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서신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목회서신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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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서신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에게 쓴 글이다. 그러나 목회서신 내용의 상당수는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물론 비교회적 일에 적용할 때는 교회와 다른 일터나 기관들과의 유사점과 차이점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 둘 다 (일반적으로는) 구조와 목적을 가진 자발적 기관이다. 둘다 궁극적으로는 같은 주님이 통치하신다. 둘 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으로 구성된다. 둘 다 때로는 심각하고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지만, 다음 세대에 맞게 적응하고 다음 세대를 지탱하도록 설계됐다. 나중에 이런 유사성들을 더 깊이 논의하겠지만, 각각에 상당수의 성경적 원칙을 적용해 볼 수 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고대부터 목회서신으로 함께 묶었다. 이 서신들은 지도자들의 자격과 성장 그리고 지도자로 세워짐, 구성원들을 돌보고 보상하며 훈련하기 위한 조직상의 구조, 개인적이고 기관적인 목표 설정과 실행 등을 요약해 준다. 그것은 기관들의, 특히 교회의 훌륭한 통치와 효율성 및 성장과 관련이 있다.

 

   이 세 서신의 핵심 주제는 디모데전서 3장 14-15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내가 곧 그대에게 가기를 바라면서도, 이 편지로 이런 지시를 써 보내는 것은, 만일 내가 늦어지더라도,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서 사람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그대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가족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새번역).


   그러나 거기에는 차이점도 분명히 있다. 교회는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하나님 나라를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준비시키는 고유한 사명이 있다. 하나님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에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다른 기관들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사업), 회원들을 보호하고(노동조합), 어린이와 어른을 교육시키고(학교와 대학), 국방, 사법, 행정 같은 필요를 채워 주는 것(정부) 등 각각 맡은 사명이 있다. 그런 기관들은 헌장이나 헌법 등에 의해 조직(기업이나 국가)으로 제정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른 기관들이 교회보다 열등하다는 말을 하려고 이런 차이점들을 짚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 각각의 기관은 종류별로 각기 고유한 사명이 있으므로 존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서신은 교회 공동체의 특별한 역할을 도드라지게 보여 주면서, 비교회적 일터에서의 관계들을 형성하고 유지해 가는 데 필요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한다. 비록 목회서신이 기본적으로 기관들과 관련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정이나 단일 소유지나 그와 유사한 여러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배제시키지는 않는다. 지금부터 이 장에서는 ‘일터’라는 용어를 ‘교회가 아닌 일터’의 뜻으로만 사용하겠다.

 

디모데전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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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목회서신은 각각 사도 바울이 동역자 중 한 사람에게 조언하는 편지 형식을 띤다.[1] 디모데전서는 바울이 자신의 젊은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인데, 편지에서 그는 교회 안에서의 사역은 어떻게 해야 하고, 거짓 교사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지시한다. 그러나 이 서신의 마지막 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 6:21)는 에베소에 있는 모든 교회가 이 편지를 읽어 모든 사람이 디모데에게 한 바울의 조언에서 유익을 얻게 할 의도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 서신들이 공통 주제들을 같이 나누므로 우리도 서로 연관된 본문들을 함께 묶어서 다룰 것이다. 목회서신에 나타나는 순서대로 그 주제들을 탐색해 보자.

이 논의는 목회서신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이 서신들을 일에 적용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아니다. 저자에 대한 보다 면밀한 논의는 William D. Mounce, Pastoral Epistles,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2000), lxxxiii–cxxix을 보라. 윌리엄 D. 마운스, 《WBC 목회서신》(솔로몬 역간).

조직의 건강한 사명과 문화를 형성하는 데 앞장서라 (딤전1:1-11, 18-20; 3: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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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에서는 믿음과 행동, 또는 가르침과 행함은 매우 긴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건강한 가르침은 경건에 이르게 하는 반면, 거짓 가르침은 기껏해야 비생산적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저주를 부른다. 서신 서두부터 바울은 디모데에게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라고 권면한다(딤전 1:3). 왜냐하면 그런 다른 교훈(가르침)은 신화와 족보와 더불어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딤전 1:4).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건전한 교리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그가 하는 말들은 일터에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CQI(Continuous Quality Improvement; 지속적 품질 개선)의 창설자 가운데 한 사람인 에드워즈 데밍(W. Edwards Deming)은 자신의 방법을 ‘심오한 지식 시스템’이라 불렀다. 그는 “일단 개인이 심오한 지식 시스템을 이해하고 나면, 그는 그 원리들을 다른 사람들과 맺는 모든 대인관계에 적용할 것이다. 그렇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이 내린 결정을 판단하고, 자신이 속한 조직의 변혁을 이끌기 위한 근거를 갖춘다.”[1] 어떤 기관에서든 진실을 가장 깊이 있게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루크 티머시 존슨(Luke Timothy Johnson)은 디모데전서 1장 4절을 좀 더 솔직하게 “믿음으로 알게 된 것으로서,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번역했다.[2] 교회는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정돈되어야 한다. 이에 반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기관들 역시 하나님의 방식으로 정돈돼야 할까?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는 사회가 ‘자연’에 따라 정돈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만약 자연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면, 그때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정돈하시는 방식이 사회가 정돈되는 방식에 그대로 반영되어야만 한다. 존슨이 관찰한 대로 “하나님의 뜻과 사회 구조 사이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은 없다. ‘oikos[오이코스]’(집) 조직과 ‘ekkl?sia[에클레시아]’(교회) 조직의 구조들은 서로 연속적일 뿐 아니라, 둘다 세상 속에서 해 나가시는 시혜(행정)의 일부다.” [3] 일터, 집 그리고 교회는 모두 유일한 하나의 창조 질서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모든 일터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면, 창조에서의 두드러진 주제는 인간이 선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에 우리는 죄에 빠졌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려고 오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중심 진리다. 그러므로 일꾼들은 죄를 짓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을 경험하고, 하나님께서 항상 의도하셨던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선, 죄, 구속에 관한 진리를 조직 관습에 반영해야 한다. 만약 사람이 단지 선하기만 할 뿐 죄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면 교회도 직장도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가 없다. 회계는 감사를 받아야 하며, 의도적으로 남을 못살게 구는 것은 중단되어야 한다. 고객 봉사에 대해서는 보상이 따라야 한다. 목사들, 근로자들과 경영진도 감독을 받아야 한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도 일터도 실수를 하거나 죄를 짓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해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구속의 제안을 그리고 변혁을 일어나게 하기 위한 실질적 도움을 제시하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서는 영적이며 영원한 구속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교회 아닌 일터에서는 그 조직의 사명과 관련된 보다 더 제한된 구속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당장 해고하지 않고 업무 향상 계획, 재훈련, 다른 직위로 재배치, 멘토링과 근로자 지원 프로그램을 발동하는 것은, 특정 직장들, 특히 서구의 직장에서 실행하는 구속 사례들이다. 실제로 어떤 프로그램을 적용할지는 당연히 조직의 형태, 그 조직의 사명, 주변 문화적 · 법적 · 경제적 환경, 그 외 다른 요소들에 의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만약 직장을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하길 바라시는지 알고 싶다면(딤전 3:15), 성경에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진실은 사랑에 이르게 하지만(딤전 1:5), 거짓 교리들은 “변론”(딤전 1:4), “언쟁”(딤전 6:4) 그리고 영적인 파선에(딤전1:19) 이르게 한다. 그분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지식은 성경학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성경 이해 역시 오로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 아니다. 크리스천 근로자들도 성경 지식이 있어야 하며, 그래야 그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조직 내에서 그들의 지위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다 리더의 역할이 주어져 있다. 경영진은 대개 한 조직의 전략과 구조를 짤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갖는다. 모든 근로자들에게는 좋은 관계를 형성해 가고, 탁월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이 능력을 개발하도록 돕고, 자신들이 일하는 그룹의 문화를 형성할 기회가 계속해서 주어진다.

 

  이렇게 일터에서는 누구나 다 나름의 영향을 끼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조언했다. 다른 사람들이 디모데의 지위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해서 디모데 스스로 변화 도모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딤전 4:12).


   이런 실상은 오늘날의 일터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많은 기관들은 “사명선언문”과 “핵심 가치” 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세속적 기관에서 교회의 ‘신조’나 ‘교리’와 같은 의미다. 교회와 같이 기관들은 문화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근로자들이 무엇을 믿거나, 또는 한 기관이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양식이 달라진다. 일터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참여하는 조직의 가치와 사명과 문화를 형성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W. Edwards Deming, The New Economics  for Industry, Government, Education, 2nd ed. (Cambridge: MIT Press, 2000), 92쪽.

Luke Timothy Johnson, The First and Second Letters  to Timothy: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The Anchor Yale Bible Com  mentaries (New York: Doubleday 2001), 149쪽.

Johnson, The First and Second Letters to Timothy, 149쪽

일터에도 기도와 화평과 질서가 필요하다 (딤전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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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이 장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딤전 2:1-2)라는 권면으로 시작한다. 이 기도의 목적은 크리스천들이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딤전 2:2). 추측할 수 있듯이, 1세기 이 통치자들은 크리스천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거나 파멸시킬 만한 권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바울은 크리스천들에게 그들의 국가 통치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한다. 세속적인 일에 참여할 때 크리스천들이 활용할 수 있는 첫 번째 도구가 기도, 화평 그리고 질서다.


   다시 한 번 바울의 지시들이 하나님의 한 분 되심,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보편적 구속, 그리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딤전 2:3-7)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주시며 세상의 구주시다. 그분의 영역에는 모든 일터가 포함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일하는 특정한 일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특히 ‘고위직에 있는’ 감독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에게 과도한 관심을 끌지 않으면서, 그리고 권위에 계속 대들지 않으면서, 다른 말로 하면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딤전 2:2) 일을 하면서 자신들의 일을 수행해야 한다. 크리스천들이 화평케 하고 순종하는 이유는 두려워서나, 사람을 기쁘게 하려거나, 사회적 통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대한 건강한 감사와, 다른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게 하려는’(딤전 2:4) 열망 때문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이것은 일터에서 사명을 정하고 핵심 가치를 만드는 첨병이 되어야하는 우리의 의무와 상충되는가? 어떤 크리스천들은 동성애자의 복지 혜택, 낙태나 피임에 대한 건강 보험 배제, 조합 결성, 종교적 상징들의 표시 등과 같은 논란이 되는 여러 쟁점들을 다루는 직무를 수행해야 할 수있다. 이 경우 불가피하게 마찰을 빚으면서 사명과 핵심 가치들을 제정하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만약 그 일을 성공한다면, 이런 접근법은 그기관의 사명이나 가치 제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종종 다른 사람들의 일을 방해할 수도 있고, 평화를 깨뜨릴 수도 있으며, 감독자들의 권위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조직의 문화를 좀 더 개인적으로, 깊이 있게 존중하는 자세로 참여하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건강 혜택을 두고 다투는 것보다는 동료들과의 우정에 더 투자하고, 인생의 중대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상담해 주면서 지혜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연설의 자유와 다른 사람을 골탕 먹이는 것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리는 대신, 맡은 일을 탁월하게 해내 직장 동료들이 도대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뭐냐고 물어볼 정도의 사람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크리스마스 실내 장식같이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논쟁하는 대신, 직무 수행, 고객 서비스 그리고 제품 디자인 같은 자신들의 일터에서 하는 핵심 활동들을 향상시키도록 도와줌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다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조언이 모순이 아니라 균형 있는 조언임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변 사람들과 평화롭게 협력하면서 살라. 사람들을 섬김으로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라. 바로 그것이 왕 중의 왕께서 하신 일이다.

고결성과 대인관계 능력, 리더십의 핵심이다(딤전3:1-13; 딛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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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 3장 1-7절과 디도서 1장 5-9절에서는 장로와 감독들의 자질을 규정한다.[1]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 8-13절은 (어쩌면 여자 집사를 포함해) 집사들의 자질을 설명한다. 다양한 자질들을 제시해 놓았는데, 도덕적 고결성과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는 능력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장로들의 자질로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명시해 놓기는 했지만(딤전3:2; 딛 1:9), 전체적으로 볼 때 다른 자질만큼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 목록에서 가정과 교회의 연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한 가정을 잘 다스리는 것을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경험으로 간주한다(딤전 3:4-5, 12, 15; 딛 3:6). 뒤이어 나오는 부분에서 이런 연결점을 더 많이 살펴볼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직마다 사명이 다르다. 그러므로 각 기관마다 필요로 하는 리더십의 자질도 다르다. 일터에서의 일반적인 자질 기준으로 이 본문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일 수 있다. 예를 들면, 신중함이나 진지함은 관광 가이드에게는 조금 맞지 않는 자질일 수 있다. 그러나 도덕적 고결성과 대인관계 능력을 우선하는 것은 어떤가? 관광 가이드의 경우 ‘책망할 것이 없음’, ‘청결한 양심’, ‘모든 일에 충성스러움’(신뢰할 수 있음)과 같은 도덕적 자질과, ‘나그네를 대접함’, ‘다투지 않음’ 그리고 ‘절제’와 같은 대인관계 자질들은 어떤 특정 기술이나 전문성보다 중요하다.


   이것이 교회 리더십에 해당한다면, 이를 일터에서의 리더십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최근에 유명한 회사나 정부 지도자들이 보여 준 도덕성과 인간관계의 실패 사례들이 널리 공론화되면서 고결성, 인품 그리고 대인관계를 그 어느 때보다 일터에서 더욱더 중요시한다. 교회 못지않게 일터에서도 리더들을 제대로 키우고 선발하는 것이 절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과 경력을 준비하면서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과연 윤리적 인품과 대인관계 능력을 함양하기 위해 애를 쓰는가?


   흥미롭게도 초대 교회 많은 지도자들은 직장에서도 또한 지도자들이었다. 루디아는 자주 염색이라는 고가의 상품을 팔았다(행 16:14, 40). 도르가는 의류 제작자였다(행 9:26-41).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바울과 동업자가 된 천막 제조업자(가죽 노동자)였다(행 18:2-3). 이 지도자들은 이미 일터에서 효율성을 검증받은 후에 교회에서도 아주 효과적으로 일했으며, 공동체에서 널리 존경을 받았다. 어쩌면 교회나 일, 또는 민간 부분에서의 리더십에서 기본이 되는 자질들에는 서로 상당한 공통점이 있을 수있다.

 “장로”(헬라어 Presbyteros)와 “감독”(episkopos)이라는 용어를 다룬 간략한 논의는 Philip H. Towner, 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2006), 246–247쪽을 보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은 선하다 (딤전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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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는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확증해주며, 이 신적인 질서는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의 집과 교회 안에서 그리고 (본문의 논리를 확장시킨다면) 일터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함축하고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한 글은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 나온다. 디모데전서 4장 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것이 선하다’고 선언하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창세기 1장 31절 말씀의 선명한 메아리다.

 

   이 서신의 문맥 안에 드러난 창조에 대한 이 같은 긍정적 칭찬은, 혼인과 어떤 음식물을 금지하던 거짓 교사들(딤전 4:3)과 싸울 때 사용됐다. 바울은 이런 것은 감사함으로 받아야만 하는 것들이라고 확실하게 주장함으로써(딤전 4:3-4) 그들의 가르침에 반격을 가한다. 음식은 (그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뭐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딤전 4:5). 이것은 선하지 않게 창조된 어떤 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선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도리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창조주와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 인정함으로써, 크리스천은 하나님이 지으신 음식 등을 거룩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따로 구별해 두게 된다는 뜻이다. 크리스천으로서 먹거나 마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것이 가능하다(고전 10:31).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이런 확증은, 우리가 일할 때 사용하는 모든 것은 본래 악하게 지음받은 것이 없으며, 죄와 연계된 것만 아니라면 창조와 연계된 어떤 일이든 크리스천이 행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유전을 퍼 올리고, 컴퓨터 칩을 설계하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달 위를 걷고, 휴대폰을 수리하고, 나무를 심거나 곡식을 수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직업이나 재료 가운데 어떤 것도 본래 악한 것은 없다. 어떤 직업이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때의 사람들이 분투한 만큼 금욕주의 때문에 크게 분투하지 않는 현대 서구인들에게는 이것이 직관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4장 4절은 물질계를 중립적 · 도덕적 가치를 가진것으로 보거나, 또는 예를 들면, 기술 같은 것을 본래 악한 것으로 보지 말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얘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모든 것을 받아 누리면서, 즐거워하고, 자유롭게 일하며 살아가게 해 준다.

직장을 가족같이? (딤전5:1-6:2; 딛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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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 4장 6?16절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준 구체적인 지시들로 가득하다. 그 가운데 경건 훈련이 전문성 개발의 필수 구성 요소임을 기억해 두면 크리스천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딤전 4:8). 그러나 여기서는 디모데전서 5장 1절 - 6장 2절로 시작하는 다음 부분으로 재빨리 넘어가고자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부분은 디도서 2장 1-10절과 비슷하다. 교회 구성원이 된다고 해서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착취해서는 안 되며(딤전 5:16; 6:2), 도리어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야한다. 이것은 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별히 이 두 본문은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상전과 종이 마땅히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디모데전서에서 이 부분의 첫 두 구절은 아주 중요하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딤전 5:1, 새번역).

 

   이 명령은 (디모데전서 5장 4절과 8절에서 밝히듯) 가족과 교회 간의 구별을 없애라는 게 아니라, 친절함, 불쌍히 여김, 충성심, 정결함 같은 특징들이 우리의 가장 친밀한 가족관계를 특징짓듯이 하나님의 가족인 교회 안에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또한 그와 똑같아야 한다고 시사해 준다.


   ‘온전한 깨끗함’(절대적 정결)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가정이나 교회에서 성적 경계선을 어기는 일이 일어나며, 일터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일터에서의 성적 학대는 큰 문제없이, 심지어 학대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알아 채지도 못한 채 넘어가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대접을 받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부적절하고 학대하는 말과 행동을 발견한다면 담대히 지적함으로써 일터에 축복을 안겨 줄 수 있다.


   일터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은가? 그 답은 ‘아니다’일 수도 있고, ‘그렇다’일 수도 있다. 〈The Office〉(미국 NBC에서 방영 중인 인기 코미디 TV 시리즈다. 원작은 영국 BBC에서 방영된 동명의 시트콤이다.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랜턴에 위치한 가상의 제지회사 사원들의 일상생활을 그린다 - 옮긴이 주)에서 너무도 재미있게 묘사한 여러 이유에서도 볼 수 있듯 진짜 가족은 아니다. 일터에서의 결속력은 어떤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지의 여부에 따라 조건적이다. 가족과 달리, 관리자의 인정을 더 이상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은 해고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고용이 “어쨌든 간에 당신이 가질 자격이 없는 어떤 것”은 아니다.[1] 직장을 가족인 양 가장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며, 심지어는 학대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 용어를 가족들이 마땅히 서로서로에게 보여 주어야하는 존경, 헌신, 열린 소통 및 돌봄 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일터는 가정과 같이 될 수 있다. 만약 크리스천들이 동료들을 그런 식으로 대하는 사람들로 알려진다면, 그것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구속적인 섬김의 큰 표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멘토링을 해 주는 것은 숙련된 일꾼들이 신참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대단히 소중한 섬김이다. 이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하는 투자와 비슷하다. 그리고 학대와 착취에서 가족들을 지키듯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가 직장 사람들을 위해서도 똑같이 행동하도록 강권한다. 가족(교회) 구성원들에게 하는 것보다 일터에 있는 사람들을 덜 존중하거나 덜 배려해도 된다고 생각해 그들을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일에 참여해서는 절대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직장 동료를 포함해 모든 이웃을 마치 우리 가족이나 우리 자신같이 사랑해야 한다.

 Robert Frost, “The Death of the Hired Man,” 125행, North of Boston (New York: Henry Holt, 1915).

경건과 돈(딤전6:3-1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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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의 마지막 부분에는 부유한 크리스천들을 향한 강력한 권면과 경고가 가득하다. (우리는 디모데가 처한 특수한 상황과 직결된 내용인 11-16절, 20절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 있는 당부는 건너뛸 것이다.) 디모데전서 6장 3-10절과 17-19절에는 일터에 직접적으로 적용한 내용이 나온다. 이 본문들을 읽으면서 흔히 저지를 수 있는 두 가지 실수가 있는데, 이를 피해야 한다.


   첫째, 이 단락은 경건한 사람이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한다고(딤전 6:5) 바울이 적었다. 그는 경건이 반드시 이생에서 재정적 이익에 이르게 해 주어야 한다거나, 또는 경건을 추구하는 목적이 당장의 재정적 이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 상태를 책망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인해 잘못됐다.

 

  1.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성도들을 이생에서 물질적 부족이라는 고난을 당하게 하시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함이 없는 재물”(딤전6:17)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2. 혹 누군가가 이생에서 엄청난 부를 얻는다 해도 이익을 보는 순간은 아주 짧다. 그 이유는 존 파이퍼가 말한 대로 “영구차 뒤에는 짐칸이 없기 때문이다”(딤전 6:7).[1]
  3. 부를 추구하다 보면 악과 배교, 파멸과 멸망(딤전 6:9-10)에 이르고 만다.

 

   그러나 바울은 인생의 기본적 필요에 만족하는 자세와 경건이 결합되면(딤전 6:6, 8) 그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고 자기 글을 읽는 이들을 격려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딤전 6:17)이시다. 바울은 의로운 부자들에게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라고 명령했지 (딤전 6:18), 가진 것들을 다 팔아 가난한 자가 되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행을 넉넉히 함으로써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딤전 6:19). 다시 말하면, 현세에서 더 많은 돈을 갖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의 생명과 복으로 이익을 이해한다면, 그 경건은 곧 진정한 이익의 수단이 된다. 디모데전서 6장 18-19절에서 바울이 하는 권면은 예수님께서 하신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19:21; 눅 12:33)라는 가르침과 매우 유사하다.


   우리가 피해야 할 두 번째 실수는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정죄의 의미를 오해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크리스천은 절대로 임금 인상이나 승진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거나, 크리스천 사업가는 이윤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군가 더 많은 돈을 원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이유는 선하고 어떤 이유는 악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돈이 제공하는 지위나 호화로운 생활, 또는 자아 만족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원하는 경우, 이는 정말로 이 성경 구절이 책망하는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가족을 적절히 부양하려는 목적이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들에 더 많이 기부하려는 목적이나, 혹은 공동체를 번창하게 할 물품과 봉사를 창출하는 데 투자할 목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기 원한다면 이는 악한 일이 아니다.[2] 돈을 사랑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해서, 일터에서 성공하거나 이윤을 얻고자 하는 모든 소원까지 반대하는 건 아니다.

 John Piper, Desiring God: Meditations of a Christian Hedonist, rev. and exp. ed. (Colorado Springs: Multnomah, 2003), 188쪽. 존 파이퍼, 《하나님을 기뻐하라》(생명의말씀사 역간).

 이 주장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Wayne Grudem, Business  for  the Glory of God: The Bible’s Teaching on the Moral Goodness of Business (Wheaton: Crossway, 2003)를 보라.

디모데후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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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전서와 마찬가지로 디모데후서도 사도 바울이 자신의 어린 동역자에게 보낸 서신으로, 어쩌면 바울이 쓴 마지막 서신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디모데후서가 훨씬 개인적이다. 디모데후서를 통해 바울은 디모데를 격려하며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끝까지 충성하라는 엄숙한 부탁을 한다. 그러나 디모데후서가 보존되어 기독교의 정경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에서 이 개인적 서신에 본래의 특정한 상황적 맥락을 뛰어넘는 중요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의 일은 유산을 남긴다 (딤후1:1-2:13; 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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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후서의 놀라운 주제 가운데 하나는 세대를 잇는 신앙심이다. 서신 서두에서 바울은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디모데에게 전해져 내려온 신앙을 상기시킨다(딤후 1:5). 이런 전달 과정은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의 충성스런 증거와 모범이 디모데를 믿음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수단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해석은 서신 후반부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격려한 말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딤후 3:14-15).

 

   또한 바울은 구세대의 일원으로서 디모데가 따라야 할 본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너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 1:13), 또 너는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받음”을 보고 알고 있다(딤후 3:10-11)고 바울은 썼다.


   디모데는 이전 세대들에게서 교훈을 얻었겠지만,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디모데가 자신이 배운 것을 다음 세대에게 똑같이 전하기를 바란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이 주제는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 자신의 직장과 산업 분야에 과연 어떤 종류의 유산을 남길 것인지 생각해 보라는 과제를 던져 준다. 긍정적인 유산을 남기기 위한 첫걸음은 당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감당하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후임자를 훈련시켜 언젠가 당신의 자리를 대신할 그 사람이 업무를 잘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직장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언제나 배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겸손해야 하며, 인내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만큼 마음이 긍휼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크리스천 직장인은 자신이 말과 행동으로 구속의 유산을 남겼는지 자문해야만 한다.


   디모데후서의 세대적 특성은 단지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영리와 비영리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회사들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법인회사 형태가 탄생한 이유는 개별 구성원보다 오래 존속하여 세대 교체기마다 새로 조직하는 혼란을 없애기 위해서다. 재무감사의 가장 기본이되는 원칙 가운데 하나가 회사가 반드시 ‘계속기업’(going concern)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회사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의미다.[1]


   만약 어느 한 조직의 급여 관행이나, 부채 부담, 위기 관리, 재정 관리, 품질 관리 또는 어떤 다른 요소가 그 조직의 존속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면, 그 조직 리더들은 이를 변화시킬 책임이 있다. 회사가 망할 지경에 처했어도 절대 회사를 합병하거나 분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때는 한 조직의 사명이 완수되었거나, 또는 그 조직의 목적이 쓸모없게 되었거나, 또는 더 이상 중대한 가치를 제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물론 그 조직을 해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조직 리더들에게는 회사가 사라진 후에도 회사의 유산을 사회에 남겨 줄 책임이 있다. 예를 들면, 연금 기금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아 은퇴한 직원들을 빈곤 위험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회사들이 적지 않다.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들은 이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기관들은 자신들의 운영이 후대에 책임을 떠넘기지는 않는지 성경적 관점 그리고 공공의 관점에서 돌아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디모데후서 역시 조직들을 환경 · 사회적 측면에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성공을 위해 지속 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원을 채취하거나,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다음 세대를 생각하고 위해야 하는 세대 간의 원칙을 어기는 것이다. 회사가 의존하는 학력을 갖춘 노동력, 거래 수단, 평화로운 사회, 그리고 다른 여러 요소들을 제공하는 교육적 · 문화적 · 법적 · 기타 사회적 투자를 의미하는 공동체의 ‘사회자본’ 고갈 역시 영원할 수 없다. 회사는 납세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정부의 환경적 · 사회적 프로그램들을 지원함으로써 환경적 · 사회적 자본에 투자한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자발적으로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했더라면, 어쩌면 환경적 · 사회적 자본에 조금 더 안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AG ISA (NZ) 570 The Auditor-General’s Statement On Going Concern, The Auditor-General’s Auditing Standards, Controller and Auditor-General, http://www.oag.govt.nz.

말을 주의하라(딤후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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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부분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위해 일터에 그대로 적용 가능한 여러 가지 상담을 해 준다. 바울은 그에게 “말다툼”(딤후 2:14)과 ‘망령된 말’(딤후 2:16)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딤후 2:23)을 피하라고 거듭 경고한다. 이것은 비록 노골적으로 악하지는 않더라도 쉬는 시간에 하는 모든 말들이다 유익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크리스천 일꾼들에게 잘 상기시켜 준다.


   우리의 대화와 대화 방식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우리가하는 말들이 화목과 구속의 대사로 쓰이는가?(고후 5:20) 도움이 안 되는 대화는 악성 종양같이 퍼져 나가고(딤후 2:17), 멸망과 경건치 않음에 이르게 하고(딤후 2:14, 16), 다툼을 야기할 수 있다(딤후 2:23). 야고보도 말이 지닌 잠재적 파괴력과 관련해 유사한 경고를 했다(약 3:2-12).


   실제로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은, 예수님이 주제가 아닐 때 동료들에게 어떤 식으로 말하느냐는 것이다. 세 마디의 험담이 삼천 마디의 찬양과 경건을 파괴시킬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말로 계속해서 격려하고, 감사하고, 존경하고, 돌봄을 증명해 보이는 크리스천들은, 비록 그들이 말로 예수님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강력한 증인이 된다. ‘겸손한 자세’와 ‘판단하는 태도를 엄격하게 피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의를 따르라’(딤후 2:22)라고 권면한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개인의 문제를 일터로 가져온다. 알코올 의존증과 약물 남용은 일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인터넷을 사용하는 근로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주중 근무 시간에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방문하고 …… 하루 중 포르노 사이트 방문자 수가 가장 많은 시간대도 근무 시간이다.”[1]

 

​  크리스천 일꾼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또 다른 권면은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하라는 것이다(딤후 2:24-25). 크리스천 일꾼들은 이 서신에서 바울이 그리는 디모데의 모습 상당 부분을 힘써 닮아야 한다.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바울은 그의 지지망이 되어 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회사들은 일꾼들을 위해 어떤 종류의 지지망을 제공할 수 있을까?

 Anna Kuchment, “Report: More Employees Visting Porn Sites At Work,” Newsweek (November 28, 2008), http://www.newsweek.com/report-more-employees-visiting-porn-sites-work-85229.

지금이 말세의 고통의 때다(딤후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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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4-5장은 주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당부와, 자신의 생애에 대한 회고, 그리고 구체적인 지시와 인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직장생활에 간접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디모데후서 3장 1-9절 하나만 더 살펴볼 생각이다.


   첫 구절은 그 단락 전체의 주제를 제시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다’(딤후 3:1). 그러나 그 뒤에 나오는 설명은 디모데가 이미 이런 말세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딤후 3:2, 5) 분명히 한다. 신약에서는 그 “말세”가 이미 우리 모두에게 임해 있다고 분명하고도 일관되게 증언한다(행2:17; 히 1:2; 약 5:3; 벧후 3:3) 크리스천들은 이 말세와 관련된 역경과 고난에 대비해야 한다. 뒤에 가서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라고 경고한다.


   이것을 들으면, 힘든 환경 속에 있지만 1세기의 (혹은 오늘날 세계 여러 많은 지역의) 사회 현실보다는 훨씬 덜 위협적인 환경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은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크리스천인 우리는 일에서 부당한 대우나 불의, 편견, 박해나 조롱당할 것을 예상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 것들을 거의 경험하지 않고 있다면 마땅히 기뻐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호의적인 근무 조건에 취해 잠들어 버려서는 안 된다. 직장에서 그리스도께 충실하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뒤에서 우리를 조롱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결과가 나타날 날이 곧 올 것이다.  실제로 많은 근로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비윤리적으로 행동하라는 압력을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단지 “경건의 모양”(딤후 3:5)만 있는지, 아니면 그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지 더욱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 이상을 소유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서 계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딤후 4:17).

디도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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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도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는 목회서신의 마지막 편지로, 디모데전후서와 유사점이 상당히 많다(딛 1:5-9와 딤전 3:1-13을 함께, 딛 2:1-10과 딤전 5:1-6:2를 함께 읽으라). 이 서신에서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 둔 것은 “남은 일을 정리하게 하기 위함”(딛 1:5)이었다고 디도에게 상기시켜 준다. 디모데처럼 디도도 거짓 교사들과 싸워야 했고, 올바른 리더십을 세워야했으며, 사람들이 선행에 헌신하도록 확실히 해 두어야만 했다(딛 3:8, 1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행 (딛2:11-3:11).

 

   우리는 이미 이 글 앞부분에서 디도서 1장 5-9절에 묘사한 리더의 자질들과 디도서 2장 1-10절에 묘사한 교회 가족의 관계들을 살펴보았다. 바울은 이 서신의 나머지 상당 부분을 할애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선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이 비전은 분명히 크리스천 일꾼들에게 적용되는 바, 곧, 교인들은 자신이 고용된 그 자리에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선행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행은 이 세상 피조물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한다. 그것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 깨어진 세상을 구속해 내고, 사람과 사람끼리, 그리고 사람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한다. 이런 유형의 헌신은, 단순히 돈이나 업무 평가를 위해 자신의 일을 잘 해내야겠다는 열정이상으로 크리스천 일꾼을 이끌어 간다. 그러나 선행에 대한 이런 경건한 열정을 가지려면, 무엇이 이런 선행들을 가능하게 하며 왜 크리스천이 선행을 하는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디도서에 이 두 가지 의문을 충족시키는 답이 있다.


   먼저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딛 3:5)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딛 3:5) 기억해야 한다. 일터든, 가정이든, 다른 어디서든, 우리가 하는 행위 덕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을 노력으로 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도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도록’(딛 2:12)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전부를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동시에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셨다(딛2:14).

 

  디도서 3장 3-7절은 회심과 칭의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을 다음 명령의 토대로 신자들에게 훌륭하게 설명한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1-2).  구원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순종하고 선한 일을 하는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경건한 삶을 살도록 도우신다. 매일 이런 실상을 기억한다면, 보다 유능한 그리스도의 종들이요, 피조 세계의 청지기들이 되지않을까?


   둘째, 디도서의 이 부분은 선행의 목적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선행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의 자리에 열매를 맺게 하려는 의도를 가진다(딛 3:14). 이것은 땅을 경작하고 그것을 생육하게 하라는 명령을(창 2:5, 15) 다시금 귀담아 듣게 해 준다.

 

  선행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섬기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이나 사람들로부터 호의나 호감을 얻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 선행은 믿음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다. 그것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께 보이는 반응이다.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 (딛 3:7). 그 결과 우리는 선한 일에 힘쓰게 되고,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딛 3:8).

 

  바울은 연설을 하거나, 전도지를 나눠 주거나, 또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행동이라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선행을 얘기한다. 일터에서라면 새로 들어온 신입 직원들을 성경 공부에 초청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일을 잘 배우도록 도와주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딛 2:5), 그리고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딛 2:8) 경건한 행동을 장려한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크리스천들에게 경건한 행동을 장려하는 이유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다(딛 2:10). 올바른 교리는 선행을 이끌어 내고, 선행은 다시 하나님의 진리에 다른 사람들이 더 이끌리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천 일꾼들이 자신의 일에서 선행(그들이 입으로 선포하는 진리를 직접 실천하는 일)에 헌신하는 이유다. 이것은 크리스천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을 완화시켜 주고, 또한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호소하는 강력한 증언이 될 수있다.


   디도서 전체에 걸쳐 바울은 선행을 위한 실천적인 지침을 준다. 대부분은 직장에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자기 조직의 가치나 훌륭한 관행을 찾고 있는 거의 모든 직장은 디도서를 그냥 잘라서 갖다 붙이는 것 같은 간단한 방법으로도 멋지게 시작할 수 있다. 바울의 조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존중

  •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딛3:1)
  • 남들을 잘 대접하라(딛1:8)
  • 친절하게 대하라(딛2:5, 현대인의성경)
  •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 관한 분란에 개입하지 말라(딛 3:9).
  •  고집대로 하거나 급히 화내거나 자기 의견만 내세우지 말라(딛 1:7, 8).
  •  관리와 감독의 수단으로 폭력을 쓰지 말라(딛 1:7). 대신 온유함을 나타내라(딛 3:2).

 

절제

  • 절제하라(딛1:8, 2:6)
  •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라(딛 1:7).
  • 술의 종이 되지 말라(딛 1:7; 2:3).
  • 악의와 투기를 피하라(딛 3:3).​

 

고결함(Integrity)

  •  고결하게 행하라(딛 1:8).
  •  선행을 사랑하라(딛 1:8).
  •  직장 상사에게 순종하라(딛 2:9).
  •  국가의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딛 3:1).
  •  타인의 물건을 존중하고(딛 2:10), 당신이 맡아서 관리하는 책무를 지고 있을 때는 그들을 위해 충성을 다해 그것을 관리하라(딛 2:5).

 

권위와 책임

  •  당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행사하라(딛 2:15).
  •  신중하라(딛 1:8).
  •  거역하는 자들, 게으른 말쟁이들, 속이는 자들, 중상모략하고 의도적으로 개인적 분열을 조장하는 자들의 입을 막으라(딛 1:10; 2:3; 3:10). 그런 사람들을 엄하게 꾸짖으라(딛 1:13).
  •  이와 같은 미덕으로써 지도력을 발휘해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키라 (딛 2:2-10).

 

   충분히 적용 가능한 이런 점들을 단순한 교리나 신조로 바꾸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컨대 ‘신중하라’는 말은 분석만 하고 위험을 무릅쓸 시간은 절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온유함을 나타내라’는 것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를 위한 고대 편지에서 현대 일터에 적용할 점들이다. 디도서에 나오는 이런 항목들은 교회와 일터 양쪽의 훌륭한 리더십에 딱 들어맞는 원칙과 가치들을 제공해 준다.

 

 

목회서신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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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서신은 하나님 집에서의 조직과 관계와 리더십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의 집은 가족에서 시작해 교회로 확장되고, 그리고 종종 일터에도 적용된다. 가족과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께서 일 또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화평과 번성, 그리고 안정을 가져다주는 교회를 위한 질서를 세우셨다. 똑같은, 또는 대단히 유사한 질서가 다른 일터에도 동일한 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


   어떤 기관이든지 첫째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창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일터든 업무 효과를 내려면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위에 기초를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인 인간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인식해야 한다. 더불어 세상 속에서 한결같은 하나님의 은혜, 세상과 그 사람들을 구속하시려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명을 알고, 하나님의 완벽한 질서 회복에 대한 약속의 진실을 깨달아야 한다.


   구속은 오로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로만 일어나며, 이런 이유로 우리가 온갖 종류의 선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또 선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더욱 열매 맺는 곳으로 변화시켜 가고,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게 된다.


   목회서신은 리더십과 훌륭한 대인관계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조직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진리의 시사점을 제시한다. 교회와 다른 기관들과의 차이점만 염두에 둔다면, 여기서 고려하는 내용은 교회 밖 직장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또 항상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목회서신을 직장에 적용하지 않는다 해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터에 적용한다면 이 서신에서 발견한 진리들은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방식을 나타낼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딤전 6:16) 분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