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더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더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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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크리스천은 직장에서 자기 신앙이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크리스천으로서 공개적으로 간증하거나 행동하는 것은 대체로 그 범위가 제한적이다. 게다가 크리스천은 직장에서 성경의 기준에 맞는 윤리적 요구를 어기라는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압박을 느낄 수도 있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이러한 일부 제한은 당연할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크리스천에게는 일터가 낯설게 느껴진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환영받지 못하는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묘사한다. 이 책들은 건축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종에서 하나님의 가치와 계획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존재하는 환경에 맞서 일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최고 권력자에게 예상치 못한 도움을 받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은 극도로 힘든 상황과 결정에 직면하고, 이럴 때마다 이들이 항상 합의에 이르는 건 아니다.

 

   에스라는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해 성전을 재건하게 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통치자가 이들을 보호할 것이라고 신뢰해야 할지 심사숙고해야 했다. 그는 부패한 바사 제국의 경제 체계 내에서 재정 지원을 확보하는 동시에 경제적 정직성이라는 하나님의 율법에도 부합해야 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는데, 이 일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실용주의를 모두 필요로 했다. 느헤미야는 이타주의부터 탐욕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동기를 가진 사람이 각자의 사적 욕망을 이겨 내고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했다. 에스더는 여성에 대한 억압과 바사 궁중 내의 치명적인 계략을 모두 이겨 내는 동시에, 종족 말살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어떠한 위험이라도 무릅쓸 각오를 다져야 했다. 우리 직위와 제도는 그들 시대 이후로 줄곧 변화해 오긴 했지만, 오늘날의 일터도 에스라와 느헤미야, 에스더가 사역했던 장소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다. 이 책들에서 발견되는 실제 삶의 상황과 어려움, 선택은 우리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일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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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587년 느부갓네살의 통치하에 있던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그들은 유다의 지도자를 살해하고, 성전을 약탈한 후 불을 질러 완전히 태워 버렸으며, 성벽을 포함한 성읍 대부분을 파괴했고, 예루살렘 백성의 수확물 중 가장 좋은 것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거기서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 주시고 이스라엘을 회복해 주시길 늘 소망하면서 수십 년을 포로로 살았다. 그들의 소망은 BC 539년에 바사 고레스 왕이 바벨론을 전복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 후 머지않아 고레스 왕은 자기 왕국에 있는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라는 칙령을 내렸다(스 1:1-4).

 

   두 책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원래 한 묶음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1] BC 539년 고레스 칙령으로 시작하는 성벽 재건 이야기의 핵심 측면을 기술한다. 그러나 이 기술의 목적은 단순히 고고학적 호기심에서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려는 게 아니다. 도리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회복’이라는 주제를 예시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 책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의 백성을 회복했고, 백성은 이 회복의 사역에서 어떻게 중심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보여 준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BC 4세기경 미상의 작가에 의해 쓰였는데,[2] 이들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외세의 지배 아래서도 충성스럽게 살면서 하나님의 현재와 미래의 회복 역사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려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기록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대단히 신학적인 책이지만 직접 일의 신학을 다루지는 않는다. 이 책들은 우리 일상 노동과 관련된 법적인 명령이나 예언적 비전 등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고된 노동을 기술함으로써 일이라는 개념을 신학적 틀 안에서 암시적으로 풀어낸다. 따라서 일의 신학이라는 싹이 움틀 수 있는 근간이 되는 풍부한 토양을 이 책들의 기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적대적인 분위기와 우호적인 분위기가 공존하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 나라(이스라엘)를 회복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오늘날 일터 역시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 부분적으로는 적대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우호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지 고심하도록 독려한다. 

 

에스더서

 

   에스더서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묘사된 동일한 시기에 발생한 흥미로운 사건을 들려준다. 에스더서는 예루살렘의 재건이라는 주제보다는, ‘크세르크세스’라는 헬라어 이름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BC 485-465년) 바사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에스더서 이야기는 유대인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한다. 신원 미상 작가의 일부 집필 의도는 바로 이 국가 절기가 어떻게 유래했는지를 설명하고 지키길 권면하는 것이다(에 9:20-28).[3] 하지만 저자는 적대적인 이교도 나라에서 유대인이 포로의 신분으로서 어떻게 생존하고 또 번성할 수 있었는지를 고찰하는 것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진다.[4]

 

   에스라서 및 느헤미야서와는 대조적으로 에스더서는 표면으로는 전혀 신학적인 성격을 띠지 않으며, 실제로 하나님이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신앙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에 기술된 사건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놓칠 수 없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볼 눈이 없는 사람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역하시는지 독자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H.G.M. Williamson, Ezra, Nehemiah,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TX: Word Books, 1985), xxi.

 “Ezra-Nehemiah, Books of,  ” The Anchor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2)

 Frederic W. Bush, Ruth-Esther,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1996), 326-335쪽.

Mark D. Roberts, Ezra, Nehemiah and Esther, The Preachers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2002), 315-318쪽.

성전의 회복 (스1: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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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서는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파괴됐던 성전을 재건하도록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해 준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시작된다(스 1:2-4). 이 칙령을 서술한 구절에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BC 539-538년, 바사가 바벨론을 멸망시킨 직후)라고 이 칙령이 언제 선포됐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또한 이 본문은 우리에게 에스라서 및 느헤미야서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인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과의 관계’를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스 1:1) 고레스가 칙령을 선포했다. 고레스는 그저 자신의 개인적, 국가적 목적을 추구하면서 왕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면서 고레스 왕 안에서 역사하신 결과였다. 우리는 에스라서 첫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모든 걸 주관하시면서도 이방 왕까지 포함한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오늘날 크리스천 직장인 역시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및 조직의 결정과 행동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걸 믿고 살아간다. 고레스는 그가 그것을 인지했든 못했든 간에 하나님이 쓰기로 택하신 도구였다. 마찬가지로 우리 상사와 동료, 고객과 공급자, 경쟁자, 규제 담당자나 다른 무수한 행위자의 행동은 우리나 그들이 인식하지 못해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이 사실로 인해 우리는 절망하지도, 교만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 일터에서 크리스천과 기독교적 가치가 부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절망하지 말라. 하나님은 여전히 역사하신다. 반대로 당신 자신이나 당신이 일하는 조직을 기독교 미덕의 본보기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오거든 경계하라! 하나님은 하나님과 뚜렷한 연결고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통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이루실 수도 있다.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궁핍한 포로 상태에서 너무도 더디게 회복되는 동안에도, 여전히 부와 권력을 유지하며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고레스 왕을 통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이 사실은 우리가 신실하게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써 부와 권력이 반드시 주어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한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일에는 모든 것을 사용하시지만, 우리 개인적 성공을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하시지는 않는다.

 

   많은 유대인이 고레스 칙령을 기회로 이용할 때도 하나님의 일은 계속됐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모든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것을 준비했다(스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서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스 3:1-3). 이것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시간 순서대로 정리된 주요한 일을 축약해서 보여 준다. 이는 성전에서 행해지던 구약 유대교 제사 풍습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이 책들에 기술된 일은 하나님 백성의 삶에서 성전이 중심이 된다는 것을 반영한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 본문 전체에 걸쳐 예배와 일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에스라서가 성전을 재건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재건하는 노력과 관련 있을 때만 언급된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의 명단에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스 2:70)이 구체적으로 분류된다. 또 본문은 재건 사업에 필요한 사람이었던 “석수와 목수”도 따로 밝히고 있다(스 3:7). 성전 재건에 직접 참여할 기술이 없는 사람은 각자 일한 결실을 통해 ‘예물을 기쁘게 드리는’(스 2:68) 형태로 기여했다. 이렇듯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여했기에 성전 재건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백성의 일이었다.

 

   에스라는 고레스 이외의 정치 지도자 역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성전 건축 노력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도 밝힌다. 예를 들면 스룹바벨이 백성의 지도자로 언급된다. 그는 성전 재건을 감독한 유대 지역의 총독이었다(학 1:1). 에스라는 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편지를 쓴 관리인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도 언급한다(스 4:8-10). 그 외 다른 왕과 관리도 재건 사업과 연관성이 있으면 등장한다.

 

   물론 재건 사업은 성전 건축에 대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종교적인 목적으로 드려진 장인의 기술과 물질적인 일을 축복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에스라의 비전은 성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 전체를 회복하는 것이었다(스 4:13). 우리는 성전 건축 그 이상의 일에 착수했던 느헤미야에 대해 논의할 때, 이 요점을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에스라는 성전 건축을 막기 위해 이뤄진 몇 가지 방해 공작에 대해 기술한다(스 4:1-23). 이런 노력은 한동안은 성공을 거두어 거의 20년 동안 성전 건축이 중단됐다(스 4:24). 그러다 마침내 하나님은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 성전 건축을 재개해서 그 일을 마무리하라고 유대인을 격려하셨다(스 5:1). 더 나아가 바사 왕 다리오는 여호와가 자신과 자기 아들들을 축복해 주시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성전 건축에 자금을 제공했다(스 6:8-10). 이렇게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스 6:22) 하신 덕분에 성전은 마침내 완공됐다.

 

   이 구절이 명시하는 바와 같이, 실질적으로 유대인이 성전을 재건했다. 하지만 재건 사업의 착수를 명령하고, 또 완공을 위해 자금을 제공한 두 이방 왕의 도움으로 유대인의 수고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사람이 수고한 것의 바탕에는 왕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선지자를 통해 백성에게 용기를 주신 하나님의 사역이 자리 잡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이 인지할 수 없는 저 너머에서도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언약적 삶의 회복, 1단계: 에스라의 일 (스7:1-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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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설적이게도 에스라서 7장 이전까지는 정작 에스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제사장이며 율법 교사로서 매우 박식했던 에스라는 성전이 재건된 후 50여 년이 지나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지지를 받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에스라의 임무는 왕을 대신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과 율법을 가르치고 동시에 율법을 준수하는 지도자를 임명함으로써 유다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확립하는 것이었다(스 7:25-26).

 

   에스라는 왕의 호의를 행운 차원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왕의 마음에 자신을 예루살렘에 보내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신’ 하나님을 찬양한다(스 7:27-28). 에스라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스 7:28) 왕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다고 밝힌다. 하나님의 손이 누군가의 위에 있다는 말은 에스라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써, 이는 성경 전체에서 총 8번 언급되는데 그중 6번이 에스라서에 나온다(스 7:6, 9, 28; 8:18, 22, 31). 하나님은 에스라 안에서, 에스라를 통해서 역사하셨다. 이것이 바로 에스라가 노력한 것이 성공을 거둔 이유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에스라의 확신은 그가 수행원과 함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여행할 때 시험을 받았다. 에스라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스 8:22)라고 설명한다. 에스라에게 있어 왕의 호위에 의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신뢰하지 못함을 의미했다. 그래서 에스라와 그의 수행원은 왕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대신 금식 기도를 했다(스 8:23).

 

   에스라가 왕의 보호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는 데 있어 어떠한 특정 구약 율법도 따르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라. 도리어 이 결정은 리더십이 실질적인 도전에 부딪쳤을 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대한 개인적인 확신을 반영한 것이다. 에스라가 사람의 도움에 의존해 보호를 보장받기보다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는 이상에 기꺼이 자기 목숨을 걸었기 때문에 혹자는 이 상황에서 그가 ‘이상주의적 신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경건한 지도자들이 에스라의 태도만을 합당하다고 여긴 건 아니었다.

 

   에스라의 전략은 성공했다. 에스라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스 8:31)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에스라 일행이 무기를 휴대했거나 보호를 위해 그 무기를 사용했는지 여부는 모른다. 본문은 에스라와 그 일행이 아무런 위협적인 사건없이 여정을 마무리했다고 시사하는 듯하다. 에스라서는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실 때 그들의 노력이 성공을 거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 준다.

 

   에스라서의 마지막 두 장은 유대인의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기도하는 마음에 바탕을 둔 결단력으로 율법에 충실하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에스라의 사례를 제외하면 이 본문에서 일이라는 주제는 다뤄지지 않는다.

 

예루살렘 성벽의 회복 (느1: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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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서 1장은 바사 제국의 수도인 수산 궁에 거주하던 느헤미야를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느헤미야는 성전 재건 후 반세기 이상이 지났는데도 예루살렘 성벽이 여전히 허물어진 채로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앉아서 울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다(느 1:4). 은연중에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복구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과 속의 간극을 메우다(느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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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과 성벽의 관계는 일의 신학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성전은 종교 기관처럼 보이는 반면 성벽은 세속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재건 사역에 에스라를 인도하신 것처럼, 이번에는 성벽 재건 사역에 느헤미야를 인도하셨다.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서 성스러운 일과 세속적인 일 모두 필요했다. 성벽이 재건되지 않으면 성전 역시 미완성인 것과 다름없었다. 이 두 가지는 하나의 사역이었으며, 그 이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전체 제국이 평화로운 상태라고 하더라도 성벽 없이는 고대 근동의 어떤 성읍도 도적 떼나 강도, 야생 동물로부터 안전할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더 발전한 성읍일수록, 성읍 내 재화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고 그로 인해 성벽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했다. 특히 화려하게 장식된 성전은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상 성벽이 없으면 성읍도 없고, 성읍이 없으면 성전도 없는 것이었다.

 

   또한 성읍과 성벽은 율법과 정부, 안전과 번영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제공받는 원천으로서 성전을 필요로 했다. 군사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성전과 성벽은 상호의존적이다. 성벽은 성읍 보호에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대적의 포악한 꾀를 다 폐하시는(느 4:15)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성전(스 1:3)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와 사법부 역할이라는 측면에서도 이 둘은 상호의존적이다. 성문은 재판이 열리는 곳이었으며(신 21:19; 사 29:21), 동시에 여호와는 그분의 성전에서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신다’(신 10:18). 성전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는 것은 군사적 힘도, 정의도, 문명도, 성벽의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전과 성벽은 하나님의 ‘언약과 긍휼’(느 1:5) 위에 세워진 사회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적어도 이러한 이상을 위해 느헤미야는 금식하고 기도하며 사역했다. 

 

기도할 것인가, 실질적인 ‘행동’을 취할 것인가(느1:1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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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서 1장의 마지막 절은 느헤미야의 신분을 “왕의 술 관원”으로 밝힌다(11절). 이것은 그가 왕이 마시는 음료를 시음하고 드리는 사람으로서 왕을 알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느헤미야가 신임받는 책사이자 바사 제국의 고위 관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1] 그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착수함에 있어서 자신의 전문 경험과 지위를 아주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성벽 재건 사업의 감독을 허락했을 때 느헤미야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지나가야 할 영토를 다스리는 총독에게 보여 줄 편지를 써 달라고 요청했다(느 2:7). 느헤미야 관점에서 왕이 이 청을 허락해 준 것은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시므로”(느 2:8) 허락한 것이었다. 분명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왕의 보호를 요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믿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군대 장관과 마병”이 그를 예루살렘까지 안전하게 호위해 준 것을 기뻐했다(느 2:9).

 

   느헤미야서 본문은 느헤미야가 왕의 보호를 구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 잘못된 결정이라고 암시하지 않는다. 실제로 본문은 이러한 왕의 지원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있어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비교했을 때 놀랍도록 상이한 접근방식을 취한다. 에스라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왕의 보호를 요청해서는 안 된다고 믿은 반면, 느헤미야는 이러한 보호의 제공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축복의 손길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이견은 경건한 사람이 자기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 얼마나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어쩌면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단순히 각자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을 취했던 것일 수 있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임재에 익숙했지만, 느헤미야는 왕의 술 관원으로서 왕권의 행사에 익숙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모두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 충실하고자 했다. 두 사람 모두 경건하며 기도하는 지도자였다. 그러나 이 둘은 보호를 위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을 다르게 이해했다. 에스라에게 있어 그것은 왕의 경비병 없이 여행하는 걸 의미했다. 반면 느헤미야에게 있어 하나님을 신뢰함은 왕의 도움을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축복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느헤미야를 ‘실용주의적 신자’라고 부를 수 있는 증거를 여러 곳에서 발견한다. 예를 들면 느헤미야 2장에서 그는 예루살렘 백성에게 자신의 재건 계획을 알리기 전에 은밀히 무너진 성벽을 시찰한다(11-17절). 분명 그는 공개적으로 그 일에 헌신하기 전에 자신이 하려는 사역의 규모와 범위를 가늠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과 하나님 은혜의 손길이 자신 위에 있었다는 걸 설명한 후 몇몇 지방 관리가 그를 조롱했을 때,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느 2:20)라고 대답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공을 허락하실 때 일부분은 현명하고 박식한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통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성공이 여호와께로부터 온다고 해서, 느헤미야가 뒤로 물러앉아 느긋할 수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느헤미야는 고되고 부담이 큰 과업에 착수해야 했다.

 

   느헤미야가 리더로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에는 “대제사장 엘리아십 …… 그의 형제 제사장들”(느 3:1), 감독관에게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던 귀족들을 제외한 “드고아 사람들”(느 3:5), “금장색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느 3:8),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느 3:12) 등 다양한 사람에게 성벽 건축 사업의 일부를 위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느헤미야에게는 동료 간의 협력을 고취하고 재건 사업을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에스라서의 성전 재건 때와 똑같이 반대가 일어난다. 지역 총독이 조롱하며 유대인의 노력을 방해하려고 시도했으나 ‘백성이 마음 들여 일을 했다’(느 4:6). 업신여기는 말로 성벽 재건을 중단시킬 수 없자, 지역 총독은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곳을 요란하게 하자”(느 4:8)며 모의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백성이 어떻게 하도록 이끌었는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인도했는가, 아니면 무장을 통해 전투에 준비하도록 했는가? 예상대로 실용주의 신자였던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취하도록 이끌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느 4:9). 실제로 성벽을 재건하는 자에 대한 위협이 고조됨에 따라, 느헤미야는 핵심 지역에 보초도 배치했다. 그는 대적 때문에 낙심하지 말라고 백성을 격려했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느 4:14). 자신의 신앙 때문에 백성은 싸워야만 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을 곧 덧붙였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느 4:20).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보호하심만 믿으며 성벽 건축에 집중하라는 요청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을 전투에서 도우심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싸우실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백성이 일을 해 나갈 때 그들 안에서,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었다.

 

   때때로 우리 크리스천은 능동적으로 자기 목표를 추구하는 것과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것 사이에 마치 단단한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우리는 이것이 잘못된 이원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전통 있는 기독교 신학은 의학적 치료가 하나님을 불신하는 행동이라고 전제하는 크리스천 사이언스교와 같은 주장을 배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동하시길 수동적으로 기다리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당신이 실직 상태라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직하기를 원하시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이 얻기 원하시는 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당신은 여느 사람과 같이 구직하기 전에 이력서를 쓰고, 조사를 하고,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고, 때로는 수십 번이나 거절을 당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부모라면, 하나님은 당신이 자녀 양육의 기쁨을 누리길 분명히 원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은 규칙을 정해 자녀를 훈육해야 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도 시간을 내야 하며, 자녀와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 논의도 하고, 자녀가 다치거나 뼈가 부러지거나 가슴 아파할 때 같이 울어 주고 아파하며, 숙제도 같이 하고, 당신이 잘못했을 때는 자녀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 자녀가 잘못했을 때는 용서도 해 주어야 한다. 자녀를 교회에 데려가는 것 같은 선한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 휴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느헤미야와 동료의 고된 노동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우리가 손 놓고 앉아 어려움이 마술처럼 해결되길 기다리는 걸 뜻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경고해 준다.

 

“Nehemiah(person),” The Anchor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2).

‘대출 관행’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상관있는가(느5: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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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의 성벽 건축 사업은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의 위협에도 직면했다. 일부 부유한 유대인 귀족과 관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편승해 자기 주머니를 불리고 있었다(느 5장). 이들은 동족인 유대인에게 돈을 빌려 주고 율법에 명백히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출 22:25) 대출금에 대한 이자를 받으려 했다.[1] 그 빚을 갚을 수 없을 때 채무자는 소유한 토지를 잃었고 자식까지 종으로 팔도록 강요받았다(느 5:5). 이와 관련해 느헤미야는 부자에게 이자 받는 것을 중단하고 채무자로부터 취한 것은 무엇이든지 되돌려 줄 것을 주장했다.

 

   동족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취한 사람의 이기심과는 대조적으로 느헤미야는 자신의 지위를 개인 재산 축적에 이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는 자신의 선임 총독과 달리 개인 비용 충당을 위해 백성에게 세금 부과하기를 거부했다(느 5:14-16). 대신 느헤미야는 백성에게 징세하지 않고 개인 비용으로 많은 사람을 자의 상으로 초대해 넉넉하게 먹도록 했다(느 5:17-18).

 

   어떤 의미에서 귀족과 관리는 우리가 방금 논의한 이원론의 죄를 지었다. 이들의 경우 자기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길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았다. 도리어 경제생활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양 적극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측면에 관심을 쏟으시기 때문에 경제생활은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라고 느헤미야는 이들(유대인 채무자를 종으로 팔아넘긴 귀족)에게 설명한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느 5:9). 느헤미야는 고리대금업 같은 경제 문제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연결하고 있다.

 

   느헤미야 5장의 문제는 현재 우리 상황과는 거리가 먼 법적 · 문화적 배경에서 제기된 것이긴 하지만, 우리 지위나 특권, 심지어 우리 일을 통해 우리가 사적으로 얼마큼의 이익을 취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도록 도전을 던진다. 우리는 대출을 해 주고 이자를 받는 은행에 돈을 예치해야 하는가? 직장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특혜가 누군가의 상당한 희생을 수반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 누려야 하는가? 이자를 받지 말고 담보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강제로 사람을 종으로 팔지 말라는 느헤미야의 구체적인 명령은 우리 시대엔 다르게 적용될 수도 있지만, 그 명령의 근본이 되는 것은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기도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느 5:19).

 

   느헤미야에게 그랬듯이, 오늘날 일꾼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 역시 우리가 우리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이다. 현실에 적용해 보면, 이는 우리 각자가 직원, 동료, 고객, 가족, 일반 대중 등 우리 일에 의지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돌볼 책임을 하나님 앞에 지고 있다는 뜻이다. 느헤미야는 우리가 오늘날 직장에서의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진 않지만, 우리가 결정을 내릴 때 마음을 어느 방향으로 잡아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바로 사람들을 우선순위에 놓으라는 것이다. 

 

 

이자를 받고 돈을 꾸어 주는 걸 성경이 금하는지는 기독교 신학 역사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문제다. TOW 웹사이트(www.theologyofwork.org) 핵심 주제 코너에서 ‘금융’(Finance) 부분을 클릭해 “금융에 대한 개요”(Finance Overview)를 읽어 보라.

모든 공을 하나님께 돌리다(느6:1-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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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가 직면했던 내·외부적 문제들도 성벽 재건을 중단시키지는 못했으며, 성벽은 52일 만에 완공됐다(느 6:15). 유다의 원수들은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하였으니 그들이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느 6:16)라고 성경은 밝힌다. 느헤미야가 성벽 건축자를 조직하고 영감을 불어 넣는데 상당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이들 역시 쉬지 않고 일했으며, 느헤미야의 지혜 덕분에 적의 공격을 막아 내고 건축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고 여겼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느헤미야와 동료들의 은사와 수고를 통해 일하신 것이다. 

 

언약적 삶의 회복, 2단계: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함께하다(느8:1-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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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루살렘을 둘러싼 성벽이 완공된 후에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다. 에스라는 백성에게 율법을 읽어 주기 위해 이 시점에서 다시 등장한다(느 8:2-5). 백성은 율법을 듣고 울었다(느 8:9). 그러나 느헤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슬퍼하는 그들을 꾸짖었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느 8:10).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중심이 되어야 하므로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주일에 하나님의 백성은 수고해서 얻은 결실을 기뻐하고 그러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과 그 결실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느헤미야 9장이 보여 주듯이, 백성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경건하게 슬퍼해야 할 때도 있다(느 9:2). 백성들은 창조부터 구약의 가장 중요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들었을 때 비로소 회개하기 시작했다(느 9:6).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 이방 왕들의 포로가 됐고, 이스라엘이 수고한 대가를 이 왕들이 누리게 된 것이다(느 9:36-37).

 

   백성들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갱신하며 한 약속 가운데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느 10:31). 특히 이들은 안식일에도 일하던 “그 땅 백성들과” 안식일에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한 성전과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을 돕는 자기 의무를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느 10:31-39). 이들은 성전과 성전 일꾼에게 자신의 소산 중 십의 일조를 드림으로써 의무를 다했다. 그때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느 10:32) 우리 소득의 십의 일조를 드리는 것은 예배 사역을 재정적으로 돕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해 주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에서 성벽을 건축하고 공동체의 회복을 감독하는 자기 과업을 완수한 후,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을 섬기기 위해 복귀한다(느 13:6). 나중에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그가 시작했던 개혁 중 일부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일부는 도외시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느헤미야는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여전히 일하는 것을 발견했다(느 13:15). 유대 관리는 안식일에도 이방인 무역상이 예루살렘으로 장사를 위해 상품을 가지고 들어오게 해 줬다(느 13:16). 그래서 느헤미야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자를 꾸짖었다(느 13:17-18). 더 나아가 느헤미야는 특유의 실용주의적 접근법을 적용해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문을 걸어 잠가 뒀다. 또한 그는 성문에 경비병을 배치해 상인들에게 떠날 것을 경고하도록 했다(느 13:19).

 

   오늘날 크리스천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느헤미야서에 나와 있지 않다.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신학적 대화가 필요하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헤미야 본문은 하나님의 첫 번째 언약 백성의 삶에서 안식일 준수가 차지했던 중심적인 위치와 안식일을 성수하지 않는 사람과 경제적으로 교류하는 것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우리 상황에 이를 적용해 살펴보면, 과거 주일에 쇼핑몰이 문을 닫았을 때는 크리스천이 안식일을 지키기가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24시간 내내 상업 거래가 이루어지는 현대 문화 속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대가를 감수하면서 안식일 준수를 결단해야 하는 느헤미야 시대 같은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TOW 웹사이트(www.theologyofwork.org) Key Topics 섹션에서 ‘Rest and Work’ 부분을 읽어 보라.

타락한 체제 안에서 일하다 (에1-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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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더서는 성경 밖의 역사에서는 ‘크세르크세스’로 더 잘려진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초호화판 잔치를 벌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에 1:1-8). 포도주를 과음한 후 아하수에로는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와스디 왕후를 자랑하려 어전 내시에게 그녀를 데려오라고 명령한다(에 1:10-11). 하지만 이 요구를 모욕적이라고 여긴 와스디 왕후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에 1:12). 이는 다른 참석자까지 거북하게 만들었는데, 이들은 그녀의 행동이 하나의 본이 되어 그 나라의 다른 여성들 역시 남편에게 저항하도록 자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에 1:13-18). 그리하여 와스디는 말하자면 ‘해고’됐고, 아하수에로 왕을 위해 새로운 왕후를 간택하는 절차가 시작됐다(에 1:21-2:4). 분명 이 이야기는 왕실 가정사를 다룬다. 그러나 모든 왕실은 정치적 일터이기도 하다. 따라서 와스디의 상황은 직장에서의 문제로 해석될 수도 있다. 즉, 상사가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고자 하고, 이 여성이 그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자 그녀를 해고하는 상황인 것이다.

 

   왕은 와스디를 대신할 왕후를 찾으려 했고, 왕과 하룻밤을 보낼 준비가 된 에스더라는 한 젊은 여성이 후궁으로 들어온다(에 2:8-14). 우리 관점에서 보면, 에스더는 억압적이고 성차별적인 체제의 희생양으로서, 이기적인 폭군에 의해 처녀성을 상실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에스더는 수동적인 희생자가 아니었다. 에스더는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와스디의 억압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자신의 종족 정체성은 숨긴 채 자기 유익을 위해 그 체제를 오히려 이용한다(에 2:20). 에스더는 뛰어난 미모 덕분에 왕의 호감을 사고 새로운 왕후 자리에 오른다(에 2:17).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모두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통혼이 잘못된 행위라고 강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스 9:1-4; 느 13:23-27), 왕국의 후궁전에 자원해서 들어가 이방 왕의 아내가 되는 것은 더욱 놀랄 만한 일이다. 우리는 에스라가 일부 유대인이 이방인과 통혼한 것에 비통해하며 기도한 것(스 9:13-15)을 이미 살펴봤기 때문에, 에스더와 아하수에로 왕의 혼인에 대해 에스라가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보여 준 유대인의 율법에 대한 충실한 준수와 에스더의 종교적 · 도덕적 타협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에스더는 남보다 앞서 나가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행하고자 한다. 에스더는 다른 여인의 불행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기꺼이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에스더에 준하는 수준이든 아니든 간에 도덕적 타협은 일터에 있는 거의 모든 크리스천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직장에서 단 한 번도 도덕적으로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상사가 부하를 해고함으로써 자기 무능을 감추거나 가장 더럽고 위험한 일이 다른 인종의 사람에게 배정되는 등 다른 사람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우리 자신에게는 유익이 되어 돌아올 때 절대 침묵을 지키지 않고 항상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과거 성공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실제보다 부풀리거나 수업이나 일터에서 자기 지식을 실제보다 더 과장하는 등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진실을 숨기는 행위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에스더는 더 큰 권력과 영향력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왕궁으로 들어간다. 에스더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이나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에 관심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에스더서에서는 하나님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아하수에로 궁전에 있는 에스더를 위해 하나님께서 아무런 계획이나 목적도 갖고 계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에스더의 사촌인 모르드개는 유대인의 율법을 준수함에 있어 훨씬 더 양심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모르드개는 머지않아 아하수에로의 최고위 관리인 하만과 갈등을 빚는다(에 3:1-6). 하만은 모르드개뿐만 아니라 온 유대 민족을 말살할 계획을 세운다(에 3:7-15). 모르드개는 그의 음모를 파악하고 이를 에스더에게 전달한다. 자기 민족 전체가 말살될 지경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는 냉정해 보인다.

 

   에스더는 자신이 이 사건에 관여함으로써 자기 지위는 물론 목숨까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변명을 내세운다(에 4:11). 실제로 에스더는 30일 동안이나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미 왕의 관심을 잃은 상태였다. 왕이 혼자 잠을 잤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여인이 ‘왕에게 부름을 받았을 것이다’(에 4:11). 자기 민족을 위해 개입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모르드개는 두 가지 주장을 내세웠다. 첫째, 에스더의 개입 여부와 상관없이 그녀의 목숨은 위험하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에 4:13). 두 번째 주장은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였다. 이 두 가지 주장으로 에스더의 태도는 완전히 변한다.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자신의 이익 외엔 어느 누구의 일에도 관심이 없고 출세만 노리던 야심가가 갑자기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겠다고 나선 것이다.

 

   모르드개의 두 주장이 각각 다른 본능에 호소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첫 번째 주장은 에스더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지 않겠냐고 호소한다. ‘에스더 너는 유대인이다. 만약 모든 유대인을 몰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너도 발각되어 결국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암시와 함께 운명에 호소하고 있다. ‘에스더 네가 왜 수많은 젊은 여인 중에 왕후로 간택받았을지를 생각해 보라. 어쩌면 그것은 네 인생에 뭔가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주장은 비루한 반면, 두 번째 주장은 고귀해 보인다. 어떤 주장이 에스더를 변하게 했을까?

 

   아마도 모르드개의 두 가지 주장 모두 에스더의 마음을 단계적으로 변화시켰을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동일화다. 마침내 에스더는 자기 동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자신을 사람과 동일시한 것과 똑같은 단계를 밟았다. 에스더의 경우에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 단계를 밟긴 했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향해 에스더의 마음이 열릴 수 있었다.

 

   두 번째 단계는 섬김이다. 자기 동족이 멸절할 위험을 자신의 위험으로 동일시한 에스더는 왕에게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 재산, 목숨을 건다. 이제 에스더의 높은 지위는 이기심의 충족 대신 섬김의 수단이 된다. 신실하지 않고 율법을 준수하지 않던 에스더의 예전 행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본이 되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사용하신 것과 똑같이 에스더를 사용하신다. 에스더의 섬김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 직장에 그대로 적용된다.[1]

 

  1.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간에 많은 사람이 성공적인 경력을 쌓기 위해 윤리적인 타협을 한다. 우리 역시 에스더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에 도덕적으로 실패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리는 기회와 책임을 모두 가지고 있다. 직장을 얻기 위해 원칙을 무시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 직장에서 행해지는 기만적인 관행을 없애기 위해 당신을 사용하실 수 있다. 회사 재산을 부당하게 사용해 왔는가?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 부서의 허위 기록을 바로 잡는 일에 당신을 쓰실 것이다. 과거의 위선을 핑계 삼아 현재 하나님이 당신으로부터 필요로 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는 없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오늘 당신이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그 능력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에스더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던 우리 모두의 본이다. 당신은 “제가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윤리적 잘못을 저질렀는지 아신다면 제가 지금 하나님께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할 수 없다.

     
  2. 하나님은 우리 삶의 실제 상황을 활용하신다. 에스더는 자기 지위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독특한 기회를 부여받았다. 모르드개의 경우 자신의 지위를 통해 또 다른 종류의 기회가 주어졌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독특한 기회를 포용해야 한다. 우리는 “제게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어쩌면 바로 이때를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3. 우리 지위는 영적인 면에서 위험하다. 우리는 우리 가치나 존재를 자기 지위와 동일시할 수도 있다. 우리 지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위험은 더 커진다. 에스더는 더 이상 자신을 젊은 유대인 여인이 아닌 바사의 왕후로 여겼다. 이와 같은 행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사실에 종속되게 만든다. CEO나 정교수가 되거나 좋은 직장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해져서 이 사실이 우리 존재의 전부가 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4.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 지위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함을 의미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당신 지위를 사용한다면, 그 지위는 물론 장래 전망까지 잃을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이 직업이나 경력을 자신과 동일시한다면 그 두려움은 배가 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경우에도 우리 지위는 얼마든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에스더의 경우는 극단적이다. 그녀가 자기 지위를 걸고 개입한다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고, 또 개입하지 않더라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우리 입장은 에스더보다 정말로 더 안전한가?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당신이 영원히 지킬 수 없는 것을 잃을 각오를 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행한 일은 절대 잃어버릴 수 없다.

 

   에스더서의 이야기는 에스더와 유대인들의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에스더는 초대받지 않은 채 왕에게 나아가지만 왕의 호의를 입는다(에 5:1-2). 그녀는 부드러운 말로 두 번의 잔치에 왕을 오게 하고(에 5:4-8; 7:1-5), 하만이 유대인을 말살할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기 위선을 폭로하게 만드는 술책을 사용한다(에 7:6-10). 왕은 유대인을 적대시하는 판단을 철회하고(에 8:11-14)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부와 영예와 권력으로 보상한다(에 8:1-2; 10:1-3). 이들은 결과적으로 바사 제국 전역에서 유대인의 삶을 개선한다(에 10:3). 하만과 유대인의 원수는 모두 말살됐다(에 7:9-10; 9:1-17). 아달월 14-15일인 유대인 구원의 날은 그 이후 부림절로 지켜졌다(에 9:17-23). 

이 섹션의 아이디어들은 2007년 4월 22일 뉴욕 리디머장로교회에서 팀 켈러가 한 설교, “죽으면 죽으리라”에서 가져왔다. 이 설교는 http://www.gospelinlife.com/if-i-perish-i-perish-5610.html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과 인간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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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살펴봤듯이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성경의 일부다. 따라서 주석가는 에스더서에서 베일에 가려진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일반적으로 다음을 가장 중요한 구절로 꼽는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 이 구절은 에스더가 운이나 운명, 자신의 간계가 아닌 보이지 않는 어떤 분의 의지로 왕후의 지위에 올랐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여기서 벽에 글씨를 쓰는 신의 손을 볼 수 있다.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그 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스 8:18; 느 2:18).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어떻게 일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도록 우리에게 도전을 던진다. 세속적인 회사가 승진과 급여 체계에 있어 편향성을 없앤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인가? 한 크리스천이 회사의 이중장부 관행에 종지부를 찍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선언해야 할까? 당신이 타협이 만연한 정치 부서에 일자리를 얻어 선을 행할 수 있을 경우, 하나님은 그 제안을 수락하라고 부르실까? 만약 당신이 양심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라고 강요당하는 학교의 교사라면 그 자리를 떠나야 할까, 아니면 더욱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그 자리를 지켜야 할까?

 

에스라  · 느헤미야  · 에스더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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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세 권 모두 바사 제국의 통치 시기 동안 일어난 사건에 대해 상대적으로 간결하게 기술하며, 바사 왕들과 그 외 정부 관리를 등장시키고 있다. 또한 세 권 모두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데 여러 면에서 적대적이었던 환경에서도 번성하기 위해 애쓰던 유대인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며, 생존하고 번성하려고 애쓰던 유대인에게 바사 왕들이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행동의 본이 되는 세 명의 핵심 지도자가 세 권 모두에서 소개되기도 한다. 또한 세 권 모두 일하는 사람들을 보여 주기 때문에, 이 세 권의 책은 우리의 일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과 그 일의 관계에 대한 우리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중대한 사안에 있어서는 세 권 모두 폭넓은 의견차를 보여 준다. 이는 원래 한 묶음의 책이었던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에스라서에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왕의 호위를 받지 않고 위험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느헤미야서에서는 왕의 호위가 하나님이 복을 주신 증거로 제시된다. 에스라가 소위 ‘이상주의적 믿음’(idealistic faith)을 대변한다면, 느헤미야는 ‘실용주의적 믿음’(pragmatic faith)을 실천한다. 에스더서에서 하나님의 손길은 직접 보이지 않지만 에스더가 자기 민족을 섬기기 위해 자신의 지위와 기지를 기민하게 사용하는 데서 드러난다. 우리는 에스더의 믿음을 ‘영리한 믿음’(clever faith)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비슷한 비전을 공유한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왕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인도하신다. 여호와는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다양한 지도자와 예언자적 목소리를 사용하셔서 당신 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헌신적으로 일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으신다. 에스라서에서 하나님은 성전 재건을 위해 신실한 제사장을 사용하신다. 느헤미야서에서는 하나님 수도의 성벽 재건을 위해 신실한 평신도를 사용하신다. 에스더서에서는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 극도로 타협적이고 율법을 준수하지 않은 유대인을 사용하신다. 이 세 권 모두의 관점을 통합해 보면, 하나님은 각양각색 사람이 하는 일로 세상에서 일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