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전환(골3:1-16)

아티클 / 성경 주석

   방향 전환이란, 예수님께서 한 번도 접해 보지 않은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시하신 윤리 기준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 삶을 재편하는걸 뜻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되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예수님께서 구체적인 답을 주시지 않는 문제들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바울이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라고 말할 때, 이것은 집에 페인트 칠하는 것보다 기도하는 걸 우선하라는 뜻인가? 더 나은 크리스천이 되려면 일 생각은 점점 적게 하고, 수금과 천사들과 구름에 관해서 점점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가?


   바울은 이런 것들에 대한 설익은 생각을 하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골로새서 3장 1-17절에서 그는 ‘위의 것을 생각하라’(골 3:2)는 말의 의미는 이 땅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하는 활동들을 철저하게 해 나가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우선순위를 표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땅의 것을 생각하고 사는 삶은 스스로 높아져 하나님과 그분의 길을 대적하는 세상 시스템의 가치대로 사는 것이다.


   “땅에 있는 지체를”(골 3:5) 죽인다는 건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그것은 영성 훈련을 위해 고행자가 걸치는 거친 옷을 입거나, 찬물로 목욕재계하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몸을 괴롭게 하는” 것(골 2:23)은 죄를 그치게 하는 데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먼저 그것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우상숭배인] 탐심”을 죽이라는 뜻이다(골 3:5). 우리는 성적 부도덕(천박한 성생활이 개선된 삶을 가져다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 탐심(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 더 많은 생명을 누릴 거라는 생각)에서 돌아서라는 부름을 받고 있다. 당연히 그런 부름은, 실제로 성적욕망을 채워 줄 적절한 장소가 있으며(남자와 여자 간의 결혼),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구의 적정선(하나님에 대한 신뢰, 부지런히 일함, 이웃에게 너그러이 베풂,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감사로부터 나오는 것)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8-10). “서로”라는 말에서 바울이 교회에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뜻일까? 아니다. 바울은 행위 변화뿐만 아니라 마음과 뜻의 변화도 말하는 것이다. “새 사람”을 입어 놓고 어떻게 된 일인지 비신자들을 대할 때는 옛 사람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일단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렸다’는 것은 그런 것들이 다시 되돌아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악함 가운데 세 가지가 특히 직장과 연관되어 있으니, 탐심, 분노, 그리고 거짓말이다. 이 세 가지 악은 합법적인 사업을 해 나가는 중에도 나타날 수 있다.

 

  •  탐심은 아무런 제재 없이 부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업 이윤을 내고 비영리 기관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은 적절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윤 추구라는 욕망의 경계선이 없어지거나, 충동적으로 변하거나, 도를 지나치거나, 또 개인적 이익의 추구로 좁혀지면, 죄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  분노는 갈등이 일어날 때 나타난다. 어떤 직장에서든 갈등은 일어나며, 그렇기 때문에 자세히 검토하고 또 해결해야 한다. 만약 갈등을 공개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분노와 노여움을 해소하지 못해 결국 악의로까지 변형돼 죄가 자리를 잡고 만다.

  •  거짓말은 회사에 대한 전망이나 제품의 이점들을 부정확하게 홍보하는 데서 올 수 있다. 모든 기업은 현재 자사 제품과 서비스 및 회사의 조직을 넘어서는 비전을 갖는 게 당연하다. 영업 판촉물에는 자사 제품의 최고 · 최선의 사용 상태를 명기하지만, 그와 더불어 그 제품의 한계점도 경고해 두어야 한다. 주식 공모 안내서는 공모가 잘 되었을 경우 그 회사가 무엇을 이루고 싶어 하는지를 기술하되, 동시에 회사가 직면할 수 있는 위험도 기술해야 한다. 만약 제품과 서비스 그리고 회사나 개인을 비전이 창창한 것처럼 제시해 보이고 싶은 바람이 속임의 선을 넘어설 경우(위험 대 보상, 방향성의 오류를 균형 있게 기술하지 않거나 조작을 목적으로 하거나 거짓말로 기술할 경우) 그때는 다시 한 번 죄가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바울은 올바른 미덕이 언제 사악함으로 타락하는지 진단하는 보편적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크리스천은 자신들이 처하는 특정 상황에서 그렇게 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한다.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옛 사람을 “죽일 때”(골 3:5)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되길 바라시는, 곧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지으시는(골 3:10) 사람들로 옷 입는다. 자신의 자아를 숨긴 채 기도하고 예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기도하고 예배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전임으로 이런 일들을 하라고 부름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덕인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골 3:12)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서로 용납하라’(골 3:13)는 바울의 권면은 용기를 주는 말이다. 대부분의 영역본 성경이 “bear with one another”(서로 참아 주라)로 번역하지만, 이런 번역은 바울이 말하는 요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 본래 교회 안에는 우리가 같이 잘 지내기 어려운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고, 직장에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바로 그 말을 하는 것 같다. 우리의 관심사와 개성들이 너무 달라서 본능적인 유대관계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간에 우리는 그들을 용납한다. 그들의 유익을 구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고, 자꾸 짜증나게 하는 그들의 성벽을 견딘다. 바울이 자기 서신들에서 칭찬하는 많은 성품들은, “그 사람은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잘 어울린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팀 플레이어’가 되는 것은 단순히 이력서에다 자랑하기 위한 상투어가 아니다. 그것은 크리스천의 근본 미덕이다.
 

  •  옛것을 죽이고 새것을 입는 것은 둘 다 우리의 일상 업무와 엄청난 관계가 있다. 크리스천들은 죽어 가는 세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여 주어야 하며, 직장은 어쩌면 그런 유형을 보여 주는 모습이 일어날 수 있는 주 무대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크리스천도 일을하다 많은 직장에 스며들어 있는 험담이나 불평에 가담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걸쭉한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직장에나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거짓말을 하는건 아니지 않은가?

  •  어떤 직장이든 불공평한 정책, 나쁜 상사, 제 기능을 못하는 업무 처리 과정, 그리고 형편없는 의사소통 채널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단점들을 불평하는 것이 중상모략은 아니지 않은가?


   바울은 타락한 직장 안에서조차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땅의 지체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입는 것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정면으로 직접 마주하는 것이지, 등 뒤에서 그들을 험담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마 18:15-17). 직장 내에서 일어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일하고, 그런 일들이 생겨도 용서하라.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하면서, 왜 사람들에게 ‘거룩한 소리만 늘어놓는 따분한 기독교인’이라는 오해를 사 거부당할 위험부담은 감수하지 않는 거죠?” 크리스천들이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드러내기 위해 아예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고 무리에 섞이지 않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다. 직장 동료들은 이런 의도를 단박에 알아차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약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하는 대신 정말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자기 곁에 있어서 행복해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누군가가 적어도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골 3:12)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는 사실에 몰래 또는 공개적으로 감사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속임수를 거부하는 크리스천 일꾼들은 (잘못을 호도하는 광고 카피를 거부하거나 또는 과장된 다단계식 사기수법을 좌절시키거나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직성 때문에 적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증권거래위원회(SEC; 미국 증시를 감시 감독하는 정부 직속 기관 - 편집자 주)가 사무실 문을 노크할 때 몇몇 동료들은 예수님을 새로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