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에서의 이스라엘 (출1:1–13:16)

아티클 / 성경 주석

   이스라엘에 대한 애굽인들의 학대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하는 배경과 동력을 제공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광야로 들어 가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초점은 애굽의 경제 체제에서 억압받는 노동자로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인의 모습에 맞춰져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일을 행하셨다.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괴로워한 것은 통상적인 일 그 자체의 어려움보다는 그들의 일이 엄하고 가혹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셨지만 이는 그들에게 완전히 안락한 삶을 주신 것이 아니라 억 압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신 것이다.

 

 

가혹한 노예 노동에 시달리다 (출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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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굽이 이스라엘인에게 강요한 일은 그 동기가 악했으며 그 본질도 잔혹했다. 출애굽기의 처음은 애굽 땅에서 엄청나게 불어나고 번창한 이스라엘인의 수를 서술한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어울렸고(창 1:28; 9:1), 아브라함과 그의 선택된 후손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도 부합했다(창 17:6; 35:11; 47:27). 그들은 전 세계에 복의 통로가 될 민족이었다. 이전의 통치 체제에서 이스라엘은 애굽 땅에 거주하며 일할 수 있도록 왕에게 허락 받았다. 그러나 애굽의 새로운 왕은 이스라엘인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을 국가 안위의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기민하게’ 대하기로 결심했다(출 1:10). 실제로 이스라엘인이 역사적으로 그런 위협이 됐는지 여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어쨌든 중요한 건 바로의 파괴적인 두려움은 이스라엘인의 작업 환경을 열악하게 만들었고, 영아를 살해해 이스라엘인의 인구를 통제하려는 시도로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일이 사람에게 신체 및 정신적 부담을 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일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애굽에서의 상황이 처절했던 것은 노예 생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극도의 가혹함 때문이었다. 애굽 관리는 “엄했고”(befarekh - 출 1:13, 14) “괴로웠고”(marar - 출 1:14) “어렵고 가혹했다”(qasheh; 잔인하다 - 출 1:14; 6:9). 이스라엘은 “비참함”과 “고통”(출 3:7, NIV)과 “마음의 상함”(출 6:9) 가운데서 괴로워했다. 인간 존재의 목적과 기쁨의 주요 원천이 되어야 할 일(창 1:27-31; 2:15)이 가혹한 압제에 의해 비참한 것으로 변질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한 산파와 요게벳 (출1:1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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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혹한 대우를 받는 중에서도 이스라엘인은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켰으며 그 결과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창 1:28). 생육하고 번성한다는 것은 곧 자녀 출산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또한 산파의 수고와 연결되어 있었다. 산파의 역할은 성경뿐만 아니라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의 기록에서도 충분히 입증되어 있다. 산파는 여인의 출산을 도와주었으며 영아의 탯줄을 잘라 냈고 아기를 씻긴 후 부모에게 아이를 건네주는 일까지 맡았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히브리 여인이 낳은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출 1:15-17). 일반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에 대한 경외”(fear of the Lord) 및 이와 유사한 표현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YHWH - 히브리어)에 대한 건강하고 순종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은 애굽 왕이 그들에게 준 그 어떤 두려움보다 강했다. 그들의 용기는 그들의 일에서 우러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매일 돕고 보살피는 사람으로서 그들은 생명을 매우 가치 있게 여겼을 터이니, 설령 왕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살인이라는 건 생각할 수도 없지 않았겠는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출 6:20)도 불가능해 보이는 선택의 기로에서 독창적인 해법을 창안했다. 남자 아이를 비밀리에 성공적으로 출산한 기쁨도 잠시,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 강물로 떠내려 보내야만 했던 그녀의 고통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모세 이야기에 나오는 “상자”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성경에서 단 두 번, 즉 노아의 “방주”를 나타낼 때와 여기서 쓰였는데, 모세 이야기는 한 남자 아기를 구원하기 위해서만 아니라 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아가 모세와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피조물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면에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은 산파에게 보상해 주셨던 것처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에게도 호의를 베푸셨다. 그녀는 자기 아들 모세를 되찾아 그가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될 때까지 그를 키울 수 있었다. 자녀 출산과 양육이라는 거룩한 일은 복잡하고 힘들고 칭찬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잠 31:10-31).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무명의 여장부 요게벳이 경험했던 내적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 모세의 삶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가 어떻게 그들의 믿음을 행위로 옮겼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나중에 그들을 칭찬한다(히 11:23).

 

   출산과 양육이라는 일은 너무나 자주 경시된다. 특히 어머니들은 자녀 양육은 다른 일만큼 중요하거나 칭찬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법을 이야기하는 출애굽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첫 번째 내용은 자녀의 출산, 양육, 자녀를 보호하고 돕는 일의 비할 데 없는 중요성이다. 용기 있는 행위로 가득 찬 출애굽기에서 첫 번째 용감한 행위는 한 어머니와 가족, 산파가 한 남자 아이를 구한 것이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 (출2:1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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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는 히브리인이었지만 바로의 손자로 입양되어 애굽 왕족 가운데서 성장했다. 모세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했다. 그는 히브리 노동자를 때리는 애굽인의 행동을 보고 발끈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했다. 결국 바로에게 들켰고 모세는 시내 반도의 반대쪽, 즉 애굽으로부터 동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져 있는 미디안으로 피신해 목동이 됐다. 모세가 거기서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기간 동안 그는 결혼해 아들까지 두었다. 그 사이에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애굽 왕이 죽었고, 여호와는 억압받는 자기 백성의 호소를 들으셔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셨다(출 2:23-25). 이 ‘기억하셨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잊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곧 행동을 취하실 것을 나타낸 것이었다.[1]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고자 하셨다.

 

   하나님은 모세가 일하는 도중에 그를 부르셨다. 그 부르심은 여섯 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는데, 이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지도자와 예언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과 동일한 형태를 띤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소명 이야기를 살피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고찰하는 것은 특히 우리 직업 현장에 비춰볼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은 “떨기나무”가 불타는 곳에서 모세를 만나 그의 관심을 사로잡으셨다(출 3:2-5). 광야 같은 곳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 아니지만, 모세는 이 현상에 끌렸다. 모세는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언급이지 장소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둘째로, 여호와는 자신을 족장의 하나님으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서 그들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할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셨다(출 3:6-9). 셋째, 하나님은 바로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셨다(출 3:10). 넷째, 모세는 반대했다(출 3:11). 모세는 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강력한 계시를 그 순간에 받았지만, 그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이것이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분이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시며 확신을 주셨다(출 3:12a).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확증의 표징을 말씀하셨다(출 3:12b).

 

   이런 요소는 성경에 나오는 다수의 다른 부르심 속에서도 동일하게 등장한다. 예를 들면 기드온,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예수님의 몇몇 제자의 부르심 이야기에 나온다. 이것은 정해진 형태는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다른 소명 이야기는 상이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흔히 장기간에 걸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사 기드온(사사기)

선지자 이사야
(이사야)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

선지자 에스겔
(에스겔)

예수님의 제자들
(마태복음)

 대면

6:11b-12a

6:1-2

1:4

1:1-28a

28:16-17

 소개

6:12b-13

6:3-7

1:5a

1:28b-2:2

28:18

 명령

6:14

6:8-10

1:5b

2:3-5

28:19-20a

 반대

6:15

6:11a

1:6

-

-

 확신

6:16

6:11b-13

1:7-8

2:6-7

28:20b

 확증의 표징

6:17-21

 -

1:9-10

2:9-3:2

사도행전의 사건

 
 

 

   이런 부르심이 회중 가운데서 행해지는 제사장 직책이나 종교적인 직업에는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기드온은 군사 지도자였으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사회 비평가였고, 예수님은 왕(전통적인 의미의 왕은 아니었지만)이셨다. 많은 교회는 오늘날 “소명”(부르심, 콜링)이라는 용어를 종교 직책에 국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성경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물론 출애굽기에서도 그렇지 않았다. 모세도 아론이나 미리암처럼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정치가요 행정가였다.

 

Brevard S. Childs, Memory and Tradition in Israel (London: SCM Press, 1962).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역사 (출5:1-6:28)

목차로 돌아가기

   출애굽기에서 본질적 ‘일꾼’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 일의 본질과 의도는 모세의 일을 규정지었고 그것으로 하나님 백성의 일도 규정됐다. 하나님이 모세를 처음 부르셨을 때 이미 거기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에 따라 모세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보내라”(출 5:1)라고 말했다. 하지만 바로는 말로만 반발하지 않았다. 그는 이스라엘인을 이전보다 한층 가혹하게 다스리며 억압했다. 이야기의 끝 무렵에서는 이스라엘인조차도 돌아서서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출 5:20-21). 이런 위기의 순간에 이르자, 하나님은 그분의 전반적인 의도를 묻는 모세의 질문에 답하며 자신의 계획을 모세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셨다. 출애굽기 6장 2-8절에 나오는 내용은 애굽에서 억압받는 이스라엘 상황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일 전체를 망라하는 내용이기도 했다.[1]

 

   하나님 일의 범위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모든 크리스천에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오며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마 6:10)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도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business)이다. 그 뜻이 성취되려면, ‘종교적’ 일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하면 우리는 우리 일의 본질뿐 아니라 그 일을 해 나가는 하나님 방식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이 핵심 내용을 보다 더 잘 짚고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먼저 간단히 검토해 본 후에 어떻게 그것을 일의 신학과 연결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향한 모세의 비난 섞인 질문에 우선 확신의 대답을 주신 후에(출 5:22-6:1), 하나님은 보다 더 장황한 설명을 풀어 놓으셨는데, 그 설명의 처음과 끝에는 “나는 여호와이니라”(I am the Lord)라는 표현이 첨가된다(출 6:2, 8). 이 핵심 어구는 단락에 경계를 그어 주는 한편 메시지 자체에 매우 높은 중요성을 부여한다. 영어권 독자는 이 어구가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직분의 칭호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계시함과 더불어 그분이 ‘누구’신지를 나타낸다.[2] 하나님은 언약을 맺고 약속을 지키며 족장에게 나타난 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하려고 하는 일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미 말씀하신 바 있는 그분의 작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을 번성케 하며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그를 축복함으로써 지상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내리겠다는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한 것이었다(창 12:2-3).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이 네 가지 구속적 목적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갖가지 방식으로 재현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가장 큰 구속 사역 속에서도 발견된다.

 

   첫째는 구원 사역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출 6:6). 이 해방 사역에 필연적으로 내재된 것은 세계에는 여러 가지 억압이 존재한다는 엄연한 진실이다. 가끔 우리는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이런 활동을 묘사하는데, 지상에서 구출해 천국으로 옮긴다거나(물질계에서 영계로 옮겨지는 것도 포함) 단지 죄의 용서를 의미하는 것만으로 그것을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스라엘 하나님은 그들의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셔서, 말하자면 ‘그 땅 위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 왕 바로에게서 구원하시는 것을 보여 줬고, 나아가 메시아시며 왕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건져 내고 궁극적 악의 폭군인 마귀를 정복하실 여건의 토대까지도 마련했다(마 1:21; 12:28).

 

   둘째, 여호와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실 것이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출 6:7a).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한 것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살라고 구원하신 것도 아니고 동떨어진 개인으로 살라고 하신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셨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또 서로 신실한 언약을 맺고 살아가기 원하셨다. 고대의 모든 민족에게는 각자 ‘신’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규례, 명령, 율법을 전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아야 했다(신 26:17-18). 이런 가치와 행위가 그들과 하나님 및 서로 간의 거래와 관계에 (또 언약 밖의 사람과의 거래와 관계에) 깊이 스며들수록,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이스라엘 족속을 통해 점점 더 증거될 것이었다. 요컨대, 이것이 예수님이 세우실 ‘교회’, 즉 벽돌이나 돌로 지어진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만국으로부터 선택된 제자로 구성될 새로운 공동체의 배경이 됐다(마 16:18; 28:19).

 

   셋째, 여호와는 자기 백성과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형성해 나가실 것이다. “너희는, 내가 주 곧 너희를 이집트 사람의 강제노동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하나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출 6:7b, 새번역).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다른 모든 진술은 ‘나’라는 말로 시작되는데 여기서는 예외다. 여기서는 초점이 ‘너희’에게 있다(개역개정에서는 어법상 “나는”으로 문장이 시작하며 “너희가 알지라”가 처음이 아닌 끝에 나온다 - 옮긴이 주).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받은 자기 백성이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경험하기 원하셨다. 우리는 보통 ‘지식’을 ‘정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성경적 개념의 ‘지식’에는 이런 의미는 물론 타인을 인격적 관계로 알게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LORD”로 “알려 주지” 않았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YHWH”(여호와 - 창 13:4; 21:33)라는 거룩한 이름을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위 구절은, 아브라함과 그 일족이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며 민족 전체를 노예 생활에서 건져 낼 약속을 지키실 하나님 이름이 갖는 의의를 아직 개인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3] 궁극적으로 이 일은 예수님에 의해 이뤄졌는데,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관계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의미했다(마 1:23).

 

   넷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풍성한 삶을 경험하기 원하신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출 6:8).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이 “땅”을 단순히 우리가 사용하는 ‘영토’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그것은 약속과 예비의 땅이었다. 우리가 보통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그 땅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이 이상적인 조건에서 사는 곳, 즉 ‘풍성한 삶’을 상징했다.[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란 그분의 창조 세계 전체 즉, 물리적 환경, 인간, 문화, 경제 등 모든 것을 올바르게 회복하는 것임을 또다시 본다. 이것 역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영원한 생명을 경험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불러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기도 하다(마 5:5; 요 17:3).[5] 이는 요한계시록 21-22장에 나오는 새로운 예루살렘에서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기는 이후 전개될 성경 내용 전체에 대한 터를 닦는 것이다.

 

   우리 일을 통해서 오늘날 이 네 가지 구속적 목적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을 억압과 유해한 생활 환경에서 구원해 내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적인 위험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 정서적 고통을 줄이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일 수도 있다. 치유하는 일이란 사람을 하나하나 다루는 것인데, 정치적 해법은 그런 의미에서 사회 전체와 모든 부류의 사람에게 포괄적인 축복을 가져오기도 한다. 행정부와 사법부에서 일하는 사람은 악을 행하는 자를 제재하고 처벌하며 민중을 보호하고 피해자를 돌볼 목적으로 일해야 한다. 온 세계에 압제가 만연해 있기에, 사람을 구할 기회와 수단은 도처에 널려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목적(공동체 및 관계)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천국에서 평안과 참된 조화를 증진하는 하나님의 일은 지상에서 자비와 공의도 증대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 사람에게 역설한 내용의 요지였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와 화해하셨으며 나아가 우리에게 화해의 사명과 사역을 맡기셨다(고후 5:16-20). 하나님과 화해한 크리스천은 화해 사역을 감당할 동기와 수단을 갖게 된다. 복음 전파와 영성 개발의 일은 이런 분야의 한 축을 담당하며, 평화와 공의를 촉진하는 일은 대인관계적 차원을 다룬다. 그러나 사실상 그 두 가지는 뗄 수 없으므로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신성한 본질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는 세상의 빛이므로 우리 빛이 다른 사람 앞에서 빛나야 한다고 가르치셨다(마 5:14-16).

 

   지역사회 조직가, 청소년 사역자, 행사 기획자, 소셜 미디어 종사자, 부모와 가족 구성원의 경우처럼 공동체와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우리 일의 목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직업이 무엇이든 공동체와 대인관계의 구축은 우리 일의 구성 요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신입 사원을 환영하고 도와줄 때, 다른 사람의 고민거리에 관심을 가져 주고, 누군가를 시간 내서 만나고, 격려의 말을 건네고, 기념사진을 같이 찍고, 맛난 음식을 함께 나누며, 누군가를 대화에 끼워 주는 등 다른 이에게 우호적 행동을 보일 때, 우리는 이 두 가지 일의 목적을 매일매일 성취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일은 풍성한 삶을 증진시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 약속된 땅으로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정착해서 생활을 영위하며 발전할 수 있게 하셨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곳에서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찬가지로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도 이상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은 여전히 미완성인 상태다(히 4:1). 우리는 지금도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내려 주신 언약의 많은 부분은 사람들이 서로를 윤리적으로 대하는 것과 관련 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며 일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완성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교훈을 우리가 무시하는데 어떻게 우리(그리스도를 믿는 아브라함 후손)를 통해서 지상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J. H. Wright)가 말했듯이, “신구약 속의 하나님의 백성은 열국의 빛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경건한 백성의 변화된 삶 속에서 우선 빛이 나지 않는다면 열국에도 결코 빛이 비춰질 수 없는 노릇이다.”[6]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풍성한 삶’이란 절제되지 않은 이기적 번영이나 헤픈 소비가 가능한 그런 풍요가 아니다. 풍성한 삶이란 사랑과 공의와 자비가 가득한 삶, 즉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사는 삶이다.

Elmer Martens, God’s Design: A Focus on Old Testament Theology, 3rd ed. (Grand Rapids: Baker, 1994). 글의 이 섹션은 하나님의 의도를 네 부분으로 나눈 마르텐(Marten)이 만든 개요의 분석 뒤에 나온다.

영어성경들은 “LORD”(Lord와 구분해서 두 번째 글자부터 대문자로 작게 표시해서 쓴다)라는 단어를 써서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 ‘YHWH’를 나타내는 관례를 따른다

이 요점에 대한 구약 신학 문헌은 그 분석의 범위와 깊이에 있어 거의 무한하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중추적 중요성을 감안해 보면 이것은 이해할 만하다. 이 쟁점들에 대한 요약과 이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들을 제시하려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이 글에서 취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논의한 내용을 보려면 Bruce K. Waltke and Charles Yu, An Old Testament Theology: An Exegetical, Canonical, and Thematic Approach (Grand Rapids: Zondervan, 2007), 359-369쪽을 보라. 브루스 월키, 《구약 신학》(부흥과개혁사 역간).

Martens, God’s Design: A Focus on Old Testament Theology, 10쪽.

신약에서 땅에 대해 더 알고 싶거든 Waltke and Yu, An Old Testament Theology: An Exegetical, Canonical, and Thematic Approach, 558-587쪽을 보라. 브루스 월키, 《구약 신학》(부흥과개혁사 역간).

Christopher J. H. Wright, The Mission of God: Unlocking the Bible’s Grand Narrative (Downers Grove, IL: IVP Academic, 2006), 358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바로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다 (출7:1-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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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첫째 단계, 즉 구원을 시작하실 때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 보내어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라’라고 전하게 하셨다(출 7:2). 이 임무를 위해, 하나님은 공공 연설에 능한 아론의 타고난 재능을 사용하셨다(출 4:14; 7:1). 하나님은 또한 아론에게 애굽의 고위 관료를 능가하는 능력을 부여하셨다(출 7:10-12).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말과 행위가 둘 다 필요하다.

 

   바로는 모세에게서 하나님 뜻을 전달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을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듣지 않았다. 그러자 모세는 점차 심해지는 일련의 생태계 재앙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바로에게 선언했다(출 7:17-10:29). 이 재앙은 개인적인 불행을 초래했고, 애굽 땅과 사람들의 생산 역량에 심대한 타격을 줬다. 질병으로 가축이 죽어 나갔고(출 9:6) 작물이 파괴됐으며 숲이 황폐화됐다(출 9:25). 해충이 여러 생태계를 파멸했다(출 8:6, 24; 10:13-15). 출애굽기에 나오는 생태계 재앙은 바로의 폭정과 압제를 하나님이 벌하시는 것이었다. 현대 세계에서도, 계속되는 정치 억압은 생태계 재앙과 연관이 있다. 우리가 모세처럼 그의 권위를 빌려 이런 재앙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경제, 정치, 문화, 사회의 구원이 환경 구원과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각각의 경고가 실현될 때마다 바로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겠다고 공언하지만 재앙이 지나가고 나면 약속을 곧 뒤집었다. 결국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장자와 동물의 첫 새끼를 모두 죽이는 재앙이 임하게 하셨다(출 12:29-30). 바로가 그랬듯이(출 11:10) 노예제도의 끔찍한 영향은 연민, 정의, 심지어 자기 보호에 대해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이다.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놓아 주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떠나면서 애굽인의 보석, 은, 금, 의류를 약탈했는데(출 12:35-36) 이것은 합법적인 것으로 노예 생활의 대가를 돌려받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해방시킬 때, 하나님은 사람이 향유할 수 있는 노동의 열매를 회복해 주신다(사 65:21-22). 일과 작업 환경은 하나님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