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한 재물도 여전히 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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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부의 축적이 부당함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물을 정당한 방법으로 얻었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많은 성경 구절은 독자들에게 재물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들면서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부유함은 온갖 종류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부는 교만과 오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잠28:11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이처럼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믿기 쉽다. 에스겔은 두로의 왕에게 이렇게 경고하지 않는가.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겔28:5)

 

   두 번째로, 재물은 종종 자족감, 안일함, 그리고 잘못된 안도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호12:8에서 볼 수 있는 에브라임의 자만이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서는 호세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을 묘사하며 굉장히 안타까운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먹여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13:6). 예수님께서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시면서, 재물이 우리에게 주는 그릇된 안도감의 위험에 주목하신다(눅12:13-21). 우리는 배가 부르고, 삶이 평온하며, 미래가 보장되었다고 느껴질 때,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

 

   세 번째, 재물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주변 이웃들에게서 우리의 관심을 거두고,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막는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이야기해주셨다(눅16:19-31). 나사로라는 거지가 어떤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굉장히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부자는 나사로의 고통에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과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계속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부자는 죽어서까지 자신만의 필요를 채우는 데만 집착하며 나사로를 여전히 하수인 취급하고 있다.

 

   네 번째는 우리가 그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빠지기 쉬운 것으로, 재물의 유혹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음을 둘로 나눈다. 다음은 돈이 지닌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이다. 시편 기자는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62:10)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재물의 위험은 신명기 8:12-17에서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설명되고 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잠언 30장에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30:8-9)

 

   이러한 재물의 위험은 신약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에서 주님의 생각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여기서 재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단어는 맘몬(mammon)이다. NIV 성경과 같은 일부 번역본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물을 신으로 표현해 하나님과 대적하는 관계로 나타냈다 해서 이를 대문자로 쓰기도 한다. 하나님과 재물은 모두 충성과 찬양을 추구한다. 부는 중립적이지 않다. 재물은 만족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만약 재물을 조금 얻었다면,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이 갖고 싶어진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 청년과 만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19:23-24)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위험한 것으로 보신다. 이는 마치 다이너마이트와 같아서 굉장히 선하게 쓰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큰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질수록, 그에 따르는 위험 또한 같이 커진다.

 

   다섯 번째로, 공급하심과 부를 얻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키울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더 많은 부를 갈망하게 된다. 질투와 탐욕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이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면서 생겨난다. 우리는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쉽게 조종당할 수 있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1929년 경, GM의 간부였던 플로이드 앨런(Floyd Allen)은 사뭇 직설적으로 말했다. "광고란 사람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것을 원하도록 만드는 사업이다."[1]

 

   최근에는 사회학자 버나드 맥그레인(Bernard McGrane)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광고에는 이런 메시지가 숨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모습은 문제가 많다. 이거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니 당신은 도움이 필요하다. 당신은 구원이 필요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광고는 끝없는 자기비판과 온갖 종류의 걱정을 하도록 종용하고 있으며, 그런 다음 ‘구원’을 위해 필요한 소비재를 모든 사람들에게 권한다. 우리가 절대 접할 수 없는 광고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광고다. "당신은 괜찮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당신 자신이 되어라.”[2]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갈망하도록 우리의 욕구를 훈련시켜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인지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작업이다. 다음 구절처럼 야고보 또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2-3)

 

   여섯 번째, 우리는 미래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재물에 대해 근심하고 걱정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많이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이러한 걱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걱정을 키워간다. 기본적으로 생계에 필수적인 재물보다 더 많이 지니게 되면 혹시라도 재물을 잃을까봐 근심하는 마음 역시 커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충분한 부를 갖지 못할까봐 두려워 불필요하게 오랜 시간 일하면서 자녀들에게 최신 기기나 화려한 옷을 사주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실제로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관심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또 다른 이들은 노후를 위한 자금을 충분히 마련해놓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현 시점에서 하나님과 이웃들을 섬기는 일이나,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 또는 균형 잡힌 삶을 희생하면서 미래를 위한 자금을 준비하고자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어떤 투자항목이 과연 안전한지 걱정하거나, 또는 어떻게 자신들이 원하는 집 또는 차를 마련할 것인지 꿈꾸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은 근심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걱정 때문에 사람들은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사기도 치고, 정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우정을 희생하거나 그들의 가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급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은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 마태복음 6에서 생계를 겨우 이어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이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이는 예수님께서 굉장히 강하게 주장하신 말씀이다. 만약 미래의 경제적 상황이 불투명하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토머스 라이트(N.T.Wright)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본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삶을 이끌어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3] 따라서 만약 "그러한 점에 있어 하나님을 정말로 의지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적어도 단 한 명은 그렇게 믿었다고 답할 수 있다.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