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일하신다 (창1:1-25)

아티클 / 성경 주석

하나님이 물질 세상을 존재하게 하셨다 (창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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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는 세상의 물질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초기 피조물은 여전히 “혼돈”(formless)했지만 공간(“깊음”)과 물질 (“수면”)이라는 물질적 차원이 있었으며, 하나님은 이 물질성에 깊이 관계하셨다(“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흙까지 사용해 일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1-2장 전체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의 물리적인 면에 몰두하신다.

 

   그러므로 일의 신학은 창조물(피조물) 신학과 더불어 시작돼야 한다. 우리는 우리 일의 재료인 이 물질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일급 재료로 여기는가?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단지 임시 일터로, 일종의 시험 무대로, 비물질적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처소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벗어나야만 하는 난파선으로 여기는가? ‘물질적인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세상보다 못하다’는 견해에 창세기는 전적으로 반대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선명하게 나누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ruah[루아흐]”는 ‘숨’, ‘바람’, ‘영’을 동시에 의미한다(NRSV에 나오는 각주 b를 참고하거나 NRSV, NASB, NIV, KJV와 비교하라). “천지”(하늘과 땅 ‐ 창 1:1; 2:1)는 엄연히 별개의 두 영역이지만, 히브리어로 천지는 ‘우주’[1]를 뜻한다. 마치 영어의 “kith and kin”이 ‘친척’을 뜻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건, 성경이 시작한 곳, 즉 땅에서 끝난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지상을 떠나 하늘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완전케 하시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계 21:2)와 존재하게 하신다. 사람과 함께 거할 하나님의 처소는 바로 여기 새로워진 피조물 속에 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계 21:3).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창세기 2장과 요한계시록 21장 사이의 기간 동안에, 땅은 부패하고 깨지고 비정상이며 하나님의 목적에 반대하는 사람과 세력으로 가득 찰 것이다(이에 대한 추가 사항은 창세기 3장 이하에 나온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그분은 그것을 보고 “좋다”라고 말씀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서는 이 시리즈 4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서신서·요한계시록》10장의 “계17-22장” 부분을 보라.

 

   물리적 대상과 주로 일하는 많은 크리스천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람과 사상,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일보다 교회가 (심지어 하나님마저)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좋은 일을 칭찬하는 설교에서는 광부나 자동차 정비사나 화학자보다는 선교사, 사회복지사, 교사가 사례로 등장할 가능성이 더 높다. 동료 크리스천들은 재고 관리자나 조각가가 되라는 부르심보다는 목사나 의사가 되라는 부르심을 더 알아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태도에 과연 성경적 근거가 있을까?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곧 물리적 대상과 일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제쳐 놓더라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과제(창 2:18)와 사물과 함께 일하는 과제(창 2:15)를 모두 주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대단히 진지하게 여기신다.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98), 15쪽.

하나님의 창조는 일의 형태를 띤다 (창1:3-2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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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일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능력으로 분명히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세상이 존재하게 됐는데, 우리는 여기서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원시적 실례를 단계적으로 본다. 창조의 순서에 유의하라. 하나님 창조 행위의 처음 세 가지는 형체가 없는 ‘혼돈’을 분리해 하늘(또는 궁창), 물, 땅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었다. 첫째 날, 하나님은 빛을 만들고 그것을 어두움으로부터 분리해 낮과 밤을 조성하셨다(창 1:3-5).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을 분리해 하늘을 만드셨다(창 1:6-8). 셋째 날 전반부에 하나님은 건조한 땅을 바다로부터 분리하셨다(창 1:9-10). 이 모든 게 그 뒤에 지음받은 것들이 생존하는 데 꼭 필요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영역을 충만하게 채우셨다. 셋째 날 후반부에 하나님은 식물을 만드셨다(창 1:11-13). 넷째 날에 하나님은 해와 달과 궁창의 별을 만드셨다(창 1:14-19). “해”와 “달”이란 말 대신에 “큰 빛”(greater light)과 “작은 빛”(lesser light)이란 용어를 써서 피조물을 예배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로써 우리가 창조주 대신에 창조물을 예배할 위험에 늘 노출돼 있음을 상기시키셨다. 빛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더러, 식물의 생명에 필수적이고, 햇빛과 밤, 계절에도 필요하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은 앞서 창조된 식물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물고기와 새로 물과 궁창을 채우셨다(창 1:20-23). 마지막으로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동물을 창조하셨으며(창 1:24-25), 창조의 극치인 사람을 지으셔서 땅에 살도록 하셨다(창 1:26-31).[1]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말씀하심으로써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모든 것이 이뤄졌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유지하시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하나님의 연료가 다 떨어지진 않을까, 피조물의 존재가 불확실한 상태가 아닐까 하고 염려할 것 없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강건하며 그 존재는 안정적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아무것에도 도움받을 필요가 없으시다. 혼돈의 세력과의 어떤 싸움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무너뜨리는 위협이 되지 못한다. 후에 하나님이 창조의 책임을 사람과 공유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지 그분께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피조물을 훼손하려 들거나 지구를 생명이 충만하게 살기에 부적절한 곳으로 망가뜨리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속하고 회복하는 능력은 그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더 광대하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성경 본문에 나타나 있다고 해서, 그분의 창조가 일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연극을 하는 게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록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하신 일의 초월적인 위엄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쉽게 일로 연결하지 못한다 해도, 창세기 2장을 살펴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손을 가지고 내재적으로 일하신다. 사람의 몸을 만드셨고(창 2:7, 21), 정원을 일구셨으며(창 2:8), 과수를 심으셨고(창 2:9), 조금 뒤엔 “가죽 옷”을 지어 주셨다(창 3:21). 이것들은 하나님의 노동으로 꽉 들어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육체적 일의 시작일 뿐이다.[2]

창조 때의 “날들”에 대한 유익한 토론을 위해서는 Bruce K. Waltke, Genesis: A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1), 74-78쪽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수많은 종류의 일 목록은 다음을 보라. R. Paul Stevens, The Other Six Days (Grand Rapids: Wm. B. Eerdmans, 2000), 18-123쪽. Robert Banks, God the Worker: Journeys into the Mind, Heart, and Imagination of God (Eugene, OR: Wipf & Stock, 2008).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지만, 하나님과 동일하지는 않다 (창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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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만물의 근원이시다. 하지만 피조물이 하나님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콜린 건톤(Colin Gunton)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Selbständigkeit [젤프슈텐디히카이트]” 즉 “적당한 독립”을 피조물에게 주셨다. 이것은 유신론자나 무신론자가 상상하는 절대 독립이 아니라 피조물 중 의미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식물에 대한 묘사에 가장 잘 나타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창 1:11).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창조물을 대대로 영구 보존하시기 위해 문자 그대로 씨를 심으셨다.

 

   창조 세계는 영원히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그러나 피조물은 별개의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일은 똑딱거리는 시계나 껑충대는 꼭두각시의 가치를 뛰어넘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갖고 있다. 우리의 일은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으면서도 나름의 고유한 무게와 존귀함을 지닌다. 


 

하나님은 자신이 일한 결과를 보고 좋다고 하신다 (창1:4, 10, 12, 18, 21, 2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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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은 좋지만 땅은 나쁘다는 이원론적인 견해에 맞서, 창세기는 창조의 각 날에 대해 선언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 얼마 못 가 죄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여올 통로인데도 ‘매우 좋았다’라고 평하셨다. 

 

   ‘이 세상은 구제받지 못할 정도로 악하므로, 구원은 오직 비물질적이며 영적인 세상 속으로 피해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이 신자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창세기는 이를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물질적’ 임무가 아니라 ‘영적’ 임무에만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견해도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의 선한 세상에서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코 분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