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이사야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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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그분의 위대하신 권능과 영광스러운 주권, 죄를 정화하는 거룩함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은 이사야는 자신과 자신이 사는 사회에 겸허해진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 6:5).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경험한다면, 부풀려진 자만심과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잘못된 행위는 정화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깨달음이 인생에서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또한 생활 방식은 물론이요, 사업 방식, 예배하는 방식까지 모두 변화시킨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우리가 하나님과 비교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면 우리의 가치관과 직업 윤리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특히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지도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명확하게, 때로는 두렵기까지 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사야서는 이스라엘 및 유다의 왕들과 그 외 지도자들의 업적을 광범위하고, 또 부정적으로 평가한다.[1]

 

   현대 사회의 직장은 고대 이스라엘과 비교해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지도자들은 정부, 군대, 종교 분야에 종사한 반면, 오늘날 지도자들 가운데 다수는 기업이나 과학 및 교육기관에 종사한다. 하지만 이사야서가 당시 상황에서 의미한 바를 이해한다면 이사야서 내용을 오늘날의 세계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고, 오늘날 직장에 적용 가능한 원리를 도출해 낼 수도 있다. 더욱이 이사야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일하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시는 새 창조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이사야서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이사야가 대변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사야는 선지자의 이름을 딴 성경책에 그의 예언을 기록한 소위 구약의 주요 ‘기록 선지자’ 가운데 첫 선지자다.

 

   기록 선지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명기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유다 지도자들에게 왜 낙제점을 부여하셨는지 알려면, 모세 율법에 기록된 언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백성들과 언약 관계를 맺으셨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안전과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셨고, 이는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심으로써 보증되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다른 기록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사야 역시 백성들, 특히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음을 선포한다. 예수님 시대 유대 백성들이 구약 성경을 종종 ‘율법과 선지서’라고 간단히 요약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선지서를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선지서의 역사적인 배경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의 배경 역시 고려해 읽어야 한다.

 

 

이사야서에서 “이스라엘”은 분열된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이나 유대인들 전체를 가리키는 반면, “유다”는 분열된 이스라엘의 남쪽 왕국을 가리킨다.

이사야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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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1장 1절에 따르면 선지자 이사야의 사역은 남 왕국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등 네 왕의 통치 시대에 걸쳐 있다. 그는 유다에서 50년 이상을(대략 BC 740-686년) 하나님의 사신으로 섬겼는데, 이는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등 기록을 남긴 세 명의 대선지자들보다 거의 100년이나 앞섰다.

 

   유다의 정치적 형국은 북 왕국 이스라엘과는 달랐지만, 백성들의 죄는 비참하게도 비슷했다. 이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사적인 이익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억누르고 소외시켰으며,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위협하는 사업 관행을 일삼았다.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벧엘 제단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던 동시대인 아모스와 같이, 이사야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태가 이기적인 사회윤리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이사야는 예레미야나 에스겔과는 달리 선지자 사역에서 예언(foretelling;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과 선포(forthtelling; 죄에 빠진 백성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것)를 상당 부분 융합했다.[1] 이사야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유다 역사의 특정한 시대에 단단히 묶어 두는 몇몇 역사적인 접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계시는 이사야가 활동한 시대에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을 창조하시는 종말의 때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사야서를 두고 다양한 봉우리들은 볼 수 있지만 그 봉우리 사이에 뻗어 있는 골짜기들(다양한 예언적인 통찰을 구별 짓는 역사상 시기)은 볼 수 없는 산맥의 계시로 묘사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임마누엘이라는 아기의 징조를 주신다는 예언(사 7:14)을 700년 후 마태에 의해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계시로 인용한다.[2]

 

   선지자 이사야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6세기 전에 닻을 내리게 한 이사야서의 역사적인 상황은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즉 BC 740년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사 6:1). 그다음 본문은 요담 왕의 15년간의 통치(왕하 15:32-38)를 건너뛰고 이사야 7장 1절에서 아하스 왕 시대(왕하 16:1 이하)로 넘어간다. 당시 아람과 동맹국인 북이스라엘이 예루살렘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후 36-37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 장군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완전히 멸망시키겠다고 위협했을 때 히스기야 왕이 봉착한 난국을 상세하게 기술한다(왕하 18:13-19:37).

 

   이사야는 38-39장에서 히스기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가는데, 하나님께서 왕의 치명적인 질병을 치료하셔서 그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신 내용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각각의 역사적인 접점에서 왕들과 직접 대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사야는 임박한 국가적인 심판에서부터 잇따라 일어나는 재앙 이후에 어떻게 은혜로운 회복을 맞이할 것인지,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으로만 설명 가능한 독특한 종말론적인 소망까지, 참으로 광범위한 계시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여 준다. 예언과 훈계를 모두 포함하는 이사야의 사역 범위는, 유다 왕권에서부터 국가적인 바벨론 포로 유수, 회복과 유다로의 귀환까지 모두 아우른다. 그는 메시아의 오심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까지 일어날 사건들을 선포한다. 1-39장은 이사야의 활발한 사역 기간을 다루는 반면, 나머지 장들(40-66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를 깊이 살핀다. 이와 같이 이사야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선지자적인 말씀은 수많은 세대들을 포괄한다.

 

   이사야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유다 백성이 죄 가운데 있음을 그들 앞에서 선포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사야는 앞으로 올 세대들을 위해 그의 예언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사 30:8-9).

 

   하나님은 하나님의 율법이나 하나님 언약의 요구를 무시하고 묵살하는 것을 죄로 보신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죄로 물든 백성을 향해 하는 예언은 너무나 강력하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으로 부르신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바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한다면 사람조차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진리를 선포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두 가지 직무를 모두 수행했다. 이사야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에 따라 살도록 돌이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진리를 선포), 미래를 내다보고 임할 사건들을 예언했다(미래를 선포).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주로 정의를 선포하는 설교자였으며, 그들의 예언(예보적) 사역은 이사야나 다니엘, 미가의 예언적인 사역에 비해 폭이 좁았다. 그들이 죄에 빠진 백성들에게 죄로 인해 하나님의 재앙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는 동안, 소수의 선지자들만이 하나님이 내리실 심판 그 이상으로 예언의 범위를 확대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예언은 아하스 시대 한 아기의 출생으로 가까운 미래에 성취됐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처녀 잉태와 탄생에서 성취됐다.

이사야서에서 말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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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에서는 일을 일곱 개의 주요 주제로 나눈다. (1) 예배와일은 불가분의 관계다. (2) 일에서 교만하고 자만심을 품으면 파멸하고 만다. (3)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착취하여 부를 이루는 행위를 경멸하신다. (4)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평화롭게, 또한 번영하며 살기를 바라신다. (5)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시다. (6)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탁월하게 일하는 좋은 모범 사례다. (7) 오늘날의 일은 ‘새 창조’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일곱 가지 주제를 이사야서에 처음 등장하는 순서대로 논의할 생각이다. 

 

 

예배와 일, 불가분의 관계 (사 1장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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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죄로 물든 삶을 회개치 않은 채 드리는 종교의식을 혐오하신다고 이사야는 주장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1-17).

 

   후에 이사야는 하나님의 책망을 반복한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그 나라에 재앙이 임하는 까닭은, 근로자들을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사 58:1-8).

 

   평일의 삶과 주일의 삶을 구별하여 사는 오늘날의 세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안 된다. 너희가 나의 법을 알고 나를 사랑한다면, 직장에서 근로자들을 부당하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직접 경험했기에 잘 알았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크리스천이라면, 직장에서도 개인의 삶 전반에서도 삶이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 이사야는 모든 신들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반복적으로 보여 준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사 8:13-14a).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7-29).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13).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사 44:6-7).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을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사 48:12-13).

 

   이런 크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권세에 압도당해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으나, 이내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마련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잠기면, 우리 영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고, 공의와 의를 일상에 적용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24시간을 살게 된다. 일과 예배는 거룩하신 분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으로 긴밀하게 묶여 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일하는 방식, 여가를 즐기는 방식을 바꾸며, 우리의 일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바꾼다.

 

   일과 예배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일터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기 위해 이사야가 언급한 두 왕의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아하스와 히스기야는 군주로서 유다를 지휘할 책임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나라와 예루살렘 성을 멸망시키려는 무서운 적들을 만났다. 그리고 둘 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유다가 적에게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을 기회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에 빠진 왕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b) 하고 아하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하스는 구제를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대신 경솔하게 앗수르와 동맹을 맺는다.

 

   한 세대가 지난 후 히스기야는 더욱 강력한 적과 맞닥뜨린다. 그때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산헤립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도록 그냥 두지 않으신다고 확증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18만 5천 명을 쳐 전멸시켰다. 성경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보니 시체뿐이었다’고 밝힌다. 마침내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다시 니느웨로 돌아갔다(사 37:36-37).

 

   두 이야기에서 이사야는, 예배의 초석인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우리를 위협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대조하여 보여 준다. 일터는 우리가 믿음과 두려움 사이에서 선택에 직면하는 장이다. 우리가 일할 때 주님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임마누엘 주님은 심지어 일터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신다(사 7:14).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지 안 믿는지에 따라 우리의 믿음은 믿음으로 굳게 설지, 아니면 우리를 해칠 능력을 가진 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에 압도당할지 결정된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아야, 참된 예배를 드리고, 일 또한 참되게 할 수 있다. 

 

파멸을 부르는 교만과 자만 (사 2장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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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만과 자만은 이사야서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권위와 권세를 부정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의 재주나 이방 신들에 대한 신뢰로 쉽게 대체하곤 한다. 이사야는 이사야서 초반부에서 이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놓는다. “그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사 2:11).

 

   국가의 교만은 부, 군사력, 우상숭배 등 세 가지에서 드러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겸손하게 의지하지 않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대신 사람들은 자신의 손으로 일군 부와 군사력뿐만 아니라 우상에까지 의지한다.

 

   이사야는 금과 은으로 사람들의 부를 묘사한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사 2:7). 이사야는 그들의 군사력과 우상들도 똑같이 묘사한다. 끝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기에 이르고, 이사야는 그 우상들을 비웃는다(사 44:10-20).

 

   하나님은 인간이 교만을 부리고 지나치게 자기에게 의존하는 것을 용납지 않으신다. 부를 추구하고 또 축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세를 자신의 일상에서 밀어내는 행위는 하나님께 맞서는 범죄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39장에서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에서 온 사절단에게 성전 보물을 과시하여 그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렸고, 그 일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인다. 그는 대적에게 왕국의 보물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춤으로써 대적을 상대해야 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착취해 부를 쌓다 (사 3장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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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지도자들은 소외되고 빈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부와 지위를 추구해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지 않았다. 이사야서 전반에 걸쳐 이 점을 반복적으로 고발한다. 이사야 3장 3-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고 그들의 얼굴에 맷돌질하여 자신들의 부를 확장했다는 이유로 하나님 백성의 장로들과 지도자들에게 심판을 선고한다.

 

   윌리엄슨은 “이사야 3장 14절에 묘사한 상황이, 소작농처럼 빈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부와 권력이 소수의 특권층에게 점점 더 집중되는 계층 구조가 형성된 시기와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궁핍한 사람들이 부채를 지면 압류된다든지 궁극적으로는 노예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특권층들은 이런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는데, 이는 선지자의 관점에서는 불공정하나 세상에서는 합법적인 방식이었다.[1]

 

   이와 비슷하게 이사야 5장 포도원의 노래에서 유다 백성들한테 선고하는 몇 개의 “화”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부를 챙기려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2]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들은 주변 문화와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도록 부름을 받았다. 사회 엘리트 계층의 발전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는 하나님 언약의 요구를 위반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 아합 왕의 통치 시기 동안 그의 이방인 아내 이세벨이 이러한 잘못을 범했다. 이세벨은 나봇이라는 농부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의 포도원을 탈취했다. 선지자 엘리야는 격분하여 선언한다.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왕상 21:23).

 

   이사야는 유다에서도 이러한 행태가 계속되는 것을 보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이기적인 야망을 향해 다음과 같은 해독제를 처방한다. 메시아 시대에 참된 왕의 통치가 도래하면 “[하나님의 메시아가]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사 11:4)이다.

 

   이사야는 유다의 하나님 백성들이 저지른 죄를 정조준하면서 열방에 내릴 하나님의 심판 또한 언급했다.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사 14:26), 바벨론은 멸할 것이며(사 13:9-11), 3년 내에 모압의 영광은 끝나고(사 15장), 아람은 쇠락할 것이며(사 17:7-8), 구스(사 18장)와 애굽(사 19:11-13)과 두로(사 23:17)도 쇠락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과 높은 눈 자랑하는 것을 벌하실 것이다(사 10:12).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사 24:5-6).

 

   하나님은 공의와 의에 관심을 가지시고 오늘날에도 사취나 기만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국가, 기업, 개인을 심판하신다. 우리 시대에는 미얀마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국가 지도자들의 자국민 착취, 인도의 보팔 참사(1984년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니언 카바이드가 운영하는 인도 마디아프라데시주 보팔시의 살충제 공장에서 독가스 누출로 일어난 환경재난 사건. 2,800여 명의 주민이 사망하고 20만 명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 옮긴이 주)와 같이 외국 기업의 과실로 빚어지는 재앙, 메이도프 사건(버나드 메이도프라는 미국의 전직 증권 중개인이 주동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폰지 사기 사건 - 옮긴이 주)처럼 개인이 저지른 투자자 사취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우리 역시 불공정한 보상, 지나친 작업량, 가혹한 계약 조건, 시험에서의 부정행위, 가정과 일터 및 교회와 거리에서 일어나는 학대 외면 등 상대적으로 덜 심각해 보이는 부당행위를 자주 목격하고, 또 이에 관여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일자리나 특권을 보존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H. G. M Williamson, Isaiah 1-5, The International Critical Commentary(London: T&T Clark, 2006), 271쪽 참조.

이사야 1:23, 3:9; 5:23; 10:1-2; 29:21과 비교. 또한 John Bartond의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of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Craig C. Broyles and Craig A. Evans (Leiden: Brill, 1997), 89-70에서 “Ethics in the Book of Isaiah” 참조.

평화롭게, 번영을 누리며 살기를 바라신다(이사야 9장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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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서의 네 번째 주제는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가 평화와 번영 가운데 살 것이라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추수의 때에 기뻐한다(사 9:3).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백성들은 평화와 안전, 일을 통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 것이다(사 32:15).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 소와 나귀를 그리로 모는 너희는 복이 있느니라”(사 32:20).

 

   마찬가지로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앗수르 장군 산헤립에게서 구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었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백성들이 자신의 수고로 맺은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사 37:30).

 

   산헤립이 곧 침입할 상황이었기에 그 땅에는 아무것도 경작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양식을 얻으리라 약속하신다. 백성이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으려면 경작에 알맞은 평화로운 환경이 일정 기간 필요하다. 평화로운 환경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유다 백성이 들과 포도원에서 수고하여 성공적으로 수확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지속적으로 나타내는 표지 역할을 했다.

 

   이사야 62장에서 새로운 시온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하나는 백성이 자신들의 수고로 얻은 양식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과 관련이 있다(사 62:8-9). 이와 비슷하게, 이전 것들이 새로운 창조 속에서 잊혀 갈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억압당하지 않고, 대신 자신들의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 것이며 자신들이 심어 거둔 포도주를 마시며 자신들의 양식을 먹을 것이다(사 65:21-22).

 

   구약에서 농사는 대다수 백성들의 주업이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난 많은 예는 농경생활과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더욱 근본이 되는 원칙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좀 더 명백한 종교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직업의 종류에 관계없이 우리가 하는 일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촉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서 자신이 하는 일을 탁월하게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창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사 65:21).

 

   하나님의 가치와 공급을 우리 자신의 가치와 야망으로 대체함으로써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문제는 발생한다. 이런 일은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없어 보이는 세속적인 일로 분류할 때 일어난다. 물론 타락한 세상에서 믿음대로 산다고 반드시 부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을 떠나 이루어진 일은 물질적인 빈곤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사야는 예언 초반부에서 이러한 결과를 폭로하면서 유다에 증언한다.

 

창조주 하나님, 모든 것의 원천이신 분(이사야 28장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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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는 기록 선지자들 중에서도 가장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 주는데, 이 계시를 이해하면 겸손하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모든 것,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의 원천이시다. 일찍이 300년 전에 솔로몬은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이제 이사야는 그러한 지식과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 삶과 일에서 왜 중요한지를 증명해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다. “[너희는]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3-4).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식과 이해력을 주셨다.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사 48:17).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에게 지적 능력을 주신 하나님이 그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시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주었느냐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 40:12-18).

 

   하나님께서 삶과 지식과 지혜의 원천임을 깨달으면, 일을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재능을 주시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다. 여호와를 ‘경외함’(외경심으로 충만한 자각) 가운데 사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출발점이다. 이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상호보완적인 지식과 재능을 주신 다른 이들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 일에서 창조적인 팀워크는 우리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을 존중할 때 가능하다.

 

   직장에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우리 일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농부에게 밭농사를 이렇게 짓도록 일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사 28:26, 새번역). 이는 다음과 같이 응용이 가능하다. “장인에게 물건을 이렇게 만들도록 일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또는 “기업가에게 기업을 이렇게 운영하도록 일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보다 더욱 심오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써, 일터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공동 창조자가 되는 신비를 경험한다.

 

 

점차 변화하는 종의 정체성(사 40장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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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의’(justice, 히브리어로는 mishpat)와 연계해서 ‘의’(righteousness)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사야 1-39장에서는 ‘의’를 써서 유다의 결점과 불의를 드러낸다. 40-55장에서는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선물로 ‘의’를 나타낸다.[1] 이사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하는 모범 사례다.

 

   이사야 40-55장에 이사야의 증언이 나오는데, 거기서 이사야는 수수께끼 같은 불가사의한 어떤 “종”을 이야기하면서 공의 또는 심판을 언급한다. 이른바 ‘종의 노래’ 가운데 첫 번째 노래인 이사야 42장 1-4절은 그 “종”을 세상에 공의를 세울 분이라고 말한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종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공의를 부르짖는(사 40:27) 유다에게 응답하신다.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mishpat]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위해 그들 스스로는 이루어 낼 수 없었던 일을 성취하시려고 신성한 계획에 착수하신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붙드는 하나님의 종’(사 42:1)을 통해 이스라엘과 열방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종이 의와 공의를 성취하실 것이다.

 

   40-48장에서는 종의 정체성을 이스라엘 국가 자체로 정의한다. 이후 49-53장에서는 이스라엘과 열방 모두를 위한 이스라엘의 선교적 임무를 짊어진 한 개인으로 전개해 간다.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었다가 어찌하여 이스라엘의 화신 또는 이상적인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인물로 정체성이 변했을까?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여 사명 성취에 실패했기 때문이다.[2] 그토록 고집스러운 백성들에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이 종을 다시 수단으로 삼아 늘 함께하겠으며, 회복시키겠다는 계획을 알리려 하신다. (이제는 하나님 백성에 대한 언약적 신실함으로 이해되는) ‘의’은 종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자유’와 ‘그분의 약속에 대한 주권적 열심’을 토대로 백성들에게 주어진 선물이었다. 이처럼 의는 노력해서 스스로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3]

 

   이사야 1-39장과 40-55장에서 말하는 ‘의’는 이사야 56-66장에 그려진 ‘의’와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이사야 55-66장에서 비로소 일의 신학을 좀 더 명확히 묘사한다. 이사야 40-55장에서 선물로 주신 그 ‘의’가 이제 56-66장에서는 행해야 하는 의무가 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이사야 56-66장에서는 공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이는 이미 종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미리 성취하셨다. 이사야 56장 1절의 언어는 유다가 다시금 공의와 의를 구하라고 부름을 받는 51장 4-8절과 연결이 된다. 51장 6절과 8절에서 이미, 56장 1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의를 행하리라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구원은 없어지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 40-55장에 등장하는 서사 구조는 사뭇 문학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와 구원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당하는 종의 인격 안에서(사 53장) 재현되는 것을 본다. 56-66장에서 “의를 행하라”는 호소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의 불의를 종의 은혜롭고 대속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 미리 처리하셨기 때문이다. 신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은총이 율법을 선행한다. 또한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겠다 확증하셨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책임감이나 올바른 행동을 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다. 우리가 선한 행위를 좇아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속해 주신 덕분이다.[4]

 

   이사야는 “내가 기뻐하는 금식”(사 58:6)이라고 단언함으로써 부정적 논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사 58:6-7)을 포함한다.[5] 이사야가 특정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하는 가치는 주변국 문화와는 현저히 다르다.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 활동이나 신앙생활에 열심이면서 직원들을 사적인 이익이나 기업이윤 추구를 위한 도구로만 인식하는 태도를 가졌거나, 분쟁과 험담, 짜증과 분노를 일삼는 리더라면,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상실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이미 먼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치를 지킬 의무가 있다. 58장 초반부의 비난에 뒤이어 하나님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사 58:8-9; 사 52:12 참조).

 

   하나님의 ‘종’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에서 이상적인 이스라엘로, 다시 주의 종으로, 이후 주의 종의 종들로 정체성이 변화를 거듭한다. 이토록 능동적이요, 헌신적으로 섬기는 주님의 모습을 보며 직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돌아볼 수 있다. 이사야는 종이 하나님 자신을 반영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 종을 묘사할 때 매우 신중하다.[6] 따라서 크리스천들은 전통적으로 그 종을 예수님과 동일시해 왔다. 이사야는 52-53장에서 고난받는 종을 묘사한다. 이로써 우리 역시 하나님의 종들로서 직장에서 자기희생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상기시켜 준다.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 ……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2:14; 53:3, 5, 7).

 

   우리는 하나님을 정확히 알아야 하나님의 기준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고, 그래야만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권력을 강화하는 등 우리일을 왜곡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충족시킬 수 없었던 필요를 충족시키셨다. 하나님의 기준은 일을 통해 공의와 의를 성취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사 59:14-16). 우리는 하나님의 종의 종들이 되어 채워지지 못한 필요를 채우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직장에서 부당대우를 받는 피고용인이나 동료에게 관심을 갖고, 소비자들에게 더 좋은 제품을 팔기 위해 노력하고, 또는 사람들에게서 공헌할 기회를 빼앗는 편법을 사용하지 않거나 또는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매점매석을 거부하는 등의 행동이 바로 부르심에 합당한 자세다. 바울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일맥상통하는 호소를 쏟아 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물론 일을 하고도 아무런 갈채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보상이 늦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사야는 이렇게 표현한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이 주제는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 형태와 결부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John N.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A Study of the Function of Chapters 56-66 in the Present Structure of the Book,”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ed. Broyles, Evans 117-191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의 문학적인 표현에서 종을 점차 드러내는 전개에 대해서는 Christopher R. Seitz, “  ‘You Are My Servant, You Are the Israel in Whom I Will Be Glorified’: The Servant Songs and the Effect of Literary Context  in Isaiah,” Calvin Theological Journal 39 (2004), 117-134쪽을 참조하라.

이사야 40-55장에서 ‘의’(tsadeqah)와 ‘구원’(yeshua)의 동의어적인 연관성을 강조한 것은 Gerhard von Rad였다. Rad, Old Testament Theology, Volume 1, rans. D. M. G. Stalker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62), 372쪽.

 56-66장의 “의”를 주해하면서 오스왈트(Oswalt)는 이렇게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행하는 완전히 새로운 동기가 있다. 이제 의를 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임박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롭고 의롭게 언약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신다는 사실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는 의로워야 된다고 말한다.” Oswalt, “Righteousness  in Isaiah,” Writing and 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in an Interpretive Tradition, 188쪽.   

 이 목록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결부된 특정 문제들과 관계가 있지만, 이 문제들을 인간 행위의 다른 영역까지 확장하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Christopher R. Seitz, “The Book of Isaiah 40-66: Introduction, Commentary, and Reflections,” The New Interpreter’s Bible VI (Nashville: Abingdon Press, 2001), 499쪽을 참조하라.

 Richard Bauckham, God Crucified: Monotheism and Christology i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99), 50쪽.

오늘날의 일, ‘새 창조’에서 의미를 찾다(사 60장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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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서 전반에 걸쳐 이사야는 현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부정을 하나님께서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라고 이스라엘을 격려한다. 일과 일의 열매들이 이러한 희망 안에 포함된다. 40장에 이르러 이사야서가 현재에서 미래에 대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옮겨 감에 따라 희망은 점차 고조된다. 40-59장의 고난당하는 종이라는 개념은 미래에 하나님 나라가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60-66장에서 이 희망은 마침내 완벽하게 표현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다시 모으실 것이며(사 60:4),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을 파멸시키시고(사 60:12-17), 회개하는 반역자들을 구원하시며(사 64:5-65:10), 그분의 공의로운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다(사 60:3-12). 이스라엘의 부정한 지도자들 대신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실 것이다.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사 60:16). 이 변화는 매우 철저하며 근본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첫 창조 세계에서 나타난 권능과 장엄함에 상응하는 새 창조로 이어진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60-66장에서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실제로 신약 성경의 비유적인 묘사 및 신학의 상당 부분이 이사야 60-66장에서 왔다. 신약 성경의 마지막 장(계 21-22장)들은 본질적으로 이사야 65-66장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다시 요약한 것이다. 혹자는 이사야 60-66장의 내용이 일이나 일의 성과와 얼마나 깊은 관계가 있는지 알면 놀랄 수도 있다. 사람들은 평생 일하고 궁극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실을 맺는다.

 

  • 은금(사 60:6, 9)과 목재의 유입, 교역을 위한 성문의 개방을 포함하는 시장과 교역.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사 60:11).

  • “유향, 양 무리, 숫양”(사 60:6-7)과 “잣나무와 소나무”(사 60:13)를 포함한 농산품 및 목제품.

  • 수로와 육로(사 60:6, 9), 심지어 하늘(사 60:8)을 이용한 운송 및 수송.

  • 공의와 평화(사 60:17-18; 61:8; 66:16).

  • 사회복지(사 61:1-4).

  • 식품과 음료(사 65:13).

  • 건강과 장수(사 65:20).

  • 건축과 가옥(사 65:21).

  • 번영과 부(사 66:12).

 

   이 모든 결실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비켜 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들을 이루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데 소홀했다. 그 결과 그들은 더욱 궁핍해졌다. 그러나 이사야서가 새 창조라는 이스라엘의 미래 소망을 제시함에 따라,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전면에 부상한다. 마지막 날에 ‘종의 의로운 후손’은 앞서 묘사한 메시아적 시대의 모든 축복을 누린다. 이후 백성들은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기’(사 65:23) 때문에 그들은 실제로 일한 대가를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며, 이 다가오는 기쁨과 관련된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들 자신의 손으로 수고한 것을 온전히 누린다는 것이다.

이사야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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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 그 둘 사이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일의 즐거움을 누리고, 우리가 수고하여 하나님 영광을 찬송하는 열매를 맺는 것은, 앞서 언급한 긴장이 사라지는 다가올 “그 날”의 예표가 된다.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일을 즐기고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열매를 맺을 때, 그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조금이라도 맛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될 때까지는 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은 계속될 것이며,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타락의 고통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날 큰 기쁨을 누릴 것이다.

 

   일을 즐기고 열심히 일한 열매를 즐기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인간이 번영하고, 나아가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사야의 예언은 우리가 직장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마 22:33-40) 율법을 성취할 수 있으며,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묘사한다.

 

   하나님의 경륜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회복의 사역으로 가능해진 은총 안에서 이루어지는 때에 이르면, 우리는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복을 누릴 것이다. 노동과 일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아 부하 직원들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소외된 계층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이사야서에서 강력하게 비난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내가[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 아니다!” 일과 노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맥락에서 즐겁게 이루어질 때, 새 하늘과 새 땅을 지금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