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창12:1-25:11)

아티클 / 성경 주석

바벨탑 건축자들 VS 신실한 아브라함 (창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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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신실하게 준수할 것을 말씀하신다. 본토와 믿음이 없는 친척을 떠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창세기 11장 말미에 나오는 바처럼 메소포타미아에 살면서 바벨탑을 건축한 그의 먼 친척으로부터 분연히 갈라섰다.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직계 가족과 11장에 나오는 노아의 다른 후손은 다섯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아브라함은 인간적 수단보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했다. 그에 반해 바벨탑 건축자들은 자기 재능과 재간을 믿었으며,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창 11:4) 탑을 쌓을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명성과 안전을 성취할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권위를 찬탈하고 말았다.[1]

 

   둘째, 바벨탑 건축자들은 그들 자신의 이름을 내려 했으나(창 11: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이름을 주시리라고 하신 그분의 약속을 신뢰했다(창 12:2). 차이는 위대함을 성취하려는 욕구 자체가 아니라 명성을 자기 방식으로 추구하려는 데 있었다. 하나님은 참으로 아브라함을 유명하게 해 주셨는데 아브라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려 함이었다(창 12:3). 바벨탑 건축자들은 자신을 위해 명성을 얻으려 했으나 그들은 오늘날까지 무명으로 남아 있다.

 

   셋째,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려 했으나 바벨탑 건축자들은 그들이 익숙해진 곳에 모여 있으려 했다. 그들은 지면에 흩어질까 두려워서 일을 벌였으며(창 11:4),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땅을 충만케 해야”(창 1:28) 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을 저버렸다.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흩어져 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라고 걱정한 듯하다. 그들은 창조적이었으며 혁신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나(창 11:3)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라는 하나님의 목적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창조의 충만함에 동참하기를 두려워한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대신에 인간적인 재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추구하지 못할 때 우리의 열망은 무의미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최초의 실업가로 만들어 주셨으며 새로운 땅에서 신선한 노력을 통해 늘 움직이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하란에서 불러내어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는데, 거기서도 아브라함은 결코 고정된 장소에 정착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신 26:5)으로 알려졌다. 이런 생활양식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어서 명성, 안위, 성공과 관련해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과 인도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 말하듯,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일의 세계에서 신자는 근본적인 두 방향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에는 기획과 건설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불경건한 일은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발생하는데, 이는 자신과 그 주변에 있는 소수에게만 유익을 끼칠 수 있을 뿐이다. 경건한 일은 기꺼이 하나님의 인도와 권위에 의존하려고 하며 전 세계 모든 이에게 축복을 전하고 싶어 한다.

 

   넷째,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해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해 주시기 바랐으나, 바벨탑 건축자는 폐쇄적 성채(城砦) 안에 그들 자신을 유폐시키고자 했다. 아브라함은 그의 가족을 이끌어 큰 민족으로 성장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창 12:2; 15:5)을 신뢰했다. 비록 가나안 땅의 이방인 가운데서 살았으나(창 17:8), 그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창 21:22-34; 23:1-12). 이것은 공동체의 선물이었다. 여기서 일의 신학에 대한 또 다른 핵심 주제가 드러난다. 하나님의 설계는 사람들이 건전한 유대 관계 속에서 일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은 인내의 축복을 받아 장기적인 안목을 갖게 됐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 자신의 때가 아니라 아브라함 후손의 때에 이루어질 것이었다. 사도 바울은 그 “후손”을 예수님이라고 해석했는데(갈 3:19), 이는 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에 성취될 것임을 의미했다. 사실,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야 완전히 성취된다(마 24:30-31). 그 성취는 분기 보고서로 보고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바벨탑 건축자는 그들의 사업이 미래 세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전혀 생각이 없었으며 하나님이 문제에 대해 그들을 분명하게 질책하셨다(창 11:6).

 

   요컨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성, 풍성한 결실, 좋은 관계를 약속하셨는데, 이것은 그와 그의 가족이 전 세계의 복이 될 것이며 때가 되면 그들 자신도 상상 이상으로 복을 받게 될 것임을(창 22:17) 의미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그런 것을 자기 힘으로 성취하려고 하는 시도는 아무리 해 봐야 헛되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매일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하심을 의지해 살았다(창 22:8-14). 비록 이 약속이 창세기 안에서 완벽히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서 언약의 단초가 됐으며 이를 통해서 세상의 구속이 그리스도의 날에 온전히 성취될 것이었다(빌 1:10).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가족에게 새로운 땅을 약속하셨다. 땅을 사용하려면 여러 종류의 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땅이라는 선물은 일이 하나님의 필수 관심사항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일러 준다. 땅을 일구려면 목양 기술, 천막 제조술, 군사적 보호 기술, 다양한 재화와 용역 생산 기술을 가진 직업이 필요하다. 더욱이 아브라함의 후손은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되어 그 수가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대인관계 개발, 출산과 육아, 정치, 외교, 행정, 교육, 의술 및 기타 사회적 직업의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셋째, 그런 축복을 온 세상에 가져오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불러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라고 명하셨다. 그러려면 예배, 구속, 제자화, 다른 종교적인 직업이 필요하다. 넷째, 요셉의 일은 기근을 대비해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가끔 우리 일은 깨어진 심령을 치유하는 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유형의 일과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와 인도, 공급하심 아래 움직인다.

 

Bruce K. Waltke, Genesis: A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1), 182-183쪽.

아브라함 가족의 유목 생활 (창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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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는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그의 가족은 이미 상당한 대가족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 사라와 그의 조카 롯이 그와 동행했다. 일단의 사람과 소유물도 함께 나왔다(창 12:5). 게다가 아브라함은 이내 매우 부요하게 됐으며 은과 금은 물론 노비와 가축도 얻었다(창 12:16; 13:2). 그는 애굽에 머무는 동안에 바로에게 사람과 동물도 받았으며 귀금속은 상업적 거래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이는 복을 주시는 궁극적인 분으로서의 여호와를 암시한다.[1] 아브라함과 롯이 모두 성공했다는 것은 땅의 목초지가 부족한 것을 두고 양가의 목자들이 서로 다투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그 두 사람은 기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갈라섰다(창 13:11).

 

   이 기간과 지역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는 본문에 나오는 두 가정이 반유목과 농업을 혼합적으로 실시했음을 암시한다(창 13:5-12; 21:25-34; 26:17-33; 29:1-10; 37:12-17).[2] 이 가족들은 계절마다 이동해야 했으므로 가죽과 펠트와 모직으로 만든 천막 안에 거주했다. 그들이 소유한 재산은 나귀가 운반했으며 만일 재물이 많을 경우에는 낙타도 운반에 이용됐다. 사용 가능한 목초지와 물 사이에 최적의 균형을 이루려면 우수한 판단력이 필요했으며 기후와 지형을 잘 아는 것이 필요했다. 10월에서 3월에 이르는 우기에는 낮은 평지에서 방목이 가능했지만, 4월에서 9월에 이르는 고온 및 건기에는 목자들이 짐승 떼를 이끌고 푸른 초목과 흐르는 시내를 찾아 고지대로 향했다.[3] 목축만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역 농업도 하면서, 정주 생활을 하는 지역 사람과 교역도 하는 게 필요했다.[4]

 

   유목민은 양과 염소를 쳐서 우유와 고기(창 18:7-8; 27:9; 31:38), 양모, 가죽 등 다른 동물 제품을 얻었다. 나귀는 짐을 날랐으며(창 42:26) 낙타는 특히 장거리 여행에 적합했다(창 24:10, 64; 31:17). 이런 동물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방목과 물 공급, 분만시키기, 병든 짐승과 다친 짐승 돌보기, 포식자와 도적으로부터 동물 보호하기, 길 잃은 짐승 찾아내기 등이었을 것이다.

 

   기후 변화 및 양 떼와 소 떼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나약한 목자는 쉽게 쫓겨나거나 흡수되는 한편, 소유물이 늘어나서 더 많은 토지가 필요한 목자가 그들을 대신했을 것이다.[5] 목축에서 나오는 이윤은 소유자나 관리자를 위해 저축이나 투자로 적립되지 못하고 가족이 공유했다. 마찬가지로 기근으로 인한 고난의 영향도 모두에게 미쳤다. 물론 개인에게는 그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 있고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각자 책임을 져야 했지만, 가업의 공동체적인 성격은 개인 성취와 이윤의 상시적 증가를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현대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적 책임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매일의 관심사였다.

 

   이런 생활 방식에서는, 공유된 가치가 생존에 필수적이었다. 식구 또는 부족 구성원 간의 상호 의존성과 그들의 공동 조상에 대한 의식은 커다란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그것을 파괴하려는 사람에 대해 극심한 적개심을 자아내기도 했다(창 34:25-31).[6] 지도자는 집단의 중지를 모아서 어디로 여행할 것이며 얼마나 오래 머물 것이며 짐승 떼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와 관련해 건전한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했다.[7] 그들은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짐승 떼를 치고 있는 목자와 교신하는 방도를 파악해야 했다(창 37:12-14). 방목지 및 수원지에 대한 권리와 관련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갈등을 해결하는 기교도 필요했다(창 26:19-22). 이동성이 큰 생활과 약탈자의 위협에 취약한 환경은 대접을 예의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다과, 식량 및 거처를 제공하는 것이 품위 있는 사람의 요건으로 간주됐다.[8]

 

   족장 이야기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큰 재산에 대한 언급이 반복적으로 나온다(창 13:2; 26:13; 31:1). 목축업과 축산업은 훌륭한 일의 분야였으며 수익성이 좋은 일이었다. 아브라함의 가족은 매우 부요해졌다. 예를 들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만난 형제 에서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야곱은 그의 재산 중에서 550마리 이상의 동물을 선물로 선발했다. 암염소 200마리와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와 숫양 20마리, 암낙타 30마리와 그 새끼들, 젖소 40마리와 수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와 수나귀 10마리(창 32:13-15).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의 끝에 그가 아들들에게 축복을 전수(傳授)하면서 그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창 48:15)이라고 증거한 말은 적절했다. 부요가 종종 신앙에 유해할 것이라고 경고한 성경 구절이 많지만(렘 17:11; 합 2:5; 마 6:24), 아브라함의 경험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번영 속에서도 표출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하나님 백성이 지속적으로 번영을 기대해도 좋다는 약속은 아니었다. 

같은 책, 216쪽.

Victor H. Matthews, “Nomadism, Pastoralism,”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eds. David Noel Freedman, Allen C. Myers, and Astrid B. Beck (Grand Rapids: Wm. B. Eerdmans, 2000), 972쪽.

John H. Walton, Victor H. Matthews, and Mark W. Chavalas,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Old Testament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0), 44쪽.

Matthews, “Nomadism, Pastoralism,”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971쪽.

T.C. Mitchell. “Nomads,” New Bible Dictionary, 3rd ed., eds. I. Howard Marshall, A. R. Millard, J. I. Packer, and D. J. Wiseman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6), 828-831쪽.

같은 책, 829쪽.

Matthews, “Nomadism, Pastoralism,”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972쪽.

Julian Pitt-Rivers, “The Stranger, the Guest, and the Hostile Host: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Laws of Hospitality,” Contributions to Mediterranean Sociology, ed. John G. Peristiany (Paris: Mouton, 1968), 13-30쪽.

녹록지 않은 여정의 시작 (창12:8-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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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의 초기 여행은 유망하지 못했다. 땅을 놓고 경쟁이 심했으며(창 12:6) 아브라함은 적합한 점령지를 찾아 오랜 세월을 허비했다(창 12:8-9). 결국 악화된 경제 여건 때문에 그는 온 가족을 이끌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애굽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창 12:10).

 

   경제적 이유 때문에 애굽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취약한 처지를 걱정했다. 아브라함은 애굽 사람이 그를 살해하고 그의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취해 가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이를 막으려고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아내가 아니라 여동생이라고 둘러대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예상했던 대로, 애굽에서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바로가 사라를 탐냈으며 그녀는 ‘바로의 궁으로 불려 들어갔다.’ 그 결과로 ‘여호와는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창 12:17). 바로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했음을 깨달았을 때 바로는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고 즉시 그들에게 명하길 그 나라를 떠나라고 했다(창 12:18-19). 바로는 그들에게 양과 소, 암나귀와 수나귀, 여종과 남종뿐 아니라 낙타(창 12:16)와 은금까지 주었는데(창 13:2), 이는 아브라함의 부요(창 13:2)가 왕의 선물 덕분이기도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1]

 

   이 사건은 빈부 격차로 인해 드러난 도덕적 곤경은 물론 그런 문제에 직면해 믿음을 잃을 뻔한 위험도 극적으로 보여 준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굶주림은 면했으나 외국에서 시민권이 없는 그들은 여전히 취약했다. 극심하게 가난하고 두렵다고 해서 경제적 생존을 위해 여성인 가족 구성원이 성적 관계에 빠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겠으나, 오늘날에도 수백만의 사람이 이런 처지에 처해 있다. 하나님은 이 취약한 여인과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성적 호의를 받아들인 바로를 벌하셨다. 수치를 당하게 된 바로는 사라가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에 대해 아브라함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후에 또다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창 20:7-17), 정죄보다 긍휼함을 보여 주셨다.

 

   다른 한편으로 아브라함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직접 받은 자였다.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믿은 아브라함이 왜 그렇게도 빨리 실패하게 됐을까? 진정 생존 때문에 그가 왕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기 아내에게도 거짓말을 하게 해서 왕의 첩이 되도록 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니면 하나님이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시고자 한 것이었을까? 아브라함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것 같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종종 다른 방도가 없다고 느낀 나머지 그릇된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설득한다. 하지만 어려운 선택을 앞두고 아무리 마음이 복잡하고 어렵다 해도, 어려운 선택은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과는 다르다.

Waltke, Genesis: A Commentary, 216쪽.

조카 롯과 갈라서다 (창1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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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가나안에 다시 들어가 벧엘 근처 지역으로 갔을 때, 아브라함의 짐승 떼와 조카 롯의 짐승 떼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서 아브라함이 다른 땅으로 가는 선택을 한다. 결국 서로 갈라서게 됐으며 아브라함은 위험을 감수하고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했다. 가나안 중앙에 있는 등성이 땅은 바위가 많아서 목초지를 충분히 제공할 수 없었다. 롯이 눈을 들어 동쪽을 쳐다보니 요단강 근처 평야가 “여호와의 동산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 좋은 땅을 차지했다(창 13:10). 하나님을 신뢰하는 아브라함은 스스로 땅을 고르고자 안달하지 않았다. 아브라함과 롯이 장차 얼마나 번영할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아브라함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줬다는 사실은 그의 너그러움을 나타냈으며 그와 롯 사이의 신뢰를 굳건하게 했다.

 

   너그러움은 대인관계나 사업 관계에서 긍정적인 자질이다. 너그러움만큼 신뢰 관계를 확립하고 좋은 관계를 굳건히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동료, 고객, 공급자, 심지어 적도 너그러움에는 강렬하게 반응하며 오랫동안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증오의 대상 세리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해 들인 후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겠으며 사취한 것이 있다면 4배나 상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그러움과 회개의 열매를 보고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셨다(눅 19:9). 물론 삭개오는 그 당시 사람들과 다른 예수님의 차별 없는 관계적 너그러움에 반응한 것이었다.

 

너그러운 환대의 힘 (창1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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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므레 상수리나무 근처로 찾아온 세 명의 나그네를 아브라함과 사라가 너그럽게 환대했다는 이야기는 창세기 18장에 나온다. 그 나라의 반유목 생활에서는 종종 모르는 가족 간에 접촉이 이뤄졌는데, 지리 특성상 가나안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이에서 선호하는 교역 통로가 됐다. 공식접대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지라 도시나 주거지에 정주하는 사람은 낯선 사람을 환대할 사회적 의무가 있었다. 구약 성경 및 다른 고대 근동 문서로부터 마태는 모범적 환대를 위한 일곱 가지의 행동 규범을 도출했다. 그것은 외부인을 받아들여 보호해 줌으로써 개인, 가족 및 공동체의 명예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었다.[1] 주거지 근처에는 개인이나 마을이 환대를 보여야 할 구역이 마련되어 있었다.

 

1. 이 구역에서 마을 사람은 외지인을 환대할 책임이 있었다.

2. 환대를 받고 난 외지인은 잠재적인 위협이 되지 않고 협력자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3. 집안의 남자나 마을의 남자만이 그런 환대를 위해 초청할 수 있었다.

4. 초청에는 환대 기간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양자가 합의하면 주인이 초청을 갱신할 경우 연장이 가능했다.

5. 방문객은 그에 대해 거부할 권한을 갖고 있지만, 이는 주인의 호의를 무시하는 처사로 받아들여져서 즉각 적대 행위나 갈등이 표출될 수도 있었다.

6. 일단 초청이 받아들여지면, 주인과 손님 역할은 관습법에 의해 규정된다. 손님은 아무것도 요청해서는 안 된다. 처음에 환대를 제의할 때 별것 없다고 말했다 할지라도 주인은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제공할 것이다. 손님은 대접받은 것에 대해 즉시 새로운 소식, 행운에 대한 예언 또는 감사의 표현으로 화답해야 하며 주인의 너그러움과 명예를 칭찬해 줘야 한다. 주인은 손님에게 개인적인 질문을 해서는 안 되며, 손님이 자발적으로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7. 손님은 주인의 보호를 받으며 거하다가 주인의 의무 구역을 벗어나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신약에 나오는 계명의 배경이 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환대와 너그러움이 크리스천 사이에서 종종 평가절하된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을 너그럽고 풍성한 잔칫집으로 묘사한다(사 25:6-9; 마 22:2-4). 환대는 좋은 관계를 맺게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환대는, 함께 식사하는 것이 그 당시에 대인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외부인은 함께 식사하며 교제 시간을 오래 가짐으로써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함께 먹을 것을 나누거나 오락이나 여흥을 즐길 때, 그들은 종종 상대방을 더 잘 이해하고 진가를 알게 된다. 보다 더 나은 업무 관계와 보다 더 효과적인 의사소통은 종종 환대의 열매가 된다.

 

   아브라함과 사라 시대에, 환대는 대개 주인의 집에서 이뤄졌다. 오늘날 이것은 언제나 가능한 것도 아니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접대 산업이 발달해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환대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대접을 하고 싶은데 당신 집이 너무 좁다거나 요리 솜씨가 너무 볼품없다면, 당신은 손님을 모시고 식당이나 호텔로 가서 우정을 쌓고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종업원이 당신을 도와줄 것이다. 더욱이 종업원은 자발적으로 사람을 즐겁게 하고 좋은 관계를 형성해 주고 쉴 곳을 제공하는 등 예수님이 포도주를 만드시고(요 2:1-11) 손님의 발을 씻겨 주시던(요 13:3-11) 때처럼 사람을 섬기기도 한다. 환대 산업은 GDP의 9퍼센트를 점하고 있으며 9800만 명의 사람을 고용하고 있다.[2] 거기에는 덜 숙련된 사람과 이주 노동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교인 중에서 빠르게 늘어나는 집단이기도 하다. 한층 많은 이가 무급으로 환대 산업에 종사하며 다른 이를 사랑, 우정, 긍휼, 사회적 약속의 일환으로 환대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례는 이 일이 하나님과 인류를 섬기는 데 아주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지 간에, 너그럽게 환대하도록 서로를 격려하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게 무엇이겠는가?

 

Victor H. Matthews, “Hospitality and Hostility in Judges 4,” Biblical Theology Bulletin 21, no. 1 (1991): 13-15쪽 초록에서 발췌

World Travel and Tourism Council, Travel and Tourism Economic Impact 2012, World (London: 2012), 1쪽.

자원과 권리를 사수해야 할 때를 분별하라 (창20:1-16; 21: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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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비멜렉이 왕으로 있는 그랄에 들어갔을 때, 아비멜렉은 무심코 환대의 규칙을 어겼으며 그 보상으로 아브라함에게 원한다면 어디서든 자유롭게 방목할 수 있도록 권한을 줬다(창 20:1-16). 후에 아브라함이 원래 팠으나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은 우물을 두고 다툼이 발생했다(창 21:25).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불평하는 소리를 들은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발의한 협약서에 서약하고 승인했다. 그 우물에 대한 아브라함의 권리를 공적으로 인정한 맹약이었다. 그 지역에서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는 맹약이었다(창 21:27-31).

 

   다른 곳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는 모습을 봐 왔다(창 14:22-24). 그러나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끈질기게 자기 권리를 주장했다. 21장 본문이 예배하는 것으로 끝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다시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은 듯하다(창 21:33). 따라서 그는 사업을 공개적으로 수행하고 적절한 법적 보호를 정당하게 이용하는 현명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모범이 됐다. 목축에서 물 공급은 꼭 필요했다. 아브라함은 물 없이는 동물, 일꾼과 가족을 지속적으로 공궤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물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그 권리를 확보할 수단까지 사수한 것은 중요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너그럽게 행동할 때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조직의 유익을 위해 자원과 권리를 주장해야 할 때를 분별해야 한다. 기계적인 답변으로 이끌 수 있는 일련의 규칙이나 규정은 없다.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 자원의 청지기가 되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목적이 자원을 포기할 때 더 잘 달성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보호할 때 그렇게 될 것인지가 늘 분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결정은 누가 옳으냐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결정이 우리 대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의 실례는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면을 강조해 보여 준다. 앞서 나왔던 롯과 더불어 땅을 분배하는 문제의 경우, 아브라함이 흔쾌히 선택의 우선권을 양보했던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좋은 업무 관계를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맹약 조건에 따라 우물에 대한 접근성을 요구한 지금의 경우에, 아브라함은 사업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자 했다. 게다가 아브라함의 강력한 주장은 그와 아비멜렉의 관계를 개선했다. 이 분쟁은 처음 아비멜렉을 만났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 입장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을 기억하라(창 20:2).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사다 (창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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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아내를 위한 매장지를 사기 위해 모범적인 협상을 진행했다. 그는 자신과 매도자의 필요를 다 감안하며 증인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협상을 진행했다(창 23:10, 11, 12, 13, 16, 18). 문제의 재산을 분명하게 적시했으며(창 23:9) 아브라함이 그것을 매장지로 사용할 의도임을 수차례 언급했다(창 23:4, 6, 9, 11, 13, 15, 20). 협상을 위한 대화는 지극히 분명했으며, 사회적으로 적절했고, 투명했다. 대화는 사업이 공적으로 이뤄지던 성문 앞에서 진행됐다.

 

   아브라함이 먼저 부동산 거래를 요청했다. 히타이트 사람(헷 족속)이 좋은 무덤을 무료로 제시했다. 이를 거부한 아브라함은 매장지로 쓰기에 적합한 동굴을 낀 벌판을 소유한 사람과 접촉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밭을 “충분한 대가”를 치르고 구매하겠다는 것이었다. 소유자인 에브론이 그 요청을 듣고는 그 땅을 선물로 주겠다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영구히 가질 것은 아니었으므로, 그는 공손하게 시가를 제시했다. 거래 협상에서 늘 그랬듯이 짐짓 꾸미는(잠 20:14) 대신에, 아브라함은 즉시 에브론이 제시한 가격에 동의하고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창 23:16) 지불했다. 이 표현은 부동산 매매에서 통용되던 표준 은화에 따라 거래했다는 의미다.[1] 아브라함은 충분히 부요해서 깎을 필요가 없었거나 땅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호의도 사고자 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브라함은 그 땅의 매매나 그에 대한 권리와 관련해 발생할 어떤 의문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결국 그는 동굴과 나무가 포함된 그 땅에 대한 권리 증서를 받았다(창 23:17-20). 그것은 사라의 매장지로 귀중하게 쓰였으며 후에 아브라함의 매장지가 됐고 나중에는 이삭, 리브가 및 야곱과 레아의 매장지도 됐다.

 

   이 문제와 관련해 아브라함의 행동은 정직과 뛰어난 투명성, 뛰어난 사업적 통찰력의 핵심 가치를 모범적으로 보여 줬다. 아브라함은 애통해할 뿐 아니라 아내의 시신을 잘 돌봄으로써 아내의 존엄성을 지켰다. 그는 그 땅에서 자기 위치를 알았을 뿐 아니라 장기적인 거주민을 존중하며 대했다. 또 사업을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행하며 증인을 세우기도 했다. 아브라함은 자기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했으며 협상 과정에 민감했고 그 땅을 선물로 주겠다는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아브라함은 합의된 금액을 신속히 지불했다. 그리고 그 땅을 그가 애초에 얘기했던 목적대로만 사용했다. 아브라함은 관련된 모든 이와 더불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Walton, Matthews, and Chavalas,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Old Testament, 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