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개기관을 통해 정말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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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금융이 관심과 사랑의 수단이라면, 중개기관을 통한 금융 활동은 하나의 의문점을 낳는다.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리적 거리나 시간을 초월해 서로를 향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의 여러 가지 조직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옥스팜(Oxfam)이나 월드비전(World Vision) 혹은 적십자(Red Cross)와 같은 비정부기구의 직원들과 기부자들은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사랑을 실천한다. 그들이 그 대상을 실제로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기구들을 발전시켜나가는 것 역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된다.[1] 다음과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일정 기간 동안 채무자들이 자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은행에 돈을 맡기는 예금주들도 잘 알지 못하는 채무자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청지기 사명과 사랑 사이에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갈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규모가 큰 중재기관들은 전 세계의 많은 시장에서의 대출 중개 기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청지기 사명을 더욱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현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규모의 지역 중재기관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뛰어날 수 있다. 대규모의 국영은행은 최적의 청지기 사명을 수행할 수 있으며, 소규모의 지역은행은 좀 더 친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우리의 신학은 은행과 고객들이 은행의 규모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이러한 잠재적 장단점에 대해 숙고할 것을 권고한다. 만약 은행이 규모를 키우기로 결정하였다면, 은행은 규모 있는 뛰어난 지리적 청지기 사명을 향한 분명한 목표를 지녀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은행이 계속해서 작은 규모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2] 예금자들 또한 금융 업무를 어디서 할지 결정할 때 이와 동일한 사항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