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급하심과 부에 대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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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재물(기본적인 필요)을 찾을 수 있길 원하신다. 또한 우리가 그분의 관대하심 속에서 부유함(풍족함)을 누리기를 소망하신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자원으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풍족한 공급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필요가 채워짐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이는 반드시 자기 자신 또는 주변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정신적, 육체적, 관계적, 환경적, 도덕적 또는 영적인) 엄청난 희생을 전제로 해야만 가능하다. 또한 다른 이들이나 스스로에게 해를 끼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이들도 있다. 어떠한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든지,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공급하심과 재물에 대해 어떠한 의도와 역할을 지니고 계신지에 대해 크게 궁금해 하고 염려하기도 한다. 이런 문제는 빈곤층, 부유층, 고용주, 직원, 구직자, 학생, 부모, 퇴직자, 주택 소유주, 세입자, 노숙자 등 할 것 없이 모두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행히 경제적 상황에 대한 걱정은 성경에서 말하는 우선순위와도 상통한다. 참으로 성경은 공급하심이나 재물을 단순하게 다루고 있지 않다. 신약과 구약의 상당 부분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다뤄지고 복음서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신가? 이번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룰 것이다.

  •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이나 재물과 관련해 태초부터 가지고 계셨던 의도
  •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이 그분의 공급하심 및 재물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해 우리에게 미친 영향
  • 경제권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응답과 이를 위한 우리의 역할
  •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해 우리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
  • 우리가 소유한 재물을 관리하는 방법

 

   우리는 주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재산을 어떻게 관리하도록 의도하셨는지에 더 주목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기본적인 공급하심에 의존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실지, 그렇지 않을지, 염려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들 중 대다수는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공급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높은 수준의 부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는지를 걱정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물론 기초적인 공급 또한 이 토론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특히 불안 가운데 가난한 삶을 경험한 적이 있거나, 이런 분야에서 남들에 비해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이들이 지닌 더 깊은 통찰력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지니셨던 본래의 의도 : 축복, 공급, 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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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1장과 2장의 말씀을 보면, 인류가 창조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및 풍족함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에덴동산의 목가적인 환경 속에서 최초의 인간은 풍요롭고 비옥한 땅을 찾았으며, 인류는 이에 따라 모든 면에서 번영을 누리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번성할 수 있도록 풍부한 자원과 재물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저자는 인간이 창조된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창1:28) 라고 말하고 있다. "축복" 또는 "복을 받다"라는 단어는 성경 이야기를 이루는 중심적 요소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축복을 받는 것은 분명히 실재하며, 우리의 손 안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 축복은 우리의 창조주를 알고 그를 사랑함으로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혜택들과 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후 광야의 황폐함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만나를 내려주시고 (출16)  반석에서 물을 얻게 하심으로 (출17) 매일 필요한 양식을 제공해주셨다. 그분으로부터 비롯되는 풍족한 재물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도착한 때를 묘사하는 성경구절 속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으며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따라 사는 데 필요한 물질로 넘쳐났다. 신명기를 보면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 즉 번성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지상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신8:7-9)

 

   태초부터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번성할 수 있도록 세상을 완벽하게 준비해두셨다. 인간이 비옥한 땅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 능력을 사용할 때, 식량을 일구어낼 수 있다(창2:15).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사람들이 그저 생계를 겨우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들로 풍족함을 누리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1:28)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연계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이를 통해 자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다(창2:20).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풍족함을 안겨주시기 위해 다른 피조물을 지으셨으며, 인간은 이를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노동의 능력과 재주를 받았다. 창조주와의 동반자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땅의 자원을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하며, 이를 통해 획기적으로 산물을 길러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며, 본래의 것보다 더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원자재는 모든 이들에게 돌아가고도 남을 만큼 풍부하다. 이는 에덴동산 이후, 대부분 재산과 물질이 부족했던 경제적 상황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놀랍게도 인류는 그분의 피조물을 개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잘 협조해왔다. 농업이나 원예의 발달, 석탄과 석유, 가스, 풍력, 그리고 수자원을 이용한 전력발전, 또는 공원과 정원,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의 창조, 주택, 가전제품, 옷, 다양한 운송수단의 설계와 구축 등과 같은 발전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였고 이는 공동 창조의 결과이다. 이렇게 획기적인 방법으로 제작하고 생산해내며 발전시킬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지어졌다는 사실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타락한 세상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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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 인류의 반란은 (창3) 모든 만물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태초의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무너졌을 뿐 아니라, 땅을 통해 식량을 공급받고 재물을 얻는 능력 또한 잃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했을 때, 경제적 문제와 여러 가지 악이 따라옴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사이가 소원해지면서, 인간이 식량과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 또한 약화되었다.

 

   결국 타락한 인류는 저주와 축복 모두를 안고 살게 된 것이다. 이는 노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땅,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것들과 풍요로움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셨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3:17하-19상)

 

   우리는 식량을 생산해낼 수 있는 재료들을 통해 기본적인 식량도 일구어내지 못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나 남의 잘못으로 인해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약물의 남용, 형편없는 업무 습관, 적은 교육기회, 병약한 신체, 상류층에 집중되어 있는 자원, 인종차별 등과 같은 수많은 장애물들이 개인, 가족, 공동체, 그리고 사회 전체가 하나님과의 동반자 관계 속에서 함께 식량을 생산해내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타락한 세상에서 공급하심과 재물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크게 방해받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급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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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적으로 약 14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으며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공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도,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할 정도로 생계만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11억 명에 달한다.[1] 이렇게 전 세계 인구의 40%에 가까운 이들이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본 것처럼, 이 같은 현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가난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공평한 세상에서는 현명한 선택이 공급하심과 재물로 이어지고 잘못된 선택이 가난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원인과 결과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세상에서 다음과 같은 잠언의 진리는 논리상의 오류가 전혀 없다.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잠14:23) 게으름, 헛된 사치, 형편없는 자제력, 그리고 중독적인 행동 등은 자연스럽게 빈곤으로 이어진다. 그 반면에 근면함, 현명한 소비생활, 강한 자제력, 그리고 중독으로부터의 자유 등은 부유함으로 이어진다. 이는 오늘날 전 세계 수백만 또는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될 수도 있다. 즉, 그들의 상대적인 부와 빈곤은 그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렸는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또는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크게 기인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원 및 교육의 접근기회를 얻을 수 있는 매우 안정된 사회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질병, 재난, 가족의 역기능, 범죄, 사고 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 사회의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부와 가난은 아마도 개인적인 노력에 따른 공정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그러한 공평한 경쟁 환경과는 거리가 멀다. 타락한 세상은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 다른 시작점에서 출발한다. 가족, 공동체, 그리고 사회 환경으로 인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세상의 기회가 좌우된다. 어떤 이들은 부유한 국가에서 사랑과 보살핌이 넘치는 가정의 자녀로 태어나 수많은 능력과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원이 매우 부족한 환경에서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원마저 공급받지 못한다.

 

   빈곤이 대부분 인류가 범한 일종의 죄 또는 실수의 결과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부족한 자원과 재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전부 그들 자신만의 죄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형편없는 정부, 전쟁, 부정부패, 권력에 의한 착취, 교육과 훈련의 부족, 가정 및 사회적 병폐 등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지만 충분한 자원을 공급받지 못한다. 특히, 이러한 공급의 부족은 종종 사회 또는 개인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죄에서 기인한다. 즉, 가난한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지은 죄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가령 어느 폭군이 어느 한 가족의 땅을 압수해 그들이 더 이상 농작물을 생산하지 못하게 한다든지, 어떤 공장이 힘없는 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최소임금도 보장해주지 않고 이에 반발하는 이들을 협박한다든지, 부유한 지주가 울창하고 거대한 숲의 나무들을 베어내어 강의 하류에서 거주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홍수의 위험으로 몰아넣는다든지, 어떤 남편이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가난에 허덕이는데도 도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든지, 사기와 속임수로 인해 투자에 실패해 가족들이 미래를 위해 힘들게 모아두었던 재산을 모두 날리는 경우 등등이 모두 그러한 예가 된다.

 

   그렇지만 모든 가난이 죄의 결과는 아니며, 어떤 특정한 사람이 지은 죄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장애, 질병, 나이 등과 같은 다른 요인들로 인해 자급자족하지 못한다. 구약에서는 특히 과부, 고아, 그리고 이방인 이렇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약자로 묘사되고 있다.[2] 이를 내다보고 히브리 법은 이러한 약자들이 필요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을 지니고 있다.[3] 예언서를 대표하는 인물인 스가랴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스7:9-10)라고 말하고 있다.[4]

 

   또 다른 종류의 가난은 천재지변으로 인해 생겨난다. 지진, 쓰나미, 가뭄 또는 홍수 등의 자연재해는 공동체를 전부 황폐화시키고 농작물과 집, 소유물, 생계수단 등을 눈 깜짝할 사이에 파괴해버린다. 그 예로, 2004년 인도네시아 해안과 동남아시아 일부를 휩쓴 복싱 데이 쓰나미로 인해 25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었고 자급자족할 수 있는 방편을 전부 잃어버렸다.

 

   따라서 많은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로 나타나는 개인의 부유함 또는 궁핍함에 대해 마음대로 추측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일부는 개인 스스로가 자초한 것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범위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성경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부와 가난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는 개인이 자초한 것이라고 일컫는 부분은 잠언 전체의 1/3도 되지 않으나, 나머지 부분은 전부 사회경제적 정의와 그 문제를 인식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주목하기도 한다.[5] 따라서, 성경이 부유함과 가난함을 어떠한 원인과 결부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경은 가난의 구체적인 이유를 밝혀내는 데 치중하기보단 부유한 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즉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의무에 대해 더욱 많은 초점을 맞추고 있다.

 

World Bank, World Development Indicators 2011 (Washington, DC: World Bank Publications, 2011), 65쪽. World Bank는  하루 1.25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 "극심한" 가난으로 , 하루 2.00달러 미만으로 사는 것을"최저 생활 수준의" 가난으로 정의한다.

이 세 그룹을 돌보는 것은 지속적으로 유대인 사회가 그들의 언약적 책임들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로 여겨지고 있다. 예를 들면, 출22:22, 신10:18; 24:17-22, 시146:9, 사1:17, 슥7:9-10을 보라.

이삭 줍기는 바로 이 상황에 대해 규정된 한 가지 방법이었다. 예시는 룻2:2-3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의 상황을 보라.

또한 렘7:5-7을 보라.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65, noting an observation of Norman Gottwald.

많은 이들이 재무을 탐하고 부유해지지만 결국 자신에게 큰 해만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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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하루 끼니를 겨우 연명해나가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이 세상에는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 풍족한 재산을 지닌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얼핏 보기에 큰 축복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또 경제적으로 보면 이는 틀린 말도 아니다. 하지만, 부유한 개인, 가정, 공동체, 국가 등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며 그 대가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이제 공급이나 재물을 지닌 이들, 또는 이들이 재물을 얻기 위해 착취하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을 살펴보자.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은 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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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국가 지도자들은 착취, 무력, 부패, 갈취 등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 또는 부를 얻는다. 잔혹한 독재자 및 정권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빼앗으며 국민들을 무력과 협박으로 탄압하고 다른 이들이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 자신들은 호화로운 삶을 살아간다. 버마, 짐바브웨, 리비아 등 이러한 국가들은 수도 없이 많다.

 

   어떤 다국적기업들은 최대한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 노동이 값싼 시장을 착취하고, 절실한 이들에게 위험한 근로 환경을 강요하거나 현지 생태계를 파괴한다. 이렇게 사람들과 그 지역을 해치면서 얻은 이윤은 본국 규제기관들의 감시망을 피하며 해당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도 이를 알지 못한다.

 

   어떤 개인과 조직은 개인투자자에게 사기를 치거나 속임수를 써서 이들이 그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무시한 채 굉장히 큰 위험을 떠안게 만든다.

 

   이 같은 경우는 다른 이에게 해를 가하면서 자신은 이득을 취하는 방법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러한 부당함은 종종 "재물, 권력, 또는 식량을 향한 강력하고 자기중심적인 열망"과 같은 욕심으로 인해 비롯된다.[1]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있을 때, 그는 이러한 문제에 맞서 디모데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그러한 욕심은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를 해치고 다른 이들을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드는 것 이외에 다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예로, 탐욕은 환경을 파괴하기도 한다. 즉, 지구를 심하게 파괴하여 궁극적으로 다른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고,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식량도 줄어들게 된다.

 

   안타깝게도,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부유해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사실 예언서가 전하는 메시지 대부분도 이스라엘 내 권력 있는 부유층이 저지르는 경제적 부당함을 겨냥해 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미가, 그리고 예레미아와 같은 대변자들을 통해 우리가 만일 이웃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무의미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이웃을 대하고 일을 할 때도 실제로 그런 모습이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에 심판이 내려졌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팔며"(암2:6) 이러한 질책은 언약적 책임을 어긴 이스라엘이 응당 받아야 할 결과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변함없는 사랑, 공의로우심, 그리고 의로우심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2] 즉,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언약공동체에서도 나타나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임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약자를 포함한 사회의 모든 일원이 자원을 얻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언약적 책임 중 하나였다.

 

   애석하게도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인정을 베푸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법체계는 도외시되고 무시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샬롬(‘평화’를 뜻하는 히브리어_역자 주)을 본보기로 따르기는커녕, 억압과 권력 남용의 소굴이 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해버리는 등 다른 국가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부자들은 땅의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으며 (이는 레25:25-28을 위반함), 소작농들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주었고 (이는 신23:19-20에서 금하고 있음), 이는 채무불이행으로 이어졌다. 또한 부자들은 뇌물로 사법제도를 왜곡시켰다. 그 결과, 생계를 이어나기 힘들었던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팔아 노예가 되었다.

 

   이에 따라 선지자 아모스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5:24)라고 간청하였다. 미가는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돈을 벌고, 다른 이들을 고용하거나 관리하며, 사업을 하고, 투자를 하며 돈을 소비하는 방식은 정의로울 수도, 또는 부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분리할 수 없다. 우리는 부를 추구하기 위해 남을 착취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0th ed., revised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Walter Bruggemann의 강의 본문, “The Continuing Subversion of Alternative Possibility: From Sinai to Current Covenanting,” Laing Lectures, 2008, Regent College, Vancouver, Canada으로부터 가져옴.

정당한 재물도 여전히 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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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부의 축적이 부당함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재물을 정당한 방법으로 얻었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많은 성경 구절은 독자들에게 재물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들면서 이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부유함은 온갖 종류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부는 교만과 오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잠28:11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 이처럼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믿기 쉽다. 에스겔은 두로의 왕에게 이렇게 경고하지 않는가.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겔28:5)

 

   두 번째로, 재물은 종종 자족감, 안일함, 그리고 잘못된 안도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호12:8에서 볼 수 있는 에브라임의 자만이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내가 재물을 얻었는데 내가 수고한 모든 것 중에서 죄라 할 만한 불의를 내게서 찾아 낼 자 없으리라 하거니와"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서는 호세아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을 묘사하며 굉장히 안타까운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먹여준 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호13:6). 예수님께서도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시면서, 재물이 우리에게 주는 그릇된 안도감의 위험에 주목하신다(눅12:13-21). 우리는 배가 부르고, 삶이 평온하며, 미래가 보장되었다고 느껴질 때,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쉽다.

 

   세 번째, 재물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주변 이웃들에게서 우리의 관심을 거두고,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자비를 베풀지 못하게 막는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이야기해주셨다(눅16:19-31). 나사로라는 거지가 어떤 부자의 대문 앞에서 굉장히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 부자는 나사로의 고통에 눈도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생활과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계속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부자는 죽어서까지 자신만의 필요를 채우는 데만 집착하며 나사로를 여전히 하수인 취급하고 있다.

 

   네 번째는 우리가 그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빠지기 쉬운 것으로, 재물의 유혹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마음을 둘로 나눈다. 다음은 돈이 지닌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 말씀이다. 시편 기자는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시62:10)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재물의 위험은 신명기 8:12-17에서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설명되고 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잠언 30장에서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간청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30:8-9)

 

   이러한 재물의 위험은 신약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에서 주님의 생각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6:24)

 

   여기서 재물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단어는 맘몬(mammon)이다. NIV 성경과 같은 일부 번역본에서는 예수님께서 재물을 신으로 표현해 하나님과 대적하는 관계로 나타냈다 해서 이를 대문자로 쓰기도 한다. 하나님과 재물은 모두 충성과 찬양을 추구한다. 부는 중립적이지 않다. 재물은 만족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다. 만약 재물을 조금 얻었다면, 계속해서 점점 더 많이 갖고 싶어진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젊은 부자 청년과 만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19:23-24)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위험한 것으로 보신다. 이는 마치 다이너마이트와 같아서 굉장히 선하게 쓰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큰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많이 가질수록, 그에 따르는 위험 또한 같이 커진다.

 

   다섯 번째로, 공급하심과 부를 얻는 것은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키울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더 많은 부를 갈망하게 된다. 질투와 탐욕은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이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면서 생겨난다. 우리는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쉽게 조종당할 수 있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1929년 경, GM의 간부였던 플로이드 앨런(Floyd Allen)은 사뭇 직설적으로 말했다. "광고란 사람들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것을 원하도록 만드는 사업이다."[1]

 

   최근에는 사회학자 버나드 맥그레인(Bernard McGrane)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광고에는 이런 메시지가 숨어 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모습은 문제가 많다. 이거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니 당신은 도움이 필요하다. 당신은 구원이 필요하다." 그러한 맥락에서 광고는 끝없는 자기비판과 온갖 종류의 걱정을 하도록 종용하고 있으며, 그런 다음 ‘구원’을 위해 필요한 소비재를 모든 사람들에게 권한다. 우리가 절대 접할 수 없는 광고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광고다. "당신은 괜찮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 그저 당신 자신이 되어라.”[2]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갈망하도록 우리의 욕구를 훈련시켜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느 정도가 충분한 것인지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작업이다. 다음 구절처럼 야고보 또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약 4:2-3)

 

   여섯 번째, 우리는 미래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재물에 대해 근심하고 걱정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실제로 많이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이러한 걱정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많이 가진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걱정을 키워간다. 기본적으로 생계에 필수적인 재물보다 더 많이 지니게 되면 혹시라도 재물을 잃을까봐 근심하는 마음 역시 커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충분한 부를 갖지 못할까봐 두려워 불필요하게 오랜 시간 일하면서 자녀들에게 최신 기기나 화려한 옷을 사주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실제로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의 관심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또 다른 이들은 노후를 위한 자금을 충분히 마련해놓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현 시점에서 하나님과 이웃들을 섬기는 일이나,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맺는 것, 또는 균형 잡힌 삶을 희생하면서 미래를 위한 자금을 준비하고자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어떤 투자항목이 과연 안전한지 걱정하거나, 또는 어떻게 자신들이 원하는 집 또는 차를 마련할 것인지 꿈꾸면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돈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가장 많은 근심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걱정 때문에 사람들은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사기도 치고, 정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우정을 희생하거나 그들의 가치를 위태롭게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필요한 공급보다 더 많이 갖는 것은 오히려 짐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로 마태복음 6에서 생계를 겨우 이어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이 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이는 예수님께서 굉장히 강하게 주장하신 말씀이다. 만약 미래의 경제적 상황이 불투명하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토머스 라이트(N.T.Wright)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본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의 삶을 이끌어 주셨음을 알아야 한다."[3] 따라서 만약 "그러한 점에 있어 하나님을 정말로 의지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는 적어도 단 한 명은 그렇게 믿었다고 답할 수 있다.

 

 

Harvey Salgo, “The Obsolescence of Growth: Capitalism and the Environmental Crisis” in The Review of Radical Political Economics 5 (Fall 1973), 32쪽.

다큐멘터리 영화 The Ad & the Ego (Parallax Pictures)를 글로 옮긴 것.

N.T. Wright, Matthew for Everyone, Part One (SPCK, 2004), 66쪽.

경제권 되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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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그분의 공급과 재물을 누리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방해를 받았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세상의 물질과 부가 부족함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제권을 다시 되찾아주심으로써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고자 하신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9-20)

   여기서 "만물"은 경제권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방법인 예수님 제자들의 삶을 통해 이러한 구속을 행해 보이셨다. 골로새서에 다음 내용이 이어진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1:21-22)

 

   또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설명하고 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고후5:17-20)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경제적인 것을 포함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 위의 구절에서 사신이라 함은, 그들의 통치자가 지닌 다른 모든 관심사와 함께 경제적인 관심사도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신이자 구속의 동반자로서 우리가 지닌 역할은 무엇일까?

 

공급하심과 부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기르고 이를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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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재정적인 자원의 사용권을 되찾는 일은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질 성경적 태도를 기르면서부터 시작된다. 가장 근본적인 성경적 태도로는 위탁, 감사, 그리고 만족이라는 세 가지가 있다

 

소유의 태도에서 위탁의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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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류에게 에덴동산과 그 안에 사는 모든 피조물들과 식물들을 관리하라고 명령하셨다. 이를 "창조 명령"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경영하는 일상적 업무를 아담과 이브와 함께 나누신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스스로를 창조 질서의 관리자로 여겼어야 했다.

 

   이러한 위탁 관계는 우리가 소유한 것, 우리가 거주하는 것은 모두 궁극적으로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원리에 입각해서 세워졌다. 소유주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목적에 따라 일을 행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경영을 위탁하신 것이다. 시편 기자가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이는 다윗 왕이 성전 건축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모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올린 기도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대상29:14 ) 우리는 돈, 재산, 기업, 능력, 물리적 환경, 유산 등 우리가 가진 그 어떤 자원에 대해서도 절대적 소유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받은 그 어떤 재산이나 부에 대해서도 우리는 단순히 관리자에 불과하다.

 

   위탁의 의무, 즉 관리하는 것은 위탁의 핵심적 요소이다. 위탁관리자들이 자유롭게 자원을 분배하고 이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곧 자원의 실제 주인, 또는 이들이 다루는 자원의 수혜자를 대신해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재산이 그들에게 맡겨진다면 그에 따른 책임감 또한 당연히 커진다.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그렇지 않은 종의 비유를 들으시며 이를 설명하신다. "...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8) 크레이그 블룸버그(Craig Bloomberg)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권력의 자리에 올라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특권을 지닌 것이 아니다. 그저 더 많은 책임을 지닐 뿐이다!"[1]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그 어떤 재물이라도 위탁관리자의 태도로 임하는 것은 재산과 부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을 얻는 데 가장 기본이 된다. 이러한 재물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것 또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 자원도 없이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며, 오히려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우리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기를 원하신다. 운 좋게 풍요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들의 부를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들은 기부, 투자, 또는 직접 행하는 봉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 책임을 다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자원을 사용하라는 명령은 출애굽기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출23:10–11)

 

   땅을 소유한 자는 무조건 7년마다 한 번씩 가난한 자가 땅을 무상으로 쓸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심지어 들짐승에게도 땅을 빌려주어야 한다. 이러한 명령은 신명기에서 좀 더 간단한 말로 반복된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신15:11)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 위탁된 자원을 우리 자신을 위하여 비축하면서 우리의 생활방식, 가정, 그리고 교회 시설 등을 필요 이상으로 풍족하게 유지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위탁은 우리가 누구를 위해, 그리고 무엇을 향해 일하고 있는 지를 알려준다. 즉, 하나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새로운 경제, 그리고 또 다른 꿈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과의 동반자 관계에 있는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의 재산을 포함한 모든 자원들을 재량껏 사용할 수 있도록 부름 받았다.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84쪽.

감사를 모르는 태도에서 감사하는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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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일하고, 사업에 종사하며,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하며, 판매하고,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가 부유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가 가진 것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노력과 지적 능력, 그리고 창조적인 천재성으로 인해 얻어졌다고 확신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반대다. 우리가 만약 화목한 가정에서, 번영하는 국가에서, 좋은 교육 체계 속에서, 법의 지배를 받는 안정된 사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 노력이 빛을 발하는 데 필요한 행운을 지닌 것이다. 노력으로는 경제적 성공에 절대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노력은 실제로 종종 성공을 이루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노력을 통해 결실을 맺는 데 필요한 지적 능력과 창의적인 천재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묻는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바울이 하고자 했던 말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닌 모든 능력을 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다윗왕은 하나님의 자비 앞에서 기도할 때 이 같은 심정을 표현한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대상17:16) 우리 스스로가 재물을 축적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고 할지라도, 재물과 풍요로움에 대한 성경적인 반응은 바로 깊은 감사다.

 

   심지어 기독교인들도 풍요로움으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마치 우리가 이를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다는 특권의식을 갖게 되는 듯하다. 이는 우리가 스스로의 중요성에 대해 과장되게 생각하고, 우리 삶 속에서 받은 재능과 은혜, 그리고 행운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감사를 경험하지 못하도록 막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질투심이다. 우리가 만약 우리 스스로를 종이 아닌 소비자로만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기보다는, 남이 가진 것을 시기하기 쉽다. 또한 서구 문화는 이러한 질투심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마케팅, 광고, 그리고 심지어 오락문화까지 우리가 열망하는 부자처럼 살아가라고 우리를 재촉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다른 이들이 가진 재산뿐만 아니라 그들의 능력이나 환경까지도 갈망하게 되었다. 반면, 성경은 직장에서의 지위, 연봉, 경제적 기회, 또는 통장 잔고 등 이웃에게 속한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탐내지 말고 우리가 지금까지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기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기를 수 있을까? 바로 감사 기도를 올리면 된다. 우리가 소유한 것에 대해 그저 매일 감사기도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더욱 감사함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이와 동시에 “동경”하는 마케팅과 문화적 메시지를 잠시 접어둔다면, 우리는 삶 속에서 더욱 감사하게 되고 기쁨에 넘치게 될 것이다. 

 

 

만족하지 못하는 태도에서 만족하는 태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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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는 만족으로 이어진다. 만족은 그 자체로 아주 기분이 좋으며 탐욕과 질투심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다. 성경은 우리가 낙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증가하는 소비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제적 삶의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비전을 따르면, 충분히 소유한 후에는 더 이상 바라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매일 그들이 필요한 정확한 양의 만나를 내려주셨던 광야에서 이를 경험하였다.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출16:18) 히브리서에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고 조언하고 있다. 바울 또한 같은 맥락에서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자신의 여정을 통해 경험한 것을 나누고 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1-13)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 즉, 부유와는 거리가 먼 빌립보 교회는 겨우 끼니를 이어갈 정도로 어려웠다. 하지만 그 어떠한 경제적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부유한 삶을 사는 사람들 또한 자신들이 가진 것에서 만족을 찾으라는 도전의식을 준다.

 

   만족이란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 정도의 수익이 충분한 것일까? 급여는? 근무 시간은? 저축 금액은? 집 평수는? 재산은? 우리 중 누구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가 충분하고 과한지 그 기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신도들끼리 소그룹을 이뤄 각자의 구매 계획을 공유하고 이러한 구매가 감사와 만족에 이르는 진정으로 필요한 욕구를 위한 것인지, 혹은 질투와 열망으로 인해 특권의식과 불만족으로 이어질 구매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 시도해본 기독교인은 거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에 대해 실질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눠보는 것이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각자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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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급하심과 부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우리가 삶을 사는 방식을 필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자급자족하는 개인주의적 생활방식에서 공동체적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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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에서 “공동체” 또는 “교제”로 가장 빈번하게 번역되는 단어들 중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되던 단어다. 일상적으로 사용될 때는 누군가와 어떤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성경은 코이노니아를 단순히 어떤 것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유하는 데 있어서의 활발한 참여를 의미한다. 특히 바울은 이 코이노이아를 재정적인 동반자를 포함한 강한 동반자 관계를 의미할 때 사용하였다.[1]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는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이렇게 칭찬하는 장면이다.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코이노니아)로 말미암아…”(고후9:13) 여기서 코이노니아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기독교인들을 위해 고린도인들이 기부한 돈을 의미한다. 또 다른 예로는 기독교인들의 첫 교제(코이노니아, 행2:42) 속에서 재물을 나누는 모습이 있다. 이러한 교제는 영적임과 동시에 재정적이며 이에 따라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는”(행4:32-35)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필요를 공동체의 자원을 통해 충족시키셨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행2:44–45)

 

   이처럼 비록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 신약 교회의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이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재물과 부는 개인의 것이 아니며 공동의 소유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예루살렘 공동체가 노력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오늘날 21세기 상황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는 여러 가지 요인에 달렸다. 과거부터 공동소유라는 개념은 대게 형편없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신뢰도가 높은 공동체 속에서는 아직도 경제적 분배를 온전히 실천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신뢰 공동체는 부자들에게서 기부금을 걷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특정인들 또는 자선단체에게 개인적으로 기부금을 전달함으로써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자 할 수도 있다.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태도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을 위한 재물을 공급해주신다. 비록 그 재물을 개개인에게 위탁하시는 것이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N.T. Wright는 "…바울의 세계에서 그 단어는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일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정적인 책임을 지는 관련된 모든 사업 동반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말이었다."  N.T. Wright, Paul For Everyone: The Prison Letters (Lond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85쪽.

고립주의의 생활방식에서 교제의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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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족한 재산을 가진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떨어져 살고 싶어 한다. 높은 울타리가 쳐져 있는 주택, 에어컨이 작동되는 자가용, 자신의 사회경제적인 집단으로 국한된 교제 범위,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제한된 교회. 이 모든 것들로 부유한 자들은 자신만을 위한 거주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로써 그들만의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효과적으로 추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부자들이 국내 또는 해외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지리적인 거리와 사회적인 거리로 인해 최소한의 공급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히 과부, 아버지가 없는 고아, 그리고 이방인을 돌보라는 명을 받았다.[1] 이런 약자들은 농경사회에서 특히 취약계층으로 꼽혔는데, 그 이유는 땅을 경작할 수 있는 권한이나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인들로 인해 약자들은 쉽게 소외되었다. 이들을 돌보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것은 바로 이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시편에서 묘사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68:5)

 

   이와 같이 “이방인”을 환대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기본적 요소다. 두 개의 핵심적인 복음 구절인 눅14:12-14(자신의 축제에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는 것)과 마25:31-46(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의 말씀은 일반적인 환대(conventional hospitality)와 그리스도적인 환대(Christian hospitality)를 구분하고 있다. 우선 일반적인 환대는 친구들과 가족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적 환대는 가난한 자들과 “지극히 작은 자”(마25:40), “값을 것이 없는”(눅14:14) 자들, 그리고 “도로 청하는”(눅14:12) 자들까지 그 범위를 넓혀간다. 예수님께서는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라고 하시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적 관계의 차원을 강조하신다. 맥락상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내 가족들”)을 일컫고 계심을 알 수 있는데, 제자들 또한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없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즉, 우리가 그분과 한 가족이 되기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알게 되면 그의 관점은 바뀔 수 있다.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어려움을 직접 눈으로 보며, 이들에게 배울 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도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새로워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까이 하시기 위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빌2:6-8)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게 되었다(히4:15).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과 비교해 가난하고 연약한 우리를 가까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따라 우리와 비교해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가까이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얼굴을 모르는 무리들이 아니다. 이들은 진짜욕구를 지니고 진짜 삶을 사는 진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러한 환대를 어떻게 베풀 수 있는지에 대하여 관대하게 생각해야 한다. 환대를 베푸는 일에는 기부를 하거나 투자를 하는 것이 필수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좀 더 개인적이고 친근한 표현 또한 중요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모든 공동체 안에는 온갖 부류의 이방인들이 존재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보수를 많이 받는 직업을 갖고, 부자동네에 살며, 부유층 친구들하고만 교류하고, 부유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들에겐, 가난한 자들과의 교류가 그들의 일상에 들어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것은 익숙한 집단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불편한 상황에 처해지는 것이다. 심지어는 먼 거리를 여행하거나 이동해야 할 수도 있다. 만약 진정한 그리스도적인 환대를 베풀고자 한다면,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대신 해줌으로써 그들의 힘을 빼앗는 온정주의를 피하고 힘의 불균형을 최소화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재정적인 성공을 경험하거나 지위와 성공을 기준으로 자긍심을 얻는 이들에게는 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이들과 직접 만나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상황에서, 권력으로 비롯된 위신과 특권을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욥은 가난한 자들과 이러한 개인적 친분을 쌓은 성경 속 인물 중 한 명이다. 욥은 자신이 사는 동네의 가난한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교류하였다. 또한, 자신의 종, 과부, 아버지가 없는 고아, 이방인 같은 사람들을 멀리하지 않았으며 이들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살았다.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욥31:32)

“이는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 줄 자 없는 고아를 내가 건졌음이라… 과부의 마음이 나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였느니라.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욥29:12-13, 15-16)

 

   욥은 그의 가난한 이웃들과 친했고 이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해주었으며 이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느끼고 자신의 정치적 또는 재정적 자원을 이용해 이들을 돌보았다. 

 

 

예를 들어 출22:22; 신10:18; 24:17-22; 슥7:9-10; 렘7:5-7를 보라.

강박적인 업무 습관에서 리듬감 있는 업무와 휴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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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우리가 강박적인 업무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고든 맥도널드(Gordon MacDonald) 목사는 자신이 속한 문화를 다음과 같이 보았다.

"더 많은 것을 원할수록 그것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수입이 필요하다. 더 많은 수입을 벌수록 더 힘들게, 더 오래 일해야 한다. 그래서 더 큰 집을 짓고, 더 많은 차를 사는 등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이를 모두 갚기 위해 더 힘들게 일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게 쉬게 된다.”[1]

 

   하지만 강박적 업무 습관은 부유한 문화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스스로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공급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같은 유혹을 받는다.

 

   어떤 상황이든 공급하심과 부에 대한 신성한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서 안식일이라는 성경적 관습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일을 하지 않는 안식일은 여호와께 다시 초점을 맞추고 자신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기념하는 날로 그들이 언약한 책임의 일부였다. 안식일은 창세기 3장에서 묘사된 것처럼 땅을 가는 일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돌보심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일을 통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탐욕을 주기적으로 버릴 수 있다. 이는 우리 자신에게 인생에는 생산과 소비 외에도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산하는지 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은행계좌의 총 잔액이나 우리가 지닌 업무 또는 책임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안식은 결국 신뢰의 행위가 된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가 알아서 채워지도록 두시는 것이 아니라, 이를 공급해주실 것임을 담대히 믿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이를 진정으로 믿기 위해서는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만나에 의존하면서 깨달은 것처럼 대개는 시행착오가 필요하다(출16:1-36). 또한 이는 궁극적으로 삶이 우리의 노동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은혜에 달려 있음을 다시 상기시켜 준다. 이것은 미래에 삶이 풍족하지 못할까봐 염려하는 이들과 어느 정도가 충분한지 인식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이들 모두가 풀어야 할 과제이다.

 

   이 주제에 대한 심층적인 논의는 www.theologyofwork.org에 수록되어 있는 '휴식과 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콘텐츠 준비중)

 

Gordon MacDonald, “Rest Stops” in [email protected] Journal, Vol. 2, No. 4.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우리의 재물을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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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급하심과 부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기르고 우리의 개인적 삶을 변화시켜나가는 것은 삶의 경제권을 되찾기 위해 하나님과 동반자적 관계를 맺는 것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성경은 부유한 이들에게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재물을 사용하라고 계속해서 강하게 명령하고 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가장 명백한 방법은 바로 기부다. 이 밖에도 투자나 신중한 소비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다.

 

기부를 통한 가난한 자들을 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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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삶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알게 되었을 때, 이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은 관대한 나눔으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10:8)라고 명령하신다.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마케도니아 교회들은 이를 그대로 행하는데, 이 성경 구절은 신약에서 관용과 베풂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다. 사도 바울은 경제적 빈곤을 겪고 있었던 예루살렘의 교회 신도들을 위해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기부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케도니아 교회의 신도들 스스로도 경제적으로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의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고후8:2-4)

 

   놀라운 점은 이들이 풍요로움이 아닌 극심한 가난 속에서 이를 베풀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베푸는 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가 가진 재물이 아무리 적더라도 지금 바로 기부를 시작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생각하기에 충분히 부유해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기부를 할 수 있는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나눔의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우리는 왜 베풀어야 할까? 이는 우리가 따르는 전능하신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에게 관용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부가 공평하게 분배될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이들이 베풀고, 또 그만큼 가난한 이들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후 8:13–15)

 

   이러한 사도 바울의 사고방식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 어울리지 않게도 극히 부유하거나 가난한 이들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만약 기본적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형제들이나 자매들이 있다면, 재물이 넉넉한 이들이 나서야 한다. 전 세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매일같이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반해, 풍족함을 누리는 서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는 더욱 어려운 과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이같이 이야기하는 것의 목적은 죄책감을 이용하여 우리가 베풀도록 동기를 유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베푸는 행위는 관용뿐만 아니라 기쁨에서 우러나야 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우리는 넘쳐흐르는 감사로 인해 우리가 원해서 기꺼이 남에게 베풀어야 한다. 만약 베푸는 일이 달갑지 않다면, 감사하는 일에 더욱 신경 써서 기부를 통해 즐거운 마음이 들도록 해야 할 것이다.

 

   관대하게 베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개인적 직관과 깊이 뿌리박힌 문화와도 어긋난다. 개인적 차원에서, 우리는 아낌없이 베풀었다가 나중에 우리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우리 문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증가하는 “필요”를 만들어주고, 소유와 축적을 통해 안정감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에 호소하면서 이러한 두려움을 크게 만든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부의 속박에서 벗어나 관대하게 베풀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런 관대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는다면, 이는 물질에 매어 있던 우리를 헛된 안정감 및 지위라는 우상에 속박된 문화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물론 베풀기로 결정했다면 이제 어디서, 어떻게 베풀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수많은 선택 중에서 가장 도움이 되고 적절한 것을 고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만약 기관을 통해 기부를 하기로 결정했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 이 기관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가? 최대한 많은 도움을 주기 위해 수혜자과 함께 노력하고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는가? 이들이 행하는 일에 있어 문화적인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결국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는 않는가?
  • 자원의 사용과 효율적 운용에 있어 투명하고 정직한 기관인가? 독립적 이사회의 감시를 받으며 국제 감시기구에 회계보고를 하는가? 안타깝게도 많은 기관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진실성이 결여되고, 독립적 회계 또는 평가에 비협조적이며 자원을 낭비하거나 운영, 모금, 간부의 높은 연봉 등으로 인해 기금을 불필요하게 소비한다.

투자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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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푸는 것이 경제적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지만, 재물의 현명한 투자 또한 가난한 이들을 돕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있었던 예는 굉장히 많다. 하지만 최근 몇 십 년 동안, 가장 어려운 공동체 내에서 투자를 통해 어떤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두 가지 큰 움직임이 있다.

 

   첫 번째는 소액금융이다. 전 세계적으로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우— 매우 가난한 공동체 안에서는 소규모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대출을 위해 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사업을 통해 수익을 내면서 창업 대출금을 다시 갚고, 또 다른 사람이 새로운 소규모 사업을 위해 그 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말이다. 적어도 처음 의도는 이러했다. 이러한 소액금융의 효율성은 다양한 맥락에서 불평등하게 나타났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과 비판하는 사람들로 나눠졌다. 결국 이는 자본을 유지하고, 부가가치사업을 창출해내며, 이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가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들만을 위한 체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흔히 나타나는 소액금융의 형태는 바로 “저축용” 협동조합이다. 이는 조합원에게 대출을 해주기보다 매주 소량의 저축을 하도록 하고 이를 다른 조합원들과 합쳐서 궁극적으로 투자를 하는 것이다. 계속되는 지원과 멘토링 활동 속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협동조합은 개인이 돈이 급히 필요하거나 사업을 시작하고자 할 때 대출해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자본을 보유하게 된다. 이렇게 공유된 자본은 공동체의 복지 수준을 높이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저축용 협동조합은 가난한 사람들이 통장 잔고를 늘리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이었던 장벽, 즉 적은 금액으로 안전하게 투자하기가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서 모두 나타나는 또 다른 움직임은 “사회적 기업”이다. 이러한 기업들은 이윤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적 목표를 달성하고자 설립되었다. 이들은 종종 “지속가능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투자수익을 극대화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 기업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들이 있다 :[1]

  • 세라와 존은 도자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일자리를 찾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이들만 고용하였다. 노숙자 또는 반노숙자이거나 정신건강의 문제, 신체적 장애, 약물 중독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고용한 것이다. 풀타임으로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다른 근무자들이 받는 것보다 더 후한 지원을 받고 있다. 이 도자기는 전문매장 또는 온라인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 마이클은 부품회사를 운영하며 전자부품을 조립해서 해외로 수출한다. 그는 자폐스펙트럼장애(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알려지기도 함)가 있는 사람들을 고용해 고도의 정교한 업무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 이는 작은 규모의 사업(상시 최대 12명까지 고용)이지만, 이 일이 아니었다면 직업을 구하기 어려웠을 사람들을 교육하고, 멘토링 하면서 계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마이클이 이 사업의 원동력과 의사결정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 XYZ은 한 아시아 주요 도시의 홍등가에서 황마로 가방을 만드는 사업으로 시작하였다. 가방은 전 세계로 팔려나갔고 내구성과 품질로 유명세를 탔다. 이 사업은 매춘에 빠져있거나 쉽게 빠질 수 있는 여자들만 고용하였고 몸을 파는 행위에서 벗어나 그들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다른 의미 있는 길을 제시해주었다. 이 황마 가방 공장은 생계를 꾸려가기에 알맞은 임금뿐만 아니라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단체의 혜택도 제공한다.
  • 제리는 수년 동안 수입회사를 운영해오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고용하지는 않았지만 지속가능하고 수익성이 있는 사업을 이루기 위해 굉장히 많은 자원을 투자했다. 자신이 생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월급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개발도상국의 소액금융 프로젝트에 투자하고 있다.

 

   위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목적으로만 이뤄진 투자대상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가난한 국가나 공동체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일반 사업적 투자 또한 빈곤을 줄이는 데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비록 천연자원과 환경에 대한 인간의 기지와 부지런한 관리가 필요하긴 하지만, 전 세계의 생산능력은 아직 다 소진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기업들은 어려운 공동체가 아닌 주주들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착취와 남용의 수단이 될 위험이 있다. 수억 명의 기독교인들이 현재 빈민지역에서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투자와 제조, 물류, 판매 또는 이를 수송하는 기업에 종사하고 있다. 어쩌면 이들이 사업전략과 운영을 통해 전 세계의 빈곤층을 도울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지닌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기업들은 본 아티클의 기고자에게는 알려져 있지만, 공개적으로 접근 가능한 소스들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소비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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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를 통해 빈곤층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우리는 종종 소비를 과소비와 결부시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소비를 막연히 신성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면서 검소를 미덕으로 하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물론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는 것이 소비라면 이는 일리 있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필요하든 아니든 그저 물건을 값싸게 사고자 하는 열망으로 종종 표출되곤 한다. 왠지 저렴하게 구매하는 것이 소비에 대한 우리의 의구심을 완화시켜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행위는 가격에 대한 압력을 가함으로써 제조업자가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는 임금이 매우 낮아지고 이에 따라 결국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생계 또는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소비하는 물건에 대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그러한 물건을 만들고 판매하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시킬 수도 있다. 현재 글로벌 경제 속에서 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이 일상적인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금액보다도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 반면, 그러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이들은 별로 큰 문제없이 더 높은 가격을 주고 이를 구매할 능력이 있다. 만약 소비자들이 좀 더 많은 돈을 지출하고, 그렇게 더 많이 지출한 돈이 이를 필요로 하는 노동자에게로 그대로 전해질 수만 있다면, 실제로 소비를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돕게 되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선진국에서는 개발도상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에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커져왔다. 이와 같은 “공정무역”은 커피, 코코아, 면화를 재배하는 농부들, 수공예업자 등과 같은 소규모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노동에 맞는 정당한 보상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남에게 관용을 베풀기 위해 돈을 소비하는 것 또한 성경에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웃을 위해 호화로운 잔치를 열라고 말씀하신다(눅14:12-14). 성경이 금하고 있는 사치스러운 소비는 자신의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소비다(약4:3). 따라서 우리에게 “내가 가진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다면 이에 대한 좋은 대답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말고 이웃을 위해 호화롭고 멋지게 소비하라”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현재 우리가 다루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소비라는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한다.

 

 

우리는 사회의 조직과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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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들은 빈곤을 완화하는 일에 있어 소규모의 회사나 사람을 직접 대면하는 수준에서만 행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거시적 또는 구조적 규모에서도 이와 같이 부름 받았다. 세상에는 모든 이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있다. 하지만 전 세계가 이를 위해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동기와 이를 위한 수단을 모두 조합해 이뤄내고자 힘을 합쳤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이 역시 인간의 죄와 잘못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사회 내에서 공급과 부에 대한 조직 체계와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가 작고 하찮게 느껴질 수도 있고, 사회의 명예의 전당에서 우리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외부인들 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사회 내의 굉장한 경제적 변화를 만들어내시는 분이시다.

 

   어쩌면 이방의 땅에서 구조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한 첫 번째 사람은 요셉일 것이다(창41-42). 요셉은 가나안의 보잘것없는 땅에서 태어나 노예로 이집트에 팔려갔으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하찮은 존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는 결국 이집트라는 거대한 국가의 경제적 구조를 개혁시켰다. 그는 뛰어난 예지력을 통해 풍년의 기간 동안 흉년을 대비해 수확한 곡식들을 저장해놓았으며 이러한 저장고가 있는 도시들 간의 광범위한 연결망을 구축하였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식량 은행(food bank: 극빈자용 식량 저장 배급소_역자 주)이었다! 그 결과, 오랜 흉년 동안 이집트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요셉과 오랜 기간 떨어져 있었던 그의 가족들이 식량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도 식량을 제공해줄 수 있었다. 이집트의 경제 체계를 바꾸고자 하는 요셉의 의지가 없었다면, 수백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칠 년 동안 이어진 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이 도전했고 체계를 바꾸어놓았기 때문에,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구별 없이 모두 살아남게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력해졌고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느꼈다. 하지만 선지자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29:7)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들이 지닌 체계를 개혁하도록 하는 계획을 지니고 계셨다.

 

   이러한 계획은 다니엘,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 같은 젊은 청년들이 바빌론 정부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면서 실현되었다. 이들은 새로운 지위를 통해 얻게 된 사치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체계를 개혁하고자 했다. 자신들의 지위뿐만 아니라 목숨까지 내걸고서 이들은 불의와 불평등에 맞서 싸웠다. 이렇게 개혁을 이끌면서,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을 억압하였던 나라의 번영을 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위해 힘썼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이들이 일하고 거주했던 곳의 체계, 문화, 그리고 사회를 전부 개혁하고자 하셨다. 한 사례를 보면, 이는 다니엘이 왕에게 다음과 같이 전면적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4:27)

 

   우리가 정부 부처, 정당, 민간 기업, 시의회, 다국적기업, 소기업, 의료 또는 교육 기관, 지역 동네 등, 그 어디서 일하든지 간에 우리 또한 우리가 섬기는 이들의 복지와 번영을 위해 힘써야 한다. 이것은 때로 모든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번영을 막는 체제와 구조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거나 소외시키는 기업들의 우선순위, 구조, 절차 등을 개혁하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더욱 공정한 세금제도를 옹호하는 것, 독점이나 반경쟁적인 행위를 막는 법안이 마련되도록 돕는 행위, 또는 특정 산업에서 고용주와 노동조합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 등, 그리스도인이 공급하심과 부가 얻어지는 방식을 구조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많다.

 

   경제 체제와 긴밀하게 관련된 주제는 www.theologyofwork.org에 수록되어 있는 '경제와 사회(Economics and Society)'에서 찾아볼 수 있다. (콘텐츠 준비중)

 

 

공급하심을 늘리고 가난을 줄이려면 비신도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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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기독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경우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그 한 예로 에스라에서 볼 수 있는 페르시아인인 고레스 이야기가 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스1:1-2)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따르지 않는 이들도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신다. 그분의 자녀들을 통해서만 구원의 일을 행하시는 게 아니란 얘기다. 에스라(또는 이후의 느헤미야)처럼 우리 또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비기독교인들과도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 

 

   그 예로 다양한 방법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개인 또는 기관들과 함께 협력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의미 있는 고용, 소규모 사업 기회, 빈곤 완화, 그리고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비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이들과 힘을 합쳐 이들이 지닌 선한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분별 있게 행동해야 한다. 그러한 결속 관계를 통해 나타날 수 있는 결과가 성경적인 목표와 가치에 부합하는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한다.

 

 

느헤미야 - 긍정적인 역할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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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는 궁핍한 이들을 위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태도와 생활방식, 전략, 그리고 우선순위를 지녔던 성경의 인물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외세를 위해 일했으며, 자신의 관직이 위태로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가난에 허덕였던) 원주민인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스라엘 성벽의 재건을 주장하였다. 느헤미야는 고위관직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풍부한 물질적 보상을 받았다. 따라서 자신의 지위에 따라오는 특권을 그저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단의 유대인들을 접한 다음, 그들을 돕기 위한 일에 뛰어들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이들 또한 주체할 수 없는 빚에 시달리고, 토지를 몰수당했으며, 심지어는 노예로 전락하기까지 했다. 이는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부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이득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에 느헤미야는 공개적으로 그런 착취자들을 비난하고 몰수한 것을 다시 돌려주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부유층은 그의 명을 따랐다! 이 밖에도, 느헤미야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제도를 세우고 이들이 다시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장기적인 재정 개혁을 실시한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은 어렵게 대가를 치르고 바꾼 자신의 생활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전임자와 부하들이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지켜본 그는 자신의 봉급을 줄이고 더욱 단출한 삶을 택했으며 마땅히 받을 권한이 있는 여러 혜택들을 거부하였다.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재임기간 중 일했던 유대인, 관료, 이방인 등 150명에 달하는 이들의 세금을 대신 지불해주었다. 그렇게 그는 이들을 후하게 환대했고 매일 이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느5:14-19).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자신의 부를 사용하였는지 더 알고 싶다면 www.theologyofwork.org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와 일'에서 "예루살렘 성벽의 회복재건 (느1:1-7:73)"을 참고하라.

 

 

하나님의 공급하심 속의 희망과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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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필요와 관련해 하나님께서 뭐든지 공급해주실 것임을 기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공급하심에 대해 인도해주실 것을 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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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공급하심에 대한 인도하심을 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필요와 우리가 부양하는 이들의 필요, 그리고 세계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7:7-11)

 

   사도바울이 로마의 자택에 감금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빌립보 교회가 그를 도와주자,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한 감사를 표한 후 확신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의 필요 또는 주변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된다는 것일까? 그렇다. 물론 필요한 모든 물질을 바로 공급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시겠다는 약속은 해주셨다. 따라서 우리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현실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요청해야 한다. 직업을 얻거나 보조금을 신청하는 일, 또는 직업을 바꾸거나 노사분쟁을 해결하고 직무교육이나 훈련을 받는 일 등에 있어 그분의 인도하심을 요청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직장을 유지하고, 일터에서 번창하도록 해주는 직장에서의 윤리, 창의력, 생산성, 업무 습관과 그 밖의 요인들을 하나님의 힘으로 변화시켜달라고 간구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직업이 없거나 변변찮은 경우, 그 실망감 또는 수치심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시간들이 그 어떤 때보다도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재물을 지녔다 하더라도, 우리는 물질을 어떻게 얻고, 투자하며, 베풀어야 하는지에 대해 종종 고민하고 혼란을 느낀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재물을 얻고 이를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도가 필요하다. 이에 대해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라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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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하게 되어 있다는 말은 우리가 가진 물질이 부족할 때 하나님께서 이를 공급해주실 것을 믿고 기대해야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5,000명의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은 우리의 재물이 부족하게 느껴질 때 하나님께서 이를 공급해주신 대표적인 성경 속 예시이다. 예수님께서 외딴 곳으로 들어가셨을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뒤따랐다. 이들은 곧 허기가 졌으나 음식을 구할 곳이 없었고 음식을 살 수 있는 돈도 없었다. 그 때 제자 중 한 명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소년을 발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빈약한 양의 식량을 받으시고 축사하신 후, 마치 애초부터 수천 명을 위한 준비된 식량이었던 것처럼 이를 모든 무리에게 나누어주셨다. 놀랍게도 무리의 모든 이들이 이를 가지고 먹고 싶을 만큼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요6:11-12). 그리고 남은 식량들을 모아 담았을 때, 총 열두 개의 바구니를 채울 수 있었다! (요6:1-14; 마14:13-21, 막6:30-44, 눅9:10-17 참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을 기쁨으로 채워주신다. 이는 우리가 자급자족하는 존재가 아님을 상기시켜준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급자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면하고 지혜롭게 일하도록 부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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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힘닿는 데까지 근면하고 지혜롭게 일하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의 노동에 대해 지녀야 하는 태도일 뿐 노동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 공급자이시긴 하지만 우리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공급하심에 대해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주시는 선물은 바로 일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일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베푸심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 하나님께서 주시는 공급하심의 첫 번째 요소다. 장애, 상황, 불의 등으로 우리가 일을 통해 필요를 채우기가 매우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 임하기 시작하신다. 그리고 무한한 그분의 자원을 통해 부족한 것을 보충하신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신도들 중 자신의 일에 태만한 이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살후3:10-12)

 

   노동을 하지 않는 이들은 식량을 먹을 권리도 없다. 이는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항상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해당된다. 일이 유급인지 무급인지에 대한 여부는 상관없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용한 일이 있는데, 게으름을 부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태함을 축복해주시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많은 가정이 집 밖에서 이뤄지는 유급의 노동과 집 안에서 행해지는 무급의 노동에 의존한다. 두 종류의 노동 모두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이루는 구성요소다. 보수가 있는 일이 필요한데 이를 계속 유지할 수 없거나 아예 실직한 사람들 또한 자원봉사를 통해 일할 수 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힘이 닿는 데까지 일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나태함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올바른 형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들이 타락한 세상의 영향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약속은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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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타락한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구해주신다는 약속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성경 인물들은 대부분 어려운 상황, 고통, 박해 등으로 인해 필요한 공급을 빼앗기는 힘든 시기를 겪는다.

 

  • 요셉은 이집트의 감옥 안에서 수년간 힘든 시기를 보냈으며 이 시기 동안 목숨만 부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식량만을 배급받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 나오미는 남편이나 식량을 공급해줄 토지도 없이 자신과 자신의 며느리 룻의 생계를 겨우 유지해나가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 바울은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7)와 같은 끔찍한 경험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이를 면제해주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러한 어려움에 빠지도록 가만히 두지도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대신해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17:15)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약속하시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욕구가 아닌 필요를 충족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그 어떠한 물질의 부족이나 시련 및 환난을 겪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를 견디고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재물이 부족할 때와 같이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이를 통해 그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우리에게 좋은 것을 공급해주신다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로마서 말씀처럼 말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부는 하나님의 은혜 또는 축복을 보여주는 척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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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교회는 "기복신앙"이라 불리는 것을 설교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번영할 수 있도록 항상 복을 내려주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재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척도가 아니다. 또한 가난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형벌도 아니다.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5:45)

 

   기복신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가장 존경하는 많은 구약 인물들이 경제적로 부유했음에 주목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보아스, 욥, 다윗, 그리고 솔로몬 등이 그런 예다. 그리고 이들의 부유함은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이들의 충성심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이다. 성경학자 크레이크 블룸버그(Craig Bloomberg)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약에서 부유함은 항상 개인 또는 국가의 복종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독특한 언약적 관계를 고려해보면 다른 국가나 시대의 충성스러운 이들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물질로써 축복하시리라고 일반화하긴 힘들다.[1]

 

   이에 따라, 의로움과 부가 강력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예시 또한 이를 보여준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부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악해서 번영한다. 이는 다윗 왕의 많은 자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열왕기상 21을 보면, 아합 왕이 나봇의 토지를 탐내었는데 이를 정당한 방법으로 얻지 못하자 그의 아내 이세벨이 나봇을 사형시켜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아합은 이미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의로움과 부유함이 관계가 거의 없음은 신약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경학자 고든 피(Gordon Fee)는 복음서와 다른 신약에서 나타나는 부는 복종하는 삶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2] 아미라데의 요셉과 리디아와 같이 소수의 부유한 신자들이 있긴 하나, 신약에서 재물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라고 기록한 부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젊고 부유한 통치자와 만나셨던 예수님께서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놀란 제자들은 되묻는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19:25) 이걸 다른 말로 묻는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부자가 안 된다면 당연히 다른 이들도 희망이 없는 것 아닙니까?” 부유함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나타낸다고 여겨졌던 이러한 문화 속에서 예수님의 주장은 강경했다. 부는 의로움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척도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이다. 

 

 

Craig Blomberg, Neither Poverty Nor Riches (Eerdmans, 1999), 51쪽.

Gordon Fee, The Disease of the Health & Wealth Gospels (Regent, 1996), 9쪽.

마지막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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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소망은 타락한 세상에서 모든 이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겪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 세상이 완전히 구원받을 때, 약속하신 풍족함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새로운 세상에는 모든 이를 위한 풍부한 자원이 있을 것이고, 그 누구도 부족한 양의 공급을 받지 않을 것이다. 정의가 지배할 것이다. 모든 이들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부유함을 누릴 것이다. 물질의 부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통해 재산을 모으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나타날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이사야 65:17, 21-23; 66:12).

 

   요한도 새로운 예루살렘의 번영을 예언한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너무나 화려해 도시 문들이 진주로 되어 있고, 기초석이 보석으로 만들어지며 성의 길은 정금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계21:19-21). 이러한 환상은 조금 과장된 것처럼 들릴 수 있으나, 이는 하나님의 베푸심은 결핍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가 말 그대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임을 의미할 것이다.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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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성경의 공급하심과 재물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부유하다면 우리는 물질의 축복에 감사하고 이러한 부를 우리 자신, 이웃, 또는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어떻게 잘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탁관리자로서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우리의 부를 기부나 지혜로운 투자, 그리고 책임감 있는 소비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재물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교만, 부패, 이기심, 잘못된 자족감, 안주 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총애를 받는 존재라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가난하거나 우리의 기본적 필요를 채우기도 어렵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분의 인도하심과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근심이나 절망 속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너그럽고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거나, 심지어는 우리가 갈망하는 것보다 적은 재물로 만족하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른 이들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신다든지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고 그럭저럭 살아나갈 만하다면 우리가 받은 재물에 대해 감사를 올려드리고, 어떻게 하면 이를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근심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우리의 필요에 대해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존할 수 있는 경제적 상황이 제공하는 기회를 잘 누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만족함을 배우고, 알맞다고 생각되는 정도보다 더 많이 베풀라는 부름을 받았다. 또한 우리 자신의 상황이 안정적이지 못할 때라도, 앞으로 더 상황이 어려워질 수도 있더라도, 경제 정의를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감사, 만족, 관용, 그리고 정의를 행하게 되면 우리가 느끼기에 필요한 것들과 진정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의 차이를 더욱 극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공급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의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킬 것이다.

 

   부자, 가난한 사람, 혹은 어중간한 이들 모두는 그 어떠한 고난이나 부족함도 없을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를 기대하며 살 수 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 지구에서 풍족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와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