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 열왕기 · 역대기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사무엘 · 열왕기 · 역대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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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및 역대상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분야는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법률적 측면을 포함해서 ‘왕’이 하는 일이다. ‘지배권 소유’의 양식인 다스림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과업 중 하나이며(창 1:28), 리더십이나 통치는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및 역대 상하에서 중심 무대를 차지하는 주제다. ‘이스라엘 민족은 누가 다스려야 하고,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기관이 잘 다스려지면 백성은 번성한다. 반대로 훌륭한 통치가 깨지면 모두가 고통받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우리가 살펴볼 일꾼은 왕뿐만이 아니다. 첫째로, 왕이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군인, 건축가, 장인, 제사장 같은 다른 사람 일에 영향을 미친다. 사무엘서, 열왕기 및 역대기는 왕이 하는 일이 다른 일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두 번째로, 통치하는 일 외에도 왕이 해야 할 여러 일이 있는데, 이 책들은 특별히 ‘자녀 양육’에 관심이 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역사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책들은 전체적으로 백성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많은 경우 이는 왕의 일에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의 일을 이야 기함을 뜻한다.

 

   이 책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서, 우리는 이스라엘 왕들의 리더십과 통치 과업을 집중해서 조명하는 동시에, 기술된 다른 여러 종류의 일꾼도 알아보고자 한다. 여기에는 군인, 장군, 사사와 민간 지도자(흔히 “장로”라고 불리는 사람), 부모, 목자, 농부, 요리사, 제빵사, 포도원지기, 음악가, 예술가, 투자가, 기업가, 외교관(공식 및 비공식 모두), 시위자, 활동가, 정치 자문관, 기술자 및 장인, 건축가, 감독관, 석공, 벽돌공, 금속공, 목수, 무기 제조업자, 우물 지킴이, 유류 무역상, 치유사, 계집종, 전령, 벌목공, 회계사 등이 포함된다. 물론 선지자와 제사장도 포함되는데, 이 주석 시리즈의 초점이 비종교적인 일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종교적 범주를 벗어나 그들이 일에서 하는 역할만 조명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다.

 

   오늘날 거의 모든 분야 일꾼이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에 망라되어 있거나, 이 책에서 그들이 하는 실무에 적용할 수 있는 사항을 찾아볼 수 있다. 실무에(통치나 리더십이 우리의 주 업무인 경우를 제외하고,) 이제 우리는 특정한 직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에 대한 실무 지침을 찾기보다는 훌륭한 통치와 리더십이 우리 일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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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들은 이스라엘이 왕정 통치 국가가 되어 감에 따라 왕이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춘다. 이야기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리더십 규범들, 윤리와 미덕을 오랫동안 어기면서부터 시작된다. 거의 200년 가까이 “사사들”(임시 지도자)이 계속 뒤를 이어가며, 점점 더 악랄하게 통치한 결과 이스라엘은 만신창이가 됐다. 안타깝게도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몰락으로 끝나고, 성경 시대 동안에 다시는 회복되지 못 했다. 이런 모습은 통치를 연구하기엔 전망이 썩 밝지 않아 보인 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인도하심을 백성이 따르든 안 따르든 상관없이 역사 안에 항상 증거하신다. 수천 년이 지난 후에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들의 성공에서 배우고 실패에서도 배운다.

 

   이 책들이 취한 기본적인 신학적 입장은, 만일 왕이 하나님께 신실하다면 그 나라는 경제, 사회, 군사적으로 번성하지만, 신실하지 않다면 국가적 재앙이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이다. 오늘날 용어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최고위 정부 지도자의 행동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맞이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치는 정치 기관, 민간 기관, 영리 기관, 비영리 기관, 학술 기관, 아니면 다른 어떤 기관이든 간에 모든 종류의 공동체나 조직에서도 필요하다. 이 책들 이 남긴 교훈은 오늘날 사회의 모든 구역을 통치하는데 다 적용할 수 있다. 이 책들은, 많은 사람의 생계가 지도자의 말과 행동에 얼마나 달려 있는지를 증명함으로써, 리더십에 대한 다양한 연구거리를 제공한다.

 

   학자들은, 각 쌍으로 된 이 책들(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은 원래 두 개의 두루마리를 중간에 나누어 표시한 한 책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무엘서와 열왕기가 이스라엘 왕정 시대의 정치 역사를 통합해서 한 권을 이루며, 역대기는 열왕기와 같은 역사를 말하지만 히브리 역사의 제사장적이고 예배적인 측면에 초점을 둔다. 우리는 이를 (1) 지파 간 연방제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시기, (2) 왕정 시대의 황금기, (3) 실패한 왕정 시대에서 포로기, 총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지파 간 연방제에서 왕정으로 : 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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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이 지파 간 충돌을 빚던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중앙 집권화 되는 왕정 시대로 옮겨 가는 과도기를 기록한다. 이야기는 선지자 사무엘의 출생과 부름받음으로 시작해, 사울과 다윗의 왕으로의 기름부음 받음과 통치로 이어진다. 이는 한 국가의 형성, 권력과 예배의 중앙화, 새로운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질서 형성에 대한 이야기다. 

 

사무엘을 부르신 하나님 (삼상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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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 마지막 말과 사무엘상 1장의 시작하는 말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족속이 지도자도 없고, 하나님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들에게 국가 지도자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제사장 엘리였는데, 엘리는 자기 아들들과 실로에서 성소를 운영했다. 이스라엘 족속의 정치, 경제, 군사적 형통은 하나님께 그들이 신실한지 여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백성은 그 성소로 하나님께 예물과 제물을 가져왔지만, 정작 제사장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독하고 있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삼상 2:12, 17). 그들은 지도자로서 신뢰할 수 없었으며, 마음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사람은 자신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방향을 이끌어 줘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그들에게서 도적질하는 걸 봤다. 왕정으로 넘어가는 한 나라치고는 어딘지 심상치 않다.

 

   세습된 권력의 위험

   세습된 권력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천부적으로 위험하다. 우선, 최고의 지도자조차도 그 후손이 완전하고 충성스러울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둘째, 권력층 집안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부패의 영향을 안고 있어서 아주 공손한 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엘리 자식들처럼 남에게 어떤 칭호로 불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든지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엘리는 자기 직무를 하나님께 받은 거룩한 명령으로 보고 수행했지만, 그의 아들들은 그것을 개인 소유로 여겼다(삼상 2:12-17). 성소 운영이 거의 가업이다시피 한 분위기에서 자란 그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특권을 물려받길 기대했다. 이 ‘가업’이 하나님 소유의 성소였기에 그들은 대중보다 더 신성한 권위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더군다나 엘리 아들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욱 더럽혔다.

 

   오늘날의 가업과 정치 왕조도 엘리의 상황에 견줄 만하다. 사업이나 정치의 창업자는 세상에 큰 유익을 가져왔을지 모르나, 만약 그 뒤를 이을 사람이 그것을 사적인 이익의 수단으로 소유하면, 그들이 섬기겠다고 내세우던 사람들은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반면 창업자나 그 계승자가 처음에 가졌던 선한 목적에 충실하면 모두가 승자가 된다. 세상은 더 나은 곳이 되고, 사업과 공동체는 번창하며, 가족 살림은 넉넉해진다. 그러나 처음 목적이 소홀히 여겨지거나 부패하면, 사업이나 공동체는 고통을 받게 되고 조직과 가족도 위험에 처한다.

 

   정부, 교회, 기업, 그 외의 다른 기관에서 권력을 세습받은 사람,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 하나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훌륭한 리더가 되는데 필요한 기술이나 자기 훈련, 섬김의 자세 같은 측면은 개발할 필요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현실이 전도서의 교사를 당혹스럽게 한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18-19). 이는 오늘날의 상황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한 세대 동안 기업의 성공으로 부와 권력을 쥔 가문이 이렇게 얻은 것을 3대째 가서는 전부 잃고, 가족 간의 파괴적인 다툼과 개인적 불행으로 고통을 당한다.[1] 세습된 권력이나 부가 항상 가난으로 귀결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세습이 통치에는 위험한 정책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세습을 통해 권세를 물려주는 가족, 기관, 정부는 그 세습에 내포된 위험에 대처할 여러 가지 수단을 잘 강구해야 한다. 세습에 대해 가족이나 기업을 전문적으로 지원해 주는 컨설팅 회사와 기관이 많다.

 

   사무엘을 엘리의 후계자로 부르시다

   만약 엘리의 불량한 아들들이 아니면, 누가 엘리의 뒤를 이을 수 있을까? 사무엘상 3장 1절부터 4장 1절, 7장 3절과 17절은 엘리의 뒤를 잇게 하려고 어린 사무엘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준다. 사무엘은 하나님 음성을 귀로 들은, 성경에 기록된 몇 안 되는 부르심 가운데 하나를 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종류의 일이나 사역으로의 부르심이 아니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사무엘은 두세 살 때부터 여호와의 집에서 섬겼으며, 직업은 어머니가 선택한 것이었다(삼상 1:20-28 2:18-2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조만간 엘리와 하나님의 제사장 자리에서 내려올 그의 아들들을 벌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엘리에게 말해야 하는 과업으로 부르신 것이었다. 이 부르심에 순종한 후 사무엘은 정정당당하게 선지자로 인정받을 때까지(삼상 4:1) 엘리 밑에서 계속 섬겼고, 엘리가 죽은 뒤에야 그의 뒤를 이었다(삼상 4:18). 사무엘이 하나님 백성의 지도자가 된 것은 자기 배를 채우려는 욕심이나 사람들에게 특별한 호칭으로 불리고 싶은 특권 의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비전을 주시고(삼상 3:10-14), 백성이 그 비전을 성취하도록 그들을 이끄는 솜씨와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었다(삼상 3:19-4:1). ‘일’로의 부르심(소명)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의 “소명에 대한 개요” 부분을 보라. 

 

 

Missy Sullivan, “Lost Inheritance,” Wall Street Journal Money, March 8, 2012, accessed at http://online.wsj.com/news/articles/SB10001424127887324662404578334663271139552, May 21, 2014.

하나님을 ‘행운의 부적’처럼 대하는 태도(삼상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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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 엘리의 부패가 백성의 부패를 불러왔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사무엘상 4-6장은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재앙을 그린다. 이스라엘은 인접 나라인 블레셋과 수 세기에 걸쳐 갈등을 빚어 왔다. 블레셋이 다시 침략했는데, 이스라엘이 졌고 4천 명이 희생당했다(삼상 4:1-3). 이스라엘 족속은 그 패배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하나의 표징으로 봤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허물을 성찰하고 회개하며 여호와께 나아와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대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자신들을 천하무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해, 언약궤를 가져와 블레셋에 맞서 전장에 투입했다. 그러나 블레셋은 전장에서 이스라엘을 도륙했다. 3만 명의 이스라엘 군인을 죽였으며, 그 언약궤를 빼앗고 엘리의 아들들을 쳐 죽여, 결국 그 사건으로 엘리까지도 죽게 만들었다(삼상 4:4-19).

 

   군대 지도자와 함께 엘리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 있고, 하나님의 임재라는 상징을 소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에게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쩌면 책임자들은 언약궤를 둘러메고 갔기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은 스스로 속아서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기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길 원하신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든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보호의 보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라는 초청임을 알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언약궤에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가장 큰 수단, 십계명이 들어 있었으나(신 10:5) 엘리의 아들들은 블레셋을 공격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인도하심도 구하지 않았다.

 

   우리도 일할 때 이런 나쁜 습관에 자주 빠지지 않는가? 일하면서 누군가의 반대에 부딪치거나 어려움을 만날 때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가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이뤄 달라는 짧은 기도를 후다닥 해치우고 마는가? 일어날 수도 있는 행동 추이를 성경에 비춰 고려하는가 아니면, 성경을 그냥 책장에 묵혀 두는가? 자기 동기를 살피고 하나님이 일으키실 변혁에 열린 마음으로 자기 행동을 평가해 보는가 아니면, 그저 기독교적인 상징물로 자신을 치장하는가? 우리가 하는 일이 성취감 없어 보이거나, 경력이 우리가 바라는 만큼 올라가지 않는 것 같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일의 주인으로 따르는 대신 행운의 부적으로 쓰려고 하지 않는가? 

 

 

충성스럽게 일할 때 기회가 찾아오다(삼상5-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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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레셋도 언약궤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의 태도보다 더 나을 게 없었고, 그 언약궤는 군사적 용도에서 배제되기 전까지는 양쪽 진영 모두에게 위험한 게 됐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여호와께 다시 헌신하라고 말했다(삼상 5:1-7:3). 백성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다시 여호와를 예배하기로 돌아섰으며, 사무엘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제사장으로서 사무엘의 역할은 얼마 안 있어 “사사”(군사 통치자의 뜻)로 승격했고, 급기야 그는 블레셋에 맞서 성공적인 방어를 해내기에 이른다(삼상 7:4-13). 사무엘의 역할은 곧 법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정을 여는 것도 아우르게 된다(삼상 7:16). 사무엘의 모든 과업 뒤에는 ‘신뢰할 수 있는 여호와의 선지자’가 되게 하려는(삼상 3:20) 그분의 부르심이 깔려 있다.

 

   하나님 방식에 충실한, 노련하고 믿음직한 일꾼은 종종 자신의 직무 기술보다 더 많은 업무가 주어지는 걸 안다. 과도한 업무 책임에 직면해 사무엘은 ‘그건 내 일이 아니야’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사무엘은 자기 앞에 있는 절대적인 필요를 봤고, 자신이 그런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무엘의 마음에 맞춰 그의 권위와 효율성을 높여 주신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다. 사무엘이 한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반응하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 업무와 그다지 관련 없는 일을 맡았는가? 당신의 상사나 동료가 공식적으로는 당신의 주 업무가 아닌 영역에서 당신이 책임을 더 많이 맡아 주기를 기대하는 것같이 보이는가? 이런 것은 종종 성장, 발전, 승진의 기회다. 당신이 이런 기회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디면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반응할 용기와 신뢰만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채워 줄 수 있는 주변의 필요가 보일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신뢰를 키워 가고,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데 필요한 용기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무엘의 통치에 대한 마지막 설명(삼상 7:15-17)은 그가 매년 이스라엘 성읍을 순회하며 정의를 구현하고 다스렸다고 말한다. 그 장은 그가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라는 말로 마친다. 이스라엘에 행한 사무엘의 공적, 군사적 섬김은 그의 평생에 걸친 신실함과 여호와를 향한 예배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자녀가 실망을 안겨 줄 때(삼상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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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이 나이 들면서 그도 엘리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해 자기 아들들을 후계자로 임명한다. 안타깝게도 엘리의 아들들처럼 그들 역시 탐욕에 빠지고 타락했다(삼상 8:1-3). 위대한 지도자의 실망스러운 자녀 이야기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에 계속되는 주제다. 우리가 곧 살펴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비극은 사무엘하에서 13-19장이나 되는 분량을 차지한다. 그것은 부모의 일이라는 것이 다른 어떤 직업 못지않게 버거운 일이며, 정서적으로는 훨씬 더 강도가 센 일이라는 걸 되새기게 해 준다.

 

   본문에는 아무 해결책이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우리는 엘리, 사무엘, 다윗이 문제 있는 자식에게 여러 특권은 주면서도 부모로서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부모가 정말로 최선을 다해 헌신하더라도 가슴을 도려낼 만큼 마음 아프게 하는 자식이 생길 수 있다. 그들을 비난하거나 여러 가지 판에 박힌 이유를 제시하는 대신, 부모로서 자식을 키운다는 것은 어떤 다른 직업 못지않게 기도, 기술, 공동체의 지지, 사랑이 요구되는 일이라는 것에 주목하자. 결국 부모가 된다는 건 자녀들이 기쁨을 안기든 실망을 안기든 아니면 어떤 때는 둘 다든 간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달려 있으며,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가 보는 것을 넘어선 구속의 희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도 정죄받은 자기 아들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부모 마음을 경험하셨지만 그 모든 걸 사랑의 힘으로 이겨 내셨다는 것이다.

 

왕을 요구하다  (삼상8: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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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 아들의 부적합성을 본 이스라엘 족속은 그에게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간청했다. 이 요구는 사무엘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삼상 8:4-6). 사무엘은 백성에게 왕이 나라에 무거운 짐을 지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 8:11-17).

 

   그 왕은 약탈을 너무 심하게 해서 결국에 백성은 왕에게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소리치게 될 것이었다(삼상 8:18). 왕을 구하는 것은, 결국 왕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좋지 못한 생각이라는 데 동의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백성이 원하는 정부 형태를 선택하게 하기로 작정하시고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성경학자 존 골딩게이(John Goldingay)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그들이 처한 그 자리에서 자기 백성과 시작하시며, 만약 그들이 자신의 가장 높은 길을 따라오지 못할 때 하나님은 더 낮은 길을 새겨 나가신다. 그들이 여호와의 영에 반응하지 않거나 모든 사람이 무정부 상태를 향해 나갈 때 하나님은 …… 지상의 통치자라는 제도적인 안전장치를 제공하신다.” 때로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목적의 일부가 아닌 기관을 허락하시며, 이스라엘 왕정 제도가 바로 확연히 그런 사례다.

 

   하나님도 사무엘도, 이스라엘이 선택하고 실수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 결과를 통해 배우게 한 것은 대단한 겸손과 탄력성과 은혜를 보인 것이다. 지도자가 백성이 한 어리석은 선택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면서도 동시에 성장과 은혜를 경험할 기회를 주려고 애써야 하는 기관이나 일터에서의 상황이 많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에 한 경고는 오늘날 국가나 기업, 교회와 학교, 다른 조직에도 해당된다. 타락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권력을 남용한다. 우리는 거기에 적응해야 하지만, 동시에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한다. 우리 열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서 명령한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인데, 그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의 사람이 행하기 극도로 어려운 일이다. 

 

왕을 택하는 과업 (삼상9-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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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택함받은 사울

  하나님은 사울을 첫 번째 왕으로 택하셨다(대략 BC 1050-1010). 사람들은 사울의 어느 일부분만을 봤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삼상 9:2). 나아가 사울은 백성들이 왕을 갖고자 한 제일 첫 번째 이유인 군사적 승리도 거두었다(삼상 11:1-11). 처음에 사울은 충성스럽게 섬겼지만(삼상 11:13-14), 순식간에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했고(삼상 13:8-15), 자기 백성과 함께 교만해졌다(삼상 14:24-30). 사무엘과 하나님은 모두 그에게 몹시 노했다. 그리고 사울을 대신할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삼상 16:1). 그러나 우리가 사울을 21세기의 리더십 기대치에 비추어 평가하기 전에, 사울은 고대 근동에서 왕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걸 주목해야 한다. 백성은 자신이 구한 왕, 곧 (사무엘이 경고한 것처럼) 군국주의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폭군을 얻었을 뿐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초대 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하나님은 사무엘이 어린 사울에게 기름 붓게 하는 실수를 하신 것일까? 아니면 겉으로는 멋스러우나 내면은 공허했던 사울을 이스라엘이 그의 외양만 보고 거기에 현혹되어 선택했음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일까? 왕을 구함으로써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그들이 허락받아 세운 왕도 결국은 똑같이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 왕으로써 사울이 해야 할 첫 번째 과업은 인접한 블레셋과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골리앗과 부딪치자 사울의 두려움은 그의 믿음을 압도했고, 사울은 왕으로서의 역할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드러냈다(삼상 17:11). 즉위 기간 내내 사울은 계속 비슷하게 하나님을 의심했고, 잘못된 곳에 가서 조언을 구했으며 마지막에 가서 그의 군대가 적군과 마주쳤을 때는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삼상 31:4).

 

 

   사울의 뒤를 이어 택함받은 다윗

   사울의 뒤를 이을 사람을 물색하면서 사무엘은 한 번 더 외모로 사람을 택하는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삼상 16:6-7). 소년 다윗은 사무엘이 보기엔 전혀 적합하지 않은 듯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마침내 다윗이 이스라엘을 위해 선택된 왕이라는 걸 인정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다윗은 사람들이 리더에게 기대하는 엄숙한 이미지를 발산하지 않았다(삼상 16:6-11). 나중에 보면 블레셋 거인 골리앗도 비슷한 이유로 다윗을 업신여겼다(삼상 17:42). 다윗은 그가 젊다는 것 빼고는 여러 이유로 전통적인 왕의 후보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다윗은 장자 우선 사회에서 막내였다. 더욱이 다윗은 증조할머니가 모압에서 이주해 온 룻이었기 때문에(룻 1:1-4), 혈통적으로도 순수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혼혈이었다. 다윗은 여러 불리한 요소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그에게서 큰 잠재성을 보셨다.

 

   오늘날 우리가 지도자 선택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요동치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가장 마지막 것이나 그냥 지나쳤던 것이 가장 탁월한 선택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최고의 리더는 어쩌면 아무도 찾지 않는 리더일 수도 있다. 처음엔 아주 인상 깊은 리더, 곧 카리스마를 보이거나 다른 사람이 따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찾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실린 글에 의하면,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 실제로는 수행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1] 하나님이 중시하는 건 카리스마가 아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건 인격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어떤 한 사람의 인격을 보는 법을 배우는 데는 무엇이 필요할까?

 

   사무엘이 다윗을 찾아갔을 때 그가 밖에서 성실하게 자기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며 목동으로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다윗의 경우처럼 더 큰일을 하기 위한 훌륭한 준비다(삼상 17:34-37 눅 16:10 19:17). 사무엘은 다윗이 사람들이 갈망하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 줄’(삼상 8:20) 강하고, 확신에 차 있으며, 경쟁력을 갖춘 리더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그의 인생 여정 전체를 통해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섬기는 자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뒀다. (삼하 6:21).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내 마음에 맞는 사람”(행 13:22)이라고 부르셨다. 

 

 Tomas Chamorro-Premuzic, “Less-Confident People are More Successful,” Harvard Business Review, July 6, 2012, accessed at http://blogs.hbr.org/2012/07/less-confident-people-are-more-su/ on May 23, 2014

권좌에 오르기까지 오래 기다리다(삼상 17-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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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이 기름 부은 뒤 바로 통치를 시작했던 사울과 달리(삼상 11:1), 다윗은 헤브론에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길고도 어려운 도제 기간을 거쳤다. 다윗의 공적인 첫 성공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안정을 위협하던 골리앗을 죽인 것이었다. 군대가 귀환하는 길에 여인들이 기쁨으로 맞이하며 노래했는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7)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사울을 노하게 했다(삼상 18:8). 다윗의 능력 때문에 자신과 나라가 얼마나 큰 혜택을 입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사울은 다윗을 하나의 위협으로 간주했다. 사울은 초기에 다윗을 없애야겠다고 결심했다(삼상 18:9-13). 그래서 사울은 결국 다윗이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힘들게 사울을 피해 다니며 유랑 길에 오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경쟁을 시작했고, 사울은 추적대를 데리고 10년 동안 유다 광야를 헤매고 다녔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주어졌을 때도 다윗은 권좌는 자신이 취할 자리가 아닌 것을 알고 그를 죽이길 거부했다. 권좌는 하나님이 주셔야 할 하나님의 권한이었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7). 다윗은 사울이 수치스러운 방식으로 행동할 때조차도 하나님이 사울에게 주신 권위를 존중했다. 이것은 오늘날 까다로운 상사 밑에서 일하거나, 또는 자신의 리더십이 인정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교훈을 준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특정한 일이나 자리로 부름받았을지라도, 이것이 곧 우리가 기존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권력을 잡아도 된다고 공적으로 인정해 주신 게 아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스가 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자기 힘으로 그 과정을 서둘러서 권력을 쥐려고 한다면, 권력이 승계될 때마다 혼란이 따라올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니 우리도 다윗이 한 것처럼 오래 참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길 원하시는 일을 하는 데 필요한 권위를 그분의 시간에 주실 것을 신뢰하는가? 일터에서는 더 큰 권위를 갖는 데 필요한 일을 완수하는 게 소중하다. 상사를 찍어 내거나 자기 동료를 밀어냄으로써 조기에 그런 권위를 쥐는 것은 동료와 신뢰를 쌓지 못할뿐더러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 증명해 보이지 못한다. 때로는 당신에게 필요한 권위를 받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느낌이 들 땐 절망스러울 수도 있으나, 진정한 권위는 우리가 쥘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허락되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 권위를 그의 손에 쥐어 주실 때까지 기꺼이 기다렸다. 

 

 

다윗과 나발 간의 위기를 해결한 아비가일 (삼상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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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의 힘이 커져 감에 따라 그는 나발이라는 부유한 지주와 갈등을 빚는다. 우연히 사울의 통치에 반대하는 무리와 다윗의 부하가 나발이 거하는 지역에 한동안 진을 쳤다. 다윗의 부하는 나발의 목동을 인자하게 대해 주며, 그들을 위해로부터 보호해 주고, 최소한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다(삼상 25:15-16). 이것을 두고 다윗은 나발이 뭔가 자신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해 사절단을 보내 나발에게 다윗의 군사를 위해 양을 좀 기증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어쩌면 다윗은 자기 요구에 허점이 있음을 깨달았는지, 사절단에게 나발을 더욱 공손하게 대하라고 지시했다.

 

   나발은 다윗의 요구대로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다윗의 잔치를 위해 아무것도 안 주겠다며 거부한 것은 물론이고, 다윗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다윗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다윗을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역적으로 몰아 다윗의 정직성을 공격했다(삼상 25:10). 나발의 종조차 그들의 주인을 “성질이 너무 고약해 어느 누구도 그에게 말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삼상 25:17). 다윗은 즉각 400명의 무장한 군사와 함께 나발과 그 집안 모든 남자를 죽이겠다고 나섰다.

 

   나발이 자기 일꾼이나 가족을 돌보기보다 자만에만 신경을 쓰는 사이, 다윗은 대량 살상을 감행할 참이었다. 이 두 교만한 사람은 수백 명의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고는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런데 현명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이 싸움에 발 벗고 나섰다. 그녀는 다윗과 그의 부하를 위해 신속하게 잔치를 준비한 다음, 나귀를 타고 다윗을 맞아 사과하려고 나갔는데, 이것은 구약에서 정중한 호의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었다(삼상 25:26-31). 그러나 정중함을 갖춘 말에 담긴 내용은 다윗이 꼭 들어야 했던 진실이었다. 자칫하면 다윗은 자신이 절대로 지워 버릴 수 없는 평생의 죄가 될 수 있는, 아무 명분도 없는 피를 흘릴 찰나에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에 감동했고 나발과 그의 모든 남자와 소년을 죽이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그는 심지어 아비가일에게 자신의 무모한 계획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 준 것에 고마워하기까지 했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라(삼상 25:33-34).

 

   이 사건은, 자신의 리더들이 책임감 있게 행동하도록 사람들이 붙들어 줄 필요가 있다는 걸 보여 준다. 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당신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부름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권세 있는 지위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용기는 가져야 한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용기를 구하고 받을 수 있다. 아비가일의 개입은 한편으로는 어떤 비판의 요점이 담겨 있긴 하지만, 존경을 보이면서도 권위자에게 도전하는 하나의 모델을 보여 준다. 나발은 사소한 갈등을 개인적 모욕이라는 포장지로 싼 바람에 하찮은 논쟁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만들고 말았다. 반면 아비가일은 대단히 중요한 책망을 정중한 대화로 옷 입혀 생명을 위협하는 위기를 해결했다.

 

   고위직에 있는 권세자가 책임을 지도록 하게끔 당신이 영향력을 끼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당신을 부르실 것 같은가? 어떻게 당신은 흔들리지 않고 분명하게 진리를 말하면서도 동시에 존중하는 신실한 태도를 기를 수 있겠는가? 실제로 그렇게 하는 데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용기를 받아야 하는가?

 

 

왕정 시대의 황금기 : 삼하1-24장; 왕상1-11장; 대상21-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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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남유다 지파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그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려면 아직도 상당한 양의 피를 흘려야 했다(삼하 5:1-10). 다윗이 마침내 왕이 됐을 때, 다윗은 다른 사람을 훈련시키는 데 자기 달란트를 투자했다. 두려움으로 경쟁의식에 빠진 사울과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경쟁자로 볼 수도 있는 용사들을 곁에 뒀다(삼하 23:8-39 대상 11:10-47). 다윗은 그들을 귀하게 여겼고(대상 11:19), 그들의 명예를 격려해 주면서 높여 줬다(대상 11:25). 하나님은 사람들을 지원해 주고 격려하려는 다윗의 자발성을 사용하셔서 그것이 다윗의 성공에 기여하고 그 휘하의 사람에게 축복이 되게 해 주셨다.

 

   마침내 느슨하던 이스라엘 족속의 열두 지파 연방제가 하나의 국가가 됐다. 80년 동안의 통치 가운데 처음은 다윗이 다스렸고(BC 약 1010-970년) 그다음엔 그의 아들 솔로몬이 다스렸다(BC 약 970-931년). 이스라엘은 번영의 황금기를 누렸고, 고대 근동 국가 가운데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 가운데 이 두 통치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기도 했다. 이런 죄가 끼친 영향이 그들 당대에는 제한적이었지만, 그들의 뒤를 이어받은 사람들에겐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서 그분의 언약을 파기하게 하는 하나의 패턴을 정하는 계기가 됐다. 

 

왕으로서 다윗의 성공과 실패 (삼하1-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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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본이 되는 왕으로 간주했으며, 사무엘서와 열왕기와 역대기는 그가 거둔 수많은 성공을 묘사했다. 그러나 “그[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삼상 13:14) 다윗조차 자기 권력을 남용해 때때로 믿음 없는 행동을 했다. 다윗은 자신을 대단한 존재라 여기지 않을 때는 성공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가진 권력으로 기고만장했을 때, 예를 들어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인구 조사를 했을 때(삼하 24:10-17), 밧세바를 성적으로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는(삼하 11:2-17)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러나 다윗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과 세우신 언약을 이루시고 그를 자비롭게 대해 주셨다. 

 

가정 내 갈등에 침묵한 다윗 (삼하13-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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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갈등 상황에 처하면 대부분 불편을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가정에서든 일터에서든 갈등에 직면하는 걸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소한 것은 무시해도 해결될 수 있지만, 큰 갈등은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저절로 심화되어 우리 시스템에 재앙을 가져온다. 이것은 다윗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윗이 몇몇 자식 간에 일어난 갈등을 방치하는 바람에 온 가족이 비극에 빠졌다. 다윗의 장남 암논은 그의 배다른 누이 다말을 강간하고 수치스럽게 대했다(삼하 13:1-19).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은 그로 인해 암논을 증오했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윗도 그 문제를 알았지만 그 상황을 무시해 버렸다(삼하 13:21).

 

   2년간은 모든 게 잘 되어 가는 것 같았으나, 이 정도 규모의 해결되지 않은 갈등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암논과 압살롬이 함께 시골로 여행을 갔을 때 압살롬은 자기 이복형을 술로 취하게 한 후에 그의 종들에게 그를 쳐 죽이라고 시켰다(삼하 13:28-29). 이 갈등은 다윗의 가정은 물론 귀족과 군대, 마지막에는 온 나라가 내전에 빠지게 만들었다. 많은 경우에 갈등을 회피해서 초래되는 파괴가 그 갈등이 처음에 일어났을 때 처리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보다 훨씬 더 나쁜 경우가 많다.

 

   하버드대학교의 로널드 하이페츠와 마티 린스키 교수는 리더가 어떻게 “갈등을 잘 지휘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자체가 끓어올라서 그들의 목표를 뒤집어엎고, 조직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말한다.[1] 마찬가지로 짐 콜린스(Jim Collins)도, 누코 철강(Nucor Steel) 회장이었던 앨런 아이버슨(Alan Iverson)이 회사가 고철강 재활용 사업으로 사업 분야를 다각화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의견 분열이 극심했을 때의 사례를 들려준다. 아이버슨은 그런 의견 분열을 공개석상에 내놓고,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보복하지 못하게 보호해 주면서 누구나 각자의 의견을 말하게 했다. 계속된 “격렬한 논쟁”은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그들은 책상을 팔로 마구 내리쳤다. 얼굴이 붉어지고 핏줄이 불거졌다. 그러나 서로의 갈등을 인정하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처리해 나감으로써, 분노가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가 나중에 폭발하는 사태를 방지했다. 더 나아가 다양한 사실과 의견을 수렴함으로써 회사가 더 나은 결정을 하도록 이끌었다. “동료들이 회장실로 몰려가 야유를 퍼붓고 서로 삿대질을 했지만 그 후에 결론이 도출됐다. …… 그 회사의 전략은 고뇌에 찬 수많은 논쟁과 싸움을 통해서 나왔다.”[2] 잘 지휘된 갈등은 실제로는 창의성의 원천이 될 수 있다. 

 

Ronald A. Heifetz and Marty Linsky, Leadership on the Line (Boston: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2002), 101-122쪽.

 Jim Collins, Good to Great (HarperBusiness, 2001), 76쪽. 짐 콜린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김영사 역간).

다윗의 불순종, 국가적 전염병을 불러오다(대상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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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또 다른 실수로 고통을 겪었는데, 21세기 우리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것은 행하려면 아주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성경 본문은 요압 장군의 충고를 다윗이 듣지 않고 강행하도록 사탄이 부추겼다고 기록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이 일을 악하게 여기사 이스라엘을 치시매”(대상 21:7).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인구 조사를 한 것이 죄라는 점을 인정했다. 다윗에게는 세 가지 선택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 많은 해를 끼치는 일이었다. 3년의 기근, 적군의 칼에 3개월간 처참하게 쫓겨 다니는 것, 그 땅에 사흘간 전염병이 도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다윗은 세 번째를 택했다. 죽음의 사자가 그 땅을 지나가자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명령하여 백성을 계수하게 한 자가 내가 아니니이까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곧 나이니이다 이 양 떼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니라”(대상 21:17).

 

   어쩌면 어째서 다윗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7만 명의 다른 백성을 벌하신 것일까? 본문은 거기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지도자의 허물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르는 자에게 해를 입히게 된다는 걸 본다. 만약 기업의 대표가 제품 개발에 대한 결정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회사에 몸담은 사람은 이윤이 줄어들어 실직하게 될 수도 있다. 식당 주인이 위생 규칙을 제대로 안 지키면 식당 손님이 병에 걸릴 것이다. 교사가 형편없는 학생에게 좋은 점수를 주면 그 학생은 다음 단계 교육에서 실패하거나 낙제할 것이다. 리더십 위치를 수용하는 사람은 그들이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음악 예술을 후원한 다윗 (대상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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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상은 사무엘하와 열왕기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을 자세히 덧붙인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서 노래를 하게 하기 위하여’ 음악대를 창설했다.

 

이들이 다 그들의 아버지의 지휘 아래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아 여호와의 전에서 노래하여 하나님의 전을 섬겼으며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왕의 지휘 아래 있었으니 그들과 모든 형제 곧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의 수효가 이백팔십팔 명이라(대상 25:6-7).

 

   현대 관현악단 두 개를 합친 규모의 앙상블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BC 10세기의 막 떠오르던 신흥 국가에서는 상당히 큰일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그것을 사치라고 여기지 않고 필요하다고 여겼다. 실제로 다윗은 자기 역할을 다른 장군들의 동의를 얻어서, 전체 군대의 사령관으로서 그것을 명령하는 것으로 봤다(대상 25:1).

 

   오늘날 많은 군대가 밴드와 합창대를 운영하지만, 일터 중에는 원래 음악 기관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하는 곳이 거의 없다. 그러나 음악이나 다른 예술에는 모든 종류의 일에 필수적인 뭔가가 있다. 인간의 경제 활동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창조는 생산적일 뿐 아니라, 아름답다(창 3:6 시 96:6 겔 31:7-9). 하나님은 아름다운 수공품을 사랑하신다(사 60:13). 당신 일에서 무엇이 그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 영역인가? 당신이 더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면 당신이 속한 조직이나 사람들은 그 일에서 혜택을 누리는가? 당신 직업에서 일이 아름답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다윗의 통치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 (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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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다윗과 그의 통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솔로몬이 자기 아버지 다윗보다 더 많은 부와 땅,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열왕기와 역대기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요, 모든 다른 왕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은 왕은 다윗이다.

 

   우리는 다윗의 생애와 행동에 대해 하나님의 아주 강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를 보면서 소망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다윗의 정치적인 술수, 정욕, 폭력 등을 감안하더라도, 우리는 그가 보인 근본적인 경건에는 감동을 받게 된다. 우리도 자기 심령과 행동에서 이와 유사한 양면성을 볼 때, 우리는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위로받고 소망을 갖는다. 다윗과 함께해 주신 여호와의 임재는 설령 우리가 신실하지 못할 때조차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며, 하나님은 끈질긴 “천국의 사냥개”(Hound of Heaven 영국 프랜시스 톰슨이 쓴 시의 제목으로, 죄를 짓고 도망쳐 세상의 다른 것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을 추적해 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 시 - 옮긴이 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사울처럼 다윗도 위대함과 신실치 못함, 죄와 실수가 얽혀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하나님은 사울의 통치는 보전해 주지 않으시고 다윗의 통치는 지켜 주신 걸까 하고 의아할 것이다.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께 신실하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지만(왕상 11:4 15:3) 결국 그의 행동은 잘못된 방향으로 갔다. 사울에게는 그렇게 똑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한 목적을 이루시는 최고의 방법이 그냥 다윗을 왕위에 붙들어 두는 것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직책이나 임무를 맡기실 때, 그분이 반드시 우리를 생각하시는 게 아닐 수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끼칠 영향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에게 상을 주거나 혜택을 주기 위해서 그가 바벨론을 이기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포로에서 해방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대하 36:22-23). 

 

 

왕위 계승자를 준비하다(왕상1장; 대상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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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왕으로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여호와를 위한 집을 짓게 하지 않기로 작정하셨다. 대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그 과업을 물려받았다(대상 22:7-10). 그래서 다윗은 자기 마지막 임무는 솔로몬이 왕이라는 직책을 수행하도록 그를 훈련하고(대상 22:1-16) 그의 주변에 유능한 보좌진이 있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대상 22:17-19). 다윗은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대상 22:5)라고 하면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한 재료를 엄청나게 쌓아 뒀다. 다윗은 공적으로 솔로몬에게 권세를 이양해 줬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솔로몬을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고 그가 성공하도록 도와줄 준비를 하라고 분명하게 해 두었다.

 

   리더십은 한 개인의 경력보다 오래 가는 하나의 책임이라는 걸 다윗은 인정했다. 대부분의 경우 (승진해서든, 은퇴해서든, 아니면 이직해서든 간에) 우리가 떠난 후에도 우리가 하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후임자가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줄 의무가 있다. 다윗이 솔로몬을 준비시키는 데서 우리는 성공적인 승계 계획의 세 가지 요소를 볼 수 있다.

 

   먼저 우리가 마무리하지 않고 남겨 놓은 일을 후임자가 완수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자원을 제공해야 한다. 당신이 중간 정도의 성공이라도 했다면 당신은 그 자리에 필요한 자원을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지 배웠을 것이다. 이것은 흔히 (후임자가 곧바로 물려받지는 못할) 대인관계의 인맥에 달려 있다. 예를 들면, 우리 부서에서 같이 일하지 않으나, 우리 일을 자발적으로 도와주려는 사람의 지지에 따라 우리 업무의 성공 여부가 나뉠 수 있다. 당신은 후임자가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며, 당신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계속 후임자를 잘 도와주도록 미리 부탁해 놓는 게 좋다. 다윗은 자신이 개발해 두었던 모든 인맥 가운데 자신이 떠난 뒤에 솔로몬을 위해 일해 줄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을 사전에 준비했다(대상 22:15).

 

   둘째,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대인관계를 후임자에게 물려 줘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떠나기 전에 후임자를 실무 현장에 함께 데려가는 것이다. 다윗은, 비록 그가 이 일을 좀 더 일찍 했더라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자신이 죽기 직전에 솔로몬을 리더십 구조와 궁중 예식에 포함시키기 시작했다(왕상 1:28-40). 물론 후임자에게 위임해 줄 역할이 아무것도 없을 경우가 있고, 또 그 사람과 근무 시기가 겹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 글로 쓰거나 그 조직에 남아 있을 사람을 통해 정보를 전달해 주면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이 맡았던 일이 지속되고 후임자가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떤 것이 있을까?

 

   셋째, 우리는 우리 직책을 이어받을 그 사람에게 권위를 확실히 넘겨 줘야 한다. 우리가 직접 후임자를 정했든지 우리 의견을 묻지 않고 다른 사람이 정했든지, 우리는 여전히 공개적으로 자리 이동을 알리고 예전에 당신이 가졌던 권위를 확실하게 이양해 줄 것인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다. 당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후임자에게 복이 될 수도,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임기 조항에 걸려 3연속 러시아 대통령으로 집권할 수 없게 된 블라드미르 푸틴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썼던 수법이다. 그는 대통령의 권한 일부를 국무총리에게 이양하는 술수를 쓴 다음, 선거로 선출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신임 대통령이 즉시 자신을 러시아 국무총리로 임명하게 했다.[1] 정해진 국무총리 임기가 끝나자 푸틴은 현직에 있는 대통령의 요청으로 쉽게 대통령에 다시 취임했고, 요청한 대통령은 그 후에 물러났다.[2] 그 결과 푸틴의 손에 들어간 권력은 수십 년째 계속 유지되고 있고, 권력의 임기를 제한하려고 의도했던 게 러시아와 그 인접 국가에 손해를 끼쳤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솔로몬이 공개적으로 왕으로 임명되도록 준비해 줬고, 왕정의 상징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다윗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솔로몬을 왕으로 공식 선포했다(왕상 1:32-35, 39-40).

 

C.  J. Chivers, “Putin  is Approved as Prime Minister,” New York Times, May 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nytimes.com/2008/05/09/world/europe/09russia.html?_r=0 on May 25, 2014.

“Russia’s Putin set to return as president in 2012,” BBC News Europe, September 24, 2011, accessed online at http://www.bbc.com/news/world-europe-15045816 on May 25, 2014.

다윗에 이어 왕이 된 솔로몬(왕상1-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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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을 이어 왕이 되자마자 솔로몬은 엄청난 책무에 직면한다(왕상 3:5-15). 솔로몬은 자신이 그 일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예리하게 꿰뚫고 있었다(대상 22:5). 그에게 맡겨진 과업은 엄청났다. 성전 건축 과업 외에도 크고 복잡한 나라 문제가 그의 손안에 맡겨져 있었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왕상 3:8). 업무 경험을 축적하면서도 솔로몬은 그 일이 너무 복잡해서 상황마다 올바른 행동 방향을 잡아 나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솔로몬은 신적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셨다(왕상 4:29). 

 

여호와의 성전을 짓다 (왕상5-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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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의 첫 주요 과업은 성전 건축이었다. 이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솔로몬은 왕국 사방에서 전문가를 고용했는데(왕상 5-7장), 그들은 성전 건물을 짓는 데 헌신된 사람이었으며, 그 성전 건물 중 우리에게 알려진 공간은 일부에 지나지 않다.

 

솔로몬에게 또 짐꾼이 칠만 명이요 산에서 돌을 뜨는 자가 팔만 명이며 이 외에 그 사역을 감독하는 관리가 삼천삼백 명이라 그들이 일하는 백성을 거느렸더라 이에 왕이 명령을 내려 크고 귀한 돌을 떠다가 다듬어서 성전의 기초석으로 놓게 하매(왕상 5:15-17).

 

그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그 높이는 각각 십팔 규빗이라 각각 십이 규빗 되는 줄을 두를 만하며 또 놋을 녹여 부어서 기둥 머리를 만들어 기둥 꼭대기에 두었으니 한쪽 머리의 높이도 다섯 규빗이요 다른쪽 머리의 높이도 다섯 규빗이며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를 위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으로 땋은 것을 만들었으니 이 머리에 일곱이요 저 머리에 일곱이라(왕상 7:15-17).

 

솔로몬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기구를 만들었으니 곧 금 단과 진설병의 금 상과 내소 앞에 좌우로 다섯씩 둘 정금 등잔대며 또 금 꽃과 등잔과 불집게며 또 정금 대접과 불집게와 주발과 숟가락과 불을 옮기는 그릇이며 또 내소 곧 지성소 문의 금 돌쩌귀와 성전 곧 외소 문의 금 돌쩌귀더라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드는 모든 일을 마친지라 이에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이 드린 물건 곧 은과 금과 기구들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에 두었더라(왕상 7:48-51).

 

   일가견이 있는 전문가부터 강제 부역을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왕국 백성은 성전 건축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지식과 솜씨를 바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솔로몬은 자기 나라를 세우고 유지하는 데 수많은 백성을 참여시켰다. 그것은 솔로몬이 의도한 것이었든 아니었든 간에, 다양한 사람을 그렇게도 많이 고용한 것은 엄청난 수의 시민이 그 나라의 정치, 종교, 사회, 경제적 복지에 개인적인 투자를 하게 만든 것이었다. 

 

통치의 중앙집권화 (왕상9-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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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 건축에 필요한 국가적인 대규모의 노력 투입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강력한 힘을 가진 왕국의 통치자가 되게 만들었다. 솔로몬의 재위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의 군사 · 경제적 힘은 정점에 이르렀고, 이스라엘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큰 영토를 다스렸다. 솔로몬은 국가 정부와 경제 기관, 예배의 중앙집권화를 완료했다.

 

   대규모 노동력 확보를 위해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전역에서 일꾼을 징집했다. 할당된 숫자는 3만 명이었다(왕상 5:13-14).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을 종으로 삼지 말라는 레위기 25장 44-46절에 따라 징집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금을 지불한 듯하다(왕상 9:22). 그러나 거주하는 외국인은 그냥 노예였다(왕상 9:20-21). 거기에다 주변 국가에서 수많은 일꾼이 들어왔다. 어디서 왔는지는 몰라도 당대 최고의 장색공을 포함해 광범위한 숙련공이 다 모였다. 사무엘서와 열왕기, 역대기는 기본적으로 왕의 신분으로 하는 일에 관심을 둔 책인데, 성전과 관련된 사람을 제하고는 이 일꾼들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대 뒤에서나 보이는 사람들이지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사회를 구성한다.

 

   솔로몬은 중앙정부가 커지면서 점점 늘어 가는 중앙정부의 노동력을 위한 식량의 필요성을 봤다. 군인은 식량이 필요했고(왕상 5:9-11) 거기에다 솔로몬의 건축 프로젝트에 투입된 일꾼도 있었다. 늘어나는 귀족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래서 왕은 그 나라를 12구역으로 나눠 각 구역을 관할하는 책임자를 임명했다. 각 구역 책임자에게는 매년 1개월 치의 필요한 식량을 조달해야 할 책임이 부과됐다. 그 결과 그 나라의 딸들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징집됐다(삼상 8:13). 이스라엘에 강제 노역과 무거운 세금, 궁중 전역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중앙 엘리트가 생겨나 이스라엘도 다른 나라처럼 되고 말았다.

 

   사무엘이 전에 말했던 것처럼, 왕들은 군사력을 크게 키운다(삼상 8:11-12). 군대가 나라 안정의 필수 요소가 됨에 따라 군사화는 솔로몬의 재위 기간에 꽃을 피운다. 보병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온갖 계급 군인은 모두 던지는 창과 찌르는 창, 단창, 활과 화살, 칼, 단검, 물매 등 무기가 필요했다. 방패와 투구, 갑옷과 같은 보호용 장비도 필요했다. 그런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군사 조직이 유지되어야만 한다. 아버지 다윗과는 대조적으로 솔로몬은 “평화의 사람”으로 불리지만, 그 평화는 잘 조직된 군사력에서 보장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솔로몬 이야기에서 대량 생산과 분배를 조직화하는 구조와 시스템과 더불어 사회가 얼마나 무수한 사람의 일에 의존하는지를 본다. 일을 조직화하는 사람의 역량은 우리가 전 세계적인 규모의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증거다(창 1장). 성경이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시는 장소의 건설을 통해 이런 능력을 묘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거기엔 하나님의 집을 짓기에 충분할 만큼 대규모로 일을 조직화하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 들어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솔로몬 시대의 방법(징병, 강제 노역, 군국화)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를 보다 공정하고 효과적인 체계 속에 살도록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아마도 우리가 이 일화에서 알 수 있는 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일을 조직화하는 기술과 이 세상에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창조력에 큰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이다. 

 

 

솔로몬의 황금기에 대한 평가 (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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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을 갖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 사무엘의 예언은 솔로몬 시대에 이루어졌다.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그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삼상 8:11-18).

 

 

   표면적으로는 솔로몬의 행정과 건축 캠페인이 대단히 성공적으로 보인다. 백성은 성전을 건축하는 데 요구된 희생을 기쁨으로 감당했으며(왕상 8:65-66), 성전은 모두가 가서 하나님의 공의(왕상 8:12-21), 용서(왕상 8:33-36), 치유(왕상 8:37-40), 긍휼(왕상 8:46-53)을 받는 곳이었다.

 

   그러나 성전이 완공된 뒤, 솔로몬은 성전만큼이나 웅장하고 큰 규모의 궁전을 짓는다(왕상 9:1, 10). 부와 권력에 익숙해지면서, 솔로몬은 자신만 챙기고 교만해졌으며 신실함을 잃었다. 솔로몬은 국가 생산 역량의 상당 부분을 자기 개인의 유익을 위해 썼다. 기존의 상아 왕좌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금을 입혔다(대하 9:17). 또한 흥청망청 낭비했다(왕상 10:5). 동맹국과 맺은 약속을 어겼으며(왕상 9:12),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을 두었다(왕상 11:3). 이 마지막 것이 결국은 파멸의 원인이 됐다. 그가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왕상 11:1)고, 그 결과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왕상 11:4)다. 그는 아스다롯과 밀곰을 따르고, 그모스와 몰록을 위한 산당을 세웠다(왕상 11:7). 왕이 여호와께 충실한 것이 국가 번영의 열쇠라는 언약에 비춰 볼 때, 이스라엘은 그 정점에서 내리막길로 얼마 안 있어 급격하게 치달을 것을 내다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목적을 위해 일하는지, 아니면 그 목적을 거슬러 일하는지에 깊이 신경 쓰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하면 놀라운 업적도 가능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우리 일은 급격히 붕괴되고 말 것이다.

 

왕정 실패에서 포로기까지 (왕상11장 - 왕하25장; 대하10-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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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3대 왕에 불과하지만 이미 그 왕국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 뒤 400여 년 동안 악한 왕이 연이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을 쇠퇴와 분열, 결국엔 패망으로 이끌었다. 

 

   부강했던 솔로몬 왕국, 마침내 둘로 나뉘다 (왕상11:26-12:19)

 

   솔로몬이 죽고 나자 그의 공평하고 효과적인 국가 경영의 이면에 불안 요소가 싹트고 있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여로보암(전에 역군 감독이었던 사람)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은 솔로몬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르호보암(BC 931-914년)에게 나아와 “당신 아버지가 시행했던 무거운 노역과 세금의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라고 요청했다(왕상 12:3-16; 대하 10장). 그들은 자신이 새 왕에게 충성하기로 서약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대신에 부역과 세금을 좀 경감해 달라고 한 것이다.[1] 그러나 르호보암은 이스라엘 백성이 공급해 주던 것으로 40년 동안 호화롭게만 살아왔다. 그는 지금껏 누려 왔던 법적인 수혜의식이 너무 강해 타협할 수가 없었다. 자기 아버지가 백성에게 지운 부당한 짐을 가볍게 해 주는 대신 르호보암은 그들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하기로 작정했다.

 

   사무엘의 예언은 더욱 성취되었다(삼상 8:18). 반역이 일어났고 왕정은 영원히 나눠지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국가를 지탱하기 위해 자신에게 부과된 공정한 노역 분담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자발적인 자세 못지않은,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기대가 표출되면서 결과적으로 반역이 일어나고 나라가 분열됐다. 북쪽의 열 지파는 따로 떨어져 나가서 여로보암을 그들의 왕으로 기름 부었다(BC 약 931-910년). 여로보암은 르호보암 밑에서 세금 경감을 추구하던 대표단 단장이었지만, 그의 왕조도 백성들에겐 딱히 더 나을 게 없었음이 판명됐다. 

 

   앗수르에 끌려가는 북이스라엘 (왕상12:25 - 왕하17:18).

 

   200년 동안(BC 910-722년)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여호와 앞에서 크게 악을 행한 왕에 의해 통치됐다. 이 기간은 끝없는 전쟁과 반역, 살해로 특징지어지다가 앗수르에 의해 철저하게 파멸당했다. 앗수르의 정복자들은 정복지 백성을 끌고 가 자기 제국 여러 곳에 흩어 놓았고, 외국인을 피정복지에 데려다 놓았다(왕하 17:5-24). 지도자의 실패는 종종 그 백성에게 재앙 같은 영향을 끼친다. 

 

 

Warren W. Wiersbe, The Bible Exposition Commentary: Old Testament History (Colorado Springs, CO: Victor/Cook Communications Ministries International, 2004), 446쪽.

부패한 구조 안에서 100명을 구한 오바댜(왕상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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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두 가지 일화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100명의 선지자의 목숨을 구한 오바댜의 첫 번째 일화는 비윤리적인 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결정, 곧 직장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부딪치는 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바댜는 아합 왕국의 수석 행정관이었다. 아합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으로 유명하다. 아합의 부인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다. 아합 왕국의 고위 관리였던 오바댜는 그 작전 명령을 먼저 듣고, 선수를 치기 위한 수단도 강구했다. 그는 100명의 선지자를 두 동굴에 숨긴 후 위기 상황이 누그러질 때까지 그들에게 떡과 물을 제공해 줬다. 그들이 살아남은 건 오로지 “여호와를 지극히 경외하는” 한 사람(왕상 18:3)이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권세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부패하거나 악한 기관에서 일하면 사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직장에서 힘겹게 버티느니 차라리 그만둬 버리고 좀 더 거룩한 일을 찾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진다. 우리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일 때가 흔히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그 어떤 일터도 완벽하게 선한 곳은 없다. 어디에서 일하든 우리는 결국 윤리적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일터가 부패하면 할수록 거기엔 더욱더 경건한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더 악을 덧붙여 행하지 않으면서도 그 자리에 머물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곳에 남기를 원하실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일단의 장교들이 압베어(Abwehr: 나치 독일 군사 정보기관)에 있으면서 그곳에서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고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형됐다. 자신이 히틀러 군대에 남아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질문할 줄 아는 책임 있는 사람이 해야 할 궁극적인 질문은 ‘어떻게 하면 이 어려움 속에서 영웅처럼 빠져나올 수 있나’가 아니라, ‘다음 세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다.”[1] 하나님께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우리 책임이 우리 자신을 도덕적으로 순결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열망보다 더 중요한 것 같다.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New York: Touchstone, 1997), 7쪽.

아합과 이세벨, 땅을 차지하려고 나봇을 살해하다 (왕상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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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합 왕이 자기 이웃에 살던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남용했다. 아합은 그 포도원을 넘기는 대가로 상당한 액수를 제안했으나 나봇은 그 땅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이기에 아무리 높은 가격을 준다 해도 그 땅을 파는 데는 흥미가 없다고 말했다. 아합은 낙담하면서 이 합당한 자기 권력의 한계를 받아들였으나 이세벨이 그를 폭군이 되도록 부추겼다. “그러고도 당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요?”라고 그녀는 비아냥거렸다(왕상 21:7).

 

   설령 왕은 권력 남용의 욕구가 없을지 모르나 왕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두 명의 난봉꾼에게 돈을 주어 나봇에 대한 거짓 신성모독과 반역죄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아합은 즉시 나봇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 그 성 장로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이게 했다. 어째서 그 성의 장로들이 제대로 된 재판도 안 한 채 그토록 신속하게 행동했는지 의아하다. 그들은 왕과 공모했던 것일까? 아합의 치하이니 겁이 나서 그의 편에 선 것일까? 어쨌든 앞길의 장애였던 나봇을 제거한 아합은 그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아합같이 뻔뻔스럽게 땅을 차지하는 식을 비롯해 권력의 남용은, 일간 신문만 흘깃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듯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아합 시대처럼 권력의 남용은 자기 이웃의 유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자기 안위를 지키는 게 낫다고 생각해 불의는 물론 심지어 살해까지도 그냥 넘어가려는 사람과의 공모가 있을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만이 과감하게 아합 왕에게 맞섰다(왕상 21:17-24). 비록 엘리야의 항거가 나봇을 돕는 데는 기여하지 못했지만, 엘리야의 반대는 아합의 권력 남용에 재갈을 물렸고, 아합이 죽을 때까지 더 이상의 권력 남용은 기록되지 않고 있다.

 

   소수의 단체나 한 개인이 제기한 원칙에 입각한 반대가 권력 남용을 막는 일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일어난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많은 지도자가 자신의 비리를 감추느라 그렇게 고생하겠는가? 당신도 직장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 다른 사람의 권력 남용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신은 그걸 어떻게 생각했는가? 앞으로 그걸 인지한다면 어떻게 할 텐가? 당신은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일상적인 일에 대한 엘리사의 관심 (왕하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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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이스라엘이 점점 더 깊은 배교와 폭정으로 미끄러져 감에 따라 하나님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그들에게 맞설 선지자를 세우신다. 선지자는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인간의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는 능력을 갖춘, 위대한 하나님의 작은 모형과도 같다. 엘리야, 엘리사가 열왕기와 역대기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며, 그 둘 중 엘리사는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 사람으로 유명하다. 엘리사는 오랜 경력을 통해 이스라엘의 악한 왕에게 맞서는 자로 서라는 소명을 받는다(왕하 2:13-13:20). 엘리사의 행동은, 백성의 경제적 삶이 나라 왕조의 고민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그는 왕에 의해 초래되는 재앙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성의 관개 시설을 회복시킨 엘리사 (왕하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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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사가 첫 번째로 한 주요 활동은 여리고 성의 오염된 샘을 깨끗케 한 것이다. 그 단락에서의 주된 관심은 농업 생산성이다. 위생적인 물이 없이는 ‘그 땅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깨끗한 물에 다시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써 엘리사는 성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며 식량을 생산하라는 하나님 주신 사명을(창 1:28-30) 재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가정의 재정 지급 능력을 회복시킨 엘리사 (왕하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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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사와 같이 있던 선지자 한 명이 죽었다. 그 후 그의 가족은 빚에 시달렸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빈곤에 빠진 가정의 운명은 전형적으로 가족 중 어떤 사람이나 가족 전부가 종으로 팔리는 것이었으며, 팔려 가서도 먹을 게 거의 없었다. 이 책 3장의 “출 21:1-11” 부분을 보라. 그 과부는 자기 두 자식을 종으로 팔 지경에 처해서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왕하 4:1). 엘리사는 그 가정이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그 가정을 찾아갔다.

 

   엘리사는 그 과부에게 뭔가 가지고 일할 도구가 있는지 물었다.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단지에 기름 조금 있는 거 빼고는요”(왕하 4:2). 분명히 이것은 엘리사가 시작하기에 충분한 자본이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모든 이웃에게 가서 빈 항아리를 있는 대로 다 빌려 그 항아리에 남아 있는 기름병의 기름을 부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모든 항아리를 기름으로 채울 수 있었고, 얼마 안 있어 그녀의 처음 기름 항아리까지 넘쳤으며, 기름을 판 돈으로 그녀는 충분하게 가족의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왕하 4:7). 본질적으로 엘리사는 그 여인이 작은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나의 기업 공동체를 창설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기업과 정부 쪽에서 보면 마이크로파이낸스(소액금융), 신용사회, 농업협동조합, 또는 소상공인 지원 프로그램이다.

 

   이 가정을 위해 한 엘리사의 행동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반영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떻게 궁핍한 사람이 일하도록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가난한 사람의 생산능력과 경제력을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훼손하고 있을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그것을 개혁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군대 장관의 건강을 회복시킨 엘리사 (왕하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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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적군인 아람(시리아)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나병을 치료해 줬을 때, 그것은 일의 영역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본문에 대해 쓴 자크 엘룰(Jacques Ellul)의 통찰력 있는 글에 보면 “병들었던 사람, 특히 나병 환자가 치유됐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1] 왜냐하면 그 치유는 일할 능력을 회복해 줬기 때문이다. 이번 경우에는 그 치료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통치하는 일, 이스라엘 왕을 대하는 일에서 왕에게 필요한 조언하기 등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회복해 줬다. 

 

   흥미롭게도 이 치유 사건은 엘리사 자신이 세운 조직의 윤리적 문화도 회복시켰다. 나아만은 그 치료에 대해 넉넉한 보상을 제안했으나 엘리사는 단순히 여호와의 뜻 행한 걸 가지고 무슨 대가를 받느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사의 사환 중 하나인 게하시는 약간의 추가 보수를 챙길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아만 뒤를 쫓아가서 엘리사가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면서 악의로 취득한 이익을 숨기고 엘리사에게는 그것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엘리사는 게하시가 나아만에게서 떠났던 바로 그 나병에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사는 자기 조직에서 부패를 용납하는 것은 자신이 평생 하나님을 섬긴 것의 유익을 다 앗아갈 것을 분명히 알았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나아만 개인이 한 행동도 또 다른 요점을 보여 준다. 나아만에게는 나병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나아만은 치료가 필요했지만 치료에 대해 그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선지자와 극적으로 상봉해서 질병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더러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 하자 처음에는 그 진짜 해결책을 명백히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엘리사도 아니고 엘리사의 사자를 통해 그 답변을 듣자 나아만은 화가 났고 그냥 가 버렸다. 해결책도,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도 나아만이 보기엔 전혀 관심을 기울일 만한 것이 못됐던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종종 이런 이중적인 어려움이 되풀이된다. 첫째로, 최상위 리더는 자신들이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인 아래 직급 직원에게서 나온 통찰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무시한다. 짐 콜린스(Jim Collins)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Good to Great , 김영사 역간)에서 그가 “레벨 5 리더”(level 5 leader)라고 부르는 사람의 첫 번째 징표로 겸손, 많은 인재의 이야기를 경청하려는 자발성을 들었다.[2] 둘째로, 그 해결책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그 리더가 상상하던 접근법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나아만 같은 많은 리더들은 그들에게 말이 통하게 말하려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는 부하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기관에서는 겸손한 보스만 필요한 게 아니라 용기 있는 부하도 필요하다. 흥미롭게도 이 일화 전체를 움직이는 인물은 가장 천한 계급의 사람, 그 나라에서 가장 낮은 사람, 그가 기습 작전을 벌여 포로로 잡아다 자기 아내의 몸종으로 준 어린 소녀였다(왕하 5:2). 이것은 교만과 그릇된 기대가 얼마나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지, 그럼에도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그런 것들을 뚫고 나오는지 탁월하게 상기시켜 준다. 

 

 

 Jacques Ellul, The Politics of God & the Politics of Man (Grand Rapids, MI: Eerdmans, 1972), 35쪽.

 Collins, Good to Great, 22-25쪽. 짐 콜린스,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김영사 역간).

벌목꾼의 도끼를 찾아 준 엘리사(왕하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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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단강가에서 나무를 베던 엘리사의 제자 중 하나가 강물에 쇠도끼를 떨어뜨렸다. 그는 그 도끼를 벌목꾼에게서 빌려 온 것이었다. 청동기 시대에 중요했던 철이었기 때문에 그 값은 그 소유주에겐 재정적 파산을 의미했다. 그 제자는 혼비백산했다. 엘리사는 그 경제적 손실을 즉각 자기의 근심처럼 여겨 그 도끼가 물 위에 떠오르게 했고, 제자는 도끼를 주인에게 돌려 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엘리사는 누군가 일을 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입한 것이다.

 

   선지자의 은사는 일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분별해 그것에 맞게 일하고 행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세상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리키게 하는 방식으로 창조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선지자를 부르신다. 선지자가 하는 일의 신학적 측면, 즉 사람에게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결국 창조 질서의 선한 일을 회복하는 실천적 면이 수반된다. 신약은 우리도 선지자로 소명을 받았다고 말해 준다(고전 12:28; 엡 4:11). 엘리사는 자기 백성이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신다는 걸 보여 준 역사적 인물일 뿐 아니라 오늘날 크리스천의 한 모델이기도 하다. 

 

남유다의 포로 행진 (왕상11:41-왕하25:26; 대하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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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이스라엘의 발자취를 따라가던 남유다의 통치자도 얼마 안 가서 우상숭배와 악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르호보암의 통치 아래서 백성은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고 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다’(왕상 14:23-24). 르호보암의 후계자도 하나님 보시기에 신실함과 악행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한동안 남유다에는 재앙을 간신히 모면하게 해 주던 선한 왕이 충분히 있었으나, 끝내는 북이스라엘이 빠졌던 것과 똑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나라는 정복당했고 왕과 귀족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 사람들에게 끌려갔다(왕하 24-25장). 백성이 그토록 요구했던 왕들의 신실치 않음은 수백 년 전에 하나님이 하셨던 충고를 거부했고, 그것은 재정의 와해, 노동력 파괴, 기근, 대량 살육, 인구의 대량 유수에서 절정에 달했다. 예고됐던 재앙은 바사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위해 일부 유대인은 귀환하라는 조서를 내리기까지 70년이나 계속됐다(대하36:22-23).

 

성전 재정 책임(왕하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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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유다 왕국의 쇠퇴를 보여 주는 사례로 역설적이게도 훌륭한 재정 관행이 등장한다. 본질적으로는 그 나라의 모든 지도자처럼, 제사장도 부패했다. 예배자의 헌금을 성전 유지에 쓰지 않고, 그 돈을 편취해서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왕하 12:2) 몇 안 되는 왕 중 하나인 요아스의 지시로, 제사장은 효율적인 회계 시스템을 개발해 냈다. 뚜껑에 작은 구멍을 하나 낸 자물쇠 달린 궤가 헌금을 받기위해 성전에 설치됐다. 궤가 가득 차면 대제사장과 왕실 서기관이 그 궤를 같이 열고 돈을 세어 목수, 건축자, 미장이, 석수와 계약을 맺어 성전수리를 하게 했다. 돈이 본래의 올바른 목적에 확실하게 쓰이도록 만든 것이다.

 

   동일 시스템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사용되는데, 예를 들면 현금이 자동현금 인출기에 들어오면 반드시 계수된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조차도 검증과 책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훌륭한 경영의 기본 토대다. 권력(특히, 돈을 다루는 권력)을 쥔 사람이 검증을 거부하려고 할 때마다 그 조직은 위험에 처한다. 이 일화에 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행원, 회계사, 감사, 금융 규제위원, 현금 차량 운전사, 컴퓨터 보안 전문가, 그 외의 재정 건전성을 위해 수고하는 모든 사람의 일을 귀히 여기신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은 모든 리더에게,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하는 업무를 와서 확인해 보라고 함으로써 공공 책임의 본을 보이며 사람을 이끌라고 권고한다. 

 

교만과 왕국의 마지막 (대하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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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어떻게 세워지는 왕마다 그토록 쉽게 악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일까? 웃시야 왕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통찰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웃시야는 16세에 즉위했고 초기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대하 26:4). 무엇보다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웃시야에게 조언을 하던 스가랴가 곁에 있던 젊은 시절엔 유익이 있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대하 26:5).

 

   흥미롭게도 여호와께서 웃시야에게 주신 성공의 상당 부분이 일상의 일과 관련이 있다.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대하 26:10).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대하 26:15a). 

 

   그는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해졌다’(대하 26:15b).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강성함은 태만의 요인이 됐다. 그는 여호와 대신 자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대하 26:16). 웃시야가 제사장들의 종교적 권위를 박탈하려 한 것이 궁중 반란으로 이어졌고, 결국 그는 권좌에서 쫓겨나 평생 추방된 외인으로 살아갔다.

 

   웃시야의 이야기는 오늘날 리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성공에 이르는 인물, 특히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존은 그 성공을 안겨 주는 권력과 특권에 의해 침식되기 쉽다. 얼마나 많은 기업과 군대,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이 천하무적이라고 믿는 수준까지 나아갔다가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겸손과 절제, 섬김의 태도를 잃어버리고 말았는가? 어느 정도씩은 성공한 많은 이들이, 자기 힘이 커질수록 얼마나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 그만큼 하나님께 더 소홀히 해 왔는가? 웃시야는 (비록 그가 그들을 무시하기는 했지만) 그가 잘못했을 때 그를 반대하는 부하를 두는 은혜까지 입었다(대하 26:18). 무엇이 또는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교만으로 떠밀려가게 하고 당신의 성공을 점점 더 키워 주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해 왔는가? 

 

 

사무엘, 열왕기, 역대기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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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치와 리더십 이슈는 삶의 전 영역을 건드린다. 국가와 기관이 잘 다스려질 때 백성은 번창할 기회를 얻는다. 지도자가 자신의 조직이나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행동에 실패할 때는 재앙이 따른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들의 성공 또는 실패는 결국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에 의존했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다윗, 솔로몬 및 기타 몇 명을 제외하고 왕들은 가짜 신들을 택했다. 그것은 그들을 비윤리적 원칙을 추종하게 만들었고, 자기 백성을 대가로 지불하고 자기 배만 불리게 만들었다. 그들의 신실치 않음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두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

 

   그러나 허물은 왕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자신들을 위해 왕을 임명해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들 스스로 폭정의 화를 자처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 주신다는 걸 믿지 않고 그들은 스스로 독재자의 통치에 기꺼이 굴복했다.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는 “모든 국가는 그에 마땅한 정부를 갖는다”라고 설파했다.[1] 권력의 부패 영향은 상존하는 위험이지만, 그렇더라도 나라나 기관은 다스려져야만 한다. 고대 이스라엘 족속도 부패와 폭정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강력한 정부를 택했고, 그런 유혹은 오늘날에도 상당히 살아 있다. 제대로 기능하는 정부를 세우는 데 필요한 어떤 희생도(납세, 율법 준수, 부족 및 개인 간의 전투) 치르길 거부하는 바람에 무정부 상태, 혼란, 경제적 자기 교살이라는 대가를 치른 사람들도 많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러 나라에서 계속 자행되고 있다. 훌륭한 정부를 탄생시키는데는 정교한 균형, 사람의 능력을 초월하는 균형이 필요하다.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에서 도출해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그분의 언약과 계명에 철저하게 의지할 때만 우리는 비로소 선하고 오래 가는 정부에 필요한 윤리 덕목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교훈은 국가는 물론 기업, 학교, 비정부 기구, 가정, 모든 종류의 일터에도 적용될 수 있다. 훌륭한 통치와 리더십은 사람이 성공하고 경제적, 관계적, 개인적, 영적으로 번창하는 데 필수다.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는 온갖 종류의 일이라는 햇살에 비추어 리더십과 통치의 여러 측면을 탐구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권세와 부를 세습하는 것의 위험성, 우리 일에서 하나님을 행운의 부적처럼 대하는 것의 위험성, 신실한 일꾼으로 세워질 기회, 자녀 양육의 기쁨과 절절한 아픔, 리더 선택의 경건한 기준, 리더십에서 겸손과 협업의 필요성, 혁신과 창의성의 역할, 리더십의 승계 계획과 리더십 개발의 필요성 등이다.

 

   이 책들은 눌러 둔 갈등의 파괴력과, 공개적이며 존중하는 태도로 표출하는 반대 의견의 창의적 잠재력을 다 보여 줌으로써 갈등을 다루는 데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그것은 공식적, 비공식적 외교관과 중재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며,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에게 용기를 가지고 존중하는 자세로 진리를 말해야 하는 부하의 필수적인 역할도 보여 준다. 이 책들은 권세를 가졌으나 결점투성이인 인물로 넘쳐난다. 훌륭한 갈등 해소책으로 자기 가족의 목숨을 구하고 다윗의 정직성까지 구해 준 아비가일, 자신을 노예로 삼은 바로 그 사람(나아만)을 섬기기 위해 용감하게 나서서 전쟁 중인 두 나라 사이에 평화를 안겨 준 나아만 아내의 이름 없는 여종을 포함해서 눈에 띄게 훌륭한 리더는 아주 소수다.

 

   이 책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훌륭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사다. 모든 선지자 가운데 그는 일상과 일과 경제적인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성의 관개 시스템을 회복시켰고, 기업적 경제 공동체에 자본을 창출했고, 나아만 장군을 치료하는 의료 선교를 통해 국가 간의 화평을 이뤘으며, 자신의 조직에 윤리적인 문화를 조성했고, 과부와 일꾼과 장군과 농부의 생활을 더 낫게 만들었다. 인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다주는 것은 훌륭한 통치와 경제 발전, 농업 생산성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유감스럽게도 왕들에 관해서는 훌륭한 통치나 리더십보다는 형편없는 사례가 훨씬 더 많다. 갈등을 형편없게 다루는 건 물론이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가정을 깨뜨리며, 일반 백성의 고혈로 귀족층과 공무원과 군인을 승진시키고, 자신의 호화로운 삶의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에게 세금 폭탄을 퍼부으며,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가차 없이 처단하고, 맘대로 재산을 몰수하고, 종교 제도를 뒤엎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백성을 타국에 포로로 잡혀가게 만들었다.

 

   그 왕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공과 힘을 교만과 폭정으로 비틀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언약과 계명을 어겼다. 재앙을 초래하는 리더십의 비밀한 핵심은, 참되신 하나님 대신 가짜 신을 숭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형편없는 리더십을 볼 때, 다른 사람에게든 우리 자신에게든 물어야 할 첫 번째 좋은 질문은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지금 이 상황 속에서는 어떤 가짜 신이 숭배되고 있는가?’

 

   어둠 가운데서 빛이 더 밝게 비치듯이, 왕들의 실패는 훌륭한 리더십에 대한 어떤 일화보다 더 명확하게 진실을 보여 준다. 다윗의 치하에서는 음악과 예술이 발달했다. 솔로몬 시대의 성전 건축은 건축 설계와 시공, 세공, 경제적 조직의 경이로움을 나타냈다. 요아스 시대 제사장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회계 시스템을 개발했다. 오바댜는 신실한 사람은 부패한 시스템과 악한 상황에서도 업적을 남길 수 있다는 훌륭한 모델이다.

 

   오바댜가 우리에겐 다윗이나 솔로몬, 다른 그 어떤 왕보다 훨씬 더 나은 모델이다. 왕들의 전반적인 관심은 ‘어떻게 내가 권력을 얻어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바댜의 관심은 ‘현재 내가 있는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방법으로 백성을 섬길 수 있을까?’였다. 둘 다 리더십에 관한 질문이다. 하나는 ‘권력을 위한 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선을 위한 권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권력의 자리로 부르시기를, 그분이 우리 각 사람에게 각자가 감당해야 할 도전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힘을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자. 그러나 그런 기도를 입 밖으로 내기 전에 우리는 먼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로 시작하고, 마쳐야 한다. 

 

 Joseph-Marie, comte de Maistre, Lettres et Opuscules, letter 76 (27 August 1811), as quoted by Edward Latham in Famous Sayings and Their Authors (London: Swan Sonnenschein & Co., 1906), 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