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일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또는 어떻게 그것을 하기 원하시는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일의 신학은 우리에게 창조주와 구세주로 자신을 계시하시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분을 닮고 따라갈 수 있는지 보여 주시는 하나님에게서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형상을 닮아 가면서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해 나가게 된다.

 

   출애굽기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그분의 성품을 깨달으며, 자기 백성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나가시는 하나님을 본다. 크리스천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아들을 통해서 특별한 구속 사역을 행하시는 특정한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서 일을 수행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분이 하시는 일로 드러나며 그분이 하시는 일에 따라 우리 일도 정해진다. 일 자체가 출애굽기의 주안점인 것은 아니지만, 일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출애굽기의 주요 주제 중 하나다.

 

   출애굽기 속에는 일상적인 일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그러나 이 법과 율례는 3천 년도 더 되는 시간 이전에 존재했던 일터에서 생겨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우리 일과 환경도 변했다. “살인하지 말라”(출 20:13) 같은 구절은 모세 시대나 현대에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살아 있는 소를 팔아 그 값을 반으로 나누고 또한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려니와”(출 21:35) 같은 구절은 이 시대 대부분의 일터에서 적용하기 어려워 보인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고,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면서도 율법주의나 오용의 덫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출애굽기가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이해로 이스라엘이 하 나님의 위대한 이야기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것은 오늘날 성경이라는 보다 더 완전한 이야기에서 우리 위치를 찾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하나님 일의 목적과 형태는 그분의 백성이라는 우리 정체성을 규명해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의 방향도 제시해 준다.

 

 

출애굽기의 서론

목차로 돌아가기

   출애굽기는 일하는 모습의 이스라엘로 시작되고 일하는 모습의 이스라엘로 끝난다. 첫 장부터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 사람을 위해 일하는 모습이 나온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성막을 건축하는 일을 마무리 짓는 것이 끝 장면이다(출 40:33).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으셨다. 이스라엘이 일을 하도록 해방시키셨다. 애굽의 이방인 왕 치하에서 억압당하며 일하는 그들을 관대하고 경건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새롭게 일하도록 이끄신 것이다.

 

   “출애굽기”라는 책 제목은 “출”(出, 나오다)이라는 의미를 지니지만[1] 출애굽기의 전방 진행 방향을 보면 이 책은 사실상 “입”(入, 들어 가다)에 대한 것이라고 무리 없이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언약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는데, 이 언약은 그들이 시내 광야에서 방황할 때뿐 아니라 약속의 땅에 서 정착된 생활을 할 때에도 그들 삶을 관장하는 것이 됐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새로운 땅에서 어떻게 일하고 예배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이스라엘의 삶은 가나안의 신을 좇는 사람의 삶과는 구별되고 그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은 명심해야 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우리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해 일을 하는지와 서로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우리는 가혹하고 억압적인 일의 사례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분명 하나님은 우리가 더 나은 방식으로 사업하고, 다른 사람을 더 나은 방식으로 대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새로운 방식으로 향하는 길은 우리가 자신을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로 보느냐,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지를 분별해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자신을 얼마나 잘 훈련하느냐에 달려 있다.

 

   출애굽기는 창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400여 년이 흘러 시작된다. 창세기에서 애굽은 살기 좋은 곳이었으며, 거기서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요셉을 출세시켜 그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후손을 구원할 수 있게 하셨다(창 50:20). 이런 역사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위 대한 민족으로 만들어 그들을 축복하심으로 다른 사람도 축복하고, 아브라함의 이름을 크게 만들어 그를 통해 지상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창 12:2-3)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출애굽기에서 애굽은 이스라엘의 번성이 죽음의 위험을 키운 억압적인 곳이었다. 애굽 사람은 이스라엘을 신성한 축복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들을 노예 생활에서 풀어 주는 것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은 바로와 그의 많은 병사가 홍해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지면서 이뤄졌다.

 

   아브라함의 선택받은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민족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에 비춰 보면,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은 과도기에 있었다. 늘어난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냈지만 한편으로 그다음 세대의 남자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임당했다(출 1:15-16).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아직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모세오경 전체는 이런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후손에 대한 언약,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 들어가서 살게 될 땅은 모두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냈지만, 이것은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모두 위험에 처해 있었다.[2] 모세오경 중에 서 출애굽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주목을 하는데, 특히 하나님이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것, 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언약의 성취라는 관점에서 그러하다.[3] 이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통찰력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에도 매우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출애굽기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점 때문에 이 책의 구조와 내용이 귀중하며, 이는 하나님의 의도에 맞춰 우리 삶과 일 모두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과도기에 있는 이스라엘의 성격을 파악하려면 출애굽기를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이 책이 일의 신학에 시사하는 바를 평가해야 한다. 애굽에서 출발해 홍해로, 또 홍해에서 시내산으로 가는 길, 마지막으로 시내산에 이른 출애굽 여정의 지리적 단계를 따라가 보자. 

 

히브리어로 출애굽기의 제목은 그냥 ‘셰모트’인데, “-의 이름들”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출애굽기 첫 문장에 등장한다.

David J. A. Clines, Theme of the Pentateuch, 2nd ed. (London: T&T Clark, 1997), 29쪽.

같은 책, 47쪽.

애굽에서의 이스라엘 (출1:1–13:16)

목차로 돌아가기

   이스라엘에 대한 애굽인들의 학대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는 배경과 동력을 제공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광야로 들어 가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초점은 애굽의 경제 체제에서 억압받는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인의 모습에 맞춰져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일을 행하셨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괴로워한 것은 통상적인 일 그 자체의 어려움보다는 그들의 일이 엄하고 가혹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지만 이는 그들에게 완전히 안락한 삶을 주신 것이 아니라 억 압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신 것이다.

 

 

가혹한 노예 노동에 시달리다 (출1:8-14)

목차로 돌아가기

   애굽이 이스라엘인에게 강요한 일은 그 동기가 악했으며 그 본질도 잔혹했다. 출애굽기의 처음은 애굽 땅에서 엄청나게 불어나고 번창한 이스라엘인의 수를 서술한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어울렸고(창 1:28; 9:1), 아브라함과 그의 선택된 후손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도 부합했다(창 17:6; 35:11; 47:27). 그들은 전 세계에 복의 통로가 될 민족이었다. 이전의 통치 체제에서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 거주하며 일할 수 있도록 왕에게 허락 받았다. 그러나 애굽의 새로운 왕은 이스라엘인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을 국가 안위의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기민하게’ 대하기로 결심했다(출 1:10). 실제로 이스라엘인이 역사적으로 그런 위협이 됐는지 여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어쨌든 중요한 건 바로의 파괴적인 두려움은 이스라엘인의 작업 환경을 열악하게 만들었고, 영아를 살해해 이스라엘인의 인구를 통제하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일이 사람에게 신체 및 정신적 부담을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일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애굽에서의 상황이 처절했던 것은 노예 생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극도의 가혹함 때문이었다. 애굽 관리는 “엄했고”(befarekh - 출 1:13, 14) “괴로웠고”(marar - 출 1:14) “어렵고 가혹했다”(qasheh; 잔인하다 - 출 1:14; 6:9). 이스라엘은 “비참함”과 “고통”(출 3:7, NIV)과 “마음의 상함”(출 6:9) 가운데서 괴로워했다. 인간 존재의 목적과 기쁨의 주요 원천이 되어야 할 일(창 1:27-31; 2:15)이 가혹한 압제에 의해 비참한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 산파와 요게벳 (출1:15-2:10)

목차로 돌아가기

   가혹한 대우를 받는 중에서도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켰으며 그 결과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창 1:28).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것은 곧 자녀 출산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또한 산파의 수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산파의 역할은 성경뿐만 아니라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의 기록에서도 충분히 입증되어 있다. 산파는 여인의 출산을 도와주었으며 영아의 탯줄을 잘라 냈고 아기를 씻긴 후 부모에게 아이를 건네주는 일까지 맡았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히브리 여인이 낳은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출 1:15-17). 일반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에 대한 경외”(fear of the Lord) 및 이와 유사한 표현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YHWH - 히브리어)에 대한 건강하고 순종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애굽 왕이 그들에게 준 그 어떤 두려움보다 강했다. 그들의 용기는 그들의 일에서 우러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매일 돕고 보살피는 사람으로서 그들은 생명을 매우 가치 있게 여겼을 터이니, 설령 왕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살인이라는 건 생각할 수도 없지 않았겠는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출 6:20)도 불가능해 보이는 선택의 기로에서 독창적인 해법을 창안했다. 남자 아이를 비밀리에 성공적으로 출산한 기쁨도 잠시,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 강물로 떠내려 보내야만 했던 그녀의 고통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모세 이야기에 나오는 “상자”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성경에서 단 두 번, 즉 노아의 “방주”를 나타낼 때와 여기서 쓰였는데, 모세 이야기는 한 남자 아기를 구원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아가 모세와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면에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은 산파에게 보상해 주셨던 것처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에게도 호의를 베푸셨다. 그녀는 자기 아들 모세를 되찾아 그가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될 때까지 그를 키울 수 있었다.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거룩한 일은 복잡하고 힘들고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잠 31:10-31).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무명의 여장부 요게벳이 경험했던 내적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 모세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가 어떻게 그들의 믿음을 행위로 옮겼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나중에 그들을 칭찬한다(히 11:23).

 

   출산과 양육이라는 일은 너무나 자주 경시된다. 특히 어머니들은 자녀 양육은 다른 일만큼 중요하거나 칭찬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법을 이야기하는 출애굽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첫 번째 내용은 자녀의 출산, 양육, 자녀를 보호하고 돕는 일의 비할 데 없는 중요성이다. 용기 있는 행위로 가득 찬 출애굽기에서 첫 번째 용감한 행위는 한 어머니와 가족, 산파가 한 남자 아이를 구한 것이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출2:11-3:22)

목차로 돌아가기

 

   모세는 히브리인이었지만 바로의 손자로 입양되어 애굽 왕족 가운데서 성장했다. 모세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했다. 그는 히브리 노동자를 때리는 애굽인의 행동을 보고 발끈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결국 바로에게 들켰고 모세는 시내 반도의 반대쪽, 즉 애굽으로부터 동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져 있는 미디안으로 피신해 목동이 됐다. 모세가 거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기간 동안 그는 결혼해 아들까지 두었다. 그 사이에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애굽 왕이 죽었고, 여호와는 억압받는 자기 백성의 호소를 들으셔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셨다(출 2:23-25). 이 ‘기억하셨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잊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곧 행동을 취하실 것을 나타낸 것이었다.[1]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모세가 일하는 도중에 그를 부르셨다. 그 부르심은 여섯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지도자와 예언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형태를 띤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명 이야기를 살피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고찰하는 것은 특히 우리 직업 현장에 비춰볼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은 “떨기나무”가 불타는 곳에서 모세를 만나 그의 관심을 사로잡으셨다(출 3:2-5). 광야 같은 곳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 아니지만, 모세는 이 현상에 끌렸다. 모세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언급이지 장소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둘째로, 여호와는 자신을 족장의 하나님으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서 그들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할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셨다(출 3:6-9). 셋째, 하나님은 바로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셨다(출 3:10). 넷째, 모세는 반대했다(출 3:11). 모세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강력한 계시를 그 순간에 받았지만, 그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이것이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분이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시며 확신을 주셨다(출 3:12a).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확증의 표징을 말씀하셨다(출 3:12b).

 

   이런 요소는 성경에 나오는 다수의 다른 부르심 속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예를 들면 기드온,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예수님의 몇몇 제자의 부르심 이야기에 나온다. 이것은 정해진 형태는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다른 소명 이야기는 상이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흔히 장기간에 걸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사 기드온(사사기)

선지자 이사야
(이사야)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선지자 에스겔
(에스겔)

예수님의 제자들
(마태복음)

 대면

6:11b-12a

6:1-2

1:4

1:1-28a

28:16-17

 소개

6:12b-13

6:3-7

1:5a

1:28b-2:2

28:18

 명령

6:14

6:8-10

1:5b

2:3-5

28:19-20a

 반대

6:15

6:11a

1:6

-

-

 확신

6:16

6:11b-13

1:7-8

2:6-7

28:20b

 확증의 표징

6:17-21

 -

1:9-10

2:9-3:2

사도행전의 사건

 
 

 

   이런 부르심이 회중 가운데서 행해지는 제사장 직책이나 종교적인 직업에는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기드온은 군사 지도자였으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사회 비평가였고, 예수님은 왕(전통적인 의미의 왕은 아니었지만)이셨다. 많은 교회는 오늘날 “소명”(부르심, 콜링)이라는 용어를 종교 직책에 국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성경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물론 출애굽기에서도 그렇지 않았다. 모세도 아론이나 미리암처럼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가요 행정가였다.

 

Brevard S. Childs, Memory and Tradition in Israel (London: SCM Press, 1962).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역사 (출5:1-6:28)

목차로 돌아가기

   출애굽기에서 본질적 ‘일꾼’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 일의 본질과 의도는 모세의 일을 규정지었고 그것으로 하나님 백성의 일도 규정됐다. 하나님이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이미 거기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에 따라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출 5:1)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로는 말로만 반발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인을 이전보다 한층 가혹하게 다스리며 억압했다. 이야기의 끝 무렵에서는 이스라엘인조차도 돌아서서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출 5:20-21). 이런 위기의 순간에 이르자, 하나님은 그분의 전반적인 의도를 묻는 모세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계획을 모세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출애굽기 6장 2-8절에 나오는 내용은 애굽에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상황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 전체를 망라하는 내용이기도 했다.[1]

 

   하나님 일의 범위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모든 크리스천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오며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마 6:10)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business)이다. 그 뜻이 성취되려면, ‘종교적’ 일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하면 우리는 우리 일의 본질뿐 아니라 그 일을 해 나가는 하나님 방식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이 핵심 내용을 보다 더 잘 짚고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먼저 간단히 검토해 본 후에 어떻게 그것을 일의 신학과 연결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향한 모세의 비난 섞인 질문에 우선 확신의 대답을 주신 후에(출 5:22-6:1), 하나님은 보다 더 장황한 설명을 풀어 놓으셨는데, 그 설명의 처음과 끝에는 “나는 여호와이니라”(I am the Lord)라는 표현이 첨가된다(출 6:2, 8). 이 핵심 어구는 단락에 경계를 그어 주는 한편 메시지 자체에 매우 높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영어권 독자는 이 어구가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직분의 칭호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계시함과 더불어 그분이 ‘누구’신지를 나타낸다.[2] 하나님은 언약을 맺고 약속을 지키며 족장에게 나타난 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하려고 하는 일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미 말씀하신 바 있는 그분의 작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케 하며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그를 축복함으로써 지상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한 것이었다(창 12:2-3).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이 네 가지 구속적 목적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갖가지 방식으로 재현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가장 큰 구속 사역 속에서도 발견된다.

 

   첫째는 구원 사역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출 6:6). 이 해방 사역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것은 세계에는 여러 가지 억압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진실이다. 가끔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이런 활동을 묘사하는데, 지상에서 구출해 천국으로 옮긴다거나(물질계에서 영계로 옮겨지는 것도 포함) 단지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그들의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셔서, 말하자면 ‘그 땅 위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 왕 바로에게서 구원하시는 것을 보여 줬고, 나아가 메시아시며 왕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건져 내고 궁극적 악의 폭군인 마귀를 정복하실 여건의 토대까지도 마련했다(마 1:21; 12:28).

 

   둘째, 여호와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실 것이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출 6:7a).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한 것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구원하신 것도 아니고 동떨어진 개인으로 살라고 하신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셨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또 서로 신실한 언약을 맺고 살아가기 원하셨다. 고대의 모든 민족에게는 각자 ‘신’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규례, 명령, 율법을 전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했다(신 26:17-18). 이런 가치와 행위가 그들과 하나님 및 서로 간의 거래와 관계에 (또 언약 밖의 사람과의 거래와 관계에) 깊이 스며들수록,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이스라엘 족속을 통해 점점 더 증거될 것이었다. 요컨대, 이것이 예수님이 세우실 ‘교회’, 즉 벽돌이나 돌로 지어진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만국으로부터 선택된 제자로 구성될 새로운 공동체의 배경이 됐다(마 16:18; 28:19).

 

   셋째, 여호와는 자기 백성과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형성해 나가실 것이다. “너희는, 내가 주 곧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강제노동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출 6:7b, 새번역).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다른 모든 진술은 ‘나’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여기서는 예외다. 여기서는 초점이 ‘너희’에게 있다(개역개정에서는 어법상 “나는”으로 문장이 시작하며 “너희가 알지라”가 처음이 아닌 끝에 나온다 - 옮긴이 주).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기 백성이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경험하기 원하셨다. 우리는 보통 ‘지식’을 ‘정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성경적 개념의 ‘지식’에는 이런 의미는 물론 타인을 인격적 관계로 알게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LORD”로 “알려 주지” 않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YHWH”(여호와 - 창 13:4; 21:33)라는 거룩한 이름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위 구절은, 아브라함과 그 일족이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며 민족 전체를 노예 생활에서 건져 낼 약속을 지키실 하나님 이름이 갖는 의의를 아직 개인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3] 궁극적으로 이 일은 예수님에 의해 이뤄졌는데,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관계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했다(마 1:23).

 

   넷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풍성한 삶을 경험하기 원하신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출 6: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땅”을 단순히 우리가 사용하는 ‘영토’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약속과 예비의 땅이었다. 우리가 보통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그 땅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이 이상적인 조건에서 사는 곳, 즉 ‘풍성한 삶’을 상징했다.[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란 그분의 창조 세계 전체 즉, 물리적 환경, 인간, 문화, 경제 등 모든 것을 올바르게 회복하는 것임을 또다시 본다. 이것 역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불러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기도 하다(마 5:5; 요 17:3).[5] 이는 요한계시록 21-22장에 나오는 새로운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기는 이후 전개될 성경 내용 전체에 대한 터를 닦는 것이다.

 

   우리 일을 통해서 오늘날 이 네 가지 구속적 목적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을 억압과 유해한 생활 환경에서 구원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위험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 정서적 고통을 줄이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일 수도 있다. 치유하는 일이란 사람을 하나하나 다루는 것인데, 정치적 해법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 전체와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포괄적인 축복을 가져오기도 한다. 행정부와 사법부에서 일하는 사람은 악을 행하는 자를 제재하고 처벌하며 민중을 보호하고 피해자를 돌볼 목적으로 일해야 한다. 온 세계에 압제가 만연해 있기에, 사람을 구할 기회와 수단은 도처에 널려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목적(공동체 및 관계)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천국에서 평안과 참된 조화를 증진하는 하나님의 일은 지상에서 자비와 공의도 증대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 사람에게 역설한 내용의 요지였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화해하셨으며 나아가 우리에게 화해의 사명과 사역을 맡기셨다(고후 5:16-20). 하나님과 화해한 크리스천은 화해 사역을 감당할 동기와 수단을 갖게 된다. 복음 전파와 영성 개발의 일은 이런 분야의 한 축을 담당하며, 평화와 공의를 촉진하는 일은 대인관계적 차원을 다룬다. 그러나 사실상 그 두 가지는 뗄 수 없으므로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신성한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는 세상의 빛이므로 우리 빛이 다른 사람 앞에서 빛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마 5:14-16).

 

   지역사회 조직가, 청소년 사역자, 행사 기획자, 소셜 미디어 종사자, 부모와 가족 구성원의 경우처럼 공동체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우리 일의 목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직업이 무엇이든 공동체와 대인관계의 구축은 우리 일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신입 사원을 환영하고 도와줄 때, 다른 사람의 고민거리에 관심을 가져 주고, 누군가를 시간 내서 만나고, 격려의 말을 건네고, 기념사진을 같이 찍고, 맛난 음식을 함께 나누며, 누군가를 대화에 끼워 주는 등 다른 이에게 우호적 행동을 보일 때, 우리는 이 두 가지 일의 목적을 매일매일 성취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일은 풍성한 삶을 증진시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 약속된 땅으로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정착해서 생활을 영위하며 발전할 수 있게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도 이상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다(히 4:1). 우리는 지금도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내려 주신 언약의 많은 부분은 사람들이 서로를 윤리적으로 대하는 것과 관련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며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완성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을 우리가 무시하는데 어떻게 우리(그리스도를 믿는 아브라함 후손)를 통해서 지상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가 말했듯이, “신구약 속의 하나님의 백성은 열국의 빛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경건한 백성의 변화된 삶 속에서 우선 빛이 나지 않는다면 열국에도 결코 빛이 비춰질 수 없는 노릇이다.”[6]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풍성한 삶’이란 절제되지 않은 이기적 번영이나 헤픈 소비가 가능한 그런 풍요가 아니다. 풍성한 삶이란 사랑과 공의와 자비가 가득한 삶, 즉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사는 삶이다.

Elmer Martens, God’s Design: A Focus on Old Testament Theology, 3rd ed. (Grand Rapids: Baker, 1994). 글의 이 섹션은 하나님의 의도를 네 부분으로 나눈 마르텐(Marten)이 만든 개요의 분석 뒤에 나온다.

영어성경들은 “LORD”(Lord와 구분해서 두 번째 글자부터 대문자로 작게 표시해서 쓴다)라는 단어를 써서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 ‘YHWH’를 나타내는 관례를 따른다

이 요점에 대한 구약 신학 문헌은 그 분석의 범위와 깊이에 있어 거의 무한하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중추적 중요성을 감안해 보면 이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 쟁점들에 대한 요약과 이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들을 제시하려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이 글에서 취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논의한 내용을 보려면 Bruce K. Waltke and Charles Yu, An Old Testament Theology: An Exegetical, Canonical, and Thematic Approach (Grand Rapids: Zondervan, 2007), 359-369쪽을 보라. 브루스 월키, 《구약 신학》(부흥과개혁사 역간).

Martens, God’s Design: A Focus on Old Testament Theology, 10쪽.

신약에서 땅에 대해 더 알고 싶거든 Waltke and Yu, An Old Testament Theology: An Exegetical, Canonical, and Thematic Approach, 558-587쪽을 보라. 브루스 월키, 《구약 신학》(부흥과개혁사 역간).

Christopher J. H. Wright, The Mission of God: Unlocking the Bible’s Grand Narrative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6), 358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바로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다 (출7:1-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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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첫째 단계, 즉 구원을 시작하실 때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라’라고 전하게 하셨다(출 7:2). 이 임무를 위해, 하나님은 공공 연설에 능한 아론의 타고난 재능을 사용하셨다(출 4:14; 7:1). 하나님은 또한 아론에게 애굽의 고위 관료를 능가하는 능력을 부여하셨다(출 7:10-12).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말과 행위가 둘 다 필요하다.

 

   바로는 모세에게서 하나님 뜻을 전달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을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 그러자 모세는 점차 심해지는 일련의 생태계 재앙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에게 선언했다(출 7:17-10:29). 이 재앙은 개인적인 불행을 초래했고, 애굽 땅과 사람들의 생산 역량에 심대한 타격을 줬다. 질병으로 가축이 죽어 나갔고(출 9:6) 작물이 파괴됐으며 숲이 황폐화됐다(출 9:25). 해충이 여러 생태계를 파멸했다(출 8:6, 24; 10:13-15). 출애굽기에 나오는 생태계 재앙은 바로의 폭정과 압제를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이었다. 현대 세계에서도, 계속되는 정치 억압은 생태계 재앙과 연관이 있다. 우리가 모세처럼 그의 권위를 빌려 이런 재앙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 정치, 문화, 사회의 구원이 환경 구원과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각각의 경고가 실현될 때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겠다고 공언하지만 재앙이 지나가고 나면 약속을 곧 뒤집었다. 결국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장자와 동물의 첫 새끼를 모두 죽이는 재앙이 임하게 하셨다(출 12:29-30). 바로가 그랬듯이(출 11:10) 노예제도의 끔찍한 영향은 연민, 정의, 심지어 자기 보호에 대해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이다.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놓아 주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떠나면서 애굽인의 보석, 은, 금, 의류를 약탈했는데(출 12:35-36) 이것은 합법적인 것으로 노예 생활의 대가를 돌려받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해방시킬 때, 하나님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노동의 열매를 회복해 주신다(사 65:21-22). 일과 작업 환경은 하나님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홍해를 지나 시내로 가는 도중의 이스라엘 (출13:17-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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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단호하게 자기 백성을 이끌어 홍해를 건너게 하고 애굽의 폭력적 속박에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순간, 하나님의 근본적인 일은 극적인 열매를 거뒀다. 혼돈의 물을 거두고 마른 땅을 창조하셨던 하나님, 홍수 속에서도 노아의 가족을 이끌어 마른 땅에 도달하게 하셨던 하나님은 홍해 물을 갈라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마른 땅”을 밟으며 건널 수 있도록 하셨다(출 14:21-22). 이스라엘의 애굽에서 시내(Sinai)까지의 여정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이야기의 연장이었다. 모세, 아론 및 여러 사람이 열심히 일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진정한 일꾼은 하나님이셨다.

 

분쟁 해결의 권한을 위임하다 (출18: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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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굽으로부터 시내까지 이르는 동안에, 모세는 장인 이드로와 다시 만났다. 이스라엘인에게 이방인으로 지내 왔던 이드로는 공동체 내에서의 공의에 대해 모세에게 매우 긴요한 조언을 줬다. 하나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공의로 확대됐다. 이스라엘은 이미 애굽의 십장에게 부당한 대우를 당한 적 있었다. 해방된 사람으로서 이제 그들은 그들 사이의 분쟁에 대한 하나님의 답을 온당하게 구했다. 월터 브루그만은 성경적 믿음이 단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치유와 회복에 대한 열정을 매일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고 실천하는 것이며, 부정직한 이득은 끊임없이 거부하는, 힘든 것이다.”[1]

 

   분쟁에 말려든 사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맡는 것이 모세가 하고자 하는 일 중에 하나였음을 우리는 앞서 배운 바 있다. 처음에 그가 개입하려고 나섰을 때, 모세는 이런 항의를 받았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출 2:14). 그런데 이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통치자와 재판관의 역할을 맡아 달라는 요구가 너무 많아 많은 사람이 모세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의 판결을 기다릴 정도였다(출 18:14; 신 1:9-18 참조).

 

   모세의 일에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그는 사람 사이의 분쟁에 합법적인 결정을 내려 줬다. 둘째, 그는 도덕 및 신앙적인 지도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교훈을 가르쳐 줬다.[2] 이드로는 모세가 홀로 그런 고귀한 일을 감당하고 있음에 주목했는데, 그는 그것을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출 18:17). 더 나아가서 그것은 모세에게도 해가 되고 그가 돕고자 애쓰는 사람에게도 불만족스런 일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계속해서 감당하되, 여타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는 것이 이드로의 해법이었다. 이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고, 백성을 가르치며, 어려운 사건을 판결하는 것은 모세가 맡고, 다른 사건은 하위 재판관이 담당하는 그런 4단계 사법 체계였다.

 

   이런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지혜의 핵심은 재판관의 자격이었는데, 이들은 지파 구분이나 종교 성숙도에 따라 뽑히지 않고 네 가지 자격검증을 거쳐 선발됐다(출 18:21). 첫째, 그들은 유능한 자여야 했다. “chayil[하일]을 가진 자”라는 히브리어 표현은 능력, 지도력, 경영 능력, 지략을 겸비하고 존경받는 이를 뜻했다.[3] 둘째,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했다. 출애굽기 2장에 나오는 산파의 경우처럼, 이것은 꼭 종교적인 품성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문화와 종교 경계를 넘어 통상적으로 인식되는 도덕성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셋째, 이들은 “진실”한 자여야 했다. ‘진실’이란 추상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행동 양식이기도 하므로, 이들은 행위뿐만 아니라 성품도 진실하다고 하는 객관적인 증거를 갖고 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부당한 이득을 미워하는 자여야 했다. 이들은 부패가 어떻게, 왜 발생하는지를 알아야 했으며 뇌물의 관행과 모든 종류의 파괴를 경멸하고 그런 악습으로부터 사법 체계를 적극적으로 수호할 수 있는 이들이어야 했다.

 

   위임은 지도력이 요구되는 일에 있어 필수적이다. 모세가 예언자, 정치가, 재판관으로서 독보적인 은사를 지닌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의 재능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만이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 됨이 무엇인가를 잊은 사람이다. 리더십의 은사는 궁극적으로 권력을 적절하게 나눌 줄 아는 은사다. 지도자라면, 모세처럼 필요한 자질을 분별하고 권위를 부여할 사람을 훈련하며 그들에게 책무를 지울 수단도 마련해야 한다. 지도자도 곁에서 그들의 책무를 느끼게 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모세의 경우에는 이드로가 그런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 단락은 구약의 예언자 중 가장 위대하게 여겨지는 사람도 그에게 책임을 물을 권세가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음을 아주 솔직하게 보여 준다.

 

   지혜와 과감함, 자비로움을 갖춘 리더십은 모든 공동체에 필요한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하지만 출애굽기는 은사를 지닌 지도자가 권위를 잘 발휘하는 것보다 은사 지닌 자들이 성공할 수 있는 공동체 리더십 구조가 개발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이것이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방법과 과정임을 보여 준다. 위임은 후임 지도자를 키우는 방법일 뿐 아니라 조직이나 공동체의 역량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모세가 이런 조언을 아주 신속히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실은 그가 개인적으로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넓게 보면, 우리는 모세(히브리인이며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가 한 미디안 제사장을 통해 그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지혜를 향해 완전히 마음을 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일 문제와 관련된 차원에서 본다면, 크리스천이 다양한 전통과 종교로부터 제공되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또 존중하는 것도 권장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표시, 믿음이 약하다는 표시도 아니다. 그것은 종교적 다원주의와 부적절한 타협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 지혜의 인용구를 너무 자주 들이댐으로써 비신자에게 편협하고 신뢰가 안 가는 싸구려 증인으로 인식될 수가 있다. 크리스천은 우리가 받아들인 세부적인 조언이 밖에서 왔는지 아니면 안에서 왔는지를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고 확신한다.[4]

 

Walter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Genesis to Leviticus, The New Interpreter’s Bible: Genesis to Leviticu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829쪽.

Umberto Moshe David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Exodus (Skokie, IL: Varda Books, 2005), 219쪽.

‘chayil’이라는 단어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www.theologyofwork.org)에서 “용감한 여인”(The Valiant Woman)이라는 제목의 글을 검색해 글 도입부에 나오는 Bruce K. Waltke and Alice Matthews, Proverbs and Work, “Proverbs 31: 10-31” 내용을 참조하라.

Arthur Holmes, All Truth is God’s Truth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83).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 (출19:1-4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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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는 시내산에서 여호와께 십계명을 받았다. NIV 스터디 성경의 표현대로 하면,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시내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핵심 규정이다. 십계명이 후대 역사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십계명은 서구 세계 전반에 뿌리 내린 도덕 원칙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서 어떤 믿음, 예배, 행위를 기대하시는지를 요약해서 설명해 준다.”[1]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스라엘의 율법을 크리스천이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다루는 주제는 어마어마한 논쟁거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출애굽기 본문이 실제로 전하는 내용에 최대한 집중하고자 한다. 그것이 공통분모가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크리스천이 출애굽기에서 교훈을 도출해 내는 다양한 방식도 인정하고, 또 존중하고자 한다.

 

Kenneth Barker, ed., The NIV Study Bible (Grand Rapids: Zondervan, 1999), 269쪽.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의 의미 (출19:1-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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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먼저 출애굽기가 성경의 일부이지 독립된 법체계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크리스천을 위한 도덕 법전일 뿐이라는 일반 견해는 성경의 본질과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한 것이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이 땅,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즉 무엇이 잘못됐으며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고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기록한 책이 성경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도덕적 가르침 또한 지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일(mission)에 대한 이야기다. 성경은 사람의 온전한 반응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사명은 사람의 반응을 요구함과 동시에 그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사람의 그런 반응에는 윤리적 차원이 엄연히 포함된다.[1]

 

   “law”(율법)라는 영어 단어는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말이지만 핵심 히브리 단어인 ‘Torah’(토라)를 정확하게 번역한 것은 아니다. 이 용어가 우리 앞에 놓인 논의 전체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에, 이 히브리 단어가 성경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토라’라는 말은 아브라함이 따랐던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의미로 창세기에서 한 번 사용된다(창 26:5). 이 단어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명령을 가리킬 수도 있다(시 78:1).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에서의 토라는 모세오경과 나머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민사 및 사회 행위의 규범뿐 아니라 공식 예배 예식과 관련된 하나님 백성의 행동 표준을 나타낸다.[2] 토라의 성경적 개념은 ‘신적 권위의 명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개념은 현대인이 갖고 있는 입법부에서 만든 법이나 자연법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의 풍부하고 권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별도의 번역 없이 ‘토라’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일련의 구체적 명령이라고 할 수 있는 토라는 언약의 일부로 간주된다. 언약이 토라의 일부인 게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언약 전체는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은 관계를 말한다(출 20:2). 언약으로 백성과 관계를 맺은 왕으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예배하고 행동하기를 원하는지 율법을 통해 명시하신 것이다. 순종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서약은 언약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반응이었다(출 24:7).

 

   이것은 일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직장에서 우리가 우리 행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또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방식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 크리스천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우리 태도에서 다시 그 사랑이 드러나는 것이다(요일 4:19-21).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 계명의 범위는 교회, 카페,집, 공공장소, 일터 등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서나 그 계명을 적용하며 살기 원하신다. 

 

 

 

Wright, The Mission of God: Unlocking the Bible’s Grand Narrative, 357-358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Peter Enns, “Law of Go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ed. Willem A. VanGemeren (Grand Rapids: Zondervan, 1997), 4:893. 그 단어는 또한 신명기서의 역사적 핵심이 “율법서”(신 31:26)라고 불린다는 점에서 한 문헌의 본체를 가리킨다. 전통적으로 모세오경은 “토라”라고 불렸다

크리스천을 위한 율법의 역할 (출20:1-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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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개인이 출애굽기나 특히 레위기의 어느 구절에서 논점을 이끌어 낸 다음, 그 교훈을 현대에 적용하는 법을 제시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일을 시도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반론에 부딪힌다. “좋아요. 하지만 성경은 노예제도를 허용하고 우리에게 베이컨이나 새우를 먹지 말라고 하잖아요! 게다가 내 옷에 면과 폴리에스테르가 섞여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크게 상관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해요”(출 21:2-11; 레 11:7, 12; 19:19 참조). 이런 일은 크리스천 가운데서도 일어나기 때문에, 성경을 공적인 분야에서 ‘일’이라는 주제에 적용할 때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무엇이 오늘날 적용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경을 모순되게 대한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진실로 변화될 수 있을까? 출애굽기와 모세오경에 나오는 율법의 다양성은 이런 유형의 도전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도전은 크리스천들이 토라와 구약을 그리스도와 신약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다양한 방식에서 나온다. 기독교에서 토라 문제는 극히 중요하며,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일에 관해서 성경이 다루는 부분으로부터 뭔가를 얻을 수 있다. 다음에 나오는 간단한 정리는 과도하게 편협하지 않은 차원에서 이에 도움을 줄 것이다.

 

   신약과 율법의 관계는 복잡하다. 그것은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제는 ……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6)라는 바울의 두 진술을 모두 포함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구절이 아니고, 토라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얻은 사람에게 공의, 지혜, 내적 변화라는 하나님의 선물을 계속해서 계시해 준다는 하나의 공통된 사실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경건한 본질에 대한 표현이자, 구원이라는 위업에 따르는 결과로서 토라를 주셨다. 토라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 내재된 죄성을 보고 하나님 및 타인과 평화롭게 살기 위한 어떤 기준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훈을 우리가 삶의 크고 작은 실제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그 교훈에 순종할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몇몇 특정 율법을 보고서 우리가 하나님을 비현실적인 완벽주의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 작거나 시시한 것이 아님을 율법은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므로 토라는 외적 행위에 대한 것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탐심 같은 마음의 문제도 거론한다(출 20:17). 후에 예수님은 살인과 간음을 정죄하셨을 뿐 아니라 분노와 정욕의 뿌리도 꾸짖으셨다(마 5:22, 28).

 

   하지만 오늘날 삶의 실제 문제에 토라를 적용하며 토라에 순종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수천 년 전에 행했던 것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르다. 율법의 일부는 영구적인 게 아니라는 점을 이미 구약은 우리에게 암시한다. 성막은 영구적인 구조물이 아니고 성전도 이스라엘 원수의 손에 무너져 버렸다(왕하 25:9). 예수님이 파괴된 “성전”을 삼일 만에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의 희생을 통한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 것이었다(요 2:19).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성전, 제사장 제도 및 제사장 활동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구현했다. 음식에 대해 예수님이 선언하신 내용, 즉 ‘사람이 불결하게 되는 것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 때문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모세 언약의 특정 음식법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막 7:19).[1] 더욱이 신약의 하나님 백성은 그들에게 토라의 제재 규정을 적용할 합법적 권한이 없는 세계 여러 국가와 문화 속에서 살았다. 이에 사도들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여러 문제를 논의했고, 유대 율법의 세부사항이 이방 크리스천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의했다(행 15:28-29).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당시 신학에 비춰 볼 때도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0-31).[2]

 

   신약에 나오는 내용 대부분도 토라를 확증해 주는데, 거기에는 간음, 살인, 도적질, 탐심을 경계하라는 계명뿐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계명도 있다(롬 13:8-10; 갈 5:14). 팀 켈러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우리가 예배하는 방식은 바뀌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3]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은, 새 언약 속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 속에 율법을 넣어 두고 그들의 마음에 율법을 새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렘 31:33; 눅 22:20). 모세 언약의 율법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실함은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결심에 달려 있었는데, 결국 예수님만이 이를 성취하실 수 있었다. 새 언약 아래의 신자는 그런 식으로 행하지 않는다. 바울은 ‘우리는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섬긴다’고 말했다(롬 7:6, NIV).

 

   일의 신학과 관련해서는 앞서 설명한 것이 몇 가지 내용을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데, 그것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을 직업과 관련된 현장에서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줄 것이다. 노동자, 동물, 재산을 다루는 것과 관련된 율법은 하나님 본성의 영원한 가치를 나타낸다. 그것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하지만 노예처럼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십계명은 일반 용어로 표현되어 있으므로 다양한 상황에서 자유롭게 적용될 수 있다. 반대로 시종(servants), 가축 및 개인 상해에 대한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의 특정 역사, 사회적 맥락, 특히 당시 논쟁 거리였던 분야에서의 적용을 예시(例示)하는 것이었다.

 

   율법은 올바른 행위의 예를 든 것이지만 적용의 실례를 모두 총망라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천은 행위를 스스로 통제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의 태도, 동기, 욕구를 변화시키도록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율법을 존중한다(롬 12:1-2).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주님과 구주의 일과 의도에 대한 회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이 자기 방침과 행위를 주관하도록 구해야 한다.

 

Tim Keller, “Keller on Rules of the Bible: Do Christians Apply them Inconsistently?” The Gospel Coalition, http://thegospelcoalition.org/blogs/tgc/2012/07/09/making-sense-of-scriptures-inconsistency/.

James Tabor and Randall Buth, Living Biblical Hebrew for Everyone (Pasadena, CA: Internet Language Corp., 2003).

Keller, “Keller on Rules of the Bible: Do Christians Apply them Inconsistently?”

일에 관한 명령 (출20:1-17 및 21: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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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언약서”(출 24:7)에는 ‘데카로그’(Decalogue; 문자 그대로 “말씀들” - 출 20:1-17)라고도 불리는 ‘십계명’, 출애굽기 21장 1절에서 23장 19절에 나오는 규례가 포함되어 있다. 십계명은 무엇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같은 일반 명령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규례는 판례법을 모아 놓은 것으로써, ‘만일 …… 한다면, 그때는 ……’ 형태를 사용해서 십계명을 특정 상황에 적용한 것이다. 이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 및 경제 세계에 맞는 것이었다. 이 법은 총괄적인 법전이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서, 극악한 행위를 저지하고 난제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적 선례였다.[1]

 

 

Gordon J. Wenham, A Guide to the Pentateuch, Exploring the Old Testament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8), 71쪽.

십계명 (출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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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계명은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 뜻에 대한 최상의 표현이므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십계명을 수백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열 가지 계명으로 간주할 게 아니라 토라 전체를 집대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 모든 토라는 십계명에 근거를 두므로 실질적으로 우리는 십계명에서 모든 율법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으로 율법을 요약했을 때 십계명은 본질적으로 나머지 율법과 일치할 수밖에 없음을 표현하신 것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십계명을 나타낼 때는 언제나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지칭됐다.

 

   십계명과 나머지 율법의 근본적인 일치와, 신약과의 연속성은 우리가 성경 전체를 조명하며 십계명을 현대 직업 현장에 적용해 보도록 초청한다. 다시 말해 십계명을 적용할 때 우리는 신구약에 나오는 관련 성구도 함께 살펴볼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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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계명은 토라에 담긴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 사랑은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에 반응한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셨을 때 드러났다(출 20:2). 인생에서 그 어떤 욕망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커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더 강력한 다른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규칙을 어기고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른 관심사가 돈, 권력, 안정, 명예, 성적 쾌락 또는 여타 어느 것이든 간에 우리의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가짜 신’들은 그 나름의 계명을 갖고 있어서 하나님의 계명과 불화를 일으킬 것이며, 우리가 가짜 신의 요구 조건에 응하는 순간마다 반드시 토라를 위반하게 된다. 십계명을 지키는 첫 발걸음을 뗄 수 있는 것은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일과 관련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일이나 그 조건과 열매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길(David Gill)이 말한 대로, “아무도, 아무것도 당신 삶 속에서 하나님이 차지한 중심적 위치를 절대 위협하지 못하게 하라.”[1]

 

   많은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므로, 돈에 대한 과욕은 일과 관련해서 첫째 계명을 어기게 만드는 가장 흔한 위험이 된다. 예수님도 바로 이 위험을 경고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어쨌든 일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우리 욕망을 왜곡시켜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에 지장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루는 수단이 되어야 할 것, 즉 정치 권력, 재정 안정, 직업에 대한 헌신도, 동료 사이에서의 지위, 탁월한 성과 등이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변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극적인 파국을 맞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인격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한 게 되었다면, 궁극적 관심사가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사람의 평가로 바뀌었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실생활에서 우리는 이렇게 점검해 볼 수 있다. 하나님 사랑이 직장에서 사람을 대하는 내 태도로 드러나는지 여부를 스스로 물어보면 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만일 우리가 우리 개인 관심사를 직장 상사나 동료에 대한 관심사보다 앞세운다면, 우리는 개인 관심사를 우리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대상, 극복해야 할 장애물,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줄 수단, 우리 진로에 그저 놓여 있는 물체쯤으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우리는 일과 관련된 행위 중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은 것을 열거해 볼 수 있다. 우리 양심에 반하는 일을 행하는 것,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칠 수밖에 없는 조직 내에서 일하는 것, 너무 오래 일하다 보니 기도 · 예배 · 안식할 시간은 물론 하나님과 더 깊고 친밀한 관계를 맺을 시간이 없는 것, 우리를 부도덕하게 만들거나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하는 것, 술 · 마약 남용 · 폭력 · 성희롱 · 부패 · 무례 · 인종 차별 또는 다른 비인간적인 대우가 우리와 직장 동료 속에 있는 하나님 형상을 파괴하는 환경 가운데서 일하는 것. 만일 이런 위험을 피할 방도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지혜로운 처신이 될 것이다. 새로운 직장을 찾아 나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방도를 찾기 힘들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우리의 일터에서 유지하기 위해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David W. Gill, Doing Right: Practicing Ethical Principles (Downers Grove, IL: IVP Books, 2004), 83쪽. 이 책에는 오늘날의 세상에서 십계명을 적용할 수 있는 자세한 강해가 담겨 있는데, 읽을 때 아주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출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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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계명은 우상숭배 문제를 거론한다. 우상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신이며 우리가 고안한 것이 전부인,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 그런 신이다. 고대 세계에서 우상숭배는 주로 물리적 대상을 숭배하는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이 주제의 초점은 신뢰와 헌신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안녕과 성공에 대한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나님 외의 존재는 우리 소망을 성취할 능력이 없으며,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조종할 의도로 우상을 만들었다가 비참한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 결과를 얻은 한 집안의 이야기가 사사기 17-21장에 잘 나와 있다.

 

   일의 세계에서는 돈, 명예, 권력을 잠재적 우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흔한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우상인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일 가운데 우리 역할 속에서 사실상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거나 그것으로 우리 안전과 번영이 확보될 것이라 여긴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된다. 동일한 상황이 준비, 각고의 노력, 창의력, 모험, 부(富), 기타 자원과 우호적인 환경 등 성공의 모든 여타 요소 가운데 있는 상태에서도 사실상 발생할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는 이런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는 우상숭배가 시작되는 시점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자칭 대단한 것을 예배하고자 하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다. 모든 일에 참으로 거룩한 지혜와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를 의뢰하게 하려” 함이다(잠 22:19).

 

   우상숭배의 특이한 점은 사람이 우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일터에서 우리가 우리 권력, 지식, 생각을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할 때 우상숭배의 위험성이 발생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세운 기준을 우리 자신에게 더 이상 적용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더는 귀 기울이지 않거나,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짓밟으려고 할 때, 우리는 이미 자신을 우상화하고 있는 것 아닐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출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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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계명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지’ 말 것을 하나님 백성에게 명한다. 이것은 “여호와”(출 3:15)라는 이름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등에도 적용된다. 그릇되게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여기에는 저주, 비아냥,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보다 더 중한 잘못은, 사람이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에게로 거짓되게 돌릴 때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배재한 채 우리 자신의 행위나 결정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크리스천들은 직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에 기초해서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야”라든가 “그런 일을 당신이 당하는 건 하나님이 당신에게 벌을 주고 있기 때문이야”와 같은 말은 매우 위험하다. 신앙 공동체의 지지나 분별 없이 개인의 입에서 나올 경우, 대개는 근거가 전혀 없다(살전 5:20-21).

 

   이에 비춰 보건대, 전통 유대인이 하나님(the divine)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영어식 표현인 “God”도 사용하기를 꺼려 하는 지혜는 크리스천도 일면 본받을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 조금이라도 더 신중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주장을 펼 때 더 조심하고 특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셋째 계명은 사람의 이름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요 10:3)하시는 선한 목자는 만일 다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거나 그들을 불경스런 호칭으로 불러서도 안 된다. 다른 이에게 저주를 퍼붓거나 창피를 주거나 그들을 억압하거나 배척하거나 편취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는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거나 고마움을 표하거나 그들과 유대감을 다지거나 환영할 때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좋게 사용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외워서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축복이 된다. 그 사람이 무명이나 보이지 않거나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당신은 쓰레기통을 비워 주는 사람, 고객 상담 전화를 받는 사람, 버스 운전기사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비록 이런 예가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출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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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은 출애굽기와 구약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과 실생활에서도 복잡한 문제다. 이 계명의 앞부분은 일주일에 하루는 노동하기를 쉬라고 명령한다. 출애굽기 중 안식일에 관한 내용은 16장(만나를 거두러 나감), 23장 10-12절(안식년 및 매주 안식의 목적), 31장 12-17절(안식일을 어길 때의 형벌), 34장 21절과 35장 1-3절에 나와 있다. 고대 세계에서 안식일은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이었다.

 

   다른 고대 국가 사람은 일주일에 하루씩 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안식일을 지키려면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을 온전히 신뢰하는 게 필요했다. 이는 곡식을 심고 거두고 물을 긷고 길쌈을 하고 각종 양식으로부터 식량을 얻어 내는 모든 작업을 6일 만에 끝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이 일주일에 하루씩 안식하는 동안 주변 나라는 계속 칼을 만들고 화살을 제작하고 병사를 훈련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경제 및 군사 재난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각종 문제와 씨름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를 따라 일과 안식의 순환을 지키면서도, 과연 우리는 현대 경제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둘 혹은 셋 이상의 직업을 유지하고 집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세차를 하고 공과금을 제때 내고 학교 공부를 하고 시장을 보는 데 7일이 다 필요한가? 아니면 매주 하루씩 쉬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양해 주시리라고 신뢰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를 드리며 다른 사람과 어울려 성경공부를 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우리 생산성이 전반적으로 더 떨어질까 아니면 더 높아질까? 넷째 계명은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해 주실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안식을 취할 것을 말할 뿐이다.

 

   크리스천은 안식일을 “주일”(일요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로 바꿔 부르고 있으나, 안식일의 본질은 일주일 중 특정한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게 아니다(롬 14:5-6). 안식일이 정말로 강조하는 두 가지 사항은 일과 안식이다. 일과 안식이 둘 다 제4계명에 포함되어 있다. 일하는 6일도 안식하는 하루만큼이나 이 계명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많은 크리스천이 일하는 시간을 짜내어 안식에 할애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와 반대로 한가로운 여가와 낭비를 위해 일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것은 안식일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악하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부양하지, NIV]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과 안식의 적절한 조화다. 그것이 우리 자신과 가족, 동료 근로자와 고객 모두에게 다 좋기 때문이다. 그 조화에는 일요일 또는 토요일 24시간 동안 푹 쉬는 것이 포함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안식의 시간적 비율은 일시적인 필요(안식일에 소를 우물에서 건져 내는 일과 비슷한 현대의 일 - 눅 14:5)나 때에 따른 삶의 필요에 의해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과로가 우리의 주된 위험이라면, 우리는 신령한 것(일요일에 진행되는 예배)과 세속적인 것(월요일부터 진행되는 노동)을 대립시키는 새로운 거짓 율법주의를 창안해 내지 않으면서도 제4계명을 지킬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일을 회피하는 것이 우리 위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일하는 것의 기쁨과 의미를 배우고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엡 4:28).

 

 

“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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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를 공경하거나 공경하지 않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은 이 계명의 의미를 부모에 대해 좋게 말하고 칭찬하는 것에 국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계명을 지키려면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셨다(막 7:9-13). 우리는 누군가의 선을 위해 일함으로써 그 대상을 향한 공경심을 표현한다.

 

   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인생의 커다란 기쁨 중 하나다. 부모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즐거움이며, 이 계명을 따르는 것도 쉽게 다가온다. 그러나 부모를 위해 일하는 것이 짐처럼 느껴질 경우 우리는 이 계명으로 시험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홀대를 받거나 냉대를 받았을 수 있다. 부모로부터 통제나 간섭을 심하게 받으며 자랐을 수도 있다. 부모와 엮이는 것이 자아를 무너뜨리거나 배우자에 대한 헌신(셋째 계명에 따른 우리의 책임 포함),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망치는 것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비록 현재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부모를 돌보는 일에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나중에 큰 짐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만일 늙거나 치매에 걸려서 부모의 기억력, 능력, 좋은 성품이 사라질 경우, 부모를 돌보는 일은 깊은 슬픔으로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섯째 계명에는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라는 약속이 들어 있다. 실질적인 방식으로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더 오래 살게 되는 (아마도 더 충만하다는 의미에서) 유익을 누리게 된다는 약속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 이 말씀은 그런 기대를 우리에게 안겨 준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제1계명 참조).

 

   부모의 유익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 이 계명의 바탕이기에, 이것은 본질상 일의 현장에서의 명령이 되기도 한다. 일터는 우리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곳일 수도 있고, 일상적인 수발로 그분을 돕는 곳이 될 수도 있다. 두 가지가 다 일이다. 부모와 더 가까이 살기 위해, 혹은 부모에게 돈을 보내거나, 부모가 물려준 가치관이나 재능을 가지고 일하거나, 부모가 중요하다고 여긴 일을 해 나가기 위해 우리가 일할 때, 우리는 그분들을 공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분들과 함께 거하기 위해, 혹은 그분들을 위해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부모를 목욕시켜 드리거나 안아 드리고, 좋아하는 장소로 모시고 간다거나 부모의 두려움을 덜어 드리기 위해 직장활동을 역으로 제한한다면, 그것 역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된다.

 

   직장에서 우리는 스스로 다섯째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우리는 종업원, 고객, 동료, 상사, 거래처 및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 기대를 조절함으로써 그들이 자기 가족을 돌볼 수 있도록 지원해 줄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과 부모 사이의 갈등에 대해 말하거나 불평할 때, 우리는 그들의 말에 연민을 갖고 귀를 기울이거나 실질적으로(가령 근무 시간대를 교대해 부모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지원해 줄 수 있다. 그들에게 성경적인 시각에 근거한 어떤 견해를 피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출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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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깝게도 여섯째 계명은 현대인의 직장생활에 너무나도 실질적으로 잘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이다. 직업과 연관된 사망 사고의 10퍼센트(미국 기준)가 살인이기 때문이다.[1] ‘직장에서 절대로 살인하지 말라’라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권고한다고 해도 이런 통계치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살인은 유일한 형태의 직장 폭력은 아니며, 단지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더욱 실질적인 폭력은 분노인데, 예수님은 분노를 발하는 것도 여섯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21-22). 바울이 말한 대로, 분노의 감정을 금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배울 수는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따라서 여섯째 계명이 일의 현장에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일터에서 분노 문제를 겪는다면, 분노 조절에 관한 도움을 받도록 하라.’ 많은 고용주, 교회, 국가, 자치단체, 비영리 조직이 분노 관리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제공하는데, 이런 것을 이용하면 여섯째 계명을 지키는 데 크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은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이지만, 여섯째 계명으로부터 파생된 판례법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의도적이지 않은 죽음을 막을 의무도 있다. 아주 명료한 한 예는 소(일을 하는 동물)가 사람을 받아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다(출 21:28-29). 만일 그 사건이 예측 가능한 사고였다면, 그 소의 주인이 살인 책임을 물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주인이나 관리자는 직장 내의 안전을 적절하게 유지할 책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원칙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으로 잘 확립되어 있는데, 작업 현장의 안전은 정부 정책, 산업체 내규, 조직체 정책과 관습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직장이 근로자로 하여금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계속 일하도록 요구하거나 묵인한다. 작업 여건을 조성하거나 근로자를 감독하거나 직장 관습을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크리스천이라면 여섯째 계명을 상기해 안전한 근무 환경이 그들이 책임져야 할 가장 큰 것 중 하나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Fact Sheet: Workplace Shootings 2010,” United States Department of Labor, Bureau of Labor Statistics, http://www.bls.gov/iif/oshwc/cfoi/osar0014.htm.

“간음하지 말라” (출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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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은 간음이 가장 흔히 발생하는 환경 중 하나다. 간음이 직장 내에서 많이 발생해서라기보다 근무 환경, 직장 동료끼리 인간관계 등이 간음이 발생할 환경을 쉽게 조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장에서 이 계명은 우선 문자 그대로 적용된다. 결혼한 사람은 직장과 연관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어떤 이유에서라도 성(性)적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것은 성매매, 포르노그래피 산업 종사자, 섹스 대리모 같은 직업적 성행위를 하는 사람은 일단 제외하고, 적어도 선택권을 지닌 대다수의 직장인을 향해서 하는 말이다.

 

   결혼 서약에 흠집을 내는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일곱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런 일은 여러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다. 병원, 회사, 연구소와 교회 등 직장 동료 간의 강한 감정적 유대관계가 요구되면서도 배우자와 서약한 것은 충분히 지지해 주지 못할 수 있는 환경. 장시간 신체적으로 가까이 하는 직업이라든지 합리적인 한계 내에서 퇴근 후의 만남을 제한하지 못하는 장기 출장 같은 작업 조건. 성희롱을 당하게 하거나 압력에 굴복해 권력자와 성행위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무 환경도 있을 수 있다. 허영심이나 선망에 둘러싸이는 연예인, 스타 운동선수, 대기업 사업가, 정부 고위 관료나 극히 부유한 사람 사이에서도 간음이 흔히 발생할 수 있다. 직장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신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소비하다가 배우자와의 관계가 침식당하기도 한다. 크리스천이라면 이 모든 상황에서 드러나는 위험들을 알아보고 피하거나, 개선하거나, 경계해야 할 것이다.

 

   간음이 불법 성적 접촉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곱째 계명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창조하실 때 “한 몸”(창 2:24)이 되도록 만드셨으며, 일곱째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 역시 결혼 언약에서의 하나님 역할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그러므로 간음을 저지르는 것은 사람과 더불어 죄를 짓는 것일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는 것이다. 

 

   사실 구약에서는 종종 “간음”이란 말과 간음을 둘러싼 비유가 성적인 죄가 아닌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사용된다. 이사야 57장 3절, 예레미야 3장 8절, 에스겔 16장 38절 및 호세아 2장 2절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예배하겠다는 언약을 어긴 것을 종종 “간음”이나 “통간”이라고 질책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과의 신의를 저버리는 것은 불법적인 성행위 유무와 관계없이 모두 간음에 비유된다. ‘간음’이란 단어의 이런 용례는 첫째, 둘째 및 일곱째 계명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십계명이란 그저 중요한 상위 열 가지 규칙을 모아 놓은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단일한 언약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상숭배를 요구하거나 그런 쪽으로 우리를 이끄는 직장은 피해야 한다.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서 타로 카드로 사람들에게 점괘를 봐 주거나, 우상숭배와 관련된 미술이나 음악에 종사하거나, 외설 도서를 출판하는 일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가진 배우가 음란하거나 불경건하거나 영적으로 혼란시키는 역할을 맡는 것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아무리 작은 것처럼 보여도 어떻게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좋게 하기도 하고 나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에게 영적으로 해가 되는 스트레스성 일이 계속 쌓인다면, 결국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직업을 결정할 때 우리는 선택권이 있는 범위 내에서 그런 요소를 최대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간음으로 깨지는 언약의 특이한 점은 그것이 대부분 하나님과 우리가 맺은 언약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크리스천이 맺는 모든 약속이나 합의가 다 은연중에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아닌가?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골 3:17). 계약, 약속, 합의는 우리가 흔히 구두나 행위로 맺는다. 우리가 그것을 모두 주 예수 이름으로 행한다고 치면, 어떤 약속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므로 지켜야 하고 어떤 것은 사람과 맺은 것이므로 어겨도 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모든 유형의 합의를 지켜야 하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합의를 깨도록 유도해서도 안 된다. 출애굽기 20장 14절에 들어 있든지 이 구절에서 파생된 신구약 가르침이든지 간에,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다른 사람도 그들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도우라’라는 말은 직업 세계에서 일곱째 계명을 명석하게 해석한 설명이 될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 (출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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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째 계명 역시 일터를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는 또 다른 계명이다. 도둑질은 피해자로부터 노동의 대가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한 일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 도둑질은 정직한 노동을 피하려는 편법의 일환으로 저질러지기 때문에, 그것은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도 된다. 여기서도 우리는 십계명끼리의 연관성을 본다. 그러므로 일터에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도둑질은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 외에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타인의 귀한 어떤 것을 소유주의 동의 없이 취득하는 순간 그것은 도적질이 된다. 자원이나 자금을 개인 용도로 착복하는 것도 도둑질이다. 판매 실적을 올리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사기를 치거나 가격을 올리는 것 역시 도둑질이다. 구매자가 실제와 다른 상황 속에서 구매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주제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과대광고/과장” 부분을 보라. 마찬가지로 사람의 두려움, 취약점, 무력감, 절박함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의 한 형태다. 그들이 동의한 것은 진정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작권이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도 창안한 사람에게서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민법상의 이윤을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둑질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직업이 사람의 무지나 궁지에 몰린 선택권 없는 상황을 이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원치 않는 거래를 하게 만드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회사, 정부, 개인, 조합 및 기타 조직은 흔히 그들의 힘을 이용해 사람에게 불공정한 임금, 가격, 재무 조건, 근무 여건이나 근로 시간 등을 강요한다. 은행을 털거나 고용주의 것을 훔치거나 상점에서 들치기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불공정하거나 비윤리적인 관행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서 그들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는 일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동참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이런 관행을 거부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심지어 경력에 큰 제한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할 소명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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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째 계명은 자기 평판에 대한 권리의 중요성을 다룬다.[1] 이것은 사람의 증언에 따라 인생 행로가 갈리는 법정 현장에서 뚜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이다. 사법 판정과 소송 과정 속에 담겨진 힘은 실로 대단하다. 그런 힘을 가지고 노는 것은 사회의 윤리 체계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며 결과적으로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 계명이 다음 사실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사회적 실상이 신빙성 있게 묘사되며 알려진다고 대중이 확신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적 삶은 실현 불가능하다.”[2]

 

   법정 용어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이 아홉째 계명은 사실상 삶의 모든 국면에 해당하는 다양한 상황에 적용된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잘못 대변하는 말이나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은 통찰도 제시했다.

 

정치인은 네거티브(부정적) 선거 운동으로 경쟁자를 음해하려고 애쓴다. 가십 기고가들은 중상모략으로 돈을 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거실에서 멋진 커피잔에 곁들인 다과를 먹으면서 남을 비방하고 교묘하게 악평을 일삼는다. 사실상의 법정 행위가 정당한 사법적 절차 없이 이렇게 도처에서 자행된다. 비난이 가해지고 소문이 전파되며 비방, 위증 및 명예훼손 발언이 여과 없이 유포된다. 여기에는 증거도 없고 변론도 없다. 크리스천은 이런 대화에 가담하거나 그런 대화를 용인하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당사자 본인이 없는 상황에서 절대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기도 요청이나 목회자적 관심에 의한 것이라 해도, 동기가 무엇이든 어떤 형태로든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단순히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크리스천에게는 소문을 멈추게 하고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을 막아야 할 의무도 있다.[3]

 

   이 계명은 직장에서 하는 잡담도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직장 밖의 개인 영역에서 파괴력을 발휘하는 잡담도 그 자체로 악하지만, 한 직원이 다른 직원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경우에는 어떤가? 당사자가 현장에 없는 상황에서 진실이 규명될 수 있을까? 근무 태도를 평가하는 것은 또 어떤가? 공정하고 정확한 평가가 이뤄지려면 어떤 안전장치가 필요한가? 대체로 마케팅이나 광고 산업은 단체와 개인이 섞인 공공영역에서 전개된다. 이때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장 돋보이게 하려고 할 경우, 편견이 배제된 객관적 시각으로 경쟁자 제품의 하자나 약점을 어느 정도까지 지적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당신이나 이웃의 권리만큼 다른 회사의 권리도 똑같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세계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이 계명의 적용 범위는 엄청나게 넓다. 인식이 종종 실재를 대신하는 현 세상에서, 효과적인 언변의 수사학이 참된 진실과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이 계명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 평가가 정확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만큼은 속일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을지라도 옳은 일을 하는 게 좋다. 이 명령을 들으면서 우리는, 듣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항상 진실을 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도 이 계명을 이해해야 한다. 이 주제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Genesis to Leviticus, The New Interpreter’s Bible, 431쪽.

같은 책, 848쪽.

같은 책, 432쪽.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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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와 탐심은 삶의 여러 현장에서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직위와 급여와 권력’이 주요 요소가 되는 직장에서도 그렇다. 우리가 직장에서 성과, 진급 또는 보상을 원하는 데는 정당한 이유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기는 그런 이유 중 하나가 될 수 없으며 사회적 지위를 탐해 집착적으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유가 될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면서까지 우리 업적을 과대 포장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이를 예방하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일관된 자세로 다른 사람이 성취한 결과를 알아주고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타인의 성공을 기뻐해 주거나 최소한 알아주기라도 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탐심의 명맥을 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자신의 성공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성공도 이뤄질 수 있게끔 노력한다면, 탐심은 협력으로, 시기는 화합으로 바뀔 것이다.

 

   레이스 앤더슨(Leith Anderson)은 미네소타주 에덴 프레리 우드데일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이런 말을 했다. “담임목사로서 저는 주머니 속에 동전을 무한히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교회 임원이 내놓은 좋은 방안이나 자원봉사자의 수고를 칭찬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할 때마다, 제 주머니 속 동전이 그들 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리더인 제가 할 일은 그거죠. 동전을 제 주머니로부터 그들의 주머니로 넣어 주는 것.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건넬 칭찬을 저도 한쪽에서 거들어 주는 것입니다.”[1]

 

2004년 10월 2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롯에서 레이스 앤더슨(Leith Anderson)과 나눈 대화를 윌리엄 메신저(William Messenger)가 기록했다.

“언약서”에 나오는 판례법(출21:1-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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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계명으로부터 판례법전이 파생되어 그 뒤에 이어진다. 세부 원칙을 열거하는 대신, 이 판례법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통상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사건의 경우에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을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예를 보여 주는데, 사건 사례는 모두 이스라엘 사람이 직면했던 상황을 나타낸다. 실제로 모세오경(토라) 전체 가운데서 특정 율법을 상황적 이야기와 권고로부터 따로 구별해 떼어 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판례법의 네 가지 부분에서 우리는 현대 직장에 특별히 적용 가능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다.

 

 

노예 생활 혹은 계약 봉사 (출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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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비록 히브리인을 애굽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키기는 하셨지만, 노예 생활이 전면적으로 성경시대에 금지된 것은 아니었다. 노예가 공동체의 완전한 일원으로 인정되거나(창 17:12) 일반 사람과 동일한 휴식 시간과 휴일을 누리면서(출 23:12; 신 5:14-15; 12:12)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출 21:7, 26-27) 상황 하에서 노예제도가 허용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노예 생활이 영구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궁핍 속에서 고생하는 사람의 자발적이면서도 일시적인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출 21:2). 노예 학대가 발생했을 경우 주인은 즉각 그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 줘야 했다(출 21:26-27). 따라서 히브리인의 노예제도는 개인 간에 이루어지던 장기 근로 계약에 가까웠고 현대 사람이 정의하는 그런 영구적인 인종 · 계층 · 종족 착취 같은 것과는 사뭇 달랐다.

 

   또한 일반적으로 노예끼리의 결혼을 금지했던 미국 노예제도와는 대조적으로, 출애굽기 규정은 노예 가족의 온전한 보존을 지향했다. “만일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들었으면 그의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출 21:3). 출애굽기 21장 7-11절에 나오는 여성 노예 규정은 노예 주인과 노예 사이의 전반적인 평등도 강조했다. 여성 노예를 사들이는 사실상 유일한 목적은 그 여성 노예를 주인 혹은 주인 아들의 아내로 삼고자 할 때뿐이었다(출 21:8-9). 여성 노예는 소유주와 사회적으로 동등한 사람이 됐으며, 그 구매 행위는 혼인 지참금을 주는 것과 흡사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이 여성은 해당 규정(출 21:9)에 따라 “아내”로 불리기도 했다. 예컨대, 만일 소유주가 여성 노예를 통상적인 아내가 갖는 모든 권리를 지닌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으면, 그는 그녀를 자유롭게 풀어 줘야 했다. “여자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출 21:11). 이런 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유주나 소유주 아들을 위한 게 아니라 종종 남성 노예를 위해 소녀나 성인 여성이 노예로 구매되는 경우가 있었고, 이는 복잡한 상황을 낳기도 했다(출 21:4).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노예는 노예로 있는 기간 동안 단지 하나의 ‘재산’처럼 취급을 받았다. 규정이야 어떻든 간에, 실제로는 혹사를 방지하는 보호체계가 다소 미흡했을 것이고, 학대는 분명 일어났을 것이다. 이방인에게서 태어난 노예에 대한 안전장치는 히브리인 종을 보호하는 것처럼 엄격하지 않았고(레 25:44-46),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성에 대한 보호는 남성을 보호하는 것보다 약했다.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 및 경제 체제를 몰고 온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사람이 공의와 긍휼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가르칠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냉정한 마음으로 선진국은 물론 세계 전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팽배해 있는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두세 개 직장에서 쉼 없이 일하는 노동자, 권력자에 의한 학대와 무분별한 권력 행사, 불법 사업가와 부패한 관료 및 정치적 줄을 대고 있는 사장에 의한 노동력 착취. 오늘날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규정의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일하는 노동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이스라엘을 노예 생활의 착취로부터 보호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하나님은 오늘날 그와 동일하거나 그보다 더 고약한 억압을 당하는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무엇하기를 바라시겠는가?

 

상업적 배상 (출21:18-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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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의론적인 율법은 특히 손해나 상해를 배상하는 책임 등 상업과 직접 연관된 여러 위법행위에 대한 형벌을 규정하고 있다. 소위 복수법(lex talionis)이 레위기 24장 17-21절과 신명기 19장 16-21절에도 나오는데, 이 개념의 핵심은 보복이다.[1] 글자 그대로, 이 율법은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해는 상해로, 타박상은 타박상으로 갚으라고 말한다(출 21:23-25). 이 목록은 눈에 띄게 구체적이다. 이스라엘 재판관이 판결을 내릴 때, 그들이 정말로 이런 방식으로 벌을 내렸을 것이라고 우리가 믿을 수 있을까? 타인의 과실로 화상을 입은 고소인이 상대방도 동일하게 화상 당하는 것을 보고 정말 흡족해 했을까?

 

   흥미롭게도 출애굽기의 이 부분은 그런 식으로 복수법이 적용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지 않는다. 대신 다투는 중 다른 사람에게 심한 상해를 입힌 자가 피해자의 시간 손실을 배상하고 치료비를 물어 주는 내용이 나온다(출 21:18-19). 피해자가 대중 앞에서 가해자를 똑같이 자신이 당한 것만큼 채찍질을 가하는 장면은 본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복수법은 중한 범죄에 대한 표준 형벌이 아니라 청구 가능한 손해 배상의 최대 상한선이었던 듯하다. 고든 웬함(Gordan J. Wenham)은 이렇게 말했다. “구약 시대에는 경찰이나 변호사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기소와 처벌은 피해자와 그 가족이 시행해야 했다. 따라서 피해자 측이 복수법에 따른 권리를 다 행사하지 않고 합의를 하거나 심지어는 범죄자를 완전히 용서하기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2]

 

   이런 복수법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볼 때 야만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알렉 모타이어(Alec Motyer)는 이렇게 말한다. “양을 한 마리 훔친 사람을 영국이 법에 따라 교수형에 처한 적이 있는데, 이는 ‘눈에는 눈으로’라는 원칙이 너무 가혹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원칙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3]

 

   이 복수법 해석의 문제는 성경이 말한 내용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실천하는 것과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적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 문제에 대해 성경적 해법을 얻는 것은 늘 딱 떨어지지 않는다. 크리스천은 성숙함과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특히 행악자에게 복수법을 적용치 말고 그것을 ‘앞지르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춰 볼 때 그것은 더욱 자명해진다(마 5:38-42). 그분이 개인 윤리 영역에서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 원칙을 사업 현장에도 적용하기를 바라셨을까? 이 원칙이 작은 죄에는 잘 적용되지만 큰 죄에는 잘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악을 품는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을 우리가 방어해 주고 보호해 줘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잠 31:9).

 

   도둑질의 보응과 형벌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은 두 가지 목적을 달성했다. 첫째, 이 가르침은 도둑에게 피해자를 원상태로 회복시키거나 그가 입은 손실을 충분히 보상할 책임이 있음을 알게 해 줬다. 둘째, 이 가르침은 도둑으로 하여금 피해자에게 준 만큼의 고통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를 처벌하고 교육하는 기능을 했다. 이런 가르침은 오늘날 민법과 형법의 기독교적 기반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사법 체계는 국가가 정한 특정 규례와 지침에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재판관에게는 판결을 내리고 형을 선고할 일말의 재량권도 있다. 법정 밖에서 이뤄지는 분쟁과 관련해 변호사는 의뢰인의 합의를 중재한다. 최근에는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이라 불리는 게 생겨났는데, 이는 피해를 원상 복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능한 범위 내에서 범죄자까지도 사회의 떳떳한 일원으로 회복시키고자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런 접근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은 여기서 우리가 논하는 주제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우리는 성경이 이 점과 관련해 현대 사법 체계에 제시할 게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업 현장에서, 리더는 일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직원 사이에서 때때로 중재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 옳고 그름을 판정한 결과는 분쟁에 휘말린 직원뿐만 아니라 조직 전체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앞으로 직원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정의하는 선례의 본보기가 될 수도 있다. 사건이 회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클 수도 있다. 더욱이 만일 크리스천 중재인으로서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보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갖고 있는 믿음의 진정성에 대한 결론도 그 중재자를 보며 내릴 것이다. 우리는 분명 모든 상황을 다 예상하며 삶을 살 수는 없다(출애굽기도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의 교훈을 적용하며 살기를 기대하신다는 걸 알고 있고, 어떻게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는지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Genesis to Leviticus, The New Interpreter’s Bible, 433쪽. 비록 인간 생명을 토라만큼 우선하고 있진 않지만, 이 원칙은 함무라비 법전(BC 1850-1750)에도 나타나 있다.

Wenham, A Guide to the Pentateuch, Exploring the Old Testament, 73쪽.

J. A. Motyer, The Message of Exodus: The Days of Our Pilgrimage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5), 240쪽.

가난한 자를 위한 생산 기회 (출22:21-27 및 23: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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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이방인, 과부, 고아에게 도움이 되는 규정 속에 나타나 있다(출 22:21-22). 이 세 집단의 공통점은 먹고살 자원이 되는 땅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개 가난했고 이방인, 과부, 고아는 구약에서 “가난한 사람”이 언급될 때마다 주요 대상이 된다. 신명기에서, 이 세 부류의 취약계층에게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공의(신 10:18; 27:19)와 음식(신 24:19-22)을 베풀 것을 이스라엘에게 요구했다. 이 문제에 대한 판례법은 이사야 1장 17절과 23절, 10장 1-2절, 예레미야 5장 28절, 7장 5-7절, 22장 3절, 에스겔 22장 6-7절, 스가랴 7장 8-10절, 말라기 3장 5절에도 나와 있다.

 

   이런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확한 후 떨어져 있는 것을 “줍고” 묵힌 밭에서 자생하는 모든 작물을 추수할 수 있게끔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 이삭줍기 관행은 곡식을 그냥 나눠 주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자력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땅 주인은 7년에 한 해씩 밭, 포도원, 과수원을 묵혀야 했고, 가난한 사람은 거기서 자생하는 것은 무엇이든 수확할 수 있었다(출 23:10-11). 경작 중인 밭에서도 주인은 작물을 말끔히 거두어 가지 않고 떨어진 곡식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이 수확할 수 있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레 19:9-10). 예를 들어, 감람원이나 포도원은 매 계절 단 한 번씩만 수확이 허용됐다(신 24:20). 그 후에는 가난한 사람이 남아 있는 품질이 열등한 작물이나 늦게 여문 것을 거둬 갈 수 있었다. 이런 관습은 친절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했지만 공의로운 행위이기도 했다. 룻기서에서는 이삭줍기를 둘러싼 배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삭줍기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 8장의 “룻 2:17-23” 부분을 보라.

  

   오늘날에도 농업 종사자, 음식 제조자와 유통업자가 가난한 사람과 나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나이 든 사람이 취약계층에 속해 있거나 가난할 가능성이 크기에 식당이 노인에게 음식 값을 할인해 주는 통상적 전통은 이스라엘의 이런 율법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최소한 선진국에서는, 더는 생계를 농업에 의존하지 않는다. 현대 산업 및 기술 사회에서는,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이 성공적인 생산의 기반이 된다. 주식거래소, 조립 공장이나 프로그램 설계실 바닥에는 주워 담을 수 있는 ‘이삭’ 같은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취약계층 근로자에게 생산적인 일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정부 보조 유무와 관계없이 회사는 정신 및 신체 장애가 있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 불우한 환경의 사람, 사회로 복귀한 재소자 및 통상적인 직업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훈련과 지원만 있다면 생산적인 사회의 일꾼으로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그 외의 사람은 일할 기회보다는 금전적 기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또다시 언급하지만, 현대 상황은 너무 복잡해 우리가 성경적 율법을 단순하게 적용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율법의 근간이 되는 가치는 공공복지, 개인 자선,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제도를 고안하고 집행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근로자 고용을 책임지거나 고용 정책을 입안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는 크리스천도 많을 것이다. 출애굽기는 취약계층의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의 필수적인 부분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비록 꼭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옛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했다. 우리가 입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주변의 궁핍한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창조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명백하고도 강력한 동기가 된다.

 

 

대여와 담보 (출22: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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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부류의 판례법은 금전 및 담보를 다룬다(출 22:25-27). 두 가지 상황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사례에서는 금전 대부를 필요로 하는 궁핍한 하나님의 백성이 등장한다. 이때 대부는 통상적 표준에 따라서 이뤄져서는 안 된다. “이자” 없이 대부가 이뤄져야 한다. 히브리어 ‘neshek[네쉑]’(어떤 상황에서는 ‘물어뜯다’ 의미로 사용된다)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받아 왔다. 네쉑이 금전적 대부 사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합리적인 이자에 ‘추가’된 과도한, 즉 불공평한 이자를 의미했는가? 아니면 그것은 모든 이자를 총칭하는 말이었는가? 본문에는 이 문제를 명확하게 밝혀 줄 내용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가 옳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네쉑은 언제나 비참하거나 취약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는 것과 관련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이자가 큰 부담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1]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사람을 영구적인 재정 악순환 속으로 몰아넣는 이자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진노를 살 게 분명했다. 이 율법이 사업에 좋았는지 나빴는지 여부는 여기에서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렇게 말했다. “이 율법은 그런 관습의 경제적 실용성을 논의하지 않는다. 율법은 (취약계층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명확하게 강조할 뿐이며 세부 사항은 공동체가 알아서 해결할 것을 기대한다.”[2]

 

   또 하나의 상황은 어떤 사람이 자기의 유일한 외투를 담보로 내놓고 대부를 신청한 경우다. 그 외투는 밤이 되면 본래 옷 주인에게로 되돌려져야 한다. 그래서 옷 주인은 건강을 해치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어야 한다(출 22:26-27). 그렇다면 이 경우, 부채가 다 청산될 때까지 채권자는 아침마다 옷 주인을 방문해 그 외투 회수하기를 무한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채무자가 처해 있는 명백히 궁핍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채권자라면 그런 의미 없는 짓을 반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아예 담보를 잡지 않는 길을 택할 것이다.

 

   이런 규정은 오늘날 은행 체계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보호 시스템과 구호 체계에 더 잘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개발도상국의 경우 신용 대부를 받을 길이 없는 가난한 사람의 필요에 맞게 고안된 이자율과 담보 정책에 따라 마이크로파이낸스(microfinance, 소액금융)가 개발됐다. 그 목표는 적어도 1970년대 초기에는 대부업자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게 아니라 궁핍한 사람이 가난을 탈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지속 가능한 대부기관을 유지하는 것에 있었다. 어쨌든 마이크로파이낸스가 대출 기관의 지속 가능한 대부 수익 및 연체율, 채무자가 지불할 수 있는 이자율 및 제한 없는 담보 조건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갈등 속에 놓이는 것은 사실이다.[3]

 

   십계명에 이어 구체적인 규정이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그분의 교훈을 실천으로 옮겨 진실로 어려운 사람을 도움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능동적인 행동이 따르지 않는 동정적인 관심은 가난한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도 야고보가 말했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다. 이 율법이 고대 이스라엘에 어떻게 적용됐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많은 점을 배운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이 율법은 실례에 지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테렌스 프레다임(Terence Fretheim)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율법을 적용하는 것에는 개방된 가능성의 측면이 있다. 출애굽기 본문은 불의가 판치는 삶의 모든 영역에 이 구절을 확대할 것을 듣는 자와 독자 모두에게 권고한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율법의 범위를 넘어설 것을 우리에게 권고하는 것이다.”[4]

 

   출애굽기를 유심히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왜 이 율법을 지켜야 하며 왜 우리가 새로운 상황에 그것을 적용하도록 노력해야 하는지 말해 주시는 세 가지 이유를 본다.[5] 첫째, 이스라엘인은 애굽에서 이방인으로서 억압을 당했다(출 22:21; 23:9). 이 역사 이야기를 복습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역할만을 하지 않는다. 그 기억은 우리가 대접받고 싶어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게 만드는 동기를 우리에게 불어넣는다(마 7:12). 둘째, 우리가 나서지 못하거나 나서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억압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하신다(출 22:22-24). 셋째,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출 22:31; 레 19:2).

 

 

 

Robin Wakely, “#5967 NSHK,”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Old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ed. Willem A. VanGemeren (Grand Rapids: Zondervan, 1997), 3:185-189쪽.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Genesis to Leviticus, The New Interpreter’s Bible, 868쪽.

Rob Moll, “Christian Microfinance Stays on a Mission,” Christianity Today, http://www.christianitytoday.com/ct/2011/may/stayingonmission.html.

Terence E. Fretheim, Exodus: Interpretation: A Bible Commentary for Teaching and Preaching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1), 248쪽.

Motyer, The Message of Exodus: The Days of Our Pilgrimage, 241쪽.

성막 건축 (출25:1-4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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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막 건축은 그것의 예배(禮拜)적 요소 때문에 일의 신학의 범위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현대인인 우리는 그렇게 구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출애굽기 당시의 이스라엘은 삶을 거룩한 삶과 세속적 삶으로 구분해 다루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예배 활동과 예배 외의 활동을 우리가 구분 짓는다 해도, 출애굽기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게다가 성막 안에서 발생한 일을 우리가 오늘날 기준에 따른 ‘교회 일’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시대 성막 건축과 현대 교회 건물 건축 간에 유사한 점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 부분은 모두 유례없는 특정 시설을 확립하는 내용을 다룬다. 비록 성막 일은 해를 거듭하며 이어졌고 나중에는 성전에 속하게 됐지만, 성막 건축물 하나하나는 그 설계상 중심적이고 독립적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인이 거주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복제할 수 있는 모형 같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영토 도처에서 건축되고 운영되던 지방 신당은 이스라엘의 영적 건강에 해가 됐다.

 

   마지막으로, 성막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허가된 공식 예배 장소를 제공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처음부터 분명하게 드러났다.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출 25:8). 오늘날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 1:14). 예수님의 일을 통해 신자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게 됐고 이제는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의 성전이 됐다(고전 3:16).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일과 관련해 두 가지 주장을 펼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건축가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신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성막에 관한 긴 부분은 하나님의 계명(출 25:1-31:11)과 이스라엘의 반응(출 35:4-40:33)을 따라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로부터 무엇을 원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가셨다. 하나님은 성막 자체를 설계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출 25:9). 여기서 “모양”(pattern)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tabnith)는 건물 및 그와 연관된 품목을 가리킨다. 오늘날 건축가는 청사진을 사용해 건축을 감독하는데, 이스라엘에도 어떤 원형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1] 성전은 종종 하늘의 성소를 지상에 복제한 장소로 묘사되었다(사 6:1-8). 성령을 통해 다윗 왕은 성전 ‘모양’을 얻었고 그것을 다윗으로부터 건네받은 아들 솔로몬은 그것을 바탕으로 성전을 건축했다(대상 28:11-12, 19).

 

   이어지는 구절을 보건대, 하나님의 설계 디자인은 정교하고 절묘했음이 분명하다. 건축에 앞서 하나님의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은 이스라엘의 성소뿐 아니라 신약의 크리스천 공동체에서도 지켜졌다(고전 3:5-18). 장차 나타날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만이 설계할 수 있는 도시인 것이다(계 21:10-27). 건축가로서 하나님의 경력은 그 건물에 대한 위엄도 한층 덧입혀 준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자기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속에 하나님의 설계가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이어서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우리가 메워야 할 세부 내용도 있지만, 성령은 그것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

 

   브살렐과 오홀리압 및 성막 일꾼 모두를 둘러싼 이야기는 일과 관련된 용어로 꽉 차 있다(출 31:1-11; 35:30-36:5).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 일과 관련해서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과 후람 왕의 역할 모델로서도 중요했다.[2] 그들이 다뤘던 일련의 기술에는 금, 은, 동을 가지고 하는 금속세공뿐만 아니라 돌과 나무를 가지고 하는 석공과 목공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의상 제작에는 양털을 구입해 실을 잣고 물들이고 직조하는 일과 의상을 설계, 제조 및 재단하는 일과 수를 넣는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장인은 관유와 향료를 준비하는 일까지도 맡았을 것이다. 이 모든 실무를 하나로 묶는 것은 일꾼에게 성령을 부으시는 하나님이셨다. 본문에 나오는 “능력”과 “기능”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hokhmah)는 대개 “지혜”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말의 사용과 판단을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그것은 명백히 직접 하는 실제의 일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넓은 신학적 의미에서 영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출 28:3; 31:3, 6; 35:26, 31, 35; 36:1-2).

 

   이 구절이 보여 주는 광범위한 건축 활동은 고대 근동 지역 건축에 수반되던 것을 설명해 주지만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영감을 부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원하셨고 그들을 축복하셨을 것이라고 무난하게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본문이 꼭 있어야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종류의 일을 축복하심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그 외의 작업은 어떻게 봐야 할까? 약간 농담조로 얘기를 한다면, 만일 성막에 에어컨 장치가 필요했다면 하나님은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도 좋은 계획을 세워 두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로버트 뱅크스(Robert Banks)는 지혜로운 통찰을 나눈다. “성경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현대적] 건축 과정과 비교해 너무 좁게 바라보거나 특정 직업만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비교 해석해서는 안 된다. 가끔 맞을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3] 하나님이 어떤 유형의 노동은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어떤 노동은 하찮게 여기셨다는 것이 여기 논점이 아니다. 특정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기 위해 성경이 모든 고상한 직업을 일일이 나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창조된 게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듯이(막 2:27), 건물과 도시도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평평한 지붕 주변에는 보호 난간이 설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고대의 법(신 22:8)은 사람에게 진정 이로우며 사람을 안전하게 해 줄 책임 있는 건축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반영한다. 하나님이 성막 일꾼에게 성령을 부으신 것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특정 목적을 가지고 특정 프로젝트에 관심을 기울이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한 일을 우리의 서툰 손에 내맡기지 않으신다. 직업의 다양한 수만큼 그분이 우리를 준비시키는 방식도 다양할 수 있다. 그분의 신실하심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이 되는 영적 은사를 나눠 주실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세상 끝나는 날까지 해 나갈 것이다(고전 1:4-9). 그분은 우리에게 온갖 은혜를 넘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하실 것이다(고후 9:8).

 

Victor Hurowitz, “The Priestly Account of Building the Tabernacle,”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105 (1985): 22. ‘tabnith’라는 단어는 우상(신 4:16-18; 시 106:20; 사 44:13), 제단의 복제품(수 22:28; 왕하 16:10), 손 모양(겔 8:3, 10; 10:8)의 3차원적 형상을 그려 보여 주고 있다.

Raymond B. Dillard, 2 Chronicles,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98), 4-5쪽.

Robert Banks, God the Worker: Journeys into the Mind, Heart, and Imagination of God (Eugene, OR: Wipf & Stock, 2008), 349쪽.

출애굽기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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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억압적 노동에서 구원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스러운 자유로 나아가게 하시는 모습을 본다. 그것은 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삶의 모든 일을 통해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길 수 있게 하는 자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복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삶과 노동으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를 위한 처소를 제공해,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