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소선지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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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선지서는 이스라엘 안에서 사는 다양한 삶의 환경들을 다루는데, 하나하나마다 그 나름의 도전들을 안고 있다. 이 선지서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주는 주제는, 하나님은 일과 예배 그리고 일상에서 하는 일을 나누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개인의 형통과 공동체의 유익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실함은 저마다 달랐다. 하나님은 그들이 예배에 충실하냐 아니냐를 보시고 그분과 맺은 언약에 얼마큼 신실한지를 판단하셨다.

 

   하나님의 언약을 향한 백성의 신실함은 땅을 포함해 영적 환경에는 물론 사회 · 물리적 환경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백성들의 신실함은 그들의 삶과 일의 윤리에도 명백히 나타난다. 나아가 그 정도에 따라 번영과 궁핍으로 나뉜다. 단기간에는 악인들이 형통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당함을 징계하시며, 결국 불의한 자들은 빈궁과 절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개인과 사회(공동체)가 하나님께 충실한 자세로 일하면 하나님은 영과 윤리, 환경에 건강과 번영을 복으로 내리신다.

 

   구약 성경의 이 마지막 열두 권의 책을 영어권 크리스천들은 전통적으로 ‘소선지서’ 라 부른다. 히브리 전승에서는 이 책들이 “열두 권의 책”이라고 불리는 하나의 두루마리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일관성이 있는 주제로 된 일종의 선집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그 선집의 배경이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긴 이야기, 하나님께서 그런 이스라엘에게 벌을 주시거나 징계하시는 이야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와 사회를 서서히 회복시켜 나가시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1]

 

   첫 여섯 권 가운데 다섯 권(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미가)은 백성들의 죄가 언약과 세상 사건에 끼친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다음 세 권(나훔, 하박국, 스바냐)은 죄에 대한 징벌에 주안점을 두며, 다시 언약과 세상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 마지막 세 권(학개, 스가랴, 말라기)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측면에 중점을 두며, 다시 한 번 언약의 갱신과 세상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부분적 지위 회복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요나는 특수한 경우다. 그의 예언은 이스라엘이 아닌 비히브리인들의 성인 니느웨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배경과 구성 모든 면에서 저작 연대를 알아내기가 어렵기로 유명하다. 

 

 Paul R. House, Old Testament Theology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8), 346-348쪽

소선지서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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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과 유다 선지자들의 배경과 연대를 두고 상당한 논란이 있다. 주요 쟁점과 그들의 저술 정황을 전반적으로 다룬 논의는 ‘예언서의 이해’(208쪽) 부분을 참조하라. 소선지서와 관련해서만 개요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첫 번째 묶음에서 호세아, 아모스 그리고 미가가 BC 8세기에 활동했다는 데 많은 학자들이 의견을 같이한다. 그 무렵은 다윗과 솔로몬이 다스리던 통일 왕국이 이스라엘로 알려진 북 왕국과 유다로 알려진 남 왕국으로 분열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때다. 미가는 남유다를 향해 말한 남유다 출신이고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말한 북이스라엘 출신이다.

 

   8세기가 열리면서 남북 왕조는 모두 솔로몬 시대 이래로 사상 유례가 없는 번영과 주변국들과의 안정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처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 눈에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왕조 갈등들이 지배층들을 사로잡으면서 경제와 정치 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변화무쌍해졌다. 대외적으로는 그 지역에서 서서히 초강대국으로 재부상하던 앗수르가 남북 왕국 모두에게 점차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갔다. 실제로 북 왕국은 BC 721년경에 앗수르 군대에게 전멸당했다. 비록 그들의 존재 흔적을 오늘날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긴 하지만(왕하 17:1-18), 북 왕국은 하나의 정치적인 실체로는 다시는 등장하지 못했다. 선지자들은, 남유다에 한 것과는 달리 북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율법의 윤리적 요구사항들을 어긴 것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을 대놓고 비난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도록 자신들은 여호와와 언약을 맺었다는 잘못된 안정감에 의지해 그들 스스로 미혹되었다.

 

   남 왕국은 히스기야 왕 치하에서 이렇게 저렇게 해서 앗수르의 위협에서 살아남았지만(왕하 19장), 바벨론 제국의 발흥이라는 더 큰 도전에 직면했다(왕하 21장). 불행하게도 유다는 앗수르에게 멸망당할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후에도 자신들의 우상숭배를 회개하지 않았다. 결국 BC 587년, 바벨론에 멸망당한다. 이로써 유다 사회 인프라는 완전히 파괴되고 유다 지도자들은 바벨론 제국으로 포로로 잡혀간다(왕하 24-25장).

 

   선지자들은 이 멸망을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내린 형벌의 증거로 여겼다. 이것은 소선지서 가운데 나훔, 하박국, 스바냐서에 신랄하게 기록했다. 아울러 같은 시대 인물들로 추정되는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쓴 예언적 내용들도 함께 담았다. 성경의 각 권들은 그들의 선지자 경력을 기록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그 내용을 다루지는 않을 생각이다.

 

   바사의 고레스 왕은 바벨론을 멸망시켰고 그 권력을 쟁취했다. 이후 바사 제국은 유다 백성들의 고국 귀환을 허락했고, 아울러 그들의 성전과 핵심 기관 재건도 허락해 주었다(스 1장). 이 모든 일은 바사 제국이 기꺼이 그리한 것이었다.[1]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기간에 자신들의 사역을 감당했다.

 

   요약하면, 소선지서는 하나님 백성들의 광범위한 삶을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그것은 일에서 신앙 표현이 필요한 여러 상황에서 여러 다른 패러다임들을 반영한다. 

 

Carol L. Meyers, Eric M. Meyers, Haggai, Zechariah 1-8: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he Ancher Bible (New York: Doubleday, 1987), xxxi-xxxii.

포로기 이전의 신앙과 일(호 · 암 · 옵 · 욜 ·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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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아와 아모스와 미가는, 나라는 잘 발달했으나 경제가 쇠퇴하던 8세기에 활동했다. 권력과 부는 상류층에 편중되어 있었고, 소외된 계층이 점점 많아졌다. 점차 늘어 가는 도시의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환금 작물(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재배하는 농작물 - 편집자 주) 재배가 팽배해졌다는 증거가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특정한 손해나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혼합작물이나 가축이 없는 농부들은 떠날 수밖에 없는 불안정을 겪게 되었다.[1]

 

   농업 공동체들은 연간 생산량 변동이 심해지면서 취약해졌고, 도시들도 그에 따라 식량 조달에서 변동을 겪었다(암 4:6-9). 이 시기 선지자들이 활동하던 때는 넘쳐나던 건축 프로젝트와 영토 확장의 영광이 오래전에 사라진 때였다. 그런 환경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줄어드는 부를 붙잡고 놓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들에게 부패의 토양을 제공해 주었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 간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 시기의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일과 관련한 세계에 관해 할 말이 무척 많았다.

 

 Marvin L. Chaney, “Bitter Bounty: The Dynamics of Political Economy Critiqued by the Eighth-Century Prophets,” The Bible and Liberation: Political and Social Hermeneutics, rev. ed.; eds. N.K. Gottwald and R.A. Horsley(Maryknoll: Orbis, 1993), 250-263쪽에 나오는 분석을 참조하라.

하나님께서 변화를 요구하신다 (호1:1-9, 미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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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패한 책임을 백성 전체에게 돌리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다. 하나님과 자신들의 연결을 끊어지게 만들었고, 하나님 율법에 입각한 정의로운 사회 구조도 파괴시켰다. 이는 직접적으로 도덕적 부패와 경기 침체를 불러왔다. “행음”이나 “음란”은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용어였다(렘 3:2; 겔 23:7). 하나님은 그 은유를 문자 그대로 취해 선지자 호세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호 1:2)라고 하셨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하는데, 실제로 그녀는 그 조건에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호세아는 그 여자에게서 아들 셋을 낳았다(호 1:3). “음란한 여자”와 한 집에서 자녀를 낳고 기른다는 것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일은 참 착잡하기 그지없다.

 

   비록 선지자들이 매춘이나 간음 같은 비유들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성적 부도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경제와 사회의 부패를 책망하셨다.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미 2:1-2).

 

   오늘날 부패하고 불완전한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호세아의 가정 상황은 드라마틱한 표본이 된다. 하나님은 뜻이 있으셔서 타락하고 어려운 가정 상황으로 호세아를 밀어 넣으셨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들을 타락하고 어려운 상황으로 밀어 넣으시는가? 우리는 존경받을 만한 전문직 분야에서 평판이 좋은 고용주와 함께 일하는 편안한 직장을 추구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도덕 관념과 타협해야 하는 곳에서 훨씬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만약 당신이 부패를 혐오한다면, 당신은 명성 있는 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하거나 마피아가 장악한 도시에서 건물 감독관으로 일함으로써 부패와 더 싸울 수 있겠는가? 쉽게 대답할 순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 우리의 손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함을 시사한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독일의 나치 지배 아래서 이런 말을 남겼다. “질문할 줄 아는 책임 있는 사람이 해야 할 궁극적인 질문은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 속에서 영웅처럼 빠져나올 수 있나’가 아니라, ‘다음 세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1]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ed. Eberhard Bethge, rev. ed. (New York: Touchstone, 1997), 7쪽.

변화를 가능케 하시는 분 (호14:1-9, 암9:11-15, 미4:1-5, 옵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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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를 요구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께서는 또한 변화를 가능케 하시리라고 약속하신다.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호 6:11). 소선지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신다고 낙관적으로 기술해 나간다. 분명히 악은 득세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모든 걸 주관하시며, ‘나라가 여호와의 것이 될 것이다’(옵 1:21).

 

   백성들이 스스로 재앙을 초래했는데도 하나님은 태초부터 당신이 의도하신 일과 삶에서 선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일하신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요엘, 호세아 그리고 아모스를 끝내는 마무리 말씀들은(호 14장; 암 9:11-15) 이것을 명백한 경제 용어들로 보여 준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 ……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욜 2:24, 26).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호 14:7).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암 9:14).

 

   사회와 경제가 모두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말씀하셨다.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평화, 공의, 번영을 회복시키신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는 일을 사용하신다.

 

불의한 일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 (미1:1-7; 3:1-2; 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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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뜻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은 인간의 죄에 지배당하고 있다. 최악의 경우는 ‘본질적으로 죄의 속성을 띠는’ 일이다. 미가는 매춘을 가리켜 (아마도 여기서는 이교적 매춘을 가리키는 듯한데) 그것은 불타 없어져 버리는 것이 그 죗값일 것이라고 약속한다(미 1:7). 이를 적용한다면, 비록 매춘 외에는 자신과 자기 가족들을 부양할 다른 방편이 없다 하더라도, 매춘을 합법적인 직업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는 것이다.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다른 직업들도 더러 있는데, 꼭 이 직업만 그렇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분명 우리는 수많은 경우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과 사회 전반에 유익한 일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가는 이스라엘을 개인적으로는 물론 전체적으로도 본다. 그는 매춘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 경제, 종교적 여건들이 조성되어 있는 사회를 비판한다. 우리는 “매춘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가?”를 물을 게 아니라, “어느 한 개인이 퇴폐적인 또는 해로운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상황들을 타개하기 위해서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미가는 어쩔 수 없이 나쁜 일에 내몰린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 개혁에 실패한 지도자들에게 더 큰 책임을 추궁한다. 그의 말은 가차 없다.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미 3:1-2).

 

   지금 이 사회는 미가가 살던 사회와는 다르고, 하나님께서 고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특정 치료책들을 오늘날에도 꼭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가의 예언적 말들은 당시의 예식적 행음과 우상숭배적 이단 간의 연관성을 반영한다. 하나님은 이교 신당들에서 주로 행해지는 패악을 없애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네가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 내가 또 네 아세라 목상을 너희 가운데에서 빼버리고 네 성읍들을 멸할 것이며”(미 5:13-14).

 

   현대 사회에서 죄로 물든 일, 억압하는 일에 이르게 하는 사회 요소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데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동시에 우리도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고의로 죄짓는 일에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요청해야 한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암 5:14).

 

 

불의한 방법으로 일하는가(호4:1-10; 요엘2: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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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지자들은 매춘을 일의 한 맥락으로만 보지 않는다. 하나님 언약에 불충하는 불의를 암시하여 표현할 때 “음행”을 쓴다(호 4:7-10). 불의한 수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널리 상기시키기 위해 아모스는 질이 낮은 제품을 만들고, 무게를 속이며, 취약한 고객들의 돈을 갈취하기 위해 여러 속임수를 쓰는 상인들을 고발한다. 그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암 8:5-6).

 

   합법적인 생계 수단이라 해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불의해질 수도 있다. 사진사는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이나 그 사진의 대상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 고객이 원하는 사진이라면 뭐든지 찍어 주어야만 하는가? 환자가 얼마든지 돈을 지불하겠다고 하면, 의사는 무슨 수술이든지 해 주어야 하는가? 모기지론 중개사는 부당한 어려움을 겪지 않고 대출금을 되갚을 수 있도록 대출자의 능력을 보증해 줄 책임을 져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 뜻에 따라 섬기는 것이라면, 위와 같은 질문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일마다 위상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선지자들이 하는 말은 어떤 일이 다른 일들보다 더 경건하다는 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일이 세상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그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다”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신다(욜 2:29).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실천하는 공의 (암8:1-6, 미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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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에서의 공의는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생계를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자원들을 이용할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아모스는 이삭줍기 율법이라는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불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삭줍기는 추수꾼들이 지나간 후에 들판에 남아 있는 곡식 이삭을 줍는 것이다.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르면, 농부들은 자신들의 들판에서 이삭줍기를 할 수가 없었고 오직 가난한 자들(말 그대로 “고아와 과부들”)의 자급자족을 위해서 그들에게만 들판을 열어 주어야 했다(신 24:19).

 

   가난한 자들이 구걸을 하거나 도적질을 하거나 굶는 대신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들에서의 이삭줍기)를 창출하는 데 토대를 둔 기본적인 사회복지 제도였다. 이삭줍기는 자원이나 사회 · 경제적 지위, 차별, 장애 또는 다른 요인들 때문에 노동시장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 일의 존엄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는 한 방편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필요가 채워지길 원하실 뿐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게 해 주는 일의 존엄성을 모두에게 제공하기를 원하신다.

 

   아모스는 이런 공급체계가 무너졌다고 비판한다. 농부들은 자신들의 들판에 이삭을 남겨 두지 않음으로써 가난한 자들이 이삭을 줍지 못하게 만들었다(미 7:1-2). 도리어 그들은 폭리를 취하는 가격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타작을 하고 남은 겨 찌꺼기를 팔겠다고 나선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암 8:4)라고 아모스는 책망한다.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암 8:6).

 

   아모스는 달리 음식을 구할 방도가 없는 자들에게 가서 질 낮은 싸구려 음식을 팔려고 안식일이 끝나길 간절히 기다리는 그들을 책망한다(암 8:5). 더 나아가 그들은, 시장에서 저울 눈금을 조작하는 데서 명백하게 드러났듯이, 좋은 곡식을 살 수 있는 사람들조차 속였다. 그들은 “[팔리고 있는 밀의]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파는 가격]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자랑한다. 미가는 불의한 거래에 내리실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내가 만일 부정한 저울을 썼거나 주머니에 거짓 저울추를 두었으면 깨끗하겠느냐(미6:11)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로써 공의가 단순한 범법과 정치적인 표현의 문제일 뿐 아니라, 경제적 기회도 다루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개인과 가족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일하는 기회는 언약 안에 있는 개개인의 필수적인 임무다. 경제 정의는 미가가 세 구절 앞에서 외친 유명한 선언에서 필수 요소로 나온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모든 일과 경제 생활에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기를 바라신다. 

 

일과 예배 (미6:6-8; 암5:21-24; 호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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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는 선지자들이 보았던 대로 단순한 세속의 이슈가 아니다. 미가는 6장 8절에서 공의를 요구한다. 이는 공의가 화려한 종교적 제사보다 더 낫다는 관찰에서 나왔다(미 6:6-7). 호세아와 아모스는 이 요점을 더 확장시킨다. 아모스는 종교적 의식 준수와 윤리적 행동을 연결시키지 않는 것에 반대한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1-24).

 

   호세아는 영적으로 좌초된 상태와 선한 일들 간의 연결점 안으로 우리를 더 깊이 이끌어 간다. 선한 일은 하나님 언약을 향한 신실함에서 우러나오며, 반대로 악한 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1-3, 6).

 

   일의 세계는 삶의 영역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을 말해 주는 구절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가치와 우선순위들을 하나님 언약의 토대 위에 두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의 삶과 일은 윤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일관성을 잃을 것이다.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면, 예배에서도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

 

 

자신의 부富를 위해서만 내달리는 인생 (암3:9-15,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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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지자들은 개인의 부를 좇느라 공동의 유익은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이웃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포기한 사람들을 비판한다. 아모스는 악행과 폭력 및 강도짓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을 책망하면서 손 안 대고 얻은 부와 압제를 이야기한다(암 3:10).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부를 순식간에 끝내실 것이다. 하나님은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 궁들이 파괴되며 큰 궁들이 무너지리라”(암 3:15)라고 말씀하신다. 아모스는 “시온에서 교만한 자”(암 6:1)들이 저지르는 사치를 통렬하게 책망한다. ‘상아 상에 누우며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기 때문에’(암 6:4-5) 그들은 처단 1순위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하실 때 그들은 ‘제일 먼저 추방당할 것이다’(암 6:7).

 

   오늘날에도 자신의 부를 선한 목적에 사용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아모스에 등장하는 불평과 놀랍도록 유사한 불평들이 쏟아진다. 자신들의 부를 취약한 계층들을 착취하는 데 쓰는 개인들, 기업체들, 정부, 그리고 다른 기관들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많은 크리스천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다. 적어도 자신들이 일하는 환경에서만큼은, 그리고 적어도 어느 정도는 말이다. 선지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 일과 부가 어떻게 우리 주변 사람들을 섬기는 데 쓰이는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사회의 유익을 위해 언제나 도전하고 또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포로기 동안의 신앙과 일(나 · 합 ·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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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훔, 하박국, 스바냐는 남 왕국이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나날이 융성하던 바벨론 제국의 외부적인 압박과 내부 혼란 때문에 남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그다지 오래지 않은 BC 587년, 어설픈 반란으로 유다는 몰락하기 시작했고, 엘리트들은 바벨론 제국 중심부에 포로로 잡혀갔다(왕하 24-25장).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자신들의 핵심 종교 기관, 성전과 제사장, 심지어는 조국 땅을 떠나 있는 동안에 어떻게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강구해야 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첫 여섯 권에서 백성들의 죄가 미친 영향들을 이야기했다면, 나훔, 하박국, 스바냐서는 그 결과로 그들이 받은 형벌을 다룬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나1:1-12; 합3:1-19; 습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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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훔서는 당시 정치 · 경제 면에서 닥쳐온 재난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 또는 징계였음을 분명히 한다. ‘내가 너를 괴롭혔다’고 하나님은 선언하신다(나 1:12). 하나님이 내리시는 징계에서 중요한 점은 적정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의 능력이 약화되는 것이라고 하박국과 스바냐는 말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 3:17).

은을 거래하는 자들이 끊어졌음이라(습 1:11).

 

   이것은 경제적인 피폐뿐만 아니라 환경적인 문제에서도 나타난다. 현재 일어나는 정치, 경제, 자연 재난들이 하나님의 형벌일까? 특정 재난이 하나님이 진노하신 표시라고 선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많다. 도쿄 도지사[1]와 MSNBC 텔레비전 뉴스 진행자 모두 2011년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는 신의 형벌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열두 선지자나 이스라엘의 다른 선지자들 대열에 들지 않는 이상,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선언하는 일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그런 주장을 펼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그런 사실을 계시하신 것인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가 결론을 내린 것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선지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미리,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도를 계시하시는가? 아니면 사건 발생 이후 한두 사람에게만 계시를 하시는가? 오늘날 하나님의 형벌을 선포하는 자들은 예레미야나 열두 선지자 및 고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처럼 과연 고난당하는 자들 곁에서 함께 연단을 받은 사람들인가?

 

 Brad Hirshfield, “Where is God in Suffering?” Washington Post, 16 March 2011.

일도 우상이 될 수 있다 (합2:1-10; 습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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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들은 형벌을 자초했다. 맡은 일에 충실하지 않았고, 돌과 나무, 그리고 쇠와 같은 선한 재료들을 우상으로 바꾸어 왔다. 아무리 재료가 좋고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우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합 2:18).

   

   스바냐가 말하는 대로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다(습 1:18).

 

   신실함이란, 일을 하는 동안 입으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추상적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일에서 가장 앞세우는 행위이며, 하박국은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라고 상기시킨다. 이런 잠잠함은 단순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깨어진 야망, 두려움, 동기들을 잠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언약의 우선순위들을 우리의 우선순위로 만든다.

 

   은행업과 금융업에서 다른 사람들을 속일 직원들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라.

 

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 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너를 억누를 자들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힐 자들이 깨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합 2:6-7).

 

   부동산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이익을 쌓아 두는 사람들도 그들 스스로 이와 비슷한 함정에 빠지고 있다.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가 많은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합 2:9-11).

 

   다른 사람들의 취약함을 이용해 착취하는 사람들도 스스로를 심판으로 내모는 것이다.

 

이웃에게 술을 마시게 하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에게 취하게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받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리라(합 2:15-16).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거나 이용하는 사람들이 하는 일도 결국에는 파멸에 이른다.

 

   오늘날 우리는 글자 그대로의 귀한 재료들로 우상을 새겨 그 앞에 절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일은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우상의 핵심은, 그분의 인도와 능력을 받아 일하라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만든 자가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기 때문이다’(합 2:18). 만약 우리의 지혜, 기술, 리더십이 없이는 속한 팀, 회사, 조직, 또는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해 권력과 영향력을 갖추고자 한다면, 그때 우리의 야망은 하나의 우상이 된다. 반대로,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은사들을 투입하는 섬김의 네트워크 안으로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권력과 영향력을 갖추고자 한다면, 그때 우리의 야망은 곧 신실함이 된다.

 

   성공을 자축한다면,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에 감사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실패했을 때 절망한다면, 깨어진 우상의 공허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반면에 인내로 반응한다면,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

 

 

 

역경 중에도 신실함을 지키다 (합2:1; 습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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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 생활 동안에는 또 다른 역동적 움직임도 있었다. 나훔, 하박국, 스바냐가 형벌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이 기간 동안 어떻게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길 수 있을지 다시 배운다. (이 내용은 이 책의 7장과 9장에서 충분히 논의했고, 이 장에서도 약간 다루었다.)

 

   핵심은 포로 생활이라는 처절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신실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자기 주변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육당하는 현장을 목도하면서 자신이 다른 곳에 있었으면 하고 바랐을 하박국은, 자신의 자리를 그대로 지키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결심했다(합 2:1). 그러나 단순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도 가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음을 알아야 한다. 한편 의롭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 2:3).

 

   이상적인 직장은 없다. 어떤 직장은 온갖 방법으로 타협을 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큰 도전이 되는 반면, 어떤 직장은 아주 사소한 면에서 결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힘든 직장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증거하는 삶을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 하박국은 우리가 한 일이 아무리 결실이 없는 것같이 보여도 하나님은 최악의 근로 조건도 이겨 낼 수 있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는 일에 함께하신다고 상기시킨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테리 배린저(Terry Barringer)는 그것을 다시 자기 나름의 표현으로 바꾸었다.

 

계약이 만료되어 일도 다 끊기고, 내 능력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내 일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비록 은행 잔고가 바닥이 나고 연금은 살아가기에 충분치 않을지라도 나는 여호와,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1]

 

   19절이 암시하는 것처럼 ‘여호와가 나의 힘이시기 때문에’ 어려운 환경에서도 얼마든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다. 신실함은 역경을 그저 견디기만 하지 않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최악의 상황조차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다.

 

 

The Bible and the Business of Life, Gordon Preece and Simon Carey Holt, eds. (Adelaide: ATF, 2004), 215쪽에 인용되어 있다.

포로기 이후의 신앙과 일 (학 · 슥 ·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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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기가 끝나고 유대인들의 일상과 종교생활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회복되었다. 유대인 사회의 경제, 사회, 종교 인프라와 함께 예루살렘과 그 성전도 재건했다. 소선지서는 이제 죄와 벌 이후 우리가 수행하는 일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과제들로 옮겨 간다.

 

사회자본의 필요성 (학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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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보다 내 자신과 가족을 우선시하라는 유혹을 받는다. 학개 선지자는 이 도전과 관련한 그림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는 자신들의 집 짓는 데는 있는 힘을 다하면서, 유대 사회의 중심인 성전 재건을 위한 자원 투입은 태만히 하는 백성들을 책망했다. “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학 1:4).

 

   그는 사회자본에 투자하지 않으면 결국 개인의 생산성이 다시 하락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학 1:6).

 

   여호와께서 백성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의 마음에 박차를 가하자 그들은 성전 재건과 사회 기간망에 투자하기 시작한다(학 1:14-15). 사회자본에 투자함으로써 ‘스스로 만들어진 인간’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개인의 노력으로 큰 부를 창출할 수도 있으나 우리 각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여러 가지 자원과 사회 인프라에 의존하고 산다.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7-8).

 

   번영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에 토대를 둔 공동체의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9).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이 사는 사회를 위해 시간을 내기보다 우리가 먼저 먹고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상호간의 일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먹고살 수가 없다. 이것은 십일조의 배경에 들어 있는 것과 똑같은 개념이다. 그것은 수확에서 10퍼센트의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내준 놀라운 100퍼센트의 축복이다.

 

   현대에는 우리가 가진 자원을 무형자산에도 투자해야 한다. 주택, 식량, 자동차, 그 외 다른 현실적인 필요들을 충족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넘치도록 부어 주셔서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해 주는 예술, 음악, 교육, 자연, 레크리에이션 등과 같은 무수한 것들도 누릴 수 있는 여유까지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예술이나 인문학, 또는 여가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공원과 놀이터, 극장 등을 만드는 데 투자하는 사람들은, 사업가나 목수만큼이나 하나님이 꿈꾸고 계시는 세상에 똑같이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와 교회 생활에 투자하는 일 역시 크리스천의 일에 힘을 실어 준다. 예배는 그 자체로 선하며, 앞에서 보았듯이 단순히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의 영적이고 윤리적인 능력을 경제, 사회, 정부, 교육, 의료, 과학 및 기타 영역과 관련된 다른 일에 적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크리스천 공동체는 경제적, 시민적, 사회적 복지를 위한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환경을 보호할 책임 (학1:1-2:19; 슥7: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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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개는 사람들의 사회, 경제적 안정을 환경과 연결시킨다. 학개는 히브리어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언어유희 수단을 써서 성전의 황폐함(hareb-학 1:9)과 그 땅의 가뭄과 수확물의 황폐함(horeb-학 1:10), 그리고 그 결과로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이 황폐해짐을 연결시킨다(학 1:11). 이와 같은 연결에서 핵심은 성전의 건강으로, 이는 사람들의 종교적 성실성을 측정하는 일종의 암호가 된다. 사회 · 경제적 건강, 환경, 예배가 삼중 방식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우리가 의존해 사는 물리적 환경이 병들면 인간 사회도 병든다. 그리고 그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지표들 가운데 하나는 사회가 환경을 병들게 하는 데 일조한다는 것이다.

 

   한 공동체가 예배를 드리고 그 땅을 돌보는 방식과, 그 땅을 차지한 사람들의 정치적 · 경제적 조건 사이에도 연결점이 있다. 이 땅을 창조하신 분을 존중하는 것은, 땅은 물론이요 그 땅에 사는 거주민들과 평화를 이루며 사는 출발점이다. 선지자들은 우리가 이 같은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권고한다.

 

   학개는 땅의 가뭄과 성전 황폐화를 같은 맥락의 문제로 본다. 진심과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만이 그 땅을 평화와 축복으로 안내한다.

 

너희는 오늘 이전을 기억하라 아홉째 달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성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기억하여 보라 곡식 종자가 아직도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 2:18-19).

 

   스가랴 역시 인간의 죄와 황폐한 땅을 연결지어 생각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한다(슥 7:10). 그들은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한다(슥 7:12). 그 결과 환경은 피폐해졌고, 이어 ‘아름다운 땅은 황폐해졌다’(슥 7:14). 요엘은 이 같은 황폐함이 이미 포로기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욜 1:12).

 

   일과 일하는 습관이 환경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감안해 볼 때, 만약 크리스천들이 소선지서의 비전에 따라 일을 한다면, 우리는 이 지구와 지구에 사는 모든 생물들에게 엄청난 유익을 줄 수 있다.[1]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처한 일터에서 신실하게 일할 수 있다.

 

   정결에 대한 학개의 긴 말씀(학 2:10-19) 또한 정결과 땅의 건강 사이를 이어 주는 연결 고리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부정 때문에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학 2:14)라고 책망하신다. 이는 예배와 건강한 환경을 더욱 일반적인 관점에서 연결시킨 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환경(자연)을 건강하게 오래도록 보전하라고 맡기셨다. 따라서 정결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를 통합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태계를 건강하게 지키고, 창조된 생물들이 활력과 건강이 넘치도록 돌보며, 피조물이 생산성을 회복하도록 존중하는 마음이 수반된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천과 ‘책임감 있는’ 일하는 습관이라는 주제로 되돌아가게 된다.

 

   소선지서 기록처럼, 사람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내린 형벌로 황폐해졌다면, 생산성이 높은 땅은 회복해 가는 한 과정이다. 스가랴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이스라엘이 번성하던 시기의 아모스가 본 것과 아주 흡사한 환상을 보았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심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복을 맛보는 모습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슥 3:10).

 

   하나님과의 화평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을 돌보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아무리 생산성 높은 땅이라 해도 열매를 맺으려면 경작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의 세계는 곧 풍성한 삶을 실현하는 것과 같다. 

 

 

이 링크의 내용을 더 자세히 보려면 T. J. Meadowcroft, Haggai (Sheffield: Sheffield Phoenix Press, 2006), 238-242쪽을 보라.

죄와 희망이 함께 남아 있다(말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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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 기간 중에도 인간의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회복기의 세 번째 선지자 말라기는, 백성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사회의 가장 약한 계층(“저는 자와 병든 자” - 말 1:13), 특히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해 이익을 챙기는 행위를 책망한다(말 3:5).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다’(말 3:8).

 

   놀랄 일도 아닌 것이, 그런 사람들은 헌금으로 바치는 것들을 삭감함으로써 성전 예배를 더럽혔고(말 1:8-19), 그 결과 환경도 피폐해졌다(말 3:11). 그러나 선지자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었고, 그 중심에 바로 일이 있다. 그것은 성전의 종교 · 사회 인프라를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에서 시작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

 

   이어 그것은 환경 회복으로 이어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리라’(말 3:11a). 그런 다음 하나님은 ‘너희 땅이 아름다워질 것’(말 3:12)이라고 약속하신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을 윤리적으로 해 나가고(말 3:14, 18), 그 결과 “토지 소산”과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말 3:11b)를 포함해 경제가 회복된다.

 

요나와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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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요나서는 소선지서 가운데서 다른 책들과 성격이 좀 다르다. 그 무대도 이스라엘이 아니다. 본문에는 연대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없다. 거기에는 예언적인 말씀도 없고, 그 초점 또한 백성들이 아닌 선지자 개인의 체험에 맞춰져 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움직이신다는 것과(욘 1:2, 17; 2:10),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 예배, 사회 · 경제적 건강, 환경을 삼중으로 잇는 연결점의 토대가 된다는 관점을 다른 선지자들과 공유한다. 선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바다는 잠잠해지고, 하나님은 선원들과 요나의 안녕을 지켜 주셨다(욘 1:14-17). 요나가 올바른 예배로 돌아오자 여호와께서는 바다에 물고기를 두고 땅 위로 사람들을 놓음으로써 환경을 원래의 정상적 질서로 되돌려 놓으신다(욘 2:7-10). 니느웨가 여호와께 돌아오자 짐승과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게 되고, 사회와 경제 부분에서 저지르던 위법행위들도 멈추게 된다(욘 3:4-10).

 

   요나의 배경은 소선지서의 나머지 책들과는 다르지만, 그 신학만큼은 다르지 않다. 요나서가 독특한 점은 (1) 선지자를 향한 부르심과 그의 반응, (2)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축복하고 다른 나라들을 대적하시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다른 나라들도 축복하고자 하신다는 점이다.[2]

 

 

 Douglas Stuart, Hosea-Jonah,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2002), 431쪽.

같은 책, 434쪽

소명을 거부하고 달아난 선지자(욘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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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선지서가 다 그렇듯이 요나서 역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욘 1:1-2).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다. 무모하게도 그는 외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탐으로써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려 한다(욘 1:3). 이는 그 자신뿐 아니라 그 배에 탄 다른 사람들까지도 위험에 빠뜨린다. 우리가 소선지서 전체를 통해 본 것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형벌을 내리시고, 개인의 행동은 언제나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은 폭풍우를 보내신다. 우선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선적했던 화물들을 전부 다 배 밖으로 던져야 했기 때문에, 자기네 장사의 전망을 망쳐 버린다(욘 1:5). 심지어 나중에 그 폭풍우는 그들의 목숨마저 위협한다(욘 1:11). (선원들이 받아들이기를 주저한 제안이었지만)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제안한 다음에야 폭풍우는 누그러졌고 공동체에 닥쳤던 위험이 가라앉았다(욘 1:12-15).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요나를 부르신 것은 니느웨의 생명을 위해서였다.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했을 때 그의 섬김을 받아야 할 백성들이 참혹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 고생했다. 만약 우리가 요나의 일과는 다를 수 있으나 하나님께는 똑같이 중요한 우리의 일에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걸 인정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실패하는 건 우리의 공동체도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 부분을 보라.

 

   우리의 은사나 재능이 크면 클수록, 우리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할 때 우리가 끼치는 해악은 그만큼 더 커진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업이나 정부, 사회, 과학,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해를 끼치고 다닌 이야기들은 얼마나 많은가! 만약 그들이 여호와를 예배하고 섬기는 데 그들의 능력을 최우선으로 활용했더라면 그들이 어떤 선을 행할 수 있었을지, 그리고 어떤 악을 피할 수 있었을지 상상해 보라. 우리의 은사들은 너무도 미약해 보일 수 있으나, 우리가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 일을 해 나간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을 행하며 얼마나 많은 악을 피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보라.

 

온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욘1:16, 3: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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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한 것은,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집을 누그러뜨리고 자신의 사명을 성공리에 마무리한다. 이때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에 분노한다(욘 4:1-2).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왕하 17:6).

 

   요나는 자신이 경멸하는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보냄을 받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온 열방을 축복하셨다. 이 책 7장의 “렘 29장” 부분을 보라.

 

   우리의 일을 통해 우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한계를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놓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위를 점유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하는 일에서 얻는 유익을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해 쌓아 두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우리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이익을 챙기기 위한 노력으로 우리는 비밀, 속임수, 편법 혹은 지름길을 사용하거나 착취를 하거나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 일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우리가 성공은 제로섬 게임이요, 이득 챙기기라고 믿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축복은 용량이 제한된 양동이가 아니라 흘러넘치는 샘이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일을 하노라면 경쟁, 유한한 자원, 그리고 우리를 해치려는 악한 의도에 자주 부딪친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획하신 창의성과 생산성, 대인관계와 사회적 조화, 환경적인 균형으로 우리의 일터를 충만하고 웅장하게 변혁시키신다.

 

   요나는 비록 처음에는 자기 원수들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길 거부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께 충성함으로써 불순종을 이겨 낸다. 그가 니느웨에 경고하자, 요나의 예상을 뒤엎고 니느웨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에 열렬히 반응한다.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욘 3:5b) 왕과 대신들, 거리의 백성, 심지어 우리 안 짐승들까지 온 성읍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다’(욘 3:8).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욘 3:5a) 그들이 행한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고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욘 3:10).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요나는 낙심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셔서 하길 원하신 그 일의 결과를 자신이 좌지우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니느웨가 용서가 아니라 벌을 받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의 결과에 맞게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하고(욘 4:5),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한다. 우리의 태도도 이와 똑같지 않은가? 우리의 일에서 보람이나 성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하는 일의 참된 가치를 보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께 저지른 작고 불완전한 순종은 그의 주변 사람들을 축복에 이르게 했다. 배 위에서 그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자신을 알리고(욘 1:9), 배에 같이 탄 동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폭풍우에서 건짐을 받고, 더 나아가 여호와를 따르는 자들이 된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 1:16).

 

   만약 불순종이나 분노, 방종, 두려움, 이기심 또는 다른 병적 요소들을 핑계 삼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일을 주저하고 있다면, 요나의 경험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신실한 사역자인 선지자가 우리보다 더욱 크게 실패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요나의 주저함이나, 결점, 오락가락하면서 간간이 중단되는 사역을 통해서도 그분의 계획을 완수하신다. 우리가 하는 형편없는 사역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뜻하신 대로 다 이루신다.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을 돌보고 책임지신다 (욘1:3,12-14,17; 2:10;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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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의 경험을 보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자칫하면 우리를 재앙과 역경에 이르도록 만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질 수도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큰 희생과 어려움을 요구할 수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1]

 

  그러나 요나의 경우, 어려움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요나가 불순종하면서 생겨났다. 파선을 당하고 큰 물고기 배 속에서 3일간 장사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가 해와 바람에 노출되고 절망에 빠지면서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간 것은(욘 4:3-8) 하나님이 그를 어려움에 빠뜨려서가 아니었다. 요나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욘 4:2)의 축복을 받아들이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요나를 돌보시고 위로하셨다.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선원들이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대려고 애쓸 때,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를 불쌍히 여기게 하신다(욘 1:12-14).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보내셔서 요나가 익사하지 않게 하시고(욘 1:17), 그런 다음 물고기에게 요나를 마른 땅에 토해 내라고 말씀하신다(욘 2:10). 하나님은 니느웨에 있는 요나의 원수인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이 요나를 높이 평가하고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끔 만드신다. 하나님은 요나가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니느웨에서 그에게 박넝쿨과 그늘을 제공해 주신다(욘 4:5-6).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소명이 꼭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맞바꿔져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달리 생각하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고방식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소명을 거부했어도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특별한 조치들을 취하셨는데, 만약 요나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더라면 그가 어떤 축복을 누렸을 것인지 상상이 되는가. 여행 수단,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줄 친구들, 자연 세계와의 조화, 박넝쿨과 그늘, 사람들 가운데서의 평가, 맡은 일의 놀라운 성공 ……. 만약 요나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이런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얼마나 더 큰 축복들을 누렸을지 상상해 보라. 이 축복이 요나의 불순종으로 그나마 축소된 것임을 생각하면, 섬김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두 축복으로 가는 초청이다.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 설명은 1937년에 첫 출판된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New York: Macmillan, 1966)을 보라.

소선지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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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선지서는 이스라엘의 다양한 시대와 상황을 배경으로 한 ‘일을 통일된 관점으로 풀어 간다. 소선지서는, 하나님은 모든 시대 모든 백성에 걸쳐 역사하시면서 그분과의 언약을 지키는 자기 백성에게 최고의 것을 안겨 주신다고 확언한다.

 

   포로기 이전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엘리트층에게 권력을 바로 사용하고, 신실하게 예배하라고 권고했다. 각 책들의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은 예배와 일상의 일을 분리해서 생각지 않으시므로 경제적 · 정치적으로 공의롭지 않는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고 일침을 놓는다.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 부자와 권위자들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은 절대 용인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일과 예배 모두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결국 나라를 잃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다. 포로기 동안에도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직시하라고 촉구했고, 최악의 시기지만 하나님께 신실할 기회가 된다고 그들을 불렀다. 그들의 신실함은 예배 못지않게 일에서도 볼 수 있다. 일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 일을 높이고, 그 결과로 얻는 부를 목표로 삼는 것은 우상숭배와 똑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공의롭게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임재하시어 기쁨과 결실을 가져다주신다.

 

   포로에서 풀려나 고국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건한 우선순위를 지켜 나가라고 선지자들은 도전한다. 경제 발전, 정직한 상행위, 공공선을 제공하는 정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예배는 참된 예배의 토대를 형성한다.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모든 개인과 신앙공동체는 합력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평화와 안녕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에게 그랬던 것과 같이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같은 소명이다. 소선지서는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앞서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책들이다. 따라서 그 책들은 일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풍성한 삶을 바라던 선지자들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슥 1:17)라고 스가랴를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이 땅에 실현시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