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창37:2-50:26)

아티클 / 성경 주석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마다 핵심적인 약속을 주셨다는 점을 기억하라(창 12:2-3). 첫째, 하나님은 그의 후손을 번성시켜 큰 민족을 이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실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크게 만드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아브라함이 그의 명성에 걸맞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넷째,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될 것이다. 이 마지막 항목은 미래의 아브라함의 후손과 그 울타리 너머의 사람들, 즉 지상의 모든 족속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사람을 축복하실 것이고 그를 저주하는 사람을 저주하실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이 약속이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삭, 야곱 및 야곱의 아들 등 선택받은 계보를 통해 부분적으로 성취될 것이다.

 

   그들 모두 중에서 요셉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 열국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직접 성취하실 때 사용한 사람이었다. 참으로 “온 세상” 사람이 요셉이 경영한 식량 제도에 의해 유지됐다(창 41:57). 요셉은 이 사명을 알았으며 삶을 하나님 의도에 맞게 살았다.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 바로 그가 받은 사명이었다(창 50:20).

 

 

형제에게 거부당하고 종으로 팔린 세월 (창37: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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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부터 요셉은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위해 자신을 지명했다고 믿었다. 꿈속에서 하나님은 요셉에게 그가 부모와 형제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7:5-11). 요셉은 이 꿈이 자기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형제들은 그 꿈이 요셉이 아버지의 총애받는 아들로서 부당하게 누리던 특권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창 37:3-4). 우리가 옳다고 확신한다고 해도 우리는 동일한 견해를 갖지 못한 다른 사람에게 공감을 사지 못할 수도 있다. 좋은 지도자는 시기보다는 협력을 이끌어 내려고 애쓴다. 요셉은 이 점을 인식하지 못했고, 형제들과 심한 불화를 겪었다. 그를 살해하려고 모의했던 그의 형제는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물자를 실어 나르던 대상(隊商)에게 요셉을 팔기로 결론내렸다. 그러자 그 장사치들은 요셉을 애굽 왕 “바로의 신하”이자 “친위대장”인 보디발에게 팔아 버렸다(창 37:36; 39:1).

 

 

보디발 아내의 계략, 투옥당한 요셉 (창3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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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디발 밑에서 요셉이 맡은 일은 신임을 받은 노예로서의 책임이었다. 처음에는 요셉이 주인의 집 “안”에만 있었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일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보디발은 요셉의 전반적인 능력을 알아보고는 승진시켜 그를 개인 비서로 삼는 한편 자기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했다(창 39:4).

 

   얼마 후에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성(性)적인 관심을 보였다(창 39:7). 요셉은 그녀의 요구를 단호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거절했다. 그는 보디발이 그에게 보여 준 폭넓은 신뢰를 상기시키면서 그녀가 꾀하는 관계를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용어로 “큰 악”이고 “하나님께 죄”라고 묘사했다(창 39:9). 그는 사회적 및 신학적 차원에 민감했다. 더 나아가 요셉은 반복해서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며 그녀 앞에 있는 것조차 거부했다. 강제로 끌려간 요셉은 굴복하기보다는 반쯤 벗은 몸으로 도망쳤다.

 

   이 여인의 성적 괴롭힘은 요셉에게 불리한 권력 관계에서 발생했다. 그녀는 요셉을 이런 식으로 압박할 힘과 권한이 있다고 믿었으나, 그녀의 말과 접촉은 분명히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요셉은 일하기 위해 그녀가 거주하는 집 안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는 주인을 불러 보디발 아내의 행위를 보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주인의 혼인 관계가 파탄 날 것이기 때문이다. 도망가다가 거짓된 고소로 감옥에 갇힌 뒤 요셉은 법에 의지하지 않은 듯하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직장에서 발생하는 성적 괴롭힘 문제를 세밀히 묘사한다. 부적절한 언어와 신체적 접촉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마다 다른 기준을 갖고 있지만, 힘 있는 자의 변덕스런 행동이 실제로는 종종 먹혀 들어간다. 잠재적인 괴롭힘을 상사에게 종종 보고해야겠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기를 꺼린다. 보복당할 위험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괴롭힌 내용을 문서로 남길 수 있겠지만, 사건이 드러날 경우 도리어 피해자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셉의 경건함은 그를 거짓 고소와 투옥으로부터 구해 내지 못했다. 만일 우리가 비슷한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거룩함이 우리가 상처를 받지 않고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와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교훈을 남겼다. 우리가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과 그분은 연약한 자를 지키신다는 것을 안다면, 궁지에 몰려서도 포기하지 않고 맞서 나아가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는 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케 하는 현실적인 사건이다. 허나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선이 결국은 이길 것을 기대하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요셉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 줬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으로 고소를 당하고 그릇된 대우를 받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을 계속 수행하며 하나님이 바른 길로 마무리 지어 주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감옥에서 꿈을 해몽하다 (창39:20-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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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의 감옥 생활은 여호와의 임재, 간수의 호의 및 요셉의 승진 등으로 특징지어진다(창 39:20b-23). 감옥에서 요셉은 감금되어 있던 바로의 신하 두 명을 만났는데 그들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었다. 여러 애굽 문서에 의하면, 술 맡은 관원장은 술의 품질을 시험하고 독이 들었는지 검사할 뿐 아니라 정치 권력자와 가까이 지내기도 했다. 그들은 종종 왕의 친구가 되기도 했으며 지혜로움으로 인해 소중히 여김을 받기도 했다(느 2:1-4).[1] 술 맡은 관원장처럼, 떡 굽는 관원장도 신뢰받는 신하로서 정부 내 최고위 관리와 무시로 상통했으며 음식 마련 이상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했을 것이다.[2] 감옥에 갇힌 요셉은 이 왕실 관리들을 위해 꿈을 해석해 줬다.

 

   꿈 해석은 고대 세계에서 박식한 일로서, 꿈과 그 의미가 망라된 기술적 “꿈 해석서”를 가지고 푸는 것이었다. 과거의 꿈과 그에 대한 해석의 진상에 대한 기록은 해석자의 예측을 지원해 줄 경험적 증거를 제공했다.[3] 하지만 이런 전통을 교육 받은 적이 없는 요셉은 하나님이 해석을 보여 주셨다고 했는데 결국은 그것이 진실임이 밝혀졌다(창 40:8). 그 후 술 맡은 관원장은 그의 이전 직책을 회복했으나, 그는 요셉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이야기 속에 담긴 역학은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르지 못할 곳까지 오른 다른 이의 성공을 돕는 것에 투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유용성이 다하면 폐기 처분될 뿐이다. 이 말은 그런 일은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지위와 승진에 초점을 맞추는 게 더 나을 것이라는 의미인가? 나아가, 요셉은 감옥에서 그 두 관원장의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검증할 길이 없었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잠 18:17). 하지만 판결이 내려지고 나면, 어떤 죄수라도 자기 무죄를 항변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 투자가 결국 어떻게 우리나 우리 조직을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의심을 품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돕는 사람의 성격과 동기를 궁금하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후에 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그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반영될지에 대해 찬성하지 않을 수도 있다. 보통 이런 문제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기도와 분별력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마비시킬 것인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한다면, 선행을 실천해 나가기가 더 쉬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믿기 때문이다(롬 8:28).

Kenneth A. Kitchen, “Cupbearer,” New Bible Dictionary, 3rd ed., ed. I. Howard Marshall, A. R. Millard, J. I. Packer, and D. J. Wiseman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96), 248쪽.

Roland K. Harrison, “Baker,”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ed.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Eerdmans, 1979), 1: 404쪽.

John H. Walton, Genesis,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1), 672-673쪽.

요셉을 승격시킨 바로 왕 (창4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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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가 더 지나자 요셉에게 비참한 감옥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졌다. 바로가 혼란스러운 꿈을 꾸었는데, 술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갇힌 젊은 히브리 사람을 기억했던 것이다. 암소와 이삭에 대한 바로의 꿈은 그의 가장 빼어난 술사도 당황케 만들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거했으며 그는 계시를 중개하는 역할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창 41:16). 바로 앞에서 요셉은 그의 민족에게만 적용되던 하나님의 언약적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일관되게 하나님을 보다 더 일반적인 용어인 “엘로힘”으로 지칭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불필요하게 거부감을 조성하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가 하나님이 꿈의 의미를 알려 주셨다고 인정한 사실을 봐서도 알 수 있다(창 41:39). 직장에서 신자가 종종 천박한 태도로 그들의 성공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될 수 있다. 요셉은 바로에게 인상 깊게 행동한 나머지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공(公)적으로 보여 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지라, 바로는 요셉을 애굽의 제2인자로 삼았으며, 특히 요셉으로 하여금 다가올 기근을 준비하도록 했다(창 41:37-45).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이 열매를 맺고 있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요셉처럼 우리도 우리 앞에 닥친 도전을 헤치고 나갈 힘이 없음을 고백하고 성공을 위한 해결책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대중의 갈채에 종종 따라오는 ‘자만’에 강력한 방벽(防壁)을 칠 수 있을 것이다.

 

   요셉의 승진은 그에게 대단한 지도력을 갖추게 했다. 바로의 인장 반지와 금 목걸이, 고위직에 맞는 훌륭한 복장(세마포 옷), 공식적인 운송수단(버금 수레), 새로운 애굽식 이름(사브낫바네아), 상류층 출신의 애굽인 아내 등이 그것이었다(창 41:41-45). 만일 히브리인의 유산을 저버리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다면,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와 패배를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분의 도우심이 한층 필요한 때는 우리가 성공했을 때다. 본문은 지위가 높아진 뒤 요셉이 얼마나 경건한 방식으로 처신했는가를 수차례 보여 준다. 그중 하나가 요셉이 승진에 대비했다는 것과 관련된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지도자가 될 꿈을 주셨는데, 그로 인해 요셉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과 사명이 있으며 이를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됐다. 요셉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신뢰했다. 그는 시기심 많은 형제에게 전혀 앙심을 품지 않았으며, 자신을 금세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장에 대해서도 그랬던 듯하다. 바로가 그를 승진시키기 전, 요셉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을 입증할 증거도 갖고 있었다. 반복적으로 하나님 덕분이라고 말한 것은 잘한 일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은사는 여호와로부터 온 것이라고 요셉 스스로 확신하게 했다. 요셉은 예의 바르고 겸손했으며 바로와 애굽 사람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할 의사가 있었다. 애굽 사람에게 돈이나 가축이 남지 않아 온 애굽이 굶주릴 때도 요셉은 애굽 사람과 바로의 신뢰를 얻었다(창 41:55). 총리로서 시무하던 그의 여생 동안 요셉은 다른 사람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 효과적인 관리를 하고자 변함없이 진력했다.

 

   여기까지의 요셉 이야기는, 깨어진 이 세계에서 우리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신속하게 주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을 때 요셉은 17세 소년이었다(창 37:2). 13년의 세월이 흘러 30세가 됐을 때 비로소 그는 종살이에서 해방됐다(창 41:46).

 

장기적인 농업 정책 및 기반구조를 만들다 (창41: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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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은 바로가 그에게 맡긴 일에 즉시 착수했다. 요셉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총리라는 나라의 수장으로서 새로 얻은 그의 직책으로 개인적인 이득을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직임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정서적 고통을 치유해 주셨고 그를 번성케 하셨다는 의미의 이름을 자녀에게 지어 줬다(창 41:51-52). 요셉은 자기 지혜와 분별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인정했지만, 애굽의 땅과 특히 농업에 대해 배울 게 여전히 많다는 현실도 인정했다. 총리인 요셉의 일은 나라 살림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직책상 그는 입법, 통신, 협상, 운송, 안전하고 효율적인 식량 저장 방법, 건축, 경제 전략 및 예측, 기록 보관, 급여 지급, 통화 및 물물교환을 통한 거래 성립, 인적 자원, 부동산 취득에 대해서 많이 배워야 했다. 하나님 및 사람과 관련된 그의 특별한 능력이 별도의 영역에서 작동하지는 않았다. 요셉의 비범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 습득한 능력을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요셉에게는 이 모든 것이 경건한 일이었다.

 

   바로는 이미 요셉을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으로 여겼으며(창 41:39) 이런 특징 때문에 요셉은 전략적 기획과 행정 일을 감당할 수 있었다. “지혜 있는”과 “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hakham[하캄]’과 ‘hokhmah[호크마]’는 높은 수준의 정신적 통찰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실용적 기술에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에는 목각, 보석, 철에 대한 숙련 기술(출 31:3-5; 35:31-33), 재봉술(출 28:3; 35:26, 35), 행정 기술(신 34:9; 대하 1:10), 법적 정의(왕상 3:28)가 포함된다. 이런 기술은 비신자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지혜로운 이들은 이스라엘을 통해 만국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여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었다(신 4:6).

 

   첫 번째 행동으로서 “요셉이 …… 애굽 온 땅을 순찰”(창 41:46)했다. 그는 농민, 지형과 농토 조건, 작물, 도로, 운송수단에 대해 잘 알아야 했다. 요셉이 이 모든 일을 개인 차원에서 감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농림부나 국세청 같은 훈련 기관을 설립하고 감독해야 했다. 7년의 풍년 기간 동안 요셉은 도성 안에 곡식을 저장해 놓았고(창 41:48-49), 이어서 닥친 7년의 흉년 동안에 요셉은 애굽 사람과 넓게 퍼진 기근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곡식을 분배해 줬다. 이 모든 일을 발의하고 실시하는 한편 전제 군주제의 정치 음모에서 살아남으려면 특출한 재능이 필요했다.

 

애굽 사람을 빈곤에서 구해 내다 (창47: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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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 돈이 떨어지자 요셉은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식량과 맞바꾸도록 허용했다. 이 계획은 1년간 지속됐는데, 이 기간 동안 요셉은 말, 양, 염소, 소, 나귀를 모아들였다(창 47:15-17). 그는 이 동물의 가치를 판정해 공평한 교환 체계를 확립했다. 식량이 결핍되면 사람들이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생존을 극히 염려하게 된다. 식량 배급을 실시하되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것은 행정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모든 가축을 팔아 버린 후에 사람들은 자진해서 그들 자신을 바로에게 노예로 팔 뿐 아니라 토지 소유권도 그에게 넘기려 했다(창 47:18-21). 지도자의 관점에서, 이것은 지켜보기 끔찍한 일이었다. 요셉은 그 사람들로 하여금 땅을 팔고 노예 생활로 들어가도록 허락했지만, 그들의 무력함을 기회 삼아 그들을 착취하지 않았다. 요셉은 그들 재산의 가치를 제대로 쳐서 씨 뿌릴 종자와 교환해 주도록 했다(창 47:23). 그는 수확의 20퍼센트를 바로에게 되돌리도록 하는 영속적인 법을 제정했다. 그 후 사람들이 그 법을 따르는지 감시하며 준수하도록 하는 체제를 확립했으며 그 수익을 관리하는 부서를 만들기도 했다. 이 모든 일에서 요셉은 제사장 가족은 땅을 팔지 않아도 되게 해 주었다. 왜냐하면 바로가 그들에게 고정적으로 일정한 식량을 주어서 그들의 필요를 충분히 해결해 줬기 때문이다(창 47:22, 26). 이 특수 집단을 다루는 일은 결과적으로 그들만을 위해 마련된 소규모의 독특한 분배 체계를 갖도록 했을 것이다.

 

   빈곤과 그 결과는 경제적인 현실이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그런 결과가 없어지도록 돕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전에는 완전한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자에게 사람들이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제거할 힘은 없지만, 우리는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이 대처할 수 있도록 그들을 지원할 방도를 찾을 수 있다. 두 가지 악 중에서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게 필요할 것이나, 정서적으로 황폐한 일이 될 수 있다. 일하는 중에 우리는 어려운 사람에게 동정하면서도 우리가 속한 조직의 선에 대한 책임을 느낌으로 긴장을 경험할 수 있다. 요셉은 이런 어려운 임무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했다. 우리 또한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다행히 하나님이 주신 기술과 지혜를 사용해서 요셉은 성공적으로 애굽을 이끌고 재난을 통과할 수 있었다. 7년간의 풍년이 닥쳤을 때 요셉은 비축 제도를 만들어서 곡식을 저장했다가 다가올 가뭄 기간에 사용했다. 7년 가뭄이 닥쳤을 때 “요셉은 창고를 열고” 충분한 식량을 풀어 나라로 하여금 기근을 넘기게 했다. 요셉의 현명한 전략과 효과적인 계획 집행은 애굽으로 하여금 기근 동안에 전 세계에 곡식을 공급할 수 있게 했다(창 41:57). 이 경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전 세계에 축복이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을 이방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 성취하셨을 뿐 아니라 한 이방 나라, 즉 애굽의 산업으로 성취하셨다.

 

   사실상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이방인에 대한 축복을 통해서, 그 축복 이후에야 이뤄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서 한 이스라엘 사람을 일으켜서 기근 중에 이스라엘을 구제하도록 하지 않으셨다. 대신 애굽 정부를 위해 일하던 요셉이 이스라엘 사람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게 만드셨다(창 47:11-12). 그렇지만 우리는 요셉을 이상화해서는 안 된다. 종종 억압적이 되던 당시 애굽 사회에서 관리 노릇을 한 요셉은 그 권력 구조의 일부가 됐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에게 노예 생활을 강요했다(창 47:21).

 

요셉의 행정 경험에서 배우기 (창41:46-57; 47: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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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에서 요셉이 식량 위기를 관리한 일에 갖는 관심은 효과적인 관리 원칙의 개발보다는 이스라엘 가족에게 미친 영향이 더 크게 표출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비상한 지도력은 충분히 오늘날 지도자를 위한 실례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요셉의 일로부터 몇 가지 실제 원리를 도출해 낼 수 있다.

 

1. 당신이 임무를 시작할 때 존재하는 상황에 가능한 한 익숙해지도록 하라.

2. 미래에 대해 분별력을 얻어서 현명한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기도하라.

3.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한 후에 그분이 당신 계획을 지도하고 성취하실 것이라고 기대하라.

4.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신 선물을 감사함으로, 적절하게 인정하라.

5. 비록 다른 사람이 당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당신이 갖고 있는 특별한 재능을 인식한다고 해도, 존경을 받으려고 이기적으로 애쓰면서 그 사실을 널리 알리지 말라.

6. 당신의 직무를 감당하는 법과 훌륭하게 완수하는 법에 대해 스스로 깨달아 알도록 하라.

7. 당신이 축복이 될 수 있는 곳에 하나님이 당신을 갖다 놓으신 줄 알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실질적인 선이 되는 일을 추구하라.

8. 모든 거래에서 공평하게 행하라. 특히 상황이 어렵고 문제투성이일 경우에 그리 하라.

9. 비록 당신의 모범적인 근무 때문에 당신이 유명하게 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종인 당신의 근본 사명을 기억하라. 당신 삶의 목적은 자신을 위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있는 게 아니다.

10. 사회가 필요로 하는 무수한 유형의 고귀한 일이 갖는 경건함을 귀중히 여기라.

11. 당신 노력의 결실을 그것을 참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가능한 한 널리 펼치되, 생각 속에서라도 그들에게 차별을 두지 말라.

12. 하나님이 당신을 조건이 특히 까다로운 업무 분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그렇다고 그것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거나 당신이 하나님 뜻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13.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 임무에 맞도록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용기를 내라.

14. 때때로, 매우 달갑지 않지만 피할 수 없는 두 상황에서 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15. 당신이 하는 일이 매일 보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향후 여러 세대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을 믿으라.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충분히 성취하실 수 있다(엡 3:20).

 

요셉과 형제들 사이의 거래 (창42-4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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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위기가 심각할 즈음에 극심한 기근이 가나안 땅에도 덮치자 요셉의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려고 애굽으로 왔다.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고 요셉도 자신을 그들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요셉은 형제들과 대화할 때 주로 상업적 언어를 사용했다. “은”(keseph)이라는 단어가 42-45장에서 20번이나 나오며 “곡식”(sheber)이라는 말은 19번 등장한다. 이 상품의 거래를 둘러싸고 그들의 개인적 역학 관계가 뒤얽혀 있었다.

 

   이때 요셉의 행동은 아주 기민했다. 첫째, 그는 자기 정체를 형제들에게 숨겼는데, 이는 (창세기 27장 35절에 나오는 야곱의 경우처럼) 노골적인 책략의 수준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해도 덜 솔직한 것은 분명했다. 둘째, 요셉은 알려진 죄과를 들어 그 형제들을 심하게 나무랐다(창 42:7, 9, 14, 16; 44:3-5). 요컨대, 요셉은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된 집단을 자기 권한을 이용해서 꾸짖었는데 그들이 이전에 요셉을 학대했기 때문이었다.[1] 요셉의 동기는 형제들의 현재 성품을 파악하고자 함이었다. 그는 20년도 더 전에 형제들에게 크게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 행동, 가족에 대한 약속을 믿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다.

 

   요셉의 방식은 사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숨기면서 갖가지 방식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요셉은 어려운 심문을 수행하는 형사처럼 행동했다. 그는 완전히 투명하게 진행해서는 그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런 책략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기민함’(Shrewdness)이다. 기민함은 선을 위해서 행사할 수도 있고 악을 위해서 행사할 수도 있다. 한편에서 보면 뱀이 “들짐승 중에 가장 기민[the Shrewdest]”(창 3:1, NLT)하여 극악한 목적을 위해 기민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기민함에 대한 히브리어, ‘ ormah[오르마]’ 및 그 동족어는 “good judgement”(좋은 판단), “prudence”(신중함), “clever”(영리함)로 번역되기도 하므로(잠 12:23; 13:16; 14:8; 22:3; 27:12 - 개역개정은 모두 “슬기로운”으로 번역했다 - 편집자 주), 적대적인 상황에서도 가능한 한 경건한 일을 추진하는 데 이 단어가 사용될 수도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뱀같이 기민하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라고 타이르셨다(마 10:16, NLT). 성경은 고상한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기민함을 종종 칭찬한다(잠 1:4; 8:5, 12).

 

   요셉의 기민함은 형제들의 정직성을 테스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형제들은 요셉이 남 모르게 자루 속에 넣어 뒀던 은을 되돌려 줬다(창 43:20-21). 그가 막내 동생 베냐민을 너그럽게 대함으로 그들을 추가로 시험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을 때와 같은 원한 관계에 빠지지는 않게 될 것임을 알게 됐다.

 

   요셉의 행동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언제나 책략을 정당화해 준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피상적인 판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면서 고난을 당한 요셉은 그의 형제들보다는 상황을 깊이 이해했다. 그들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미해결 상태에 빠진 듯이 보였다. 요셉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인간적 권한에 달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권위과 지혜를 사용해서 그들을 돕고 섬겼다.

 

   두 가지 중요한 요인이 요셉을 차별화했다. 첫째, 요셉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 유익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복받은 자이며 그의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일에만 기여했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에 그는 형제들의 절망적인 곤경을 이용해 앙심을 품고 더 많은 은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둘째, 요셉의 행동은 그가 복을 전해 줄 수 있었기에 필요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자기 형제들을 보다 더 공개적으로 대했다면, 그런 식으로는 그들의 신뢰성을 시험할 수 없었을 것이다.

 

 

Waltke, Genesis: A Commentary, 545쪽.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유다 (창44:1-45:15)

목차로 돌아가기

   요셉이 그의 형제를 시험한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서 요셉은 베냐민에게 가상의 죄를 뒤집어 씌워서 베냐민을 종으로 추포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베냐민을 놔둔 채 집에 있는 야곱에게로 돌아가라고 요구했다(창 44:17). 그러자 유다가 집안의 대변인으로 나섰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나서서 이런 역할을 떠맡게 했을까? 유다는 가나안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가족과의 신의를 저버렸으며(창 38:2) 그가 키운 아들 중 둘은 너무 사악해 여호와께서 죽이셨다(창 38:7, 10). 유다는 며느리를 창녀 취급했고(창 38:24), 자기 형제를 종으로 팔자는 계획을 구상한 사람이었다(창 37:27).

 

   그러나 유다가 요셉에게 한 말은 그가 변화됐다는 것을 보여 줬다. 유다는 가족이 경험하고 있는 가슴 아픈 배고픔, 베냐민에 대한 아버지의 꺼지지 않는 사랑, 야곱이 슬픔으로 인해 죽을까 염려되어 베냐민을 반드시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아버지에게 한 약속 등을 얘기하며 예상치 못한 연민의 정을 내비쳤다. 그리고 마침내는 베냐민 대신에 자기가 갇히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베냐민을 집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 주기만 한다면 평생 애굽에 머물며 총리의 종이 되겠노라고 간청했다(창 44:33-34).

 

   유다의 변화를 본 요셉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그들을 축복했다. 그는 그들에게 진실을 다 공개했다. “내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결국 그의 형제가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인식한 듯했다. 우리를 착취하고 속이려는 사람을 대할 때 우리는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하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명하신 대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마 10:16). 어떤 사람이 말한 대로, “신뢰는 신뢰할 만한 품성을 필요로 한다.” 요셉이 그의 형제와 나눈 대화를 통한 모든 계획은 종국에는 이리 됐으니, 곧 요셉은 그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됐다. 그는 겁에 질린 형제를 달래면서 온 애굽을 책임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보내신 하나님의 일에 대해 설명했다(창 45:8). 브루스 월키는 요셉과 그 형제간의 상호관계가 갖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장면은 화해의 구조를 드러낸다. 이것은 어려움에 처한 가족 구성원에 대한 변치 않는 애정을 나타낸다. 심지어 그 식구가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죄와 그 결과에 대해 모조리 자백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편애를 눈감아 주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며, 신뢰받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진실한 사랑을 보여 주고, 친밀함을 위해 통제권과 지식의 힘을 저버리며, 깊은 연민과 다정함과 민감하게 반응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품으며, 서로 더불어 얘기를 나누는 것이다. 비록 역기능이 있었지만 이런 덕목을 받아들이는 가족이라면 장차 전 세계에 빛이 될 것이다.[1]

 

   하나님은 흠이 많은 사람을 통해서 그분의 축복을 전 세계에 전하실 능력이 아주 충분하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악한 행위를 끊임없이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와 변화를 받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이생에서 완벽하게 우리의 실수, 연약함, 죄를 제거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이스라엘 주변 사회의 가치관에 반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는 지도자가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흔쾌히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지도자의 표상으로 인식됐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사건과 관련해 죄를 지었을 때 모세가 그것을 보여 줬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다윗도 여호와의 사자가 백성을 치는 것을 봤을 때 그렇게 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삼하 24:17). 유다 지파의 사자인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7-18).

 

같은 책, 565-566쪽.

야곱의 가족, 애굽으로 이주하다 (창45:16-47:12)

목차로 돌아가기

   요셉과 바로는 요셉의 형제들에게 “애굽의 온 땅에서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줬으며(창 45:20)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돌아가 가족을 이끌고 오도록 했다. 하지만 이 좋게 보이는 결말에도 어두운 면이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신 것이지 애굽을 주신 것은 아니었다. 요셉이 무대에서 사라진 지 오랜 후, 이스라엘과 애굽의 관계는 적대적이 되고 말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요셉이 자기 가족에게 보여 준 자비는 하나님의 축복을 지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달해 줘야 할 사람인 그의 역할에 얼마나 어울리는 것이었나?(창 12:3) 요셉은 통찰력 있는 사람이었으며 미래에 대비하는 한편 자기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축복을 실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장차 일어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출 1:8)에 대해 계시해 주시지 않았다. 각 세대는 하나님을 충실하게 섬기고 하나님이 그때그때 내리시는 축복을 받아들이면 된다. 유감스럽게도 요셉의 후손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불신에 빠져들고 말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 후손 중에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전할 새로운 사람을 일으키셨던 것이다.

 

 

 

모든 일에 선을 의도하시는 하나님 (창50:15-21)

목차로 돌아가기

   형제들이 뉘우치면서 요셉에게 한 말은 요셉에 대한 핵심 신학 중 하나이며, 창세기의 전반적인 요점 중 하나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을 학대한 것을 보복하지 않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20-21). 요셉이 언급한 “많은 백성”은 “지상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창 12:3)을 생각나게 한다. 하나님은 요셉이 구하거나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축복을 내려 주셨다(엡 3:20).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일은 실질적이고 중대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바로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직장에서 전도하기를 원하신다든가 우리 일에서 하나님께 중요한 부분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뿐이라는 인상을 우리가 받았다고 해도, 요셉의 일은 다른 차원의 얘기를 한다. 우리가 일하는 중에 하는 행동은 그 자체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극히 중요하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이 보다 더 큰 일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 일의 결과를 다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자기 일에 대해 보다 더 넓은 시각을 가졌고, 불가피하게 다가오는 우여곡절을 만날 때도 낙담하지 않았다.

 

   이 말은 일터에서 관계가 가장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마도 크리스천들은 직장에서 사람들을 용서하는 특별한 은사를 갖고 있을 것이다. 요셉이 자기 형제를 대한 태도는 용서의 모범이 된다. 아버지의 명을 좇아서 요셉은 그 형제들을 용서했으며 그들을 죄책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의 용서는, 다른 모든 진정한 용서와 같이 말로만 한 게 아니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관리하도록 해 주신 엄청난 애굽의 자원을 사용해서 그들을 물질적으로도 지원해 번성할 수 있게 했다. 요셉은 심판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님을 인식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50:19).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 판단하지 않고 그의 형제를 구원자 하나님께 연결해 줬다.

 

   요셉이 자기 형제와 맺었던 관계는 가족으로서 맺은 관계이자 경제적인 면에서 비롯된 관계였다. 둘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었다. 용서는 이 둘에 다 해당됐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신앙의 가치는 주로 지역 교회처럼 동일함을 식별할 수 있는 종교권에서 작용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우리 일의 대부분은 공적 영역에서 발생하며, 우리는 다른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참작해야 한다. 그러나 생활의 영역을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정확히 분리하는 것은 성경의 세계관이 아니다. 따라서 용서가 직장 내 건강한 관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 아니다.

 

   살다 보면 언제나 많은 상처와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런 것을 당하지 않는 회사나 조직은 없다. 일반적으로 그 누구도 고의적인 언행으로 해를 주려 하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요셉은 사람들이 그를 해하려 했다고 인정했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판단 속에 보다 더 큰 진실이 숨어 있다. 하나님은 선을 의도하신다는 점이다. 상처받을 때 이것을 기억한다면, 고통을 감내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셉은 자신을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일을 집행하는 도구요, 하나님의 대리자로 봤다. 그는 사람이 가할 수 있는 해악에 대해 알았으며 가끔은 사람이 가장 고약한 원수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는 의심과 신의가 뒤엉킨 가족 이야기, 신실한 섬김과 적나라한 자기 보호 가 뒤섞인 이야기, 진실과 거짓의 이야기를 알았다.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하나님이 그 가족을 축복하시겠다고 한 언약,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불과 물을 통과하게 하시며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도 알고 있었다. 요셉은 그들의 죄를 덮어 두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원대한 일 속으로 끌어들였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섭리에 의해 반드시 성취될 것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의 수고는 그 대가가 무엇 이든 간에 보람 있게 될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일에 대한 여러 교훈 중에서, 특히 이것이 유용한 것 이며 구속과 영광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에 대해서도 설명해 준다(고 전 2:8-10). 우리 직장은 우리 가치관과 성격이 드러나며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리게 되는 무대다. 지혜로우시고 능력 이 크신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함을 사용하시고, 우리 약함을 고치시며, 우리 실패를 쇠를 벼리듯 벼리시면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친히 세워 놓으신 계획을 성취하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