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예수님, 좀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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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한다(요일3:2).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과 소망하는 결과, 그리고 인격을 우리의 생활방식과 세계관과 너무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스스로 "재구성"할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예수님을 우리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유혹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부유한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어마어마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인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걸러내기 쉽다. 그래서 결국은 범위가 좁은 "개인적"인 도덕 문제들만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에게 남는 것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이 보잘것없게 여겨지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규칙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비기독교인들과 구별되는 윤리적 이해를 실제로 실천하는 경우는 단지 성적 행위, 개인적인 정직함, 그리고 부의 축적과 관련된 소수의 문제들인 경우라고 한다.[1] 다른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예수님의 윤리보다는 우리의 문화가 중시하는 가치에 따라 우리의 모습이 정해진다.

 

   이 연구 결과의 긍정적인 점은 교회를 다니는 것이 윤리적 이해에 있어서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굉장히 제한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꾸준히 다루는 윤리적 문제들이 대부분의 직장 혹은 사업과 관련된 윤리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엔론(Enron)이나 월드컴(WorldCom)과 같은 기업의 CEO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의 지원을 받으면서 자신들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라 칭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맹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를 알리고, 기념하며, 탐색하는 방식으로 더 많은 일터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도록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성품은 그저 개인의 변화의 결과를 통해 발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러한 성품이 처음부터 양육되어지는 공동체의 맥락에서만 가능하다. 벤저민 팔리(Benjamin Farley)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 성경은 히브리서 성경과 함께 믿는 공동체의 불가분한 상황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이 양육되는 상황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의 과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생경하고 적대적인 문화에 맞서는 것은 결코 개인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결코 개인이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행동의 진원지가 될 수 없다.[2]

 

   우리가 복음의 이야기를 다시 전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실천하고자 하는 공동체에 속해있을 때, 비로소 미덕을 갖춘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특히 공동체 자체가 예수님의 성품을 좀 더 명확히 알아내고자 노력하고, 도덕적인 삶에 대한 우리의 제한적인 시각에 도전하는 어렵고 불편한 질문들을 던진다면, 그러한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비기독교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하는 안타까운 여러 사례들을 반복하게 될 확률이 줄어든다.

 

이것은 Robin Gill의 저서 Churchgoing and Christian Eth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의 결론이며,  Alistair Mackenzie, “Evangelicals and Business Ethics: The Church” in Stimulus, Vol. 14, No.1 (February 2006) 2-9쪽에 의하면 New Zealand Values Surveys와의 비교를 통해서도 지지되고 있다.

Benjamin Farley, In Praise of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5) 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