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예레미야애가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예레미야·예레미야애가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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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과연 하나님께 신실할 것인지에 주목한다. 예레미야는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신실함에 관심을 갖는다. 종교, 가정, 군대, 정부, 농업 그리고 인생과 일에 관련된 모든 영역들을 포함한다. 오늘날 근로자들도 비슷한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는 일터에서 하나님께 신실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많은 직장의 경우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예레미야는 사실상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신실한지 다루어야 했다. 왕과 왕자들에서 시작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님께 신실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 보아 아직도 성전에 나아가 희생제사를 드리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외 다른 삶의 방식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다(렘 7:1-11). 오늘날 일요일에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을 드리면서도, 그 밖에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마치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사람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 신실함’이라는 틀 안에서 예레미야는 일과 직접 관련이 있는 많은 구절들을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친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다루면서 일에 관한 의미를 포함한 구절들을 많이 제공한다.

 

   예레미야는 일과 관련된 말씀에서 새로운 원리나 명령을 풍성하게 소개하지는 않는다. 대신 성경에서 초기에 기록된 책들, 특히 모세 율법에서 계시하는 원리들을 수용한다. 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며, 그리하여 곧 그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재난이 도래하자 새로이 닥친 암담한 현실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떻게 지키며 살아야 하는지 가르친다. 그는 하나님께 신실함을 다시 보인다면 하나님이 결국 그들의 기쁨과 번영을 회복해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백성을 격려한다.

 

   예레미야가 사도 바울보다 약 600여 년 앞서 살긴 했지만, 일에 관한 그의 견해는 골로새서 3장 23절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예레미야와 그가 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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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이 직장은 힘든 곳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적어도 가끔은 힘든 곳이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상황도 극도로 힘들었다. 유다를 통치하는 엘리트들과 함께 일하던 그의 일터는 부패했고, 하나님의 일에 적대적이었다. 예레미야는 끊임없이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그는 가장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그는 힘든 일터에서도 인내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좋은 본이 된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나돗이라는 자그마한 도시에서 자랐다. 지리상 예루살렘과 가까웠지만, 이 두 지역 공동체의 문화 · 정치적 성향은 사뭇 달랐다. 예레미야는 아비아달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신분상 예루살렘에 있는 제사장 그룹에는 거의 들지 못했다. 솔로몬이 수세기 전에 아비아달을 직분에서 추방하고(왕상 1:28-2:26) 예루살렘의 사독 제사장 가문으로 그를 대신하게 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불러 예루살렘에서 선지자가 되라고 하셨을 때, 제사장 무리들은 그가 계승한 제사장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동안 내내 의심받고 미움받는 이방인으로 지냈다. 오늘날 일터에서 문화, 인종, 언어, 종교적인 편견 또는 그 외 다른 편견에 직면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내키지 않는 소명과 직무 수행 설명서

 

   20세 초반,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때는 BC 626년으로 요시야 왕이 통치한 지 13년째 되는 해였다(렘 1:2). 그가 맡은 직무는 그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겠다(렘 1:10)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저버렸기 때문에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전혀 너그럽지도 긍정적이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사람들에게 재난이 덮치기 전에 그들의 맘을 돌이키려고 하셨다. 기업의 세계에서 현상 유지를 타파하려고 외부 컨설턴트를 고용하는 것처럼, 유다 왕국에서 관례대로 기업을 척결하라고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의 일부는 유다에서 예배의 일부가 되어 버린 우상숭배와 부도덕한 관행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는 선한 왕 요시야 치하에서 선지자 사역을 시작했다. 그 사역은 요시야 이후 왕위를 계승한 악한 자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또한 바벨론의 통치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하기까지(BC 586년) 계속됐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로 활동하던 40년 동안 그는 끊임없이 조롱당했으며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비웃음거리였다. 실제로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음모가 몇 번이나 있었으며, 그때마다 간신히 벗어났다(렘 11:21; 18:18; 20:2; 26:8; 38-39장).

 

   예레미야는 선지자직에 지원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라는 소명을 받아들였다는 기록조차 어디에도 없다. 이사야와는 사뭇 대조적인 부분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광대하심을 비전으로 본 다음,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물으시는 것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사 6:8).

 

   하지만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그분의 대변인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리자, 예레미야는 자신은 너무 어리고 미숙하다는 이의를 제기했다(렘 1:6-7). 그러나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전달할 선지자적 메시지를 즉시 그에게 주심으로써 그러한 이의 제기를 압도하신다(렘 1:11-16). 그 후 하나님은 이 신임 선지자에게 교훈과 경고와 약속을 담은 메시지를 내리셨다.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1:17-19).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자신이 맡은 임무가 매우 힘든 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 자신의 임무 때문에 그는 왕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아래로는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유다라는 국가 전체와 대항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러한 힘든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부르심을 마침내 느꼈고, 그를 이끌어 그 일을 해내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했다.

 

 

예레미야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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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서에는 예레미야가 맞닥뜨린 악화 일로의 상황이 잘 드러난다. 변화가 많은 때에 예레미야는 종교적인 위선과 경제적인 부정, 그리고 유다 지도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자들의 포학한 관행에 도전하는 난감한 임무를 맡았다. 예레미야는 경고의 목소리이자, 다른 이들은 무시해 버릴 가혹한 실상에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모으는 파수꾼이었다.

 

여호와께서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머리이나 내가 반드시 너로 광야와 주민이 없는 성읍을 만들 것이라 내가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무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여러 민족들이 이 성읍으로 지나가며 서로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읍에 이같이 행함은 어찌 됨인고 하겠고(렘 22:6-8).

 

예레미야는 비관론자요, 현실주의자였다. 그렇다 보니 ‘하나님은 결코 예루살렘 성을 침략자에게 멸망당하지 않게 하시리라’고 주장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쫓겨나고 조롱당했다.

 

   40년이 넘도록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전하다니, 예레미야의 끈기도 참 대단하다. 그는 불가능한 과제처럼 보이는 임무를 중단하지 않았다. 우리 가운데 과연 몇이나 그런 상황에서도 상처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레미야는 가차 없는 반대와 혹독한 비판에 직면해서도 굽히지 않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애통해하고, 그들을 여호와께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 슬퍼 자주 울어 ‘눈물의 선지자’라 불린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이 그의 메시지의 진실성을 입증해 주시리라는 확신 때문에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신실하겠노라 약속하셨으므로 원치 않는 소명이었지만 끝까지 신실하게 감당했다. 그는 주머니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니고 다니면서 섬겼다.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렘 1:19).

 

   BC 605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에스겔과 다니엘을 포함하여 재능 있는 유다인 1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제 예레미야는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이른다(29장).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 가운데는, ‘바벨론의 날수는 정해져 있고 하나님은 결코 예루살렘을 함락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고 선동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다. 이에 예레미야는 포로들에게 바벨론에서 70년을 지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곳에 있는 유다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의 거짓 희망을 따르지 말고, 그 땅에 정착하여 집도 짓고 채소도 심으며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유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했다. BC 586년 바벨론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그 성벽을 헐고 성전을 돌 하나까지 다 파괴하였으며, 남아 있던 신체 건강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예레미야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생겼다(40-45장). 하나님은 그를 무너진 예루살렘 성에 머무르게 하셨다. 바벨론이 임명한 총독 그다랴가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통치했으며, 예레미야는 그 새로운 통치자를 격려하고 백성들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런 폐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바벨론이 머지않아 패배시킬 애굽과 맺은 군사동맹을 신뢰했다. 결국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끌려가서 거기서 죽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끝까지 거부한 통치자들이 초래한 파괴적인 결말을 그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오늘날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도 당시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어느 순간 깨달을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성공이란, 만사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때조차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장들(46-52장)은 유다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열국 위에 내리시는 심판을 다룬다. 하나님께서 유다에 맞서 바벨론을 사용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또한 형벌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예레미야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다의 지도자들, 즉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지긋지긋한 불신앙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의 근시안적인 생각과 서로에게 했던 거짓말을 기꺼이 믿는 마음이 유다와 수도 예루살렘을 완전한 파멸로 인도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일은 엄숙한 임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하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이요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심각한 손해를 입힌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는 일은 왕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책무였다. 이스라엘이 파국을 맞은 것은, 왕과 백성이 언약에 규정된 의무를 소홀히 한 까닭이었다. 

 

 

예레미야서에서 나오는 일과 관련된 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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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서는 일을 중점적으로 다룬 한 편의 논문이 아니므로, 일과 관련된 주제들이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많은 장들로 분리되어 있고 때로는 한 장이나 한 구절 속에 겹쳐서 등장한다. 우리는 그 주제들이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 순서를 지켜 가면서, 일이 등장하는 장과 구절을 가능한 많이 다룰 생각이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신실함을 지키면서 행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봤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할 때도 하나님께 신실하기를 바라신다. 그럴 때 우리는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우리의 일 가운데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 이 두 가지는 자주 되돌아보게 될 상호 연관된 주제들이다.

 

우리를 부르시고 준비시키시는 하나님 (렘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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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선지자의 사역을 위해 준비시키셨으며(렘 1:5), 적절한 때에 그를 지명해 그 일을 하도록 하셨다(렘 1:10). 예레미야는 그 일로 부르신 하나님께 신실하게 반응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일을 이루는 데 필요한 지식을 주셨다(렘 1:17).

 

   예레미야의 직업이 선지자였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직 선지자에게서만 신실함을 보시고 그들만을 준비시키셔서 부르신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부르셔서 나라 살림을 감당할 수 있게 준비시키셨고(창 39:1-6; 41:38-57),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불러 건축의 수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하도록 예비시키셨고(출 36-39장), 목동 다윗을 불러 왕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준비시키셨다(삼상 16:1-13). 신약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공동체의 유익에 공헌하는 일을 하도록 모든 신실한 사람을 예비시키신다고 말한다(고전 12-14장). 우리는 예레미야서에서 자신의 일을 통해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부르시는 하나의 패턴을 볼 수 있다.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은 오래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더 나은 일이란 없다. 물을 따르는 일, 설거지, 구두 수선, 또는 사도의 일이 모두 한가지다. 설거지도 설교도 그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매한가지다.[1]

 

   하나님은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설계에 따라서 어떻게 함께 결합되어 있는가를 아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능력과 재능을 경건하게 사용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의 소명이 예레미야의 소명처럼 반드시 직접적인 소명이거나 특정한 소명이거나 명백한 소명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아마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기를 몹시 주저했기 때문에 그처럼 이례적으로 직접적인 방식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어쨌든 우리의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일에서 하나님께 신실하기만 하다면, 그분은 우리를 예비시켜 주신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 부분을 보라.

 

 

. Parker Society Vol. 42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1), 102쪽에서 재인용

일이 오염되었다(렘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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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은 ‘일은 사람들에게 좋은 것이다’라고 선언하셨다(창 1-2장).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받아들이고, 그의 시대에 어떻게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지, 혹은 어째서 실천하지 못하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2장에서 예레미야는 일의 미덕을 왜곡시키는 백성들을 책망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에 인도하여 그것의 열매와 그것의 아름다운 것을 먹게 하였거늘 너희가 이리로 들어와서는 내 땅을 더럽히고 내 기업을 역겨운 것으로 만들었으며”(렘 2:7). 거기에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무익한 것들을 따랐다’고 덧붙인다(렘 2:8).

 

   주님은 일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옥한 땅으로 그분의 백성을 데려오셨지만, 그들은 그의 땅을 더럽힘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했다. 고대 근동에서 신학적인 특권을 나타내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땅을 창조하셨고 그 땅의 소유자이시지만, 그 땅의 청지기로서 섬길 백성들에게 그 땅을 주셨다.’ [1]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바로 하나님 자신의 땅, 우주의 중심이 되는 땅을 일구는 특권을 주셨다. 예레미야 시대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땅을 경멸하는 태도로써 일구었지만, 일 그 자체는 선이 되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시 128:2).

 

   땅을 일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 일하면 기쁨과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 2:24).

 

   그러나 사람들이 일을 신실하게 하지 않으면서 일이 더럽혀졌다.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함으로써’(렘 2:5) 사람들은 땅을 더럽혔다. 일이 악화 일로를 걷는다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소홀하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하느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 보내기를 멈추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무익한”(렘 2:8)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과제를 해결해 보려는 유혹을 자주 받는데, 이는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더 소홀히 하게 만든다. 업무 효율이 오르지 않는 것은 업무 시간이 짧아서가 아니다. 일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기 때문에 성과가 없고 능률이 오르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일의 본질로 돌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직장 상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지난 6개월 동안 제 업무 실적은 늘 기준 미달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30분 일찍 와서 15분은 기도하는 데 보내고 다른 사람보다 15분 더 일찍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단순히 오랜 시간 동안 일하는 것보다 이런 시도가 조금이나마 더 효과가 있을까? 우리가 우리의 가장 큰 도움의 원천을 매일의 일과에 들여올 때, 직장 상사는 기뻐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땅의 소작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Daniel I. Block, The Gods of the Nations: Studies in Ancient Near Eastern National Theology, 2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0), 109-110쪽을 보라. 그러나 소작농은 청지기와는 같지 않은데, 청지기는 창세기 1장 28절을 명백하게 함의한다(“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인정하는가(렘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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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는 이렇게 호소한다.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반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미 배반하고 갔다’(렘 5:23).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땅에서 청지기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 땅을 일구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히브리어로 yare)는 구약에서 “하나님께 반응하면서 사는 것”과 동의어로 자주 사용하는 단어다.[1]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을 비를 내리시는 원천이시며, 추수 수확량을 보장해 주시는 분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예레미야는 이 점을 지적했다.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렘 5:24). 그들은 불신앙에 빠져 자신들이 추수 수확량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렘 17:5-6 참조). 결국 그들은 더 이상 풍성한 추수를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 “너희 허물이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 5:25).

 

   1-25장의 많은 부분이 그 땅이 “오염”되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본문(5장)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농업이 경제 활동의 주축이었던 고대에 땅이 더러워졌다는 것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생산성과 풍요의 상실을 의미했다. 또한 땅을 오염시키는 것은, 땅을 주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는 성찬이나 가시적인 징표와 마찬가지로 땅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재는 지표였다는 데 주목한다.[2] 단체가 하든, 군대가 하든, 개인이 하든 땅을 약탈하는 것은 하나님이 땅의 주인이시라는 사실과 우리를 땅의 청지기로 삼으신 그분의 목적을 부정하는 것이다.

 

 

 Robert Laird Harris, Gleason Leonard Archer, Bruce K. 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electronic ed. (Chicago: Moody Press, 1999), entry 907쪽.

 Christopher J. H. Wright, Deuteronomy, New International Biblical Commentary (Peabody:  Hendrickson, 1996).

물질적인 성공과 실패 (렘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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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성공을 보류하시는가? 예레미야는 현대 크리스천들이 감히 언급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사실을 말한다. 하나님이 모자라게 공급하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승인하지 않으셨다는 징표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 땅의 주민들의 죄 때문에 유다에 비 내리기를 보류하셨다.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로부터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렘 5:25).

 

   선지자는 공급이 부족하거나 실패할 때마다 모두가 하나님 심판의 징표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예레미야 시대에서 거의 600년 후에 태어나신 예수님도 눈먼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의 징표로 눈이 먼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요 9:2-3) 더구나 하나님은 악한 사람들에게까지 물질적인 이익을 공급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고 짚어 주신다(마5:45). 예레미야서에 의하면, 물질적인 성공은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적어도 가끔씩은 불의를 행하고 억압하는 자들로부터 물질적인 성공을 거둬들이신다.[1]

 

   이제 실질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하나님께서 불의한 자들과 억압하는 자들의 수입을 빼앗아 가시는 것이 나에게 좋은 일일까, 아닐까?”

 

실패할 때마다 우리에게 죄가 있어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에 빼앗기는가? 이 질문에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답을 할 것이다.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악한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불공정, 탐욕, 공공선, 고결함 (렘5-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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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

 

   하나님을 풍성한 수확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은 유다 백성들은, 자연히 수확량을 결산하면서 하나님을 제외시켰다. 이 때문에 그들은 약자들과 무방비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속이기에 이르렀다.

 

살지고 윤택하며 또 행위가 심히 악하여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하게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재판을 공정하게 판결하지 아니하니(렘 5:28).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렘 8:6).

 

   하나님의 땅에서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이루어져야 했던 것이 단지 개인들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을 일하도록 부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에 하나님은 비를 거두셨고,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이 성공의 원천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와 유사한 모습을 2008-2010년의 경제적인 위기 및 그 위기에 따른 보상 문제,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금전 거래에서의 정직의 문제,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 즉각적인 이익을 맹렬히 취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 매사를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오늘날의 주요 경제적인 문제들은 너무 복잡해서 예레미야서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끌어내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복잡할지라도 사람들과 국가의 경제적 안녕과 그들의 영적인 삶과 가치관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경제적인 안녕은 도덕적인 문제다.

 

 

 

   탐욕

   하나님은 경제적인 사욕을 채우는 것보다 더 높은 목적으로 사람들을 부르신다. 우리의 가장 높은 목적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인데, 그 관계 안에서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공급과 물질적인 안녕은 중요한 문제다.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렘 2:2-3).

 

   하나님의 사랑을 최고 관심사로 삼아야 하는데, 경제 이익을 무절제하게 추구하는 탐욕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렘 8:10). 예레미야가 내리는 정죄에서 피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1] 그는 부유한 자들에게나 가난한 자들에게나, 작은 자들에게나 큰 자들에게나 편파적이지 않았다. 그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려고’ 애를 쓴다(렘 5:1).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도 완악했다(렘 5:4). 다음에는 부자들을 향했는데 ‘그들도 일제히 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어’ 버렸다(렘 5:5).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 말한 대로, “모든 사람들, 더구나 종교 지도자들조차 부도덕한 경제 범죄로 기소되었다. …… 이 공동체는 만족할 줄 모르고 착취를 일삼고, 탐욕을 평가하고 산정하는 기준을 잃어버렸다.” [2]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보다는 부를 획득하는 일에 마음이 기울었다. 부자들(왕 - 렘 22:17)이든 가난한 자들이든 간에 탐욕한 자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공선

   하나님은 우리가 공공선을 위해 살기를 원하신다.[3] 예레미야는 유다 사람들을 비판한다. 그들이 고아들이나 궁핍한 사람들(렘 5:28)이나 타국인들과 과부들과 없이 사는 사람들(렘 7:6)에게 경제적 이익을 나누지 않고, 그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행위는 도둑질과 살인, 간음과 거짓 맹세, 우상숭배 등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 더 큰 죄다(렘 7:9).

 

예레미야는 특정한 개인들과(“내 백성 가운데 악인이 있어서”-렘 5:26) 모든 개인들(“유다 사람들” - 렘 7:2), 사업을 주도하는 자들(부자들 - 렘 5:27), 정부(재판관 - 렘 5:28)와 여러 도시들(렘 4:16-18; 11:12; 26:2), 그리고 국가 전체(“이 악한 백성” - 렘 13:10)를 고소한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던 것이다.

 

   일과 일의 소산물이 공공선에 도움이 된다는 예레미야의 주장은, 기업 윤리는 물론이요 개인의 동기 부여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 어떤 행위가 공공선에 공헌하는지는 그 행위의 합법 여부만큼이나 중요하다. 공공선을 훼손하면서 하는 사업이 세상 법으로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합법적이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회사들은 가공 전 부품을 다루거나, 부품들을 조립하여 완성된 상품을 만들거나, 완성된 상품을 소비자에게 배달하는 역할들을 분담한다. 그 네트워크에서 한 회사가 다른 회사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의 수익을 쥐어짜 모든 이익을 손에 넣는 것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런 행위가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해도 정녕 그것이 산업과 공동체를 위한 선이겠는가? 또 그것이 장기간 지속될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한 노조가 신규 근로자들의 이익을 외면한 채 협상하여 현행 근로자들의 이익을 지켜 내는 것은 합법적일까? 이것이 과연 공공선에도 동일하게 유익할까? 이런 문제들은 복잡하며, 예레미야서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도 없다.

 

   예레미야서는 유다 백성들과 관련이 있고, 그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여러 가지 경제 규정 및 일터 규정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율법을 지키며 산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4]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아직도 일터와 경제 활동에서 정직하지 않음을 간파하셨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들을 따르기는 했지만, 정신을 따르지는 않았다. 예레미야는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백성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땅에서 그들이 수고한 열매를 향유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는 모두 일에서 얻는 이익을 저장하거나 혹은 나누는 기회를 갖는다. 어떤 회사들은 상위 간부들의 손에 보너스와 스톡 옵션을 몰아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회사들은 그것을 모든 근로자들과 널리 나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관계한 모든 성과를 자기의 공으로 돌리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할 수 있는 한 아낌없이 동료들에게 공을 돌린다. 여기에도 물론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단순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내가 이 일에서 얻은 돈과 권한과 인정과 다른 보상들은 주로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그것이 내 동료들과 내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의 이익에 공헌하는가?’

 

   마찬가지로 조직은 탐욕에 치우칠 수도 있고 공공선으로 기울 수도 있다. 만일 기업이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독점권을 부당하게 활용한다거나, 생산품을 팔기 위해 속임수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돈을 탐해서다. 만일 정부가 이웃 나라들을 누르고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무력을 행사하거나, 시민들을 누르고 지도자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공공선은 물론 그 반대인 탐욕까지도 폭넓게 파악한다. 탐욕은 어떤 특별한 법을 위반하여 얻은 이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들의 필요나 상황을 묵살하고 획득한 그런 류의 이익도 거기에 포함된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그러한 탐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고결함

   ‘고결함’(integrity)이라는 단어는 단순하고 일관된 태도로 윤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사회에서 동일한 윤리 의식을 따른다면, 우리는 고결함을 갖는 셈이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다른 영역에서 다른 윤리적인 의식을 따른다면 우리는 고결함을 잃어버린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에게 고결함이 결핍돼 있다고 꾸짖는다. 그들은 일터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윤리적인 기준을 위반하고도, 성전에 올 수 있고 거룩하게 행할 수 있으며 자신의 행위가 어떠하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듯 보인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7:9-11).

 

   예레미야는 그들을 고결한 삶으로 초대한다. 고결함이 빠진 그들의 경건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 7:15). 그저 성전에 가기만 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평소 우리가 직장에서 행하는 모습을 포함해 우리가 매일 행하는 행동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렘 2:30-32, 3:25; 7:21-24; 11:7-8; 22:21 등을 보라.

Walter Brueggemann, A Commentary on  Jeremiah: Exile & Homecoming  (Grand Rapids: Eerdmans, 1998), 72-73쪽.

 “TOW 프로젝트 지도위원회”(The Steering Committee of the Theology of Work Project)는 일과 수고의 산물이 근로자나 권력을 쥔 사람들만이 아닌 일반적으로 사회의 모든 사람에게 (또는 최소한 사회 다수의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예레미야의 주장을 기술하기 위해 “common good”(공공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 D의견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다. 대다수의 위원이 명백한 영어 의미가 그 상황을 정확하고 간결하게 기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의 주안점을 묘사하기 위하여 공공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더욱이 NIV, NASB, RSV와 NRSV와 같은 주요 영어 성경 번역본에서 그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느헤미야 2장 18절과 고린도전서 12장 7절에 등장한다. 하지만 소수의 위원들은, 어떤 예레미야 영역본에도 그 용어가 없고, 예레미야서에는 대충이라도 그에 상응하는 어떤 히브리 용어도 없기 때문에,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일 그 용어가 예레미야의 주안점을 기술한다는 대다수의 의견이 옳다면, 예레미야 자신이 그와 같은 방
식으로 기술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그들은 말한다. 더욱이 그 용어는 예레미야와 관계됨직한 명백한 영어 의미를 훨씬 넘어가는 어떤 철학파나 신학파나 정치학파의 전문화된 의미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그 용어를 사용하는 일은, 자칫 예레미야서가 그런 학파들의 사상을 본질적으로 가르친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우려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대다수의 의견에 따라 이 논문에서 그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게 우리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취한다거나 후기 예레미야의 철학이나 신학을 예레미야 본문에서 찾아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수고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도 또한 채워 주는 데 공헌하도록 의도하셨다는 예레미야의 선포를 가리키기 위해 그 용어를 선택하고, 사용할 뿐이다. 

몇몇 다른 선지자들과는 대조적으로(겔 45:9-12), 예레미야는 그가 만난 상인들이 불공정한 무게 단위와 계량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는데, 그것들은 레위기 19장 36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는 믿음 (렘8-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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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5장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급해 주심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니, 하물며 미래에 그들을 부양해 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은 또 얼마나 부족했겠는가? 청교도 신학자 존 코튼(John Cotton)은 믿음이 일이나 직업을 포함해 우리가 사는 동안 행하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진실로 믿는 크리스천들은 …… 직업에서도 믿음으로 산다.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시민생활까지도 내가 사는 모든 인생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분은 믿음을 대신하는 것에 의존하는 삶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신다.[1]

 

   다시 말하지만, 예레미야 시대에 유다 백성이 실패한 근본 원인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해서였다. 때때로 예레미야는 그것을 가리켜 주님을 “알지”(knowing) 못하는 거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곧 충성심을 의미했다.[2] 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듣지” 않는다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거나 복종하거나 주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3]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경외심”이 부족해서라고 지적한다. 이런 모든 표현은 간단히 말해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믿음, 그가 행하시거나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부족한 믿음이 생각을 지배하고,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노골적으로 위반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커다란 아이러니가 있다. 사람들이 일을 할 때 주님을 신실하게 의지하지 않고 대신 자기 자신의 행위에 의존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즐거움과 성취감과 인생의 선함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레미야는 끝내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성실함을 처리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렘 8:3)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의 법이 추구하는 목표는 우리가 선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을 좇아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4]. 하나님의 법을 좇아 사는 일이 자기 방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법들을 무시하다가는 우리가 참된 자아를 실현하도록 설계하신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나고 만다. 우리가 자기만을 믿고 자기 방식대로 일할 때, 특히 그렇게 일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어길 때, 안타깝게도 일은 그 고유한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부정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을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분의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을 따라 일한다. 그러나 우리 방식대로 했다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좋은 것들을 결코 얻지 못한다. 결핍의 경험이 쌓여 갈수록 사람들은 점차 자기 이익이라는 절망적인 행위에 집착한다. 지름길을 선택하고,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가진 것이 아까워 움켜쥐기만 한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것을 받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어떤 가치 있는 것도 생산해 내지 못한다. 크게는 국가에서 작게는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노동을 통해 얻는 결과에 점점 더 만족하지 못할 것이고, 결국 서로 다툼이 일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도달하게 되어 있는 이상적인 모습과는 정반대 사람이 될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우리 속에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깨닫는다(렘 2:19).

 

   유다 백성은 그 결과,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공급하심을 믿지 못하고 서로를 압제하는 백성이 되었다(렘 8-16장).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6). 그들은 더 이상 번영하지 못한다. “거기서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며 공중의 새도 짐승도 다 도망하여 없어졌음이라”(렘 9:10). 결국 그들은 손해를 벌충하는 방법으로 서로를 속이는 길을 선택한다.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5-6).

 John Cotton, “Christian Calling,” The Way of Life (London, 1641), 436-451쪽. Leland Ryken, Worldly Saints: The Puritans as They Really Were Grand Rapids: Zondervan, 1986), 26쪽에서 재인용.

 렘 2:8; 4:22; 5:4-5; 8:7, 9:3-6; 22:16을 보라. “예레미야가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언약적인 율례를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Jack R. Lundbom, “Jeremiah, Book of,” Anchor Bible Dictionary, ed, D. N. Freedman (New York: oubleday, 1992), 718b. Herbert B. Huffmon, “The Treaty Background of Yada’,” 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181 (1966), 31-37쪽을 보라.

 예를 들어, 렘 7:23-28; 11:7-8; 32:23; 40:3; 43:3, 7; 44:23.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제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외적 동인은 마귀지만 …… 선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외적 동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그분의 율법으로 가르치시고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 실질적인 면에서 으뜸가는 원리는 …… 마지막 목표이고, 인생의 마지막 목표는 지복 또는 행복이다. …… 결국 율법은 대개 행복과 관련이 있다.” (Summa heologicaIaIIae, q.90, pro. and a. 2.co.)

일과 휴식 사이에서 균형 잡기 (렘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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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는 일과 휴식의 리듬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선지자는 여느 때와 같이 하나님의 초창기 계시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번 경우에는 안식일 휴식 이야기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 2:2).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

 

   그러나 예레미야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만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렘 17:21-23).

 

   17장 초반부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5-8).

 

   예레미야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는 믿음에 대한 그의 요점을 반복해서 적는다. 이미 예레미야 8-17장에서 안식일과 함께 다루었던 주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대신 우리 자신을 의지하니 우리에게는 쉴 여유가 없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 취미 활동까지 모두 완벽하게 해내려다 보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자연스레 시간이 부족하니 안식일을 범하고 만다. 그런 우리에게 예레미야가 일침을 놓는다. 미약한 육신의 힘을 자랑하고, 자신을 의지한다면 성취를 위해 하루 24시간, 매주 7일 내내 가혹하게 우리 자신을 밀어붙여야 하며, 그러다 결국 “광야”로 내몰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한다’(렘 17:6). 반면에 주님을 의지한다면, ‘결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렘 17:8). 일과 휴식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라는 충고를 무시하면 궁극적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다. 

 

 

더 넓은 세상을 축복하다(렘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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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공동체까지 축복하고 섬기기를 바라신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4-7).

 

   이 주제 또한 유다 국경 내에 사는 이방인들을 압박하지 말라는 명령 형식으로 앞에서 다룬 바 있다(렘 7:6; 22:3). 예레미야는 유다에게 이 언약의 일부를 계속해서 호소한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 18:18). 그런데도 포로로 잡혀간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그 이웃들을 추방하실 것이라고 포로 된 유다 백성들에게 단언했다. 바벨론은 멸망할 것이며 예루살렘은 구원받고 따라서 백성들은 곧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예레미야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짓 선포에 대항했다.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1]

 

   바벨론은 이 세대에게는 유일한 고국이었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거기 그 땅에서 부지런히 일하라고 하셨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렘 29:5). 비록 유다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징계와 회개의 장소였으나,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번성하도록 작정되어 있었다. 더욱이 바벨론에 사는 유다 사람들의 성공은 바벨론의 성공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지금부터 2,600년 전에 살았던 시민에게 하신 명령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우리는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 말고 전체 사회의 번영을 위해 일하도록 부름받았다. 예레미야 시대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 역시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심지어 우리의 불성실과 부패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럴지언정 우리는 우리가 살고 일하는 사회에 복이 되라고 부름받았으며, 또 그렇게 예비되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불러 그들의 다양한 직업 기술을 사용해 사회에 봉사하라고 하셨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이 구절을 두고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바벨론 사람들을 돌보신다는 증거는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단순히 포로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이 번영하지 않고서는 번영할 수 없다는 점을 아시는 것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도 돌보신다. 이는 언약의 고유한 요소로, 예레미야의 초기 가르침에도 나타난다.

 

   29장을 읽어 보면 온갖 종류의 건축가들과 정원사들과 농부들과 근로자들이 명백하게 그 전체 사회의 유익을 위해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은 아주 방대하기 때문에 그분 백성의 고국이 멸망당하고 가족이 추방되고 땅을 몰수당하고 권리를 침해당하며 평화가 깨져 버릴 때조차도, 그들은 자신들을 번성케 하며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기에 충분하다. 단, 그것은 오직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예레미야 29장 7절에서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예레미야 29장에 비추어 볼 때, 은사에 관해 기록한 신약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고전 12-14장) 교회나 크리스천들에게만 적용하라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불러 온 세상에 봉사하도록 준비시키신다.

 

 

스스로의 죄 때문에 포로로 잡혀 있는 백성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다. 그들을 거기 있게 만든 죄의 잔존물들이 제거될 포로 생활 70년이 찰 때까지, 약속된 미래와 희망은 오지 않을 것이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구할 준비가 될 70년의 끝에만 약속된 미래와 희망이 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9:13-14).

당신의 일터에도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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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편재하신다, 즉 어느 곳에든 계신다는 말은 전혀 놀랍지 않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시 24:1)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예루살렘이나 유다 땅에만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적국의 수도에도 계신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지 복일 수 있다. 바벨론의 중심부에 있을지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일하도록 부름받았다.

 

   이 말씀이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우리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로지 예루살렘 성전에만 임재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성전도 없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 하나님의 목전에 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오늘날 일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포로가 느끼는 정서와 흡사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신자들과 비신자들이 섞여 일하는 직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회사들이 반드시 비윤리적이거나 크리스천들에게 적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런 회사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일하는 것과는 다른 의제를 갖고 있다. 

 

   그래도 하나님은 임재하시며,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 땅에 정착하라. 과수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며 일하고 급여를 집으로 가져오라. 하나님은 그곳에서 당신과 함께 계신다.[1]

 

 

오늘날에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에도 계시고 멀리도 계신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는 유한한 인간 존재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는 거리가 있다는 각도에서 하나님을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진정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한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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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은 공공선을 확장한 개념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인류에게 복의 근원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바벨론을 위해서도 마땅히 기도해야 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철저히 좌절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심지어 적들에게조차 복이 되도록 부름을 받는다. 이 복은 예레미야 29장 7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물질적인 번영까지 포함한다. 1-25장을 보면 유다의 신실하지 못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평화와 번영을 철회하셨다. 그런데 29장에서는 바벨론이 유다의 하나님을 믿지 않을지라도 바벨론에게 평화와 번영의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니, 얼마나 모순인가! 왜 그러시는 걸까? 만민에게 복의 근원이 되라고 이스라엘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크리스천들의 특별한 유익을 위해 작정하신 어떤 계획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크리스천들은 직장에서 효과적으로 경쟁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이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리라 기대하면서 수준 이하의 업무 수행을 해서는 안 되며, 그리 되지도 않는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복되게 해야 한다면, 능력을 갈고 닦아 대등한 경기장에서 경쟁에 참여해야 한다. 한 무역협회가 공급자 우선관계나 고용 선호, 세금 또는 정규적인 이익, 혹은 크리스천들에게만 유익하도록 고안된 어떤 체계를 채택해 실행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도시를 축복하는 일이 아니다. 1800년대 중반 아일랜드에 기근이 들었을 때, 많은 성공회 교회들은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겠다는 사람들에게만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물론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였고, 그 결정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기독교 종파가 다른 종파를 배제하면서 자기 식구들만 챙기는 행위였다. 비기독교인들을 차별하는 기독교인들이 일으킨 훨씬 더 큰 손해를 상상해 보라. 그런 차별이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역사의 페이지를 채우고 있다.

 

   하나님께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닌 사람들에서 시작해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에게까지 확장되어) 모든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최선의 길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서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경제 원리다. 성공하는 사업가들은 상품 개발과 마케팅, 판매, 고객 지원 등이 고객을 최우선으로 할 때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든 아니든 이것은 모든 근로자들이 인정하는 최고의 실천 사항이다.

 

선한 일의 회복 (렘30-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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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는 23년 동안(2장부터 28장까지 유다를 고소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예언했다.[1] 그리고 예레미야 30-33장에서 이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내다보았다. 죄로 더럽혀지지 않은 일의 즐거움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며 그런 회복을 묘사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들을 심되 심는 자가 그 열매를 따기 시작하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수꾼이 외치는 날이 있을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렘 31:4-6).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렘 32:15).

 

   예레미야 예언이 갖는 전체적인 골격은 죄, 그다음에는 포로, 그다음에는 회복이다. 심지어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새롭게 회복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예레미야 2장 23-25절, 33절, 3장 1-5절 등과 비교해 보라. 유다가 회복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하지만, [2] 선지자는 29장 11절에서 포로들에게 약속하신 희망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백성들은 회복된 세계에서 여전히 일할 것이지만, 과거에는 그들의 수고가 헛되었다면, 이제는 그들이 그 열매를 즐길 수 있다. 회복된 백성들은 일과 즐거움, 축제와 예배가 모두 하나로 묶이는 삶을 누릴 것이다. 심고 추수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춤추며, 추수를 즐기는 것 등을 묘사하는 그림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일을 즐거워하는 모습을 표현한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은 부수적인 주제가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핵심이요, 나아가 그 일로 생산한 것들을 즐기는 데서도 핵심이다. 예레미야 31장 31-34절과 32장 37-41절에 기술한 “새 언약”은 신실함의 중요성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4).

 

   회복된 세계가 한눈에 들어온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백성들이 일을 즐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회복될 것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기 때문에 공공선을 위해 일할 것이다. 로버트 캐럴(Robert Carroll)에 따르면, “재건된 공동체는 일과 예배가 융화되는 가운데 하나가 된다.” [3] 아직은 타락한 세상에 살기에 당장에 이런 모습이 완전히 실현될 거라는 기대를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이런 삶이 실현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서기관의 거짓의 붓”(렘 8:8)과 탐욕과 속임수를 공격하여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8:10-11). 그는 유다의 신들이 유다의 성읍만큼 많다는 데 주목한다(렘 11:13).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20장 3-6절에서 예루살렘에서 족쇄에 채워져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했으며, 21장은 공의를 행하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라는 마지막 기회와 함께 다가오는 패망을 명백하게 예언했다(렘 21:12). 25장에서 후렴처럼 반복되는 구절은 “그들의 손의 일”이 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온 땅의 악한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모든 악한 열방들의 멸망을 보여 주시면서) 악한 백성(바벨론)을 사용하실 것이다.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거짓 예언을 듣지 말라고 호소하는 동안에(27장), 하나냐는 바벨론이 2년도 못 가서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모든 전리품을 돌려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예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의적인 축제 및 예배와 연계되어 있는데(렘 31:6), 백성들이 하나님의 집에서 쫓겨나고 예배를 거부당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렘 11:15 참조) 예레미야서의 이 시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예레미야 7장 1-15절에 예배에 대한 잘못된 접근법을 적어 놓았다. 예레미야 31장 4-6절에서 의도적으로 선한 일의 목록을 보여 주기 위해 적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음악을 만들고 춤을 추는 일이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Robert R. Carroll, Jeremiah; A Commentary, Old Testament Library(London: SCM Press, 1986), 590쪽.

노예 해방 (렘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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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서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하나님은 노예제도를 청산하라고 명령하신다(렘 34:9). 모세 율법에 보면, 6년간의 봉사 기간이 끝나면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라고 적혀 있다(출 21:2-4; 신 15:12). 성인들은 스스로를 6년간 노예로 팔 수 있었고, 부모들 또한 자신의 자녀들을 그렇게 팔 수 있었다. 그러나 6년 후에는 그들을 해방시켜야만 했다(레 25:39-46). 이론적으로 보면 그 제도는 우리가 지금껏 알던 농노나 노예를 재산으로 여기는 제도보다 인도적이다. 그러나 주인들은 기한이 끝나면 해방시키라는 요구를 쉽게 무시했다. 또는 기한이 만료되면 6년 단위로 재등록하여 일생을 노예로 살게 함으로써 그 제도를 남용하기도 했다(렘 34:16-17).

 

   예레미야 34장 9절에서는 얼마 동안 노예로 등재되어 왔느냐에 상관없이 히브리 노예들을 즉각 풀어 주라고 강하게 권고한다. 이어 더욱 인상적인 내용이 등장한다. 어느 누구도 “그의 동족 유다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며, “다시는 종을 삼지 말라”고 규정한다(렘 34:9-10). 다른 말로 하면, 최소한 유다 사람이 유다 사람을 노예로 소유하는 문제에 관한 한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라는 이야기다.

 

   이 규정이 노예제도 영구 폐지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곧 포로 신세로 전락해 잡혀갈 것을 생각하고 내놓은 포석인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어느 경우였든 노예제도는 오랫동안 폐지되지 않았고, 그래서 곧바로 주인들이 그들의 예전 노예들을 다시 노예로 등재했다. 그러나 노예제도 폐지는 괄목할 만한 경제적 개선을 가져오는 법이므로, 만약 당시에 정말로 노예제도를 폐지했다면 경제는 놀랍게 발전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유다 백성 가운데서 본의 아니게 노예가 되어 평생을 노예로 살아야 하는 그 제도를 금지하셨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했던 이들을 하나님이 이미 속량하셨기 때문이다(신 15:15).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신 팔을 펴서 백성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면, 그의 백성이 같은 백성을 노예로 삼는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참으시겠는가?

 

   하나님은 예레미야 34장에서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셨다.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라”(렘 34:17). 즉, 노예들을 “이웃과 친구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의 인격을 부각시켰고, 이것을 근거로 그들의 해방을 요구했다. 그들은 그 공동체의 사랑받는 구성원이었고 또한 구성원이어야 했기 때문에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이 원리는 종교 차별이나 인종 차별을 뛰어넘었다. 왜냐하면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다른 인종의 사람들도 서로서로 친구나 이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나오게 하신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의 자손이라는 사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노예들 역시 그들의 주인이나 그들 주위의 공동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해방되어야 했다.

 

   이러한 기본 원칙은 아직도 적용된다. 지금 이 순간 세계에서 노예로 지내는 수백만의 사람들은 그들이 인간이라는 그 이유만으로도 하루 속히 해방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노예 상태로 매여 있는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근로자들이 ‘이웃과 친구’로 대우받아야 한다. 또한 노예들이 겪는 것 못지않게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 근로자의 시민권 침해, 불공정한 차별, 성적 학대, 그리고 이보다 더 열악한 일단의 폐해들에 노출돼 있는 사람들을 구해 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이웃들을 어떤 것에도 종속시키지 않고, 가까운 친구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묵인하지 않으며, 우리 회사와 조직과 공동체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좌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시대의 크리스천 직장인 모두에게 그런 환경을 조성하라고 예레미야 시대의 유다 백성들에게 한 것과 똑같이 명령하신다.

 

 

생명을 구한 선택(렘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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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서 나머지 부분에는 예레미야가 선지자로서 겪은 시련(35-45장)과 열국들을 향해 그가 한 예언(46-51장), 그리고 예루살렘 멸망 이야기(52장)가 담겨 있다. 그중 에벳멜렉 이야기가 일과 관련이 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게 포위당하자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설교했다. 예루살렘은 함락당할 것이며, 나가서 바벨론에 항복하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유다의 관원들은 이 메시지가 거슬렸고, 왕의 허락을 받아 예레미야를 물이 마른 웅덩이에 던져 넣기에 이른다. 그대로라면 예레미야는 그 웅덩이에 갇혀서 굶어 죽거나, 비가 오면 익사할 처지였다(렘 38:1-6).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에벳멜렉이 왕궁에서 나와 왕께 아뢰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성 중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에서 굶어 죽으리이다 하니 왕이 구스 사람 에벳멜렉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렘 38:7-10).

 

   왕의 결정 번복은 단순히 그 문제에 대한 왕의 무관심을 보여 준다(하나님은 왕의 활동만큼이나 그의 무관심도 쓰셨다). 오히려 이 일로 이방인 노예(에벳멜렉이라는 이름은 ‘왕의 노예’라는 뜻이다)가 신실한 사람으로 부각되었다.[1] 그는 이민자로서 신분도 낮고, 인종 차별도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께 늘 신실했고, 일터에서 부당한 처사가 일어나자 그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 생명이 구원받았다. 바퀴에 달린 이름 없는 톱니 같은 사람이 생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에벳멜렉의 행동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 직장에서 고려해야 할 다른 모든 사항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실례로 보여 주었다. 왕이 공정하게 행동할지, 혹은 명령 체계를 따르지 않아 직장에서 쫓겨나지나 않을지, 또는 예레미야의 경우처럼 목숨까지 위태로워질지 에벳멜렉은 그 여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왕이 어떻게 반응하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 주시리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결국 그는 하나님께 칭찬을 듣는다.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9:18).

 

에벳멜렉은 악한 사람들과 악행으로 가득 찬 예레미야서에서 희귀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하나님을 신뢰한 이 한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구스(에디오피아) 사람이라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Tom Parker, “Ebed-Melech as xemplar,” Uprooting and Planting: Essays on Jeremiah for Leslie Allen, ed. John Goldingay (NY/London: T&T Clark, 2007), 258쪽.

일을 노래한 시인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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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애가를 예레미야가 썼다는 증거는 없지만, 랍비 전통과 예레미야와 애가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주제들, 그리고 애통시가 갖는 목격자적인 성격 등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애가의 시 다섯 편을 쓴 저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 

 

   유다와 수도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바벨론은 2년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에 함락시키고 성벽을 허물었으며 하나님의 성전을 약탈하고 파괴한 뒤 신체 건강한 시민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아갔다.

 

   예레미야는 유다 땅에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기근을 거치면서 자녀들이 굶주려 죽는 모습을 슬픔 속에 지켜보아야 했다. 그 와중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 앞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거짓으로 전했다. 예레미야애가에는 예루살렘 성의 황폐해진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처럼 황폐해진 이유를 역설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절망도 담았다.

 

   여기서 우리는 일을 노래하는 시인을 만난다. 예레미야는 그 성에서 일어난 대학살의 강력한 이미지를 사용해 다섯 편의 시를 노래하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사악한 죄에 대해 벌 내리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러나 시인 예레미야는 정서적으로 깊은 슬픔을 겪으면서도 절제된 시의 형태로 황폐해진 상태를 그려 낸다. 정서적 표출을 기술적으로 해낸 것이다. 예술가들이 작품에서 ‘일’을 논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시들에 인생의 기복을 압축해서 잘 나타내 준다. 시인은 이러한 절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미래를 걸고 희망의 문구를 새겨 넣는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애 3:21-25).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1-33).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애 3:39-41).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죄 없는 자들도 죄인들과 함께 고난을 당했다. 어린아이들이 굶고 예레미야와 같은 신실한 선지자들도 참혹하게 내던져졌다. 이것이 타락한 세상에서 겪는 인생의 실체다. 잘못된 결정과 총체적인 부실과 노골적인 불법 관행 때문에 회사가 망하면, 무죄한 사람들까지도 직업과 연금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크리스천 직장인은 이생에서 겪는 이러한 불공정한 일들에서 영원히 허우적거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통치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은 결코 다함이 없다(시 136편). 물론 제도적으로 어렵고, 지도자들이 부도덕한 탓에 하나님의 실재를 견고하게 붙드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하지만 예레미야애가는 ‘주께서 영원히 버리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노래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를 향한 신실하심에 결코 다함이 없으시다. 우리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 믿음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자. 

 

이들 애통시 다섯 편의 구조는 얽히고설켜 있다. 히브리 시는 구조적으로 운보다는 운율과 평행법에 따라 이루어져 있다. 1장과 2장과 4장과 5장은 각각 22개 절로 이루어져 있고, 5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각 행의 첫 글자를 짜맞추면 말이 되는 아크로스틱 형식이다. 즉, 모든 절이 22개의 히브리 알파벳 문자 순서대로 시작한다. 3장은 22개의 알파벳 문자 대신 66개 문자로 이루어진 3중적인 아크로스틱 형식으로 되어 있다. 즉, 1-3절은 ‘aleph’(히브리 알파벳 첫 문자)로 시작하고 4-6절은 ‘beth’(히브리 알파벳 둘째 문자)로 시작하는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