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출20:1-17)

아티클 / 성경 주석

   십계명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 뜻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므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십계명을 수백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열 가지 계명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토라 전체를 집대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 모든 토라는 십계명에 근거를 두므로 실질적으로 우리는 십계명에서 모든 율법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으로 율법을 요약했을 때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나머지 율법과 일치할 수밖에 없음을 표현하신 것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십계명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지칭됐다.

 

   십계명과 나머지 율법의 근본적인 일치와, 신약과의 연속성은 우리가 성경 전체를 조명하며 십계명을 현대 직업 현장에 적용해 보도록 초청한다. 다시 말해 십계명을 적용할 때 우리는 신구약에 나오는 관련 성구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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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계명은 토라에 담긴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 사랑은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에 반응한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셨을 때 드러났다(출 20:2). 인생에서 그 어떤 욕망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커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더 강력한 다른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규칙을 어기고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른 관심사가 돈, 권력, 안정, 명예, 성적 쾌락 또는 여타 어느 것이든 간에 우리의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가짜 신’들은 그 나름의 계명을 갖고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과 불화를 일으킬 것이며, 우리가 가짜 신의 요구 조건에 응하는 순간마다 반드시 토라를 위반하게 된다. 십계명을 지키는 첫 발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은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일과 관련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일이나 그 조건과 열매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길(David Gill)이 말한 대로, “아무도, 아무것도 당신 삶 속에서 하나님이 차지한 중심적 위치를 절대 위협하지 못하게 하라.”[1]

 

   많은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므로, 돈에 대한 과욕은 일과 관련해서 첫째 계명을 어기게 만드는 가장 흔한 위험이 된다. 예수님도 바로 이 위험을 경고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어쨌든 일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우리 욕망을 왜곡시켜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에 지장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할 것, 즉 정치 권력, 재정 안정, 직업에 대한 헌신도, 동료 사이에서의 지위, 탁월한 성과 등이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변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극적인 파국을 맞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인격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한 게 되었다면, 궁극적 관심사가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사람의 평가로 바뀌었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실생활에서 우리는 이렇게 점검해 볼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이 직장에서 사람을 대하는 내 태도로 드러나는지 여부를 스스로 물어보면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만일 우리가 우리 개인 관심사를 직장 상사나 동료에 대한 관심사보다 앞세운다면, 우리는 개인 관심사를 우리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대상, 극복해야 할 장애물,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줄 수단, 우리 진로에 그저 놓여 있는 물체쯤으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우리는 일과 관련된 행위 중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은 것을 열거해 볼 수 있다. 우리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행하는 것,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칠 수밖에 없는 조직 내에서 일하는 것, 너무 오래 일하다 보니 기도 · 예배 · 안식할 시간은 물론 하나님과 더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시간이 없는 것, 우리를 부도덕하게 만들거나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는 것, 술 · 마약 남용 · 폭력 · 성희롱 · 부패 · 무례 · 인종 차별 또는 다른 비인간적인 대우가 우리와 직장 동료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을 파괴하는 환경 가운데서 일하는 것. 만일 이런 위험을 피할 방도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처신이 될 것이다. 새로운 직장을 찾아 나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방도를 찾기 힘들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우리의 일터에서 유지하기 위해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David W. Gill, Doing Right: Practicing Ethical Principles (Downers Grove, IL: IVP Books, 2004), 83쪽. 이 책에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십계명을 적용할 수 있는 자세한 강해가 담겨 있는데, 읽을 때 아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출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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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계명은 우상숭배 문제를 거론한다. 우상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신이며 우리가 고안한 것이 전부인,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런 신이다. 고대 세계에서 우상숭배는 주로 물리적 대상을 숭배하는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이 주제의 초점은 신뢰와 헌신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안녕과 성공에 대한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나님 외의 존재는 우리 소망을 성취할 능력이 없으며,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조종할 의도로 우상을 만들었다가 비참한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결과를 얻은 한 집안의 이야기가 사사기 17-21장에 잘 나와 있다.

 

   일의 세계에서는 돈, 명예, 권력을 잠재적 우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흔한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우상인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일 가운데 우리 역할 속에서 사실상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거나 그것으로 우리 안전과 번영이 확보될 것이라 여긴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된다. 동일한 상황이 준비, 각고의 노력, 창의력, 모험, 부(富), 기타 자원과 우호적인 환경 등 성공의 모든 여타 요소 가운데 있는 상태에서도 사실상 발생할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는 이런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우상숭배가 시작되는 시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자칭 대단한 것을 예배하고자 하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 모든 일에 참으로 거룩한 지혜와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함이다(잠 22:19).

 

   우상숭배의 특이한 점은 사람이 우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일터에서 우리가 우리 권력, 지식, 생각을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할 때 우상숭배의 위험성이 발생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세운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더 이상 적용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더는 귀 기울이지 않거나,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짓밟으려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자신을 우상화하고 있는 것 아닐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출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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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계명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지’ 말 것을 하나님 백성에게 명한다. 이것은 “여호와”(출 3:15)라는 이름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등에도 적용된다. 그릇되게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여기에는 저주, 비아냥,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보다 더 중한 잘못은, 사람이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에게로 거짓되게 돌릴 때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배재한 채 우리 자신의 행위나 결정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크리스천들은 직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기초해서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야”라든가 “그런 일을 당신이 당하는 건 하나님이 당신에게 벌을 주고 있기 때문이야”와 같은 말은 매우 위험하다. 신앙 공동체의 지지나 분별 없이 개인의 입에서 나올 경우, 대개는 근거가 전혀 없다(살전 5:20-21).

 

   이에 비춰 보건대, 전통 유대인이 하나님(the divine)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영어식 표현인 “God”도 사용하기를 꺼려 하는 지혜는 크리스천도 일면 본받을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 조금이라도 더 신중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주장을 펼 때 더 조심하고 특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셋째 계명은 사람의 이름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요 10:3)하시는 선한 목자는 만일 다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거나 그들을 불경스런 호칭으로 불러서도 안 된다. 다른 이에게 저주를 퍼붓거나 창피를 주거나 그들을 억압하거나 배척하거나 편취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는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거나 고마움을 표하거나 그들과 유대감을 다지거나 환영할 때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좋게 사용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외워서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축복이 된다. 그 사람이 무명이나 보이지 않거나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당신은 쓰레기통을 비워 주는 사람, 고객 상담 전화를 받는 사람, 버스 운전기사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비록 이런 예가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출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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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은 출애굽기와 구약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과 실생활에서도 복잡한 문제다. 이 계명의 앞부분은 일주일에 하루는 노동하기를 쉬라고 명령한다. 출애굽기 중 안식일에 관한 내용은 16장(만나를 거두러 나감), 23장 10-12절(안식년 및 매주 안식의 목적), 31장 12-17절(안식일을 어길 때의 형벌), 34장 21절과 35장 1-3절에 나와 있다. 고대 세계에서 안식일은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이었다.

 

   다른 고대 국가 사람은 일주일에 하루씩 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안식일을 지키려면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을 온전히 신뢰하는 게 필요했다. 이는 곡식을 심고 거두고 물을 긷고 길쌈을 하고 각종 양식으로부터 식량을 얻어 내는 모든 작업을 6일 만에 끝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이 일주일에 하루씩 안식하는 동안 주변 나라는 계속 칼을 만들고 화살을 제작하고 병사를 훈련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경제 및 군사 재난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각종 문제와 씨름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를 따라 일과 안식의 순환을 지키면서도, 과연 우리는 현대 경제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둘 혹은 셋 이상의 직업을 유지하고 집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세차를 하고 공과금을 제때 내고 학교 공부를 하고 시장을 보는 데 7일이 다 필요한가? 아니면 매주 하루씩 쉬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양해 주시리라고 신뢰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를 드리며 다른 사람과 어울려 성경공부를 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우리 생산성이 전반적으로 더 떨어질까 아니면 더 높아질까? 넷째 계명은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실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안식을 취할 것을 말할 뿐이다.

 

   크리스천은 안식일을 “주일”(일요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로 바꿔 부르고 있으나, 안식일의 본질은 일주일 중 특정한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게 아니다(롬 14:5-6). 안식일이 정말로 강조하는 두 가지 사항은 일과 안식이다. 일과 안식이 둘 다 제4계명에 포함되어 있다. 일하는 6일도 안식하는 하루만큼이나 이 계명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많은 크리스천이 일하는 시간을 짜내어 안식에 할애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와 반대로 한가로운 여가와 낭비를 위해 일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것은 안식일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악하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부양하지, NIV]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과 안식의 적절한 조화다. 그것이 우리 자신과 가족, 동료 근로자와 고객 모두에게 다 좋기 때문이다. 그 조화에는 일요일 또는 토요일 24시간 동안 푹 쉬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안식의 시간적 비율은 일시적인 필요(안식일에 소를 우물에서 건져 내는 일과 비슷한 현대의 일 - 눅 14:5)나 때에 따른 삶의 필요에 의해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과로가 우리의 주된 위험이라면, 우리는 신령한 것(일요일에 진행되는 예배)과 세속적인 것(월요일부터 진행되는 노동)을 대립시키는 새로운 거짓 율법주의를 창안해 내지 않으면서도 제4계명을 지킬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일을 회피하는 것이 우리 위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일하는 것의 기쁨과 의미를 배우고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엡 4:28).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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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를 공경하거나 공경하지 않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은 이 계명의 의미를 부모에 대해 좋게 말하고 칭찬하는 것에 국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계명을 지키려면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셨다(막 7:9-13). 우리는 누군가의 선을 위해 일함으로써 그 대상을 향한 공경심을 표현한다.

 

   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커다란 기쁨 중 하나다. 부모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즐거움이며, 이 계명을 따르는 것도 쉽게 다가온다. 그러나 부모를 위해 일하는 것이 짐처럼 느껴질 경우 우리는 이 계명으로 시험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홀대를 받거나 냉대를 받았을 수 있다. 부모로부터 통제나 간섭을 심하게 받으며 자랐을 수도 있다. 부모와 엮이는 것이 자아를 무너뜨리거나 배우자에 대한 헌신(셋째 계명에 따른 우리의 책임 포함),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망치는 것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비록 현재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부모를 돌보는 일에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나중에 큰 짐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만일 늙거나 치매에 걸려서 부모의 기억력, 능력, 좋은 성품이 사라질 경우, 부모를 돌보는 일은 깊은 슬픔으로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섯째 계명에는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는 약속이 들어 있다. 실질적인 방식으로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더 오래 살게 되는 (아마도 더 충만하다는 의미에서) 유익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이 말씀은 그런 기대를 우리에게 안겨 준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제1계명 참조).

 

   부모의 유익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 이 계명의 바탕이기에, 이것은 본질상 일의 현장에서의 명령이 되기도 한다. 일터는 우리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곳일 수도 있고, 일상적인 수발로 그분을 돕는 곳이 될 수도 있다. 두 가지가 다 일이다. 부모와 더 가까이 살기 위해, 혹은 부모에게 돈을 보내거나, 부모가 물려준 가치관이나 재능을 가지고 일하거나, 부모가 중요하다고 여긴 일을 해 나가기 위해 우리가 일할 때, 우리는 그분들을 공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분들과 함께 거하기 위해, 혹은 그분들을 위해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부모를 목욕시켜 드리거나 안아 드리고, 좋아하는 장소로 모시고 간다거나 부모의 두려움을 덜어 드리기 위해 직장활동을 역으로 제한한다면, 그것 역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된다.

 

   직장에서 우리는 스스로 다섯째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우리는 종업원, 고객, 동료, 상사, 거래처 및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 기대를 조절함으로써 그들이 자기 가족을 돌볼 수 있도록 지원해 줄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과 부모 사이의 갈등에 대해 말하거나 불평할 때, 우리는 그들의 말에 연민을 갖고 귀를 기울이거나 실질적으로(가령 근무 시간대를 교대해 부모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지원해 줄 수 있다. 그들에게 성경적인 시각에 근거한 어떤 견해를 피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출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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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깝게도 여섯째 계명은 현대인의 직장생활에 너무나도 실질적으로 잘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이다. 직업과 연관된 사망 사고의 10퍼센트(미국 기준)가 살인이기 때문이다.[1] ‘직장에서 절대로 살인하지 말라’라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권고한다고 해도 이런 통계치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살인은 유일한 형태의 직장 폭력은 아니며, 단지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더욱 실질적인 폭력은 분노인데, 예수님은 분노를 발하는 것도 여섯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21-22). 바울이 말한 대로, 분노의 감정을 금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배울 수는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따라서 여섯째 계명이 일의 현장에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일터에서 분노 문제를 겪는다면, 분노 조절에 관한 도움을 받도록 하라.’ 많은 고용주, 교회, 국가, 자치단체, 비영리 조직이 분노 관리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제공하는데, 이런 것을 이용하면 여섯째 계명을 지키는 데 크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은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이지만, 여섯째 계명으로부터 파생된 판례법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의도적이지 않은 죽음을 막을 의무도 있다. 아주 명료한 한 예는 소(일을 하는 동물)가 사람을 받아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다(출 21:28-29). 만일 그 사건이 예측 가능한 사고였다면, 그 소의 주인이 살인 책임을 물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이나 관리자는 직장 내의 안전을 적절하게 유지할 책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으로 잘 확립되어 있는데, 작업 현장의 안전은 정부 정책, 산업체 내규, 조직체 정책과 관습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직장이 근로자로 하여금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계속 일하도록 요구하거나 묵인한다. 작업 여건을 조성하거나 근로자를 감독하거나 직장 관습을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크리스천이라면 여섯째 계명을 상기해 안전한 근무 환경이 그들이 책임져야 할 가장 큰 것 중 하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Fact Sheet: Workplace Shootings 2010,” United States Department of Labor, Bureau of Labor Statistics, http://www.bls.gov/iif/oshwc/cfoi/osar0014.htm.

“간음하지 말라” (출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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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은 간음이 가장 흔히 발생하는 환경 중 하나다. 간음이 직장 내에서 많이 발생해서라기보다 근무 환경, 직장 동료끼리 인간관계 등이 간음이 발생할 환경을 쉽게 조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장에서 이 계명은 우선 문자 그대로 적용된다. 결혼한 사람은 직장과 연관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어떤 이유에서라도 성(性)적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은 성매매, 포르노그래피 산업 종사자, 섹스 대리모 같은 직업적 성행위를 하는 사람은 일단 제외하고, 적어도 선택권을 지닌 대다수의 직장인을 향해서 하는 말이다.

 

   결혼 서약에 흠집을 내는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일곱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런 일은 여러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다. 병원, 회사, 연구소와 교회 등 직장 동료 간의 강한 감정적 유대관계가 요구되면서도 배우자와 서약한 것은 충분히 지지해 주지 못할 수 있는 환경. 장시간 신체적으로 가까이 하는 직업이라든지 합리적인 한계 내에서 퇴근 후의 만남을 제한하지 못하는 장기 출장 같은 작업 조건. 성희롱을 당하게 하거나 압력에 굴복해 권력자와 성행위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무 환경도 있을 수 있다. 허영심이나 선망에 둘러싸이는 연예인, 스타 운동선수, 대기업 사업가, 정부 고위 관료나 극히 부유한 사람 사이에서도 간음이 흔히 발생할 수 있다. 직장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신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소비하다가 배우자와의 관계가 침식당하기도 한다. 크리스천이라면 이 모든 상황에서 드러나는 위험들을 알아보고 피하거나, 개선하거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간음이 불법 성적 접촉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곱째 계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창조하실 때 “한 몸”(창 2:24)이 되도록 만드셨으며, 일곱째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 역시 결혼 언약에서의 하나님 역할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그러므로 간음을 저지르는 것은 사람과 더불어 죄를 짓는 것일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는 것이다. 

 

   사실 구약에서는 종종 “간음”이란 말과 간음을 둘러싼 비유가 성적인 죄가 아닌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사용된다. 이사야 57장 3절, 예레미야 3장 8절, 에스겔 16장 38절 및 호세아 2장 2절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예배하겠다는 언약을 어긴 것을 종종 “간음”이나 “통간”이라고 질책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불법적인 성행위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 간음에 비유된다. ‘간음’이란 단어의 이런 용례는 첫째, 둘째 및 일곱째 계명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이란 그저 중요한 상위 열 가지 규칙을 모아 놓은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단일한 언약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숭배를 요구하거나 그런 쪽으로 우리를 이끄는 직장은 피해야 한다.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서 타로 카드로 사람들에게 점괘를 봐 주거나, 우상숭배와 관련된 미술이나 음악에 종사하거나, 외설 도서를 출판하는 일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가진 배우가 음란하거나 불경건하거나 영적으로 혼란시키는 역할을 맡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작은 것처럼 보여도 어떻게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좋게 하기도 하고 나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에게 영적으로 해가 되는 스트레스성 일이 계속 쌓인다면, 결국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직업을 결정할 때 우리는 선택권이 있는 범위 내에서 그런 요소를 최대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간음으로 깨지는 언약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 대부분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언약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크리스천이 맺는 모든 약속이나 합의가 다 은연중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골 3:17). 계약, 약속, 합의는 우리가 흔히 구두나 행위로 맺는다. 우리가 그것을 모두 주 예수 이름으로 행한다고 치면, 어떤 약속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므로 지켜야 하고 어떤 것은 사람과 맺은 것이므로 어겨도 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모든 유형의 합의를 지켜야 하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합의를 깨도록 유도해서도 안 된다. 출애굽기 20장 14절에 들어 있든지 이 구절에서 파생된 신구약 가르침이든지 간에,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다른 사람도 그들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도우라’라는 말은 직업 세계에서 일곱째 계명을 명석하게 해석한 설명이 될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 (출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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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째 계명 역시 일터를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는 또 다른 계명이다. 도둑질은 피해자로부터 노동의 대가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일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 도둑질은 정직한 노동을 피하려는 편법의 일환으로 저질러지기 때문에, 그것은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도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십계명끼리의 연관성을 본다. 그러므로 일터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 외에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타인의 귀한 어떤 것을 소유주의 동의 없이 취득하는 순간 그것은 도적질이 된다. 자원이나 자금을 개인 용도로 착복하는 것도 도둑질이다. 판매 실적을 올리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사기를 치거나 가격을 올리는 것 역시 도둑질이다. 구매자가 실제와 다른 상황 속에서 구매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과대광고/과장” 부분을 보라. 마찬가지로 사람의 두려움, 취약점, 무력감, 절박함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의 한 형태다. 그들이 동의한 것은 진정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작권이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도 창안한 사람에게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민법상의 이윤을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둑질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직업이 사람의 무지나 궁지에 몰린 선택권 없는 상황을 이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원치 않는 거래를 하게 만드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회사, 정부, 개인, 조합 및 기타 조직은 흔히 그들의 힘을 이용해 사람에게 불공정한 임금, 가격, 재무 조건, 근무 여건이나 근로 시간 등을 강요한다. 은행을 털거나 고용주의 것을 훔치거나 상점에서 들치기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불공정하거나 비윤리적인 관행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서 그들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는 일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동참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이런 관행을 거부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심지어 경력에 큰 제한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할 소명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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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째 계명은 자기 평판에 대한 권리의 중요성을 다룬다.[1] 이것은 사람의 증언에 따라 인생 행로가 갈리는 법정 현장에서 뚜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이다. 사법 판정과 소송 과정 속에 담겨진 힘은 실로 대단하다. 그런 힘을 가지고 노는 것은 사회의 윤리 체계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며 결과적으로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 계명이 다음 사실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실상이 신빙성 있게 묘사되며 알려진다고 대중이 확신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적 삶은 실현 불가능하다.”[2]

 

   법정 용어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이 아홉째 계명은 사실상 삶의 모든 국면에 해당하는 다양한 상황에 적용된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잘못 대변하는 말이나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은 통찰도 제시했다.

 

정치인은 네거티브(부정적) 선거 운동으로 경쟁자를 음해하려고 애쓴다. 가십 기고가들은 중상모략으로 돈을 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거실에서 멋진 커피잔에 곁들인 다과를 먹으면서 남을 비방하고 교묘하게 악평을 일삼는다. 사실상의 법정 행위가 정당한 사법적 절차 없이 이렇게 도처에서 자행된다. 비난이 가해지고 소문이 전파되며 비방, 위증 및 명예훼손 발언이 여과 없이 유포된다. 여기에는 증거도 없고 변론도 없다. 크리스천은 이런 대화에 가담하거나 그런 대화를 용인하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당사자 본인이 없는 상황에서 절대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기도 요청이나 목회자적 관심에 의한 것이라 해도, 동기가 무엇이든 어떤 형태로든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단순히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크리스천에게는 소문을 멈추게 하고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을 막아야 할 의무도 있다.[3]

 

   이 계명은 직장에서 하는 잡담도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직장 밖의 개인 영역에서 파괴력을 발휘하는 잡담도 그 자체로 악하지만, 한 직원이 다른 직원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경우에는 어떤가? 당사자가 현장에 없는 상황에서 진실이 규명될 수 있을까? 근무 태도를 평가하는 것은 또 어떤가? 공정하고 정확한 평가가 이뤄지려면 어떤 안전장치가 필요한가? 대체로 마케팅이나 광고 산업은 단체와 개인이 섞인 공공영역에서 전개된다. 이때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장 돋보이게 하려고 할 경우, 편견이 배제된 객관적 시각으로 경쟁자 제품의 하자나 약점을 어느 정도까지 지적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당신이나 이웃의 권리만큼 다른 회사의 권리도 똑같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세계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이 계명의 적용 범위는 엄청나게 넓다. 인식이 종종 실재를 대신하는 현 세상에서, 효과적인 언변의 수사학이 참된 진실과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이 계명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 평가가 정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만큼은 속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을지라도 옳은 일을 하는 게 좋다. 이 명령을 들으면서 우리는, 듣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항상 진실을 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도 이 계명을 이해해야 한다. 이 주제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Genesis to Leviticus, The New Interpreter’s Bible, 431쪽.

같은 책, 848쪽.

같은 책, 432쪽.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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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와 탐심은 삶의 여러 현장에서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직위와 급여와 권력’이 주요 요소가 되는 직장에서도 그렇다. 우리가 직장에서 성과, 진급 또는 보상을 원하는 데는 정당한 이유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기는 그런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사회적 지위를 탐해 집착적으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유가 될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면서까지 우리 업적을 과대 포장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이를 예방하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일관된 자세로 다른 사람이 성취한 결과를 알아주고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타인의 성공을 기뻐해 주거나 최소한 알아주기라도 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탐심의 명맥을 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자신의 성공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성공도 이뤄질 수 있게끔 노력한다면, 탐심은 협력으로, 시기는 화합으로 바뀔 것이다.

 

   레이스 앤더슨(Leith Anderson)은 미네소타주 에덴 프레리 우드데일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이런 말을 했다. “담임목사로서 저는 주머니 속에 동전을 무한히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교회 임원이 내놓은 좋은 방안이나 자원봉사자의 수고를 칭찬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할 때마다, 제 주머니 속 동전이 그들 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리더인 제가 할 일은 그거죠. 동전을 제 주머니로부터 그들의 주머니로 넣어 주는 것.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건넬 칭찬을 저도 한쪽에서 거들어 주는 것입니다.”[1]

 

2004년 10월 2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롯에서 레이스 앤더슨(Leith Anderson)과 나눈 대화를 윌리엄 메신저(William Messenger)가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