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에 대한 지시 (엡5:21-6:9)

아티클 / 성경 주석

   두 번째 실질적인 주제는 관계다. 크리스천으로의 부르심은 우리의 기본 관계, 특히 가정과 직장 내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산업시대 이전에는 한 가정이 가족생활의 터전이면서 동시에 일의 터전이기도 했다.) 에베소서 5장 21절부터 6장 9절은 아내와 남편, 자녀와 아버지, 종과 상전 등 한 가정 내에서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포함함으로써 이 요점을 강조한다. 이런 종류의 목록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도덕적 담론에서는 일반적이었고, 신약에서도 나타나 있다(골 3:18-4:1; 벧전 2:13-3:12).6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루는 에베소서 6장 5-9절을 주의 깊게 보자. 바울은 신앙을 가진 상전들에게, 크리스천 상전들 밑에 있는 종들(slaves)에게, 그리고 믿지 않는 상전들 밑에 있는 종들에게 말한다. 이 본문은 골로새서의 병행 구절(골 3:22-4:1)과 아주 유사하다. 에베소서의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1세기 로마제국의 노예제도에 관한 역사적 배경은 이 책 5장을 보라. 

 

   간단히 요약하면 로마의 종(노예)과 21세기의 임금 근로자를 비교했을 때 유사점과 차이점이 모두 있다. 가장 큰 유사점은 고대 노예나 현대 근로자들 모두 주인이나 감독관의 권위하에서 일한다는 것이다. 일 자체와 관련해서 보면 두 집단 모두 자신의 일에서 감독하는 위치에 있는 자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고대 그리고 현대 노예들 모두 일뿐만 아니라 삶까지도 주인에게 예속돼 있다는 것이다. 노예는 그만둘 수가 없으며, 법적인 권리와 부당처우에 대한 해결책이 제한되어 있고, 일에 대한 급여나 보상을 받지 못하며, 근로 조건에 대한 협상의 여지가 없다. 요약하자면, 노예들에 대한 주인들의 권력 남용이 근로자들에 대한 감독관의 권력 남용보다 그 범위가 훨씬 더 넓다.


   우리는 에베소서의 이 본문이 실제 노예들에게 적용된 것을 먼저 살펴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오늘날의 발전된 경제에서 지배적인 직업 형태인 임금 근로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을 고려해 보고자 한다.

The Anchor Bible Dictionary(New York: Doubleday, 1992)에 실린 데이비드 노엘프리드먼이 쓴 “Haustafeln” and “Household Codes”를 보라.

‘진정한 주인’을 섬기는가 (엡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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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는 종들에게 그들의 인간 주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열심으로 섬기는 그리스도의 종들’로 스스로를 바라보라고 권면한다(엡 6:6-7). 그들이 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은, 일을 열심히 그리고 잘 해낼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말은 당신의 상전이 선을 행하라고 명령할 때 위안이 된다. 종의 경우에는 늘 그렇듯(눅 17:8) 주인이 보상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상을 주실 것이다(엡 6:8).


   그러나 이 땅의 주인을 위해 종살이를 하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가?(엡 6:6) 분명히 주인은 종에게 다른 종을 학대한다든가, 고객을 속인다든가, 다른 사람의 밭에 몰래 침입하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한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종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만 자기 주인들을 위해서 할 수 있다. 만약 주인이 종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한다면, 종은 주인의 명령을 거부해야 하기 때문에 이 경우 바울의 말은 정말 힘든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명령 거부는 달갑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명령은 피할 수가 없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

 

  주님의 명령은 어떤 주인의 명령보다 우선한다. 실로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와 상충하는 모든 명령들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성실한 마음으로”(엡 6:5)라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누구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마 6:24). 지상의 주인에게 불순종함으로써 받는 처벌은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주께 하듯”(엡 6:7) 하기 위해서 그런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한 분을 섬긴다 (엡6: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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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이 종에게 주인과 그리스도 가운데 누구에게 순종할지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인들에게 그들의 종에게 하는 위협을 그치라고 말한다(엡 6:9). 만약 당신이 종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령했다면, 위협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종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했다면, 당신이 가하는 위협은 마치 그리스도에 대한 위협과 같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이 땅의 상전들은 그들에게도 하늘의 상전이 계신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종과 상전들 모두 ‘같은 상전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엡 6:9). 이런 이유 때문에 상전들은 ‘자신의 종들에게도 똑같이 하라’(엡 6:9)고 에베소서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종들에게 명령할 때 마치 주님께 또는 주님을 위하여 명령하듯 하라는 말이다. 이를 따른다면, 어떤 크리스천 상전도 종에게 악한 행위나 심지어 지나친 일도 명령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이 땅에서의 종과 주인의 구별은 그대로일 수밖에 없지만, 이들의 관계는 유례가 없는 상호협력하라는 부르심 덕분에 변화되었다. 양쪽 다 “성실한 마음으로”(엡 6:5) 주님께만 복종해야 한다.

 

  양쪽 다 상대를 지배할 수도 없다.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기 때문이다(엡 6:7). 어느 쪽도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 이 단락은 노예제도의 경제적 · 문화적 실체를 수용하고 있으나, 동시에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풍성한 씨앗을 품고 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종도 자유인도 없다’(갈 3:28).


   오늘날은 노예제도를 흔히 인신매매 또는 강제노동으로 부른다. 그런데도 여전히 노예제도가 번창하고 있다. 에베소서의 전반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6장 5-9절의 내면적 논리는 노예제도의 종식을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전으로서든 종으로서든 개인적으로 노예제도를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권위를 갖는 직장관계 안에 놓여 있다. 에베소서 6장 5-9절은 비유를 통해 상사와 직원 모두에게 명령하라고 가르치며, 그리스도에 의해 또는 그리스도를 위해 행해질 수 있는 일만 행하고 보상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선을 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항상 쉬운 건 아니지만 문제는 간단하다. 상사, 고객, 감독관, 또는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보상이나 칭찬을 해주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가진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악한 일을 하라는 지시를 받으면, 상황은 훨씬 더 복잡해진다. 바울은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이 땅의 상전들에게도 복종하라.” 그리스도께 경솔하게 불순종할 수 없듯이,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에게도 경솔하게 불순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내부 고발, 파업, 규제 당국을 향해 하는 항의 등이 크리스천 근로자들로서 정당한 행위인가? 견해나 판단의 차이 자체가 정당한 명령에 불순종할 충분한 명분은 되지 못한다.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상사가 나한테 이 일을 하라고 하는 건 불공평해’라는 생각과 ‘내가 이 일을 하는 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야’라는 생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 땅의 주인들에게 복종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이 내린 지시를 이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을 만한 강력한 이유가 없는 한, 단순히 불공평하다거나 부담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지시에 불순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이 땅의 상전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방식으로 하라고 덧붙인다. 성경의 명령이나 가치와 상충되는 등,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라는 지시를 받는 경우, 우리의 더 높으신 주인(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인간 상사가 내린 경건치 않은 지시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 점도 분명하다. 그런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누구의 이익이 관철되는지가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된다. 만약 불순종하여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더 큰 공동체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면, 그때는 불순종해야할 더욱 강한 명분이 생긴다.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불순종이 우리의 경력에 치명적이거나, 더 심할 경우 생계마저 위협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바울이 우리에게 “주 안에서 …… 강건하여지고 ……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0-11)라고 권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경건하지 않은 명령을 순종하거나 아니면 해고와 같은 개인적 손해를 감당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 때로는 우리 자신들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이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진정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표하는 바다. 특히 경제적 사다리의 가장 아래에 있어 다른 대안이나 재정적 완충장치가 거의 없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근로자들은 일상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졸렬하고 악한 행위를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가령 “나 사무실에 없다고 해 줘” 등의 거짓말, “16번 테이블 손님들 많이 취해서 눈치도 못 챌 테니 주문 안 한 술 한 병 더 가져다 놔” 같은 속임수, “이 일이 이 세상에서 자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고 해 주길 바라네” 같은 우상숭배 등의 명령이다. 이 모든 명령들을 우리는 모조리 거부해야 할까?

 

  어떤 경우에 근로자들은 정말 심각한 악행을 저지르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우리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름에 먹칠을 해 버린다고 협박해!”라든가, “그 사람이 가짜 품질 평가 기록을 찾아내기 전에 그를 해고시킬 명분을 찾아봐!” 또는 “오늘 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강에다 쏟아 부어 버려!” 같은 명령을 받을 수 있다.

 

  직업을 잃고 우리 가족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쪽을 택하는 것은 경건치 않은 명령을 따르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일처럼 느껴지고 또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어떤 선택이 성경적 가치에 더 또는 덜 부합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우리는 그런 결정이 상당히 복잡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잘못된 일을 하라는 압박을 받을때,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강하게 악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직장 내에서 모든 악을 다 이겨 내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되면, 우리는 이에 대해 그리스도의 긍휼과 용서의 말을 건넬 필요가 있다.


   권위를 가진 당사자라면,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실 법한 일만 지시해야 한다. 우리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부하 직원들에게 그들 스스로나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가하는 명령은 하지 말아야 한다. 선한 양심을 가졌다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라고 명령해서는 안 된다. 양심이나 정의에 근거해 우리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협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누군가의 상사라 하더라도 우리 역시 위에 상사가 있으며, 권위를 가진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철저한 의무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그리스도에 반하는 방향으로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반대로 복종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직장에서의 직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우리 각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거나 반대로 거스르는 방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