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잠언 서론

목차로 돌아가기

   똑똑함과 지혜로움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혜는 사실을 규합해놓은 것 이상으로, 지식의 범주를 넘어선다. 지혜란 삶에 대한 훌륭한 이해이며, 삶에 대한 실용적인 기술이고, 올바른 의사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전문 지식이다. 똑똑한 사람도 얼마든지 지혜롭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 지혜는 물론 지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지만 잠언에서 언급하는 지식에서 시작해야 한다.[1] 이 책은 그런 연관성을 확신한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잠 1:1-2).[2] 지혜를 얻으려면 이 지식과 여호와를 향한 경외심이 결합해야 한다.[3] 하나님을 경외(fear)한다는 건 구약에서 종종 “하나님께 반응하며 사는 삶”과 같은 개념으로 쓰였다. 잠언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여호와께 의탁하지 않는 지식은 소용이 없어서 물 없이 시멘트만 가지고 회반죽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역설적이게도, 믿음으로 잠언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주님을 향한 경외심이 생겨난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1, 5).

 

   크리스천의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다. 특히 그분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계시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여호와가 어떤 분이며, 무엇을 하셨는지, 또 그분이 우리와 우리가 사는 세상에 바라시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력과 함께 시작된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점점 더 깊어짐에 따라, 세상을 유지하고 구속하시려는 그분과 어떻게 협력할 것인지를 배운다. 그럴수록 우리가 맺는 열매는 더욱 풍성해져 우리 자신에게도 물론 유익하고, 다른 사람들도 돕게 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잠언에 의하면, 지혜를 얻는 것은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에 그것을 적용할 때까지 우리는 그 지혜를 진정으로 얻지 못한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잠 14:16).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잠 10:31). 잠언서는 예수님의 훈계를 예견한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지혜는 여호와로부터 나온다. 여호와는 “내가 지혜로운 길을 네게 가르쳤으며 정직한 길로 너를 인도하였은즉”이라고 말씀하신다(잠 4:11). 잠언은, 정신과 도덕은 함께 다니며 지혜는 선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지배하신다는 진리를 담아낸다.

 

   잠언서는 또한 지혜가 자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지혜를 여인으로 의인화시켜 이렇게 말한다.[4]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잠 8:35-36). 지혜로우면 위대하고 더 충만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반면에 지혜가 없으면 삶이 위축되고 궁극적으로는 사망에 이른다(잠 13:14). 

 

 

 지식과 지혜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결성에 대해서는 Bruce K. Waltke, The Book of Proverbs: Chapters 1-15 (Grand Rapids: Eerdmans, 2004), 76-87쪽을 보라.

“알게 하며”(개역개정)에 대한 NRSV의 “learning about”이라는 번역은 히브리어 ‘da’at’(어원은 yada)가 나타내는 경험적인 성질을 간과한 것이다

 Robert Laird Harris, Gleason Leonard Archer and Bruce K. 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electronic ed. (Chicago: Moody Press, 1999), entry 907

여성 의인화에 대한 설명은 Waltke, The Book of Proverbs: Chapters 1-15, 83쪽을 보라.

잠언 개요

목차로 돌아가기

   고대 근동 지방에서 통치자들은 전문직이나 왕궁 관리에 임명되는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종종 현자들에게 국가에서 통용되는 지혜를 모으라고 명했다.[1] 인생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인간의 실제 경험에서 뽑아낸 이 지혜의 말들은 미래 세대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하지만 잠언서는 솔로몬 왕이 제일 저자이지만(잠 1:1) 영감은 여호와께서 주셨다고 주장한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 2:6).

 

   잠언은 인간의 경험이 아닌 여호와를 믿으라고 말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 3:5).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다른 고대 근동 지도서들은 그들이 가르치는 지혜에 신성한 기원이 있다고 암시하거나 추정한다. 그러나 잠언은 지혜는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나온다고 강조한다.[2] 참된 지혜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를 두며, 우리는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떠나서는 참된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잠언의 중심 메시지다.

 

   따라서 잠언에 나오는 교훈들은 통상적 의미나 좋은 조언 그 이상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행위와 운명의 연관성을 가르칠 뿐 아니라 참된 지혜의 근원이신 여호와 휘하에서 어떻게 하면 평안하고 번영하는 공동체를 이뤄 갈 수 있는지 가르친다. 아울러 우리가 잠언이라고 부르는 이 짧고 간결한 말들은 삶에 대한 일반론이지, 세분화된 약속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통해 우리의 생각을 지도하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점괘가 들어 있는 복주머니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잠언 중 그 어떤 한 가지가 온전한 진리를 다 표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책 전체 내용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3]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라는 말씀을 읽고 나서, 아이는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이라고 섣불리 결론 내린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다. 잠언은 부모가 하는 훈육의 효과를 분명 높이 산다. 다만 각 사람이 자기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는 다른 잠언들에 비추어 이 말씀을 해석해야 한다. 이를테면,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 30:17) 같은 잠언 말이다. 잠언에 정통하려면 전체 잠언을 가지고 지혜의 옷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므로 잠언서에서 지혜를 얻으려면 평생에 걸쳐 잠언서를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통상적인 과업이 아니다. 잠언 가운데 일부는 서로 완벽하게 대립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긴장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또 일부는 너무 모호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잠언이 누구를 향하여 말하는지 잘 관찰해야 한다.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라”(잠 20:13)라는 경고는 하나님의 자녀 모두에게 주는 잠언이지만(잠 1:4-5),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 것이다”(잠 3:24)라는 말씀은 지혜와 근신에 너무 연연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격려다(잠 3:21). 잠언서 내용은 시간 구애를 받지 않지만, 잠언을 적용하는 일은 욥기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시간성을 생각해야 한다. 잠언은 시간이 걸리는 덕목 개발의 시금석이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 1:5-6).

 

   잠언서는 일곱 부분으로 나뉜다. 제1집(잠 1:1-9:18)에는 이후 소개할 간결한 말들에 앞서 제자의 마음을 준비시키려고 장황한 연설을 담았다. 제2집(잠 10:1-22:16)은 “솔로몬의 잠언”이다. 제3집(잠 22:17-24:22)은 “지혜자의 말들”인데, 솔로몬이 개작한 것으로 본다.[4] 제4집(잠 24:23-34)은 “지혜자의 말들”을 추가해 놓은 것이다. 제5집(잠 25:1-29:27)은 “유다 왕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한 다른 잠언들”인데 솔로몬 시대의 고대 기록에서 발췌한 것들이다(히스기야는 솔로몬 이후 약 300년 간 통치했다). 제6집(잠 30:1-33)과 제7집(잠 31:1-31)은 각각 아굴과 르무엘의 잠언인데, 이들은 다른 곳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다.[5] 잠언 전체에 걸쳐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 사람들과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에게 주는 일련의 경구, 조언, 교훈과 경고를 준다. 더불어 여호와로부터 지혜를 구하라고 권고한다(잠 1:2-7).

 

   잠언은 대개 짝을 지어서 기술한다. 부지런함과 게으름, 정직함과 부정직함, 계획을 세워서 하는 일과 성급히 내린 결단, 공평한 처분과 위약한 자들을 착취함, 좋은 조언을 구함과 자만 등등. 잠언은 다른 어떤 주제보다 우리에게 지혜로운 말하기를 가장 많이 언급하며, 두 번째로는 일과 상관관계에 있는 돈에 대한 것이다. 비록 일곱 부분으로 나뉘기는 하지만, 잠언서에 들어 있는 잠언들은 동일한 주제를 반복적으로 되뇐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의에서는, 각각의 부분을 이 책에 나오는 순서대로 탐구하기보다는 일과 관련된 가르침들을 주제별로 살펴보려고 한다. 

Richard J. Clifford, S.J., “Introduction to Wisdom Literature,” The New Interpreter’s Bible, (Nashville: Abingdon Press, 1997), 3-4쪽.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공직에 관해 더 자세히 알기 원하면 Robert Banks, “The Role of the Bible in Bureaucratic Decision-Making,” Private Values and Public Policy: The Ethics of Decision-making in Government Administration (Lancer Books, 1983), 35-40쪽을 보라.

 Roland Murphy, Proverbs, Word Biblical Commentary (Thomas Nelson, 1998), 289쪽.

 Waltke, The Book of Proverbs: Chapters 1-15, 107-109쪽을 참조하라

같은 책, 23쪽부터 보라

같은 책, 31-37쪽을 보라

잠언과 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목차로 돌아가기

   잠언의 주요 관심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이 부르심이 잠언의 서두를 장식하며(잠 1:7), 도처에 스며 있고(잠 9:10), 책을 마무리 짓는다(잠 31:30). 잠언은, 좋은 일 습관은 번영으로 이어지는데, 일하는 습관은 인격에서 나오며, 인격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형성된다고 가르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과 지혜는 직접적으로 동일시된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 2:5-6).

 

   다시 말해서 잠언은 잠언을 읽는 사람들 안에 하나님의 품성을 키우기 위함이다. 그래서 많은 잠언이 하나님의 품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잠 6:16).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경건한 품성 즉, 지혜는 일을 포함한 인생 전반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잠언을 잠깐만 들여다보아도 이 책이 일에 관련하여 기여하는 바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잠언이 농업, 가축 사육, 직물, 의류 제조, 무역운송, 군사, 행정, 법원, 가사일, 자녀 양육, 교육, 건축 등 고대 근동의 직장 활동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일과 밀접히 관련된 돈 또한 놓칠 수 없는 주제다. 많은 다른 잠언들도 근면, 정직, 공의, 통찰력, 좋은 관계 등 일에 크게 적용되는 주제들을 다룬다.

 

 

용감한 여인 (잠 1:20-33; 31:10-31)

목차로 돌아가기

   이 책 끝에 잠언서와 일의 세계 사이의 놀라운 연관성이 나온다. 이 책 처음 부분(잠 1:20-33; 8:1-9:12)에서 만났던 지혜로운 여인은 이 책의 마지막 22개 구절에서 평상복 차림으로 다시 나타난다(잠 31:10-31). 이 여인은 “현숙한 여인”으로 살아서 숨 쉰다. 어떤 번역자들은 “여인”이라는 말 대신 “아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아마도 그 단락에서 여인의 남편과 아이들을 언급해서인 듯하다(“아내”와 “여인”은 모두 히브리어 ishshah에서 번역 가능한 단어들이다).

 

   참으로 그녀는 가족에게서 성취를 발견했으며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잠 31:23). 그러나 본문은 종들과 일꾼들을 거느리면서 가내공업을 운영하는 이 여인의 일에 초점을 맞춘다(잠 31:15).[1] 잠언 31장 10-31절은 그 직장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이런 일은 어느 직장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그 다음에 잠언서는 직조 내지 포도주 제조 같은 다양한 기업의 지혜로운 관리자인 한 여인을 칭찬하는 하나의 시로 마무리한다. 잠언 31장 10절에서 번역자들은 “정숙한”(KJV), “유능한”(NRSV), “뛰어난”(NASB), 또는 “고상한 성격의”(NIV) 같은 여러 말들을 사용해서 이 여인의 성격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해당 히브리 원어(chayil)의 강점이나 그 단어가 함축한 요소들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 사람에게 적용할 경우 이 용어는 잠언 31장 3절에서처럼 “힘”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246번 나오는데, 대부분 전사들에게 적용했다. (예를 들면, 역대상 7장 2절에 나오는 다윗의 “용사들”) 번역자들은 이 단어를 여인에게 적용할 경우에, 룻의 경우처럼 힘의 요소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영어 성경에서는 룻을 “고상한”(NIV, TNIV), “정숙한”(NRSV, KJV) 또는 “뛰어난”(NASB) 사람으로 묘사할 뿐이다. 그러나 이 말을 남자에게 적용하든 여자에게 적용하든 뜻은 동일하다. 잠언 31장 10-31절에 나오는 여인을 묘사할 때, 그것의 가장 적절한 의미는 ‘강력한’ 또는 ‘용감한’이다. 잠언 31장 17절에서는 잘 번역했다.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알 월터스(Al Wolters)는 그런 군사적 표현을 언급하며 가장 적절한 번역은 “용감한 여인”이라고 주장했다.[2] 따라서 잠언 31장 10-31절에 나오는 여인을 “용감한 여인”으로 일컫고자 한다. 그 표현이 히브리 원어에 담긴 강점과 덕목을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잠언서 결론 단락에서는 이 힘의 여인을 일터에서 다섯 가지 관습을 나타낸 지혜로운 일꾼으로 묘사된다. 이 섹션의 큰 중요성은 두 가지 방향에서 나타난다. 첫째, 그것은 삼행시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시의 연들이 히브리어 알파벳 22개 글자 순서대로 시작되어 기억하기가 쉽다. 둘째, 그것은 책 전체의 클라이맥스와 요약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용감한 여인에게서 볼 수 있는 다섯 가지 관습은, 책 전체를 탐구하기 위한 틀 역할을 할 것이다.

 

   한 여인을 지혜로운 기업가의 모범으로 그리는 것은 고대 근동에 살던 몇몇 사람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도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동일하게 일이라는 선물을 주셨다는 사실(창 1-2장)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일을 남자들 일에 비해 종종 폄하하고 경시해 왔다. 잠언에 나온 내용을 좇아 우리는 이 지혜로운 일꾼을 하나님의 지혜가 남자나 여자에게 동일하게 주어졌다는 것을 이해하는 여인으로 보고자 한다. 그녀는 잠언에서 모든 사람의 일이 존귀하다고 긍정해 주는 역할을 감당한다.

 

   지혜의 길은 여호와를 향한 경외심에서 흘러나온다. 이 용감한 여인의 모든 능력과 덕목을 묘사하고 존중하자 마침내 그녀가 가진 지혜의 근원이 드러났다.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Waltke, The Book of Proverbs: Chapters 15-31, 528쪽을 보라.

Al Wolters, “Proverbs XXI 10-31 as Heroic Hymn: A Form-critical Analysis,” Vetus Testamentum 38 (1988): 446-457쪽을 보라.

지혜로운 일꾼, 신뢰할 수 있다 (잠 3:7; 6:11-19; 8:6-7; 10:18-19; 11:1, 3; 12:22, 17-20; 13:5; 14:25; 16:11; 19:)

목차로 돌아가기

   용감한 여인으로 의인화된 지혜의 첫 번째 특징은 신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잠 31:11). 신뢰는 지혜와 덕의 기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일하라 하셨는데(창 2:15), 이는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신뢰를 얻으려면 신실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윤리적 원칙을 지켜야 한다. 잠언에서 묘사한 신뢰성은 오늘날의 직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수탁자의 책임에 충실하다

목차로 돌아가기

   신뢰성의 첫 번째 요건은 우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일이 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용감한 여인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일했다. 그녀의 일은 그녀의 고객(잠 31:14), 공동체(잠 31:20), 직계가족(잠 31:12, 28), 동료 일꾼들(잠 31:15)에게 유익이 되었다. 고대 근동의 경제에서 이런 책임 분야는 모두 ‘가족’이라 불리는 경제적 실체의 범주에 들어 있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살았던 것과 동일한 처지에서 일을 한다.

 

   어떤 식구들은 요리사, 청소부, 간호사로 또는 실내에서 직물이나 금속이나 나무나 돌을 다루는 장인으로 일한다. 다른 사람들은 들이나 실외에서 농부, 목동 또는 노동자로서 일한다. ‘가족’은 생산적 기업의 전 분야뿐 아니라 대가족, 고용된 일꾼, 그리고 아마 노예들까지도 포괄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한 가족의 관리자인 이 용감한 여인은 현대적 기업가나 사장과 흡사한 사람이다. “집안일을 보살피고”(잠 31:27) 있을 때, 그녀는 자신의 기업에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뢰에 합당하게 맡은 바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용감한 여인은 가족을 위해 의무를 다하고, 가족은 그녀를 위해 의무를 다한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이익 중에서 그녀의 몫을 받으며, 이는 정당하다. 이 단락에서는 그녀의 아이들, 남편, 그리고 공동체 전체에게 그녀를 귀하게 여기고 칭찬하라고 장려한다.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잠 31:28, 31).

 

   신의성실의무(Fiduciary Duty)는 우리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고용주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고용주에게 투쟁할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고용주의 것을 도적질하거나(잠 29:24) 파괴하거나(잠 18:9) 또는 비방하는 방법으로 불만을 토로해서는 안 된다(잠 10:18). 일하지 않은 시간에 임금을 청구하지 않아야 한다. 고용주의 재산을 파괴하거나 또는 그들을 거짓으로 고소해서도 안 된다.

 

   이런 원칙을 깊이 생각하다 보면 더 깊은 의미 있는 질문을 만난다. 내부 경쟁자를 돕지 않아 조직의 생산성이나 조화를 깨뜨리는 것이 합당한가? 여행, 상금, 무료 상품 등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느라 고용주의 이익을 희생시키지는 않는가? 직원과 고용주가 서로에게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다.

 

   이 상호간의 의무는 신탁의무의 관계를 맺고 있는 기관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떤 회사가 더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고객과 더불어 협상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그러나 고객을 비밀리에 착취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은 불법이다. 곧 가치가 폭락할 것이 예상되는 CMO(주택담보 대출 증권의 일종)를 고객들에게 견실한 투자로 권장하면서 팔라고 직원들에게 명령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다.[1]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은 수탁자 책무의 시금석이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 3:7).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싶은 유혹에 간혹 빠진다. 그것은 인류 타락의 결과물이다. 유혹이 찾아오는 순간 잠언의 가르침을 떠올리자. 다른 사람들을 해하고자 할 때는, 여호와를 향한 경외심 즉,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선, 모든 일을 다스리시는 그분의 섭리, 그분의 공의를 기억하자.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Wall Street and the Financial Crisis: Majority and Minority Staff Report” (Washington DC: United States Senate, Permanent Subcommittee on Investigations). 다음 웹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hsgac.senate.gov/public/_file...isisReport.pdf

정직하게 말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

목차로 돌아가기

   정직은 신뢰의 또 다른 필수 항목이다. 정직은 진리를 말하며 진리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어떤 잠언에서는 진리를 지혜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 23:23).

 

정직하게 말하기

   잠언 6장에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곱 가지 목록이 실려 있는데, 그중 두 가지가 부정직의 형태를 띤다.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잠 6:16-19). 진실 말하기의 중요성은 잠언서 전체에 걸쳐 강조하는 내용이다.

 

내가 가장 선한 것을 말하리라 내 입술을 열어 정직을 내리라 내 입은 진리를 말하며 내 입술은 악을 미워하느니라(잠 8:6-7).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잠 14:25).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잠 21:6).

거짓 증인은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하는 자도 피하지 못하리라(잠 19:5).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잠 24:28).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요 중상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니라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0:18-19).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잠 12:17-20).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잠 25:18).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잠 26:24-25).

 

   성경에서도 거짓과 사기와 관련해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다(여호수아 2장 1절에 나오는 기생 라합의 거짓말, 출애굽기 1장 15-20절에서 히브리 산파들이 바로에게 한 거짓말, 사무엘상 21장 1-3절에서 다윗이 제사장에게 한 거짓말). 하지만 잠언은 일상적인 삶과 일에서 거짓이나 사기를 일삼아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다. 거짓은 그릇된 것이요,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거짓을 피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금하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진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파괴적이며 궁극적으로는 형벌과 사망으로 우리를 이끈다.[1] 사기를 조심하고, 도처에 있는 사기꾼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의 거짓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거짓을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주변에 흔히 널린 쉬운 잡담(종종, 진실로 포장된 거짓)처럼, 거짓은 우리가 알고 좋아하는 사람들 틈에 끼여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또는 더러 비뚤어진 심성을 가진 사람은 거짓을 믿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잠언은 우리에게 거짓말하는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사랑 안에서” - 엡 4:15 참조). 진실만이 통용되는 직장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짓말하는 혀를 증오하는 사람들 중에 속하라고 명하신다.

 

   잠언 절반에 걸쳐 거짓 증인이 되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은 특히 아홉째 계명(출 20:16)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일이며,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잠 19:5). 거짓 증언은 죄 없는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직장에서는 그 같은 거짓말이 횡행한다. 두 번째는 허위 광고다. 허위 광고는 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제품에 대한 정보가 없는 외부인(고객)을 상대로 이루어진다. 이에 반해 거짓 증언은 대개 동료에 대한 공격의 형태로 조직에서 의심 없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 다른 사람의 역할과 행위를 잘못 전함으로써 책임이나 공을 바꾸려고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런 행위는 개인뿐 아니라 전체 조직까지 해친다.

 

   어떻게 성공했는지, 왜 실패했는지 이유를 정확히 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그렇게 해야 조직을 향상시킬 수 있고, 나아가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정직에 관해 더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정직하게 행동하기

   말뿐 아니라 행위도 진실하거나 거짓될 수 있다.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르느니라”(잠 13:5). 잠언에서 언급하는 가장 두드러진 형태의 부정직한 행위는 거짓된 저울과 척도를 사용하는 일이다. “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잠 16: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잠 11:1).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잠 20:23).

 

   상품 판매 차원에서 봤을 때, 거짓된 저울과 척도는 상품을 구매하려는 고객을 속이는 행위다. 제품을 틀리게 소개하는 것, 품질 상태가 약속과 다른 것, 출처나 기원을 틀리게 말하는 것, 혹은 수량을 뻔히 속이는 것이 그 예다. 하나님은 이런 관행을 싫어하신다.

 

   정직하게 행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부정직한 행위로 수입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고객이 눈치를 채고 거래처를 옮길 것이다. 사람을 부정직하게 대해도 무사하리라고 생각될 때에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이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 추와 한결같지 않은 되는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잠 20:10).

 

   직장에서 부정직하게 처신하는 경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구약에 땅 소유권 이야기가 나오는데, 경계석을 두어서 소유권을 표시하곤 했다. 부정직한 사람은 남몰래 그 경계석을 옮겨서 이웃을 희생시키는 한편, 자신의 지분을 높이곤 했다. 잠언은 그런 부정직한 행위를 정죄한다.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잠 23:10-11).

 

   잠언은 온갖 부정직한 행위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지는 않는다. 대신 하나의 원칙을 제시한다. 부정직한 행위는 부정직한 말처럼 여호와께서 증오하신다는 것이다.

 

   말과 행위 모두에서 정직하다는 건 오늘날의 직장에서 무엇과 같은가? 정직이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이 지니는 품성의 한 부분이라면, 정직의 기준은 ‘그것이 기술적으로 참된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의 언행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가 될 것이다. 꼭 노골적인 사기만이 신뢰를 뒤흔드는 것은 아니다. 가장 교묘한 변호사를 고용한 사람이 계약서를 변경하거나 무마시켜서 이익을 취할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열량이 많이 들어 있을 뿐 아무것도 아닌 제품을 “에너지를 높여 준다”는 거짓된 표현을 써서 선전할 수 있다. 결국은 하나님이 사기당한 사람들을 변호하실 것이며 그런 습관을 용인하지 않으실 것이다(잠 23:11). 한편 지혜로운 즉, 경건한 일꾼은 그런 관습을 거부할 것이다.

 

   잠언은 반복적으로 정직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잠 11:3). “속이고 취한 음식물은 사람에게 맛이 좋은 듯하나 후에는 그의 입에 모래가 가득하게 되리라”(잠 20:17).

 

   잠언은 또 다른 형태의 사기를 재미있게 표현한다. “물건을 사는 자가 좋지 못하다 좋지 못하다 하다가 돌아간 후에는 자랑하느니라”(잠 20:14). 가격을 깎아내리기 위해 상품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다가 나중에는 ‘잘 샀다’고 만족하는데, 이 또한 일종의 부정직한 행위다. 가격에 정통한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실랑이를 보면, 이런 관행은 이젠 악습을 넘어서 즐기는 차원이 된 듯하다. 영어 사용 유권자들에게는 이민법에 반대한다고 말하면서 스페인계 유권자들을 그 반대말로 구슬리려고 하는 정치인들의 경우처럼 현대판 정보 조작에서 보면 그런 관행은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위장시킨다.

 

 

M. Scott Peck, People of  the Lie: The Hope  for Healing Human Evil, 2nd ed. (Touchstone, 1998)를 보라.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비전과리더십 역간).

지혜로운 일꾼, 부지런하다 (잠 6:6-11; 10:4-5, 26; 12:11, 24; 16:1; 18:9; 19:21; 21:5; 24:27, 30-34;  27:1, 23-2)

목차로 돌아가기

   이 용감한 여인은 부지런하다. 잠언은 그녀의 근면성을 세 가지로 묘사한다. (1) 열심히 일한다. (2)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다. (3) 수익을 낸다. 이렇게 부지런하게 일한 결과, 그녀는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열심히 일한다

목차로 돌아가기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잠 31:13).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일을 선택했고, 가정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한다.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잠 31:15). “베로 옷을 지어 팔며 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맡기며”(잠 31:24). “밭을 살펴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잠 31:16). 그러므로 일의 분복이 더 커진다.

 

   농경 사회에서는 부지런한 사람이 부유한 삶을 누렸다. 열심히 일하는 농부가 게으른 사람보다 훨씬 더 잘살 수 있다. 잠언은 게으른 사람은 결국 패망한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잠 10:4-5).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 네가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24:30-34).

 

   고대 근동에서는, 열심히 일하는 자는 번영을 누렸지만, 추수기에 한 주(週)만 빈둥거려도 배고픈 겨울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경제에서는 이런 효과가 단기간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모든 사람이 취직을 한 호경기 시절에는, 게으른 사람도 직업을 갖게 돼 부지런한 사람 못지않게 잘나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불황기에는 (그리고 신흥 경제국에서는 언제나)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이나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 것이다. 인종 차별, 노조 계약, 상사의 편애, 낙하산 인사, 그릇된 고과 제도, 관리자의 무지, 그리고 그 밖에 많은 요인들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할 수가 있다.

 

   그러면 열심히 일하는 근면성을 다룬 잠언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현대 경제에서도 일생을 두고 보면 부지런함은 대개 보상을 받는다. 일자리가 귀할 때도 부지런한 일꾼은 직장을 유지하거나 남들보다 빠르게 새로운 직장을 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둘째, 잠언에 나오는 다른 덕목의 경우에서와 같이 부지런함의 주요 원동력은 개인적 번영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부지런한 것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과업을 맡기셨기 때문이며, 그분을 경외할수록 우리는 더욱 부지런히 일하게 된다.

 

   게으른 직원은 직장에서 설 자리가 없다. 게으른 직장 동료나 부하, 상사를 경험해 본 사람은 누구나 이 신랄한 잠언에 동의할 것이다. “게으른 자는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에 식초 같고 눈에 연기 같으니라”(잠 10:26). 짐을 같이 지려 하지 않는 사람과 한 팀에 속하는 건 아무도 원치 않는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운다

목차로 돌아가기

   이 용감한 여인은 미리 계획을 세운다.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잠 31:14). 품질과 가격이 의심스러우면 그녀는 구매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능성을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밭을 살펴보고” 산다(잠 31:16). 그녀는 어떤 밭을 포도원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잠 31:16), 포도원은 계획 후 2-3년이 되기 전에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1] 그녀는 장기적 결과를 내다보고 결정을 내린다는 말이다. 잠언 21장 5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지혜로운 계획을 세우려면, 농업 자산 관리의 주기에서 보듯이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 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잠 27:23-27).

 

   포도원을 경영하는 이 용감한 여인처럼, 지혜로운 농부는 여러 해 뒤를 내다본다.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왕이나 총독도 장기적으로 앞을 내다본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잠 28:2). 잠언은 또한 개미에게 가서 장기적인 근면을 배우라고 말한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잠 6:6-11).

 

   직장에서 미리 계획을 세우는 데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잠언 24장 27절에서는 재정적인 계획을 언급한다.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너를 위하여 밭에서 준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지니라.” 다시 말하면, 당신의 밭에서 나는 소출로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댈 수 없다면 집짓기를 시작하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 28-30절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셨다.

 

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그 밖에 수많은 형태의 계획이 있으므로 잠언을 현대적 기업을 위한 계획 세우기의 지침서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계획을 세우는 데서 나타나는 지혜와 하나님의 품성 사이의 연관성을 잠언에서 다시 한 번 주목해 볼 수 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하나님은 매우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시므로 우리도 지혜를 얻어 미리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계획을 세울 때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계획을 성취시킬 힘이 없기 때문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 27:1). 우리는 지혜롭게 계획을 세우고 겸손하게 말하되,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가 되기를 기대해야 한다.

 

   성공을 바란다면 장기적 결과에 유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자기만족을 보류할 수 있는 능력 즉, 장기적인 결과에 기초하여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학업 성공에서 지능지수보다 훨씬 더 좋은 가늠자라고 한다.[2] 유감스럽게도 크리스천들은 가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 6:34)라는 구절을 ‘내일을 위해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잠언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더불어 이런 해석이 제멋대로 한 잘못된 해석임을 보여 준다. 사실상, 크리스천의 삶 전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온전케 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므로,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삶이다.

 

 “포도 재배”(Vine Growing). 2011년 11월 11일에 vinegrowing.com에서 봤다. 이 링크는 더 이상 활성화되어 있지 않으나, https://web.archive.org/web/20111113045248/http://vinegrowing.com/에서 볼 수 있다

 Angela L. Duckworth and Martin E.P. Seligman, “Self-Discipline Outdoes  IQ  in Predicting Academic Performance of Adolescents,” Psychological Science 16, no. 12 (2005), 939-944쪽. 이와 비슷한 결과들을 Mischel and Shoda (Science, 1989), Rosenbaum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1986)과 Bialer (Journal of Personality, 1961)에서 다루었다

기업의 수익성에 기여한다

목차로 돌아가기

   이 용감한 여인은 그녀의 일에 시장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상인들이 어떤 제품을 구매하는지 알았고(잠 31:24) 신중하게 재료를 골랐으며(잠 31:13) 양질의 제품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잠 31:18b). 그녀는 “자기의 무역하는 것이 이로운 줄을 깨달았으므로”(잠 31:18a), 그녀의 가족과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재료를 확보했다. 잠언은 일꾼 개개인의 부지런함이 사업 전체의 수익성에 기여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잠 21:5). 그 반대되는 실례도 잠언에 있다.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잠 18:9). 게으른 일꾼은 기업을 고의로 파괴하는 자나 다름없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를 듣고 배워야 한다.

 

   수익과 관련한 이런 잠언은 하나님의 품성에 기초를 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익성 있는 일을 하기 원하신다. 배정받은 업무를 완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의 일이 실제로 재료, 자본 그리고 노동의 가치를 증진시키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열린 경제에서는 경쟁을 통해 이윤을 내는 것이 매우 도전적인 일이 될 수 있다. 부지런하지 못한 즉, 게으른, 어리석은 또는 방탕한 자들은 신속히 손실, 파산 그리고 파멸에 빠진다. 부지런한 이들, 즉, 열심히 일하고 창조적이며 집중해서 일하는 이들은 사업을 운영할 때 이윤을 남길 수 있게 거룩히 섬긴다.

 

   크리스천들이 이윤의 중요성을 언제나 성경적 관점에서 인식해 온 것은 아니다. 사실 사람들은 이윤을 종종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사람 대 이윤”이라는 관점에서 논의한다. 투자를 해서 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을 생산해 내는 일을 통해 이윤이 발생한다고 믿기보다는 구매자, 노동자 또는 공급자를 편취해서 이익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이는 사업과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결과다. 사업을 진실로 성경적 기준으로 평가하려면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이윤을 남기는가?”, “어디서 이윤이 발생하는가?”, “독점, 위협 또는 사기로 얻은 이윤은 아닌가?”, “이윤이 일꾼, 관리자, 소유자, 임대업자, 공급자, 고객 그리고 세무서 사이에 어떻게 분배되는가?” 건전한 수익성을 창출하는 일은 근로자나 사업주에게 용기를 줄 뿐 아니라 축복이 된다.

 

  자기가 하는 일에 수익성이 있는지 모든 일꾼들이 다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건 아니다. 대기업의 직원들은 각자 맡은 일이 기업의 수익성에 얼마큼 긍정적으로 기여하는지를 거의 알지 못할 것이다. 회계학적 의미에서의 수익성은 교육, 정부, 비영리 기업, 가정 등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모두 자기가 하는 일이 조직의 임무 달성에 어떻게 기여를 하는지, 또 그들이 부가하는 가치가 그들이 얻어 가는 급여나 다른 자원보다 더 큰지 등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종의 봉사다.

 

   이 용감한 여인은 가업을 수익성 있게 경영함으로써 많은 칭찬을 받는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잠 31:10). 이것은 감상적인 찬사가 아니라, 진정한 칭찬이다. 기업을 잘 운영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보석이나 다른 재물을 쌓아 두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이윤을 발생시킬 수 있다.

 

부지런한 일꾼, 평온함 속에 살아간다

목차로 돌아가기

   이 용감한 여인은 부지런했고, 부지런함을 밑거름 삼아 미래를 열망하게 되었다. “능력과 존귀로 옷을 삼고 후일을 웃으며”(잠 31:25). 잠언이 개인의 번영을 약속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부지런함은 우리를 보다 더 나은 미래로 인도할 것이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잠 12:11).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잠 28:19).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잠 12:24).

 

   부지런함이 미래의 슬픔이나 재난까지 막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앞날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하며, 부지런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과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하라고 하신 일을 한 뒤 평온함 속에 살아갈 수 있다.

 

지혜로운 일꾼, 영리하다(잠 1:4; 15:22; 19:14; 20:18; 21:30; 31:13-14, 17, 21-23)

목차로 돌아가기

   이 용감한 여인은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는 일꾼의 실례다. 잠언은 이 덕목을 ‘슬기롭다’(잠 19:14, NRSV) 또는 ‘분별 있다’(잠 1:4, NRSV)로 묘사한다. 영리한 사람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을 편취하는 자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잠언에서는 자원과 상황을 가장 잘 쓰는 사람으로 해석한다. 만일 우리가 영리함을 “재치 있고 분별력 있는 의식과 빈틈없는 총기”로 이해한다면,[1] 잠언을 통해 하나님이 일꾼들에게 원하시는 종류의 영리한 지혜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예리한 인식과 판단력을 갖고 있다

 

   이 용감한 여인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재료를 분석함으로써 슬기로움을 드러냈다.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며”(잠 31:13-14). 오늘날의 제조업자나 장인들은 재료 선택에 슬기로울 것이며, 지혜롭지 못하게 내구성이 약한 재료를 택하지 않을 것이다.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 시장 분석, 물류, 전략적 제휴 그리고 공동체 형성은 장차 큰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판단력이 매우 귀중하다. 온갖 형태의 투자가 가져올 위험이나 보상을 고객의 필요에 연계시킬 수 있는 투자 고문은 신성한 섬김을 행하는 것이다.

  

생길 수 있는 우발적 사건에 대해 대비한다

 

   “자기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자기 집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하지 아니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잠 31:21-22). 그녀는 재료를 준비할 때 다가오는 겨울 날씨의 모든 우발적 상태에 대비했다. 그녀는 계절에 따라 가족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의복과 침구류(“덮을 것들”)를 준비했다. 묘사한 재료를 보면 화려하거나 비싼 재료(“세마포와 자색 옷”)인데, “홍색 옷”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sanim)는 ‘여러 겹으로 되어 따뜻한 옷’ 즉 “이중 옷”(shenayim)을 필사자가 오역(誤譯)한 듯하다.[2]

 

   이 여인은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경계하면서 그런 문제가 생기기 이전에 해법을 찾아서 애쓴다. 남편을 위한 그녀의 준비성을 보라. 의복과 침구를 마련하는 중에 그녀는 남편의 공적 역할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잠 31:23).

 

   그녀의 남편이 공무를 보는 중에 눈이 온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는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녀의 모든 식구’가 이미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하게 의복을 갖춰 입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적 이야기에 비유하면 의미가 조금 더 명백해질 것이다. 한 저명한 정치가가 갑자기 눈보라를 만났다고 상상해 보라. 그는 즉시 날이 선 중절모를 쓰고 그에 어울리는 외투와 장화도 갖춰 착용하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신문지를 찾아 헤매며, 젖은 신발 속으로는 진눈개비가 흘러들어 발이 금세 젖어 버릴 것이다. 

 

유익이 되는 조언을 구한다

 

   어떤 부류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신화와 같은 얘기가 있는데, 극히 영리한 지도자는 조언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명민함은 바로 ‘너무 약해서 다른 사람들은 잘 볼 수 없는 기회’를 감지하는 능력이다. 많은 사람이 조언을 해 주지만 그것이 현명하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지혜로도 못하고, 명철로도 못하고 모략으로도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느니라”(잠 21:30). 만일 어떤 생각이 나쁘거나 잘못되었다면 (“여호와의 뜻에 어긋나면”) 아무리 예스맨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해도 그 생각을 좋거나 지혜롭게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충고에 귀를 닫고 반대하는 천재에 대한 신화는 현실에서는 드물다. 창의력과 빼어남은 여러 가지 관점 위에서 성립된다. 혁신은 알려진 것에 주목하면서 미지의 것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전통적인 지혜를 거부하는 위대한 지도자는 대개 먼저 그것을 통달한 다음에 그것을 넘어서는 사람이다.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잠 15:22). 잠언 20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지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보완적 강점을 이용한다. 심지어 새로운 분야로 진출할 때에도 그렇게 한다.

 

자신의 기능과 지식을 계속 업그레이드한다

 

   이 용감한 여인은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한다(잠 31:17). 그녀는 일을 잘 해내기 위해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애를 쓴다. 그녀는 팔을 강력하게 만들며 힘으로 허리를 묶는다. 슬기로운 사람은 자신의 기능과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행동한다.

 

   선진국에서는 산업경제가 기술경제에 자리를 내어줌에 따라, 고용주와 직원 모두 지속적으로 훈련하고 교육받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많은 신흥 경제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당신이 오늘 하는 일을 앞으로 10년 후에도 동일하게 하고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기민한 일꾼은 이것을 인식하여 직장에서 다음 기회를 위해 재훈련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고용주가 오늘날 여러 직책에 필요한 기능을 가진 근로자들을 만나기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평생 학습을 위해 효과적인 체계를 개발하는 개인, 조직, 사회가 가장 큰 성과를 내게 될 것이다.

 

 Merriam-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 제11판, s.v. “shrewd.”

Murphy, Proverbs, Word Biblical Commentary, 247쪽. 비록 마소라 학자들(Masoretic; 마소라는 유대교 성경의 권위 있는 히브리어 본문이다. 7-10세기에 걸쳐 활약한 마소라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구약 성경 헤브라이어 교정본이다–편집자 주)은 아니었지만, 칠십인역(LXX; BC 300년경에 번역되거나 집필된 고대 그리스어인 코이네 그리스어[헬라어]로 쓰인 구약성경이다–편집자 주)과 불가타 성경(Vulgate; 가톨릭교회에서 공적으로 쓰는 라틴말 번역 성경이다. 성 제롬이 4세기 말엽에 번역했다–편집자 주)은 이 해석을 채택했다.

지혜로운 일꾼, 너그럽다 (잠 11:24-26; 19:17; 28:27; 31:19-20)

목차로 돌아가기

   이 용감한 여인은 너그럽다.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잠 31:20). 성경은 관대한 자를 칭찬하는데, 여기서 이 용감한 여인이 그런 칭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녀의 관대함이 성격상 유쾌한 기질 덕이라고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그녀의 관대함은 잠언 31장 19절과 20절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의 일의 한부분이며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손(yade)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kappe)으로 가락을 잡으며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kap)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yade)을 내밀며.

 

   이 두 성구에서 두 가지 상이한 히브리 단어를 “손”으로 번역했다. 만일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본다면, 첫째 성구에서는 ‘yade’ 다음에 ‘kappe’의 순서로 나오고, 두 번째 성구에서는 ‘kap’ 다음에 ‘yade’가 나온다(kappe는 kap의 복수형이다). 이 A-B-B-A 형태의 교차 대구법적 구조는 성경에 흔히 나오는 것으로써, 전체 구조가 단일한 생각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다시 말하면, 그녀의 일과 그녀의 관대함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방적 일에서 성공한 덕분에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었다. 반대로, 그녀의 너그러운 정신은 기업가요 경영자인 그녀가 가진 능력의 필수 요소가 된다.

 

   잠언에서는 관대함과 수탁자의 의무는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정의 여러 자원을 가지고 어려운 형편의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은 재산을 줄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리는 것이다. 이런 역설적인 주장은 잠언서 전반에 걸쳐서 등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대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만일 남들한테 너무 많이 주면 그들 자신이 쓸 것이 충분히 남지 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언은 정반대라고 가르친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잠 11:24-26).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잠 28:27).

 

지혜로운 일꾼, 공정하다(잠 3:27-28; 8:15; 14:21, 31; 16:8, 12-13; 17:5; 21:6, 13; 22:8-9, 16, 22-23; 24:17; 25:

목차로 돌아가기

 

   잠언은 관대함을 권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공의로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첫째,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부자와 권력자들이 그들을 편취하거나 억압하기 때문이라고 인정한다. 더구나 가난한 이들에게서 편취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일은 더욱 쉽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혐오하시며,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잠 22:16).

약한 자를 그가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곤고한 자를 성문에서 압제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신원하여 주시고 또 그를 노략하는 자의 생명을 빼앗으시리라(잠 22:22-23).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잠 22:8-9).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잠 28:8).

 

   첫 번째 기본적인 원리가 잠언 16장 8절에 나와 있다.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두 번째, 비록 당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편취하거나 억압하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서 당신은 그들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채워 주는 일부터 시작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1:13).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1).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 3:27-28).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 17:5).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에서 지혜가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관대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공의를 좇아서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 일 또한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혜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그분이 바라시는 바를 행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때 생겨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 주어 궁핍함을 없애려 하신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돌보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궁핍을 없애는 일은 공의의 문제다.

 

   이 잠언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직접적 접촉을 가정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관대함이란 기부금을 내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는 것이며, 함께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또한 주거, 쇼핑, 교육, 일, 정치 등과 관련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중산층 및 부유층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일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당신은 다양한 사회 · 경제적 수준의 사람들과 매일 접촉하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세계는 너무 편협한 것일지 모른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관대함과 공의는 근로자 개개인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덕목이 우리 회사에도 적용이 가능할까? 대부분의 잠언은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용감한 여인 부분에서는 그녀를 한 가업의 관리자로 묘사한다. 그리고 우리가 보아 온 대로, 그녀의 관대함은 그녀의 일에 방해 요소가 아니라 필수 요소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기업들은 주주들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상상력이나 기능이 부족한 듯 보인다. 예를 들어서, 신문의 금융 면을 잠깐 훑어보기만 해도 많은 회사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편취하거나 억압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재산을 정가 이하로 팔도록 하는 것이나, 그들의 무지를 이용한다거나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여 의심스러운 제품을 팔려 한다거나, 취약한 사람이나 다른 삶의 대안이 없는 이들로부터 과도한 단기 이윤을 짜내려 하는 일 등 말이다. 왜 그런 회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재물을 탈취하는 것이 이윤을 내는 유일한 (또는 최선의) 방식이라고 믿는 것일까? 제로섬 접근법을 써서 기업이 실제로 이해관계자의 투자 이익을 향상시킨다는 증거가 있던가? 이런 관습 중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진실로 더 높은 장기적 수익성이나 권력으로 연계되는 것일까? 아니, 그와는 정반대다.

 

   최고의 기업은 고객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직원과 주주와 투자자들에게 훌륭한 수익을 제공하기 때문에 성공한다.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기업과 조직들은 경제적 · 정치적 · 경쟁적 위협으로부터 공동체 차원의 지원, 일꾼들의 헌신, 사회적 보호가 필요할 경우 보다 유리한 위치에 놓일 것이다.

 

공의를 추구하는 정부 정책

 

   잠언은 기업 이외의 다른 조직에게도 공의를 요구한다. 특히 왕을 언급하는 많은 성구에서는 정부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정부에도 기업과 같은 메시지를 준다. 정부는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공의를 행할 경우에만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있다.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잠 29:14).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잠 29:4).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 그리하면 그의 왕위가 의로 말미암아 견고히 서리라(잠 25:5).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잠 16:13).

악을 행하는 것은 왕들이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잠 16:12).

 

   지혜로운 정부의 기초 역시 여호와께 대한 경외심이다.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잠 8:15). 왕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잠언들은 현대 사회의 정치 지도자와 공무원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주 사회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정부 및 공공 정책에 참여한다. 대표자들과 접촉하고 후보자를 위해 투표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한 사람들에게 공의를 가져다주는 참정권 문제는 오늘날 지혜에서 기인한 공의를 입법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모두가 번성하기 위한 경쟁

 

   잠언은 경쟁과 투쟁에도 관대함과 공의를 요구한다.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잠 25:21-22).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20절에서 이 잠언을 문자 그대로 인용하면서 전할 말을 결론짓는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더 나아가서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 24:17). 원수에게도 너그러워야 한다고? 사도 바울과 잠언 저자들은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여호와께서 보상을 주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개인적이든(예를 들면 승진 경쟁자) 집단적이든(예를 들면 경쟁사) 간에 경쟁자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될까? 잠언에 현대적 경쟁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만일 원수에 대한 섬김까지도 장려한다면, 경쟁자에 대한 섬김 역시 장려하게 된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공모나 과두정치와는 다르다.

 

   시장 경제가 거의 전 세계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은 경쟁 때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기업, 정치 그리고 다른 형태의 경쟁은 중대한 경쟁적 국면을 띠고 있지만, 실은 협력의 형태들이다. 사회가 경쟁을 촉진하는 것은 모두가 번성하기 위함이다. 경쟁에서 실패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보응은 궁핍으로 내몰리는 게 아니라, 더 생산적인 일로 전환되는 것이다. 많은 회사들이 도산하기도 하지만, 성공적인 경쟁자들이 반드시 독점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기는 하지만, 승자가 헌법을 개정하여 패자를 유폐시키는 것은 아니다. 경력에 부침이 있겠지만, 실패에 대한 정당한 보응은 “당신은 이 도시에서 다시는 일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당신의 재능에 더 맞는 일을 찾도록 도우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다.

 

   지혜로운 개인이나 조직은 경쟁에 참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경쟁은 각자의 참여를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오늘 실패한 사람을 연착륙시켜서 내일 값진 기여를 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일꾼, 혀를 지킨다(잠 6:2, 17; 10:20, 31; 11:12-13; 12:18-19, 25; 15:1-2, 4, 18; 16:1, 27-28, 32; 17:4,

목차로 돌아가기

   이 용감한 여인은 자신의 언행을 늘 조심했다. 잠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잠 21:23). 가끔 농담조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잠 17:28).

 

   잠언은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혀에 대해 많이 다룬다(잠 6:17, 24; 10:20,31; 12:18, 19; 15:2, 4; 16:1; 17:4, 20; 18:21; 21:6, 23, 25:15, 23; 26:28; 28:23; 31:26). 의롭고 부드러운 혀는 지혜(잠 10:31), 치유(잠 12:18), 지식(잠 15:2), 생명(잠 15:4;18:21)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잠 16:1)을 가져다준다. 사악하고 부주의한 혀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하고(잠 6:17), 기분을 상하게 하며(잠 15:4), 악을 조장하고(잠 17:4), 재난(잠 17:20), 고통(잠 21:23), 분노(잠 25:23)를 초래하며, 뼈를 상하게 하며(잠 25:15), 파멸을 가져오고(잠 26:28), “사망의 덫”이 되기도 한다(잠 21:6).

 

   의사 소통은 거의 모든 직장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게다가 직장에서 나누는 친교적 대화는 업무 관계를 개선시키기도 하고 망치기도 한다. 잠언은 말을 지혜롭게 하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까?

 

 

험담을 피한다

 

   직장에서 험담은 진실로 문제가 되는가, 아니면 무죄한 수다일 뿐인가? 잠언은 그 위험성을 지적한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 20:19).

 

   험담은 다툼을 낳는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6-8).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잠 26:20-21).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 16:27-28).

 

   험담은 신뢰, 즉, 지혜로운 사람의 기본적인 덕목을 파괴시킨다.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 11:12-13).

 

   험담은 다른 사람들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게 하고, 어떤 사람의 정직성이나 어떤 사람이 내릴 결정이 정당한지 의심하게 만든다. 험담은 다른 사람의 동기에 악한 의도를 불어넣으며, 따라서 스스로 거짓의 아비가 되기도 한다. 험담은 전후 맥락을 무시한 채 다른 사람의 말을 전달하고, 화자의 의도를 왜곡하며, 비밀로 유지했어야 할 것을 드러내고, 그 자리에 없어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누군가를 희생시키면서 험담하는 사람을 높이려 한다. 험담이 직장에서 얼마나 파괴적이 될 수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험담이 사람의 평판이나 프로젝트의 가치, 또는 상사의 지위에 의문을 가지게 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드리우는 그림자는 험담하는 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방어적으로 만들고, 의심하게 만든다. 험담은 직장에서 근로자들 사이에 분란만 일으킬 뿐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구역질나게 만드는 죄 목록에 남을 두고 수군대는 일을 포함시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롬 1:29).

 

친절한 어조로 말한다

 

   이 용감한 여인은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한다’(잠 31:26). 누군가 자기 앞에서 분노를 분출하는 일을 누가 반기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 잠언에서 경계하는 위험성을 쉽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잠 15:18).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분노를 성공적으로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을 묘사해 내기에 잠언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죄를 마주하면 당연히 ‘분노해야’(도덕적으로 화가 나야) 하지만, 그렇다고 “분노”(격노)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지혜로운 사람은 부드럽게 대답하고 과오를 너그럽게 봐주며 다툼을 잠재운다. 이 용감한 여인의 혀는 친절한 가르침을 베푼다. 이런 사람들은 “용사보다도 낫다.” 짜증이 나고 성이 날 때 직장에서 이런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생활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의 언어를 통제하고 화나게 하는 말을 피할 뿐 아니라, 가끔 다툼이 발생하더라도 침착함을 유지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는 말을 한다

 

   지혜로운 혀에서 나오는 축복은 다음과 같은 현실에 기초를 둔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잠 25:11-12).

 

   직장에서 일하다 보면 동료들이 종종 화를 내는 일이 있다. 그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친절한 한마디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 12:25). 언제나 좋은 말을 해 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기(잠 15:4) 때문이다. 진실로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전자기기로 무장한 오늘날의 직장에서는 다양한 수단이 “혀”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이메일, 블로그, 트위터, 언론 매체 등으로 빛의 속도로 전파된다.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하며, 사망과 생명이 진실로 직장에서 우리가 서로 나누는 말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Ronald A. Heifetz and Martin Linsky, Leadership on the Line (Boston: Harvard Business School Press, 2002); 이 주제에 대해 더 자세한 것을 보려면 특히 5장의 “갈등 조화시키기”를 보라.

지혜로운 일꾼, 겸손하다

목차로 돌아가기

   잠언은 겸손한 태도를 권하며(자만을 피하도록 하며) 돈을 사용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다(낭비를 피하도록 한다). 이런 덕목들은 이 용감한 여인을 묘사하는 데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언서 다른 곳에서는 아주 강력하게 나타나며 일에는 아주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고는 잠언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자신을 바로 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6:18-19). 특히 18절은 가장 잘 알려진 잠언이며, 다른 잠언들도 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잠 21:4).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 29:23).

 

   그렇다면 이런 잠언들이 자기 존중을 금하는 명령일까? 아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여호와께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권고요,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인식하라는 권고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정직한 만큼 우리 자신을 잘 알 수 있다. 만일 여호와를 두려워한다면, 더 이상 우리의 자아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우리 자신을 과장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이 깨어진 죄와 파멸의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의인들이 직장에서 가야 하는 길도 아신다. 하나님은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높이신다.

 

 

 재물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는다

 

   잠언 마지막에서 두 번째 단원의 저자이자 고대 현자인 아굴은 지혜로운 기도문을 남겨 놓았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7-9).

 

   직장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혜로운 말이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우리는 생계를 해결하고, 지친 몸을 위로받고 편안히 쉬며, 가족을 부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사회에 무언가 공헌하기 위해 일을 한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우리는 더 많이 얻기 위해 아등바등하는가? 아굴은 그런 모습을 하나님을 제외시킨 삶, 창조주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무시한 처사와 연계시킨다. 아굴은 또한 궁핍하게 살지 않게 해 달라고, 즉,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것은 정당한 기도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그러나 만일 끊임없이 재물을 추구한다면, 이는 지혜의 길을 버린 것이다. 재물이 자칫 성공과 자아의 가치를 나타내는 증거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그것을 좇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물이 주는 위로는 허상이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라 그가 높은 성벽같이 여기느니라”(잠 18:11).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잠 28:11). 재물이 문제를 끝내 주지 못한다. 단지 궁핍이 주는 문제가 재물이 주는 문제로 바뀔 뿐이다.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잠 13:8). 또 재물이 불안감을 해소해 주지는 못한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잠 11:28).

 

   물질적 풍요를 위해 삶의 풍요를 희생시키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잠 28:22).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특히 지혜로운 이들은 은행 잔고보다는 자신들을 정직하게 평가하는 말에 더 신경을 쓴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잠 22:1).

 

   잠언이 재물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재물은 복이 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잠 10:22). 다만 재물에 대한 집착은 분명 해롭다.

 

   이 용감한 여인을 통해 잠언을 탐독하면 현숙함에 관한 유익한 인생 지침을 찾을 수 있다. 일에 관한 것 외에도 잠언은 깊이 연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잠언의 유익함을 발견했다면, 잠언을 거듭 읽으면서 추가적인 의미와 적용을 찾아내고 하나님의 지혜에 비춰서 자신의 경험을 되새겨 보기를 바란다. 

 

 

잠언 결론

목차로 돌아가기

   결국 우리의 일하는 습관은 우리 인격이 만들어 간다. 그리고 인격은 여호와의 계시를 얼마나 알고 또 얼마나 경외하는가에 따라 형성된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 갈수록 우리 인격은 하나님을 닮아 갈 것이다. 참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지혜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을 포함해 삶의 모든 영역에 생명을 가져다준다. 지혜는 신뢰할 만한 행위, 부지런함, 건전한 영리함, 너그러움, 궁핍한 사람을 위한 공의, 말하는 습관의 변화, 겸손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지혜로워지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정하시며 우리의 영원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신뢰할 수 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