인격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발달하고 성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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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삶 속에서 선한 인격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일터에서 이들이 일하는 모습은 정직해 보이며 그들의 평소 삶과도 일관되어 보인다. 이들은 정확히 어떠한 방법으로 그러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 된 것일까?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문화를 고려할 때, 이들의 성품은 대게 그리스도를 향한 강한 헌신, 엄격한 규율과 독실함,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의 결과일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분명 중요한 것이고 성령께서도 사람에 따라 매우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지만, 그러한 변화는 좀 더 넓은 상황 밖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미덕 윤리의 지지자인) 매킨타이어(Maclntyre)와 하우어워즈(Hauerwas)는 둘 다 도덕적인 삶을 만들고 체화시키는 데 있어 공동체가 지닌 지대한 역할을 강조한다. 이들은 특정 공동체의 이야기들이 그 공동체의 인격을 결정짓는 주된 요소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대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야기 속에는 인격과 공동체를 모두 성장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를 몇 년 간 지배해온 이야기는 바로 자기주도적으로 사회적 순응의 억압을 극복한 인물들에 대한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마이웨이(My Way)"부터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Pirates of the Caribbean)>(이 밖에도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는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금씩 변형만 시킨 것이기 때문에 하나만 언급한다), 그리고 베이브 루스(Babe Ruth)의 인기 등에서 볼 수 있는 두드러진 이야기는 바로 사회적 기대의 압박을 극복하는 개인의 내면적 인격의 승리이다. 신문을 읽을 때 특정 사건과 신문이 그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방식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러한 이야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경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제공해준다. 성경 또한 예수님께서 사회적 억압을 누르고 승리하신 이야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주도적이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의 방향이 외부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말씀하신다(요12:49-50).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닮아야 된다고 말씀하신다(요일3:2).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과 가치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성경 이야기는 그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찾을 수도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매우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우워어즈, 스타센, 그리고 거쉬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분의 성품과 덕목을 닮으라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문화와 신앙 공동체를 거쳐 걸러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이 이야기를 다시 전하는 방법, 즉 우리가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덕목은 어떤 것인지, 강조해야 하는 실패는 어떤 것인지, 또 그 이야기가 묘사하는 습관과 행동들을 기르기 위해 서로를 어떻게 격려할 수 있는지, 등은 우리가 미덕을 함양해가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모든 믿음의 공동체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생활방식이나 세계관과 너무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유혹이다. 오늘날 서구 교회들은 부와 풍요로움이 만연하고, 자기주도적인 승리에 대한 이야기가 과거 그 어떤 때보다도 가장 박수갈채를 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한 상항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위험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어마어마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인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걸러내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그리고 안타깝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 우리에게 남는 믿음 공동체의 이야기는 좁은 범위의 "개인적" 도덕 문제들만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만 그리는 이야기뿐이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묘사되는 예수님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관된 윤리적 삶에 대한 본을 보이시고 가르침을 주시지, 성적인 행위와 개인적 정직함에 국한된 문제들만 다루시지 않는다. 그 문제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말이다. 예수님의 윤리는 그 이상의 훨씬 많은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경건한 인격은 그저 개인적인 변화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성품이 처음부터 양육되는 공동체의 환경 속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반드시 예수님에 대해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불가피한 맹점들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벤저민 팔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 성경은 히브리서 성경과 함께 믿는 공동체의 불가분한 상황을 강조한다. 이 경우에 이 공동체는 에클레시아(ekklesia) 즉, 교회다.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이 양육되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의 과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생경하고 적대적인 문화에 맞서는 것은 결코 개인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개인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행동의 진원지가 될 수 없다.[1]

 

Benjamin Farley, In Praise of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5), 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