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고린도전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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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는 크리스천이 삶과 일에서 매일 당면하는 문제에 신앙을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신약의 그 어떤 서신보다 가장 실용적으로 조언한다. 직업과 부르심, 일의 영속적인 가치, 개인의 한계 극복하기, 리더십과 섬김, 기술과 능력 (또는 은사) 개발, 정당한 임금, 환경을 지키는 청지기, 돈과 재물의 사용과 같은 주제들이 이 서신에서 눈에 띈다. 이러한 주제들을 관통하는 관점은 사랑이다.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의 배후에 있는 동기요, 목적이며, 수단이자 은사, 그리고 영광이다.

 

 

번영과 자급자족의 도시, 고린도

 

   사도 바울이 2차 선교 여행(AD 48-51년)에서 자신이 세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는 매일 도전에 직면한 크리스천들을 위한 실천 신학의 보화다. 고린도전서는 충성심 간의 충돌, 계급 차이, 개인의 자유와 공공선 사이의 갈등,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다양한 조직의 사람들을 이끄는 어려움 등을 포함한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과 씨름하는 크리스천들을 위한 바울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지협(地峽)에 위치한 고린도는 동으로 사로니코스만(Saronic Gulf)과 북으로 코린트만(Gulf of Corinth) 양쪽을 관할했다. 상인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경유하는 어렵고 위험한 해로를 피하고자 했기 때문에 서로마제국과 동지중해의 부유한 항구도시 간 교역 물품 가운데 상당량이 이 지협을 가로질러 운반되었다. 그중 거의 대부분이 고린도를 거쳐갔기 때문에 고린도는 로마제국의 가장 거대한 교역 중심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동시대인으로 바울보다 나이가 많은 스트라보(Strabo)는 “고린도는 지협에 위치해 있고, 각각 아시아 및 이탈리아로 연결되는 두 항구가 있어 상업이 크게 발달했기 때문에 ‘풍요로운’ 곳이라고 불렸다. 고린도를 통해 서로 멀리 떨어진 두 나라의 물품을 쉽게 교역할 수 있었다”[1]는 데 주목했다.

 

   고린도는 1세기 중엽, 해방된 노예, 퇴역 군인, 상인, 무역상 등이 도시로 흘러 들어오면서 활기 넘치는 신흥 도시의 모습을 띠었다. 오늘날의 ‘계층 이동’이 고대 사회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웠지만, 고린도는 약간의 행운과 불굴의 노력이 수반된다면 스스로 정착하고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삶을 누리는 것이 가능한 장소였다.[2] 이것은 고린도의 독특한 풍조 형성에 기여했는데, 바로 “성공을 추구하는 기업가적 실용주의”[3]를 핵심 가치로 삼는 번영과 자급자족의 도시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세계의 많은 도시들이 바로 이런 풍조를 추구한다.

 

고린도 교회와 바울의 편지

 

   바울은 AD 49년 또는 50년[4] 겨울에 고린도에 도착하여 거기서 1년 반가량을 지냈다. 그동안 그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고전 4:12)의 작업장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 또는 어릴 때 배운 가죽세공(행18:2)[5]으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 바울은 선교사로서 처음부터 전액 후원을 받을 수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고,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비량 선교를 하는 이유를 밝힌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후원을 받는다(행 18:4; 고후 11:9).

 

   바울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행한 설교는 열매를 맺었고 뒤이어 고린도 교회가 탄생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썼을 당시 고린도 교회 교인은 백 명도 채 안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대개 이방인이었지만 유대인들도 더러 있었다. 이들은 비교적 부유한 두어 명 교인의 집에서 모였다. 그러나 교인 대부분은 도시 중심가에 거주하는 최하층이었다.[6]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후에도 교회 성장에 계속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후 발생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이전에(고전 5:9) 적어도 한 통의 편지를 교인들에게 보냈다.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이 사업차 에베소에 갔다가 바울을 방문하여 고린도에 있는 교회가 여러 가지 분쟁으로 인해 풍비박산이 날 위험에 처해 있노라고 전했다(고전 1:11). 기업가적 정신에 기반한 고린도인의 삶의 풍토에서, 경쟁 분파들은 스스로 지위를 얻기 위해 자신들이 편애하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당을 지었다(고전 1-4장).

 

   교인들 사이에서 몇몇은 성적인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사업 윤리에 심각한 차이가 있어 싸우는 사람들이 많았다(고전 5-6장). 그때 교회를 대표하는 또 다른 무리들이 손에 편지를 들고(고전 7:1;16:17) 성과 결혼(고전 7장),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행위의 적절성(고전 8-10장), 예배(고전 11-14장) 등 여러 가지 중요 쟁점을 묻고자 바울을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위 무리들 가운데 하나를 통해 또는 아볼로에게서(고전 16:12) 일부 교인들이 미래에 있을 신자의 부활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고전 15장).

 

   이러한 질문들은 학술 토론에서 나와 발전한 것이 아니다. 고린도의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매일의 삶과 일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이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으며, 고린도전서는 신약에서 가장 실용적인 책으로 꼽힌다.

 Strabo, Geographica 8.6.20

Donald Engels, Roman Corinth: An Alternative Model for the Classical Ci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49쪽.

 Anthony C. Thiselton,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2000), 4쪽.

 Gordon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7), 5쪽.

Ronald F. Hock, The Social Context of Paul’s Ministry: Tentmaking and Apostleship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0), 21-22쪽.

Wayne A. Meeks, The First Urban Christians: The Social World of the Apostle Paul, 2nd ed.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3), 51-73쪽.

모두가 부르심을 받았다 (고전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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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도입부에서 바울은 이후 편지의 본론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룰 주제들을 제시한다. 부르심이라는 개념을 편지 서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언급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바울은 맨 첫 구절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고전 1:1) 사실을 진술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부르셨다는 강한 확신은 바울서신 전반에 걸쳐 편만하고(갈 1:1) 바울 사명의 근간을 이룬다(행 9:14-15). 이러한 확신 덕분에 바울은 커다란 도전에 직면했을 때도 놀랍도록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처럼 고린도의 신자들은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고전 1:2)과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유는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서다. 바울은 이 점을 편지 후반부에 가서야 자세히 밝히지만(고전 7:17-24),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서 각각 부르신 대로 행해야 한다고 믿는 바울의 생각은 도입부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 하나님께 중요하다(고전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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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의 편지 형식을 살펴보면, 인사말 다음에는 관례상 저자가 수신인을 칭찬하는 내용이 따라 나왔다.[1] 그런데 바울은 대부분의 편지에서 칭찬 대신 감사를 표하고 또 “내가 ……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롬 1:4, 8; 빌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등과 같은 일정한 형식의 구절을 사용하여 정형화된 문학적 형식을 살짝 비튼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것에 감사를 표현한다. 이것은 막연한 경건 그 이상이다. 오히려 바울은 매우 구체적인 것을 심중에 품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고’(고전 1:5)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고전 1:7)고 명시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풍성하게 누린 말과 지식의 두 은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이 각자의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영적 자원을 받았다고 확신했으며, 이 점에 주목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으며,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도록’(고전 1:8) 그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직장에서나 다른 어디에서나 완전한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크리스천들은 그날에 완전한 결실을 맺을 영적 은사를 이미 사용할 수 있다.


   고린도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각 개인을 위해 특별히 계획한 직업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낮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노예나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바울이 의미한 것은 개개인의 직업이 특별해 보이건 그렇지 않건,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일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는 얘기다. 우리의 일이 아무리 하찮게 보여도, 또 우리가 아무리 다른 직업을 열망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하나님께 중요하다.

 Peter T. O’Brien, Introductory Thanksgivings in the Letters of Paul, Novum Testamentum (Leiden: Brill, 1977), 11쪽.

공동의 비전이 꼭 필요하다(고전 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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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전서를 씀으로써 성취하고자 하는 바를 명제 같은 형식으로 진술한다.[1]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바울이 마지막 구절에 사용하는 동사는 인간관계 회복을 함축하는 비유다. 바울은 교회 화합을 해치는 파벌주의를 극복하라고 교인들을 설득한다.


   현대 서양 문화는 다양성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에 바울의 권고를 부정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바울은 다른 본문에서도 분명히 하고 있듯이, 생각의 획일화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공동의 목적과 비전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매우 분명하게 이해한다. 만일 기본적 가치와 신념에 대해 지속적으로 분쟁이 발생해 구성원들간에 화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느 조직이라도 실패할 운명이 아니겠는가?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은 교회지만, 그는 또한 크리스천들이 일반적으로 사회에 공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딛 3:1).


   우리는 교회뿐 아니라 일터에서도 공동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신자와 비신자 모두와 함께 화합하여 조화로운 방식으로 선행을 하는 것이다. 부도덕이나 불의를 묵인하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좋은 관계를 발전시키고, 동료들을 지지하며, 우리의 일을 탁월하게 해내자는 의미다. 만일 우리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전심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할 수 없다면, 불평하고 책임을 회피하기보다 다른 직장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다.

 Margaret M. Mitchell, Paul and the Rhetoric of Reconciliation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3).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고전 1: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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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 대다수가 특권계층 출신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그러나 교회의 능력은 좋은 인맥, 높은 교육 수준, 또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을 확보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을 보통 사람들과 함께 이루신다. 우리 일의 가치가 우리의 자격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에 기초하고 있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는 본래 특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결코 하찮게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바울 시대 이래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권력, 부, 지위를 얻었다. 만일 우리가 이로 인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우월함을 느끼거나 그들을 무시하고 모욕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아직도 많은 직장에서는 직접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고위직을 주고 특권까지 부여한다. 임금 격차는 차치하고 고위직 임원들은 화려한 사무실, 일등석 여행, 고위간부 전용 식당, 전용 주차장, 보다 나은 복지 혜택, 회사가 지불한 클럽 멤버십, 사택, 운전사, 개인적인 편의와 혜택, 그 외 다양한 특권을 누린다


   물론 고위직 임원이 수행하는 일의 특징과 조직에서 담당하는 책임에 근거하여 특별한 대우가 적절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특권이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무너뜨리는 부당한 차등을 조장할 수도 있다. 바울이 말한 요지는, 그러한 차별이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직장에서 이러한 차별의 수혜자 또는 피해자라면 우리는 이것이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지, 또 만약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나님 앞에서 자문해야 한다.

다양성과 전문성(고전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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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 교회 안에 도사린 주된 문제는 파벌주의였다. 파벌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에 파송된 또 다른 선교사 아볼로를 각각 추종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바울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와 아볼로는 그저 하나님의 종일 따름이다. 비록 두 사람이 다른 역할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농사에 비유하자면 바울은 심는 자이고 아볼로는 물 주는 자인데, 둘의 역할은 성공적인 추수를 위해 똑같이 필요하며, 동시에 그 어느 쪽도 농작물의 성장을 관장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다양한 일꾼들이 풍부한 수확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심중에 갖고 있지만, 그들은 각자의 재능과 부르심에 따라 다른 임무를 맡는다. 모두가 다 필요한 사람들이요 어떤 사람도 홀로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은 다양성과 전문성이 중요함을 잘 알았다. 경제학자 레너드 리드(Leonard Read)는 1958년에 쓴 “나, 연필”(I, Pencil)이라는 유명한 에세이에서 연필 한 자루를 만드는 공정을 관찰한 후, 연필 만드는 방법을 다 꿰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강조했다. 한 자루의 연필은 몇 가지 정교한 과정의 산물이고, 한 개인은 그중 한 분야에만 숙달되어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양한 사람들이 세상 일터에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전문화는 개인 간 또는 부처 간 파벌주의, 소통의 부재, 심지어 인격적 비방을 야기하기도 한다. 만일 크리스천들이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다양한 역할을 각기 부여하심을 믿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속한 조직 내의 분열을 해소하는 데 앞장 설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일을 가치 있게 여겨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직장에서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다.


   이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발전에 투자하는 것으로도 적용이 가능하다. 고린도전서를 포함한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면 때때로 바울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 외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고전 14-15장). 이것은 교만이나 게으름이 아니라, 멘토링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혼자서 통제하기보다는 효과적인 일꾼과 리더를 교육시키는 데 훨씬 많은 투자를 했다. 우리가 각자의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더할수록,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며 도와주는 일에 더 힘쓰고 스스로를 좋게 보이려는 노력은 덜 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영원히 남는 수고의 열매 (고전 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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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선한 일을 행하라는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기 위해 건축 중에 있는 건물 비유를 소개한다. 이 주제는 일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 본문 전체를 인용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0-15).


   성경 전체를 통틀어 세속적인 일의 영속적 가치를 가장 곧이곧대로 언급한 구절일 것이다. 지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방식을 따라 일을 수행하는 한, 이 일은 영속적인 가치를 지닌다. 바울은 구체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행한 일을 성전에 비유하여 말한다. 바울은 자신을 터를 닦는 “지혜로운 건축자”(a skilled master)에 비교하는데, 터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 터 위에 세우고, 각자는 자신의 일에 책임이 있다. 바울은 선한 일을 금, 은, 귀한 보석에, 부끄러운 일을 나무, 풀, 짚에 각각 비유한다. 혹자는 각각의 재료에 특정 의미를 부여해 보려 했지만, 차이는 단지 어떤 재료는 불의 시험을 견디지 못한 반면, 다른 재료는 잘 견뎌 냈다는 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의 일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건축자)은 구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개인의 구원에 관해 어떤 판단을 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본문은 신자의 ‘선한 일’과 하늘에서의 상급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가끔 그렇게 읽히기도 하지만 말이다. 대신 바울은 교회 전체와 교회 리더들이 교회 내에서 어떻게 사역하는지에 관심이 있다. 만일 리더들이 교회 화합에 공헌한다면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리더들의 사역이 분쟁과 파벌주의라는 결과를 낳는다면, 하나님이 진노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살아있는 성전을, 그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자들로부터 전심으로 지키려 하시기 때문이다(고전 16-17장).


   바울이 크리스천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관해 썼지만, 그의 가르침은 모든 종류의 일에 적용할 수 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크리스천이 하는 일의 범주가 교회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권위하에서 하는 일도 포함하는 것으로 여겼다. 우리의 일이 무엇이건,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평가하신다. 인간이기에 완벽하게 공평할 수 없는 우리의 상사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정의로 심판하시고, 또 우리의 의도, 한계, 동기, 긍휼과 그분의 자비를 모두 계산에 넣을 수 있으시기에 최후의 심판은 어떤 평가보다도 그 결과가 정확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이 어떠한 환경에 처해 있든지 일을 할 수 있도록 부르셨으며, 그러한 부르심을 성취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은사를 부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은사를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책임감 있게 사용하길 기대하시며, 또한 우리의 일을 점검하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은혜에 힘입어 일을 탁월하게 해낸다면 그 일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고용주에게 인정받거나 더 많은 급여에 매달리기보다는 이러한 사실에 동기를 부여 받아 최대한 선행을 행해야 한다.

당신은 어떤 리더인가(고전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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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본문에서 바울은 리더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진술한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고전 4:1). 여기서 “우리”란 고린도 사람들을 믿음에 이르게 하고, 교회 내 다양한 분파들이 충성을 맹세하는 사도들을 지칭한다(고전 4:6).

 

   바울은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이 절에서 두 단어를 사용한다. “일꾼”으로 번역된 첫 번째 헬라어 단어 ‘hyperetes[휘페레테스]’는 시중드는 사람, 즉 대기하거나 어떤 사람을 돕는 종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더는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의 필요를 개인적으로 돌봐야 한다. 리더는 그 자리를 수용함으로써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이다. 리더라는 역할은 인내, 구성원들과의 개인적인 관계, 구성원의 필요에 대한 개별적 관심을 필요로 한다. “맡은 자”로 번역된 두번째 헬라어 ‘oikonomos[오이코노모스]’는 한 집안 또는 토지와 관련된 일을 돌보는 종 또는 노예를 묘사한다. 이 직분의 주된 특징은 신뢰다. 청지기는 주인의 신뢰를 얻어 주인의 이익을 위해 그 집안 관리를 일임받은 사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리더는 리더 개인이 아닌 모든 구성원의 유익을 위해 그 조직을 관리할 수 있다고 신임을 얻은 사람이다. 이러한 자질은 디모데(고후 4:17), 두기고(엡 6:21; 골 4:7), 바울(딤전 1:12), 안디바(계 2:13),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딤후 2:13; 히 2:17)에게서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계획을 실행할 때 이러한 사람들을 신뢰하신다.


   현대 직장에는 종종 조직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자기 팀을 적절히 다룬 리더들에게 보상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런 시스템이 리더들로 하여금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보상을 얻도록 조장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마도 이는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실제로 리더들은 자신의 팀이 부여 받은 일을 성취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이상을 해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리더가 개인적 보상을 위해 조직의 필요를 희생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조직의 필요를 충족시킴으로써 조직의 목표를 성취해야 한다.

비신자들과 더불어 일하기 (고전 5: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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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비신자들과 일하는 것에 대한 질문을 소개한다. 바울은 이 주제를 뒤에 나오는 10장과 궁극적으로는 고린도후서 6장에서 더욱 자세히 탐구한다. 5장에서 우선 바울은 크리스천들이 도덕적이지 못한 일을 저지를까 싶은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멀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전 5:9-10). 이 책 3장의 “고후 6:14-18” 부분을 보라.

 

   탐하는 사람, 속여 빼앗는 사람,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을 언급함으로써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이 일의 세계를 포함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시사한다. 우리는 스스로 음행하는 것을 피해야 하고 부도덕한 크리스천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바울은 우리가 비신자들, 심지어는 하나님의 도덕적 원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과도 일하기를 기대한다. 바울은 10장에 이르러서야 이와 관련해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만, 이는 참 어려운 제안이다. 바울의 요지는 간단하다. 크리스천들이 크리스천들만의 경제를 구축하고 세상을 떠나 자립하는 것은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대신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 일을 하는 자리에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일생의 직업을 찾는 게 내 일생의 과제인가(고전 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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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및 독신과 관계된 문제들을 주요하게 다루는 장 중반부에서 바울은 부르심과 일에 관한 중요한 진술을 한다. 다른 특별한 조건이 없는한, 신자들은 회심했을 당시의 삶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고전 7:20). 바울이 다루는 다음에 이어지는 구체적인 질문은 오늘날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중대한 문제다. 하지만 대부분의 서구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만일 종(노예)의 신분인 신자가 자유를 얻을 기회를 갖게 된다면,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대 사회의 노예제도는, 남북전쟁 이전의 미국 남부 상황이나, 현대 동남아시아에서 나타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노예로 전락하는 실상이나, 사실상 지구촌 전역에 존재하는 성 매매 등 현대판 노예제도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물론 양자 모두 극악무도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고대의 일부 종들, 특히 바울이 이 본문에서 염두에 둔 집에서 부리는 종들은 여러 자유인들보다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 더 나은 생활을 했다. 의사와 회계사를 포함하여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사실상 이러한 이유로 차라리 노예 신분을 선택했다. 따라서 바울에게 위의 질문은, 순수하게 종과 자유인 가운데 어느 신분이 더 많은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반면, 현대적인 형태의 노예제도에서는 어느 경우에도 종이 된 사람들의 삶이 철저히 훼손당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질문은 노예제도 폐지 여부가 아니라, 노예들이 자유롭게 되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고린도전서7장 21절에 사용한 헬라어가 모호하기 때문에 바울의 가르침의 정확한 본질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실제로 이 모호함으로 인해 두 개의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까지 하다. NRSV 성경과 다수의 주석가들이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당신이 노예일 때 부름을 받았습니까?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마십시오. 자유를 얻을 기회가 생긴다 하더라도, 현재의 상황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활용하십시오.” 그러나 NIV, NASB, KJV 성경의 다음 번역 역시 동일하게 가능한 해석이며, 우리는 이 해석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노예였습니까? 그로 인해 힘들어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NIV).


   바울의 조언이 무엇이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 비교하면, 종이 되는 것과 자유인이 되는 것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믿음이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고전 7:22). 

 

   그러므로 당신의 상태를 바꿀 별다른 강력한 이유가 없다면, 부르심 받은 당시의 환경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의 가르침은 직업이라는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적합한 직업을 갖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거나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의도하신 삶을 경험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느낀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생 전반에 걸쳐 갖게 되는 모든 직업을 최대한 활용하는지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주어진 상황에서 직장 또는 심지어 직업 자체를 바꿀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정당한 직업이라면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통로가 될 수 있으므로, 일생의 직업을 찾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만들지 말라. 더 경건하고 덜 경건한 직업 간에 계급이란 없다. 확실히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경건한 크리스천들은 교회 관련한 일로 부르신다는 잘못된 믿음에 경종을 울린다. 이 주제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소명’의 “소명에 대한 개요” 부분을 보라.

모든 걸 중단하라는 게 아니다(고전 7: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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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약속된 재림은 크리스천들이 일을 포함하여 매일의 평범한 삶을 버려야 한다는 의미인가? 바울은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도록 하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집니다(고전 7:29-31, 새번역).

 


   분명히 가정사를 소홀히 하고 일을 그만둔 신자들도 더러 있었다. 당신도 새 집으로 이사 가기 전에 청소하는 것을 소홀히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이전에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이같은 상황을 다루었고 이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을 주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살후 3:10-12).


   고린도전서 7장 29절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새번역)라는 구절이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이 거의 코앞에 다가왔다는 의미만은 아니라는 걸 인식한다면, 바울의 논리를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바울은 어떤 사물이 압력을 받아 전체적으로 더 짧아지거나 더 작아지는 현상을 묘사하는 동사(synestalmenos)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NASB 성경의 “Time has been compressed”(때가 압축되었다)라는 번역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이는 또한 “그때가 단축하여진 고로”(개역개정)로 번역할 수도 있다. 바울이 분명하게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래로 광활한 시간의 끝이 마침내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미래가 매우 자명해졌다”고 데이비드 갈런드(David E. Garland)는 말한다.[1]

 

  31절은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라고 설명한다. “외형”은 손상된 사회 및 경제적 관계로 점철된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의 방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바울은 이 서신을 읽는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인해 이미 삶의 기본 구조에 변화가 왔음을 이해하기를 원한다. 현재의 생활방식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가치와 열망은 신자들에게 더이상 작용하지 않는다.


   ‘그 때가 단축됐다’에 대한 올바른 반응은 일하는 것을 중단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다. 일상의 일을 대하는 이전 태도는 바뀌어야 한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7장 29-31절에 있는 역설적인 진술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는 여전히 소비해야 한다. 그러나 소유하지 않는것처럼 해야 한다. 우리는 기존에 알고 있던 방식으로 이 세상을 대해서는 안 된다. 즉, 이 세상이 제공하는 것들을 사용할 수 있지만, 세상의 가치와 원리가 하나님 나라의 방식과 충동할 땐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가 소유한 것들은, 꽉 붙들고 있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사용한다. 시장에서 흥정할 때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에게 물건을 파는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바울은 신자들을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이해”[2]로 초청하는 것이다. 

 

   우리의 옛 태도는, 우리 자신과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의 삶을 보다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만들기 위해 일했다. 우리는 높은 지위와 안정을 누리고, 남보다 더 나은 것들을 갖고 싶어 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결혼생활, 일, 그러고 나서 시간과 에너지가 남으면 사회참여, 이런 순서로 삶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하지만 새로운 태도는 우리 자신과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과 죽음의 목적이 된 모든 자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일에 우리가 가진 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예배, 가정, 일, 사회 등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통합하고 신체적 · 지적 · 문화적 · 도덕적 · 영적 자본에 주저 없이 투자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David E. Garland, 1 Corinthians,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2003), 329쪽.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336쪽.

누구나 정당한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전 9: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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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직접 재정 후원을 받을수 있음에도 왜 받지 않기로 했는지 설명한다. 바울은 사도들을 포함하여 일하는 자들의 대가를 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맡은 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주님을 섬기고, 주님은 그 대가로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을 허락하신다. 바울은 이 점을 잘 보여 주는 일상에서의 세 가지 예를 제시한다. 군인, 포도원 주인, 목장 주인은 모두 노동을 통해 경제적인 유익을 얻는다. 그러나 바울은 관습에만 근거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않고, 신명기 25장 4절(“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말씀을 인용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동물들도 수고한 열매의 대가를 받기에 합당할진대, 어떠한 유익을 창출하는 데 참여한 사람은 더더욱 그에 합당한 대가를 얻는 것이 마땅하다.


   본문은 직장, 특히 고용주와 분명한 연관성이 있다. 피고용인은 정당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성경은 고용주들이 피고용인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거부한다면 그들에게 무시무시한 결과가 있으리라고 경고한다(레 19:13; 신 24:14; 약 5:7). 바울은 정당한 임금을 결정하는 데 여러 가지 요인이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어떤 수치나 공식을 규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노동시장에 존재하는 수요와 공급, 규제와 노동조합, 임금과 복지, 권력과 유연성 간의 복잡성은 이 글에서 다룰 수 없는 광범위한 주제들이다. 그러나 원칙은 명백하다. 인력을 쓰는 사람은 그가 고용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무시해선 안 된다.


   그런데도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사역에 응당한 대가를 받을 권리를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다. 왜 그런가? 바울의 경우 고린도 교회 내의 민감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대가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에 살면서 천막 제작이나 가죽 세공 일을 하는 동료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바울을 소개하심으로써 그가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도록 하셨다(행 18:1-3; 롬 16:3).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을 준비해 놓으셔서 모든 교회 사역자들이 대가를 받지 않고 사역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경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고, 바울은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아들였다. 중요한 점은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만이 정당한 보수없이 기꺼이 일하겠다고 제안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고용주는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궁극적인 목표, 하나님의 영광(고전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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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은 합당한 일일까?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이 문제를 8장에서부터 다루기 시작한다. 그는 이 세상의 자원을 사용하는 것에 관한 하나의 대원칙을 분명히 말한다. 시편 24편 1절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고전 10:26). 즉,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므로 어떤 음식이든, 그것이 이전에 이방인의 제의적 목적에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먹을 수 있다. (로마의 시장에서 파는 고기의 대부분은 준비 과정에서 우상들에게 바쳐진 것들이었다.)[1] 이 원칙은 두 가지 면에서 일에 적용이 가능하다.


   첫째, 우리는 바울의 논리를 확장해 신자들이 음식, 옷, 제조품, 에너지를 포함하여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을 사용해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사용에 명확한 제한을 둔다. 만일 우리의 사용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우리는 그걸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가 저녁 만찬에서 논쟁거리가 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양심을 지켜 주기 위해 고기 먹는 것을 금해야 한다. 더 나아가 노동자의 안전, 자원 부족, 또는 환경 파괴 문제에 동일한 원칙을 적용해 본다면, 오늘날 노동자들의 복지, 빈곤층의 자원에 대한 접근 권리, 미래 세대의 삶의 질 등을 이유로 우리는 특정 물품에 대한 소비를 금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땅과 이 땅의 충만함의 주인이시므로, 우리가 이 땅을 사용하는 방식은 그분의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둘째, 고린도전서 5장 9-10절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비신자들과 경제 활동을 해야 한다. 만일 크리스천들이 크리스천 또는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정육점에서만 고기를 산다면,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진 것인지 아닌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신자들이 사회 전체와의 경제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8장에서는 크리스천들이 비신자들과 사회적 관계도 맺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가정하고 있다.) 크리스천들은 사회로부터 떨어져 살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고, 사회의 여러 일터를 포함하여 사회와 관계를 가지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에서 이러한 참여에 대한 제한을 논의한다. 이 책 3장의 “고후 6:14-18” 부분을 보라.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말한다(고전 10:31). 이 구절은 모든 활동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절대적으로 모든 일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논지는 일을 포함한 우리의 행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부합한지 아닌지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기준은 우리가 비신자들과 교제를 갖는지, 다른 사람들이 악용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하는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하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그 일이 하나님의 목적에 공헌하는지의 여부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 일은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한 것이 될 것이다.


   결론은 인류에 유익을 주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직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부르심이라는 것이다. 농부와 식료품가게 점원, 제조업자와 환경규제 담당자, 부모와 선생, 유권자와 정치인 모두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섬기는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

 Hans Conzelman, 1 Corinthians, trans. James W. Leit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176쪽. 11–13쪽도 포함.

은사를 올바로 사용하는 공동체 (고전 12:1-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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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은사’(spiritual gifts - 고전 12:1) 사용을 두고 고린도 교회 내에서 많은 분란이 있었던 듯 보인다. 특히 방언, 즉 성령에 이끌리어 황홀 상태에서 말하는 은사는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더 영적이라고 주장함에 따라 교회 내 지위의 차이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고전 12:1-3; 13:1; 14:1-25).[1]

 

   바울은 이에 반대하여 사역에 주요하게 적용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보다 광범위한 이해를 피력한다.  먼저 주목할 점은 ‘영적 은사’라는 용어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담기에는 너무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은사는 하나님의 영에서 온다는 넓은 의미에서 ‘영적인’ 것이지, 육체에서 분리되었거나 초자연적인 상태를 일컫는 좁은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은사”는 바울이 생각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여러 종류의 용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고린도전서 12장만 살펴봐도 바울은 여러 은사들을 일컬을 때 “직분”(services - 고전 12:5), “사역”(activities - 고전12:6), “나타내심”(manifestation - 고전 12:7), ‘행함’(deeds - 고전 12:28), ‘형태’(forms - 고전 12:28), “각종”(kinds - 고전 12:28)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바울이 ‘공동선을 위한 성령의 나타내심’(고전 12:7, NRSV) 또는 ‘직분의 종류’(고전 12:5, NIV)라고 부르는 것을 일컫는 “영적 은사”라는 용어의 전용은 우리 생각을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다.[2]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선천적’ 기술과 능력을 성령이 대체하거나 무시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또한 이것은 “은사”를 받는 사람이 그 은사의 유익을 누리는 사람임을 시사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섬김보다는 예배가 성령의 일하심의 최고 목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이는 모두 잘못된 가정이다. 성령은 우리의 선천적 재능을 없애 버리지 않고, 그것을 높이시고 사용하신다(고전 12:14-26). 또한 은사를 통해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 또는 조직이 유익을 얻는다(고전 12:7). 그 목적은 공동체를 세우는 것(고전 14:3-5)이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고전 14:23-25)이지, 단지 예배의 질을 향상시키기위한 것은 아니다. “선물”(giftings)이라는 표현이 이러한 중요한 함의를 더 잘 나타내기 때문에 아마도 보다 적합한 용어가 아닐까 싶다.


   두 번째로, 바울은 은사와 관련해 철저한 목록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사례를 제공한다. 바울은 또한 로마서 12장 6-8절, 에베소서 4장 11절, 베드로전서 4장 10-11절에서 은사들을 열거하며, 그런 은사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완전한 목록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실례임을 알 수 있다.

 

   이를 살펴보면 은사를 나열하는 표준 목록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은사가 주어진 다양한 방식을 설명하는데도 기준이 되는 방법조차 없다.이 주제에 관한 많은 대중 문헌과는 달리, 영적 은사에 관한 명확한 목록을 작성하기란 불가능하다. 영적 은사는 놀랄 만큼 다양성을 띤다. 알려지지 않은 언어로 말하는 능력을 포함해 어떤 은사는 ‘초자연적’인 반면, 리더십 등 자연스런 능력이나 심지어 자비와 같이 개인적 특성으로 보이는 은사도 있다. 살펴보았듯이 바울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말하며,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실 몇 가지 놀라운 능력을 열거한다.


   바울은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데(고전 14:4, 12), 그래서 일부 크리스천들은 이 본문이 성령께서 은사를 오직 교회 내에서만 사용하도록 주신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의 기록에는 이러한 은사가 교회 안에 한정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라는 제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전 세계를 포함한다. 신자들은 일터를 포함한 모든 환경에서 자신의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
 

   리더십, 섬김, 분별 등 여기에 소개한 은사들 가운데 많은 것은 일터에서 즉각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은사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목적을 섬기는 데 필요한 대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우리는 받은 은사들을 반드시 개발해야 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공공의 유익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해야 한다.


   사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어디서, 무슨 영적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아니다. 왜 우리가 그 은사를 사용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그 답은 ‘사랑 때문에, 사랑하려고 은사를 사용한다’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 달란트, 능력은 우리가 일을 탁월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원천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의 중요성을 논한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바울은 만일 성령의 모든 놀라운 은사를 행사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라고 말한다. 흔히 결혼식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읽곤 하는데, 사실 직장에 적용할 수 있는 완벽한 선언문과 같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4-6).


   만일 크리스천들이 직장에서 이러한 사랑을 나타낸다면,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더 생산적이며 풍성해지겠는가! 우리 주님께 얼마나 많은 영광을 돌리겠는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우리의 기도에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에 우리가 얼마나 더 가까이 다가가겠는가!

 Dale B. Martin, The Corinthian Body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5), 87-92쪽을 보라.

“영적 은사”라는 용어와 관련된 문제에 관한 학술적 논의는 다음을 보라. Kenneth Berding, “Confusing Word and Concept  in ‘Spiritual Gift’: Have We Forgotten  james Barr’s Exhortations?”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43 (2000), 37-51쪽

부활을 바르게 이해할 때(고전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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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결론을 직접적으로 일에 적용한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8). 믿는 자는 육체까지도 온전히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어떻게 주님을 위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영속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결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먼저, 우리 주변에 있는 타락한 세상의 생명이 생명의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될 것이다(고전 15:14-19). 바울이 사용한 “헛된”(vain)이라는 단어는 타락한 세상에서 일의 헛됨에 관해 자세히 묵상했던 전도서를 떠올리게 한다. 현 세상의 타락한 상태를 넘어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만일 새로운 세상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된다면 우리의 일은 헛될 것이다. 우리의 수고는 기껏해야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새로운 세상으로 보내는 역할만할 것이다. 이 시리즈 2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시가서 · 예언서》 4장을 보라.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일은 영원토록 남으리라는 것을 살펴보았다(고전 3:10-15). 고린도전서 15장 후반부에서 바울은 각각의 형체 사이에 굉장히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 전과 후의 형체 사이에 있는 근본적인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이 문제를 더욱 심도 있게 논의한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우리의 영혼은 (마치 새로운 옷 한 벌을 입는 것처럼) 옛 몸을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히지 못하지만 우리의 현재 몸은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변화를 입은 옛것은 새로운 것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현재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또 하나님을 위한 우리의 수고가 영속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연속성이다.[1]

 N. T. Wright,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Christian Ori  gins and the Question of God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3), 359–360쪽

역경에 처한 사람들과 우리의 자원을 나누는 삶(고전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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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이 자신의 선교 여행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행한 일은 바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유대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모금하는 일이었다.[1] 바울은 이러한 헌금을 여기서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서도 언급하며, 로마서 15장 25-31절과 고린도후서 8-9장에서는 이에 관한 신학적 근거를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다. 바울에 의하면 신자가 얻는 소득의 일부는 스스로 삶을 꾸려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쓰여야하며, 이 사실을 주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바울이 보기에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 가운데 하나는 전 세계 교인들의 필요를 돌아보는 것이다. 구약 성경은 정해진 십일조와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 모두를 규정했는데,[2] 이는 모두 성전을 운영하고, 나라를 꾸려 가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데 쓰였다. 그러나 이 제도는 유다 왕국의 멸망으로 끝이 났다. 유대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바울의 모금은 과거 구약 성경의 십일조와 예물이 담당했던 교회의 구제 역할을 의미한다.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정해진 비율의 십일조를 규정하지는 않지만, 바울은 너그러운 베풂을 장려하며(고후 8-9장) 이는 결코 구약 성경보다 낮은 수준의 베풂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러 세기에 걸쳐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사회복지 제공자로서의 교회 역할은 로마제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3]

 

  금액이 얼마가 됐든, 신자들은 예산의 일부로 그 금액을 미리 정해 놓고 매주 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에 자신의 헌금을 가져와야 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수준의 너그러운 베풂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 시대에는 이러한 원칙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사회복지 제공자로서 교회 기능을 이제 정부가 대신하게 되었지만, 크리스천들만이 탁월하게 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구비시키시는 특정 형태의 봉사가 있는가? 크리스천들의 일, 투자, 다른 경제 활동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자들을 섬기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바울의 시대에는 크리스천들이 사업을 시작하고, 상업에 종사하고, 또는 훈련과 교육을 제공하는 데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지만, 오늘날 이러한 활동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고용을 창출하거나 이들을 부양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베푸는 일의 목적이 단지 (바울의 분명한 목표 가운데 하나였던) 전 세계 교회의 더욱 긴밀한 단결인가? 아니면 우리 이웃을 돌보는 것 역시 그 목적에 포함되는가?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물질을 나눔과 동시에 역경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수단으로써 사업, 정부, 교육, 그리고 다른 모든 형태의 일을 수행하라고 신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아닐까?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의 ‘공급과 부’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심도 있게 다루었다.

연보에 대한 개관은 Scott McKnight, “Collection for the Saints,”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 ed. Gerald F. Hawthorne, et al.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3), 143-147쪽을 보라. 

 E. P. Sanders, Judaism: Practice and Belief, 63 BCE-66 CE (London: SCM Press, 1992), 146-169쪽을 보라.

 Jeannine E. Olson, Calvin and Social Welfare (Selingsgrove: Susquehanna University Press, 1989), 18쪽.

고린도전서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

   고린도전서는 일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도 모든 종류의 정당한 일에 대한 건강한 소명의식을 확증한다. 서두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셨음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도록 모든 신자들에게 영적 자원과 구체적인 은사를 주신다.

 

   우리의 능력은 우리 자신의 공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분의 능력에 힘입어 우리는 선행을 추구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 안에서 우리를 공동의 비전과 목적으로 이끄시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류의 직업을 가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리더들은 이러한 다양성을 효과적으로 결집시켜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 속한 리더들은 그들이 이끄는 사람들의 종이다. 그러므로 구성원들의 필요와 요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 조직의 사명을 완수할 책임이 있다. 우리의 직분이 무엇이든 간에, 완벽한 직업을 찾기 위해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매일 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나라를 위해 부지런히 일할 확신이 있다. 우리의 능력대로 일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에 정당한 대가로 보상하신다. 크리스천들은 정당한 대가와 정당한 일의 표준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이다. 이것은 세상의 자원을 사용할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우리는 미래 세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이 자원을 잘 돌보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한 개인과 개인의 서로 다른 필요 사이의 균형 맞추기를 생각해서는 안 되고, 대신 상호 지지와 봉사에 기반한 공동체 수립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이 하나님 나라의 원동력이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일하시고 대신 죽으신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사랑으로 일할 때, 우리의 일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한 일만이 영속적인 중요성을 지니며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새로운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지속적으로 남을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가지고 있는 자원을 이용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특별히 마음을 쏟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