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서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데살로니가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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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은 저희가 합니다. 여러분은 쉬세요.” 현대인을 대상으로 한 화장실 세정제 광고다.[1] 이 문구를 조금 수정해 보자. “예수님이 열심히 일하셨으니까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이 문장은 고대 데살로니가 도시에 거주했던 일부 기독교인을 묘사하는 게 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주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르면 더 이상 과거의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다. 당연히 그들은 한없이 게을러졌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어쩌면 영생을 약속받았으니 현재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있다. 이렇게 나태해진 사람들은 이들보다 더 책임감 있는 이들에 기대어 살았다. 관대한 교회 신도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진정으로 생계 유지가 어려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몫을 소비했다. 게다가 그들은 문제를 일으키고 언쟁을 일삼기도 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보면, 바울에게서는 이러한 나태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주님의 방식이 나태함이 아니라 섬김 및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노동을 계속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항구 도시 데살로니가와 데살로니가 교회

 

   로마의 속주 마게도냐의 수도이자 지중해의 주요 항구 도시였던 데살로니가에는 10만 명이 넘는 인구가 거주했다.[2] 데살로니가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항구가 있었고, 뿐만 아니라 남북을 연결하는 주요 무역로로써 동서를 잇는 에그나티아가도 위에 위치했다. 이탈리아와 동부를 연결하는 에그나티아가도는 항상 분주했고 때문에 인근 마을 사람들은 이곳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데살로니가는 무역이 발달했고 아울러 철학의 중심지로서 자리 매김했다.

 

  데살로니가에는 목재, 곡식, 대륙성 과일, 금, 은과 같은 천연자원이 있었다(BC 1세기에 금 · 은 광산이 실제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로마에게 특히 호의적이었기에 데살로니가는 자치를 통해 운영하면서 자유 도시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또한 데살로니가 시민들은 로마 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공물을 바치지도 않았다.[3]


   바울과 그의 동역자 디모데와 실라는 AD 50년 2차 선교 여행중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도움으로 선교 여행을 통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 구성원을 살펴보면 일부 유대인들이 믿었으나, 대부분은 이방인들이었다(살전 1:9-10). 당시 교회에는 야손이나 아리스다고, 그리고 여러 귀부인 (행 17:4, 6-7; 20:4) 등 상대적으로 부유한 신도들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노동자(살전 4:11)였고, 노예도 일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극심한 가난’(고후 8:2)에 시달렸다고 말하는데, 데살로니가 교회 또한 이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정확히 어떤 상황 때문에 바울이 이 두 서신을[4] 썼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바울이 적대적인 이교도 환경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고자 하는 신도들을 격려하려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들 역시 다른 곳에서와 같이 우상숭배와 간음을 멀리하려 애썼고, 세상의 종말, 일상적인 노동의 역할, 그리고 믿음의 삶이 어떤 것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미국 욕실 청결제 “Scrubbing Bubbles”(문지르는 거품)의 텔레비전 광고 문구다.

Rainer Riesner, Die Frühzeit des Apostels Paulus: Stüdien zur Chronologie, Missionsstrategie, und Theologie, 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en zum Neuen Testament (Tübingen: Mohr, 1994), 301쪽.

데살로니가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Gene L. Green, The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Grand Rapids: Eerdmans, 2002), 1–47쪽을 보라.

일반적인 성경 주석에서 논의한 대로 저자가 누군지를 두고 논란이 오래 계속되긴 했지만, 여기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의 저자라는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살후 1:1; 3:17). 상대적으로 데살로니가전서를 바울이 기록했다는 설을 두고는 크게 논란이 없었다. 어떤 경우든 기독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일이 어떠한지 살펴보는 데 저자가 누군지는 두 서신 어느 쪽에도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믿음의 삶(살전 1:1-4:8; 4:13-5:28; 살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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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마음속에 품고만 있는가 (살전 1:1-4:8)

 

   서신 뒷부분에서 언급할 노동 문제를 고려해 볼 때,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살전 1:3)를 기억하는 것으로 서신을 시작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바울은 편지 도입부에서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노동이 가리키는 범위를 조심스레 소개한다.

 

  동시에 믿음이란, 단지 마음속에 품고 있는 데서만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상기시켜 준다. 믿음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믿음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권능을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향해 우리삶을 모두 내어드리는 응답이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의 삶을 살면서 이러한 응답을 잘 해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신성한 삶을 살기 위한 권면이 필요했다(살전 4:1-8).


   노동과 관련된 문제는 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그와 친구들이 밤낮으로 일해 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직접 언급된다. 바울이 이같이 말하는 이유는 비록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몸은 떨어져 있어도 자신이 이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신도들 가운데 다른 신도의 관대함에 빌붙어 사는 이들을 향한 질책이기도 했다. 만약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이는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새로운 삶을 전파한 바울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서 재정적 대가를 받기보다, 오히려 그들을 향한 관심의 표현으로 천막을 지으며 힘들게 일했다.

 

 

완주할 때까지 계속 가야 할 길 (살전 4:13-5:28)

 

   계속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공동체 안에서 생명을 다한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위로한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마지막 날에 깨우실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죽은 것이 아니며 단지 잠을 자는 것이다(살전 4:13-18). 그날이 언제 올지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니 우리는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 어둠의 세상에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것이다(살전 5:11).

 

  이러한 말씀은 사람들에게 일하는 자를 존경하고(살전 5:12-13; 여기서 언급한 ‘일’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끄는 ‘사역’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나태한 이들과 구분되는 일반적인 노동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 가운데 나태한 이들을 질책하고자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살전 5:14). 영생의 약속을 구실 삼아 게을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로 인해 현재 삶에서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망각의 밤이 아닌 그리스도의 구속이라는 ‘낮에 속하기에’, 우리가 행한 모든 선한 것들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매일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살전 5:15).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다 (살후 1:1-2:17)

 

   데살로니가후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들의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글로 시작한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거라며 이들을 격려한다(살후 1:1-12).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주의 날이 벌써 도래했으며 자신들은 그날을 놓쳤다며 고민했다. 이에 바울은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사탄이 마지막으로 “불법한 자”(살후 2:8; 흔히 ‘적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를 통해 이 세상을 기만하기 위해 강력한 최후의 시도를 하기 전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탄과 그 앞잡이들을 심판하시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축복을 주실 것이므로(살후 2:9-17) 우리는 담대해야 한다.

 

크리스천, 직장에서 나태해도 괜찮다?(살전 4:9-12, 살후 3: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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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가전서 4장 9-12절과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6절 말씀은 노동 문제를 직접 다룬다.[1] 학자들은 데살로니가의 나태함이 정확히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두고 여전히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우리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바울이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느냐이다. 따라서 이러한 나태함의 문제가 어떻게 시작됐는지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해 본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인들이 가까이 다가온 종말 때문에 일을 그만두었다고 생각한다.[2] 이미 하나님 왕국에서 살고 있다고 믿기에 노동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거나, 예수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일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에 데살로니가 서신에서는 종말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을 다룬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9-12절과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6절의 구절 모두 흥미롭게도 종말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하는 맥락에서 나태함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울은 나태함과 종말을 명료하게 연결하지는 않는다.

  •  어떤 이들은 이러한 나태함을 좀 더 고상한 이유로 설명한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사람들이 본업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종말론에 빠져 있던 사람이라면 이를 통해 근심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3] 그리고 이렇게 복음 전파를 희망한 사람들은 교회에 짐이 되지 않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최고 전도사 바울과 첨예하게 대립한다. 마게도냐의 교회들 또한 이러한 복음주의적 열의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나태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왜 자신들의 자유 시간을 복음과 관련된 일에 사용하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  세 번째 의견은 이 문제를 신학적 시각이 아닌 사회학적 시각으로 바라본다.[4] 일부 노동자들이 (나태함, 박해, 또는 일반적인 경제적 문제로 인해) 해고를 당해서 다른 신도들의 자선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루 일을 힘겹게 해내는 노동자의 삶보다 부유한 후원자 밑에서 살아가는 삶이 훨씬 쉽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를 돌보라”는 기독교적 권고가 이들이 남에게 빌붙어 사는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는 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재구성한 의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위의 견해 모두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서신에 제시되어 있고, 현대교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곧 재림하셔서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며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 많은 기독교인 근로자들은 맡은 일을 수준 이하로 수행하고는 직장에 다니는 ‘진정한’ 목적은 자신의 동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정당화한다. 그리고 다른이의 자선에 불필요하게 의존하는 문제도 지역적인 맥락(올해에만 세 번째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며 목사님에게 돈을 요구하는 경우)과 세계적인 맥락(해외 원조가 과연 진정한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데살로니가인들이 나태해진 원인을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다음 내용으로 넘어갈 수 있다. 먼저 알아볼 것은 위의 견해들이 공통적으로 그릇된 가정을 기반에 두고 나왔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일상적인 노동의 가치가 급격하게 낮아졌다는 생각 말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 또는 공동체 내에서 철저히 나눔을 실천하라는 명령 등,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한 면만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나태함을 정당화시켰다. 하지만 바울은 이와 같은 모습을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책임감 있는 기독교인은 1세기 당시, 고된 육체노동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따라서 교회 신도들의 관대함을 이용하는 이들을 본 바울이 근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할 능력이 있는 자들은 일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크리스천의 나태함 때문에 이교도 사회 내에서 교회의 명예는 실추되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7절에서의 성적 순결에 대한 지시 사항과 4장 9-12절에서의 지
시 사항이 갖는 관계에 대해서는 Traugott Holtz, Der erste Brief an die Thessalonicher, 
Evangelisch-katholischer Kommentarzum Neuen Testament (Zürich: Benziger, 1986), 161–162쪽과 
Karl P. Donfried, “The Cults of Thessalonica and the Thessalonian Correspondence,” New Testament Studies 31 (1985): 341–342쪽 및 Earl J. Richard, First and Second Thessalonians, Sacra Pagina (Collegeville: Michael Glazier, 1995), 194, 202쪽을 보라.

예를 들면, G. Agrell, Work, Toil and Sustenance: An Examination of the View of Work in the 
New Testament, Taking into Consideration Views Found in Old Testament, Intertestamental 
and Early Rabbinic Writings,  trans. S. Westerholm and G. Agrell (Lund: Ohlssons, 1976), 
122-123쪽;  John A. Bailey, “Who Wrote  II Thessalonians?” New Testament Studies 
25, no. 02 (1979): 137쪽; Peter Müller, Anfänge der Paulusschule: Dargestellt am zweiten 
Thessalonicherbrief und am Kolosserbrief, Abhandlungen zur Theologie des Alten und Neuen 
Testaments (Zürich: Theologischer, 1988), 162-167쪽; K. Romanuik, “Les Thessaloniciens étaient-
ils des parasseux?” Ephemerides Theologicae Lovanienses 69 (1993): 142-145쪽; 그리고 A. M. Okorie, “The Pauline Work Ethic  in 1 and 2 Thes salonians,” Deltio Biblikon Meleton 14 (1995): 63-64쪽을 보라.

 John Barclay, “Conflict  in Thessalonica,” Catholic Biblical Quarterly 55 (1993), 512–530쪽; Trevor J. Burke, Family Matters: A Socio-Historical Study of Kinship Metaphors in 1 Thessalonians (London: T&T Clark, 2003), 213쪽 이하를 보라.

여러 강조점들과 함께 D. E. Aune,“Trouble  in Thessalonica: An Exegetical Study of 1 
Thess. 4:9–12, 5:12–14 and II Thess. 6:6–15 in Light of First-Century Social Conditions,” 
ThM thesis (Regent College, 1989); Colin R. Nicholl, From Hope to Despair: Situating 1 &2 
Thessalonians, Society  for New Testament Studies Monograph Seri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157쪽 이하; Ben Witherington, 1 and 2 Thessalonians: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2006), 43–44쪽을 보라.

우리는 일해야 한다(살전 4:9-12;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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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닿는 데까지

 

   바울은 하나님께서 일할 능력이 있는 모든 신자가 일하기를 바라신다고 강조했다(살전 4:11-12). 또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라고 말하면서 “아무 궁핍함이 없게”(살전 4:12) 하라고 권면한다.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은 일을 회피하지 않고 근면해야 했으며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일해야 했다. 그리스-로마 도시에서 육체노동자가 되는 것은 현대 시각뿐만 아니라 고대시각으로도 굉장히 어려운 삶을 의미했다. 그러니 이러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굉장히 유혹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노동에 빌붙어 살면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바울은 놀랍게도 데살로니가전서의 “형제 사랑”(살전 4:9) 측면에서 이 문제의 해결법을 다룬다. 이로써 기독교 관계에서 사랑과 존중은 반드시 필요하며, 불필요하게 다른 이의 자선에 생계를 의존하는 것은 이를 베푸는 형제자매를 사랑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 준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점은 노동에 항상 급여가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요리, 청소, 수리, 미용, 육아, 청소년 지도와 같은 수많은 노동은 가족 또는 공동체의 필요를 채워 주지만 보수를 받지 않는다. 어떤 예술의 경우에는 대가 없이 노동을 제공하기도 하고,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보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분명 노동이다.

  크리스천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자신과 가족, 그리고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일한다.

 

 

창조 명령, 여전히 유효하다

 

   창세기 2장 15절 말씀(“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의 창조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원래 하던 일을 없애거나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더욱 풍성하고 굉장히 가치 있게 만든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과 11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7절에서 각각 게으른 자들을 일컬을 때 ‘무질서’를 의미하는 어근 ‘atakt-’에서 파생된 헬라어 형용사, 부사, 동사를 사용한다. 이때 창세기 2장 15절 말씀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단어들은 모두 “노동의 의무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를 폭로하면서 게으른 자들의 행동을 무질서하고 혼란한 것으로 그린다.[1] 여기서 이들이 위반하는 명령은 틀림없이 창세기 2장의 명령일것이다.


   바울이 계속해서 노동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속물적 의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 표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균형잡힌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면서 이미 하나님 나라는 도래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살전 4:9-10). 만일 크리스천이 성실히 일을 해내 뛰어난 성과를 보인다면, 이는 하나님 나라가 현실 도피적인 판타지가 아니라 이 세상의 가장 깊숙한 현실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탁월하게 하자

 

   노동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크리스천은 능력이 닿는 한 최고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 높은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교회의 평판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리스-로마의 많은 키니코스 학파(Cynics)는 일터를 떠났으며, 익히 알려진 것처럼 이들은 수치스러운 행동을 일삼았다.[2]
 

   바울은 크리스천이 노동의 책임을 회피하면 교회 전체의 평판이 훼손된다고 인식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12절에서 명백히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사회가 교회에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될까 봐 깊이 염려한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맥락으로 보았을 때 바울의 염려는 지극히 타당하다.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교회의 명예가 실추되었을 뿐만아니라 자선을 베푸는 신자들을 속이기 쉽고 멍청한 사람들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신자들의 업무 성과가 사회가 세운 기준에 미달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넘어서길 바랐다. 당시 교인들은 사회 내에서 적절한 역할 수행에 실패하면서 반기독교적인 루머와 이들을 향한 분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었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적개심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을 찾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교인은 노동을 존중하는 모범시민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게으른 자들을 엄한 규율로 다스리면서 실추된 명예를 다시 효과적으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성숙한 크리스천들은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올바른 직업의식을 심어주어야 하고 이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경제적 지원을 받는것이 복음 전도사가 지닌 권리임을 알고 있었으나(딤전 5:17-18)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지 않았다(살전 2:9; 딤전 3:8). 바울은 새로이 개종한 이들에게 크리스천다운 삶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 줘야겠다는 필요를 느꼈다. 이는 곧 교인들을 육체노동에 가담시키는 것이었다. 그리스-로마시대의 순회 철학자들은 개종한 이들에게 매우 빠르게 재정적 부담을 안겨 주었지만, 바울은 편한 생활을 하는 것이나 영적으로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상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독교 리더십은 일과 관련된 분야 내에서도 섬기는 종의 리더십이다.

 

 

육체노동과 고된 노동, 고결하다

 

   바울은 고된 노동을 긍정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장려했지만 사실 이는 문화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로마 시대는 육체노동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았다.[3] 빈민이나 경범죄인들의 도시 강제노역소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인식을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데살로니가의 게으른 자들이 실직한 육체노동자였다면 빈민 수용 작업 시설로 다시 돌아가는 대신 형제자매들의 자선에 의존하는 것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모든 크리스천은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지 않던가?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정당화 작업에는 관심이 없다. 바울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일을 주시기 위해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의 육체노동은 예배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 예배의 한 형태였다는 점에 굳게 기반을 두고 이 문제에 접근한다.

 

   바울은 육체노동을 크리스천이 하기에는 수준이 낮은 것이라고 폄하하지 않았으며, 게으른 자들에게 바울이 권면한 일을 바울 스스로도 수행했다. 사도 바울은 일을 통해 신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다른 신도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지닌 변화의 힘을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게으른 형제들이 자신의 관점을 받아들여서 믿지 않는 당대 사람들에게 치욕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인상을 남기는 좋은 귀감이 되기를 바랐다.

 

 Gerhard Kittel, Gerhard Friedrich, and Geoffrey William Bromiley,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5), 8:48을 보라. 연구의 도움을 받으려면 Ceslas Spicq, “Les Thessalonicien ‘inquiets’ etaient-ils des parrassuex?” Studia theological 10 (1956): 1-13쪽을 보라.

 Abraham J. Malherbe, The Letters  to  the Thessalonians, Anchor Bible (New York: Doubleday, 2000), 258–290쪽;  idem, Paul and  the Thessalonians: The Philosophic Tradition of Pastoral Care (Philadelphia: Fortress, 1987), 99–107쪽을 보라.

Gustav Wohlenberg, Der erste und zweite Thessalonicherbrief,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Leipzig: Deichert, 1903), 93쪽; I. Howard Marshall, 1 and 2 Thessalonians, New Century Bible Commentary (London: Marshall, Morgan, and Scott, 1983), 223쪽; Ernest Best, The First and Second Epistles to the Thessalonians, 2nd ed., British New Testament Conference (London: A&C Black, 1986), 338쪽.

진정으로 일할 수 없는 사람은 지원을 받아야 한다(살전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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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사회복지와 자선 기부를 열렬히 옹호했지만 이는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만 해당됐다. 초반에 실직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관대한 자선을 받는 것을 보고 바울은 이를 예수님의 사랑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겼다(살전 4:9-10). 이기적인 사람들이 이러한 사랑의 표현을 악이용한다 할지라도 바울은 여전히 진실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을 계속 행하라고 교회에 권고한다(살후3:13). 자신들의 선행이 의도한 대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후원자들이 실망하고 환멸을 느껴 이후에는 자선을 하지 않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직한 사람이 자선이나 복지 혜택을 받기에 마땅한 사람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일하고자 하는 의향이 있는지다(살후 3:10). 아무 문제없이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하기 싫다는 이유로 일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경제적 · 물질적 원조를 받을 자격이 없다. 반면 능력이 없거나 어떠한 경감 사유가 있어서 일하지 못하는 이들은 당연히 경제적 · 물질적 원조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13절 말씀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도리에 맞는 자선이 이뤄졌음을 추측할 수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누가 게으름을 피우는지, 또는 일할 의향이 있지만 일을 하거나 직장을 잡지 못하는지 분간해 내기란 쉽지 않다.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이 서로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신도들 가운데 경제적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을 구분해 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면, 서로 교류조차 없는 현대 도시, 지방, 또는 국가에서는 이러한 일이 얼마나 더 어려울지 상상해 보라. 현실이 이렇다 보니 교회와 정부의 사회정책과 관련해 기독교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일부는 지나칠 정도로 자비의 측면을 강조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듯 보이는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얻기 쉽고 큰 혜택을 제공해 주며 때로는 이를 장기간 제공하기도 한다. 다른 일부는 지나치게 근면에만 치우쳐서 원조 수혜자가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한 것임을 증명하는 데 상대적으로 엄격한 증거를 요구하고, 지원금과 지속기간이 한정된 혜택을 제공한다.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과 경제침체로 인해 장기간 실직한 이들을 지원하는 이슈는 지금까지도 특별히 골치 아픈 문제를 낳는다.

 

  이러한 지원이 사회의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 특히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일하는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문화 자체에 보조금을 제공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해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데살로니가 서신에서 볼 수 있는 말씀과 같은 성경 구절이 크리스천의 사회적 · 정치적 이해에 깊숙이 스며들어야 한다. 이를통해 내린 결론 때문에 다른 크리스천들과 대립할 수도 있지만, 이를 이유로 사회적 · 정치적 참여에서 멀어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존중과 배려, 우리의 의견만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겸손, 그리고 똑같은 구절이라도 다른 신도들은 전혀 반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정치 · 사회적 담론에 참여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서신은 고대 데살로니가의 상황에 맞는 하나님의 가치와 통찰을 보여 주는 것이지, 오늘날 굉장히 다른 맥락에서 적용되는 사회 또는 특정 정당의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모든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힘닿는 데까지 일하고 교회가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리고 교회 신도들의 후원으로 모인 자금을 어리석게 낭비하기보다 전략적으로 사용하기를 바란다. 만약 게으른 자들이 일터로 돌아가면 이들은 수혜자가 아닌 기부자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이며, 교회의 능력, 즉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 안팎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이들을 섬길 수 있는 능력이 증대될 것이다. 크리스천들이 할 수 있는 한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은, 결국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계획이다.

게으름, 개인의 성향일 뿐이다?(살후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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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공동체적 문제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말씀은 굉장히 중요하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신도들을 바로잡으라고 교회를 부르실 정도로 일을 회피하는 것을 굉장히 큰 죄로 여기신다. 이 때문에 바울은 교회에 노동의 의무를 회피하는 이들을 ‘경고’하라고 촉구하며(살전 5:14), 데살로니가후서 3장 6-15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게으른 형제들을 권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나름 가혹한 권계로, 바울이 게으름을 가벼운 결점으로 치부하지 않았음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교회는 일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자들에게서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이는 신도들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 이들을 배제시키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을 배척함으로써 짧지만 강한 충격을 주어 이들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게으름, 반드시 문제와 재앙으로 이어진다.

 

   일을 회피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 이상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노동을 꺼리는 이들은 종종 불건전한 것을 추구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마련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의 육체노동자들에게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살전 4:11)라고 권고한 것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1절 말씀(“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이 말하려는 요지와 연관이 있다. “일만 만들기만 하는 자들”의 헬라어 원문 ‘periergazomai[페리에르가조마이]’는 남들 문제에 개입하여 쓸데없이 참견하는 것을 가리킨다.[1]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서 교회의 도움을 받는 젊은 과부들을 향해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라고 말할 때 드러난다. 또한 데살로니가의 게으른 자들이 다른 사람의 일을 방해하며 논쟁을 일삼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게으름은 반드시 문제를 낳는다.

 

 

Johannes P. Louw and Eugene A. Nid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ased on Semantic Domains (New York: UBS, 1988), §88.243; Horst Balz and Gerhard Schneider,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trans. J. W. Medendorp and Douglas W. Scott (Grand Rapids: Eerdmans, 1990–1993), 3:73.

데살로니가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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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는 ‘일과 직장’이라는 주제를 담아낸다. 특히 여러 말씀과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두 서신은 크리스천이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일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식탁 위에 음식을 올려놓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기에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마땅히 일을 해야 한다.

 

  또한 노동의 고결함은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동일하게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업적의 크기에 따라 노동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않다. 대신 섬김의 태도와 업무를 얼마나 탁월하게 수행하는지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껏 최대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공동체 내에서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일의 의무를 기피하는 자들은 교회와 맞서게 될 것이다. 만약 이들이 계속해서 나태하다면 경제적 지원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노동에 따른 산물을 소비하고 간섭과 험담을 일삼으며 훼방을 놓아 공동체를 분열시킨다면, 이들을 공동체에서 추방하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