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 (마3-4장)

아티클 / 성경 주석

   마태복음 2장과 3장 사이에 거의 3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서 예수님의 진짜 신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군중에게 계시했다(마 3:17).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뒤 예수님은 (시험에 실패했던 아담이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이겨 내신다(마 4:1-11).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에 대해서는 이 책의 3장 “눅 4:1-13” 부분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다가올 나라의 아주 오래된 뿌리, 원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의 ‘이스라엘’을 미리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나라가 갖는 혁명적 측면, 즉 타락한 세상의 임금을 이기고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도 볼 수 있다.
 

   일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즉시 아담에게 할 일을 주셨다(창2:15). 구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도 할 일을 부여받았다(출 20:9). 따라서 예수님도 근로자였다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마 13:55). 예수님의 세례받으심, 광야 시험, 공생애 전 목수로서 노동하셨던 경험 등은 이제 그분이 시작하려 하는 공적인 일(사역)을 준비한 것이었다(마 4:12).
 

   여기서 우리는 소명의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첫 단락을 접한다. 천국이 오고 있다는 것을 전파하기 시작한 직후에 예수님은 최초의 네 제자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신다(마 4:18-21). 다른 이들도 나중에 그 부름에 응답해 결국 열두 명의 제자가 됐다. 이 열둘은 그분의 친밀한 제자들이요, 새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리더로 처음 부름받아 따로 구별 된 무리였다(마 10:1-4; 19:28; 엡 2:19-21). 그 열두 명의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갈릴리 지역을 다니기 위해 각자 자신의 기존 직업과 수입, 관계를 다 떠날 것을 요구받았다.[개인적 · 가족적 · 사회적 희생을 요구한 것에 대한 논의는 이 책 2장의 “막 1:16-20” 부분을 보라] 이들 외의 다른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안전할 것이라는 희망이나, 가족 간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 갈지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를 부르신 것은, 앞으로 마태가 세금 거두는 일을 포기하게 될 것을 암시했다(마 9:9).[3]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르심이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설교자나 목사나 선교사가 되는 걸 의미하는가? 이 본문은 제자가 되려면 그물과 배, 톱과 끌, 급여와 이윤을 내던져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대답은 ‘아니요’(No)다. 이 본문은 당시 갈릴리 바닷가에 있던 네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묘사할(describe) 뿐이다.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똑같이 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는(prescribe) 게 아니다. 열두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건, 떠도는 자기 스승과 함께 다니기 위해 자신의 직업이나 가족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무수히 많은 직업 가운데 군 복무나, 원양어선 근무, 또는 외교관처럼 열두 제자와 비슷한 희생이 요구되는 직업이 있다. 동시에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라고 해서 모두가 다 그분을 따르기 위해 자기 직업을 그만두진 않았다는 것도 우리는 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집에 남아 있고, 직업을 그대로 가지고 있던 사람도 많았다. 예수님은 자신과 일행에게 식사나 숙박을 제공하고, 재정 지원을 해 주는 그들의 능력을 이따금 활용하셨다. 예를들면, 마가복음 14장 3절의 나병 환자 시몬, 누가복음 10장 38절과 요한복음 12장 1-2절의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 등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종종 예수님께서 그들이 속한 지역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도록 도왔는데, 그런 일은 함께 여행하던 제자 일행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삭개오 역시 세리였다(눅 19:1-10). 세리로 살던 삭개오의 인생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히 바뀌었지만, 그의 직업을 버리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본문은 우리가 하는 일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더 심오한 진리로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직업을 포기하지는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목적에 반하는 시스템이나 사람이나 우리 자신에게 충성하는 것은 포기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요원이다. 우리는 우리 직장에 남을 수 있다. 하던 일을 그대로 수행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로운 나라, 새로운 주인을 섬기기 위해 그 일을 받아들인다. 여전히 월급을 집에 가져다주기 위해 일하지만, 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우리 주인이 하셨던 것처럼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일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께 헌신한 것 때문에 당신이 사람들을 섬길 때 ‘당신은 그리스도를 섬기게 된다’(골 3:24).

   이것은 처음에 얼핏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다. 우리는 하던 일을 그대로 하라는 도전을 받는다. 가능한 한 우리는 창조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구속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든지, 사람들을 성공하게 하는 일을 하려고 애써야 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사람들의 꿈을 지지해 주고, 우리 주변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해야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우리 일을 바꿀 수도 있고 바꾸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는 확실히 바꾼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무엇보다 그분을 섬기기 위해 일한다. 그렇게 우리의 일하는 방식, 특히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 세상의 옛날 임금이 하던 방식이 유린과 차별과 압제와 사기와 보복이었다면, 새로운 왕의 방식은 긍휼과 공의와 진실과 자비다. 이제 옛 방식은 우리가 하는 일에 더는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것은 보기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앞으로 마태복음 5-7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새로운 방식에 요구되는 삶과 일의 방식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께서 잠재적으로 제자가 될 사람에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마 8:18-22)라고 하신 지시에서 우리는 급진적인 삶의 변화에 대한 동일한 요구를 본다. R. T. 프란스(R. T France)가 The Gospel of Matthew, New Internatinal Commentary on the New Ta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2007), 331쪽에서 말한 것처럼 “천국은 분명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리듬을 기꺼이 중단하려는 어느 정도의 광신을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