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와 일

아티클 / 성경 주석

   야고보서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행동(실천) 중심의 관점’을 보여 준다. 진정한 믿음이 있고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믿음은 궁핍한 자들을 돕는 다양한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 관점 덕분에 야고보서가 탁월한 실용적 지침으로 돋보인다.

 

당신의 믿음은 진짜인가(약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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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하루하루의 삶과 영적 성장 사이의 깊은 관계를 강조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난과 역경들을 우리의 신앙 성장에 특별히 활용하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일터에서의 문제와같은 “여러 가지 시험”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야고보는 특별히 앞서 말한 극심한 고난과 역경들이 “믿음의 시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우리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시련으로 이어지는도전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그중 하나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다. 각자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일터에서 편견, 구직 제한, 해고, 신체적 상해, 죽음에까지 노출될 수 있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지 않더라도,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시련은 윤리적인 것이다. 우리는 도둑질, 사기, 정직하지 못함, 불공정 거래,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또는 내 앞길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행위 등을 통해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직장생활에서의 실패가 또 다른 시련이 될 수 있는데, 이는 너무 충격이 커 자칫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다. 예컨대 정리해고나 일반적인 해고를 당하고 나면 너무도 황당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믿고 의지한 모든 것들을 회의적으로 보게 된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터로 부르셔서 큰 성공을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혹은 ‘우리가 그분께 충실했으니 성공시켜 주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결국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필요를 계속 채워주실지 의심할 수도 있다. 일과 관련된 이 모든 도전들이 믿음의 시련이될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의 믿음이 시련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인내하라!(약 1:3-4)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한다(약 1:5). 위기를 넘기면 넘길수록 우리는 단단해지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기쁨을 느낀다.

 

채워 주시는 하나님 의지하기 (약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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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는 지혜를 논하면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원칙에서 시작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우리가 업무상의 결정, 기회에 대한 평가, 동료나 고객에 대한 신뢰, 자원 투자 등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가? 심지어 야고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을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말라’고까지 일러 준다(약 1:6). 즉, 우리의 문제는 일터에서 하나님께 너무 많은 도움을 기대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적게 기대한다는 데 있다(약 1:8).


   바로 이 점을 반드시 포착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심한다면, 당신은 야고보가 말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다. 어쩌면 아직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약 1:8) 것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여할 수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약 1:7).

 

  야고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광대한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수신자들이 이미 겪는 시련을 너무나 잘 알았다(약 1:1-2). 그러나 그는 신자의 삶이란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야고보서 1장 9-11절에서 야고보는 이를 경제 영역에 즉각 적용한다. 당신이 부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자기 능력에 의지한다면, 비록 한창 사업을 진행하는 도중일지라도 당신은 이내 쇠진해질 것이다. 반대로 혹 당신이 가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냉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것’을 기대하라.

 

  실패나 성공의 원인은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다. 불경기, 기업 매각, 재배치, 흉작, 차별대우, 태풍 피해, 혹은 다른 온갖 요인으로 생계를 위협받게 된 사람들이 그 증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장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리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실패하도록 만드시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패와 성공을 모두 다 사용하셔서 악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인내력을 기르길 바라신다. 야고보서 2장 1-8절이 역경의 시기에 하나님을 찾도록 우리에게 당부하는 구절이라면, 9-11절은 성공의 때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되새겨 준다.


   비록 야고보가 하나님의 선과 세상의 악을 대비시키기는 해도, 우리는 천사 편에 있고 세상 사람들은 마귀 편에 있다는 식의 상상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대신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크리스천의 마음 중심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그는 지금 교우들을 향해 말한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는 선하고 세상 일터는 악하다는 정의를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기 행각 따위가 벌어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교회에도 추문이 생기곤 한다. 이처럼 악은 양쪽 영역에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두 영역에서 모두 선을 나타낼 수 있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도구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후하고 너그러우심을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모든 후하고 너그러운 베풂과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NRSV). 이것은 하나님이 곧 우리를 채워 주시는 궁극적 근원이시며, 또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궁핍한 자들을 채워줄 책임이 있다는 두 가지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잘 듣는 훈련을 하라 (약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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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경청’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약 1:19)과 하나님의(약 1:22-25)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무슨 기술이라도 습득하려는 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약 1:21) 하나의 길로써 경청해야 옳다.

 

  흥미롭게도 야고보는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것까지도 자신의 악을 제거하는 한 수단임을 시사한다. 그는 남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우에 잘 듣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오만과 분노를 없애 준다고 말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0-21).

 

  달갑지 않은 말들, 곧 거슬리는 말, 비판의 말, 묵살의 말을 남들이 건네면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넘치는 일터에서 분노로 응수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입지가 더 나빠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증거를 믿지 못할 것이다. 화를 내거나 직설적인 말로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입지를 지켜야 한다.


   이런 조언은 모든 유형의 일과 일터에 적용된다. 경청은 비즈니스 서적에서도 중요한 리더십 기술 가운데 하나다.[1] 사업체들은 고객, 직원, 투자자, 공동체, 주주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려면, 조직체는 자신들이 채워 주길 바라는 그 필요 대상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옳다. 이 사실은 마치 로마제국이 그랬듯, 곤경과 박해 속에서도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옥토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2009년 9월 18일에 ‘Harvard Business School Publications’ 웹 사이트(www.harvardbusiness.org)에서 “대인관계 기술”이라는 주제로 검색했더니, 첫 번째 결과가 “사람들 경청하기”였다.

궁핍한 이웃을 위해 일하라(약1: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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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진리는 충성된 일의 두 번째 원칙, 곧 궁핍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다루게 해 준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이것은 첫 번째 원칙, 곧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남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자유롭게 일하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서 궁핍한 이웃을 돕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지적한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신앙은 신뢰를 뜻하며, 신뢰는 행동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여러 소외계층에게 직접 실천해 보이신 모습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야고보는 하나님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특별한 자리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약 2:5; 눅6:20)을, 보물을 “땅에 쌓아” 썩혀 버림에 대한 경고(약 5:1-5; 마 6:19)와 결부시킨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일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왜냐하면 남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성공적인 일터의 으뜸가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 일터가 기업이든, 교육의 장이든, 건강 관리든, 행정 공무든, 전문직이든, 비영리직 또는 다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성공적인 조직체는 그 소비자, 직원, 투자자, 시민, 학생, 고객 또는 다른 주주들의 필요를 채우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이 야고보의 중점 사안은 아니다. 그는 빈민과 약자들의 필요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는 하되, 그럼에도 여전히 실용적이다.한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것이다.


   야고보는 두려움을 계속 직시하고 믿음의 시련을 직접 맞닥뜨리라고 요청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시련에 직면한다면, 하나님은 그 시련을 통해서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당신의 역량을 배가시켜 주신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되지 말라”(약 1:22).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궁핍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야고보는 풀이한다. 그건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있다면, 아마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일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이 당신을 돌볼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서이리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다. 혹은 야고보가 말하듯,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야고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특별히 다양한 소외계층과 가난한 자들을 실제로 돌보신 것을) 경험했기에 이런 통찰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것이라고 가르친 사실(약 2:5; 눅 6:20)이며, 아울러 “이 땅”의 썩어질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약 5:1-5; 마 6:19)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야고보의 암시를 발견할 수있다.


   이것은 성공적인 조직의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우리 일에도 직접 적용할 수 있다. 성공적인 조직은 손님, 고용인, 주주, 주민, 학생, 고객과 다른 주주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야고보는 사실 처음부터 이런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주요대상으로 삼았다. 그래도 이 원칙은 적용할 만하다. 어떤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줄 때가 바로 하나님이 함께 역사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기업의 고객 서비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기업에게 고객 대접을 받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때 오히려 더 큰 창조력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베푸시는 손길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어떤 크리스천 그룹이 베트남에서 사회 ·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그곳에 가구 공장을 설립했다. 그 공장을 통해 하나님은 가구가 필요한 해외 고객들과 전에 실직자였던 지역 노동자들의 필요를 동시에 채워 주셨다.[1]


   이와 비슷한 사례로, 글로리아 닐런드(Gloria Nelund)가 이끄는 트릴링크 글로벌(TriLinc Global)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발도상국 내 창업을 돕는 투자회사다.[2]


   크리스천들의 의무는 각자의 직업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 구조와 정치 · 경제적 시스템은 빈민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크리스천들도 이런 구조와 시스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까지, 우리에게는 빈궁한 사람들의 필요뿐만 아니라 부유층과 권력자들의 필요도 채워 줄 책임이 있다.

 TOW 프로젝트 팀 편집장인 윌리엄 메신저(William Messanger)가 2010년 7월 29일 홍콩에서 인터뷰한 내용이다. 본인 요청으로 실명은 밝히지 않겠다

 Al Erisman, “Gloria Nelund: Defining Success in the Financial World,” Ethix 80 (March/April 2012), available at http://ethix.org/category/archives/issue-80.

가난한 자를 차별하고 부자의 비위를 맞추는가(약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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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또 앞서 말한 두 가지 기본 원칙을 부자 및 권력자 선호주의에 대한 경고로 사용한다. 그는 둘째 원칙, 곧 ‘가난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를 갖고 2장을 시작한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말하자면, 우리가 부자와 권력자들을 선호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을 섬긴다는 점에서 죄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일부를 우리에게 뿌려 줄 잠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빈민들은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필요한 것들만 잔뜩 내보인다. 야고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부유하고 옷 잘 입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특별 대우를 받는 반면, 가난하고 허름한 차림의 사람은 멸시받기 십상이라는 실례를 든다. 그러니까 교회 출석이라는 간단한 것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환영의 인사말에 굶주려 있다는 말이다. 반면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부자들은 아쉬울 게 없다.


   야고보는 또 레위기 19장 18절, 곧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구를 들어, 부자들은 반기고 챙겨 주면서 빈민은 깔보고 얕보는 행위는 살인이나 간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반율법적 행동이라고 지적한다(약 2:8-12).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을 섬기지 않거나 심지어 가난한 사람을 이웃으로조차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교회 모임을 언급한 것이었지만, 여기에도 직장에 적용할 부분이 있다. 일터에서 우리는 우리를 도울 사람들, 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다. 건강한 일터라면 이것은 단순히 강조점의 문제다. 그러나 사람들이 권력 다툼을 하느라 서로 치고받는 역기능적인 직장에서는 약한 사람 편에 서 주는 용기가 필요하다. 특정 계층선호주의를 배격하다 보면, 특히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편파주의, 곧 인종차별, 성에 대한 고정관념, 또는 종교적 편견 등에 부딪칠 경우 더군다나 위험하다.


   야고보가 시사하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 원칙 적용에는 은연중 하나님 신뢰의 원리가 결부된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공급 능력을 확대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빌붙고 싶은 유혹을 그다지 받지 않을 터이다. 또 일터나 학교에서 비주류 사람들과 어울려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선행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선행이 어떻게 가능한지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빈민들 자신이 날마다 이 진리를 살아 낸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이것은 산상수훈이나 평지 설교 (마 5:3; 눅 6:2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빗댄 것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신을 의지할 이유가 없어서 그들은 하나님 의존하기를 더 잘 배워 왔다고 할 수 있다.

참믿음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진다(약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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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2장에서 일이라는 주제를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룬다. 그는 예외 없이 “일”(헬라어로 ergon; ‘행함’이라는 뜻도 있음 - 옮긴이 주)이라는 단수형보다는 “일들”(erga)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야고보가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을 쓰는 데는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ergon[에르곤]’과 ‘erga[에르가]’는 단지 같은 단어의 단수형과 복수형일 뿐이다.[1]

 

  야고보는 이 단어를 써서 누군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온정의 일들부터, 벼논의 수확을 꾸준히 늘리는 등의 일선 업무까지 그려 낸다. 그가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크리스천의 일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보여 준다. 일(행위)에 중점을 둔 야고보 서신의 논조는 큰 논란을 불러오곤 했다. 루터는 야고보서 2장 24절(“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말씀을 읽고서,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과 배치되는 것이라 생각해, 야고보를 싫어하게 된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개혁가들은 루터의 견해를 공유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루터의 이의 제기는 개신교가 야고보서를 보는 지배적인 관점이 되었다.[2]

 

  여기서 루터의 야고보서 논쟁을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야고보가 주장하는 일(행함)이 개신교에서 반대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약 2:21, 24-25)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지 질문해 볼 수는 있다.


   야고보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야고보서 2장 14절은 틀림없이 논쟁 중심부에 있으므로, 본서의 2장 1-13절에 앞서 이 부분을 먼저 생각해 볼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자신의 이 질문에 직설적으로 자답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그리고 ‘죽은 믿음’에 관해 신중하게 고른 에피소드에서, 누군가 이웃이 헐벗고 일용할 양식도 없는데 평안히 잘 가라는 빈말을 해 주는 경우를 언급한다(약 2:15-16). 야고보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하나님을 신뢰하는자)는 궁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날마다 일을 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기회가 생긴다.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하는 고객을 간단히 도와줄 수도 있고,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움 요청하기를 겁내는 신참 동료를 찾아내는 경우처럼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야고보는 이런 연약한 자들, 혹은 소외된 자들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으니, 일터에서 그런 대상이 누군지를 가려내는 연습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핵심이다. 야고보는 일(행함)과 믿음이 상충된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믿음(신뢰)이 없다면 선한 행위도 없기 때문에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야고보의 말은, 일들(행함) 없이도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행함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그건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크리스천들을 향한 야고보의 명령은, 주님께 대한 신앙 대신 다른 궁핍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라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 덧붙여 그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한 결과로써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대한다.[3]


  크리스천의 믿음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통찰은, 일터 현장에서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영적인 것이 곧 실천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세상을 영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야고보는 2장 22절에서 말한다. “네가 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 그렇지만 나는 내 행함(일)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라고 말한 것은, 매일 활동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행동으로 이루어 내야 할 과제를 던진것이다.


   야고보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라는 기본적인 두 원칙을 실제로 적용한 예를 보여 준다. 야고보서 2장 14-26절에 대한 이 같은 우리의 평가를 전제로, 이런 적용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완성이라는 관점, 야고보 시대에 유효했고 우리 시대에도 큰 교훈을 주는 이 관점을 유지하고 계속 진행해 나갈 것이다.

Gk. #2041 in James Strong, Enhanced Strong’s Lexicon (Ontario: Woodside Bible Fellowship, 1995), and #2240  in Gerhard Kittel, Gerhard Fried  rich, and Geoffrey William Bromiley,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5), 6:635를 보라

 Luke Timothy Johnson, “The Letter of James,” The New Interpreter’s Bible (Nashville: Abingdon Press, 1998), 177쪽.

이러한 믿음에 관한 이해와 바울의 해석이 어떻게 일치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Douglas Moo, The Letter of James (Grand Rapids: Eerdmans, 2000), 37-43, 118-144쪽을 보라.

혀를 길들이라(약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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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듣기’에 대한 실천 지침을(약 1:19-21) ‘말하기’에도 적용한다. 야고보서 3장 1-12절에서 그는 자못 맹렬한 단어를 사용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6, 8). 또 구약 잠언 말씀에서 혀가 생명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며(그 예로 잠 12:18 -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혀가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잘 알았다.

 

  교회에서 가혹한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주의하지 않는 크리스천들도 많다. 일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부주의를 범하지는 않는가?(약 3:9; 창 1:26-27) 직장 내 정수기 옆에 모여서 나누는 수다, 뒷담화, 희롱, 경쟁자에 대한 경멸과 같은 일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또 상처를 안 입혀 본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이기적 욕망을 해결하는 길(약3: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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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3장 14절 -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원칙과 궁핍한 자들을 섬기는 원칙을 기술한다. 늘 그렇듯이 야고보는 순서를 바꾸어서 섬김을 먼저 논하고, 신뢰는 나중에 다루었다. 여기서 야고보는 먼저 이기적 욕망(selfish ambition)을 꾸짖는 것으로 시작해, 뒤이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권고한다.

 

이기적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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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욕망은 화평하게 하는 일을 가로막는다(약3:16-4:11).  이기적 욕망은 다른 사람을 돕는 일과 반대 개념이다. 야고보서 3장 16절 말씀에 그것을 적절하게 요약했다. “시기와 이기적인 욕망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야고보는 이런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는 실질적 방안으로 화평하게 하는 일(peacemaking)을 강조한다.[1]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그 전형적인 방법으로 곡식을 수확하는 경우를 들어 강조하면서 일터를 암시하고, 몇 가지 화평하게 하는 일들을 나열한다. 피해를 입은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약 4:9), 스스로 낮아지는 것(약 4:10), 비방과 기소와 판단을 자제하는 것(약 4:11), 그리고 자비와 진실(약 3:17)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은 일터에서 이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있다.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이기적 욕망을 극복할 수 있다(약4:2-5).  이기적 욕망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다툼과 싸움을 일으킨다. 야고보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규명한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보다 자신의 기쁨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원칙을 완전한 하나로 묶는다. 야고보는 하나님 없이 부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유혹을 ‘세상과의 간음’이라는 말로 비유한다(약 4:4-5).[2]

 

산상수훈을 다시 상기시킨다(마 5:9).

야고보는 구약 예언서에서 간음의 비유를 가져와, 하나님 대용품으로 자기 기쁨과 세상의 부를 추구하는 것을 종종 묘사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투자하라 (약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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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음의 비유를 쓰기는 했지만, 야고보는 전반적으로 이기적 욕망에 관해 말한다. 일터에서 우리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디딤돌로 쓰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동료나 부하 직원의 실적을 가로챌 때, 승진을 위해 경쟁 직원에게 정보를 숨길 때, 자리에 없어서 자신을 미처 방어할 수 없는 사람한테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킬 때, 누군가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기회로 이용할 때, 우리에게는 이기적 욕망의 죄책이 있다. 야고보는 이것이 다툼의 한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기적 욕망은 성공을 촉진시키기보다 오히려 지연시킨다. 조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성공을 위해 남들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된다. 일이란 게 부하 직원들한테 떠맡길 만큼 간단할 수도 있고, 국제팀에서 조정해야 할 만큼 복잡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앞서려고 남들을 밟고 간다는 평판이라도 나돈다면, 누가 당신의 리더십을 믿고 따르겠는가?

 

   자기 형상대로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창 1:27), 모든 사람을 위해 죽도록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고후 5:14)께 복종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우리 자신에 앞서 남들을 섬기는 데까지 야망을 낮출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당신의 권위와 전문성이 더 높아지길 원하는가? 좋다. 다른 동료들의 권위와 장점을 추켜올리며 돕기 시작해 보라. 성공하고 싶은가? 좋다. 주변 사람들이 성공하도록 투자하라. 역설적이지만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한 투자는 자신을 위한 최고의 투자가 될 수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엘리자베스 던 교수와 하버드경영대학원(Harvard Business School)의 마이클 놀턴, 이 두 경제학자는, 우리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훨씬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한다.[1]

 

 Elizabeth Dunn and Michael Norton, Happy Money: The Science of Smarter Spending (New York: Simon & Schuster, 2013)

크리스천이라고 앞날을 다 통제할 수 없다(약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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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야고보는 두 원칙들의 새로운 적용의 하나로 옮겨 가면서 사업상의 예측에 대한 경고를 다룬다.[1]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원칙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말로 시작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마치 단기 사업계획에 선고를 내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전계획이 그가 우려하는 관심사는 아니다. 앞날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다음 절에서 야고보가 말하려는 진짜 포인트를 엿볼 수 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문제는 계획 자체가 아니라, 미래가 우리 손안에 있는 양 계획하는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원, 능력, 관계, 시간 등을 지혜롭게 활용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계획을 세워 실행하더라도, 그 결과는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 대다수의 사업가들이 잘 안다. 어떤 주식회사의 연간보고서든 10-20쪽에 달하는 지면 가득 회사에 닥칠 위험요소로 가득하다. “우리 주식 가격은 회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불특정 요인 때문에 크게 변동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일반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일에는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야고보는 명확히 밝힌다. 그럼 어째서 야고보는 세상의 일반 사업체들이 그토록 잘 아는 것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일까? 아마도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면 예측할 수 없는 삶과 일에 대해서도 면역력을 얻을 거라고 때때로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야고보는 크리스천들이야말로 더욱 지속적으로 재평가하고, 적응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계획은 조정 가능해야 하고 상황 변화에 맞추어 실행해야 한다. 언뜻 보면, 이것은 단순히 사업 실행의 좋은 예다. 그렇지만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고 단순히 시장 조건에 대응하는 필요를 떠나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의 훈계를 다시금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크리스천 리더십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계획과 조치에 강제로 따르도록 하기보다, 먼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 예언서의 경고인 듯하다. (겔 34:3; 암 2:6-7; 5:12; 미 2:2; 6:12-16; 마 6:19; 눅 6:24-25; 12:13-21, 32-34; 16:19-31; 18:18-30 참조). 또한 야고보서 1장 1-18절은 과거와 현재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두지만, 본 장에서는 미래의 예측에 초점이 있음을 주의하라. 

부당한 권력 남용과 노동 착취 (약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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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야고보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섬겨야 한다는 원칙으로 다시 돌아간다. 야고보서 5장을 시작하는 그의 말은 준엄하다. 그는 ‘부유한 자들에게’ 경고한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 5:1). 금고 안에 빛나는 금은보화와 옷장 안의 화려한 옷들은 언제나 빛날 것처럼 보이지만, 야고보는 그들의 재물이 이미 썩기 시작했다고 단언할 만큼 심판이 임박했음을 확신한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2-3). 그들의 사치하고 허랑방탕한 삶은 오직 도살의 날을 위해 ‘살찌는’ 데까지만 이어질 뿐이다(약 5:5).


   이들 부자들은 어떻게 그들의 부를 획득했는지, 그리고 부를 획득하고 나서 무엇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따라 파멸당할 운명이다. 야고보가 불의한 사업 관행을 강하게 꾸짖는 것을 보노라니 구약 성경의 교훈이 떠오른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레19:13).[1] 일꾼의 손에 있어야 할 돈이 사업주의 금고 안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를 비축했고 주변의 필요한 자들을 외면했다(약 5:3).


   사업주는 특별히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데 바지런해야 한다. 공평한 임금 지불에 대한 분석 연구는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야고보가 ‘사기 쳐서 남기는 임금’(약 5:4, NRSV)이라고 한것은 이 특정 지주들의 권력 남용을 꾸짖는 것이다(개역개정에는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으로 번역했다 - 옮긴이 주). 일꾼들이 마땅히 삯을 받아야 하는데도 권세 있는 부자는 법적 처벌을 용케 피해 가면서 지불하지 않을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부자는 흔히 사법체계를 무력화시킬 수단을 갖고 있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부당한 권력을 남용하기가 너무나 쉽다.

 

  부자들의 권력 남용에는 직원들을 독립 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s)로 잘못 분류하거나 미숙련자로 분류해 낮은 임금을 지급하게 만드는 부정확한 업무 배치, 같은 일이지만 여자 혹은 소수민족을 고용해서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임금 지급하기, 어른들도 꺼리는 위험한 일을 어린이들에게 시키는 아동 노동학대 등등이다. 권력 남용은 소위 표준관행이라는 이유로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자들을 단죄한다(약5:5).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삶이 과연 무엇인지를 말하기는 좀 복잡하지만,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도 도전이 된다. 이 대목에서 야고보의 주된 관심은 빈민들이 잘 사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가장 적절한 물음은 이런 것일 터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가? 아니면 더 가난하게 하는가? 나의 돈 씀씀이가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돕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빈곤 속에 머물게 하는가?”

레위기 19장은 야고보가 선호하는 구약 말씀 가운데 하나다. L.T. Johnson, Brother of Jesus, Friend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2004), 123쪽 이하를 참고하라.

추수의 날을 기다리며(약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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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인내, 정직, 기도, 죄 고백, 병 고침에 대한 다양한 권면으로써 서신을 끝맺는다. 늘 그랬듯이 이런 것들은 진실한 행함(일들)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 원칙 또는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원칙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모두에 호소한다. 그리고 여태 해 왔듯이 야고보는 이를 일터에 직접 적용한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인내하라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일터로 비유하면서 5장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그러고는 위의 말에 메아리치는 경구로 마무리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일터에서의 인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형태인데, 매우 힘든 일이다. 일은 어떤 결과를 얻으려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일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일을 하지 않고서도 결과를 움켜쥐려는 유혹은 항상있다. 만약 내가 돈을 투자한다면,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 천천히되고 싶어 하겠는가? 내부자 거래, 폰지 사기(Ponzi scheme), 슬롯머신에 생활비를 날리는 도박 등은 그런 조급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약 승진하고자 한다면 상사의 눈에 들도록 별의별 수단을 동원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중상모략, 신용 위조, 험담, 팀 와해로 이어진다. ‘만약 내가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면, 엉성하게 빨리 해치워서 생산라인의 다음 사람한테 문제를 전가시키면 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은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직원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뿐더러 제품의 질도 나빠지는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진실만을 말하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근무하는 직장을 상상해 보라. 단순히 거짓말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실 그대로 가장 정확히 이해한 것을 듣고 말한다면? 맹세와 서약도 필요 없고, 소급 해명이 없어도 되고, 허위 진술과 사기에 대한 별도의 계약 조항도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판매자가 제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항상 제공한다고 상상해 보라. 또 계약서 내용은 모든 당사자들에게 늘 명료하게 전달되고, 사장과 상사들은 수하 직원들에게 돌릴 공을 명확하게 돌린다고 상상해 보라. 업무 관련 정보를 교묘히 감추기보다 언제나 명확한 대답을 하여 그림처럼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상상해 보라. 현재의 직장에서 성공하겠는가? 만일 모두가 최대한 정직해진다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성공의 정의가 바뀌어야하는 것 아닌가? 이 주제에 대해서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구하라, 하나님께

   야고보는 기도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 의존 원칙으로 되돌아간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 5:1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하나님께 구하라”(약 1:5). 야고보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아뢰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하나님, 저는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된 이 실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릅니다. 상사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께 먼저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마다 우리가 기대한 그대로 응답하겠노라 보장하시지는 않지만, 우리의 필요를 능히 채워 주실 수 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상하게도 매일 직장에서 부대끼는 특정 이슈들, 상황, 사람들, 필요, 두려움과 의문에 관해 마지못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심지어 특정 결과를 위해 간구하라는 야고보의 권면도) 자꾸만 잊어버린다. 그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삶에서 실제로 응답하시리라고 말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서로 죄를 고백하라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함으로써 치유를 받도록 하라고 권고한다(약5:16). 일터에서 가장 흥미로운 말은 ‘서로’다. 여기서의 전제는 사람들이 단순히 하나님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일터에서의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우리는 매일 생산과 업무 수행의 압박, 시간의 제약을 받고, 종종 귀 기울이지 않은 채 행동하고,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불공정하게 경쟁하며, 자원을 독차지하고, 귀찮은 정리를 옆 사람에게 떠넘기고, 내 욕구불만을 동료들 탓으로 돌리곤 한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유일한 치유의 길은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동료의 성과를 부정확하게 비판함으로써 그가 승진에서 제외되었다면, 단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그 죄를 피해자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 손상을 정말 바로잡기 원한다면, 해당 부서의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동기로 죄 고백과 병 고침을 원하는가?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섬길 수 있다. “너희가 알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 것임이라”(약 5:20). 사망에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은 아주 깊고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는 섬김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마 우리 역시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사망에서 구원받도록 다른 누군가도 지금 우리를 돕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