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다니엘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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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을 따르면서 동시에 세속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형통할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일터에서 크리스천들은 매일 이 질문에 맞닥뜨리면서도, 답을 찾기가 너무도 어려워 대부분은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다니엘서의 중심인물인 다니엘은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바로 이 질문에 직면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에게 정복당했을 때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끌려온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에게 매우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 환경 덕분에 그는 바벨론 왕을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부패하고 불경스러운 바벨론 정부에서 발을 빼고 다른 유다 백성들과 함께 지내면서 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써야만 했을까? 아니면 바벨론의 권력과 영광의 삶을 누리고 사는 한편, 신앙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영역으로 치부해 자기 골방에서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서 살아야 했을까?

 

   다니엘은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공개적으로 계속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동시에 전도유망한 인생 경력을 쌓아 간다. 그가 어떻게 이런 험난한 물결을 헤쳐 나갔느냐 하는 이야기는 오늘날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의 지침서요, 동시에 연구 사례가 된다.

 

다니엘서의 큰 그림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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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서를 읽노라면 사뭇 당혹스러운 순간이 있다. 다니엘서는 바벨론 왕궁의 쾌락과 악에 동화되라는 압박을 받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의 상황을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그리면서 시작한다. 게다가 꿈과 환상, 그리고 예언 등이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점점 이상하게 전개된다. 그러다가 중간 지점쯤에서(7장), 본서는 기괴한 사건들과 생물들의 이미지군을 사용하여, 미래의 왕들과 왕국들의 흥망성쇠를 전조로 알려 주면서, 너무도 분명한 묵시록적 성격을 띤다.[1] 묵시록 장르는 해석이 어렵기로 유명하긴 하지만, 이 소재에서 일을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포인트를 찾을 수 있다. 아무튼 다니엘서는 또 다른 한 권 길이의 묵시록인 요한계시록처럼 일과 관련한 소중한 재료를 제공해 준다. 일의 신학을 위해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우연히도 다니엘서는 일터에서 일의 의미를 풀어놓는 데 필요한 안성맞춤 구조를 제공한다. 이 구조는 주제를 다음과 같이 A-B-C 순으로 소개한 다음, 다시 역순으로 되풀이해 나타낸다.​

 

  • 주제 A, 1부

    • 주제 B, 1부

      • 주제 C, 1부

      • 주제 C, 2부

    • 주제 B, 2부

  • 주제 A, 2부

 

   어느 주제가 어느 것인지를 독자들이 잘 따라가도록 도와주기 위해 저자는 각 주제 양쪽 부분에서 병행 요소들을 강조해 보여 준다. 예를 들면 다니엘서의 주제 A는 1부에 나오는 하나의 환상과 2부에 나오는 병행 환상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주제 B는 1부의 고난과 2부의 더한 고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조는 성경 여러 권에서 흔히 나타난다. 다니엘서에서 각 주제의 1부는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반면 각 주제의 2부는 좀 더 어렵지만, 그에 상응하는 1부로 돌아가 보라고 언급함으로써 어려운 단락들을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해 준다. 다니엘서에서 1장은 서론이며, 이어서 병행구들이 차곡차곡 포개진다.

 

  A. 이방 나라들이 전복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그것들을 대체하는 미래에 대한 환상: 2장     
     B.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 충성하는 증인들이 수난을 겪고 상급을 받음: 3장
          C. 이방 왕을 낮추시고 끌어내리심: 4장
          C. 이방 왕을 낮추시고
끌어내리심: 5장
     B.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 충성하는 증인들이 수난을 겪고 상급을 받음: 6장
  A.
이방 나라들이 전복되고 하나님의 통치가 그것들을 대체하는 미래에 대한 환상: 7-12장

 

   이 구조 덕분에 다니엘서의 큰 그림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포로로 잡혀 있는 부패하고 교만한 이방 나라들을 뒤엎으시러 하나님이 곧 오신다. 비록 그분의 백성이 지금은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이 신실함으로 감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능력이 움직이는 주요 수단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그들에게 지금 번성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 미래를 향한 밝은 소망, 그리고 현재의 생존과 미래의 약속 두 가지 모두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이 큰 그림이 오늘날의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또 이 큰 그림을 어떻게 적용할지 탐구해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앞서 간추린 여섯 가지 움직임들이 각각 어떻게 전체 주제와 총화를 이루는지 살펴볼 것이다.

 

 

다니엘 7-  12장에 나오는 환상은 수백 년에 걸쳐 바벨론, 바사, 애굽 그리고 헬라 제국이 연이어진 실제 사건들과 거의 맞아떨어진다. 이것은 특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단 11:31-39)와 딱 맞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의 기록 연대를 그의 시대인 BC 165년경으로 잡는다. 언어, 역사적 언급, 장르 등은 아주 복잡한 요소들이다. 이 책의 기록 연대는 예언들의 해석 방식에 채색을 더한다. 만약 그 연대가 대략 BC 165년경이라면 그 예언들은 예언의 모습, 그때의 (즉 그 사실 이후)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하는 것이 된다. 이 견해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다니엘서 자체의 신학을 약화시킨다는 점이다. 다가올 사건을 내다보는 예언자의 능력은 핵심적인 신학적 주제를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예언자가 미리 내다보도록 받았던 그 미래 사건들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실 수 있는 것이다. 늦은 기록 연대를 두고 오간 치열한 토론이 궁금하다면 J. J. Collins, Daniel, Hermeneia (Minneapolis: Fortress, 993)와 J. Goldingay, Daniel,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1989)를 보라. 전통적 보수적 견해는 J. Baldwin, Daniel, Tyndale Old Testament Commentaries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78)와 S. Miller, Daniel,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and Holman, 1994), T. Longman, Daniel,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9)에 있다. 어떤 경우든 간에 이 책에서 말하는 일을 이해하는 데 이 문제 해결이 직접 필요하진 않다. 이 논의에서는 이 책이 다니엘의 말과 환상을 BC 6세기의 다니엘의 것으로 돌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다 (단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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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서는 유다 왕국을 끝내 망하게 한 재앙으로 시작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BC 605-562년)은 예루살렘을 정복해 그 왕을 폐위시키고, 왕족과 귀족 청년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고대 근동에서 흔히 그랬듯이, 느부갓네살은 정복한 나라의 신전(여기서는 성전 - 옮긴이 주)을 약탈하고 자기 신당을 장식하려고 그 성전의 옛 보물들을 탈취해 감으로써 신들(여기서는 하나님)에게 앙갚음을 확실히 해 두었다(단 1:1-3). 느부갓네살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도 원수였다.

 

   사로잡혀간 청년들 가운데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있었다. 그들은 포로들을 새 주군의 왕궁에서 일할 충성스런 신하들로 개조시키는 세뇌 프로그램에 등록되었다(단 1:4-5). 이것은 하나의 기회인 동시에 도전이었다. 여기서 기회란 그들이 적국에서 잘 먹고 잘살 수 있다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살게 된 새로운 나라에 하나님의 권능과 공의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기도 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인 포로들에게 바로 그렇게 하라고 간청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4-7).

 

   다니엘은 하나님과 백성에게서 등을 돌리고 바벨론에 동화되라는 유혹에 봉착한다. 다니엘이 공부를 하던 과목에는 점성술, 동물 내장 연구, 정결예식, 제사 때 외우는 주문, 귀신 쫓기, 다른 형태의 점술과 마술 등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1] 이런 것들은 경건한 유대인에게 매우 혐오스런 일이었고,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세속 대학교에서 맞닥뜨리는 대다수의 것들보다 훨씬 더 다니엘의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었을 터이다. 거기에다 그와 그의 친구들은 과거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공표해 주던 자신들의 이름(‘엘’과 ‘야’ 부분)을 바꾸는 것까지 감수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앙과 충성을 지켜 주시리라고 확신했기에 그런 도전들을 포용했다. 그는 바벨론의 교육을 받아들였으나, 종주국의 이교문화에 실제로 동화되지 않게 선을 그어 놓았다. 그는 뜻을 정해 ‘자기를 더럽히기를’(단 1:8) 거부하면서 모든 훈련생들이 먹어야 하는 산해진미를 안 먹겠다고 맞섰다. 본문은 그 음식에서 무엇이 가증스러운 것인지는 명시하지 않는다.[2]

 

   음식을 둘러싼 문화와 전통은 강하다. 음식 관련법이 주변 나라들과는 현격하게 달랐던 유다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러했다(레 11장; 신 14장). 아마도 별도의 식단을 유지하는 건 다니엘에게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신체적 기량이 왕이 제공하는 음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입증했다. 또 다르게는 훗날 음식 취향 때문에 자신의 독립성을 타협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엄격한 식단을 고수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다니엘의 채식 논의에 한층 심오한 핵심 하나가 담겨 있다. 바로 하나님은 바벨론과 모든 나라 안에서 느부갓네살의 삶은 물론 다니엘의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까지 손수 개입하셨다는 사실이다. 1장은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단 1:2), 또한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9)라고 기술함으로써 다니엘서 맨 앞에다 이미 이 사실을 반영한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다른 후보생들보다 신체 발달 면에서 더 뛰어났다. 이것은 그들이 채식을 해서도, 또 그들이 천재여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기 때문이다’(단 1:17). 다니엘의 지혜는 왕의 교육자들이 베푼 엘리트 훈련이 아닌 다른 근원에서 왔다.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 1:20). 이것은 다니엘의 지혜,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불신 국가들과 그 왕들의 지혜와 능력보다 우월함을 보여 주면서, 다니엘서의 나머지도 같은 패턴으로 자리매김한다(단 5:14; 11:33-35; 12:3, 10).

 

   오늘날 일터의 크리스천들은, 포로로 끌려가서 (이를테면) 바벨론 ‘대학교’에 유학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랑 흡사한 경험을 많이 한다. 교회나 신학교 같은 기독교 기관에서 일하기로 마음먹거나, 오지로 물러가 그곳 공동체에서 사역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세상 일터를 벗어날 뾰족한 수가 없다. 직장은 (모두에게는 아니지만)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적절한 보수, 직업 보장, 전문인으로서의 성취와 진보, 편안한 근로 환경, 흥미롭고 창의적인 일 같은 개인적인 유익을 얻을 다양한 기회를 제공해 준다. 물론 이런 요소들은 자신들에게야 좋다. 하지만 두 가지 심각한 악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1) 물질적인 좋은 것들에 혹한 나머지, 그것들을 기꺼이 내놓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위해 과감히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 (2) 스스로 노력해서 좋은 것을 얻을 수 있고, 심지어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을 섬겨야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어 영적인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거기에다 일터는 종종 그 자체로도 좋지 않은 속임수, 편견, 가난한 자나 힘없는 자에 대한 학대, 불건전한 욕망에 영합하기, 도움이 꼭 필요한 처지의 누군가에게 사기 치기 등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다니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게 좋고 나쁜지를 알기란 어렵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점성술을 연구하는 것은 좋은 일, 또는 받아들일 만한 일이었을까? 점성술 속에 자리 잡은 미신에 홀리지 않으면서도 하늘에 관한 지식을 활용할 수 있었을까? 크리스천들이 마케팅을 공부하는 것은 괜찮은가? 속임수 광고나 착취적인 홍보를 하지 않으면서도 소비자 행동 관련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가? 다니엘서가 이와 관련한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핵심적인 관점들을 제시한다.

 

  • 크리스천들은, 비록 크리스천의 책임 영역을 벗어나 행해지는 교육이라도, 받긴 받아야 한다.

  • 크리스천들은 비기독교적인, 심지어 적대적인, 작업환경에서 하는 일도 수용해야 한다.

  • 비기독교적인 또는 반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은 주변 문화에 무비판적으로 동화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 실천에는 다음과 같은 실천 항목들이 있다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과 친교하기. 다니엘은 평생 동안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고(단6:10), 업무상 어려운 때에는 특별한 헌신을 했다(단9:3-4, 16-21). 자기 직장생활을 놓고 실제로 구체적인 기도를 하는 크리스천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나님은 매일 일과의 구체적이고 소소한 일들까지 돌아보신다는 것을 다니엘서는 계속 보여준다.

다소 임의적인 것들이 있다 해도 신앙의 물리적 표지들을 견고히 지탱하기. 다니엘은 왕이 하사한 기름진 음식과 포도주를 피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타협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특별한 실천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나 다 요구하시는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믿음은 매순간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생생하게 드러내야 한다. 칙필레(Chick-fil-a: 미국 조지아주에 본사를 둔 치킨 패스트푸드 식당 체인. 창업주와 사장이 크리스천이며 주일에는 반드시 쉰다 - 옮긴이 주)는 주일 영업을 하지 않는다. 많은 가톨릭 의사들이 인위적 피임을 위한 처방을 해 주지 않는다. 어떤 크리스천들은 직장 동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정중하게 허락을 구하기도 한다.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사실 보편적인 요구 조건은 아니다. 다른 크리스천들에게 논쟁의 소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각각은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지속적이고 공적으로 자기 신앙을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 이로써 그들은 서서히 스며드는 동화(同化)의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같은 직종 내 크리스천들과 적극적으로 단합하고 책임의식 갖기. “왕이 또 다니엘의 요구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세워 바벨론 지방의 일을 다스리게 하였고 다니엘은 왕궁에 있었더라”(단 2:49). 그러나 자신과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호 관심사, 의문 사안들, 그리고 성공 · 실패담을 나눌 수 있는 모종의 포럼을 갖는 크리스천들은 드물다. 크리스천 변호사들이 다른 크리스천 변호사들과 주기적으로 의도적인 토론을 나누지 않고서 어떻게 신앙을 법에 적용하는 노하우를 배우겠는가? 엔지니어, 예술인, 농부, 교사, 학부모, 마케팅 관리자 및 다른 모든 직업인들도 마찬가지다.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런 종류의 그룹들이 매우 필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좀체 생겨나질 않는다. 

자기 일터 비신자들과 좋은 관계 형성하기. 하나님은 다니엘의 식사 담당관인 환관장을 감화하셔서 은총과 온정을 베풀게 하셨다(단 1:9). 다니엘은 하나님과의 협력 아래 그 관리를 존대했고 그의 안전까지 돌보았다(단 1:10-14). 크리스천들은 때때로 동료들을 적으로 만들거나 비판함으로써 신앙인의 길을 벗어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8)라고 명하신다. 자, 이제부터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 주시도록 매우 구체적으로 기도하자. 

소박한 생활양식 선택하기.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 가치관이나 미덕에 어긋나는 무엇인가를 하도록 강압을 받더라도 돈, 지위, 권력 등에 대한 집착이 당신의 직업이나 경력을 위태롭게 또는 가로막지 못한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의 교육과 특권, 그리고 부의 최고봉에 이르렀지만, 계속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 모든 것을 잃을 경우에 늘 대비했다(단 2:24; 3:12; 4:20; 5:17; 6:10,21).

 

   다니엘은 종교적·도덕적 타협 없이도 부분적인 문화적 동화라는 줄타기를 해냈다. 물론 매우 위험한 길이었다. 다니엘의 경력은 물론 목숨까지도, 바벨론의 최고위 관리 환관장 아스부나스의 목숨처럼, 아슬아슬한 줄 위에 놓여 있었다(단 1:10). 그러나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고결함을 다잡아 지탱해 나갔다. 나중에는 다니엘의 원수들조차 인정하게 된다.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4).

 

 

 

Goldingay, Daniel, Word Biblical Commentary, 16-17쪽.

유대 율법에서 포도주를 허용했고, 또 후에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먹어도 될 만한 고기를 찾아낸 이야기가 나온다(단 10:3). 그러므로 음식에 대한 규례에서 기술적인 세부 사항은 까다로운 쟁점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당시 왕이 차려 준 음식을 거부한다. 후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 고기를 먹을 때 양심의 거리낌 같은 것을 느끼는 장면이 떠오른다(고전 8:1-13). 가장 알맞은 설명은 다니엘이 동화되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동화 견해에 대해서는 Goldingay, Daniel, Word Biblical Commentary, 19쪽과 Collins, Daniel, Hermeneia, 143쪽을 보라. 왕의 음식 명령을 거부한 데 대해서는 Longman, Daniel,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53쪽을 보라

주제 A :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뒤엎으시고 그분의 나라로 바꾸실 것이다 (단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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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은 적대적인 영토 한복판에서 형통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던 반면, 느부갓네살은 아무도 자기 권력에 도전하지 않는데도 자기 땅을 다스리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제국의 안전을 염려하느라 꿈자리마저 뒤숭숭해졌다. 한번은 꿈속에서 서로 다른 여러 금속 재료들로 세워진 높은 신상을 보았다. 그 거대한 신상이 돌에 맞아 박살이 나고,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했다(단 2:35). 느부갓네살의 술객들과 박수들, 그리고 점성술사들 그 누구도 왕에게 이 꿈을 해석해 주지 못했다(단 2:10-11). 하지만 다니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의 꿈과 그 해석을 왕에게서 듣지 않고도 동시에 알았다(단 2:27-28).

 

   느부갓네살의 교만과 하나님께 의존하는 다니엘의 겸손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사건이다. 느부갓네살과 그의 바벨론은 교만의 전형이다. 다니엘의 해석에 따르면, 그 신상의 엄청난 금속 성분들은 바벨론 왕국과 그 뒤를 이을 나라들을 나타낸다(단 2:31-45).[1] 점성술사들이 왕에게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단 2:4)라고 인사를 한 것은 왕 자신이 권력과 위엄의 원천인 양 허세 떠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들과 달리 왕에게 두 가지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 왕의 나라는 왕이 잘해서 얻은 결과물이 아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다’(단 2:37). 그러므로 왕의 모든 교만은 어리석고 헛되다.

  • 왕의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다. “손대지 아니한 돌이 산에서 나와서 쇠와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서뜨린 것을 왕께서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은 참되고 이 해석은 확실하니이다”(단 2:44-45). 비록 이 일이 왕의 시대에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이룩했다는 굉장한 업적들을 무(無)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다니엘의 ‘겸손한 품성’과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의존’은 그를 형통케 만든 비장의 무기였다. 겸손은 그가 왕에게 직접 왕국의 소멸을 예고해 주어야 하는 실로 대책 없는 자리에서까지 그를 형통하게 했다. 다니엘은 자신의 개인적 능력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능력과 지혜가 있으시다. “지혜자나 술객이나 박수나 점쟁이가 능히 왕께 보일 수 없으되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단 2:27b-28a).

 

   놀랍게도 이 겸손한 태도가 왕이 귀에 거슬리는 다니엘의 메시지를 용서하고 용납하게까지 이끌었다. 왕은 자신의 점성술사들을 한꺼번에 모조리 처형할 기세였다가, 오히려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단 2:46) 이어서 그를 세워 바벨론 온 지방을 다스리게 하며, 바벨론 모든 지혜자의 어른을 삼았다(단 2:48). 더 나아가 느부갓네살이 어느 정도는 여호와를 믿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단 2:47).

 

   오늘날 일터의 크리스천들에게 이것은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 하나님은 모든 일터에서 일어나는 교만, 부패, 부정과 폭력을 반드시 끝내신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또한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이것이 위로가 되는 것은, 일터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을 바로잡아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바라며 신실하게 행동할 책임을 다하면 된다. 지금의 고난이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에 맞서 도전하라고 하신다. 도전의 이유는 무엇일까? 경력을 희생시키고라도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의 악을 대적하라는 부르심을 현재 받았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에게 매우 심각한 메시지를 전해야 했던 다니엘은 두려움에 싸였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 4:27).

  • 우리는 자신의 지혜를 주장하지 않은 다니엘처럼 자기 의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겸손해야 한다. 1장에서 왕의 수라상에 차려진 진미를 먹으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다니엘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한 가지 요청을 한다.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요청한 것이다(단 1:8). 그런 다음 상대방 관리의 관점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자신의 신앙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자기 상사를 궁지로 몰아넣지 않을 타협안을 찾아낸다.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해 보십시오’(단 1:12).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자칫 완고함이나 호전적인 성향이 그리스도를 위한 처신이라고 혼동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교훈은 다니엘서를 우리의 직장생활에 응용할지 응용하지 않을지 기로에 서게 한다. 하나님께 신실하려면 때로 권력자들에게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다니엘과 달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받지 못한다. 우리가 뭔가를 강하게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니엘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하물며 우리는 얼마나 더 겸손해져야 하겠는가? “지난밤 꿈에서 하나님이 말이야 내가 당신네들 모두보다 높은 자리로 승진한다고 하셨어” 같은 말은, 가능한 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좋을 말이다. 그 내용을 우리가 직접 말하라고 하나님이 인도하실 리 없으며, 만약 그들이 알기를 바라신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들에게 알게 하실 것이다.

 

2장의 신상에 나오는 금속들과 7장의 왕국에 나오는 짐승들은 바벨론, 메데-바사, 그리스, 로마라는 네 개의 지상 왕국이 이어진 것을 표현한 듯하다. 또 다른 견해는 그 일이 2세기의 바벨론, 메데, 바사 그리고 그리스에 해당된다고 주장하는 견해다

주제 B : 하나님께 충성하는 증인들이 수난을 겪고 상급을 받다 (단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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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의 제국을 내치기로 준비하셨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겸손으로 행한 다니엘을 왕의 궁정에서 형통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교만이 새로 발동되면서 고난당할 위기에 처한다. 1, 2장과 달리, 3장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 때문에 그들이 고난을 겪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 한가운데서도 그들의 충성에 맞는 상으로 갚아 주신다.

 

   한편 느부갓네살은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복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복될 자신의 제국을 보전받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하나님의 손이 다니엘 위에 머물러 있음을 느부갓네살에게 인식시켜 준 바로 그 꿈 때문에 그는 금 신상을 세우고 모든 신민들이 그 신상에 절하도록 강요하기에 이른다(단 3:1, 5-6). 그 신상은 바벨론 왕의 교만이 되살아났다는 표시였다. 또한 “두라 평지”에 그 거대한 구조물(높이 27미터)을 세워 신상의 위압적인 모습을 더욱 과시했다(단 3:1).

 

   왕 앞에서 창피를 당한 왕의 술사들은 다니엘에게 복수할 기회를 노렸다. 그들은 되살아난 왕의 교만을 이용해 다니엘의 친구들이 신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참소했다(단 3:8-12). 친구들은 자신들의 죄책을 인정했지만,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는 왕의 위협에도 끝내 신상에는 절하지 않았다(단 3:13-18). 그들은 바벨론 왕궁의 이교적인 환경과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충성 사이의 긴장을 몇 년 동안 성공적으로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들의 고결함을 버리지 않고는 타협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다. 전에 그들은 적대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따름으로써 어떻게 번성할 수 있는지 본을 보였다. 이제 그들은 똑같은 환경에서 어떻게 고난을 견뎌 내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그들은 이것을 즐기면서 견딘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6-18).

 

   오늘날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이처럼 극단적인 적대 환경에 처하는 경우는 (적어도 서구 세계에서는) 드물다. 그러나 선한 양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라는 요구를 받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더러는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와 우리가 휘두르는 권력, 우리가 오용하는 대인관계나 우리가 하는 타협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일에서 바라시는 바를 이미 타협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노’(No)라고 말해서 해고되거나, 스스로 사직하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누군가를 옹호하거나, 내부고발자가 되는 등, 어떤 경우든 우리에게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행하려면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해서 세상 권세자들의 압제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반드시 막아 주시리라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크리스천으로서의 노동은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니라, 도리어 지속적으로 고난을 당할 위험을 안겨 준다.

 

   이 에피소드가 특히 통렬한 까닭은, 다니엘과 친구들이 살았던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너무도 흡사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만약 당신 상관의 성추행이나 데이터 조작 같은 쟁점을 들추어 제기할 경우, 당신은 징계를 받거나 승진이 늦추어지거나 명예가 실추되거나 오해를 받거나 해고당할 수 있다. 혹 당신이 그 횡포를 종결짓고, 적대자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이미 실추된 당신의 명예를 돌이키기란 쉽지 않다. 당신이 옳았음을 입증하기가 너무나 힘들고, 다른 직원들은 이런 일에 개입하기를 극도로 꺼리고, 조직은 문제의 진짜 원흉과 함께 당신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조직을 보호하려 할 것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하나님이 자신들의 문제에 개입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스스로에게 기대치가 있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최악을 예측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버리지 않았다. 그게 올바른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본으로 삼아야 할 모습이다. 일터에서 낮은 자세로 진리를 명료하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전 미군 합참의장 피터 페이스(Peter Pace) 장군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지적 용기’를 참으로 높이 산다. 지적 용기란, 높은 권력층 사람들로 가득한 방 안에 앉아 하나의 대화가 일방통행 하는 것을 보다가 뭔가 옳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 ‘저는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하고 말할 줄 아는 용기다.” [1]

 

   실제 삶에서 용기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따르는 위험을 알았고, 그래서 자신들이 확신을 굽히지 않을 경우 닥칠 결과도 알아서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우리도 우리의 일터에서 윤리적인 경계선이 어디인지를 알고,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뭔가를 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어떻게 할지를 사전에 생각해 두어야만 한다. 오랫동안 하버드경영대학원에 몸담고 있는 한 교수는 “‘저는 못 합니다’라고 말해야 할 상황을 미리 제대로 알고, 근무하게 되는 직장마다 사직용 멘트를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감언이설에 속아 한 단계 한 단계 서서히 무슨 일이든 다 하게 될지도 모른다”라고 충고했다.[2]

 

 

Peter Pace, “The Truth as I Know It,” interview by Al Erisman and David Gautschi, Ethix 61 (September 2008),  referenced online at blog.spu.edu/ethix/2008/09/03/the-truth-as-i-know-it.

 2010년 4월 익명의 사람이 TOW 프로젝트에 투고한 내용이다. 

주제 C : 이방 왕을 낮추시고 끌어내리시다 (단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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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서 4-5장을 함께 읽어 보자. 4장은 교차 대구법의 주제 C를 소개하고, 5장은 그것을 다시 재현한다. 이 두 장에서 하나님은 이방 왕을 낮추시고 폐위시키신다. 바벨론의 장엄함은 느부갓네살의 낮아짐이 드러나는 4장과 벨사살 왕이 죽음을 맞는 5장의 공통 배경이다. 4장에서 바벨론의 장엄함과 느부갓네살 왕의 오만함은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왕은 또다시 뜻 모를 꿈에 시달린다. 그는 ‘하늘에 닿은’(단 4:11) 엄청나게 큰 나무를 보았는데, 그 나무는 모든 동물들에게 과일과 그늘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한 순찰자’(단 4:13)가 내린 명령에 그 나무는 잘려 나가고 짐승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꿈에서 나무 밑 둥지가 사람이 되었는데, 그 사람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바뀌었고, 상당 기간을 짐승들과 초목들 사이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단 4:13-16). 왕은 다니엘에게 그 꿈을 해석하라고 명령했으니, 다니엘은 다시 한 번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이 군주에게 불쾌한 소식을 전하라는 요구를 받은 셈이었다(단 4:18-19).

 

   꿈에서 나무는 느부갓네살을 상징하며, 그가 교만 때문에 벌을 받고 미쳐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 때까지 야생동물처럼 살게 되리라는 내용이었다(단 4:25). 엄청나고 가혹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느부갓네살은 계속 교만으로 버텼고, 심지어는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단 4:30)라고 자랑까지 했다. 결국 그는 꿈에서 예고한 그대로 벌을 받았다(단 4:33).

 

   그러나 책망조로 했던 다니엘의 해석이 아마도 그에게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다. 광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왕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그의 정신과 왕국이 다 회복되었기 때문이다(단 4:34-37). 다니엘이 취한 행동의 목적은 재앙이 닥치기 전에 교만을 버리라고 왕에게 설득하는 게 아니었으나, 결국 그것이 왕의 회개와 이후의 회복을 위한 문을 열어 주었다.

 

   때로는 우리가 존중하며 지켜 나가는 원칙이 우리 직장까지 변혁시킬 수 있다. 국제 경영 컨설팅 회사의 한 컨설턴트가(여기서는 그를 빈스라고 부르겠다) 자만심이 다소 과한 한 사람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1] 빈스는 그 회사 고객사 가운데 하나인 대기업에서 전도양양한 젊은 직원들 팀의 컨설팅을 맡았다. 새 프로젝트를 착수하며 그 회사 간부 한 명이 팀원들에게 격려 차원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팀원 중 한 사람이(이 사람은 게리라고 부르겠다) 그 자리에서 간부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프로젝트의 타당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출범하기 전에 우리는 컨설팅 회사들이 고객들에게 실제로 가치를 더해 주는지 평가해 봐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과를 내는 데 이런 식의 연구가 생각만큼 유용하지 않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거든요.”

 

   간부는 뒤이어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나중에 빈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게리를 팀에서 빼시죠.” 빈스는 형제를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마 18:22), 게리가 태도를 바꿀 여지가 있는지 한번 알아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크긴 했지만, 한 번의 실수로 그의 경력에 흠을 내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간부는 답했다. “당신에겐 2주의 시간이 남았어요. 당신 역시 위태로워질 수 있습니다.”

 

   빈스에 의하면, 게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프로젝트의 타당성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그 일에 전력투구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간부도 게리의 변화를 깨달았고, 프로젝트가 끝난 뒤 마무리 모임에서 게리를 불러 특별히 공로를 인정해 주었다. 빈스의 태도가 게리와 회사 모두에게 변화를 가져다준 것이다.

 

윌리엄 메신저(William Messenger)가 2010년 1월 17일 진행한 전화 인터뷰 내용이다. 요청에 따라 실명은 밝히지 않겠다.

주제 C로 되돌아감 : 이방 왕을 낮추시고 끌어내리시다(단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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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장에서 소개했던 대로 주제 C는 이방 왕을 아예 폐위시키는 게 아니라, 그를 낮추는 데 주안점을 둔다. 이 주제는 5장에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이라는 관점으로 다시 살펴본다. 바벨론의 사치는 고대 사회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1]

 

   우선 바벨론은 두 겹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였는데, 바깥 성벽은 길이 17킬로미터, 높이 12미터에 이르렀다. 행차를 위한 대로는 반짝이는 푸른색 벽돌로 장식된 이슈타르 문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이 도시의 여덟 개 성문 가운데 하나였다. 성 안에는 50개의 신전과 수많은 궁전들이 있었다. 고대 역사가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던 유명한 ‘공중정원’은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그러나 BC 562년에 당시 중무장을 하고 있었던 느부갓네살 왕이 죽고 난 이래 이 도시의 함락까지는 20년이 채 안 걸렸다. 그의 사후 바사의 고레스 왕(BC 559-530년)이 BC 539년에 큰 저항도 겪지 않고 그 성을 점령했다.

 

   이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정치 지형의 변화를 이 도시가 멸망하던 날 밤, 당시 바벨론의 새로운 통치자 벨사살 왕의 궁전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관점에서 서술한다.[2] 벨사살은 호화로운 잔치 자리에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 온 유다의 거룩한 잔으로 술을 마심으로써 부정하게 만들었고, 진탕 마시고 놀면서 취하는 자리로 만들어 타락하게 함으로써 여호와를 모독했다(단 5:1-4). “그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썼다(단 5:5). 웅대한 바벨론 제국의 오만한 통치자였던 벨사살은 벽 위에 나타난 글씨에 너무도 놀라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두 무릎이 맞부딪칠 정도로 떨었다(단 5:6). 왕도, 그의 박수들과 술사들과 점쟁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글자를 해독해 내지 못했다(단 5:7-9).

 

   오직 다니엘만이 그 멸망의 메시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단 5:23).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단 5:27).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단 5:28). 그리고 실제로 그날 밤에 바벨론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했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다(단 5:30-31a).

 

   마침내 하나님이 악한 왕국을 멸망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우리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최후 승리가 하나님 백성들의 큰 희망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는 우리를 심으신 그 자리에서 활짝 꽃피어야 한다. 기회가 주어질 때 우리는 반드시 변화를 일으킬 수 있고, 또 일으켜야만 한다. 다니엘서의 모든 페이지에서 보았듯이 물러나지 않고 참여해야 한다.

 

   단, 세상에 참여하면서 성공을 기대하거나 또는 주변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우리는 피해 갈 수 있을 거라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타락한 세상 한가운데서 일어나는 모든 선한 일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실 때 올 비할 데 없는 선하심을 맛보는 데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라. 궁극적으로 “너는 누구 편에 서 있느냐?”라는 질문이 “너는 최근에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E. Klengel-Brandt, “Babylon,” Oxford Encyclopedia of Archaeology in the Near East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251-256쪽; Bill T. Arnold, Who Were the Babylonians? (Atlanta: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2004), 96-99쪽.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의 후손이 아니라 군부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나보니두스 왕(BC 556-539)의 아들이며 섭정이었다.

주제 B로 되돌아감 : 하나님께 충성하는 증인들이 수난을 겪고 상급을 받다 (단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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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점에서 다니엘서의 교차 대구법 구조는,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들이 이방 나라가 지속되는 동안 고난과 보상을 동시에 경험한다는 주제 B로 되돌아간다. 6장은 바사의 군주 다리오 대제(BC 522-486년) 통치기에 꾸며진 음모로 다니엘의 생명에 위협이 닥치는 이야기를 풀어 간다.

 

   다니엘은 탁월한 역량으로 새 제국에서 왕 다음가는 통치자로 승진한다(단 6:3). 그러나 그의 정적들은 그가 가진 유일한 약점, 곧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니엘의 습관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다리오 왕은 그들에게 속아 왕을 대상으로 기도하는 것을 제외한 일체의 종교 행위를 30일간 금하는 칙령을 반포한다. 위반할 경우 사자 굴에 던져지는 형벌을 당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다리오 왕은 전통에 따라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단 6:8) 그 칙령을 다시 폐지할 수가 없었다. 당대 최고 권력자였지만 다리오 왕은 스스로 묶이다시피 해, 자신이 총애하는 총리를 구출해 낼 수가 없었다. 왕은 다니엘에게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단 6:16)라고 시인했다.

 

   그러고는 주님의 천사가, 왕이 바라기는 했으나 단행할 수는 없었던 그 일을 실제로 행했다. 다니엘은 밤새도록 사자 굴에 내던져져 있었으나 털끝 하나 상하지 않은 채 아침까지 살아 있었다(단 6:17-23). 이 사건 이후 왕은 다니엘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유다 백성들이 계속 하나님을 경배하면 멸절시킨다는 위협을 없앤다는 칙령을 반포했다(단 6:26-27). 메대와 바사의 돌이킬 수 없는 법조차도 하나님 백성의 멸절을 담보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권능은 인간의 농간과 왕의 지시까지도 능히 이기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그 와중에 우리들 대부분이 고난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겪었다. 비록 끝내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정부 지원 아래 요인 암살 기도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단 6:4-6), 호된 경험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양심 때문에 대놓고 왕의 칙령을 어기는 것은(단 6:10-12) 비록 용감하긴 했지만 위험한 일이었다. 다니엘은 즉각 체포되어 사자 굴에 던져지는 고난을 당했다(단 6:16-17). 다니엘이 결국 구출되었으니(단 6:21-23) 그가 당한 경험을 그다지 고통스럽거나 힘든 게 아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에 대한 다니엘의 신실한 증언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 다니엘은 자기 힘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확신하던 과업에만 자신을 국한시키지 않았다. 사자 굴에 던져지는 것을 연습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지 않은가! 그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할 일을 해 나갔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기도했다(단 6:10). 그가 직면하는 모든 어려운 이슈마다 하나님을 인정했다. 우리 역시 스스로의 힘으로는 우리의 소명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 다니엘은 먼 훗날 예수님께서 주실, 우리의 일터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소명(마 5:13-16)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심지어 다니엘의 정적들마저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단 6:5) 하고 인정한다. 이것은 다니엘이 어려운 상황에 진리로 맞서서 실제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음을 뜻한다. 이런 일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진리를 위한 입장에 신중하게 서고, 그것으로 인해 왕이 새 칙령을 반포하게끔 할 때 여러 차례 일어난다(단 2:46-49; 3:28-30; 4:36-37; 5:29; 6:25-28).

  • 변화를 이끈 다니엘의 성공담을 보면, 하나님은 어그러진 사회 속의 일상적인 통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 결국에는 현 정권을 교체할 의도가 있다 해서, 그분이 지금의 정권을 더 정의롭고 열매가 풍성하며 생기가 넘치도록 만드는 데 관심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니엘서의 일의 신학이 각 일꾼에게 묻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누구의 나라를 세우고 있습니까?” 다니엘은 세상 왕국들 편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탁월하게 해 나갔다. 또한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서의 고결함(integrity)을 유지했다. 그가 이방 왕을 섬김 것은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에서 그리한 것이었다. 크리스천 일꾼들은,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성이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를 초월한다는 것을 알아 지금 여기에서의 일에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주제 A로 되돌아감 :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뒤엎으시고 그분의 나라로 바꾸실 것이다 (단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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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지점에서 다니엘서는, 하나님이 언젠가는 타락한 이 세상 나라들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실 것이라는 첫 번째 주제로 우리를 다시 데려간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 이 땅에서 포로로 살아갈 동안 용케 잘해 나갈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현재 상항을 최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기쁨을 내다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가 필수 덕목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바로잡으러 돌아오실 때까지 인내해야 한다. 인내는 고전철학과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공히 칭송하던 덕목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똑똑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남들보다 더 오래 문제를 붙들고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에도 ‘인내’ 항목이 등장한다. 신약 성경도 인내의 가치를 확증해 준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크리스천은 하나님 때문에 인내하며, 하나님께 힘을 받아 인내한다. 그것은 인간적인 고결함이나 존귀함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오래 참음은 하나님께서 해 주신 영원한 언약적 약속의 진실함에 달려 있다.

 

   다니엘서는 7장 서두부터 장르상 묵시문학과 같다. 특별한 종류의 예언 말씀인 묵시문학은 마지막 때의 대격변이라는 사건을 그린다. 그것은 초기 유대–기독교 문학에 폭넓게 유포되어 있었다. 묵시문학에는 풍부한 상징주의(단 7장), 선과 악 사이의 최후의 우주적 전투(단 11:40-12:4), 그리고 예언자에게 환상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하늘의 해석자(단 7:16, 23; 8:15; 9:21-23; 10:14)에 관한 묘사 등이 많이 등장했다. 예언자는 그 환상이 성취될 때까지 인내하라는 권면을 받는다(단 7:25-27; 9:24; 10:18-19; 12:1-4, 13). 이런 문학 양식은 인내에 관한 기자의 메시지를 강조해 준다.

 

   7-12장은 다니엘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환상들을 어떻게 받았는지, 일인칭 간증 형식으로 차례차례 이야기한다. 그 최종 결과는, 하나님의 백성이 독재자의 손 아래서 환란을 당하지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구원자가 이룩할 승리로 끝난다는 일련의 예언이다. 이 책은 다니엘에게 인내하라는 권면으로 마무리된다. “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단 12:12-13).

 

   이 장들(단 7:21, 25; 9:26; 10:1)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압제를 들 수 있다. 역사적으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1]로 알려진 이 압제자를, 충격적인 초현실적 이미지로 묘사했다. 그는 사악한 “작은 뿔”(황폐하며 혐오스러운 것. 다니엘 11장 21절에 나오는 “한 비천한 사람.” 자기 조상들의 전통적인 신들을 배척하고 자신을 최고의 신으로 삼는다)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7-12장에 나오는 일하는 크리스천들을 위한 확신의 메시지는, 우리도 살아가면서 충실하게 일하면 보상을 받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 땅에서는 사회에 선을 행한다고 해서 반드시 보상받는 것은 아니다. 상당히 많은 경우, 그 결과조차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왕의 마음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돌려놓았다. 그러나 왕은 얼마 안 가 또다시 옛 자아로 돌아가곤 했다. 우리 일터에서 우리가 빛과 소금으로써 하는 역할은 악을 저지하지만 종종 항구적인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유는 될 수 없다. 우리의 수고의 열매는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완전히 볼 수는 없을 것이다. 

John Whitehorse, “Antiochus,” Anchor Bible Dictionary, ed. David Noel Freedman (New York: Doubleday, 1992), 269-270쪽.

다니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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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계속 신실함으로써 어떻게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을 뿐 아니라 번성할 수 있는지에 희망적인 그림을 제시해 준다. 다니엘서에 따르면,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에서 개인들과 사회의 일상적 삶을 깊숙이 돌보신다. 하나님은 일상생활에 직접 개입하시며, 또한 압제를 당하는 통치 아래에서도 형통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기적적인 은사를 다니엘에게 주신다.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서가 충성에 대한 대가가 곧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약속을 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도리어 다니엘서는 유한한 인간의 삶에서 고난과 보상을 동시에 약속하며, 신실함과 고결함이 이 세상에서는 물론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서 잘 사는 열쇠라는 걸 증명해 보인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직장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여러 면에서 실천 모델이 된다. 문화 참여, 신실함과 덕을 길러 주는 평생 습관, 크리스천 동료들과의 친교, 소박한 생활양식, 비신자들과 친구 되기, 참된 겸손 보이기, 일터의 여러 상황에서 원칙에 입각한 입장 표명하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도전 받아들이기, 어떤 일이 주어지든 탁월하고 근면하게 해내기, 일터에서 크리스천다운 신실함을 유지한 대가가 고난일 수도 있음을 기억하기,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까지, 그래서 우리의 충성스런 수고에 상을 주실 때까지 인내하기 등등.

 

   우리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자신들이 건짐을 받을지 타 죽을지 알지 못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실함이 세상적인 성공으로 나타날지 실패로 나타날지 사전에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처럼 우리도 우리 일터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