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일하게 하셨다 (창1:26-2:25)

아티클 / 성경 주석

사람,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다(창1:26, 27;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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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창조를 말한 후 창세기는 사람의 일을 말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사람에게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5:1).

 

   만물이 하나님의 설계와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람만이 하나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온전한 신학을 다루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그저 우리에게는 독특하게 하나님을 닮은 점이 있다고만 말해 두자.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히’ 똑같다고 믿는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순전한 혼돈 속에서 세상을 창조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 대로 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지금까지 기술(記述)한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물질적 세상에서 일하시고, 관계 속에서 일하시는 창조주시며, 그 일하는 것의 한계를 지키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창세기 1-2장 나머지 부분에서는 사람의 일이 다섯 가지의 특정 범주로 나뉘어 전개된다. 지배(다스림), 관계, 열매 맺음/성장, 공급하심, 한계. 이런 전개는 두 가지 주기 속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창세기 1장 26절에서 2장 4절까지, 다른 하나는 창세기 2장 4절에서 25절까지다. 범주의 순서는 각기 다르지만 어쨌거나 이 범주들은 두 가지 주기에 모두 나타난다. 첫 번째 주기에서는 하나님 형상을 따라 일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전개된다. 두 번째 주기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준비시켜서 일하도록 해 주셨는지 설명해 준다.

 

   첫 번째 주기에 나오는 언어는 추상적이어서 인간 노동의 원칙을 개발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두 번째 주기에 나오는 언어는 세속적이며 흙과 다른 요소로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어서 에덴 동산에서 맡겨진 일을 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실질적인 교훈을 주기에 적합하다. 이런 언어의 변동, 성경의 처음 네 책 전체에 걸쳐서 유사한 변동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학자 간에 무수한 연구, 가정, 논쟁, 심지어 분란까지 발생했다. 다른 일반 목적의 주석서는 이에 관해 풍부하고 자세한 내용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의 대부분은 창세기의 일, 일꾼, 일터에 대한 이해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우리 논의에 관련된 것은 창세기 2장에서 앞서 전개된 다섯 가지 주제가 지배(다스림), 공급하심, 열매 맺음/성장, 한계, 관계의 순서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아 하게 된 일을 어떻게 완수하게 하시는지 설명한다. 이런 주제를 더 쉽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창세기 1장 26절 - 2장 25절을 구절마다가 아니라 범주별로 탐구해야 한다.

 

지배(다스림) (창1:2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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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이 땅을 다스리고 있는가 (창1:26).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의 결과는 우리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창 1:26) 됐다는 점이다. 이안 하트의 표현을 따른다면, “하나님의 대리자로 땅을 왕처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기본 목적이다. …… 사람은 피조물의 지명된 왕으로서 궁극적 왕이신 하나님께 받은 책임이 있으며 피조물을 관리하고 개발하고 돌봐야 하는데, 이 임무에는 물리적인 일도 포함된다.”[1]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우리 일은 하나님을 충실히 대리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창조된 세상에 통치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행위가 하나님을 비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원형이 아니라 형상이며, 우리 의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원형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인데, 그러려면 우리의 통제 아래 놓인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몸담은 일터에서 이것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직업을 어떻게 감당하기 원하실까? 직장에 무슨 가치를 더하기 원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제품을 만들기 원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섬기기 원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조직을 만들기 원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기준을 사용하기 원하실까? 하나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우리 일은 우리가 대리하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나타내야 할까? 우리가 어떤 일을 마쳤을 때,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 절 쓰셔서 이 일을 이루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배권을 행사한다는 건 무엇인가(창2:5)

 

  비록 즉시 그것을 인식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주기는 지배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창2:5) 핵심 구절은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셔서 그분과 더불어서나 그분 수하에서 일하도록 하시기 전까지는  창조하는 일을 마감하지 않으셨다.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한 왕이 농장이나 공원이나 과수원을 경작하는 것과 같았다. 거기다가 하나님은 그곳에 사람을 들여보내서 땅을 ‘갈고’ 토지를 ‘갈며’ ‘돌보도록’ 하셨다."[2]

 

   따라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일은 땅을 가는 것과 더불어 시작됐다. 이로 보건대, 1장에서 정복[3] 및 다스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을 짓밟도록 허용하신 게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창조물과 사랑의 관계를 맺듯이 행동해야 한다. 땅을 정복하는 일은 땅의 갖가지 자원을 활용할 뿐 아니라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그것을 남용할 특권이 아니라 그것을 돌볼 계약을 하나님과 맺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접촉하는 모든 것의 최대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이들에는 우리의 종업원, 고객, 직장 동료나 동역자, 또는 우리를 위해 일하거나 심지어 우리가 우연히 만나는 사람까지 해당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이익과 주장, 자존심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도록 특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창세기에서 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정확히 그런 유혹과 그 결과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자기 이익 추구가 자연 환경을 어떻게 위협하는지를 잘 알게 됐다. 우리는 에덴 동산을 개간하며 돌보도록 되어 있었다(창 2:15). 우리가 피조물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공기, 물, 땅, 식물과 동물이 선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환경을 유지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 일은 하나님이 창조물을 축복하시기 위해 주신 깨끗한 공기, 물, 땅, 다양한 생물, 생태계, 생물자원, 심지어는 기후를 보존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 지배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불리하게 일할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위해 일할 능력이다.

 

Ian Hart, “Genesis 1:1-2:3 as a Prologue to the Books of Genesis,” TynBul 46, no. 2 (1995): 322쪽.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Genesis Foundations for a Covenantal Worldview (Eugene, OR: Wipf & Stock, 2006), 69쪽.

“정복하다”(kavash)는 경작(농사), 사육(목양), 심지어 채굴에까지 적용되어 “‘땅’의 개념과 관련된 모든 경제적 문화적 잠재력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을 참고하라. Robert B. Chisholm Jr., From Exegesis to Exposition: A Practical Guide to Using Biblical Hebrew (Grand Rapids: Baker, 1998), 46쪽.

관계 (창1:27; 2:18,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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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일하고 있는가 (1:27)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분이라는 것을 이미 살펴봤으므로(창 1:26), 관계적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도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다. 창세기 1장 27절의 둘째 부분은 이 점을 재확인해 주는데, 우리에 대해 개별적으로 말하지 않고 두 단위로 언급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는 우리 창조주와 우리 동료 피조물과의 관계 아래에 있다. 이런 관계는 창세기에서 철학적인 추상 관념으로 남아 있지 않다. 동물 이름을 짓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은 아담과 이야기하시며 그와 협력하셨다(창 2:19). 또한 하나님은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창 3:8)으로 아담과 하와를 방문하셨다.

 

   이런 실질적인 일은 직장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주변 사람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관계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요일 4:7). 혹자는 단순히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내면으로 즉 성부, 성자(요 17:24), 성령 가운데서 흘러넘치는 사랑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간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우리에게로 흘러나와서, 우리에게 제일 유익한 일만을 행한다. 우리 감정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적 사랑과 비교되는 ‘아가페 사랑’이다.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우리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은 인격적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 깊이 탐구했다. 쉐퍼는 이것이 참된 사랑을 가능케 한다고 말하며, 이에 반해 기계는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관리 하에 두신 모든 것을 우리는 의식적으로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 관계적인 피조물이 되는 것에는 도덕적인 책임이 수반된다.[1]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한다는 건 무엇인가 (2:18, 21-25)

 

   우리는 관계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내재적으로 관계적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모든 창조 행위는 “좋다”라거나 “매우 좋다”라고 불렸으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이 “좋지 않다”라고 선언하신 첫 번째 경우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살과 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셨다.

 

   최초의 여자 하와가 태어나 보니 아담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이후로, 모든 새로운 사람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살로부터 나오게 되겠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잉태하게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한 몸”을 이뤘다(창 2:24). 이것이 순전히 애정 문제나 가정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일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이요 ‘동역자’로 지음받아 에덴 동산을 일구는 일에 동참하게 됐다. 돕는 자라는 말은 아담처럼 그녀도 그 동산을 가꾸게 될 것을 나타낸다. 돕는 자가 된다는 건 일한다는 의미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돕는 사람이 아니다.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이와 더불어 관계 속에서 일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하와를 “돕는 배필”이라고 부르셨을 때 그분은 하와가 아담보다 열등한 자가 되리라거나 하와의 일이 아담의 일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창조적일 거라고 의도하신 건 아니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ezer)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시 30:10). 에제르는 분명히 종속적인 자가 아니다. 더욱이 창세기 2장 18절은 하와를 돕는 자로 묘사할 뿐 아니라 동역자로도 묘사한다. 돕는 자와 동역자에 대해 오늘날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영어 단어는 “협력자”(co-worker)다. 이것이 참으로 창세기 1장 27절에서 가리키는 의미다. ‘그분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라는 말은 우선순위나 지배권의 차이를 말하는 게 전혀 아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부합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타락의 비극적인 결과였다(창 3:16).

 

   관계는 일하는 데 부수적인 게 아니라 필수 요소다. 적절한 환경 아래 일터는 깊고 의미 있는 관계의 장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일종의 일로 묘사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멍에란 소 두 마리를 함께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와와 아담을 협력자로 만드셨을 때 의도하셨던 대로 참으로 동역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과 몸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하는 동안, 우리 영혼은 안식을 찾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동의 선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쉼을 얻지 못한다. 멍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시리즈 4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서신서 · 요한계시록》 3장의 “고후 6:14-18” 부분을 보라.

 

   하나님이 친히 형성하신 관계에서는 권위의 위임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동물 이름 짓는 일을 아담에게 위임하셨는데, 권위의 이전은 진지한 것이었다.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다”(창 2:19). 다른 모든 형태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위임할 때 우리는 권한과 독립성의 일부를 내주고 다른 사람이 한 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리더십과 경영 분야에서 지난 50년 동안 이뤄진 발전의 대부분은 권한의 위임, 작업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팀워크를 기르는 형태로 성취됐다. 비록 기독교인이 늘 인지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종류의 발전은 창세기부터 일터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많은 사람은 공동의 목적과 목표가 주어질 때 (유급으로 일하든 무급으로 일하든) 서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방대하고 복합적인 재화와 용역을 개인의 역량 이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만든다. 일터에서 관계가 없다면, 자동차도, 컴퓨터도, 우편배달 업무, 법률, 상점, 학교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한 사람 크기보다 더 큰 사냥감은 사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남녀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할 다음 세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몸담은 공동체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철저하게 상호 연계되어 있다. 서로 잘 결합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

 

Francis A. Schaeffer, Genesis in Space and Tim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72), 47-48쪽. 프랜시스 쉐퍼, 《창세기의 시공간성》(생명의말씀사 역간).

열매 맺음/성장 (창1:28; 2: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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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열매 맺고 번성하고 있는가 (창1:28)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므로, 우리는 열매를 맺거나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종종 “창조 명령”이나 “문화 명령”으로 불린다. 하나님은 흠이 없는 창조물과 이상적인 무대를 만드셨으며 인류를 만드셔서 창조 프로젝트를 지속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으며 혼자서도 얼마든지 땅을 충만케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인류를 만드셔서, 그분 곁에서 같이 일하면서 우주의 잠재성을 실현하고 하나님 일에 참여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좋은 땅 위에서 엄청난 일을 수행하도록 우리를 믿어 주심이 놀랍지 않은가. 우리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 생산물과 용역, 지식과 아름다움, 조직체와 공동체, 성장과 건강을 주시며 그분께 찬양과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생산적일 뿐 아니라 “보기에 즐거움이 된다”(창 3:6).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다른 선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미(美)도 우상이 될 수 있는데, 기독교인은 종종 미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이 보시는 미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본질적으로 미는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중요한 일로부터 일탈하는 것도 아니며 시대가 지나면 시들어 버릴 꽃도 아니다. 미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귀한 보석”(계 21:11)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에 대한 말로 음악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능하다. 아마도 우리는 다른 모든 종류의 참된 아름다움의 진가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더 생산적으로, 아름답게 일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역사는 놀라운 성취를 이룬 크리스천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우리 일이 그들에 비해 열매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해답은 자기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 무리 속에서 소망을 품고, 기도하며, 성장하는 데 있다. 그 어떤 안팎의 장애물에 부딪친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선을 행할 수 있다.

 

열매 맺고 번성한다는 건 무엇인가  (창2:15, 19-20)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일하다’ 또는 ‘갈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avad[아바드]’와 ‘지키다’라는 뜻의 ‘shamar[샤마르]’는 각각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에도 쓰인다.[1]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행해진 일에는 분명히 거룩함이 있다.

 

   창세기 2장 15-20절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 가지 특별한 종류의 일이 주어졌다. 정원 돌보는 일(물리적인 일)과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일(문화적/과학적/지적인 일)이다. 둘 다 창조적인 사업으로,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특정 활동을 하게 한다. 식물을 키우고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늘어나는 인구를 유지하거나 피조물의 생산성을 늘리는 데 필요한 자원을 산출해 낸다. 우리는 땅을 과도하게 채워서는 안 되겠지만 채울 수단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정원 개간과 동물 이름 짓기가 사람에게 알맞은 유일한 임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람의 임무는 하나님이 주신 상상력과 기술,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에 의해서만 제한되는 하나님의 창조적 일을 아주 여러 방식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일은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설계에 영구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일은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게 하고, 우리 자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수단이 되며, 우리의 너그러움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 창조 사역에서 중요하지만 가끔 간과되는 면은 기이한 바다 생물부터 코끼리나 코뿔소까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거대한 상상력이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형상을 닮은 특징을 놓고 다양한 얘기를 하지만, 상상력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써 우리 가정뿐 아니라 직장, 우리 주변에서 늘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공장 조립대에서 트럭의 볼트를 조이는 동안 그 트럭이 길에서 달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또 노트북 컴퓨터에 담긴 한 문서를 열면서 이제 막 쓰려고 하는 이야기를 상상한다. 모차르트는 소나타를 상상했으며 베토벤은 교향곡을 상상했다. 테슬라와 에디슨은 전기를 동력화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빛을 가지게 됐으며 수만 가지 집기와 가전제품과 장비를 사용하게 됐다. 누군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가상 속에서 상상했다. 직장의 대부분은 누군가가 일감을 만들어 내는 제품이나 직장에서의 공정을 상상했기에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이 필요하며, 상상한 다음에는 제품을 만들어 내는 일이 필요하다. 실제로 상상력과 실현은 종종 서로 얽혀진 과정으로 발생한다. 피카소는 그의 그림 <게르니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회화는 미리 생각해 놓았다가 착수하는 게 아니다.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에 화가의 마음이 바뀌면 그림도 바뀐다. 그리고 마친 후에도 그림은 그것을 쳐다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된다.”[2] 상상력을 실재로 만드는 작업은 반드시 창의력을 수반한다.

 

 

R. Laird Harris, Gleason L. Archer, Jr., and Bruce K. Waltke, eds.,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Chicago: Moody Press, 1999), 639, 939쪽.

이 인용구가 널리 반복되고는 있으나 그 출처는 알기 힘들다. 그것이 진짜든 아니든, 그것은 모든 종류의 예술가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하나의 실체를 표현해 준다.

공급하심 (창1:29-30;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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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창1:29-30)

 

   우리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 만일 있다고 해도 그분은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힘이 있으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한편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인정하는 건 우리로 오만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분이 없으면 우리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이 공기, 물, 흙, 햇빛, 생물의 기적적인 성장, 우리 몸과 마음의 형성, 우리 일의 재료가 되는 여타의 모든 원료를 계속 공급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존재를 이어갈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의 공급을 인정하면, 일할 때 우리에게 자신감이 생긴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환경의 변화무쌍함에 기대어 우리 필요를 공급받으려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일을 열매 맺게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 필요를 공급하시는가 (창2:8-14)

 

   창조 이야기의 두 번째 주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우리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지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려고 힘쓸 때 땅을 생산적으로 만들어 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 2:8). 우리가 밭을 경작하지만, 원래 심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먹을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땅을 만드셨다. 우리가 열매 맺고 번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할 자원을 공급하시기 위해서였다. 물을 공급하는 수많은 강을 주셨고, 돌과 광물 자원을 제공하는 광석을 주셨으며, 경제 교류의 수단이 되는 원료물질을 주셨다(창 2:10-14).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창 2:11-12). 우리가 새로운 원소와 분자를 합성할 때나 미생물 가운데서 DNA를 재편성할 때나 인공 세포를 만들 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물질과 에너지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한계 (창2:3;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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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규정하신 한계를 따르고 있는가 (창2:3)

 

   하나님 형상을 따라 창조됐으므로, 우리는 일하는 중에 한계에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하나님이 지쳐서 쉬신 걸까 아니면, 그분의 형상을 지닌 우리에게 일과 안식의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해 안식하신 걸까? 십계명의 제4계명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수 세기에 걸쳐 종교적인 사람들은 무엇이 안식일을 지키도록 했는지 정의하는 규정을 쌓아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우리 유익을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막 2:27). 

 

   하나님처럼 우리의 일곱째 날마다 우리가 일을 멈춘다면, 우리 삶이 일이나 생산성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삶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생산과 소비는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 규정하고 축복하고 제한하신 세상 안에서 발생한다는 걸 증거하는 것이다.”[1]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율성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완전히 인간 통제 아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안식일을 우리 일의 일상적인 부분으로 만드는 건 하나님을 궁극적인 삶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안식일, 안식, 일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는 이 시리즈 3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2장의 “막 1:21-45”, “막 2:23-3:6”, 3장의 “눅 6:1-11”, “눅 13:10-17” 부분을 보라. 

 

한계 안에서 일한다는 건 무엇인가 (창2:17)

 

   일하는 날과 안식일을 모범적으로 지키심으로써 사람을 축복하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일을 제한하라고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다. 에덴 동산 한 가운데에 하나님은 두 가지 나무를 심으셨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창 2: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접근 금지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왜 거주민이 이용하지 못할 한 나무를 에덴 동산 가운데 두셨는지 장황하게 추측해 왔다. 일반적인 주석은 갖가지 가설을 제시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대답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볼 필요는 없다는 규칙을 따르면 그만이다. 인간의 상상력과 기술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원을 가지고 일하되 하나님의 의도, 목적, 계명에 반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거역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피조물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실현하려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준수해야 할 것이다.

 

   프랜시스 쉐퍼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한 나무와 악한 나무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하신 게 아니라 악에 대한 지식을 취할 것이냐 말 것이냐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지적했다(물론 그들은 선에 대해서는 이미 알았다). 그 나무를 만드실 때 하나님은 악의 가능성을 열어 두셨지만 그렇게 하심으로 그분은 선택의 효과를 확인하고자 하셨다. 모든 사랑은 선택에 묶여 있다. 선택이 없다면 사랑이란 단어는 의미가 없다.[2]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분과 관계 맺는 사람이 ‘피조물에게 선을 가져올’ 한계를 존중하길 바라신다. 

 

   오늘날 직장에서 우리가 한계를 따를 때, 그런 자세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복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창조성은 기회에서도 발생하지만 한계에서도 발생한다. 건축가는 고객이 제시하는 시간, 돈, 공간, 물질, 목적의 제약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화가는 2차원적 화폭에 3차원적 공간을 표현해야 하는 제한으로 시작해서 그들이 도구로 사용하는 매체의 제한을 받아들일 때, 창조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작가는 지면과 단어 제한에 직면할 때 재기(才氣)를 발견한다.

 

   모든 좋은 일은 하나님의 한계를 존중한다. 자원 추출, 오염, 서식지 개량, 식품이나 의복이나 기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동식물에 대한 땅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의 몸은 일에 대한 강도, 인내력, 역량이 크긴 하지만 제한적이다. 건강한 음식과 운동에는 제한이 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천박함으로부터 구분하고, 비판을 학대로부터 구별하고, 우정을 착취로부터, 봉사를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를 무책임으로부터, 권위를 독재주의로부터 구분하기 위한 기준에도 한계가 있다.

 

   물론 실제로 선(線)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를 정확히 알기 어려우며 기독교인도 순응, 율법주의, 선입관, 질식할 것 같은 따분함에 대해 종종 그릇 판단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지를 선포할 때 특히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형상을 지닌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피조물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한계를 따를 경우 어디서 복을 발견할 수 있는지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Walter Brueggemann, “Sabbath,” Reverberations of Faith: A Theological Handbook of Old Testament Theme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180쪽.

Schaeffer, Genesis in Space and Time, 71-72쪽. 프랜시스 쉐퍼, 《창세기의 시공간성》(생명의말씀사 역간).

 

창조 명령 (창1:28;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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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창 1:1-2:3) 사람에게 하나님 형상을 따라 살도록 준비하심에서(창 2:4-25),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셔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열매 맺고 번성하며,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아들이고, 관계 속에서 일하며 창조의 정한 한계를 따르게 하신다는 것을 탐구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창조 명령” 또는 “문화 명령”으로 종종 불려 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창세기 1장 28절과 2장 15절의 내용이 두드러진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이런 용어를 꼭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용어가 나타내는 생각은 창세기 1-2장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창조를 완성시키는 일에서 사람을 자신의 하위 파트너(junior partner)로 의도하셨고 그렇게 만드셨다. 만물을 있는 그대로 만족하고, 일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필요를 위해 공급된 것을 받아들이며, 오랫동안 빈둥거리며 놀고, 비창조적인 체계 안에서 일하고, 사회적 고립 속에서 일하는 것은 우리 본성에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일이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에 의존하며, 그분의 말씀 속에서 주어지고 피조물 가운데서 분명하게 드러난 한계를 존중하면서, 다른 사람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2차적 창조자로서 일하도록 지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