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릅니다’(욥38:4-42:6)

아티클 / 성경 주석

   욥을 향한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과 욥 사이의 거의 일방적이다시피 한 대화의 톤을 결정짓는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나님은 성경에서 드물게 등장하는 장엄한 창조 언어들을 사용하셔서, 경이로운 창조의 유일한 저자로서의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것은 일과도 강력한 연관성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에는 위대한 창조주이신(창 1-2장)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특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언급하신다.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그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6-7).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욥 38:8).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욥 39:26-27).

 

   자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기이하게 새겨진 것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이다. 하나님은 욥에게 물으신다.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욥 38:36).

 

   정답은 물론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우리가 명철을 추구하면서 또 그 명철의 한계를 드러내 보이는 존재들이라는 두 가지 사실을 단번에 확증해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지혜를 주셔서 고난이 닥쳤을 때 열정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지혜를 능가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지혜의 아주 작은 조각만을 우리 안에 심어 놓으셨기에 우리는 절대로 그분의 모든 길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불평의 소리를 내는 것은 유익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그래, 내가 틀렸다는 걸 이제야 알겠구나”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이런 평등하지 않은 독대를 계속 이어 나가시면서 하나님은 욥에게 불가능한 도전을 던지신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 때로는 ‘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답일 수 있다. 욥은 그것을 알았고 그렇게 인정했다.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하나님이 욥에게 그가 처한 상황을 큰 그림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림에 너무 가까이 붙어 있으면 화가가 의도한 전체적인 관점을 보지 못하듯, 욥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조금이나마 일부를 혹은 전체의 큰 그림 즉,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이 만든 세상을 잘못 경영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계속해서 정면 공격을 퍼부으신다. 하나님은 욥의 자기 정당화 시도를 거부한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욥 40:8).

 

   여기서 욥은 잠시 비난을 남에게로 돌리려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는지 물으셨을 때 아담이 하던 것과 같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고난의 시기에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욥기, 시편, 하박국 같은 책에 나오는 본을 따라, 불만이 생길 때는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자. 단, 우리 자신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다(욥 40:11-12). 하나님은 욥의 그런 태도를 거부하신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께 불평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욥을 정죄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을 비난한 일은 이유를 막론하고 잘못이다. 하지만 용서받지 못할 일은 아니다.

 

   욥은 자신이 바라던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룬다. 그러나 자신이 왜 그런 고난을 겪었는지 이유를 알아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욥은, 잘못은 답을 알고자 기대한 자신에게 있지, 답을 안 주신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3). 어쩌면 욥은 하나님의 임재에 너무나도 큰 경외감을 느껴 더 이상 답이 필요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욥이 왜 고난을 당했는지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해도 우리 역시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 욥의 고난은 그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더 큰 깨달음을 안겨 주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하나님과 욥의 관계는 더욱 깊어진 듯 보이며, 그 결과 욥은 더욱 현명해졌다. 그는 과거 자신의 형통이 자기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철저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아주 약간의 성숙을 위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던 손실을 꼭 경험해야 했던 것일까? 그 답은, 욥에게서도 하나님에게서도 얻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