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제도

아티클 / TOW 프로젝트가 제공하는 주제별 콘텐츠

   금융의 신학적 분석을 마무리하기 위해, 우리는 정확히 어떻게 사람들이 금융제도를 발전시켜서 이를 통해 영광과 청지기 사명,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토대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란 사회가 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조와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가장 기본적인 금융제도로는 통화, 중개기관, 금융상품, 그리고 가격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이 네 가지 제도들에 대해 각각 살펴볼 것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토대 위에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해서 청지기 사명, 정의, 사랑을 통해 순종적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생기는 의문 사항들 또한 풀어나갈 것이다.

 

   반 두저(Van Duzer)는 성경에 나오는 권세와 원칙들 속에 제도가 존재하며, 이러한 제도들은 하나님께서 선을 위해 만드신 것들이라고 주장한다.[1] 그는 골로새서 1:16-17 말씀이 비즈니스나 시장과 같은 제도를 일컫는 것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내놓는다.[2] 반 두저는 또한 요더(Yoder)의 말을 인용하는데, 요더는 하나님께서 창조물에 "균형, 체계,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창조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3] 이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금융을 긍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금융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할 것이다. 이후 우리는 금융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타락한 인류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금융제도가 잘못된 청지기 역할을 한다든지 인간의 정의와 사랑을 훼손시키는 형태로 둔갑하면, 사회에 악하게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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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구성이 있고 보관 및 운반이 용이한 매개를 통해 물질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초기 창조 계획에서 금과 같이 매력적이고 부피가 작으며 상대적으로 희귀한 물질들을 몇 가지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그것을 이해하고 그러한 물질들에 가치를 매길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셨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셨고 금과 같은 희소한 자원의 가치를 대신 나타내 줄 수 있는 흔한 자원, 즉 종이와 같은 것을 통해 다양한 자원의 교환이 가능하도록 하셨다.[1] 우리는 돈을 사용하고 있으며 현대에는 이러한 돈을 이동시키기가 매우 용이해졌고 (전자 거래를 통한 송금은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식량, 주택, 교육, 자본재와 같은 실제 자원을 얻는다. 통화를 사용해 쉽게 자원을 잘 습득하는 능력은 창조물에 대한 청지기 사명 의무를 이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에는 돈에 관한 가르침이 많이 들어있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가르침으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10)"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6:24)"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의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돈의 힘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은 악의 근원이 아니다.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축복이다.[2]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중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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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개기관은 채권자의 자원을 채무자에게 유용한 형태로 "재제조"하는 기관이다. 간단한 예로, 은행이 여러 명의 예금자들과 대출을 받는 한 기업을 연결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중개기관은 다양한 형태의 은행을 모두 포함하지만, 연금기금이나 생명보험사, 상호기금, 사모펀드, 헤지 펀드, 증권화 기구 등 다른 형태의 중요 중개기관들도 있다. 심지어, 기업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않고 채권자들에게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돈을 조달하는 경우처럼, 금융기관의 "중개를 받지 않은" 금융 거래들 또한 일반적으로 투자은행과 같은 일종의 중재 기관을 거친다. 예금자의 돈을 모아 채무자에게 빌려주는 투자를 하는 모든 금융기관은 금융 중재기관의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중개기관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회적이며 다양한 존재로 만드셨으며, 대리인의 역할도 맡고, 약속을 맺으며,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개기관을 통해 두 가지 주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청지기 사명을 이행하게 된다. 첫째, 그들 자신의 자원을 투자해 당사자들 간의 신뢰를 파악하고 형성해나감으로써 채무자와 채권자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여러분은 낯선 사람에게 주택 구매를 할 수 있도록 직접 돈을 빌려주진 않겠지만, 낯선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에게 돈을 맡기는 예금은 망설이지 않고 할 것이다. 여러분이 은행을 신뢰하는 이유는 은행이 돈을 빌릴 사람이 믿을 만한지 어떤지 확실히 알아보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둘째, 중개기관은 예금자들이 저금한 자원을 한데 모음으로써 자원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한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주택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금액의 돈을 빌려주진 못하지만, 은행은 수천 명 혹은 수백만 명의 예금자들의 자금을 모아 대규모의 대출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중개기관이 정의를 실현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서민층과 소규모 기업들에게 자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중개기관이 없다면 가계가 자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알고 있는 연줄에 한정될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 가계는 계속해서 형편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중개기관을 통해 어려운 가계는 주택, 자동차, 대학 교육 등을 위한 자원을 빌리거나 소규모의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직접 투자자들에게 채권을 발행할 수 없는 규모가 작고 평판이 낮은 소규모 기업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중개기관은 좀 더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돕는다.

 

   중개기관은 채무자와 채권자가 서로를 도울 수 있게 해주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는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중개기관은 채무자가 가족이나 친구를 통해 돈을 빌리는 것보다 좀 더 쉽고 값싸게 필요한 자금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채권자들에게도 돈을 침대 밑에 숨겨놓거나 지인들에게만 빌려주는 것보다 훨씬 낮은 위험과 고수익을 보장함으로써 미래를 위해 저축할 수 있게 해준다. 채권자와 채무자는 서로를 직접 만나진 않지만,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중개기관을 통해 정말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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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금융이 관심과 사랑의 수단이라면, 중개기관을 통한 금융 활동은 하나의 의문점을 낳는다.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리적 거리나 시간을 초월해 서로를 향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의 여러 가지 조직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옥스팜(Oxfam)이나 월드비전(World Vision) 혹은 적십자(Red Cross)와 같은 비정부기구의 직원들과 기부자들은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사랑을 실천한다. 그들이 그 대상을 실제로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기구들을 발전시켜나가는 것 역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된다.[1] 다음과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일정 기간 동안 채무자들이 자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은행에 돈을 맡기는 예금주들도 잘 알지 못하는 채무자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청지기 사명과 사랑 사이에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갈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규모가 큰 중재기관들은 전 세계의 많은 시장에서의 대출 중개 기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청지기 사명을 더욱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현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규모의 지역 중재기관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뛰어날 수 있다. 대규모의 국영은행은 최적의 청지기 사명을 수행할 수 있으며, 소규모의 지역은행은 좀 더 친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우리의 신학은 은행과 고객들이 은행의 규모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이러한 잠재적 장단점에 대해 숙고할 것을 권고한다. 만약 은행이 규모를 키우기로 결정하였다면, 은행은 규모 있는 뛰어난 지리적 청지기 사명을 향한 분명한 목표를 지녀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은행이 계속해서 작은 규모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2] 예금자들 또한 금융 업무를 어디서 할지 결정할 때 이와 동일한 사항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금융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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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상품이란 각각 다른 자원 수요를 지닌 둘 혹은 그 이상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약속으로, 미래가 불확실할 때 당사자들이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게끔 맞춰진 약속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실 때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한 창조 요소와 함께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회적이고, 다양하며, 시간의 지배를 받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배경 가운데 금융상품이 만들어졌다. 금융상품은 예금자와 채무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재기관이 "생산"한 상품으로,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이행하고 의미 있는 방법으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금융상품은 청지기 사명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이유는 이러한 상품들이 특정한 청지기 사명 기회의 리스크, 수익, 그리고 시간적 속성에 따라 맞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대출을 받는 기업이 진행하는 특정 프로젝트의 결과가 불확실한 미래에 달려있다면(다시 말해 리스크가 높다고 한다면), 이러한 리스크를 예견하고 예금주와 채권자가 정확히 필요한 자원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를 돕는 금융상품이 만들어질 수 있으며, 이는 자본상품의 형태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상품은 또한 좀 더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가능하게 한다. 금융상품은 도움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수요에 맞춰질 수 있다. 소규모 기업을 위한 대출은 사업자들에게 사회를 섬길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제공해주는 상품이다. 학자금 대출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육비 충당이 힘든 청년들에게 커다란 기회를 제공해주는 상품이다. 소액 대출을 위한 특별 상품 또한 정의를 실현한다. 계약금이 좀 더 낮은 특화된 주택융자와 국영 보험은 수많은 저소득층에게 내 집 마련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 금융상품은 풍부한 자원을 지닌 사회구성원들이 사회의 빈곤층을 향한 정의를 실천할 수 있게끔 해주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1]

 

   주택담보대출은 금융상품을 통해 가능해진 사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예금자는 채무자의 가족들이 번영할 수 있는 물리적 장소를 얻을 수 있도록 채무자를 도와준다. 그 대가로, 채무자는 예금자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생계를 이어나갈 정도의 생산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노후를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창조 계획 속에서 인간이 금융상품을 개발함으로써 이렇게 의미 있고 유용한 방식으로 인류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임을 예상하셨다. 물론 채무자와 예금자는 서로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기에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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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시장에서의 가격은 금융상품에 대한 예측 수익률로 표현되며, 채권상품에서는 이자율로 일컬어진다.[1] 그렇다면 정확히 왜 채무자와 예금자가 수익률 혹은 이자를 지불하거나 받겠다고 합의하는 것일까? 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일부일까? 우리는 그렇다고 보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를 채무자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채무자는 빌린 자원으로 미래에 더 많은 자원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자를 낼 의향과 능력을 나타내 보인다. 이러한 생산적 기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 예로 채무자가 건강히 지낼 수 있는 주거지를 얻는 것, 곡식을 기르기 위해 씨앗을 심는 것, 교육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는 것, 도로를 닦고 공장을 세우는 것, 또는 유용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구매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시한과 생산적 기회들은 둘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에 포함된다. 이는 이자율의 기초를 구성하는 중요 토대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다.

 

   토대의 나머지 절반은 채권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해보자. 채권자는 두 가지 이유로 특정 미래 시점까지 일부 자원에 대한 접근을 포기할 의향을 보인다. 현재 채권자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원보다 더 많은 자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예컨대 은퇴를 하는 상황처럼 채권자가 추가적인 자원을 필요로 하는 때가 올 것이다. 따라서 채무자가 일정 기간 동안 자원을 사용하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돌려주는 행위는 이치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채권자는 일정 기간 동안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적어도 자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차선책을 선택했을 때만큼의 보상은 받길 원할 것이다. 채권자가 현 시점에 소비를 지양하고 미래의 노후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유한하고, 시간에 구속받는 존재로 만드신 것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산적 기회와 인간의 소비 욕구는, 앞서 다룬 금융의 여덟 개의 기초와 함께 금리의 토대를 형성한다. 금리는 인간이 고안해낸 이상한 발상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제도이다. 더욱이 가격이 잘 매겨진 금리는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으며, 상호적으로 이득이 되는 자발적 교환의 결과가 될 것이다.

 

   금리는 청지기 사명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가격 장치는 자원 수급과 관련된 결정을 명료하게 내릴 수 있도록 해준다. 만약 여러분이 이자를 지불한다면, 미래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경우에만 대출을 받고자 할 것이다. 이자로 인해 오늘 사용한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내일 갚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순히 좀 더 여유롭게 살기 위해서 돈을 빌리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이자 체계는 금융자원에 대한 청지기 사명을 시간에 따라 잘 이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이런 장치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명령의 "보살핌"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긍정적인 금전적 수익을 내는 모든 프로젝트가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살피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금리의 맥락에서 일하는 금융 종사자들의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금리는 자원의 정당한 재 배분을 용이하게 하며 이를 촉진시킨다. 금리는 자원을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이에 따라 채권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제공하겠다고 단순히 합의함으로써, 자원이 없는 사회 구성원들이 자원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금리를 통해서 자원의 배분은 자발적으로 합의될 수 있으며, 상호 이익이 될 수 있다. 금리는 당사자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금융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해준다. 금리가 없다면(즉, 제로금리라면), 금융 활동은 대출을 해주는 사람들이 대출을 받는 이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제공해주는 선물이 된다. 금리가 없다면 채무자는 채권자의 자원을 공짜로 얻고자 시도할 것이다. 마치 구걸을 하는 행위처럼 보이는 이러한 방식은 아마도 정의를 실현하는 최상의 방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전능하고 창조적이신 하나님께서는 지속 가능하고 상호적으로 이득이 되는 자발적 활동을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만들어 내셨으며, 우리가 금리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시장교환을 진정 사랑으로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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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격이라는 문제는 사랑의 한 형태로서의 금융에 대한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시장 가치—교환 관계 속에서 과연 사랑이 표현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와의 관계를 통해 이득을 얻고자 한다면, 둘 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위를 하는 것일까? 둘째, 대부분의 금융 거래가 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이렇게 개인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또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격이 매겨진 상품의 판매를 통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앞에서 다루었듯이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번영하기를 바라는 목적 그 자체로 상대를 인간으로 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해보자. 따라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사람은 특정 가격에 재화와 용역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번영을 늘 돕는다. 농부들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판매할 때, 이들은 소비자들의 번영을 돕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음식에 대한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말이다. 좋은 교사가 월급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는 단순히 이들을 용병들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현대 경제에서 대부분의 일은 보수를 받으며, 일을 통해 생산된 재화와 용역은 특정 가격에 판매된다. 만약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사랑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라면, 사실상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시중 금리를 따르는 금융이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까? 이는 교육이나 농산물과는 달리 돈이 가치화되지 않는 상품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농부는 좋은 농산물을 판매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채권자가 좋은 돈을 빌려줌으로써 사랑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이다. 물론 돈 자체는 다른 돈과 비교해서 더 좋거나 나쁠 수 없다. 하지만 대출을 해주는 상황, 조건, 계약 사항 등을 통해 채권자와 채무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대출기간, 상환 조건, 담보 조건, 위약금, 보험, 인플레이션 보호 등 수많은 조건들이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정될 수 있다. 소득 증명, 자산 평가, 실사, 융자 서류에 대한 이해도, 공정한 정보의 이용 가능성 등, 대출을 받는 것과 관련된 다른 요소들을 통해서도 배려와 존중이 실천될 수 있다. 또한 은행의 위치와 이용 편의성, 대출 담당자, 금리 비교, 지역사회 참여, 광고 등과 같은 다른 요소들도 취약한 공동체 발굴에 기여할 수 있다. 생산성, 제품 교육 등을 위해 대출금이 소비되거나 투자되는 경우, 이에 대한 신용 상담이나 배려 있는 대화를 통해 채무자에게 해가 되는 대출을 예방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다. 주식거래에서는 시장 개방성, 재무제표의 정확도,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정직함 등이 투자자들에게 존중과 배려로서 다가올 수 있다. 비록 돈 그 자체는 어느 채권자의 손에서든 동일한 모습을 띠지만, 보살핌과 존중, 즉 사랑의 정도는 크게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택담보대출을 해주는 사람은 저소득층 가정이 주택을 세내지 않고 구매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만약 주택, 이자율, 대출기간, 소득 증명 등 모든 요소들이 제대로 취급되기만 한다면, 이는 재산을 갓 축적하기 시작한 가족에게 엄청난 혜택이 될 수 있다. 이는 또한 돈을 대출해주는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들, 가령 은행 예금자나 연금기금 등에도 이득이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사업의 규모를 키우는 데 필요한 자본을 얻기 위해 기업공개를 할 수 있도록 투자은행이 어떤 기업을 도와줄 때, 그 투자 은행도 해당 기업의 미래 고객들과 직원들, 협력업체, 공동체, 그리고 주식을 매입하는 주주들에게 일종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시중금리 거래들은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거래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을 지키고 이행함으로써 실천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은 법적으로 강요되는 사항이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법을 초월해 상대방의 최고 이익을 위해 행동함으로써 시장 거래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거나 마땅히 그래야 하는 상황, 혹은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에 이득이 주어지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는 상대방의 번영 자체를 최종 목표로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재화나 용역 시장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의료 서비스를 생각해보라. 금융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거의 —아니, 모든— 시장 거래는 이러한 종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으며, 많은 거래들이 이미 이를 행하고 있다.

 

성경은 이자 책정을 금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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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질문은 금융 가격을 —특히 이자와 같은 것을— 성경이 금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이자를 받거나 담보를 잡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들의 적용을 놓고 토론을 벌여왔다.[1]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 예이다 :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신23:19-20)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려면, "공공의 선을 위한 자산 사용 (신23:1-24:13)", "대여와 담보 (출22:25-27)", "안식년과 희년 (레25장)", "의인은 선불이자나 변리이자를 받지 않는다 (겔18.8상)", "의인은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에게 저당물을 돌려준다 (겔18:5,7)" 같은 부분을 참조하라.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사회에서 이자가 본질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고, 금리와 담보와 같은 대출 관행들을 통해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가난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우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금융은 청지기 사명과 관심, 그리고 존중을 나타내는 수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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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금융제도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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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의 우리의 신학을 요약해보자. 우리는 금융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창조물에 대한 청지기가 되도록 하며, 정의와 사랑을 가능하게 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금융의 토대를 창조하셨고,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네 가지의 특정 제도를 세우도록 하셨다는 것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런 제도들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청지기 사명과 하나님의 정의 및 사랑 명령을 이행할 수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러한 틀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청지기 사명과 정의, 그리고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살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