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신명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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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의 신명기의 주요 주제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이슈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일의 의미와 가치: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개인과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축복. 실패의 결과와 성공의 위험. 다른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대리해야 할 책임.
  • 일터에서의 관계: 좋은 인간관계의 중요성. 다른 사람의 위엄과 존엄성 개발. 일터에서 타인을 해하거나 그들에 대해 부당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
  • 리더십: 리더십과 권위의 현명한 행사. 승계 계획과 훈련,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할 지도자의 책임.
  • 경제적 정의: 재산과 노동자 권리와 법원 존중. 자원의 생산적인 사용. 대부와 차용, 정직한 상업적 계약 및 공정한 거래.
  • 일과 안식: 일해야 할 의무. 휴식의 중요성. 일하든 쉬든 우리를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상업과 직업이 수 세기를 두고 변했다고 해도, 신명기는 우리가 하나님 사랑에 반응해 어떻게 우리 일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책의 극적이고 통일된 설명 때문에라도 신명기는 특히 돋보인다. 예수님은 신명기를 대대적으로 인용하셨다. 사실 예수님이 최초로 인용한 성구는 신명기로부터 나온 세 단락이었다(마 4:4, 7, 10). 신약은 신명기를 50번 이상 언급하는데, 이는 시편과 이사야서 다음으로 많은 인용 횟수다.[1] 그리고 신명기에는 저 위대한 계명의 최초 형태가 담겨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신명기에 나오는 이 모든 주제 근저에는 이스라엘과 진실하신 하나님 한 분과의 언약이 자리잡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것은 다음 언약으로부터 흘러나온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 게 두지 말지니라”(신 5:6-7). 사람들이 주님만을 예배할 때 좋은 통치, 생산적인 일, 윤리적 상업, 공공선 및 모든 이에 대한 공정한 처우가 일반적으로 뒤따른다. 반면 사람이 다른 동기, 가치, 관심사를 하나님보다 앞세울 때 일과 삶은 고통으로 채워진다.

 

   신명기는 다른 율법서(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와 동일한 내용을 다루지만, 특별히 십계명을 통해 일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킨다. 다른 책에 나오는 사건과 가르침을 반복해 말하면서 모세는 하나님 백성의 삶 속에서 일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듯하다. 이것이 마치 전조라도 되는 듯, 크리스천들은 오늘날 일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성경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이전에 짐작했던 것보다 일을 더 중요시 하신다는 것과 하나님 말씀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에 대 해 더 많은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것을 발견한다. 

 Bruce K. Waltke and Charles Yu, An Old Testament Theology: An Exegetical, Canonical, and Thematic Approach (Grand Rapids: Zondervan, 2007), 479-480쪽. 브루스 월키, 《구약 신학》(부흥과개혁사 역간)

반역과 안일 (신1: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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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최근에 겪은 주요사건을 되새기는 모세의 연설로 시작된다. 모세는 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도출했으며,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의에 응답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권고했다(신 4:40). 반역이나 안일 때문에 하나님과의 신뢰가 깨지는 것은 일의 신학을 살펴볼 때 특히 중요하다.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길 거부한 이스라엘 (신1: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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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에서, 사람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실패로 이어졌다. 그 결과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해 주신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반기를 들었다(신 1:7-8).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건지셨으며, 호렙(시내)산에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들을 약속하신 땅의 변경으로 신속히 인도하셨다(신 1:19-20). 그러 자 모세는 그 땅으로 들어갈 때가 됐다고 선언하지만 백성은 그 지역을 점령한 아모리 사람을 보고 두려워했다. 그들은 계획을 신중히 세우자는 일환으로 먼저 정탐 분대를 보내자고 모세를 설득했다. 정탐 분대는 그 땅에 대한 좋은 보고를 들고 돌아왔다. 이때 백성의 진짜 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두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다’라고 모세에게 말하며 ‘낙심이 된다’(신 1:28)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성취하시리라고 신뢰하지 못했고, 결국 그분의 명령 따르기를 거부했다.

 

   하나님의 반응은 엄중했다.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신 1:35). 가나안에 입성하는 것은 자녀 세대로 미뤄졌으며 그 부모들은 영구히 기회를 잃고 말았다. 모세조차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아마도 정탐꾼을 보내기로 동의했을 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뢰도 적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좋은 땅”을 차지하는 대신 평생 광야에서 살다 가야만 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신 1:25). 그들은 뒤늦게 아모리 사람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선언하셨다.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신 1:42).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함으로써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마련해 놓은 축복을 놓치고 말았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어기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을 향한 신뢰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길을 이탈하는 데서 지켜 줄 수 있다. 이것은 도덕적인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는 데 실패했는데, 우리가 성공하리라고 진실로 자신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실 하나님 은혜에 달린 문제다. 옳은 것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때, 우리는 우리를 강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실패할 때도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 인생에서 커다란 대가를 치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실패도 하나님의 은혜로 만회될 수 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책 5장의 “민 13-14장” 부분을 보라.

성공이 안일로 이어질 때 (신4: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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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저버린 일은 두려울 때뿐 아니라 성공했을 때도 발생했다. 첫 번째 연설에서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는 번영에 대해 묘사했다. 모세는 성공이 실패보다 훨씬 더 위험한 영적 안일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일으키면 ……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신 4:25-26). 신명기 5장 8절에서 우상숭배에 대해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초점은 안일에 의해 초래되는 영적인 위험에 있다. 사람은 성공하면 하나님을 더 이상 경외하지 않고 성공이 타고난 권리라고 믿기 시작한다. 감사하는 대신에 마땅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도덕적으로는 위험할 수가 있다. 우리가 달성한 성공은 실은 약간의 기술과 수고에 행운과 하나님이 통상적으로 내려 주시는 은혜가 가미된 것이다. 실제로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필요, 욕망, 안정에 대해 내세울 게 하나도 없다. 성공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성공이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역대하에 나오는 웃시야 왕의 삶이다.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대하 26:15-16).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진정한 안정과 만족을 발견할 수 있다(시 17:15).

 

   안일해진 결과가 무신론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사람들이 주님을 저버리면 영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모세는 예견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신 4:28). 모세 시대에는 아마도 ‘종교 없는 삶’이라는 개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종교와 분리된 삶’이라는 개념이 있다. 점점 더 커지는 세속주의의 물결이 ‘부패한 종교 제도, 신념, 관습에 지배되는 족쇄처럼 보이는 것’(틀린 지적은 아니다)을 던져 버리려 한다. 그러나 종교를 거부한다고 해서 인간이 진정한 자유를 얻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인간이 날조한 신’을 위한 예배로 대체될 것인가?

 

   이 질문이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긴 해도, 이것은 일, 직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후반 전후만 해도 기업 윤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경에 근거를 두고 이루어졌다. 이런 관행이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일과 관련된 권력 투쟁에서 밀리는 측 사람에게 상당한 힘이 됐던 것은 사실이다. 가장 극적인 경우는 종교에 근거해서 영국과 미국에서 벌어졌던 노예제도 반대 투쟁일 것이다. 결국 그것으로 노예 거래와 노예제도 자체가 모두 성공적으로 폐지될 수 있었다. 세속화된 조직 내에서는 그 누구도 어떤 뚜렷한 도덕적 권위에 호소할 수 없다. 그 대신 밀턴 프리드먼이 말한 대로, 윤리적인 결정이 법과 “윤리적 관습”에 기초해서 내려질 수밖에 없다.[1] 법과 윤리적 관습은 사람이 만든 것이므로, 기업 윤리는 점차 힘 있고 인기 있는 자의 지배하에 놓인다. 누구도 종교 지도자에게 지배받는 직장을 원하지는 않겠지만, 완전히 세속화된 직장은 그저 다른 종류의 착취에 문을 열어 주는 것일 뿐이지 않을까? 신자라면 하나님의 신실함이라는 축복을 직장에 가져다주면서도 그들 자신의 특권은 주장하지 않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이 반드시 안일로 이어진다는 얘기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인도가 우리가 얻는 모든 성공의 뿌리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자기만족이 아닌 감사를 드릴 수 있다. 그럴 때 우리가 경험하는 성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다. 여기서 경고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역경보다 도리어 성공이 영적으로 더 위험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모세는 더 나아가 신명기 8장 11-20절에서 이스라엘에게 번영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 장의 “신 8:11-20” 부분을 보라.

 

 

 Milton Friedman, “The Social Responsibility of Business Is to Increase Its Profits,” New York Times, September 13, 1970.

하나님의 율법과 그 적용 (신4:44–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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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는 이 책의 중심부를 이루는 두 번째 연설로 계속 이어진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율법, 즉 이스라엘 삶의 기준이 되는 원칙과 규칙을 다룬다. 서사적 도입부(신 4:44-49) 이후에 나오는 연설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 모세는 십계명을 강론한다(신 5:1-11:32). 두 번째 부분에서 그는 이스라엘이 따라야 할 “규례와 법도”를 상술한다(신 12:1-26:19). 세 번째 부분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킬 때 경험할 축복과 어길 때 받을 저주에 대해 설명한다(신 27:1-28:68). 따라서 제2연설은 먼저 전반적인 원칙(신 5:1-11:32)을 기술한 뒤 특정 규칙(신 12:1-26:19)이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순종이나 불순종의 결과가 나오는 구조를 띤다(신 27:1-28:68).

십계명 (신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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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계명은 일의 신학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필수 요건을 기술하며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일을 지배하는 핵심 원칙을 묘사한다. 모세의 설명은 이 책에 나오는 진술 중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수 세기 후에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으뜸이 되는 계명이다. 그때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덧붙이셨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 22:37-40). 이 ‘두 번째로’ 가장 큰 계명은 신명기에 명시적으로 기술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십계명이 진실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친다는 사실을 볼 것이다.

 

   넷째(안식일 지키기), 다섯째(부모 공경하기), 열째(탐내지 말기) 계명들 내의 근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이 단락은 문법적 차이만 약간 보일 뿐 사실상 출애굽기 20장 1-17절과 동일하다. 이 계명들 중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특히 일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는 점은 흥미롭다. 우리는 이제 이 책 3장의 내용을 반복해 살펴보면서 추가적으로 출애굽기와 신명기 서술 간의 차이도 탐구해 볼 것이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신5:7; 출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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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계명은 토라 속에 담긴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 사랑은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에 반응한 것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구원하셨을 때 드러났다(신 5:6). 인생에서 그 어떤 욕망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커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보다 더 강력한 다른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규칙을 어기고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과 관계 맺으며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른 관심사가 돈, 권력, 안정, 명예, 성적 쾌락, 여타 어느 것이든 간에 우리의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가짜 신’들은 그 나름의 계명을 갖고 있어서 참된 하나님의 계명과 불화를 일으킬 것이며, 우리가 그 ‘가짜 신’의 요구 조건에 응하는 순간마다 반드시 토라를 위반하게 된다. 십계명을 지키는 첫 발걸음을 떼는 것은 여호와 이외의 다른 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일과 관련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일이나 그 조건과 열매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어 그것이 하나님을 대체하게끔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데이비드 길이 말한 대로, “아무도, 아무것도 당신 삶 속에서 하나님이 차지한 중심적 위치를 절대 위협하지 못하게 하라.”[1]

 

   많은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므로, 돈에 대한 과욕은 일과 관련해서 첫째 계명을 어기게 만드는 가장 흔한 위험이 된다. 예수님도 바로 이 위험을 경고하셨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어쨌든 일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우리 욕망을 왜곡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에 지장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한 사랑을 성취하는 수단이 되어야 할 것, 즉 정치 권력, 재정 안정, 직업에 대한 헌신도, 동료 사이에서의 지위, 탁월한 성과 등이 그 자체가 목적으로 변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극적인 파국을 맞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인격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한 게 되었다면, 궁극적 관심사가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사람의 평가로 바뀌었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David W. Gill, Doing Right: Practicing Ethical Principles (Downer’s Grove, IL: IVP Books, 2004), 83쪽. 길의 책은 현대 세계에서의 십계명에 대한 확장된 주석과 그 적용을 담고 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신5:8; 출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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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계명은 우상숭배 문제를 거론한다. 우상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신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게 해 줄 것이라고 믿게 만드는 신이다. 고대 세계에서 우상숭배는 주로 물리적 대상을 숭배하는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이 주제의 초점은 신뢰와 헌신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안녕과 성공에 대한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우리 소망을 성취할 능력이 없는 하나님 외의 존재는 그것이 무엇이든 전부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조종할 의도로 우상을 만들었다가 개인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비참한 결과를 얻은 한 집안의 이야기가 사사기 17-21장에 잘 나와 있다.

 

   일의 세계에서는 돈, 명예, 권력을 잠재적 우상으로 여기는 경우가 흔한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우상인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구속적인 일 가운데의 우리 역할 속에서 사실상 필요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성취함으로써 우리 안전과 번영이 확보될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우상숭배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의 신뢰와 소망을 하나님보다 그런 것들에 둘 때 우상숭배가 시작된다. 준비, 각고의 노력, 창의력, 모험, 부(富), 기타 자원 심지어 행운까지 사실상 성공의 모든 요소 가운데에서 우상숭배가 발생할 수 있다. 우상숭배가 시작되는 시점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까? 하나님 은혜를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 대신 가짜들을 숭배하려는 유혹을 이겨 낼 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신5:11; 출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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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계명은 글자 그대로 하나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지’ 말 것을 하나님 백성에게 명한다. 이것은 “여호와”(신 5:11)라는 이름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등에도 적용된다. 그릇되게 사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여기에는 저주, 비아냥거림 및 저속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보다 더 큰 잘못은, 사람이 사람의 책임을 하나님께로 거짓되게 돌릴 때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배재한 채 자신의 행위나 결정을 정당화하게 만든다. 유감스럽게도, 어떤 크리스천은 직장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건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자기 이해에 기초해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야”라든가 “그런 일을 당신이 당하는 건 하나님이 당신에게 벌을 준 거야”와 같은 말은 매우 위험하며 신앙 공동체의 지지나 분별 없이 개인의 입에서 나올 경우, 대개 거기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살전 5:20-21). 

 

   이에 비춰 보건대, 전통 유대인이 (“하나님”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영어식 표현인 “God”도 입에 담기조차 어려워하는 지혜는 크리스천도 일면 본받을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 조금이라도 더 신중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주장을 펼 때 더 조심하고 특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셋째 계명은 사람의 이름을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께도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시는”(요 10:3) 선한 목자는 만일 다른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거나 그들을 불경스런 호칭으로 불러서도 안 된다. 다른 이에게 저주를 퍼붓거나 창피를 주거나 그들을 억압하거나 배척하거나 편취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그릇되게 사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거나 감사를 표하거나 그들과 유대감을 다지거나 그를 환영할 때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좋게 사용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외워서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축복이 된다. 그 사람이 무명이거나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될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당신은 쓰레기통을 비워 주는 사람, 고객 상담 전화를 받는 사람, 버스 운전기사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신5:12; 출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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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은 신명기, 출애굽기와 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과 실생활에서도 복잡한 문제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넷째 계명을 이방인 신자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한 것은 신약 시대 이후로 줄곧 이어져 왔다(롬 14:5-6). 하지만 일이라는 문제만큼은 안식일의 일반 원칙이 직접적으로 적용된다. 

 

안식일과 ‘우리가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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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넷째 계명의 앞부분은 일주일에 하루는 노동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교할 데 없는 선물이었다. 다른 고대 국가 사람들은 일주일에 하루씩 쉴 수 있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안식일을 지키려면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을 온전히 신뢰해야 했다. 이는 곡식을 심고 거두고 물을 긷고 길쌈을 하고 각종 양식으로부터 식량을 얻어 내는 모든 작업을 6일 만에 끝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이 일주일에 하루씩 안식하는 동안 주변 나라는 계속 칼을 만들고 화살을 제작하고 병사들을 훈련했다.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경제 및 군사적 재난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문제와 씨름한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를 따라 일과 안식의 순환을 지키면서도, 현대 경제 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둘 혹은 셋 이상의 직업을 유지하고 집 안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세차를 하고 공과금을 제때에 내고 학교 공부를 하고 시장을 보는 일에 7일이 다 필요한가? 아니면 매주 하루씩 쉬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양해 주시리라고 신뢰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예배하고 기도하며 다른 사람과 어울려 성경공부를 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데 시간을 쓴다면, 우리 생산성은 전반적으로 더 떨어질까 아니면 더 높아질까? 넷째 계명은 이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해 주실 것인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에게 일주일에 하루는 안식을 취하라고 말할 뿐이다.

 

   크리스천은 안식일을 “주일”(일요일,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로 바꿔 부르지만, 안식일의 본질은 일주일 중 특정한 어떤 날을 다른 날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게 아니다(롬 14:5-6). 안식일이 정말로 강조하는 두 가지 사항은 일과 안식이다. 일과 안식이 둘 다 제 4계명에 포함된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신 5:13). 일하는 6일도 안식하는 하루만큼이나 이 계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많은 크리스천이 일하는 시간을 짜내어 안식에 할애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와 반대로 한가로운 여가와 낭비를 위해 일을 최대한 축소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것은 안식일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악하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부양하지, NIV]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과 안식의 적절한 조화다. 그것이 우리 자신과 가족, 동료 근로자, 고객 모두에게 다 좋기 때문이다. 그 조화에는 일요일(또는 토요일) 24시간 동안 푹 쉬는 게 포함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 안식 시간 비율은 일시적인 필요나 때에 따른 삶의 필요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과로가 주된 위험이라면, 우리는 신령한 것(일요일에 진행되는 예배)과 세속적인 것(월요일부터 진행되는 노동)을 대립시키는 새로운 거짓 율법주의를 창안해 내지 않으면서도 제4계명을 지킬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만일 일을 회피하는 게 우리의 위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일하는 것의 기쁨과 의미를 배우고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엡 4:28).

 

 

안식일과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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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계명에 대한 두 가지 역본(譯本)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중 대다수는 특히 신명기에 나오는 넷째 계명에 대한 첨가 문구에서 발생한다. 첫째, 안식일에 일을 시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목록이 확대되어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신 5:14a)까지 포함됐다. 둘째, 안식일에 왜 종에게 일을 시킬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가 주어져 있다.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신 5:14b-15a).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와 군사 및 경제적으로 경쟁하는 가운데서도 편안히 안식을 취할 수 있음은 “강한 손과 편 팔”(신 5:15b)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신명기는 상기시켰다.

 

   이 계명을 두고 출애굽기와 신명기가 차이를 보이는 주요 부분은 각각 창조 및 구속에 있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안식일은 6일간의 창조와 뒤이어지는 하루 동안의 안식으로부터 기인한다(창 1:3-2:3).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요소가 첨가된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이 두 가지를 합쳐 보면, 안식일을 지키는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것과 우리를 구속하신 사실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가된 이런 요소는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이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대변한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을 위해 일하는 노예, 다른 이스라엘 백성, 동물에게도 안식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애굽에서 종 됐던 것을 기억한다면’ 자기 안식을 특권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주님이 당신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다른 이에게도 안식을 베풀어야 한다. 그들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지 혹은 그들이 안식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일꾼이며, 일하는 이에게 안식을 제공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셨다. 우리는 자신의 휴식을 위해 안식일을 지키려는 생각은 하겠지만,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쉬게 할 의무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이 생각하는가? 많은 사람이 다른 이들의 편의를 위해 자신의 대인관계나 수면 리듬, 교제 기회를 깨뜨리는 시간대에 근무한다.

 

   과거에 사람들을 보호했던 (혹은 보는 관점에 따라 ‘일하지 못하게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는) 소위 “엄격한 법률”(blue laws 일요일에 일과 오락을 금하는 18세기 청교도적 법률 - 편집자 주)이라는 것은 이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사라져 버렸다. 분명히 이것은 노동자와 그들이 섬기는 사람에게 새로운 많은 기회를 열어 줬다. 그러나 거기에 언제나 우리가 동참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밤늦게 쇼핑을 하거나 일요일 아침에 골프를 즐기거나 자정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경우, 그것이 그 시간에 일하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하는가? 어쩌면 우리 행동이 고용 기회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시간에 해도 될 일을 누군가에게 괴로운 시간에 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패스트푸드 식당 체인인 칙필레(Chick-fil-A)는 일요일에 문을 닫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창립자인 트루엣 캐시(Truett Cathy)가 십계명의 제4계명을 독특하게 해석한 탓에서 기인한다고 사람들은 종종 주장한다. 그러나 그 회사의 웹사이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결정은 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었습니다. 모든 칙필레 운영자와 식당 종업원은 그들의 선택에 따라 휴식할 시간,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할 시간, 예배할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물론 제4계명을 부하 직원을 배려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보는 것은 종파적이거나 율법주의적인 해석은 아니다. 특이한 해석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문제는 복잡해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해답을 찾기란 어렵다. 어쨌든 소비자 또는 (경우에 따라) 고용주인 우리 선택은 다른 사람의 안식과 근무 시간 및 조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신5:16; 출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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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계명은 우리가 사람의 가장 기본 권위, 즉 부모가 자녀에게 가지는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명령이다. 달리 말하면, 자녀 양육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여서 깊은 공경과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거나 공경하지 않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의 의미를 부모에 대해 좋게 말하고 칭찬하는 것에 국한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계명을 지키려면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막 7:9-13). 우리는 누군가의 선을 위해 일함으로써 그 대상을 향한 공경을 표현한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부모와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인생의 커다란 기쁨 중 하나다. 부모를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즐거움이다. 따라서 이 계명을 따르는 것은 이들에게 쉽게 다가온다. 그러나 부모를 위해 일하는 것이 짐처럼 느껴질 경우 우리는 이 계명으로 시험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부모로부터 홀대나 냉대를 받았을 수도 있다. 또 부모에게 통제나 간섭을 심하게 받으며 자랐을 수도 있다. 부모와 엮이는 것이 자아를 무너뜨리거나 배우자에 대한 헌신(셋째 계명에 따른 우리 책임 포함),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망치는 것으로 다가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비록 현재 부모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고 해도, 부모를 돌보는 일에 시간과 수고가 많이 든다는 것 자체가 나중에 큰 짐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만일 부모가 늙거나 치매에 걸려서 기억력, 능력, 좋은 성품을 상실할 경우, 부모를 돌보는 일이 깊은 슬픔으로 변할 수도 있다.

 

   하지만 5계명은 약속이 딸린 계명이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부모를 올바르게 공경하는 것을 통해, 자녀는 장래 직장과 다른 모든 종류의 대인관계에서 남을 올바르게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장수와 번영을 돕는다. 공경과 권위를 기반으로 한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은 개인이 성공하고 사회 질서를 세우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유익을 위해 일하라는 것이 이 계명의 바탕이기에, 이것은 본질상 일의 현장에서의 명령이 되기도 한다. 일터는 우리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곳일 수도 있고, 일상적인 수발을 통해 그분들을 돕는 곳이 될 수도 있다. 두 가지가 다 일이다. 부모와 더 가까이 살기 위해, 혹은 부모에게 돈을 보내거나 부모가 물려준 가치관이나 재능을 가지고 일하거나 부모가 중요하다고 여긴 일을 해 나가기 위해 우리가 일할 때, 우리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모를 위해 청소를 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부모를 목욕시켜 드리거나 안아 드리고, 좋아하는 곳에 모시고 간다거나 그분들의 두려움을 덜어 드리기 위해 직장활동을 역으로 제한한다면, 그것 역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부모는 신뢰와 공경과 순종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녀 양육도 일종의 일이며 그 어느 직장도 그보다 더 높은 수준의 신뢰, 긍휼, 정의 및 공정(公正)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 하나님 은혜로만 부모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이 신명기 전체의 근간임을 알리는 또 다른 지표가 되기도 한다.

 

   직장에서 우리는 스스로 다섯째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 우리는 종업원, 고객, 동료, 상사, 거래처 및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기대를 조절함으로써 그들이 자기 가족을 돌볼 수 있도록 지원해 줄 수 있다. 사람들이 그들과 부모 사이의 갈등을 말하거나 불평할 때에, 우리는 연민을 갖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다. 가령 근무 시간대를 교대해 부모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도와줌으로써 말이다. 그들에게 성경적인 시각에 근거한 어떤 견해를 피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직장생활에만 몰두하는 동료가 자신의 가족 위기에 대해 털어놓을 때, 우리는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해 주고 그에게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재조정하도록 권고할 수 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신5:17; 출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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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깝게도 여섯째 계명은 현대 직장에 너무나도 실질적으로 잘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이다. 직업과 연관된 사망 사고의 10퍼센트(미국 기준)가 살인이기 때문이다.[1] ‘직장에서 절대로 살인하지 말라’라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권고한다고 해도 이런 통계치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살인은 직장 폭력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며, 단지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뿐이다. 더욱 실질적인 폭력은 분노인데, 예수님은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여섯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5:21-22). 바울이 말한 대로, 분노의 감정을 금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배울 수는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따라서 여섯째 계명이 일의 현장에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일터에서 분노 문제를 겪는다면, 분노 조절을 위한 도움을 받도록 하라.’ 많은 고용주, 교회, 국가 및 자치단체, 비영리 조직이 분노 관리에 대한 교육과 상담을 제공하는데, 이런 것을 이용하면 여섯째 계명을 지키는 데 크게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살인은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이지만, 여섯째 계명으로부터 파생된 판례법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의도적이지 않은 죽음을 막을 의무도 있다. 아주 명료한 한 예는 소(일하는 동물)가 사람을 받아서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다(출 21:28-29). 만일 그 사건이 예측 가능한 사고였다면, 그 소의 주인이 살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주인이나 관리자는 직장 내의 안전을 적절하게 유지할 책임을 지니는 것이다. 이 원칙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법으로 잘 확립되어 있는데, 직업 현장의 안전은 정부 정책, 산업체 내규, 조직체 정책과 관습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직장들이 근로자가 안전하지 못한 조건에서 계속 일하도록 요구하거나 묵인한다. 작업 여건을 조성하거나 근로자를 감독하거나 직장 관습을 형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크리스천이라면 여섯째 계명을 상기해 안전한 근무 환경이 그들의 가장 큰 책임 중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Fact Sheet: Workplace Shootings 2010,” United States Department of Labor, Bureau of Labor Statistics, http://www.bls.gov/iif/oshwc/cfoi/osar0014.htm.

“간음하지 말지니라.” (신5:18; 출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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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은 간음이 아주 흔하게 발생하는 환경 중 하나다. 간음이 직장 내에서 많이 발생해서라기보다 근무 환경과 직장 동료의 인간관계 등이 간음이 발생할 분위기를 쉽게 조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장에서 이 계명은 우선 문자 그대로 적용된다. 결혼한 사람은 직장과 연관해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어떤 이유에서라도 성(性)적 교제를 해서는 안 된다. 성매매나 포르노그래피 산업 종사자는 언제나 이 계명을 어기는데, 이런 직업은 거의 항상 기혼자 간의 성적 접촉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혼 서약에 흠집을 내는 행위는 그 어떤 것이든 모두 일곱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이런 일은 여러 가지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다. 병원, 회사, 연구소와 교회 등 직장 동료 간의 강한 감정적 유대관계가 요구되면서 배우자와 서약한 것은 충분히 지지해 주지 못할 수 있는 환경. 장시간 신체적으로 가까이 하는 직업이라든지 합리적인 한계 내에서 퇴근 후의 만남을 제한하지 못하는 장기 출장 같은 작업 조건. 성희롱을 당하게 하거나 압력에 굴복해 권력자와 성행위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근무 환경도 있을 수 있다. 허영심이나 선망에 둘러싸이는 연예인, 스타 운동선수, 대기업 사업가, 정부 고위 관료나 극히 부유한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간음이 흔히 발생할 수 있다. 직장 일에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다가 배우자와의 관계가 망가지기도 한다. 이런 모든 것은 7계명을 손상할 수 있으므로, 크리스천은 그런 환경을 피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도둑질 하지 말지니라.” (신5:19; 출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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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덟째 계명 역시 일터를 주요 배경으로 삼는 또 다른 계명이다. 도둑질은 피해자로부터 노동의 대가를 빼앗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게 일한 것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도둑질은 정직한 노동을 피하려는 편법의 일환으로 저질러진다. 때문에 그것은 6일 동안은 힘써 일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도 된다. 여기서 또 우리는 십계명끼리의 연관성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터에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도둑질’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 자체가 재산과 재산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건을 취득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자발적으로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거나(거래나 선물로), 탈취하는 길이다. 도둑질은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탈취로서, 타인에게 속한 것을 빼앗아 달아날 때 발생한다. 그러나 기업이 고객을 속이거나 정부가 국민에게 부당한 세금을 매길 때처럼, 탈취는 보다 더 크고 더 복잡한 규모로 발생하기도 한다. 그런 집단이나 기관은 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공정한 상업 거래와 독점적 상업 거래를 비교하거나 합당한 세금과 과도한 세금을 견주어 보는 것이 여기서 우리 목표는 아니지만, 여덟째 계명은 개인, 범죄 집단, 기업, 정부가 재산권을 무시하면서도 무사하다면 그 어떤 사회도 번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실질적으로 도둑질은 다른 사람 것을 훔치는 것 외에 다른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타인의 귀한 어떤 것을 소유주 동의 없이 취득하는 순간 그것은 도둑질이 된다. 자원이나 자금을 개인 용도로 착복하는 것도 도둑질이다. 판매 실적을 올리고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사기를 치거나 가격을 올리는 것 역시 도둑질이다. 구매자가 실제와 다른 상황 속에서 구매를 하기 때문이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과대광고/과장” 부분을 보라. 마찬가지로 사람의 두려움, 취약점, 무력감, 절박함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도 도둑질의 한 형태다. 왜냐하면 그들의 동의는 진정 자발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저작권이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도 창안한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민법상의 이윤을 그들에게서 빼앗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둑질이다.

 

   타인의 재산과 권리를 존중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것을 취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신명기 22장 1절은 이렇게 말한다. “네 형제의 소나 양이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 본 체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그것들을 끌어다가 네 형제에게 돌릴 것이요.” ‘그건 나랑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라는 변명은 우리 무관심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직업이 사람의 무지나 궁지에 몰린 선택권 없는 상황을 이용해 그들에게 원치 않는 거래를 하게 만드는 특성을 지닌다. 회사, 정부, 개인, 조합 및 기타 조직은 그들의 힘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불공정한 임금, 가격, 재정 조건, 근무 여건이나 근로 시간 등을 흔히 내세운다. 은행을 털거나 고용주의 것을 훔치거나 상점에서 들치기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불공정하거나 비윤리적인 관행을 따라 다른 사람에게서 그들의 당연한 권리를 빼앗는 일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동참할 가능성은 농후하다. 이런 관행을 거부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심지어 경력에 큰 제한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할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신5:20; 출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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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째 계명은 자신의 평판에 대한 권리의 중요성을 다룬다.[1] 이것은 사람의 증언에 따라 인생행로가 갈리는 법정에서 뚜렷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이다. 사법적 판정과 소송 과정 속에 담겨진 힘은 실로 대단하다. 그런 힘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사회의 윤리 체계를 어그러뜨리는 일이며 결과적으로 매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된다. 월터 브루그만은 이 계명이 “사회적 실상이 신빙성 있게 묘사되며 알려진다고 대중이 확신하지 못한다면 공동체적 삶은 실현 불가능하다”[2]라는 사실을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법정 용어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이 아홉째 계명은 사실상 삶의 모든 국면에 해당하는 다양한 상황에 적용된다. 우리는 누군가에 대한 오해를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과대광고/과장” 부분을 보라. 불러일으키거나 잘못 대변하는 말이나 행동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브루그만은 다음과 같은 통찰도 제시했다.

 

정치인은 네거티브(부정적) 선거 운동으로 경쟁자를 음해하려고 애쓴다. 가십 기고가는 중상모략으로 돈을 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거실에서 멋진 커피잔에 곁들인 다과를 먹으면서 남을 비방하고 평판을 파괴한다. 사실상 법정 행위가 정당한 사법 절차 없이 이렇게 도처에서 자행된다. 비난이 가해지고 소문이 전파되며 비방, 위증 및 명예훼손 발언이 여과 없이 유포된다. 여기에는 증거도 없고 변론도 없다. 크리스천은 이런 대화에 가담하거나 그런 대화를 용인하는 것을 거부해야 하며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당사자 본인이 없는 상황에서 절대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기도 요청이나 목회적 관심에 의한 것이라 해도, 동기가 무엇이든 어떤 형태로든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단순히 거기에 동참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크리스천에게는 소문을 멈추게 하고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을 막아야 할 의무도 있다.[3]

 

   이 계명은 직장에서 하는 잡담도 심각한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직장 밖의 개인 영역에서 파괴력을 발휘하는 잡담도 그 자체로 악하지만, 한 직원이 다른 직원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경우에는 어떤가? 당사자가 현장에 없는 상황에서 진실이 규명될 수 있을까? 근무 태도를 평가하는 말은 또 어떤가? 공정하고 정확한 평가가 이뤄지려면 어떤 안전장치가 필요한가? 마케팅이나 광고 산업은 대체로 단체와 개인이 섞인 공공영역에서 전개된다. 이때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를 가장 돋보이게 하려고 할 경우, 편견이 배제된 객관적인 시각으로 경쟁자 제품의 하자나 약점을 어느 정도까지 지적하는 게 가능하겠는가? 당신이나 ‘이웃’의 권리만큼 다른 회사의 권리도 똑같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세계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이 계명의 적용 범위는 엄청나게 넓다고 할 수 있다.

 

   이 계명은 다른 사람에 대해 거짓 증언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금하나,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든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지를 문제로 대두시킨다. 거짓된 혹은 오도(誤導)하는 재무제표를 발행하는 것은 아홉째 계명을 어기는 것인가? 경쟁자를 거짓되게 폄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장된 광고는 잘못된 것인가? 해고가 임박해 있는 상태인데도 경영자가 직원들에게 거짓된 확신을 심어 줄 때는 또 어떠한가? 인식이 실재를 종종 대신하는 세상에서, 그럴듯한 언변은 참된 진실을 가린다. 그러나 아홉째 계명은 하나님만큼은 우리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한편 속임수는 가끔 성경에서도 저질러지고, 받아들여지고, 심지어는 승인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다. 진실과 거짓에 대한 신학의 출처는 아홉째 계명을 포함한 성경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다. 보다 심층적인 논의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Walter Brueggemann, “The Book of Exodus,” The New Interpreter’s Bible: Genesis to Leviticus (Nashville: Abingdon Press, 1994), 431쪽.

같은 책, 848쪽.

같은 책, 432쪽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신5:21; 출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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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째 계명은 ‘이웃에게 속한 무엇이든지’ 탐내지 말 것을 우리에게 명한다(신 5:21). 이웃에게 속한 물건을 눈여겨보는 것이나 그런 것을 우리가 합당하게 얻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 것조차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탐심은 타인의 번영, 성취나 재능을 보고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거나 그것을 빼앗기 원할 때, 또는 성공한 사람을 응징하고 싶어질 때 발생한다. 금지되는 것은 다른 사람, 즉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이지 뭔가를 갖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이가 성공한 것을 보고 영감을 얻을 수 있지만 탐심을 가질 수도 있다. 전자의 태도는 각고의 노력과 신중함을 불러일으킨다. 후자의 태도는 게으름을 유발하고 자기 실패에 핑계를 대도록 만들고 탈취하고픈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삶을 점유율 쟁탈전으로 여겨 다른 사람이 잘 나가는 만큼 내가 해를 입는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의 성취를 우리 자신의 성취로 여기는 공상에 빠진다면 우리는 결코 위대한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강조되지만, 이 계명의 궁극적인 기초는 하나님만을 예배하라는 명령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예배의 핵심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이웃의 소유물 등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불경건하고 탐심 섞인 욕망을 대신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가 되는 것이다.

 

   신명기는 우리가 탐내서는 안 되는 이웃의 소유물에 대한 출애굽기 목록에다가 “밭”을 덧붙이고 있다. 신명기의 십계명에 추가된 다른 내용과 마찬가지로, 이 계명도 직장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밭은 직장이며, 밭을 탐내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생산 자원을 탐내는 것이다.

 

   삶의 여러 현장에서 시기와 탐심은 언제나 발생할 수 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위나 급여나 권력’이 인간관계의 주요 요소가 되는 직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직장에서 성과, 진급 또는 보상을 원하는 데는 정당한 이유가 많을 수 있다. 그러나 시기는 그런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사회적 지위를 탐해 집착적으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유가 될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면서까지 우리 업적을 과대 포장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이를 예방하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일관된 자세로 다른 사람이 성취한 결과를 알아주고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공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타인의 성공을 기뻐해 주거나 최소한 알아주기라도 하는 법을 배워 나간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탐심의 명맥을 끊어 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공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성공도 이뤄질 수 있게끔 노력한다면, 탐심은 협력으로 대체되고 시기는 화합으로 대체될 것이다.

 

   미네소타주 에덴 프레리의 우드데일교회에서 담임목사로 목회할 당시 레이스 앤더슨은 이렇게 말했다. “담임목사로서 저는 주머니 속에 동전을 무한히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교회 임원이 내놓은 좋은 방안이나 자원봉사자의 수고를 칭찬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할 때마다, 제 주머니 속 동전이 그들 주머니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리더인 제가 할 일은 그거죠. 동전을 제 주머니로부터 그들의 주머니로 넣어 주는 것.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이 그들에게 건넬 칭찬을 저도 한쪽에서 거들어 주는 것입니다.”[1]

 

2004년 10월 20일,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롯에서 레이스 앤더슨과 나눈 대화를 윌리엄 메신저가 기록했다.

규례와 법도 (신4:44-2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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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연설의 두 번째 부분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순종하라고 주신 ‘규례와 법도’를 상세히 묘사했다(신 6:1). 이 규정은 전쟁, 노예제도, 십일조, 종교적 축제, 희생제물, 정결한 음식, 예언, 군주제, 중앙 성소 등 아주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 속에는 일의 신학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다수의 단락이 들어 있다. 우리는 성경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순종하는 축복 (신7:12-15; 28: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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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명령과 규례와 법도가 이스라엘에게 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우려가 있기에, 모세는 그것의 주된 목적은 사람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를 번성하게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하게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하게 하시리니(신 7:12-13).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를 대적하기 위해 일어난 적군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가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을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 28:2-7 11-12).

 

   언약에 따르는 것은 하나님 백성에게 축복, 번영, 기쁨, 건강의 근원이 됐을 것이다. 바울이 말했듯이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다.

 

   이것을 소위 “번영 복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총애하는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재물과 건강을 가져다주신다’라는 번영 복음의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본문은 만일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언약에 따라 살면 세계는 모든 사람에게 더욱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물론 크리스천의 증언은 우리 힘으로는 율법을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이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순종 여부에 따라 제한되기보다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고 결국 모세가 묘사한 모든 복을 받을 수 있다. 현세에서는 그 복을 부분적으로 받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성취될 때에는 온전하게 받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은 신명기 전체를 꿰뚫는 중요한 주제다. 이런 세 개의 주요 단락 외에도 이 주제는 신명기 전체에 걸쳐 두루 언급되며, 모세는 그의 인생을 마치기 전 최후의 연설에서 이 주제를 반복하는데, 그 내용이 신명기 29-30장에 기록되어 있다.

번영의 위험성 (신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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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 즐겁게 순종하는 것에 반대는 거만인데, 이는 종종 번영에 뒤따라온다. 이것은 모세가 신명기 4장 25-40절에서 경고한 안일이 몰고 오는 위험과 유사한데, 그 초점은 수동적인 권리 주장이 아니라 능동적인 거만에 맞춰져 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 8:12-18).

 

   오랜 세월 동안 땀을 흘린 후에 사업, 경력, 연구 과제, 자녀 양육, 기타 일들이 성공으로 열매 맺을 경우 우리는 종종 정당한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기쁨에 찬 자부심은 자칫 교만으로 변질될 수 있다. 신명기 8장 17-18절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일부로써 하나님은 경제적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성공이 전적으로 우리 능력과 노력 덕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뿐 아니라 능력도 주셨다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된 자가 아니다. 자급자족에 대한 환상은 우리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다. 언제나 그렇듯 올바른 예배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그 대안일 것이다(신 8:18).

 

 

관대함(너그러움) (신1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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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대함’이란 주제는 신명기 15장 7-8절에서 나타난다.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관대함과 긍휼은 언약의 본질이다.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 15:10). 우리 일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될 경우에만 완벽한 축복이 된다. 바울이 말한 바처럼,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이 마찬가지겠지만, 일해서 번 돈은 우리를 너그럽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돈을 너그럽게 쓰는가? 더욱이 일 자체를 통해서 우리가 너그러워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 단락은 일(“네가 하는 모든 일” , 10절)의 한 국면으로서의 관대함을 특별히 언급한다. 만일 한 직장 동료가 기술이나 능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 정직한 충고의 말을 원할 때, 또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참아 줄 인내심을 요청할 때, 이런 순간들이 관대함을 베풀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이런 류의 관대함을 베풀려면 시간과 돈이 들 수도 있고, 우리의 자아상을 재검토하거나 우리가 누구 편인지 스스로 살피고 자신의 동기를 물어봐야 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자진해서 이런 희생을 감내할 수 있다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는 새로운 문이 우리에게 열리는 것 아니겠는가?

 

 

노예제도 (신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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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에서 논란을 일으키는 주제 중 하나는 노예제도다. 구약에서 허용된 노예제도는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 모든 의문점을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제도를 미국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를 포함한 현대 노예제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후자는 그들의 고국인 서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납치해 매매한 경우와 그들의 후손을 영구적인 종으로 삼은 경우를 포함한다. 구약은 이런 종류의 노예제도를 정죄했으며(암 1:6) 적발 시 사형까지 가능했다(신 24:7 출 21:16).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된 것은 납치나 불운한 태생 때문이 아니라 빚이나 가난 때문이었다(신 15:12, NRSV 각주 a). 노예 신세가 되는 게 굶어죽는 것보다는 나았으므로 사람들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 빚을 갚거나 최소한 잠잘 곳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이 노예제도는 종신(終身)적인 게 아니었다. “네 동족 히브리 남자나 히브리 여자가 네게 팔렸다 하자 만일 여섯 해 동안 너를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 너는 그를 놓아 자유롭게 할 것이요”(신 15:12). 놓이면, 종이었던 사람은 그들이 일해서 마련한 부의 일정 몫을 차지했다.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3-14).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는 사람이 아직도 빚 때문에 대개 부모에 의해 강제 노역 노동자로 팔린다. 이것은 사실상 노예제도인 셈이다. 성 밀매(密賣)로부터 벗어나기란 더더욱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몇몇 지역의 기독교인이 그런 관습을 뿌리 뽑는 데 앞장서고는 있지만, 훨씬 더 많은 노력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한층 많은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이런 일을 선교 및 사회활동의 높은 우선순위에 올려놓는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한번 상상해 보라.

 

   보다 더 발전한 나라에서는, 아주 궁색한 노동자라고 해도 팔려가서 비자발적인 노동에 시달리는 게 아니라 그들이 기꺼이 원하고 또 감당할 수 있는 직업을 얻는다. 신명기에 노예에 대한 보호 규정까지 담겨 있다고 한다면, 이런 보호 장치가 일반 노동자에게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명기는 정해진 해방일, 음식과 주거 제공, 작업 조건에 대한 책임 등 계약 조건과 노동 규정을 지킬 것을 주인에게 요구했다. 근무 시간은 합리적으로 제한되어야 하며 일주일에 하루는 쉬게 해야 했다(신 5:14).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주인이 종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 동일한 인간으로 취급하며 하나님 백성을 모두 구원받은 종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오늘 이같이 네게 명령하노라”(신 15:15).

 

   현대의 고용주가 고대의 주인이 그랬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힘없는 노동자를 학대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노동자가 실제로 노예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런 보호를 받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고용주에게는 노동자를 적어도 노예보다는 더 잘 대우해 줘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취약한 노동자는 초과 수당도 없이 연장 근무를 하거나, 팁을 매니저에게 넘겨주고, 근무 시간을 조절하기 위해 뇌물을 바치고, 성희롱이나 비열한 처우를 당하고, 불리한 혜택을 받아들이고, 불법적 차별과 다른 형태의 혹사를 견디도록 요구받을 수도 있다. 부유한 노동자조차도 자신이 제공한 노동의 열매에 합당하지 못한 불공정한 처우를 당할 수도 있다.

 

   고대 노예제도가 16-19세기 노예제도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현대의 독자들은 성경에서 일시적인 노예제도를 수용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적어도 오늘날 모든 곳에서 노예제도가 최소한 법적으로 불법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감사한다. 노예제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폐지된 것으로 간주하기보다, 현대적 형태의 비자발적 강제 노동을 없애는 한편 경제적으로 불우한 사회 구성원을 보호해 주는 성경 지침을 따르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뇌물과 부패 (신16: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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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산권 및 노동자 보호의 실효성은 종종 법률의 집행과 사법 제도에 달려 있다. 모세가 재판장과 지도자들에게 명한 내용은 일에 관해 특히 중요하다.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 16:19). 공정한 사법 제도가 없다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 16:20)라는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현대의 직장과 사회는 뇌물, 부패, 부정과 관련해서 고대 이스라엘 못지않게 취약하다. 유엔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큰 경제성장의 장애물은 공정한 법 집행의 실패다.[1] 부패가 만연한 곳에서는, 뇌물을 주지 않고는 생계를 유지하거나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평안히 거주하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본문의 규정은 일반적으로 뇌물을 요구하는 자가 순순히 뇌물을 바치는 자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처럼 보인다. 금지의 초점이 뇌물을 주는 쪽보다 뇌물을 받는 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뇌물을 주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부패를 줄이기 위해 크리스천들이 하는 모든 노력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신 16:18)하는 데 도움이 되며, 주님께 영광이 된다. 법 규범의 경제적 적용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내용은 이 책 6장의 “민 26-27장; 36:1-12” 부분을 보라.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Issue Brief: Rule of Law and Development (New York: United Nations, 2013), 3쪽

법원 판결을 따르는 것 (신17: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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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는 현대 법원의 구조와 놀랍도록 유사한 사실심 법정과 상소 법원 제도를 설립했다. 그는 백성에게 법원 결정에 순종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신 17:11).

 

   오늘날 일터는 법, 규정, 관습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것의 적절한 해석 및 적용을 위한 절차, 법원, 상소 과정을 통해서 통제된다. 사도 바울도 언급했듯이(롬 13:1), 우리는 이런 법적 구조에 따라야 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권세를 가진 자가 법과 규정을 흔히 무시하거나 뇌물, 부패, 폭력을 일삼는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기업과 직장 조직이 의도적으로 법을 어기는 일은 거의 없어도 방해 소송, 정치적 이해 활동, 또는 공공선에 반하는 로비 활동으로 법을 위반하려는 노력이 자행된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법 규범을 존중하고, 거기에 따르고, 지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부름받았다. 시민의 불복종이 무조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부 부당한 법은 변경이 불가능하다면 폐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드물며, 대개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 개인적 희생이 뒤따른다. 하지만 개인 이익을 목적으로 법을 전복(顚覆)하는 일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권세를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 (신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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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과 기관이 합당한 권위에 도전하지 말아야 하듯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그들의 권세를 불법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모세는 특별히 왕의 경우를 다뤘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신 17:16-19).

  

   이 본문에서 우리는 권세를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두 가지 제약을 발견한다. 권세 있는 자가 법 위에 있는 게 아니므로 그들도 법을 준수하고 법을 지지해야 한다. 권세자는 자신의 권세를 악용하거나 남용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경찰과 법원 직원이 자기나 친구가 받은 교통 위반 딱지를 ‘해결’하거나 고위 공무원이 특별대우를 받으려는 예에서 보듯, 권력을 쥔 자가 자신을 법 위에 두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관리가 자기 권세를 이용해 뇌물을 받는다거나 차별 및 예외를 불법적으로 적용하거나 비밀 정보에 접속하거나 공적 자산이나 사적 자산을 개인 용도로 유용함으로써 이익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끔 권력자에게 정책상으로나 법적으로 특혜가 주어지기도 하나, 그렇다고 해서 범죄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모세가 왕들에게 준 명령은 무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의 법적인 권세를 사용하라는 게 아니고 무절제를 전적으로 피하라는 것이었다. 권세 있는 자가 권력을 사용해 특권을 얻을 뿐 아니라 친구에게 독점권을 주고 거대한 땅과 자산을 전용하고 반대자를 투옥하거나 고문하거나 죽인다면, 그 결과는 치명적인 것이 된다. 권력을 조금 남용하든 전체주의적으로 압박을 가하든 간에, 그 본질에는 차이가 없고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공공의 선을 위한 자산 사용 (신23:1-2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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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는 생산물의 주인들에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산을 사용할 것을 명료한 방식으로 요구한다. 예를 들어, 지주는 그들의 땅을 이웃의 급박한 필요를 위해 내놓을 수 있어야 했다.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 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신 23:24-25).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길옆의 밭에서 곡식을 잘라 먹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그 율법이었다(마 12:1). 이삭 줍는 자는 자신을 위해 곡식을 수확해 음식을 조달할 책임이 있었고 지주는 그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용할 책임이 있었다. 이 관습에 대해서는 이 책 4장의 “레 19:9-10” 부분을 보라.

 

   마찬가지로 자본을 빌려주는 사람도 채무자의 건강이나 생계를 위험에 빠뜨릴 만한 조건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신 23:19-20 24:6, 10-13). 어떤 경우에는 이웃의 필요가 너무 커서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어도 그들에게 돈을 빌려줄 의사가 있어야 한다(신 15:7-9).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이 책 3장의 “출 22:25-27” 부분을 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원을 궁핍한 사람에게 개방하기를 요구하시는 한편, 그분이 맡겨 주신 자원을 선하고 충성스럽게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도 감당하기를 요구하신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것을 가지고 공동체의 선을 위해 쓰라고 명령하신다(신 15:7). 다른 한편으로, 신명기는 어떤 사람의 밭을 공동 재산으로 여기지 않았다. 외부인은 남의 밭을 마음대로 취급할 수 없었다. 공공선에 대한 기여 요건은 생산의 주요 수단인 사적 소유권 제도 내에서 성립됐다. 오늘날 사회에서 사적 소유권과 공적 소유권 사이의 균형 및 다양한 경제 제도의 적절성은 논쟁거리가 되는데, 그에 대해 성경은 원칙과 가치를 제공하지만 규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경제 정의 (신24:14-25; 25:19; 27: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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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층과 부의 격차가 불공정의 여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공의(公義)는 노동자를 공평하게 대우할 것을 요구한다. 신명기 24장 14절에는 다음 내용이 나온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희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가난한 자나 이방인은 공동체 내에서 부유한 지주에게 맞서 법정에 설 수 없었으므로 학대에 노출되어 있었다. 야고보서 5장 4절에도 유사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고용주는 가장 말단 직원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신성하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했다.

 

   또한 공의는 고객을 공정하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 “너는 네 주머니에 두 종류의 저울추 곧 큰 것과 작은 것을 넣지 말 것이며”(신 25:13). 이 저울추는 매매할 때 곡식이나 다른 상품을 계량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었다. 판매자에게는, 공시했던 것보다 가벼운 저울추를 사용해서 곡식 무게를 재는 것이 이득이었을 것이다. 구매자는 거짓된 무거운 추를 사용할 경우 이득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는 팔 때나 살 때나 언제나 동일한 저울추를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사기 방지책은 비단 고객과 거래할 때만 국한된 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과 이뤄지는 모든 형태의 거래에 해당됐다.

 

그의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7).

 

맹인에게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8).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9).

 

무죄한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25).

 

   원칙적으로 이런 규칙은 모든 종류의 사기를 금지한다. 현대적 비유를 들어 본다면, 도덕적 관련성은 무시한 채 하자 있는 제품을 고의로 판매하는 회사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고객은 사용하던 제품을 반환해 주는 상점의 정책을 악용할 수 있다. 회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회계 원칙을 어겨 가면서 재무제표를 발행할 수 있다. 노동자는 근무 시간 중에 개인 업무를 보거나 맡은 일을 게을리할 수 있다. 이런 관습은 부당할 뿐 아니라, ‘우리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려는’(신 26:19) 하나님만을 예배하겠다는 다짐에 어긋나는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라, 모세의 마지막 호소 (신29:1–3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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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는 것이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는 마지막 호소를 함으로써 그의 세 번째 연설을 마쳤다. 이것은 앞서 신명기 7장 12-15절과 28장 2-12절에서 권면한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신명기 30장 15절에서는 그것이 이렇게 요약된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것은 축복과 생명의 길로 이어지지만, 불순종은 저주와 사망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시내산 언약을 지키는 것을 의미했으며,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의무였다. 하지만 축복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시대를 초월하는 원칙으로서 고대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게 아니고 오늘날 일과 생활에도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삶과 일을 위한 최선의 계획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결코 고난과 궁핍이 뒤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기독교인도 핍박을 받거나 추방당하고 투옥을 당한다. 그것은 진정한 경건과 순수성을 유지하면서 사는 사람은 품성이 좋아서이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어서도 잘될 것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박해로 이어질 수 있는 악한 시대에도, ‘하나님의 축복에서 오는 달콤한 열매’가 ‘악에 연루되어 누리는 냄새 나는 찌꺼기’보다 낫다. 큰 그림에서 보면,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이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더 복되다.

 

모세의 일의 종국 (신31: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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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 계획 (신31:1–32:47)

  

   연설이 다 끝나고 나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지도자가 된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신 31:7). 모세가 승계를 공개적으로 실시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 앞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임무를 수용하겠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둘째, 온 백성이 여호수아가 모세의 유일하고 합당한 후계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 일 후에, 모세는 가능한 한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물러났다. 그는 죽었다. 합법적인 승계 문제가 불명확하거나 미해결 상태일 경우에는 국가든 학교든 교회든 기업이든 그 어떤 조직이라도 혼란에 빠질 것이다.

 

   여호수아가 마지막 순간에 아무렇게나 갑자기 뽑힌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여호수아를 그의 후계자로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 신명기 1장 38절부터,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모세의 “보좌관”(새번역)으로 언급하셨다(NIV에는 “assistant”). 모세는 애굽에서 나온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여호수아의 군사적 역량을 알아보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군사 지휘권을 그에게 위임했다(신 31:3). 모세는 여호수아가 사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능력을 가지고 있고 안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옳은 것을 위해 분연히 일어설 의지를 지니고 있음에 주목했다(민 14:5-10). 모세는 아모리 왕들과의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의 정치 수완을 훈련시켰다(신 3:21). 여호수아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모세의 훈련 계획에서 중요한 요소였다(신 3:28). 여호수아가 모세로부터 지도권을 인수받을 때쯤 되자 그는 지도자로서 아주 성숙해져 있었으며 백성도 그를 따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었다(신 34:9).

 

   또한 모세는 마지막 노래를 불렀는데(신 32:1-43), 그 내용은 백성이 언약에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무시무시한 고난을 겪을 것이나 마침내 하나님의 강력한 손으로 구속을 경험할 것이라는 경고의 예언적 가사였다. 끝으로 모세는 백성에게 율법을 진지하게 따를 것을 한 번 더 권고했다(신 32:46-47).

 

 

모세의 마지막 활동 (신32:48–34:12)

 

    이스라엘과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모세의 마지막 행동은 신명기 33장 1-29절에 나오는 노래를 통해 이스라엘을 지파(족속)별로 축복한 것이었다. 이 노래는 야곱이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족속을 축복했던 것(창 49:1-27)과 유사했다. 야곱이 열두 지파의 친아버지였던 것처럼 모세는 그 민족의 영적 아버지였기 때문에 이것이 적절했다. 또한 이 노래에서 모 세는 책망과 권면의 말이 아니라 축복의 말을 남기고 이스라엘을 떠났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신 34:5). 성경은 겸손하고 존귀한 “여호와의 종”이라는 칭호로 모세를 높인다. 모세는 완벽하지 못했고 그의 지도를 받던 이스라엘도 완벽하지 못했으나 그는 분명 위대한 사람이었다. 

 

   어쨌든 모세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는 계속 이어졌으며, 그의 뒤를 이은 지도자도 저마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다. 어떤 조직의 사람이라도 자신의 리더를 대체 불가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이미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리더가 스스로를 대체 불가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모든 이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 

 

신명기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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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초기 역사와 하나님의 율법을 재론하면서 신명기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의 성취 속에서 일의 중요성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 책의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 의 계명을 따르면서 그분의 도움을 구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중 그 어떤 것이든 저버린다면 우상숭배, 즉 우리가 스스로 만든 거짓 신을 예배하는 데 빠지게 된다. 비록 이런 주제가 처음에는 추상적이 거나 철학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일상의 노동과 삶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발현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생산 능력을 주신 그분께 좋은 것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우리 한계를 인정할 때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인도를 구하며 다른 이를 존중하게 된다. 또 한 일과 안식의 리듬을 준수하는 것을 통해 우리 자신 및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까지 모두에게 유익을 준다. 우리는 권한을 행사하고, 분명한 정의감을 가지고 권위 앞에 순종하며, 공공선을 위해 권세를 지혜롭게 행사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를 해하기보다는 남을 섬기는 일, 가족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기보다는 세우는 일 을 택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자원을 너그럽게 사용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속한 자원을 탈취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거래할 때 정직해야 하고, 우리 자신을 잘 다스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을 행하며 즐거워하고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감사를 표하고 직장에서 너그럽게 처신하고 직장을 보다 더 공평하고 보다 더 자유롭게 만들며 보람 있게 공공선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매일매일 우리 앞에 주어진다.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공동체, 전 세계를 변화시켜 노동 자 착취, 부정부패 및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자원 부족에 대한 무관 심 등 우상숭배적 관습을 뿌리 뽑을 기회를 (크든 작든) 가진다.

 

   그러나 만일 신명기가 우리 일에 적용될 ‘할 것과 하지 말 것’의 길고 시시콜콜한 목록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짐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일의 영역 하나만이라고 해도, 누가 과연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겠는가? 신명기의 핵심은 사실 규칙과 규정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라는 초청이다.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신 4:29).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만일 우리 일이 신명기의 그림에 전혀 못 미친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더 열심히 일하기로 굳게 다짐할 게 아니라, 하나님과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맺으라는 초청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맺는 살아 있는 관계만이 그분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을 얻는 희망이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이며 신명기라는 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내용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마 11:30). 불가능한 요구를 나열한 목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서라는 초청인 것이다. 이 초청 속에서 예 수님은 모세의 권고를 되풀이하신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신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