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아가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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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의 노래’로도 알려진 아가서는 연애시다. 한편 일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아름다움을 깊이 있게 묘사한 시이기도 하다. 구애하고, 결혼하고, 그다음에는 같이 일하는 연인들을 노래한 아가서는, 삶과 가정과 일을 이상적으로 그려 냈다. 아가서에 나타난 폭넓고 다양한 노동의 어려움, 아름다움, 근면, 즐거움, 열정, 가정과 기쁨 등의 주제를 탐색해 보자.

 

   고대 세계에서는 모든 시를 노래로 불렀다. 남성 선창자, 여성 선창자로 구성된 합창대가 이 시들을 노래로 연주했다. 아가서도 어쩌면 솔로몬 궁전의 귀족 청중들을 위해 만들어진 연주회 악보였을지 모른다. 솔로몬 시대보다 딱 한 세대 먼저 작곡한 고대 애굽의 연애음악이 있는데, 아가도 그와 비슷한 의도와 청중들을 상대로 지어졌다는 데서 매우 유사하다.[1]

 

    다만 애굽의 시는 아가서와 유사하기는 하나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썼고, 종종 젊은 연인들의 황홀경과 괴로움에 초점을 둔다. 그러나 아가의 가사는 경박하거나 즉흥적이지 않고, 심오하고 신학적이다. 또한 일을 진지한 관점에서 풀어낸다.

 

   아가를 다양하게들 해석하지만,[2] 여기서는 남녀 간의 사랑에 중점을 둔 노래 모음으로 보고 접근할 것이다. 이것은 본문의 평범한 의미다. 이것이 본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신 본문에서 우러나는 의미를 찾아내는 가장 실속 있는 방법이다. 본 연애시는 한 쌍의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결혼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기쁨을 그린다.

 

 

M. V. Fox, The Song of Songs and  the Ancient Egyptian Love Songs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85).

Duane A. Garrett and Paul A. House, Song of Songs and Lamentations,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59-81쪽에 다른 방식의 접근 방식도 나온다. 그러나 이 중 그 어떤 것도 일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일의 어려움, 일의 아름다움(아가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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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서는 한 여인이 그녀의 연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말하면서 시작한다. 여인은 자신의 피부가 검어진 까닭은 오빠들이 가족의 포도원에서 그녀에게 일을 시킨 탓이라고 밝힌다(아 1:6). 이 연가에서 노동에 관한 구절은 불과 여섯 군데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인종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 이유 때문에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깔보았다. 검은 피부는 본디 농부 계급에 속한다는 것과 햇볕 아래에서 일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흰 피부는 귀족 계급이고, 따라서 (그을지 않은)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는 여성의 아름다움의 표시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여인의 힘든 노동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소시키지 않았다(아 1:5).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1] 더구나 그녀의 직업은 자신의 장래를 준비시켜 주니, 때가 되면 그녀는 자기 소유의 포도원을 가꾸게 될 것이다(아 8:12). 자기 손으로 일하는 여성은 귀족은 아닐지언정 아름답고, 또 칭찬받을 만하다.

 

   일이라든지 일하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움은 흔히 미(美)의 기준에서 밀려난다. 오늘날의 문화에도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고대 그리스 사회는, 일을 미의 원수로 간주했다. 그러나 성경은, 일이 하나의 천부적미를 지닌다고 본다.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 “가마”를 만들었고, 아가서는 그 솜씨가 매우 아름답다고 찬양한다. 말 그대로 사랑의 수고였기 때문이다(아 3:10). 그는 그 가마의 아름다움을 사랑의 용도에 사용하는데, 자기 연인을 태우고 결혼식장으로 가는(아 3:11) 그 일은 이미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다. 일은 단지 교통 수단, 수확물, 혹은 급여를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심미적 창의성을 발현해 내는 근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배우자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땅히 칭찬해야 한다. 

 

 

가정과 일터가 분리된 현대 사회(아가서 1:7-8)

 

   여인은 최고의 남자로 여겨지는 자기 연인을 찾아다닌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를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곳은 그가 양 떼를 돌보는 일터라고 일러준다. 게다가 그의 일터는 자신의 연인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어떠한가? 일하는 시간은 고용주를 위한 시간이고, 일하지 않는 시간은 가족에게 속한 시간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일터에는 없다. 여러 면에서 가족과의 상호 작용이 불가능하다. 극단적인 예로, 트럭 운전사들은 운전하면서 자기 가족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서는 안 되며, 법정에서 최후 변론을 하는 변호사가 느닷없이 찾아온 아내를 만나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19세기 공장 시스템과 함께 일어났던, 일과 가정의 분리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현상을 전적으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겠다.  

 

“I am black and beautiful”(나는 검고 아름다우니)이라는 NRSV의 번역은, 그녀의 구릿빛 피부가 햇볕에 탄 탓 이라기보다 인종 때문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일의 즐거움이 회복되는 날을 기다리다(아가 1: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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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 1장 9절부터 2장 7절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 대한 헌신을 노래한다. 남자는 그 여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말해 주고, 여자는 그를 사랑하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고백한다. 그런 다음 2장 8-17절에서 그들은 봄이 찾아옴으로써 누리는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그는 자신과 함께 가자고 그녀를 초청한다.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농경문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로써, 봄에 시골로 여행 가는 것은 단순한 소풍이 아니다. 거기에는 일이 포함된다. 특별히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는 가지치기를 반드시 해 주어야 했다(아 2:12-13 - “노래할 때”를 NASB에서처럼 “가지치기하는 때”로 번역할 수도 있다). 더불어 아가 2장 15절은 어린 포도를 좋아하는 짐승인 여우를 언급하는데, 여우를 막지 않으면 포도 수확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남자와 여자는 오히려 경쾌한 마음이다. 그들은 이 작업을 놀이로 바꾸어 “작은 여우”들을 내쫓는다. 그들의 일은 사랑놀이에 너무도 가까운 나머지, 그것은 이중 의미로 바뀌어 ‘우리 포도원에 꽃이 활짝 피었구나’라는 뜻이 되었다. 봄철 농경 생활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함으로써 우리가 에덴 동산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 준다. 거기서는 식물을 돌보는 것이 곧 즐거움을 의미했다. 그런데 죄 때문에 그런 노동이 고된 일로 전락했다(창 3:17-19). 하지만 이는 일의 원래 의미, 올바른 의미가 아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이 에피소드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 준다. 그것은 마치 인류에 죄가 전혀 침투하지 않았을 시절의 삶과 같다. 마치 이사야 65장 21절 말씀이 이미 성취된 것 같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일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일에서 오는 기쁨과 즐거운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할 일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시리즈 4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서신서 · 요한계시록》의 10장을 보라.

 

가정과 일, 서로서로 뒷받침해 줘야 한다 (아가서 3: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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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은 일련의 노래에서 두 사람의 결혼과 그들의 하나됨을 그린다. 여자는 남자를 그리워하고(아 3:1-5), 그녀는 멋진 가마를 타고 그에게 온다(아 3:6-11). 왕관을 쓴 남자가 그녀를 맞이한다(아 3:11). 이스라엘풍의 결혼식에서 신부가 수행원들에 둘러싸인 가마를 타고 도착하면(아 3:7), 왕관을 쓴 신랑이 신부를 영접한다. 아가서 3장 11절을 보면 이 본문이 “혼인날”을 축하한다는 걸 확신할 수 있다.[1]

 

   남자는 자기 신부를 위한 연가를 부르고(아 4:1-15), 밤에 이루어지는 그들의 결혼식을 생생한 이미지와 은유로 묘사한다(아 4:16-5:8). 그 후에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아 5:9-6:3), 여자의 아름다움을 담은 또 다른 노래가 뒤이어 나온다(아 6:4–9). 그런 다음 이 커플은 서로를 위한 자신들의 사랑 노래를 부른다(아 6:10-8:4). 본문은 솔직할 정도로 성(性)적이어서, 크리스천 설교자들이나 작가들은 아가서를 회피하거나 또는 그것을 풍유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 바람에 점잖은 종교사회에서 받아들이기에 상당히 외설스러운 것으로 지금껏 여겨 왔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성관계는 의도적인 것이다. 혼인날 두 연인 사이의 열정을 노래하면서 만약에 성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뭔가를 놓친 것이다. 그리고 성은 아가서에 나오는 집안과 일 모두에 직결되어 있다. 결혼하자마자 그 연인들은 살림을 꾸리는데, 집은 고대 사회에서 경제 활동을 이루는 기본 단위다. 또한 남녀의 성관계 없이는 일하는 사람들(즉 자녀들)을 늘릴 수가 없다. 더 나아가 배우자 간의 (성관계를 포함한) 열정은 잘될 때든, 어려울 때든, 기쁠 때든 힘들 때든, 가정을 한데 묶어 주는 아교이며, 한 가정의 삶과 일을 특징지어 준다.

 

   오늘날 수많은 부부들이 성과 사랑의 행위를 위한 시간을 불만스러워한다는 보고가 있다. 이유가 많겠지만 많은 경우 부부 중 어느 한쪽이 (또는 두 사람 모두가)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그렇다는 것이다.[2] 아가서는 일을 핑계 삼아 배우자와의 친밀과 성생활을 위한 시간을 제쳐놓으면 안 된다고 권고한다.

 

   아가서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풍경과 농업 및 목축 등을 그림처럼 상상할 수 있다. 여자의 몸은 “동산”(또는 정원 - 옮긴이 주)이다(아 5:1). 남자의 볼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다’(아 5:13). 자신의 신부를 기뻐하는 신랑은 동산에서 백합화 꽃송이들을 모으는 사람 같다(아 6:2). 신부는 예루살렘처럼 훌륭하다(아 6:4). 그녀의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다(아 6:5). 그녀의 이는 “암양 떼” 같다(아 6:6). 그녀의 키는 종려나무 같다(아 7:7). 그들은 “포도원”으로 가기를 사모한다(아 7:12).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사과나무 아래에서”(아 8:5) 깨운다. 그들이 나누는 사랑의 기쁨은 그들이 하는 일의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자기네 행복을 자신들의 동산과 가축에서 따온 이미지들로 표현한다.

 

   이처럼 가정과 일은 서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다. 아가서에 보면 모든 삶이 하나로 묶여 있다. 산업혁명 이전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사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일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아직 그러하다. 아가서는 이런 결합 방식의 목가적 정경을 그려 놓고 있다. 가내 수공업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빈곤과 힘에 겨운 노동, 굴종, 종과 노예로의 예속, 학대당하는 관계 등을 떠올린다. 그러나 아가서는 우리의 일이 가족과 함께 시작해 우리 관계의 태피스트리(tapestry; 여러 가지 색실로 그림을 짜 넣은 직물 - 편집자 주)에 짜 넣어져야 한다는 우리의 바람과 하나님의 의도를 잘 담아내고 있다.

 

   경제가 발달한 곳에서는 급여를 받으며 하는 일 대부분이 가정 밖에서 이루어진다. 아가서 안에 일과 가정 및 여타 관계들을 결속시켜 줄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농장으로 가서 작은 여우들을 내쫓아야 할 소명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다만 오늘날의 직장도 근로자의 가정생활과 요구 사항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많은 직장이 근로자 자녀들을 위한 데이케어, 자녀 양육상의 필요를 중시하는 경력 개발, 가족을 돌볼 여가시간, 그리고 (개인 건강보험 제도가 있는 여러 나라의 경우) 근로자 가족들을 위한 의료보험 등을 제공한다. 그러나 모든 직장에서 이런 배려를 해 주지는 않는다. 현대의 직장 대부분은 우리가 아가서에서 보는 가족 케어 모델하고는 한참 거리가 멀다. 사무실에서 가정으로 근무지를 옮기는 최근 경향은, 비용과 재원, 지원 서비스 및 위험 요인들을 어떻게 분산시키느냐에 따라 상황을 향상시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아가서는 21세기의 직장들이 모양을 갖춰 가는 데 창의성을 발휘하라는 하나의 초청이 될 수 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일하는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사들은 배우자도 함께 채용하거나 아니면 직원이 이직할 경우 그 배우자에게 일자리를 알선할 수도 있다. 최근 몇십 년간 이 영역에서 세속적인 분야와 기독교 분야, 특히 가톨릭 모임에서 많은 것을 창출해 내고 연구가 이루어졌다.[3]

 

   아가서에서 시사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바로 급여를 받지 못하는 비급여 근로자들을 이해하라는 권고다. 산업시대 이전의 가정에서는 통합된 단위로 노동이 이루어졌기에, 급여 근로자와 비급여 근로자 간 구분이 거의 없었다.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에는 일의 대부분이 가정 밖에서 일어나고, 가정을 지탱하는 수입도 가정 밖에서 들어온다.

 

   그렇다 보니 집 안에 남아서 급여 없이 하는 노동을, 급여를 받으며 가정 밖에서 하는 노동보다 덜 존중하는 경향이 있다. 가정을 위한 전체적인 기여도를 생각지 않고, 오직 돈을 일의 가치, 때로는 개인의 가치까지 평가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을 꾸려 나가고, 자녀를 양육하고, 집안 어른들과 일할 수 없는 가족들을 돌보며 사회와 공동체와의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비급여 근로가 없다면, 가정은 절대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아가서는, 돈으로 하는 기여가 아니라 노동이 가정에 베풀어 주는 전체적인 혜택의 관점에서 일의 가치를 기술한다.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을 이끄는 지도자들에게 아가서는 하나의 도전이 될 수도 있다. 크리스천들이 아가서에서 자신의 근로 생활을 정리 정돈하는 데 필요한 도움을 많이 얻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가족과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노동에 관한 경건하고 지혜롭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도록 교인들을 준비시켜 줄 만큼 역량을 갖춘 교회들이 충분치 않다. 교회 지도자는 교인들이 직장을 잡도록, 또는 아가서에서 묘사한 이상(理想)대로 나아가는 그런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도울 만한 현장 지식을 거의 갖추지 못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간호사로서 할 일과 나의 가족 관계를 더 잘 융화시켜 나갈 방법을 알고 싶을 때, 아마도 담임목사보다는 다른 간호사들과 이야기하는 게 더 현명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런 부분은 미흡하나, 교회대로 가능한 일이 있다. 하나님이 일과 대인관계에 어떤 의도를 갖고 계신지 교인들이 깨닫도록 인도할 수 있다. 아울러 비슷한 일을 하는 교인들끼리 묶어 줌으로써 그들이 함께 어울려 희망을 나누고 갈등을 이야기하고 풀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주고, 나아가 서로 상의해 실행 가능한 옵션들을 찾아내도록 도울 수 있다. 

 

 

 Garrett, House, Song of Songs, Word Biblical Commentary, 175-184쪽.

International Planned Parenthood Federation, “FPAHK Survey on Marriage and Sex,” http://www.ippf.org.

더 공부하려면 다음 추천도서를 참고하라.     
Robert D. Austin and Lee Devin, “Knowledge Work, Craft Work and Calling,” Douglas 
A. Hicks and Mark Valeri, eds., Global Neighbors: Christian Faith and Moral Obligation in 
Today’s Economy (Grand Rapids: Eerdmans, 2008); Pope John Paul II, Laborem Exercens Encyclical 
Letter (Homebush, N.S.W, Australia: St. Paul Publications, 1981); Pope John Paul II, Sollicitudo Rei 
Socialis Encyclical Letter (Homebush, NSW, Australia: St. Paul Publications, 1987); Pope John Paul II, 
Centesimus Annus Encyclical Letter (Boston: St. Paul Books, 1991); Wilder Robles, “Liberation 
Theology, Christian Base Communities,  and Solidarity Movements: A Historical 
Reflection,” Richard L. Harris and Jorge Nef, eds., Capital, Power, and Inequality in Latin 
America and  the Caribbean, new ed. (Lanham: Rowman and Littlefield, 2008); Shirley J. Roels, 
“Christian Manufacturers at  the Crossroads,” Douglas A. Hicks and Mark Valeri, eds., 
Global Neighbors; Thomas W. Walker, “Who  is My Neighbor? An Invitation to See the 
World With Different Eyes,” Douglas A. Hicks and Mark Valeri, eds., Global Neighbors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땀 흘리는 기쁨(아가 8: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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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신성하며, 보호받아야 한다.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아 8:7). 솔로몬은 비록 일꾼들이 돌보는 큰 포도원을 많이 소유하고 있더라도(아 8:11), 이 여인은 자신의 기쁨이 자기 가족을 돌보는 데 있음을 확신하면서 남편과의 사랑의 삶을 포도원 가꾸기에다 비견한다(아 8:12). 부유해서, 또는 내 일을 남이 다 해 준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땀을 흘리는 것이 곧 행복이다. 그러므로 사랑 또한 단순한 감정 표현만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까지 포함한다.

 

아가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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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가족, 삶과 일의 이상적인 그림을 제시한다. 집안일을 서로 분담해 함께하면서 누리는 기쁨이 중심 내용이다. 마치 인간에게 죄가 전혀 침투하지 않았을 시절의 삶처럼 말이다. 아가서에서 일은 강건하고 기쁨이 가득한 삶을 완성하는 아름다움을 지닌다.

 

   이렇게 아가서는 우리가 기꺼이 노력해서 얻어야 할 하나의 이상을 보여 준다. 일은 사랑의 행동이어야 한다. 결혼과 가정은 일을 뒷받침해 줘야 하고, 또 일이 결혼과 가정을 뒷받침해 줘야 한다. 일은 결혼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지만, 모든 것의 근본인 사랑을 섬겨야 하며, 일을 핑계로 결코 사랑을 밀쳐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