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요한복음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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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이란 주제는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나온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세계를 창조한 메시아의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창조의 일은 인간의 타락 이전, 나사렛 예수로의 성육신 이전, 대속의 역사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속자로 보낸 것은 예수님이 세상의 공동 창조자였기 때문이다. 구속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행동 방침이 아니라, 이 세상을 처음 창조했던 의도로 회복하는 것이었다. 창조 당시의 약속을 성취한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창조를 실현할 때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창 2:5). 하지만 인간이 행하는 일이 타락했기 때문에, 일의 구속은 메시아가 세상을 구속하시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행하신 일은 부자간에 서로를 사랑하는 데 꼭 필요한 면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이 말씀은 구속된 인간의 일에 대한 모델을 제시함과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좋은 세상에서 함께 일하며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좋은 일의 모델을 제시하실 뿐만 아니라 소명, 관계, 창의성과 생산성, 도덕성, 진실과 거짓, 리더십, 섬김, 희생과 고통, 노동의 존엄성과 같이 업무 현장에 적합한 주제를 가르치신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깊이 묵상할 것을 상기시키는데 커다란 관심을 보인다.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단순한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시각을 발견한다. 물론 이러한 다른 영역뿐 아니라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행함’을 뜻하는 헬라어 ‘poie? [포이에오]’는 100회 이상 사용되는 것에 반해, ‘노동’을 뜻하는 ‘ergon[에르곤]’은 성경에서 25회 이상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두 단어 모두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일하심을 지칭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의 고용 상황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담겨있다. 요한복음이 의도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력, 즉 ‘노동’이 단서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메시지는 정독과 묵상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여기서 일, 노동자, 직장에 대한 의미를 보유한 특정 말씀에 초점을 맞추고, 주제와 연관성이 적은 내용은 건너뛸 것이다

 

말씀, 세상 속에서 일하시다 (요한복음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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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장엄한 소개로 시작되는 요한복음은 한계 없는 말씀의 역사를 증언한다. 말씀은 하나님의 자기표현의 결정체로, 하나님은 태초에 그분을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낼 화폭처럼 전 우주를 두루마리처럼 펼친다.

   말씀은 일하신다. 그분의 일하심이 태초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발생한 인간의 모든 일은 그로부터 파생되었다. 파생되었다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말씀이 창조하신 것으로부터 인간이 일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말씀으로 이뤄졌다. 사소한 부분을 강조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수많은 기독교인이 메시아의 일에 대해 인류의 타락 이후에야 시작됐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물질적인 형태가 없는) 천국으로 인도하는 데 국한된다는 오해 속에 살아간다. 메시아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물질을 두고 일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창조를 부정하고 노동을 폄하하는 신학을 거부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릇된 통념은 바로잡아야 한다. 요한복음은 영적인 세계와 물리적인 세계의 대립,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대립을 말하는 이분법이나 기타 이원론적 시각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구원은 물질적인 신체의 족쇄에서 영혼을 해방하는 과정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이원론이 기독교인들 사이에 일상화되어 있다. 그릇된 철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종종 자신의 견해를 지원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사칭해 왔다. 사도 요한은 실제로 대조적인 연상을 사용해 가르침으로써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번에 걸쳐 기록했다. 빛과 어둠(요 1:5; 3:19; 8:12; 11:9-10; 12:35-36), 믿음과 불신(요 3:12-18; 4:46-54; 5:46-47; 10:25-30; 12:37-43; 14:10-11; 20:24-31), 영과 육(요 3:6-7) 등의 대조적인 연상은, 하나님의 방법과 악의 방법의 대립적인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예다. 이러한 대립관계를 이원적인 하위 우주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나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영적인 세상을 추구하기 위해 살고있는 현실, 소위 ‘세속’을 포기하라고 권유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대조적인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현실 세상 안에서 성령의 힘으로 살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실로 명확하게 요한복음 3장 17절을 통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모습으로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현실에서 탈출하도록 이끌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에 대한 증거가 더 필요하다면, 요한복음 1장 14절의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말씀을 묵상할 수 있다. 성육신은 육을 향한 영의 승리가 아니라 육체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리고 육체는 임시로 거주하는 거처가 아니고, 말씀이 영구히 머무는 거처다.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도마와 제자들에게 몸의 상처를 보여 주시고 만져 보라고 말씀하셨으며(요 20:24-31), 나중에는 일행과 함께 아침으로 물고기를 드셨다(요 21:1-14). 요한복음의 끝에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요 21:22-23) 기다리라고 하셨지 ‘내가 우리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할 때까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물질적인 영역에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창조자 하나님이셨다면 그 영역 안에 영주하려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다면, 마땅히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 역시 하나님이 지극한 관심을 가진 주제라고 추론할 수 있다.

제자로, 친구로 부르시는 분 (요한복음 1:35-51;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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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자’라는 일반적인 표현은 잠시 미뤄 두고,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묘사하는 제자의 본질을 잘 담은 “친구”라는 표현을 보자. 예수님은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선 관계 요소가 핵심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가장 가까운 측근들로, 항상 그 주변에 있었던 친구들이었다(요 1:35-39; 11:54; 15:4-11). 요한복음 1장에서는 저자인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언급하며 관계성을 보여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나타난다. 세례 요한은 안드레와 또 한 명의 사도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보인다. 안드레는 그의 형제 시몬을 데려온다. 안드레, 시몬과 한 동네 출신이었던 빌립은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초대한다. 예수님이 이러한 인맥과 관계를 쌓은 이유가 이들을 통해 사역을 진척시키기 위함은 아니었다. 관계망을 정립하는 것이 사역 전반의 주안점 자체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영광을 즐기기만 하는 교우관계인 건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일꾼이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아직 알아볼 수 있는 정형화된 형태의 일을 수행하지 않지만 (형제와 이웃을 불러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전도 행위이기는 하다) 곧 상황이 달라진다. 실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정과 일의 연관성을 이해해야 한다. 일은 성과를 낳는 동안 관계도 형성한다. 창세기 2장 18-22절 말씀의 경우처럼 말이다.

 

이유 있는 기적 (요한복음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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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첫 표적”(요 2:11)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사건은 뒤따라 소개되는 표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토대를 마련해 준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관심을 끌기 위해 부리는 잔재주와는 거리가 멀다. 마지못해 행한 기적이었고, 연회장에게도 숨겼던 일이었다. 예수님은 오직 절실한 필요를 호소하는 자를 위해, 어머니의 요청에 응해 기적을 행하셨다(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잔치가 그것으로 끝나 버리면 그 신랑 신부에게는 물론 양가에 매우 큰 불명예를 안겨 줬을 것이고, 그 수치는 지역 사회에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남았을 것이다). 혼인잔치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부동(不動)의 동자(動者)”(an unmoved mover; 헬라인들이 흔히 사용한 신에 대한 표현)가 결코 아님을 확인할 수 있고,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의 아들이자 사랑하는 육신의 어머니에게도 아들인, 사랑이 넘치고 타인의 필요에 공감하고 응하시는 분이심을 발견한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닮았을 뿐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권세를 가진 분임을 보여 주셨다. 요한복음을 세심하게 읽었다면 모든 것을 창조한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육신이 되어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물질적인 축복도 내릴 수 있음은 그리 놀랍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그분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하셨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원래 예정이 없었으나 행해진 이 기적은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명백히 가리키는 표적이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온 것은 하늘에서 열릴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더 많은 하객을 초대해서 모두가 그분과 함께 만찬을 나누게 하기 위해서였다. 현세에 이룬 예수님의 기적은 그 이루어진 장소에 놀라운 축복일 뿐 아니라, 앞으로 오게 될 왕국의 더 엄청난 축복을 가리킨다.

만물이 예수님 손안에 (요한복음 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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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고데모와의 대화나 제자들과의 대화는 무수한 보배를 담고 있다. 우선 ‘인간의 노동’의 심오한 의미를 나타내는 구절부터 보자.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요 3:35). 이 구절의 국지적 문맥은 아버지의 말씀을 단순히 전하는 아들의 모습에 역점을 두는 듯하나, 요한복음의 전반적인 문맥에서 “만물”이라 함은 표현의 방식이 아니라 실제로 만물(모든 것)을 뜻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메시아에게 모든 것을 창조할 권한을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분을 통해 모든 것을 유지하시며, 세상 만물을 창조 목적에 맞게 온전히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서문에서 봤던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 즉 아들로 하여금 세상의 창조와 유지에 관여케 하시는 모습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사실은 아버지가 홀로 하실 수도 있는 창조에 어째서 아들을 관여케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려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행위였다. 하나님 아버지는 창조 행위로 시작해, 만물을 다 그 손에 두심으로 아들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표현하셨다. 이 세상은 진정 사랑의 수고로 창조된 산물이다. 누군가에게 더 많은 일을 맡김이 사랑의 행위라면, 일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보다 더욱 아름다운 게 아닐까? 일과 사랑하심을 엮는 이 핵심 개념은 복음서 전반에 걸친 예수님의 행적을 통해 더욱 면밀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3장에는 말씀이 인간의 육체를 입은 성육신 그 이상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본문 내에서는 그 반대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육체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보여 주기도 한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일종의 태어남의 과정으로 성령을 받는다. 태어남이란 육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진정으로 영적인 상태가 되는 것은 육체를 탈피해 비물질적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는 예수님처럼, 영과 육의 연합 상태로 더욱 완전하게 태어나는(위로부터 나는 - 요 3:3) 것이다.

   니고데모와 토론하는 중에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난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21)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에 예수님은 동일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빛 가운데 행하는 은유를 사용하신다(요 8:12; 11:9-10; 12:35-36). 이런 은유는 일에 대해 매우 중요한 윤리적 의미를 내포한다. 즉, 우리가 모든 업무를 공개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에 충실하게 살 수 있게 만드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자신의 업무를 숨기고 왜곡하고 있다면 윤리적이지 못한 길을 걷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예수님도 비밀리에 행동하셨고(요 7:10)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예컨대 아리마대 사람 요셉(요 19:38) 같은 경우도 있으므로 예외 없는 철칙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면 최소한 ‘이 비밀은 진정 누구를 보호하는가?’라는 질문은 던져야 한다.

   아프리카에서 비즈니스 선교사로 활동 중인 사람을 예로 들어 보겠다. 그는 빅토리아 호수에서 사용할 보트 건조 사업을 시작했다. 지방 공무원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와 뇌물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요구는 항상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문서에 기록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비공개적으로 돈을 요구해서, 마치 양질의 서비스나 우선권을 위해 지불하는 팁과 비슷하다. 거래를 증명할 영수증도 없고, 기록도 남지 않는다. 그 선교사는 요한복음 3장 20-21절에서 영감을 얻어 이러한 부당한 요구에 대처했다. 뇌물을 요구하는 공무원에게 이렇게 답한 것이다. “나는 이런 현금 거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난 이 거래에 대해 대사관이나 사업 관리부에 문의해서 공식 문서화 절차를 알아봐야겠습니다.” 그것은 이런 부당한 요구에 대응하는 매우 유용한 전략이었다.

   빛 가운데서 행하라는 은유가 구분 없이 모든 것에 두루 적용되는 법칙이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 기밀 유지 및 엄수는 직장에서 분명 필요하며, 인사 문제나 온라인 개인정보 보호 혹은 영업기밀 등에서도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마땅히 알아야 할 사람이나 부서로부터 자기 행동을 숨긴다거나, 혹은 공개되는 것이 부끄럽다면 비윤리적인 행동이었음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생수, 예수 (요한복음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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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물가 여인 이야기(요 4:1-42)는 요한복음 전반에서 나타나는 일에 대한 직접적인 토론이지만, 동시에 깊은 묵상을 통해서만 그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매일 물을 길으러 오는 일에 몰두한 나머지, 영생을 주는 말씀의 힘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로, 이미 많은 기독교인에게 친숙하다. 이 주제는 복음서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일상적인 고민과 우려를 넘어서 삶의 영적인 측면을 해결할 수 없는 군중의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 준다. 그들은 그들을 위해 예수님이 기꺼이 자신을 산 떡으로 주실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요 6:51-61). 예수님의 출신지(나사렛 - 요 1:45)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진정 어디로부터(천국) 오신 분인지는 알지 못하며, 그분이 앞으로 가는 곳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무지하다(요 14:1-6).

   이 모든 것은 일에 관해 고민하는 데 의미 있다. 안정적인 물 공급이 주는 본질적인 이로움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그리고 갈증을 느낄 때마다 마시며 그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느낄지라도) 단순히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는 물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지 못함을 본문은 분명하게 말해 준다. 더 나아가 많은 현대인은 우물가의 여인이 매일같이 물을 길어 올리던 일이 얼마나 고되고 단조로웠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단순히 여인이 게으르다고 판단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노동의 저주(창 3:14-19)는 가혹하기 때문에 자기 행위보다 더욱 효율적인 체계를 희망했던 여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우리를 더러운 세속적인 일의 속박으로부터 풀어주시고, 평온한 영원의 바다에서 해수욕을 즐기게 만드시려고 오신 것으로 결론 낼 수는 없다. 우선 요한복음 1장에 묘사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의 포괄성을 유념해야 한다. 메시아는 우물의 물도 창조하셨다. 그건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칭찬하신 물이었다. 그 물을 통해 성령이 예배를 사모하는 자의 마음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역사하시는지를 설명한다는 것은 물 자체에 고상함을 부여하는 일이지, 폄하하는 일이 아니다. 창조자를 먼저 생각하고 그 후에 창조물을 본다는 사실은 창조물을 무시하는게 아니다. 우리의 시선을 창조주께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 창조물의 목적 중 하나임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본문에 뒤따르는 내용에서도 유사한 묵상을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이 수확하는 은유로 세상 속에서 제자들의 임무를 설명하신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요 4:35-36).

   농사일은 일용할 양식의 통로, 명백하게 느낄 수 있는 그 축복의 통로가 될 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진전을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도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이상으로 노동을 직접 예찬하셨다. 우선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ergon]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라는 말씀을 보라. 성경에서 헬라어 ‘ergon[에르곤]’이 처음 등장하는[1] 구절이 창세기 2장 2절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erga]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 [erga]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구절에서 창세기 2장 2절 말씀을 암시하시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요한복음 전체 맥락을 기준으로 요한복음 4장 34절 말씀 중 “그[하나님]의 일”이 태초에 하나님이 하신 일의 종합적인 회복이나 완성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행간에서 미묘한 메시지도 발견할 수 있다. 요한복음 4장 38절에서 예수님은 다소 이해하기 애매한 말씀을 하신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눈을 떠서 보기만 한다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추수할 준비가 된 사마리아인들이라는 추수할 밭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노력”을 대신한 “다른 사람들”은 누구인가? 애매하다. 놀랍게도 우물가의 여인이 그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답이다. 물론 나중에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했으나, 그것보단 초기 모습, 영적으로 느려빠진 존재로 알려진 그 우물가의 여인 말이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요 4:39). 훗날 제자들은 우물가의 여인이 뿌린 곳에서 거두었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다른 한 명의 일꾼이신 그리스도가 있었다.

   요한복음 4장 6절에서는 ‘예수님이 길 가시다가 피곤하셨다’라고 밝혔다. 원문을 직역한다면 ‘예수님이 여정에 수고하셨다’라고도 할 수 있다. ‘피곤하셨다’라는 원문 표현 ‘kekopiak?s[케코피아코스]’는 ‘수고했다’라는 의미다. 이 동일한 어원을 지닌 단어가 요한복음 4장 38절(요한복음에서는 여기 외에 더 사용되지 않았다)에, “너희로 노력하지[kekopiakate] 아니한 것을 ……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kekopiakasin]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 [kopon]에 참여하였느니라”에서 나온다. 실제로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여정으로 지치셨던 것이다. 사마리아라는 추수할 밭이 무르익은 것은 예수님이 그곳에서 수고하시며 일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를 위해 밭을 일구고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봤듯이, 인류의 타락 이후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는 태초부터 계속 이어져 온 창조와 생산의 수고였다. 마찬가지로 그분을 따르는 자의 구속 사역은 물을 긷는 주부나 밭에서 수확하는 농부와 그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맥락을 같이한다. 전도는 사람에게 주어진 여러 일 중 하나로 어느 가사나 농사에 비해 월등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 각각 특정한 형태의 일이며 대체할 수 없는 일일 뿐이다. 물을 긷는 일과 곡식을 추수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전도하는 일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대체하지 않으며 인간 행위 중 가장 가치 있는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잘한 일은 창조주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고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인 칠십인역에 나와 있다.

안식일에 일해도 된다? 하면 안 된다? (요한복음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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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데스다 못에서 치유받아 자리를 들고 걸어간 사람의 이야기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안식일에 병든 자를 치유하시는 예수님과 그에 뒤따른 논란을 다시 상기시킨다. 비록 논란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할지라도, 그 논란에 대한 이곳에서의 예수님의 변증은 다른 때와는 약간 다른 각도를 취한다. 길게 이어지는 예수님의 논증은 요한복음 5장 17절로 말끔하게 요약할 수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원칙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창조 세계가 지속되도록 일하시므로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도 안식일에 일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주장이 예수님만의 주장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자신의 일하심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추론 과정으로 이것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은 특별하다.

   결과적으로 이 본문을 토대로 우리도 안식일에 일하는 행위의 타당성을 추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와 같은 신성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 예를 들어 도랑에 빠진 가축을 끌어내는 일은 이미 안식일에도 합법적인 행동으로 인정했다. 본문에서 그다지 큰 고통이 없는 것 같은 그 병자가 예수님을 붙잡아 뒀다가 안식일이 돼서야 치유하시게 했다고 해도, 이 이야기 속에서 치유 자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오히려 치유받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나가도록 명령한 것(유대인 율법 기준으로 자리를 드는 행위도 일에 해당하기에)을 두고 예수님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 일요일에 차를 몰고 휴양지로 이동해도 되는 것일까? 월요일 아침에 시작하는 비즈니스 회의를 위해 일요일에 비행기를 타도 되는 것일까? 제품 생산을 위해 공장을 365일 쉬지 않고 돌려도 되는 것일까?

   예수님은 단순히 안식일에 해도 되는 일 목록의 범위를 넓히시는 것이 아니다. 대신 우리가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주제, 즉 창조 세계(물질적 · 영적 모두)를 유지하고 구속하시는 일이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일일 경우, 안식일에도 행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일이 그러한 조건을 만족하는지는 해당자가 분별해야 할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www.theologyofwork.org의 '마태복음과 일'에 나오는 "마12:1-8"과 '마가복음과 일'에서 "막1:21-45"  및 "막2:23-3:6", 그리고 '누가복음과 일'에 나오는 "눅6:1-11; 13:10-17" 을 보라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보다 중요하고 명확한 교훈은 하나님이 오늘도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하시며, 예수님은 치유 사역을 통해 아버지의 일을 진척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표적은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세상의 실현이다. 표적들은 “내세의 능력”(히 6:5)을 증거함과 동시에 현세를 유지하고 관리한다. 수많은 직업과 직책에 대한 패러다임이라고 봐도 매우 적절하다. 믿음으로 행해 의사, 간호사, 자동차 정비사 등의 직업인들이 하는 것처럼 부서진 것을 회복할 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 프로그래머, 교사, 예술가 등이 하는 것처럼 창조의 역량을 배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고 사람에게 주신 권세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믿음 안에서 행하신 구속 사역과 창조, 생산의 일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선포하는 고백이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의 본래 의도를 회복하고 계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의 계획하신 목표를 이루실 것이다.

생명의 양식, 예수 (요한복음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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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 대한 요한의 기록(요 6:1-15)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데스다 못에서 병을 고침받은 사람에게서 본 여러 주제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 표적이 오직 예수님만 영원한 생명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바로 그 순간에도, 에수님은 이생에서의 생명을 계속 유지하게 하시기 위해 일하신다. 하지만 요한복음 6장 27-29절은 일의 신학이 풀어야 할 특별한 고민거리를 제시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얼른 봐도 고민이 필요한 두 가지 문제가 눈에 띈다. 우선, 예수님이 일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을 위한 일을 단순히 ‘믿음’으로 국한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첫 번째 문제는 비교적 쉽게 다룰 수 있다. 여느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동일하게, 성경 역시 전후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요한복음 6장의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떠나지 않고 계속 빵을 만들어 주시는 ‘제빵왕’이 되실 것을 기대했다는 점에 있다.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라고 하시며 무리의 영적 근시안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빵을 먹었지만 그 표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볼수 없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배운 것과 동일한 교훈이다. 영원한 생명은 무한한 음식의 제공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살아 있는 말씀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준비 작업(빵을 제공하는 일)이 원하는 결과(하나님과의 관계)로 귀결되지 않는 것을 보시고 일을 그치신다. 유능한 일꾼이라면 누구라도 일을 그쳤을 것이다.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알 테지만, 소금을 더 뿌리는 것이 음식의 맛을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멈추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이 의도하셨던 메시지는 무조건 ‘일을 그만하라’가 아니라 필요 없는 것(빵)을 더 얻으려고 일한다면 중단하라는 메시지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빤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오늘날 그 진리를 경청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일시적인 유익을 위해 일할 것을 금지하시는 듯한 본문의 내용은 군중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함에 초점을 맞춘 과장법이다.

   두 번째 문제, 하나님을 위한 일이 단순히 믿음 하나로 되는 것처럼 표현된 부분은 복음서 전반과 요한의 서신을 통해 나타나는 저자의 신학을 배경으로 봐야 한다. 요한은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해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가 보듯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력에 대한 그의 고견이 하나님을 더욱 깊이 겸손하게 의존하도록 이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일은 무한하다.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일을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행동하는 순종도 마찬가지로 강조하신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6). 그리고 다시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두 극단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자면 ‘믿어 순종하게 함’(롬 1:5), 혹은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 같은 말씀이 있다.

살과 뼈, 흙의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요한복음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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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과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았다(9장). 그를 보며 제자들은 죄에 대한 교훈이나 인과관계에 대한 사례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눈먼 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그가 볼 수 있도록 고쳐 주신다. 눈먼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특이한 치료 방식이나 눈먼 자가 치유받은 후 취하는 행동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살과 뼈, 흙의 세상에 임하심을 확인하게 된다.

   예수님이 침과 흙을 섞어 소경의 눈에 바른 행동은 이상 행동이 아니라 인간 창조와 연결되는 계산된 반복이다(창 2:7). 성경과 헬라 전통은 동일하게 “진흙”(p?los)을 언급하며 인간의 창조를 묘사한다. 일례로 욥기 10장 9절의 말씀이 있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2]

 

이 구절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진흙이, 창세기 2장 7절에서 아담의 창조에 쓰인 “흙”(티끌)과 같은 히브리어를 써서, 그 흙과 동의어적 병행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진흙과 인간의 또 다른 사례들은 사 29:16, 45:9; 렘 18:6; 롬 9:21; cf. 욥 10:9, 33:6을 보고, 성경 외 자료로는 Aristophanes, Birds 686; Herodas, Mimes 2.29를 보라.

진정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일하셨다 (요한복음 10-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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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이 가까이 왔을 때, 그분은 가장 위대한 표적을 행하신다.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요11:1-44). 이미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던(요 8:59; 10:31) 반대파는 예수님과 나사로 모두를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오자, 역설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예찬하는 말로 보이는 표현을 사용하시며 자신이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 것이라 말씀하신다(요 12:32). 그러나 요한은 그다음 구절에서, 이것이 십자가가 땅에서 들리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라고 설명한다(요 12:33). 단순한 말장난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이 지적하듯이,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완전한 자기희생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고귀한 아들임을 완전히 드러내신다. “자비로운 자기희생의 하나님으로 정의되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그냥 드러난 게 아니라 그분 아들의 섬김과 스스로 낮추심을 통해 이루신 구원 사건에서 상연됐다.” [3]

  다가오는 예수님의 자기희생 행위는 다양한 방식의 대가 지불을 뜻한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기도 하셨지만, 그에 수반된 극심한 고통과 갈증도 감내하셨다(요 19:28). (요한은 예외였지만)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비통함을 겪어야 했고 어머니에게 자식을 잃는 큰 슬픔을 안기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요 19:26-27). 오해를 받고 누명을 쓰는 수모도 겪으셨다(요 18:19-24). 하나님이 예비하신 일을 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지불해야 하는 대가였다. 태초에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이 창조되지 않았을 것이며,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의도대로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 역시 공정하지 않게 느껴지는 비용을 요구할 때가 있고, 그 비용을 지불해야만 일을 마칠 수 있는 상황에 놓일 때도 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일하셨다. 일을 자기 예찬,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보여 주신 본에서 그만큼 멀어진다.

   다른 사람을 위해 수행한 일에는 필연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며 (현대 서구의 기준에서) 적지 않은 연봉을 받지만 최대한 동시에 환자의 고통을 현장에서 목격하며 함께 힘들어한다. 높은 시급을 받는 탁월한 배관공일지라도 오물과 배설물을 뒤집어쓰는 일을 감수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공직에 앉은 자는 물론 모든 시민의 정의와 번영을 위해 일하지만,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가난한 자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음’을 알고 그들의 어려움을 헤아려야 한다(요 12:8).

   반대로 각 직업마다 타인의 고통을 같이하지 않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진통제를 투여하지 않은 환자와 대면하는 것을 최소화한다거나, 깨끗한 신축 건물에서만 배관 작업을 한다거나, 사회의 가장 취약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향한 마음을 닫는 방법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일하는 것이 예수님의 행동양식을 따르는 것일까? 비록 우리가 때때로 일을 생계 수단으로 언급하지만, 긍휼한 마음이 있는 일꾼이라면 무엇이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고 에이게 하느냐로 일을 정의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일한다.

Richard J.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68쪽.

‘겸손한 섬김’을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보라 (요 1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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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는 아무도 한 적이 없는 일을 예수님이 하시는 모습을 봤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고 눈먼 자를 치료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이다. 다음으로 하시는 일은 누구나 할 수는 있지만 하고 싶지 않은 종류에 속한다. 바로 발을 씻기는 일이다. 노예가 하는 일을 왕이 수행한 것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예수님은 요한복음 전반에 깔려 있는 질문을 표면으로 끌어내신다. ‘예수님의 일은 어디까지 우리 일에 적용되는가?’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답이 쉬울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다. 우리 중 누구도 이 세상의 죄를 위해 대신 죽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들에게도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서로 발을 씻기라는 말씀을 명백히 하신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예수님은 할 수 있는 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시다.

   겸손한 섬김의 자세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걸쳐 있어야 한다. 기업의 CEO가 제품의 생산 현장을 방문한다면 조립 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발을 씻기기 위해 왔다는 겸손한 섬김의 태도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주유소 직원도 화장실 바닥 청소를 할 때 방문하는 운전자의 발을 씻긴다는 태도로 임해야 한다. 행동보다는 태도의 문제다. 주유소를 방문하는 손님을 위해 사장이나 주유소 직원에게는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보다 더 잘 섬길 수 있는 방법이 물론 있을 것이다. 그 섬기는 방법이 무엇이든, ‘겸손한 섬김’이라는 기준으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우주를 통치하는 성령 충만한 교사이신 예수님이, 그분을 따르는 제자라면 몸에 배어 있어야 할 겸손을 매우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낮추어 섬기심을 통해 몸소 보여 주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을 따르는 이에게 겸손히 섬길 것을 요구하시고 그 행동의 높은 가치를 역설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경건한 일이란 단지 자기충족을 위함이 아닌 타인을 위한 행함이라는 진실을 명백히 대면케 하려는 것이었다.

   최근 몇 해 동안 ‘섬기는 리더십’ 개념은 기업과 정부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는 요한복음뿐 아니라 성경 전반에서 다루는 개념이다.[4]

다른 자료들로는 Robert Greenleaf, Servant Leadership (Paulist Press, 1977)과 Max De Pree, Leadership is an Art (Michigan State University Press, 1987)가 있다. 맥스 드프리, 《성공한 리더는 자기 철학이 있다》(북플래너 역간).

예수님의 다락방 설교 (요한복음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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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까지는 ‘다락방 설교’(the Upper Room Discourse)로도 불리는데, 깊이 다루기에는 너무 심오한 신학적 요소가 많아 일부 두드러진 부분만 언급하겠다. 동시에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감정의 동요 없이 전달되었던 것은 전혀 아니다. 이 본문에는 사랑하지만 그 곁을 곧 떠나야 하시는 제자들에 대해 고뇌하시며, 곤경에 처할 그들을 위로하시려는 의도가 특별히 부각되어 있다.

사랑의 관계에 동참하라는 초대 (요한복음 14-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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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4-17장 본문의 신학은 개인 관계의 강조로 가득하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너희를 친구라” 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신다(요 15:15).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일을 하지만, 우정과 동료 간 협력 정신으로 임했다. ‘가족기업’(Family Business)이라는 용어가 담고 있는 의미에 딱 맞다. 예수님은 혼자서 일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분의 일과 관계는 얽혀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10-11). 제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 내라고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요 14:18). 성령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제자들도 할 것이다(요 14:12).

   얼핏 보기보다 심오한 가르침이다. 이것은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과 친구들이 기도 속에서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간의 사랑 관계의 연료인 세상의 창조 · 회복 사역에 그들 역시 적극적인 참가자임을 뜻한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의 일을 수행하고 그 부자간의 (성령 하나님은 조금 뒤에서 다룬다) 친밀한 사랑에 동참하게 된다. 아버지 하나님은 세상을 형성하고 재창조하는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게 함으로써 아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신다.[ 5]아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고 재창조함으로, 오직 아버지의 뜻만을 행해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표현한다. 제자들과 친구들은 이러한 성부 하나님 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의 무한한 사랑 안에 동참하게 되는데, 이는 신비적인 성찰과 묵상으로만이 아니라 아들의 사명을 품고 그분이 일하셨던 것처럼 힘씀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사랑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은 일에 동참하라는 부르심과 떼려야 뗄수 없는 관계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요 17:23)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로 응답되고, 그로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 노동의 핵심적인 측면은 공동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심지어 많은 사람에게 직장이란 개인과 관계라는 측면으로 볼 때 가정을 제외하면 밖에서 가장 중요한 상황을 제공하는 곳이다. 혼자 일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일터가 자신의 집 안이든 밖이든, 공급 업체, 고객 등의 인간관계로 얽혀 있게 마련이다.[6] 우리는 앞서 예수님이 제자들과의 관계를 협력하는 동료일 뿐만 아니라 친구로 이루어진 집단으로 부르셨음을 봤다. 일에 있어서 관계는 기업체 본질상의 공리적이고 실용적인 우연한 부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는 일 자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함께 일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창조는 인간이 함께 일하면서 대인관계를 엮어 나가는 수단이 되고, 이를 통해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한다.

   자기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을 영적이지 못하다고 여겨 꺼려 하는 프로젝트 중심적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위로와 격려가 아닐 수 없다.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관계를 키워 나가기 위해서는 일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함께하는 일은 그 자체로도 관계를 쌓을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모델로 삼아, 우리는 일터에서의 관계를 배울 수 있다. 공통의 목표를 향해 일해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화합하게 하시고 가장 인간답게 만드시는 주된 방법 중 하나다.

요 3:35; 5:19-20 참조.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5)라는 진술은 구체적으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나누셨던 영광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3절에 나오는 최초의 창조에 그리스도가 포함되기에 딱 맞는 구도를 형성한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The Tuft of Flowers”라는 시에서 “‘인간들은 같이 일해야 해’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말했지, ‘그들이 같이 하든 따로 하든 간에’ ”라고 멋지게 표현했다. Robert Frost, A Boy’s Will (New York: Henry Holt, 1915), 49쪽.

풍성한 열매를 약속하시다 (요한복음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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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는 예수님과의 관계라는 축복에서 시작하고, 예수님을 통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어진다(요 15: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그러나 이 사랑의 결과는 수동적인 행복이 아닌 생산적인 일로, 비유적으로 과실을 맺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요 15:5). 우주를 생성하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도 생산적이기를 바라신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이 세상에 오랜 영향을 주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위대한 선물이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 15:16). 풍성한 열매에 대한 약속은 앞선 예수님의 말씀,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요 14:12)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

   전도해서 회심한 사람을 일컬어 때때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열매’라고 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보다 큰 일”이라는 표현은 ‘내가 하나님께로 인도한 자의 수보다 더 많은 회심자’를 뜻하게 된다. 전도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틀림없는 약속일 것이다. 이 구절을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받은 제자들에게만 하시는 말씀으로 보면, 열매는 회심한 자들만을 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는 자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보면, 열매란 성도들이 부름받은 매우 다양한 일을 뜻한다. 모든 세상이 그분을 통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하는 일”이라 하신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일을 지칭한다.

   여태껏 우리가 보아 온 “그보다 큰 일”이라 함은 더 우수한 소프트웨어의 개발, 더 많은 사람을 먹이는 것, 더욱 지혜롭게 가르치는 것, 조직의 효율성을 향상시키는 것, 고객 만족도를 높이는 것, 더욱 생산적으로 자본을 사용하는 것, 국가를 보다 공정하게 다스리는 것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의 현장이 기업, 공직, 의료서비스, 교육, 종교 어디인지는 열매 맺음의 가치와는 무관하다. 사람들의 필요를 섬겼는지에 따라 우리 일의 가치가 평가받는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7). 섬김은 사랑의 능동적인 형태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다 (요한복음 요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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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를 단순히 일에 대한 증거 구절로 전락시키는 위험 대신, 말씀하시지 않는 메시지가 말씀하신 내용 만큼이나 중요한 한 구절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긍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매우 놀라운 요약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참된 왕임을 선포하시지만, 빌라도와 같은 교활한 정치꾼이 알아볼 수 있는 왕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왕권은 절대적이고 자신을 완전히 주는 것이었기에 참으로 스스로 희생하셔야만 했다. 따라서 이 땅에서 권력 쥔 자로부터 사형 선고를 이끌어내는 상황은 불가피 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지 않으시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왕국이 일시적인 현실 세계의 정치 · 경제 · 사회 문제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일시적인 내적 종교 체험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영문 성경 NRSV와 NIV와 다른 번역본들에서는 그분의 나라는 다른 영역에서 온다는 표현이 보다 두드러진다(요 18:36). 그분의 통치는 마치 그분과 같아서 하늘로부터 유래한다. 그런 예수님이 이 땅으로 오셨고, 그분의 나라는 이 땅에도 실존하는 왕국이며, 로마제국도 결코 이룰 수 없을 만큼 더 실재하는 왕국이다. 이 땅에 임한 그분의 왕국은 이 땅의 나라와는 다른 작동 원리를 지닌다. 이 세상에 강력하게 작용하지만 현재 이 땅을 다스리는 통치자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의 왕국이 다른 영역에서 왔지만 자신이 창조한 세상안에 있음을 그때는 바로 설명하시지 않았다. 대신 후에 요한계시록 21-22장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생한 모습으로 보여 주신다. 하늘에서 내려와 이 세상의 수도로서 마땅한 자리를 차지하는 예수님의 왕국은 그분의 제자들이 영원한 보금자리로 삼을 곳이다. 예수님이 영원한 삶, 혹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실 때마다 그곳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가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온전해진 세상을 뜻한다.

나는 누구인가 (요한복음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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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은 ‘일’에 대한 고찰보다는 ‘일하는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고찰할 기회를 준다. 예수님을 다시 만났을 때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대신에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떠한 불만의 표시도 나타내지 않으신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물에 고기를 가득 채워 주심으로 제자들의 노동에 축복하신다.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전도자의 임무로 돌아가지만, 각자의 특정한 부르심일 뿐 고기 잡는 일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요한복음 21장의 배경과 흐름은 베드로의 회복, 베드로의 미래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 21:20)의 미래를 대비하는 구도로 진행된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 무너졌던 관계를 주님은 세 번 사랑을 반복해 고백하게 하심으로 회복하신다. 본문의 시점에서 가까운 미래를 내다보면 베드로가 겪어야 할 순교가 있고,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긴 수명을 누릴 것임을 암시하는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나중 인물에 초점을 맞춰 보려 한다. 그가 자칭한 내용이 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네 번째 복음서에서 ‘주의 사랑하는 제자’의 정체가 끝내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호기심을 유발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사도 요한이라고 추정하지만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7]) 여기서 핵심은 어째서 그 제자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베일에 숨겼을까 하는 것이다. 다른 제자들로부터 자신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제자로 표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서 전반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겸손과 자기희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동기다.

   그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은 그가 모든 제자에게 적용되는 표현인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칭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그는 단순히 이름이나 가족 관계, 직업으로 답하지 않는다. 그의 대답은 이것이다, “저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입니다.” 요한의 말을 빌자면 주의 사랑하는 제자는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요 13:23) 있는 제자였고, 마찬가지로 메시아는 “아버지 품속”(bosom)에서 정체성을 찾는다(요 1:18).[8] 우리 또한 무슨 일을 한다거나, 누구를 알고,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에서 정체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릴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찌 보면 예수님을 통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하다. 이것이 우리 정체성의 근원이고 삶의 이유라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활동함으로 우리는 그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활동의 매우 중요한 요소가 일상의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일은 사랑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과, 또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무대가 된다. 일상의 일이 타인의 눈에 사소해 보이든, 반대로 고귀해 보이든 그 일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일을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을 나타내는 살아 있는 비유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다.

 

D. A. Carso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The Pillar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1991), 68-81쪽.

이것들은 요한복음에서 “가슴, 품, 품속”(헬라어로 kolpos)이라는 단어가 딱 두 번 쓰인 경우다. (TOW 웹사이트 원문에는 “leaning on Jesus’ bosom”[요 13:23]과 “in the bosom of the Father”[요 1:18]의 병행법을 살려 번역한 KJV 역본이 실려 있다 - 편집자 주). 대부분의 현대영어 성경 역본에서(NASB만은 예외)는 이 병행법을 빠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