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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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론적 윤리의 문제는 누구의 결과가 최적화되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이다.

 

개인적 이익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이익을 측정의 기준으로 본다. 이들은 만약 어떠한 결정이 자신에게 선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여기는 방식으로 이러한 접근법을 취한다. 이러한 관점은 윤리적 이기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다지 탐탁지 않은가? 이 접근법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단정 짓기 전에, 웨인의 딜레마에 좀 더 적용시켜보자. 개인적 이익은 완벽하게 이기주의적인 관점에서 행동하는 것을 항상 의미하진 않는다. 웨인은 개인적 이익에 따라 고객의 차를 수리해주겠다고 결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장기적 평판이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 고객의 기대를 만족시키는 일에 달려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밖에서 보기엔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가 실제로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경우는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부정적이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다. 흔히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에게 좋은 것은 대부분 모든 이들에게도 좋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근대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비즈니스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개인의 이익추구 행위는 의도한 것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공공의 선을 달성해내곤 한다. 나는 공공의 선을 표방한 교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이를 제대로 이룬 경우를 본 적이 없다.[1]

 

   오늘날 이러한 말들은 순수하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단 비판을 받을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고객과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수많은 법들을 추가했음에도 말이다.)

 

 

공공의 선

 

   두 번째로, 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방법은 공공의 선을 측정 기준으로 한 결과에 따라 윤리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최선의 선택이란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결정이라는 접근법을 취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선(공리주의의 경우에는 행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이로 인해 소수의 사람들만 행복을 느끼고, 설상가상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행동은 선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반대로, 소수의 사람들을 희생한 채 다수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행위는 선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긍정적이나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부정적 혹은 암담한 결과를 줄 수 있는 상황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특히 소수의 사람들이 소외된 사회적 약자 집단인 경우엔 말이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이러한 조건 하에서 온갖 종류의 악이 용납되어 왔다.[2]

 

   성경은 빈곤층 및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나서고 이들을 보호하라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하고 있다. 실제로 예언서에서는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라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촉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 살펴보는 척도가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대표적인 세 개의 사회적 약자 집단)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떠한 대안도 완벽하게 선하거나 옳지 않은, 결정하기 어려운 선택들이다. 그러한 경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대안들의 상대적인 악의 정도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한다. "정전론"(just war theory)이라고 불리는 전쟁이론은 그러한 상황에서 윤리학자들이 어떠한 지침을 제시하고자 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3] 때로는 다른 이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선택이 존재한다. 그러한 고통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에 대한 선택을 내릴 때는 진정한 연민과 겸손함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것이 웨인에게는 무슨 의미일까?

 

   웨인이 처한 특정 상황에서는 그가 내리는 결정의 결과를 고려해보는 것이 다른 상황들보다 훨씬 더 간단하다. 그 이유는 웨인이 보기에 그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 당사자는 웨인 자신과 고객, 이렇게 두 명이기 때문이다. 웨인이 자동차 딜러로서 환경이나 사회적, 공동체적 문제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된 복잡한 결과들을 고려해야 하는 다른 여러 결정들과는 달리, 이 선택은 훨씬 간단하다. 수리비를 부담하겠다고, 아니면 일부만이라도 부담하겠다고 결정하게 되면 어떠한 선한 결과가 수반될까?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웨인은 만족한 고객을 얻게 될 것이며, 그 고객은 막대한 금전적 어려움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 이는 수리비를 지불하지 않고서 웨인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것보다 공공의 선을 더욱 잘 실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Adam Smith,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7).

고전적인 성경적 예시는 예수님의 처형으로 이끈 Caiaphas의 결정이다. 유대교 의회에서 그가 선포하기를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요11:50) 이 구절의 아이러니는 저자 요한이나 그의 독자들에게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사악한 나치 정권에 대해 어찌 해야할지 고뇌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딜레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