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와 일

아티클 / 성경 주석

   세 목회서신은 각각 사도 바울이 동역자 중 한 사람에게 조언하는 편지 형식을 띤다.[1]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자신의 젊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인데, 편지에서 그는 교회 안에서의 사역은 어떻게 해야 하고, 거짓 교사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지시한다. 그러나 이 서신의 마지막 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 6:21)는 에베소에 있는 모든 교회가 이 편지를 읽어 모든 사람이 디모데에게 한 바울의 조언에서 유익을 얻게 할 의도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 서신들이 공통 주제들을 같이 나누므로 우리도 서로 연관된 본문들을 함께 묶어서 다룰 것이다. 목회서신에 나타나는 순서대로 그 주제들을 탐색해 보자.

이 논의는 목회서신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이 서신들을 일에 적용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아니다. 저자에 대한 보다 면밀한 논의는 William D. Mounce, Pastoral Epistles,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2000), lxxxiii–cxxix을 보라. 윌리엄 D. 마운스, 《WBC 목회서신》(솔로몬 역간).

조직의 건강한 사명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앞장서라 (딤전1:1-11, 18-20; 3: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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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에서는 믿음과 행동, 또는 가르침과 행함은 매우 긴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건강한 가르침은 경건에 이르게 하는 반면, 거짓 가르침은 기껏해야 비생산적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저주를 부른다. 서신 서두부터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고 권면한다(딤전 1:3). 왜냐하면 그런 다른 교훈(가르침)은 신화와 족보와 더불어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딤전 1:4).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건전한 교리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그가 하는 말들은 일터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CQI(Continuous Quality Improvement; 지속적 품질 개선)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에드워즈 데밍(W. Edwards Deming)은 자신의 방법을 ‘심오한 지식 시스템’이라 불렀다. 그는 “일단 개인이 심오한 지식 시스템을 이해하고 나면, 그는 그 원리들을 다른 사람들과 맺는 모든 대인관계에 적용할 것이다. 그렇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내린 결정을 판단하고, 자신이 속한 조직의 변혁을 이끌기 위한 근거를 갖춘다.”[1] 어떤 기관에서든 진실을 가장 깊이 있게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루크 티머시 존슨(Luke Timothy Johnson)은 디모데전서 1장 4절을 좀 더 솔직하게 “믿음으로 알게 된 것으로서,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번역했다.[2] 교회는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정돈되어야 한다. 이에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관들 역시 하나님의 방식으로 정돈돼야 할까?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는 사회가 ‘자연’에 따라 정돈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만약 자연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정돈하시는 방식이 사회가 정돈되는 방식에 그대로 반영되어야만 한다. 존슨이 관찰한 대로 “하나님의 뜻과 사회 구조 사이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은 없다. ‘oikos[오이코스]’(집) 조직과 ‘ekkl?sia[에클레시아]’(교회) 조직의 구조들은 서로 연속적일 뿐 아니라, 둘다 세상 속에서 해 나가시는 시혜(행정)의 일부다.” [3] 일터, 집 그리고 교회는 모두 유일한 하나의 창조 질서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모든 일터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면, 창조에서의 두드러진 주제는 인간이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죄에 빠졌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려고 오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 진리다. 그러므로 일꾼들은 죄를 짓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항상 의도하셨던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 죄, 구속에 관한 진리를 조직 관습에 반영해야 한다. 만약 사람이 단지 선하기만 할 뿐 죄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면 교회도 직장도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가 없다. 회계는 감사를 받아야 하며, 의도적으로 남을 못살게 구는 것은 중단되어야 한다. 고객 봉사에 대해서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 목사들, 근로자들과 경영진도 감독을 받아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도 일터도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짓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해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구속의 제안을 그리고 변혁을 일어나게 하기 위한 실질적 도움을 제시하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서는 영적이며 영원한 구속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교회 아닌 일터에서는 그 조직의 사명과 관련된 보다 더 제한된 구속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당장 해고하지 않고 업무 향상 계획, 재훈련, 다른 직위로 재배치, 멘토링과 근로자 지원 프로그램을 발동하는 것은, 특정 직장들, 특히 서구의 직장에서 실행하는 구속 사례들이다. 실제로 어떤 프로그램을 적용할지는 당연히 조직의 형태, 그 조직의 사명, 주변 문화적 · 법적 · 경제적 환경, 그 외 다른 요소들에 의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만약 직장을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하길 바라시는지 알고 싶다면(딤전 3:15), 성경에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진실은 사랑에 이르게 하지만(딤전 1:5), 거짓 교리들은 “변론”(딤전 1:4), “언쟁”(딤전 6:4) 그리고 영적인 파선에(딤전1:19) 이르게 한다. 그분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지식은 성경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성경 이해 역시 오로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 아니다. 크리스천 근로자들도 성경 지식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 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조직 내에서 그들의 지위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다 리더의 역할이 주어져 있다. 경영진은 대개 한 조직의 전략과 구조를 짤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갖는다. 모든 근로자들에게는 좋은 관계를 형성해 가고, 탁월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이 능력을 개발하도록 돕고, 자신들이 일하는 그룹의 문화를 형성할 기회가 계속해서 주어진다.

 

  이렇게 일터에서는 누구나 다 나름의 영향을 끼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조언했다. 다른 사람들이 디모데의 지위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해서 디모데 스스로 변화 도모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딤전 4:12).


   이런 실상은 오늘날의 일터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많은 기관들은 “사명선언문”과 “핵심 가치” 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세속적 기관에서 교회의 ‘신조’나 ‘교리’와 같은 의미다. 교회와 같이 기관들은 문화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근로자들이 무엇을 믿거나, 또는 한 기관이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양식이 달라진다.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참여하는 조직의 가치와 사명과 문화를 형성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W. Edwards Deming, The New Economics  for Industry, Government, Education, 2nd ed. (Cambridge: MIT Press, 2000), 92쪽.

Luke Timothy Johnson, The First and Second Letters  to Timothy: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he Anchor Yale Bible Com  mentaries (New York: Doubleday 2001), 149쪽.

Johnson, The First and Second Letters to Timothy, 149쪽

일터에도 기도와 화평과 질서가 필요하다 (딤전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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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이 장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 2:1-2)라는 권면으로 시작한다. 이 기도의 목적은 크리스천들이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딤전 2:2). 추측할 수 있듯이, 1세기 이 통치자들은 크리스천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거나 파멸시킬 만한 권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바울은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의 국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세속적인 일에 참여할 때 크리스천들이 활용할 수 있는 첫 번째 도구가 기도, 화평 그리고 질서다.


   다시 한 번 바울의 지시들이 하나님의 한 분 되심,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속,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딤전 2:3-7)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시며 세상의 구주시다. 그분의 영역에는 모든 일터가 포함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일하는 특정한 일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특히 ‘고위직에 있는’ 감독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에게 과도한 관심을 끌지 않으면서, 그리고 권위에 계속 대들지 않으면서,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딤전 2:2) 일을 하면서 자신들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 크리스천들이 화평케 하고 순종하는 이유는 두려워서나, 사람을 기쁘게 하려거나, 사회적 통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대한 건강한 감사와,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게 하려는’(딤전 2:4) 열망 때문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이것은 일터에서 사명을 정하고 핵심 가치를 만드는 첨병이 되어야하는 우리의 의무와 상충되는가? 어떤 크리스천들은 동성애자의 복지 혜택, 낙태나 피임에 대한 건강 보험 배제, 조합 결성, 종교적 상징들의 표시 등과 같은 논란이 되는 여러 쟁점들을 다루는 직무를 수행해야 할 수있다. 이 경우 불가피하게 마찰을 빚으면서 사명과 핵심 가치들을 제정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만약 그 일을 성공한다면, 이런 접근법은 그기관의 사명이나 가치 제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종종 다른 사람들의 일을 방해할 수도 있고, 평화를 깨뜨릴 수도 있으며, 감독자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조직의 문화를 좀 더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존중하는 자세로 참여하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건강 혜택을 두고 다투는 것보다는 동료들과의 우정에 더 투자하고, 인생의 중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상담해 주면서 지혜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연설의 자유와 다른 사람을 골탕 먹이는 것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대신, 맡은 일을 탁월하게 해내 직장 동료들이 도대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뭐냐고 물어볼 정도의 사람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실내 장식같이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논쟁하는 대신, 직무 수행, 고객 서비스 그리고 제품 디자인 같은 자신들의 일터에서 하는 핵심 활동들을 향상시키도록 도와줌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다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조언이 모순이 아니라 균형 있는 조언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변 사람들과 평화롭게 협력하면서 살라. 사람들을 섬김으로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라. 바로 그것이 왕 중의 왕께서 하신 일이다.

고결성과 대인관계 능력, 리더십의 핵심이다(딤전3:1-13; 딛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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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서는 장로와 감독들의 자질을 규정한다.[1]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 8-13절은 (어쩌면 여자 집사를 포함해) 집사들의 자질을 설명한다. 다양한 자질들을 제시해 놓았는데, 도덕적 고결성과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는 능력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장로들의 자질로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명시해 놓기는 했지만(딤전3:2; 딛 1:9), 전체적으로 볼 때 다른 자질만큼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 목록에서 가정과 교회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을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경험으로 간주한다(딤전 3:4-5, 12, 15; 딛 3:6). 뒤이어 나오는 부분에서 이런 연결점을 더 많이 살펴볼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직마다 사명이 다르다. 그러므로 각 기관마다 필요로 하는 리더십의 자질도 다르다. 일터에서의 일반적인 자질 기준으로 이 본문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중함이나 진지함은 관광 가이드에게는 조금 맞지 않는 자질일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고결성과 대인관계 능력을 우선하는 것은 어떤가? 관광 가이드의 경우 ‘책망할 것이 없음’, ‘청결한 양심’, ‘모든 일에 충성스러움’(신뢰할 수 있음)과 같은 도덕적 자질과, ‘나그네를 대접함’, ‘다투지 않음’ 그리고 ‘절제’와 같은 대인관계 자질들은 어떤 특정 기술이나 전문성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교회 리더십에 해당한다면, 이를 일터에서의 리더십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최근에 유명한 회사나 정부 지도자들이 보여 준 도덕성과 인간관계의 실패 사례들이 널리 공론화되면서 고결성, 인품 그리고 대인관계를 그 어느 때보다 일터에서 더욱더 중요시한다. 교회 못지않게 일터에서도 리더들을 제대로 키우고 선발하는 것이 절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과 경력을 준비하면서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과연 윤리적 인품과 대인관계 능력을 함양하기 위해 애를 쓰는가?


   흥미롭게도 초대 교회 많은 지도자들은 직장에서도 또한 지도자들이었다. 루디아는 자주 염색이라는 고가의 상품을 팔았다(행 16:14, 40). 도르가는 의류 제작자였다(행 9:26-41).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과 동업자가 된 천막 제조업자(가죽 노동자)였다(행 18:2-3). 이 지도자들은 이미 일터에서 효율성을 검증받은 후에 교회에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일했으며, 공동체에서 널리 존경을 받았다. 어쩌면 교회나 일, 또는 민간 부분에서의 리더십에서 기본이 되는 자질들에는 서로 상당한 공통점이 있을 수있다.

 “장로”(헬라어 Presbyteros)와 “감독”(episkopos)이라는 용어를 다룬 간략한 논의는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2006), 246–247쪽을 보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선하다 (딤전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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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는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확증해주며, 이 신적인 질서는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집과 교회 안에서 그리고 (본문의 논리를 확장시킨다면) 일터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함축하고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한 글은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 나온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것이 선하다’고 선언하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창세기 1장 31절 말씀의 선명한 메아리다.

 

   이 서신의 문맥 안에 드러난 창조에 대한 이 같은 긍정적 칭찬은, 혼인과 어떤 음식물을 금지하던 거짓 교사들(딤전 4:3)과 싸울 때 사용됐다. 바울은 이런 것은 감사함으로 받아야만 하는 것들이라고 확실하게 주장함으로써(딤전 4:3-4) 그들의 가르침에 반격을 가한다. 음식은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뭐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딤전 4:5). 이것은 선하지 않게 창조된 어떤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선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창조주와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인정함으로써,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지으신 음식 등을 거룩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따로 구별해 두게 된다는 뜻이다. 크리스천으로서 먹거나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전 10:31).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런 확증은, 우리가 일할 때 사용하는 모든 것은 본래 악하게 지음받은 것이 없으며, 죄와 연계된 것만 아니라면 창조와 연계된 어떤 일이든 크리스천이 행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유전을 퍼 올리고, 컴퓨터 칩을 설계하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달 위를 걷고, 휴대폰을 수리하고, 나무를 심거나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직업이나 재료 가운데 어떤 것도 본래 악한 것은 없다. 어떤 직업이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때의 사람들이 분투한 만큼 금욕주의 때문에 크게 분투하지 않는 현대 서구인들에게는 이것이 직관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4장 4절은 물질계를 중립적 · 도덕적 가치를 가진것으로 보거나, 또는 예를 들면, 기술 같은 것을 본래 악한 것으로 보지 말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얘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면서, 즐거워하고, 자유롭게 일하며 살아가게 해 준다.

직장을 가족같이? (딤전5:1-6:2; 딛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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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 4장 6?16절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구체적인 지시들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경건 훈련이 전문성 개발의 필수 구성 요소임을 기억해 두면 크리스천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딤전 4:8). 그러나 여기서는 디모데전서 5장 1절 - 6장 2절로 시작하는 다음 부분으로 재빨리 넘어가고자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부분은 디도서 2장 1-10절과 비슷하다. 교회 구성원이 된다고 해서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서는 안 되며(딤전 5:16; 6:2), 도리어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야한다. 이것은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별히 이 두 본문은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상전과 종이 마땅히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디모데전서에서 이 부분의 첫 두 구절은 아주 중요하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딤전 5:1, 새번역).

 

   이 명령은 (디모데전서 5장 4절과 8절에서 밝히듯) 가족과 교회 간의 구별을 없애라는 게 아니라, 친절함, 불쌍히 여김, 충성심, 정결함 같은 특징들이 우리의 가장 친밀한 가족관계를 특징짓듯이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 안에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그와 똑같아야 한다고 시사해 준다.


   ‘온전한 깨끗함’(절대적 정결)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가정이나 교회에서 성적 경계선을 어기는 일이 일어나며,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일터에서의 성적 학대는 큰 문제없이, 심지어 학대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알아 채지도 못한 채 넘어가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부적절하고 학대하는 말과 행동을 발견한다면 담대히 지적함으로써 일터에 축복을 안겨 줄 수 있다.


   일터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그 답은 ‘아니다’일 수도 있고, ‘그렇다’일 수도 있다. 〈The Office〉(미국 NBC에서 방영 중인 인기 코미디 TV 시리즈다. 원작은 영국 BBC에서 방영된 동명의 시트콤이다.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 위치한 가상의 제지회사 사원들의 일상생활을 그린다 - 옮긴이 주)에서 너무도 재미있게 묘사한 여러 이유에서도 볼 수 있듯 진짜 가족은 아니다. 일터에서의 결속력은 어떤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지의 여부에 따라 조건적이다. 가족과 달리, 관리자의 인정을 더 이상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은 해고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고용이 “어쨌든 간에 당신이 가질 자격이 없는 어떤 것”은 아니다.[1] 직장을 가족인 양 가장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며, 심지어는 학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용어를 가족들이 마땅히 서로서로에게 보여 주어야하는 존경, 헌신, 열린 소통 및 돌봄 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일터는 가정과 같이 될 수 있다. 만약 크리스천들이 동료들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들로 알려진다면, 그것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구속적인 섬김의 큰 표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멘토링을 해 주는 것은 숙련된 일꾼들이 신참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대단히 소중한 섬김이다. 이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하는 투자와 비슷하다. 그리고 학대와 착취에서 가족들을 지키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직장 사람들을 위해서도 똑같이 행동하도록 강권한다. 가족(교회) 구성원들에게 하는 것보다 일터에 있는 사람들을 덜 존중하거나 덜 배려해도 된다고 생각해 그들을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일에 참여해서는 절대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직장 동료를 포함해 모든 이웃을 마치 우리 가족이나 우리 자신같이 사랑해야 한다.

 Robert Frost, “The Death of the Hired Man,” 125행, North of Boston (New York: Henry Holt, 1915).

경건과 돈(딤전6:3-1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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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부유한 크리스천들을 향한 강력한 권면과 경고가 가득하다. (우리는 디모데가 처한 특수한 상황과 직결된 내용인 11-16절, 20절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 있는 당부는 건너뛸 것이다.) 디모데전서 6장 3-10절과 17-19절에는 일터에 직접적으로 적용한 내용이 나온다. 이 본문들을 읽으면서 흔히 저지를 수 있는 두 가지 실수가 있는데, 이를 피해야 한다.


   첫째, 이 단락은 경건한 사람이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한다고(딤전 6:5) 바울이 적었다. 그는 경건이 반드시 이생에서 재정적 이익에 이르게 해 주어야 한다거나, 또는 경건을 추구하는 목적이 당장의 재정적 이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 상태를 책망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인해 잘못됐다.

 

  1.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성도들을 이생에서 물질적 부족이라는 고난을 당하게 하시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함이 없는 재물”(딤전6:17)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2. 혹 누군가가 이생에서 엄청난 부를 얻는다 해도 이익을 보는 순간은 아주 짧다. 그 이유는 존 파이퍼가 말한 대로 “영구차 뒤에는 짐칸이 없기 때문이다”(딤전 6:7).[1]
  3. 부를 추구하다 보면 악과 배교, 파멸과 멸망(딤전 6:9-10)에 이르고 만다.

 

   그러나 바울은 인생의 기본적 필요에 만족하는 자세와 경건이 결합되면(딤전 6:6, 8) 그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고 자기 글을 읽는 이들을 격려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딤전 6:17)이시다. 바울은 의로운 부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명령했지 (딤전 6:18), 가진 것들을 다 팔아 가난한 자가 되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행을 넉넉히 함으로써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딤전 6:19). 다시 말하면, 현세에서 더 많은 돈을 갖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의 생명과 복으로 이익을 이해한다면, 그 경건은 곧 진정한 이익의 수단이 된다. 디모데전서 6장 18-19절에서 바울이 하는 권면은 예수님께서 하신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19:21; 눅 12:33)라는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가 피해야 할 두 번째 실수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정죄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크리스천은 절대로 임금 인상이나 승진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거나, 크리스천 사업가는 이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군가 더 많은 돈을 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이유는 선하고 어떤 이유는 악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돈이 제공하는 지위나 호화로운 생활, 또는 자아 만족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원하는 경우, 이는 정말로 이 성경 구절이 책망하는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가족을 적절히 부양하려는 목적이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들에 더 많이 기부하려는 목적이나, 혹은 공동체를 번창하게 할 물품과 봉사를 창출하는 데 투자할 목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원한다면 이는 악한 일이 아니다.[2] 돈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일터에서 성공하거나 이윤을 얻고자 하는 모든 소원까지 반대하는 건 아니다.

 John Piper, Desiring God: Meditations of a Christian Hedonist, rev. and exp. ed. (Colorado Springs: Multnomah, 2003), 188쪽. 존 파이퍼, 《하나님을 기뻐하라》(생명의말씀사 역간).

 이 주장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Wayne Grudem, Business  for  the Glory of God: The Bible’s Teaching on the Moral Goodness of Business (Wheaton: Crossway, 2003)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