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나라에서 살아가기 (마18-25)

아티클 / 성경 주석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마태복음 18장-25장에서 예수님은 그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보여 주신다. 많은 경우 이 모습들은 특별히 일에 적용된다.

지혜로운 갈등 해결 (마18: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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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직장인은 갈등을 겪는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대하는 하나의 본을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너도 똑같이 해!’ 또는 ‘대갚음을 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일대일로 화목을 모색하는 과정을 제시하신다. 팔복의 온유함은 당신에게 상처 준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와, 사실에 입각해 자기 정당화를 배제하고 충분히 오랫동안 상대의 관점에 당신 자신을 열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마 18:15). 이것은 상대가 당신을 더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인식이 보편적이지 않을 가능성을 열어 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준비된 두 번째 단계는 당신에게 아픔을 안겨 줬거나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다시 그 주제로 문제를 제기할 때, 당신과 상대방 양자를 모두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그래도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때는 그 문제를 리더(마태복음 18장 16-17절은 특별히 교회 갈등을 다룬다)에게 가져가라. 그 판결도 쟁점을 해결하지 못할 때는,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은 가해자를 공동체에서 쫓아내야 한다(마 18:17).


   예수님이 ‘교회 안 다른 성도’와의 갈등을 말씀하시긴 하지만(마 18:15), 그분이 취하신 방법은 현재 직장에서도 최고의 실행 방안으로 간주되는 놀라운 선구자적 방법이다. 정말 좋은 직장에서도 갈등은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효과적인 유일한 해결책은 당사자 두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하지 말고, 직접 양자 대면을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개인적인 갈등을 드러내기보다는 그와 사적으로 해결하라. 지금과 같은 전자통신 시대에 예수님의 접근 방식을 본받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하다. 간단한 의견 충돌을 사무실 전체의 불화로 만들려면, 이메일을 주고받을 때 ‘참조’란에 한두 명의 명단을 포함시키거나 ‘전체 답장’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난다. 심지어 둘 사이에서만 이메일을 주고받는 상황일지라도, 이메일 같은 비인격적인 수단이 사용될 땐 오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마 18:15)라는 예수님의 충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책일 수도 있다.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듣기 위해서도 우린 똑같이 마음을 열어야 한다. 예수님은 세 개 구절에서 ‘경청’이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언급하신다. 경청이야말로 핵심 요소다. 갈등 해소의 현대적 모델은 대개 서로의 의견이 어긋날 가능성을 안은 채로, 서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도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집중해서 경청하면, 상호 수용가능한 해결책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면, 그때는 적절한 갈등 해결 방법을 알고 있는 권위자의 개입이 요구된다.

당신의 보물은 무엇인가 (마19: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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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6장에서 이미 논의했던 돈의 문제는 예수님께 이끌려 나온 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함께 다시 등장한다. 청년은 예수님께 묻는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고, 그 청년은 자신은 어릴 때부터 그 계명을 지켜 왔다고 말한다. 마태의 설명에서 두드러진 점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청년이 예수님께 묻는 것이다. 그는 이 질문으로써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 준다. 우리는 옳게 보이려는 건 뭐든지 하면서도, 내면에서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한다. 예수님은 대답하신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우리는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들 모두에게 그들의 소유를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는 걸 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부자 청년처럼 그들의 소유 때문에 짐을 지고 사는건 아니다. 청년의 경우엔 그가 지나치게 부에 집착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 도전은 너무도 급진적이었다(마 19:22).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뭐가 있는지, 우리가 그분을 섬길 때 필요한 게 뭔지를 정확히 알고 계신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 일인가, 직업인가, 업무수행능력과 기술인가? 혹시 우리의 퇴직 연금은 아닌가?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는 좋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고(마 6:33),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를 구한 다음에 와야 하는 부차적인 것들이다. 우리는 그 부자 청년처럼 슬퍼하며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부와 일을 움켜쥐어선 안 된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 책 2장의 “막 10:17-31”과 3장의 “눅 18:18-30” 부분을 보라.)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 (마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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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포도원 주인이 하루 중 다양한 시간에 품꾼들을 고용한다. 아침 6시에 고용된 사람들은 온종일 일을 하지만, 오후 5시에 고용된 사람들은 딱 한 시간만 일한다. 그러나 주인은 모든 사람에게 하루 일당(한 데나리온)을 지급한다. 일한 시간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임금을 받았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분명히 하기 위해, 주인은 자기 방식대로 해 나간다. 당연히 맨 처음 고용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루 종일 일했는데도 늦게 일을 시작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받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3, 15-16).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 18-23)와는 달리, 여기서 예수님은 명확하게 해석해 주지 않으신다. 그 결과 학자들은 많은 해석을 내놓았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일꾼들이고 관리자들이라서, 어떤 학자들은 이 비유가 일에 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럴경우 그 비유는 ‘네 월급을 다른 사람의 월급하고 비교하지 말라’거나, ‘혹 다른 사람이 너와 비슷한 일을 하는데, 월급을 더 받거나 일을 덜 한다고 불평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이 내용을 직장인에게 아주 좋은 관습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버젓한 급여를 받는다면, 왜 당신은 다른 이들이 더 많이 받는다고 해서 굳이 그렇게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드는가?’ 그러나 비유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불공정한 근로나 노동착취 관행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어떤 근로자들은 인종이나 성별, 이주민 신분이라는 정당치 못한 이유 때문에 낮은 급여를 받는다. 우리나 다른 근로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만족해야 한다는 게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였을까?
 

   더욱이 이것은 근로 시간과는 상관없이 급여를 지급하는 의문스런 사업 관행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꾼들이 모두 오후 5시나 돼서야 인력시장에 나오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하는 건 아닐까? 모든 사람의 임금을 공개하는 것에 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영역에 비밀스럽게 쳐진 커튼을 확 걷어 젖힌다. 그러나 한 시간만 일하고도 똑같은 임금 받는 걸 온종일 일한 사람한테 보여 주는 게 과연 현명한 생각일까? 그것은 마치 노동 분규를 조장할 목적이 있는 듯 보인다. 이 비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하지 않은 일에 임금을 주는 건, 사업 성공을 위한 비결은 아닐 것 같다. 예수님이 정말로 이런 임금 지급 관행을 옹호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비유는 ‘실제 일’에 관한 메시지가 아닐 수 있다. 본문의 문맥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이들, 예를 들면 법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권리도 소유하지 못하는 어린이들(마 19:14)에 관해 깜짝 놀랄 예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그 나라가 부자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적어도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속해 있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마 19:23-26). 그 나라는 그분을 따른 자들, 곧 어떤 경우엔 손해를 보면서도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속해 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 이 비유 바로 다음에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라는 똑같은 내용의 또 다른 끝말이 나온다. 이는 곧 이 이야기가, 누가 그 나라에 속해 있느냐 하는 논의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일이나 행위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후하심에 의해 얻어진다.
 

   그 비유가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후하심에 대한 메시지라는걸 이해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비유가 어떻게 일에 적용되는지 여전히 의문을 가질 것이다. 당신이 공정한 월급을 받고 있다면, 월급에 만족하라는 충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만약 다른 근로자가 예상치도 않은 상여금을 받았다면 불평할 게 아니라 도리어 은혜를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거기엔 또 폭넓게 적용할 점도 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모든 일꾼이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임금을 지급했다는 점이다.[15] 예수님 당시의 사회 상황은 많은 소규모 농부들이 로마에 세금을 내기 위해 진 빚 때문에 자기 땅을 내놓아야 했다. 이것은 땅에서 일하는 사람을 그 땅에서 몰아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었지만(레25:8-13), 로마인에겐 당연히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결과 상당수의 실업자들이 매일 아침 모여들었고, 그날의 일당을 벌 수 있게 누군가 자신을 고용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선택을 받는 사람보다 못 받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실업자가 넘쳤으며, 하루 운 좋게 일했다고 해도 다음 날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오후 5시까지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날 하루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을 벌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그 포도원 주인은 그들에게도 하루치 임금을 다 지불해 줬다.
 

   만약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을 나타낸다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도 그들의 필요를 채우기에 충분한 일을 찾게 된다는 강력한 메시지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께서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마 10:10)라고 말씀하신 것을 봤다. 이것은 이 땅의 고용주들이 반드시 모든 피고용인의 필요를 채워 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땅의 고용주들은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적절한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모든 사람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일을 찾게 될 거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또한 이 비유는 오늘날 사회에서 노동시장의 구조를 형성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주는 하나의 과제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 하나님 나라의 이런 측면을 확장하기 위해 크리스천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1데나리온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하루치 표준 임금이었다.

섬기는 종의 리더십 (마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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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은혜와 후하심에 관한 이 비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그 요점을 못 찾았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두 아들이 그분의 나라에서 가장 으뜸의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 두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돌아서서 이렇게 물으신다. “너희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마실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다른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 화를 냈다. 예수님은 이 기회를 이용하셔서 그들이 가진 으뜸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진정한 리더십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섬김의 실제 모습은 일터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이것은 회사 사장도 돌아가며 회사 바닥을 쓸고 화장실을 청소해야 한다거나, 회사 직원들이 다른 누군가를 돕는다는 핑계로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일함에 있어 우리 고객들과, 직장 동료들, 주주들, 우리가 하는 일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맥스 드프리(Max De Pree)는 오랫동안 허먼 밀러(Herman Miller)의 사장이었으며 〈포춘〉지 명예의 전당 위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쓴 책 《성공한 리더는 자기 철학이 있다》(Leadership Is an Art , 북플래너 역간)에서 “지도자의 첫 번째 책무는 실상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 일은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서 지도자는 종이 되고 빚진 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의 조합이 곧 능수능란한 리더가 되어 가는 과정이다”라고 썼다.[16]
 

   종은 자신의 영적 궁핍을 알고(마 5:3),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주어진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다(마 5:5). 섬기는 리더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마 5:4), 다른 사람이 실패했을 때 긍휼을 보여 주며(마 5:7), 가능한 한 화평케 하고(마 5:9), 하나님을 섬기려다 당하는 무고한 비난을 진실로써(마 5:8) 감내한다(마 5:10). 예수님은 섬기는 리더십을 손수 행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고(마 20:28), 우리는 그분의 본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임을 보여 준다.

Max DePree, Leadership is an Art (New York: Doubleday, 1989), 9쪽. 맥스 드프리, 《성공한 리더는 자기 철학이 있다》(북플래너 역간).

말뿐인 순종, 말뿐인 계획 (마21: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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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아들의 비유(마 21:28-32)는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한 두 형제에 대한 이야기다. 한 아들은 자기 아버지에게 하겠다고 말하고는 안 한다. 다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는 안 가겠다고 말했다가 결국 포도원에서 하루 종일 일한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하신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대답은 명확하다. 처음엔 그렇게 안 하겠다고 거부했지만 실제로 일을 한 아들이다. 이 비유는 앞서 마태복음에서 했던 실제 천국의 일원에 관한 이야기의 연장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듣던 청중 속 종교 지도자들에게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라고 말씀하신다.17 가장 종교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무리가 종교 지도자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에 있어서 행동이 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초기에는 고객에 대한 봉사, 질 좋은 제품 생산, 시민으로서 책임 완수, 직원 우선 등의 사명 선언문을 내세우는 조직이 많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조직이 형편없는 봉사, 허접한 품질, 불성실, 엉망인 노사관계를 갖고 있다. 개인도 똑같을 수 있다. 멋진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나 그 계획을 실행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 빠진 조직이나 개인은 의도는 좋을지 모르나 자신이 내세운 논리대로 살지 못함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직장에는 그들의 사명과 목표를 완수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시스템과, 꾸밈없이 솔직한 피드백을 해 줄 수 있는 편견 없는 모니터링 시스템, 둘 다 필요하다.
 

   그 비유 다음에는 곧바로 악한 소작농의 비유(마 21:33-41)가 포도원이란 일터를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포도원을 경영하는 법을 논하는 게 아니라, 당시 유대 종교 권력자들의 선동으로 자신이 배척과 죽임당할 것을 이야기한다는 점(마 21:45)을 분명히 하신다. 이 비유를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열쇠는 43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누구나 각자의 책임이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하면서 그 책임을 거부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과 하나님 나라가 상충하게 된다. 무슨 일이든 우리의 궁극적인 수행 평가는 하나님께 받는다.

 

예수님은 21:32에서 이것을 예시해 보이신다: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들었지만 그를 비웃었다; 세리들은 그의 말을 듣고 믿었으며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선지자의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듣거나 회개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배제시켰다.

지상대계명, 이웃 사랑의 커다란 틀 (마 22: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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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어떤 계명이 더 중요한가를 놓고 이따금 다퉜다. 어떤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할례를 다른 무엇보다 귀하게 여겼다. 현대의 많은 유대인처럼, 신명기 6장 5절에 담긴 명령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가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생각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라고 질문한 것은 해당 주제로 벌어진 기존의 논쟁에서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 달라고 요청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계명이 큰지에 답하실 뿐 아니라 그 계명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도 말씀하심으로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이 말씀 후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두 번째 계명을 덧붙이신다.(이 시리즈 1권 4장의 “레 19:17-18” 부분을 보라.) 첫 번째 계명에 대해 두 번째 계명도 “그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두 계명을 하나로 합치신다. 예수님의 논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떼려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요한의 서신에는 이 말씀의 취지가 그대로 메아리치는 문구가 들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요일 4:20).

   일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주된 통로다. 우리의 일터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장소이고, 매일매일 그들 곁에서 지내는 것은 타인을 사랑해야 하는 특별한 과제를 안겨 준다. 고객이나 다른 주주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도 우리가 일을 통해 다른 이를 사랑할 기회가 된다. (더 많은 사례가 궁금하다면 이 책 2장의 “막 12:28-34”와 3장의 “눅 10:25-37” 부분을 보라.)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실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이것은 일터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누군가 햄버거를 가리키며 “저거 괜찮아 보여요?”라고 말한다면 요리사는 햄버거 패티가 잘 익었는지 다시 확인할 것이다. 자기가 먹을 햄버거를 만든다면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받은 판매원은 적당히 맞겠거니 하며 답변을 둘러대지 않고 더 노련한 동료 직원을 부를 것이다. 자신이라면 상품을 구매하기 전에 정확한 정보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방금 브레이크 수리를 끝내고 조립을 마친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면 차량정비사는 브레이크를 다시 분해할 것이다. 자기가 운전할 차라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여직원이 다른 직원에게 무시를 당한다면 “혹시 저 사람이 여자라서 함부로 대하는 건 아닙니까?”라고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자신이 그런 입장이라면 누군가가 옹호해 주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사례지만 하나같이 대가를 치러야 할 일들이다. 수수료를 못 받는다거나, 비용을 받지 못한 채 한 시간 동안 꼬박 일한다거나, 밤잠을 줄여야 한다거나, 미운털이 박혀 사내에서 입지가 약화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노동은 이웃을 섬길 잠재력, 곧 이웃을 사랑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려면 때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분명히 감수할 위험이지만, 오로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일이 대단히 부담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아주 높은 기준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상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을 통해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를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합쳐 놓으신 게 아닐까.

위아래로 섬기기 (마24: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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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비유는 한 집 전체를 맡게 된 어느 종에 대해 말한다. 여기엔 적당한 때에 다른 종들에게 양식을 나눠 주는 책임도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6). 그것을 잘 처리하는 종은 승진해 추가 책임까지 맡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이런 점도 관찰하셨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 24:48-51).

   오늘날 직장 상황에서 그 종은 다른 근로자들을 관리하면서 경영진에게도 책임을 지는 중간 관리직에 해당할 것이다. 직원들의 요구가 충족될 때만 사장의 이익은 충족될 수 있다. 그 중간 관리자는 자신의 권위 위로도, 아래로도 다 책임을 지고 있다. 예수님은 자기 위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는 물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도 돌봐주는 것이 섬기는 리더가 해야 할 책임이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권위 위의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아랫사람들을 홀대해서는 안 된다. 자기 이익에만 신경 쓴 일꾼에게 내린 형벌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이것의 실상을 극적으로 묘사하신다(마 24:48-51).

받은 은사를 힘써 사용하라 (마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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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과 관련해 예수님이 하신 비유 중 가장 의미심장한 한 비유가 투자라는 맥락에서 설정되어 있다(마 25:14-30). 한 부자가 자기 부를 종들에게 맡기는데, 그 모습이 마치 오늘날의 투자자들이 투자 시장에서 하는 것 같다. 부자는 한 투자자에게는 다섯 달란트(아주 큰 돈)[18]를 맡겼고, 다른 투자자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투자자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 그 중 두 명은 투자를 해서 100퍼센트 이익을 벌었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어 두어 한 푼도 벌지 못했다. 부자가 돌아와서 돈을 번 두 종에게는 상을 주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은 가차 없이 벌을 줬다.
 

   이 비유의 의미는 재정적인 투자를 훨씬 뛰어넘는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양한 범위의 은사를 주셨고, 우리가 그런 은사를 활용해서 그분을 섬기길 기대하신다. 그런 은사를 벽장에 처박아 두고 무시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세 명의 종들처럼, 우리가 받은 은사도 각각 다 같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이윤은 우리가 받은 은사에 비례한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정죄를 받은 게 아니라, 자신한테 주어진 것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정죄를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에는 기술, 능력, 가족이나 친척 관계, 사회적 지위, 교육, 경험 등이 포함된다. 이 비유의 요점은 우리가 무엇을 받았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그것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성이 없는 종에게 내려진 무서운 처벌은, 단지 평범한 사업으로 일어난 결과를 뛰어넘어, 우리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어딘가에 인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심오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비유에서 투자된 특별한 달란트는 돈으로써, 오늘날 US 달러로 환산하면 백만 달러에 달한다. 현대 영어에서는 ‘talent’라는 단어가 주로 기술이나 능력을 가리키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비유는 돈에 관한 것으로, 만약 경건한 방법으로 경건한 목적을 성취하는 한, 돈을 (쌓아 두는 것이 아닌) 경건한 행위로서 투자하는 것을 묘사한다. 끝에 가서 그 주인은 신실한 두 종을 이렇게 칭찬한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3). 이 말에서 우리는 주인이 그 결과와 (“잘하였도다”), 방법(“착하고”), 동기(“충성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있다.
 

   직장과 연결해 본다면, 이익을 내기 위해 애쓰는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자본을 투자하는 것을 칭찬하고 있다는 말이다. 때로 크리스천은 성장이나 생산성, 투자 이익 같은 것이 하나님께 거룩하지 않은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 비유는 그런 개념을 뒤집어엎는다. 우리는 우리의 기술과 능력을 투자해야 하며, 더 나아가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쓰라고 제공해 주신 부나 자원은 전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써야 한다. 여기엔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 생산도 포함된다. 예컨대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자원봉사자는 이 비유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다. 새 사업을 시작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업가나, 에이즈 인식 개선 캠페인을 벌이는 보건 행정관, 생산 과정에서 혁신을 이끄는 기계 오퍼레이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똑같거나 반드시 균등한 은사를 주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그 은사를 이용해 최대한으로 잘 해낸다면, 당신은 “잘했도다”라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은사들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동시에 그 비유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받았던 자에게 주는 것으로 끝난다. 동등한 같은 가치라 해도 반드시 똑같이 보상을 받는 건 아니란 얘기다. 어떤 직책은 더 많은 기술이나 능력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보상을 받는다. 잘한 두 종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양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똑같은 칭찬을 들었다. 이 비유가 암시하는 것은 우리는 어떤 달란트를 받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그 능력을 사용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충성스럽고 신뢰할 만한 하나님의 종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것과 아주 유사한 열 므나 비유에 대한 논의는 이 책 3장의 “눅19:11-27” 부분을 보라.)

 

 

NRSV의 각주에 따르면,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치 임금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오늘날 화폐로 계산하면 US 달러로 약 100만 달러(한화 11억 정도)에 해당한다. 헬라어의 ‘talanton[탈란톤]’은 처음엔 무게를 재는 단위로(대략 30-40킬로그램) 쓰였다가, 나중엔 같은 무 286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주 287 게의 금, 은(아마도 본문의 의미는 이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는 구리에 해당하는 돈의 단위로 쓰였다(Donald A. Hagner, Matthew 14-18,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1995]). 오늘날 영어에서 “talent”라는 단어의 사용은 이 비유에서 파생되어 어떤 능력이나 은사를 가리키고 있다(Walter C. Kaiser Jr. and Duane Garrett, eds., Archaeological Study Bible [Grand Rapids: Zondervan, 2006], 1608쪽).

양인가 염소인가 (마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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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자. 예수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는, 그분이 보좌에 앉아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나누듯이 사람들을 나누실 것이다(마 25:32). 어느 쪽으로 나눠질지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그분은 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 25:34-36).

 
   그 자리에는 양으로 분류된 이들이 섬겨 줬던 어려움에 처했던 형제들이 모두 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또한 예수님은 염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 25:41-43, 45).

   개별로든 단체로든 우리는 모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라는 부름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 여호와의 돌보심 아래 생명 싸개 속에 싸여 있으며’(삼상 25:29, NRSV), 우리는 굶주림, 목마름, 헐벗음, 정처 없음, 병듦, 옥에 갇힘 등 다른 사람이 처한 곤경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일하는건 우리 자신의 필요와 우리를 의지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지만, 우리가 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나누기 위해서다(히 13:1-3).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져서, 우리가 당연시하는 삶의 기본 필요마저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 함께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베푸는 일에 매달릴 것이다.


   예수님은 양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던 사람들을 어떻게 섬겼는지는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는다. 어쩌면 선물을 주거나 자선 사업을 통해서 도왔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 중 상당수는 먹고 마시는 것을 재배하며 준비하는 등의 일상적인 일, 즉 신입 사원이 일에 신속하게 적응하도록 돕거나, 의상을 디자인하고 생산하고 판매하도록 도와주는 등의 일을 통해서 했을 것이다. 모든 합법적인 일은 그렇게 생산한 제품과 그 일이 가져다주는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섬길 것이고,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