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어려움, 일의 아름다움(아가 1:1-8)

아티클 / 성경 주석

   아가서는 한 여인이 그녀의 연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말하면서 시작한다. 여인은 자신의 피부가 검어진 까닭은 오빠들이 가족의 포도원에서 그녀에게 일을 시킨 탓이라고 밝힌다(아 1:6). 이 연가에서 노동에 관한 구절은 불과 여섯 군데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인종적인 이유가 아닌 경제적 이유 때문에 피부가 검은 사람들을 깔보았다. 검은 피부는 본디 농부 계급에 속한다는 것과 햇볕 아래에서 일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흰 피부는 귀족 계급이고, 따라서 (그을지 않은)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는 여성의 아름다움의 표시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여인의 힘든 노동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소시키지 않았다(아 1:5).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1] 더구나 그녀의 직업은 자신의 장래를 준비시켜 주니, 때가 되면 그녀는 자기 소유의 포도원을 가꾸게 될 것이다(아 8:12). 자기 손으로 일하는 여성은 귀족은 아닐지언정 아름답고, 또 칭찬받을 만하다.

 

   일이라든지 일하는 사람들의 사랑스러움은 흔히 미(美)의 기준에서 밀려난다. 오늘날의 문화에도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고대 그리스 사회는, 일을 미의 원수로 간주했다. 그러나 성경은, 일이 하나의 천부적미를 지닌다고 본다. 솔로몬은 자신을 위해 “가마”를 만들었고, 아가서는 그 솜씨가 매우 아름답다고 찬양한다. 말 그대로 사랑의 수고였기 때문이다(아 3:10). 그는 그 가마의 아름다움을 사랑의 용도에 사용하는데, 자기 연인을 태우고 결혼식장으로 가는(아 3:11) 그 일은 이미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다. 일은 단지 교통 수단, 수확물, 혹은 급여를 위한 수단일 뿐 아니라, 심미적 창의성을 발현해 내는 근원이기도 하다. 그리고 크리스천들은 배우자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땅히 칭찬해야 한다. 

 

 

가정과 일터가 분리된 현대 사회(아가서 1:7-8)

 

   여인은 최고의 남자로 여겨지는 자기 연인을 찾아다닌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를 찾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곳은 그가 양 떼를 돌보는 일터라고 일러준다. 게다가 그의 일터는 자신의 연인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가능한 곳이었다.

 

   하지만 현대는 어떠한가? 일하는 시간은 고용주를 위한 시간이고, 일하지 않는 시간은 가족에게 속한 시간이라는 개념은 오늘날의 일터에는 없다. 여러 면에서 가족과의 상호 작용이 불가능하다. 극단적인 예로, 트럭 운전사들은 운전하면서 자기 가족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서는 안 되며, 법정에서 최후 변론을 하는 변호사가 느닷없이 찾아온 아내를 만나서는 안 된다. 이렇게 볼 때 19세기 공장 시스템과 함께 일어났던, 일과 가정의 분리가 여러 산업 분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하는 현상을 전적으로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겠다.  

 

“I am black and beautiful”(나는 검고 아름다우니)이라는 NRSV의 번역은, 그녀의 구릿빛 피부가 햇볕에 탄 탓 이라기보다 인종 때문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