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파 간 연방제에서 왕정으로 : 삼상

아티클 / 성경 주석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이 지파 간 충돌을 빚던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화 되는 왕정 시대로 옮겨 가는 과도기를 기록한다. 이야기는 선지자 사무엘의 출생과 부름받음으로 시작해, 사울과 다윗의 왕으로의 기름부음 받음과 통치로 이어진다. 이는 한 국가의 형성, 권력과 예배의 중앙화, 새로운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질서 형성에 대한 이야기다.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 (삼상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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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마지막 말과 사무엘상 1장의 시작하는 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족속이 지도자도 없고, 하나님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들에게 국가 지도자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제사장 엘리였는데, 엘리는 자기 아들들과 실로에서 성소를 운영했다. 이스라엘 족속의 정치, 경제, 군사적 형통은 하나님께 그들이 신실한지 여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백성은 그 성소로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가져왔지만, 정작 제사장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독하고 있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 2:12, 17). 그들은 지도자로서 신뢰할 수 없었으며,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사람은 자신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방향을 이끌어 줘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그들에게서 도적질하는 걸 봤다. 왕정으로 넘어가는 한 나라치고는 어딘지 심상치 않다.

 

   세습된 권력의 위험

   세습된 권력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천부적으로 위험하다. 우선, 최고의 지도자조차도 그 후손이 완전하고 충성스러울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둘째, 권력층 집안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부패의 영향을 안고 있어서 아주 공손한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엘리 자식들처럼 남에게 어떤 칭호로 불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든지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엘리는 자기 직무를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명령으로 보고 수행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것을 개인 소유로 여겼다(삼상 2:12-17). 성소 운영이 거의 가업이다시피 한 분위기에서 자란 그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특권을 물려받길 기대했다. 이 ‘가업’이 하나님 소유의 성소였기에 그들은 대중보다 더 신성한 권위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엘리 아들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더럽혔다.

 

   오늘날의 가업과 정치 왕조도 엘리의 상황에 견줄 만하다. 사업이나 정치의 창업자는 세상에 큰 유익을 가져왔을지 모르나, 만약 그 뒤를 이을 사람이 그것을 사적인 이익의 수단으로 소유하면, 그들이 섬기겠다고 내세우던 사람들은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반면 창업자나 그 계승자가 처음에 가졌던 선한 목적에 충실하면 모두가 승자가 된다.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되고, 사업과 공동체는 번창하며, 가족 살림은 넉넉해진다. 그러나 처음 목적이 소홀히 여겨지거나 부패하면, 사업이나 공동체는 고통을 받게 되고 조직과 가족도 위험에 처한다.

 

   정부, 교회, 기업, 그 외의 다른 기관에서 권력을 세습받은 사람,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훌륭한 리더가 되는데 필요한 기술이나 자기 훈련, 섬김의 자세 같은 측면은 개발할 필요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실이 전도서의 교사를 당혹스럽게 한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18-19). 이는 오늘날의 상황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한 세대 동안 기업의 성공으로 부와 권력을 쥔 가문이 이렇게 얻은 것을 3대째 가서는 전부 잃고, 가족 간의 파괴적인 다툼과 개인적 불행으로 고통을 당한다.[1] 세습된 권력이나 부가 항상 가난으로 귀결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세습이 통치에는 위험한 정책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세습을 통해 권세를 물려주는 가족, 기관, 정부는 그 세습에 내포된 위험에 대처할 여러 가지 수단을 잘 강구해야 한다. 세습에 대해 가족이나 기업을 전문적으로 지원해 주는 컨설팅 회사와 기관이 많다.

 

   사무엘을 엘리의 후계자로 부르시다

   만약 엘리의 불량한 아들들이 아니면, 누가 엘리의 뒤를 이을 수 있을까? 사무엘상 3장 1절부터 4장 1절, 7장 3절과 17절은 엘리의 뒤를 잇게 하려고 어린 사무엘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준다. 사무엘은 하나님 음성을 귀로 들은, 성경에 기록된 몇 안 되는 부르심 가운데 하나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종류의 일이나 사역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사무엘은 두세 살 때부터 여호와의 집에서 섬겼으며, 직업은 어머니가 선택한 것이었다(삼상 1:20-28 2:18-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조만간 엘리와 하나님의 제사장 자리에서 내려올 그의 아들들을 벌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엘리에게 말해야 하는 과업으로 부르신 것이었다. 이 부르심에 순종한 후 사무엘은 정정당당하게 선지자로 인정받을 때까지(삼상 4:1) 엘리 밑에서 계속 섬겼고, 엘리가 죽은 뒤에야 그의 뒤를 이었다(삼상 4:18). 사무엘이 하나님 백성의 지도자가 된 것은 자기 배를 채우려는 욕심이나 사람들에게 특별한 호칭으로 불리고 싶은 특권 의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비전을 주시고(삼상 3:10-14), 백성이 그 비전을 성취하도록 그들을 이끄는 솜씨와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었다(삼상 3:19-4:1). ‘일’로의 부르심(소명)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의 “소명에 대한 개요” 부분을 보라. 

 

 

Missy Sullivan, “Lost Inheritance,” Wall Street Journal Money, March 8, 2012, accessed at http://online.wsj.com/news/articles/SB10001424127887324662404578334663271139552, May 21, 2014.

하나님을 ‘행운의 부적’처럼 대하는 태도(삼상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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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엘리의 부패가 백성의 부패를 불러왔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사무엘상 4-6장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재앙을 그린다. 이스라엘은 인접 나라인 블레셋과 수 세기에 걸쳐 갈등을 빚어 왔다. 블레셋이 다시 침략했는데, 이스라엘이 졌고 4천 명이 희생당했다(삼상 4:1-3). 이스라엘 족속은 그 패배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하나의 표징으로 봤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허물을 성찰하고 회개하며 여호와께 나아와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대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자신들을 천하무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해, 언약궤를 가져와 블레셋에 맞서 전장에 투입했다. 그러나 블레셋은 전장에서 이스라엘을 도륙했다. 3만 명의 이스라엘 군인을 죽였으며, 그 언약궤를 빼앗고 엘리의 아들들을 쳐 죽여, 결국 그 사건으로 엘리까지도 죽게 만들었다(삼상 4:4-19).

 

   군대 지도자와 함께 엘리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고, 하나님의 임재라는 상징을 소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쩌면 책임자들은 언약궤를 둘러메고 갔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은 스스로 속아서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기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길 원하신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든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보호의 보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라는 초청임을 알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약궤에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장 큰 수단, 십계명이 들어 있었으나(신 10:5) 엘리의 아들들은 블레셋을 공격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인도하심도 구하지 않았다.

 

   우리도 일할 때 이런 나쁜 습관에 자주 빠지지 않는가? 일하면서 누군가의 반대에 부딪치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뤄 달라는 짧은 기도를 후다닥 해치우고 마는가? 일어날 수도 있는 행동 추이를 성경에 비춰 고려하는가 아니면, 성경을 그냥 책장에 묵혀 두는가? 자기 동기를 살피고 하나님이 일으키실 변혁에 열린 마음으로 자기 행동을 평가해 보는가 아니면, 그저 기독교적인 상징물로 자신을 치장하는가? 우리가 하는 일이 성취감 없어 보이거나, 경력이 우리가 바라는 만큼 올라가지 않는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일의 주인으로 따르는 대신 행운의 부적으로 쓰려고 하지 않는가? 

 

 

충성스럽게 일할 때 기회가 찾아오다(삼상5-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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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레셋도 언약궤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태도보다 더 나을 게 없었고, 그 언약궤는 군사적 용도에서 배제되기 전까지는 양쪽 진영 모두에게 위험한 게 됐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여호와께 다시 헌신하라고 말했다(삼상 5:1-7:3). 백성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다시 여호와를 예배하기로 돌아섰으며, 사무엘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제사장으로서 사무엘의 역할은 얼마 안 있어 “사사”(군사 통치자의 뜻)로 승격했고, 급기야 그는 블레셋에 맞서 성공적인 방어를 해내기에 이른다(삼상 7:4-13). 사무엘의 역할은 곧 법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정을 여는 것도 아우르게 된다(삼상 7:16). 사무엘의 모든 과업 뒤에는 ‘신뢰할 수 있는 여호와의 선지자’가 되게 하려는(삼상 3:20) 그분의 부르심이 깔려 있다.

 

   하나님 방식에 충실한, 노련하고 믿음직한 일꾼은 종종 자신의 직무 기술보다 더 많은 업무가 주어지는 걸 안다. 과도한 업무 책임에 직면해 사무엘은 ‘그건 내 일이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사무엘은 자기 앞에 있는 절대적인 필요를 봤고, 자신이 그런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무엘의 마음에 맞춰 그의 권위와 효율성을 높여 주신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다. 사무엘이 한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반응하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 업무와 그다지 관련 없는 일을 맡았는가? 당신의 상사나 동료가 공식적으로는 당신의 주 업무가 아닌 영역에서 당신이 책임을 더 많이 맡아 주기를 기대하는 것같이 보이는가? 이런 것은 종종 성장, 발전, 승진의 기회다. 당신이 이런 기회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면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반응할 용기와 신뢰만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채워 줄 수 있는 주변의 필요가 보일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신뢰를 키워 가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데 필요한 용기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무엘의 통치에 대한 마지막 설명(삼상 7:15-17)은 그가 매년 이스라엘 성읍을 순회하며 정의를 구현하고 다스렸다고 말한다. 그 장은 그가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라는 말로 마친다. 이스라엘에 행한 사무엘의 공적, 군사적 섬김은 그의 평생에 걸친 신실함과 여호와를 향한 예배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자녀가 실망을 안겨 줄 때(삼상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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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이 나이 들면서 그도 엘리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해 자기 아들들을 후계자로 임명한다. 안타깝게도 엘리의 아들들처럼 그들 역시 탐욕에 빠지고 타락했다(삼상 8:1-3). 위대한 지도자의 실망스러운 자녀 이야기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에 계속되는 주제다. 우리가 곧 살펴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비극은 사무엘하에서 13-19장이나 되는 분량을 차지한다. 그것은 부모의 일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직업 못지않게 버거운 일이며, 정서적으로는 훨씬 더 강도가 센 일이라는 걸 되새기게 해 준다.

 

   본문에는 아무 해결책이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우리는 엘리, 사무엘, 다윗이 문제 있는 자식에게 여러 특권은 주면서도 부모로서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모가 정말로 최선을 다해 헌신하더라도 가슴을 도려낼 만큼 마음 아프게 하는 자식이 생길 수 있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여러 가지 판에 박힌 이유를 제시하는 대신, 부모로서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어떤 다른 직업 못지않게 기도, 기술, 공동체의 지지, 사랑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결국 부모가 된다는 건 자녀들이 기쁨을 안기든 실망을 안기든 아니면 어떤 때는 둘 다든 간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달려 있으며,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가 보는 것을 넘어선 구속의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도 정죄받은 자기 아들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부모 마음을 경험하셨지만 그 모든 걸 사랑의 힘으로 이겨 내셨다는 것이다.

 

왕을 요구하다  (삼상8: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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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 아들의 부적합성을 본 이스라엘 족속은 그에게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간청했다. 이 요구는 사무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삼상 8:4-6). 사무엘은 백성에게 왕이 나라에 무거운 짐을 지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 8:11-17).

 

   그 왕은 약탈을 너무 심하게 해서 결국에 백성은 왕에게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소리치게 될 것이었다(삼상 8:18). 왕을 구하는 것은, 결국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좋지 못한 생각이라는 데 동의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백성이 원하는 정부 형태를 선택하게 하기로 작정하시고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성경학자 존 골딩게이(John Goldingay)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들이 처한 그 자리에서 자기 백성과 시작하시며, 만약 그들이 자신의 가장 높은 길을 따라오지 못할 때 하나님은 더 낮은 길을 새겨 나가신다. 그들이 여호와의 영에 반응하지 않거나 모든 사람이 무정부 상태를 향해 나갈 때 하나님은 …… 지상의 통치자라는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제공하신다.” 때로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목적의 일부가 아닌 기관을 허락하시며, 이스라엘 왕정 제도가 바로 확연히 그런 사례다.

 

   하나님도 사무엘도, 이스라엘이 선택하고 실수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 결과를 통해 배우게 한 것은 대단한 겸손과 탄력성과 은혜를 보인 것이다. 지도자가 백성이 한 어리석은 선택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성장과 은혜를 경험할 기회를 주려고 애써야 하는 기관이나 일터에서의 상황이 많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에 한 경고는 오늘날 국가나 기업, 교회와 학교, 다른 조직에도 해당된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권력을 남용한다. 우리는 거기에 적응해야 하지만, 동시에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 우리 열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서 명령한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인데, 그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의 사람이 행하기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왕을 택하는 과업 (삼상9-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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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택함받은 사울

  하나님은 사울을 첫 번째 왕으로 택하셨다(대략 BC 1050-1010). 사람들은 사울의 어느 일부분만을 봤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삼상 9:2). 나아가 사울은 백성들이 왕을 갖고자 한 제일 첫 번째 이유인 군사적 승리도 거두었다(삼상 11:1-11). 처음에 사울은 충성스럽게 섬겼지만(삼상 11:13-14), 순식간에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했고(삼상 13:8-15), 자기 백성과 함께 교만해졌다(삼상 14:24-30). 사무엘과 하나님은 모두 그에게 몹시 노했다. 그리고 사울을 대신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삼상 16:1). 그러나 우리가 사울을 21세기의 리더십 기대치에 비추어 평가하기 전에, 사울은 고대 근동에서 왕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백성은 자신이 구한 왕, 곧 (사무엘이 경고한 것처럼) 군국주의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폭군을 얻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초대 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하나님은 사무엘이 어린 사울에게 기름 붓게 하는 실수를 하신 것일까? 아니면 겉으로는 멋스러우나 내면은 공허했던 사울을 이스라엘이 그의 외양만 보고 거기에 현혹되어 선택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일까? 왕을 구함으로써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그들이 허락받아 세운 왕도 결국은 똑같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왕으로써 사울이 해야 할 첫 번째 과업은 인접한 블레셋과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골리앗과 부딪치자 사울의 두려움은 그의 믿음을 압도했고, 사울은 왕으로서의 역할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드러냈다(삼상 17:11). 즉위 기간 내내 사울은 계속 비슷하게 하나님을 의심했고, 잘못된 곳에 가서 조언을 구했으며 마지막에 가서 그의 군대가 적군과 마주쳤을 때는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삼상 31:4).

 

 

   사울의 뒤를 이어 택함받은 다윗

   사울의 뒤를 이을 사람을 물색하면서 사무엘은 한 번 더 외모로 사람을 택하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삼상 16:6-7). 소년 다윗은 사무엘이 보기엔 전혀 적합하지 않은 듯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다윗이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된 왕이라는 걸 인정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다윗은 사람들이 리더에게 기대하는 엄숙한 이미지를 발산하지 않았다(삼상 16:6-11). 나중에 보면 블레셋 거인 골리앗도 비슷한 이유로 다윗을 업신여겼다(삼상 17:42). 다윗은 그가 젊다는 것 빼고는 여러 이유로 전통적인 왕의 후보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다윗은 장자 우선 사회에서 막내였다. 더욱이 다윗은 증조할머니가 모압에서 이주해 온 룻이었기 때문에(룻 1:1-4), 혈통적으로도 순수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혼혈이었다. 다윗은 여러 불리한 요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그에게서 큰 잠재성을 보셨다.

 

   오늘날 우리가 지도자 선택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요동치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가장 마지막 것이나 그냥 지나쳤던 것이 가장 탁월한 선택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최고의 리더는 어쩌면 아무도 찾지 않는 리더일 수도 있다. 처음엔 아주 인상 깊은 리더, 곧 카리스마를 보이거나 다른 사람이 따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글에 의하면,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 실제로는 수행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1] 하나님이 중시하는 건 카리스마가 아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건 인격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어떤 한 사람의 인격을 보는 법을 배우는 데는 무엇이 필요할까?

 

   사무엘이 다윗을 찾아갔을 때 그가 밖에서 성실하게 자기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며 목동으로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다윗의 경우처럼 더 큰일을 하기 위한 훌륭한 준비다(삼상 17:34-37 눅 16:10 19:17). 사무엘은 다윗이 사람들이 갈망하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 줄’(삼상 8:20) 강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경쟁력을 갖춘 리더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의 인생 여정 전체를 통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섬기는 자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뒀다. (삼하 6:21).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행 13:22)이라고 부르셨다. 

 

 Tomas Chamorro-Premuzic, “Less-Confident People are More Successful,” Harvard Business Review, July 6, 2012, accessed at http://blogs.hbr.org/2012/07/less-confident-people-are-more-su/ on May 23, 2014

권좌에 오르기까지 오래 기다리다(삼상 17-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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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이 기름 부은 뒤 바로 통치를 시작했던 사울과 달리(삼상 11:1),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길고도 어려운 도제 기간을 거쳤다. 다윗의 공적인 첫 성공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안정을 위협하던 골리앗을 죽인 것이었다. 군대가 귀환하는 길에 여인들이 기쁨으로 맞이하며 노래했는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사울을 노하게 했다(삼상 18:8). 다윗의 능력 때문에 자신과 나라가 얼마나 큰 혜택을 입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사울은 다윗을 하나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사울은 초기에 다윗을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다(삼상 18:9-13). 그래서 사울은 결국 다윗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힘들게 사울을 피해 다니며 유랑 길에 오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경쟁을 시작했고, 사울은 추적대를 데리고 10년 동안 유다 광야를 헤매고 다녔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다윗은 권좌는 자신이 취할 자리가 아닌 것을 알고 그를 죽이길 거부했다. 권좌는 하나님이 주셔야 할 하나님의 권한이었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7). 다윗은 사울이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하나님이 사울에게 주신 권위를 존중했다. 이것은 오늘날 까다로운 상사 밑에서 일하거나, 또는 자신의 리더십이 인정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교훈을 준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특정한 일이나 자리로 부름받았을지라도, 이것이 곧 우리가 기존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권력을 잡아도 된다고 공적으로 인정해 주신 게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스가 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자기 힘으로 그 과정을 서둘러서 권력을 쥐려고 한다면, 권력이 승계될 때마다 혼란이 따라올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니 우리도 다윗이 한 것처럼 오래 참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길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권위를 그분의 시간에 주실 것을 신뢰하는가? 일터에서는 더 큰 권위를 갖는 데 필요한 일을 완수하는 게 소중하다. 상사를 찍어 내거나 자기 동료를 밀어냄으로써 조기에 그런 권위를 쥐는 것은 동료와 신뢰를 쌓지 못할뿐더러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증명해 보이지 못한다. 때로는 당신에게 필요한 권위를 받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느낌이 들 땐 절망스러울 수도 있으나, 진정한 권위는 우리가 쥘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허락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그의 손에 쥐어 주실 때까지 기꺼이 기다렸다. 

 

 

다윗과 나발 간의 위기를 해결한 아비가일 (삼상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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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힘이 커져 감에 따라 그는 나발이라는 부유한 지주와 갈등을 빚는다. 우연히 사울의 통치에 반대하는 무리와 다윗의 부하가 나발이 거하는 지역에 한동안 진을 쳤다. 다윗의 부하는 나발의 목동을 인자하게 대해 주며, 그들을 위해로부터 보호해 주고, 최소한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삼상 25:15-16). 이것을 두고 다윗은 나발이 뭔가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 사절단을 보내 나발에게 다윗의 군사를 위해 양을 좀 기증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어쩌면 다윗은 자기 요구에 허점이 있음을 깨달았는지, 사절단에게 나발을 더욱 공손하게 대하라고 지시했다.

 

   나발은 다윗의 요구대로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윗의 잔치를 위해 아무것도 안 주겠다며 거부한 것은 물론이고, 다윗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다윗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다윗을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역적으로 몰아 다윗의 정직성을 공격했다(삼상 25:10). 나발의 종조차 그들의 주인을 “성질이 너무 고약해 어느 누구도 그에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삼상 25:17). 다윗은 즉각 400명의 무장한 군사와 함께 나발과 그 집안 모든 남자를 죽이겠다고 나섰다.

 

   나발이 자기 일꾼이나 가족을 돌보기보다 자만에만 신경을 쓰는 사이, 다윗은 대량 살상을 감행할 참이었다. 이 두 교만한 사람은 수백 명의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고는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데 현명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이 싸움에 발 벗고 나섰다. 그녀는 다윗과 그의 부하를 위해 신속하게 잔치를 준비한 다음, 나귀를 타고 다윗을 맞아 사과하려고 나갔는데, 이것은 구약에서 정중한 호의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었다(삼상 25:26-31). 그러나 정중함을 갖춘 말에 담긴 내용은 다윗이 꼭 들어야 했던 진실이었다. 자칫하면 다윗은 자신이 절대로 지워 버릴 수 없는 평생의 죄가 될 수 있는, 아무 명분도 없는 피를 흘릴 찰나에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에 감동했고 나발과 그의 모든 남자와 소년을 죽이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그는 심지어 아비가일에게 자신의 무모한 계획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 준 것에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라(삼상 25:33-34).

 

   이 사건은, 자신의 리더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사람들이 붙들어 줄 필요가 있다는 걸 보여 준다. 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당신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부름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권세 있는 지위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용기는 가져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용기를 구하고 받을 수 있다. 아비가일의 개입은 한편으로는 어떤 비판의 요점이 담겨 있긴 하지만, 존경을 보이면서도 권위자에게 도전하는 하나의 모델을 보여 준다. 나발은 사소한 갈등을 개인적 모욕이라는 포장지로 싼 바람에 하찮은 논쟁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만들고 말았다. 반면 아비가일은 대단히 중요한 책망을 정중한 대화로 옷 입혀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를 해결했다.

 

   고위직에 있는 권세자가 책임을 지도록 하게끔 당신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당신을 부르실 것 같은가? 어떻게 당신은 흔들리지 않고 분명하게 진리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존중하는 신실한 태도를 기를 수 있겠는가? 실제로 그렇게 하는 데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용기를 받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