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히브리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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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일의 가치를 이해하고, 일할 때 생기는 악을 이겨 내며, 일과 휴식 사이의 리듬을 찾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섬기고, 어려움을 견디며, 일터에 화평을 가져오고, 오래도록 일자리를 유지하고, 사람들을 대접하며, 생계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돈에 관한 태도를 기르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흔히 생각하는 일터에서 충성스러움과 기쁨을 찾아낼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이 책은 ‘예수님께 귀를 기울이라’는 메시지를 근간에 깔고 이야기를 이어 간다. 어떤 신자들은 메시아를 포기하고 옛날의 언약으로 되돌아가라는 압박을 받았다. 히브리서는 그들에게 세상을 창조하신 왕 예수님은 이 땅에 아주 분명한 결과들을 가져다주는, 더 새롭고 더 나은 언약을 시작하신 하늘의 완벽하신 대제사장이심을 상기시켜 준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는 데 드려진 최후의 희생제물이시고, 일상에서 우리를 위하시는 최후의 중보자시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다른 어떤 곳도 쳐다보지 말고, 오직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며, 우리를 변혁되고 새로워진 하나님의 도성에 데려다 주실 때까지 그분께 순종해야 한다. 거기서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 안식은 ‘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7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일과 휴식이라는 사이클의 완성이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보존하고 계신다(히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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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신학의 토대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지금도 그 세상을 보존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히 1:2).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자신의 일터에서 창조라는 일을 하신 창조주 그리스도에 대한 책이다. 성부 한 분만을 창조주로 생각해 오던 일부 사람들에게 이것은 충격일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창조에서 성부의 대리인으로 명명하는 신약의 나머지 부분들과 맥을 같이한다(요 1:3; 골 1:15-17).[1]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을 번갈아 가며 창조주라고 언급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창조라는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를 어떤 모습으로 그리는가? 그분은 건축가로서 땅의 기초를 놓고, 하늘들을 건설하신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10). 게다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심으로써’(히1:3) 현재도 그 피조 세계를 유지해 가신다. 그 “만물”에는 당연히 우리 인간도 포함된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6). 하나님은 모든 창조 역사를 그분의 아들을 통해 하셨다. 이 사실은 창조가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의 가장 중요한 장이라는 걸 확증해 준다.


   일하시는 이미지의 하나님은 히브리서 전체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분은 하늘의 장막을 펴고 치시며(히 8:2; 여기서의 암시가 9장 24절에 나타난다), 모세가 지은 성막의 모형 또는 청사진을 건축하셨고(히 8:5), 한 성을 설계하고 세우셨다(히 11:10, 16; 12:22; 13:14). 그분은 법정의 재판관이요 집행관이시다(히 4:12-13; 9:28; 10:27-31; 12:23). 또한 군대 사령관이시며(히 1:13), 부모요 (히 1:5; 5:8; 8:9; 12:4-11), 자기 집안을 정돈하는 주인이시며(히 10:5), 농부요(히6:7-8), 기록자이시며(히 8:10), 상 주시는 분이시며(히 10:35; 11:6), 의사이시다 (히 12:13).[2]


   시편 102편을 인용한 히브리서 1장 10-12절은 창조주와 피조물 간의 대조를 보여 준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갖는 일시성과, 새 하늘과 새 땅에 영원히 있을 하나님의 도성을 추구해야 할 필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1장 10-12절 말씀은 우주의 덧없음보다는 주님의 능력과 그분의 구원을 강조한다.[3] 하나님은 창조 세계 안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산물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부 창조자들(또는 공동 창조자들)이다. 그분의 아들처럼 우리도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라는 일로 부름을 받았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히 2:6-8; 이 내용은 시편 8편을 인용한 것이다).[4]


   사람을 창조 사역의 참여자로 간주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 히브리서는 ‘예수님은 그들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히 2:11)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따라서 우리가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을 닮아야 한다. 거기에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가치가 있다. 우리가 컴퓨터, 비행기, 셔츠를 만들고, 신발을 팔고, 대출계약을 하고, 농산물을 수확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도시나 지방이나 국가를 다스리거나 또는 온갖 종류의 창의적인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물 안에서 하시는 일과 나란히 일을 하는 셈이다.


   요점은 창조의 최고 책임자는 예수님이시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일할 때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로써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다. 창조된 우리 사람의 운명은 예수님 안에서 이뤄지고 있으며, 그분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모범(히 2:10; 12:1-3), 공급하심(히 2:10-18), 끝, 그리고 소망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우리는 바로 우리의 실존을 위협하는 (무의미함을 포함해) 죽음과 좌절로 얼룩진 시간의 한복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히 2:14-15). 히브리서는 ‘아직은 우리가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히 2:8)는 사실을 인정한다. 지금은 악의 세력이 강력하다.


   이 모든 것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하늘과 “오는 세상”(히 2:5)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실들이다. 히브리서는 두 개의 다른 세상, 곧 물질로 된 악한 세상과 영으로 된 좋은 세상을 대조시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악에게 굴복했으므로, 다시 온전한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회복이 시급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창조된 모든 것을 구속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사람에게 복종시키심으로써,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게 하신 것입니다”(히 2:8, 새번역).

 Sean M. McDonough, Christ as Creator: Origins of a New Testament Doctrin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을 보라.

하나님의 일에 대한 논의는 Robert Banks, God the Worker: Journeys into the Mind, Heart and Imagination of God (Sutherland, NSW: Albatross Books, 1992), 그리고 R. Paul Stevens, The Other Six Days (Grand Rapids: Eerdmans, 2000), 118–123쪽을 보라.

더불어 시편 102편을 인용함으로써 우주를 성자를 통해 창조하신 것으로 묘사한다. 이는 지금도 정결케 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그리는 이 단락의 흐름에도 부합한다. 주님은 그분의 창조 세계 안에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히브리서의 다양한 구약 인용은 항상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에서 하고 있다. 그래서 칠십인역보다는 히브리어의 마소라 본문(Masoretic text)에 근거하는 오늘날의 번역과 항상 상응하지는 않는다.

타락으로 고통받는 세상(히2: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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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완전히 선하게 창조하셨지만, 그 세상은 오염되었고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히 2:14)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히브리서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말하지 않지만,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히 2:15-16)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매우 자세하게 말한다. 이 후손에는 이삭(유대인들)과 이스마엘(이방인들)을 통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 포함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을 다 가리키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악과 사망과 마귀에서 해방시키실 것인가?”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이렇다.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다!”


   히브리서 중심부(5-10장)에 도달하면,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히브리서 시작 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신 창조의 일과 그분의 제사장직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히브리서는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히 1:10)라는 것과 그 결과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신다’(히 2:14)는 것을 하나로 합쳐 놓았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창조와 구속이라는 두 가지 일을 다 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맡은 창조 사역은 인간의 타락 이후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히 2:15) 해방시키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백성의 죄를 속량하는’(히 2:17) 제물이 되도록 이끌어 가셨다.


   우리의 일터들이 하나님의 원래 의도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어떤 일터들은 세상에 가득한 악을 억제하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범죄 억제를 위해 경찰이 필요하고, 평화 회복을 위해 외교관이 필요하며, 질병을 고치기 위해 의료전문가들이 필요하고,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전도자들이 필요하며, 사고 난 차량 정비를 위해 자동차 정비소가 필요하고, 부패를 찾아내기 위해 탐사보도 언론인들이 필요하고, 노후해 가는 다리를 보수하기 위해 기술자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모든 일터가 타락 때문에 심하게 고통받는다. 잘못된 경영과 노사 갈등, 험담, 학대, 차별, 게으름, 탐욕, 진실하지 않음, 그 외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모든 방향에서 우리의 관계를 어그러뜨린다. 이럴 때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포기하시거나 또는 인간을 그것에서 분리시킴으로써 해결하지 않으신다. 그것을 완전히 변혁시키는데, 다만 본질적인 선 안에서 재창조하신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의 창조주이셨던 그대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세상 안에 성육신하게 하셨다.

 

  일터에서 우리는 그분의 창조를 유지하고 동시에 회복시키기 위해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동역자들’(히 3:1)이 된다. 이것으로 에덴 동산에서 시작된 창조의 일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조화시키며 거기에 더하는 것이다. 창조와 구속의 일은 동시에 일어나며,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악이 없어질 때까지 서로 얽혀 있다.

광야 생활 : 새로운 세상으로의 여정(히3:7-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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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선한 일인 것 못지않게, 거기에는 아직도 현재의 깨어진 세상과 앞으로 올 영광스러운 세상 간의 너무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히브리서 2장 5절에서 저자는 자신의 대주제를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만물이 완벽해질 때에 하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될 창조가 이 책 전체의 기본 초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을 관통하는 ‘안식일의 안식’에 대한 장황한 토론이 이를 뒷받침한다.


   히브리서는 책 전체에 걸쳐 구약 본문을 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이번 경우에는 출애굽기 이야기에서 내용을 가져와 ‘안식일의 안식’ 사상을 설명한다. 출애굽기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백성들도 구원이라는 약속 지점을 향해 순례하는 여정에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그 지점은 가나안이었다. 우리의 경우, 그것은 완전해진 창조 세계다. 히브리서 4장 9-10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안식은 단순히 ‘일을 쉬는 것’일 뿐 아니라(히 4:10) 안식일을 축하(celebration)하는 것이기도 하다(히 12:22).[1]

 

  구약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면서 히브리서는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던 가나안 땅의 정복을 앞으로 올 세상에서 우리가 누릴 최후의 안식에 대한 하나의 추가 표식으로 삼는다. 여호수아의 안식은 불완전했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는 성취가 있어야 한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 4:8).


   여기 적어도 두 가지 핵심이 있다. 첫째, 이 세상에서의 삶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출애굽기 이야기의 핵심인 여정(journey)이라는 개념이 이를 암시한다.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정에는 엄청난 수고가 따른다는 것을 안다. 히브리서는 단지 안식뿐 아니라 또한 그 안식을 둘러싼 일도 서술하기 위해 안식일을 모티프로 사용한다. 당신은 6일간 일하고 7일째 쉰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인생 여정 동안에 그리스도 안에서 열심히 일하고, 그런 다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한다.

 

  물론 히브리서는 다른 어떤 것도 하지 말고 오로지 일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잠시 뒤 보겠지만 쉴 때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이 책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면 모든 활동이 끝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크리스천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그것이 요점이다. 우리는 광야에 털썩 주저앉아 편히 쉬면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우리 삶을 완전케 해 주시길 기다리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깨어진 세상을 태초에 의도하셨던 그 세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도 일하신다. 우리는 이 장엄한 일에 참여하라는 초청을 받은 특권자들이다.


   두 번째 요점은 매주 안식일의 안식을 누리고 예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확정하지도 않고, 또 정죄하지도 않으면서 의문을 품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는 독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안식일을 지키리라고 확신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저 추측만 할 뿐 현대 우리가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히브리서에서 매주 갖는 안식의 가치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 안식의 가치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었다.

 

   현재 갖는 이 안식이 장차 우리가 누릴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더 긴밀하게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가? 그것이 우리의 인생 여정을 지탱시켜 주는가? 지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영원의 때에 가서 완성될 것으로 알고 있는 그 기쁨을 지금 누리게 하는 믿음의 행위인가? 어쨋든 안식일을 정한 까닭은 한 주의 삶에 예배와 안식이라는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우리의 일이 목적이 있는 활동임을 주지시키기 위해서다. 우리의 수고가 어떤 지향점에도 도달하지 못하게 만드는, 고된 일의 끝없는 반복을 멈춰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매주 반복해서 하는 일은 (안식일 하루처럼 6일 모두가) 영적인 깨달음의 실천이 될 수 있다. 경기 침체, 경영 부실, 험담하는 직장 동료들, 감사할 줄 모르는 가족들, 부당한 임금 등으로 자기일이 저주스럽기까지 한 상황이 닥칠 수 있다(창 3:16-19).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 그분의 인간 소작인들 때문에 심하게 손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 집이 완전히 회복될 날을 소망한다. 일이 잘돼 나갈때도 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그 안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선하며, 우리가 하는 일이 이 세상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더욱 확장해 나가는 것임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의 안식일에 우리는 예배하고 참안식을 누린다.

 J. Laansma, I Will Give You Rest: The Rest Motif in the New Testament with Special Reference to Mt 11 and Heb 3–4, Wissenschalftliche Untersuchungen zum Neuen Tesament (Tübingen: Mohr Siebeck, 1997)

그리스도,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히5: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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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이라는 주제가 히브리서 전체를 주도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110편을 지침으로 삼아 메시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 되도록’ 되어 있었으며(히 5:6), 이 제사장직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생활을 감독해 왔던 레위인들의 제사장직보다 더 뛰어나다고 주장한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옛 언약 아래 일하던 옛날의 제사장은 진짜로 죄를 없애지는 못했고, 불완전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제사장들에 의해 끝없이 드려지던 희생제사로 사람들이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만 할 수 있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사장직은 단번에 영원히 확정적인 제사를 드렸고, 항상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중보자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이에 여기에서는 희생(sacrifice)과 중보(intercession)라는 이 두 주제가 우리일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 주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얻다(히5: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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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자기를 희생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영원히 없애는 데 성공하셨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2, 14).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죄를 완전히 속죄한 이야기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종종 언급한다.

 

   죄 용서는 (우리 일터에는 전혀 시사할 게 없는) 순전히 교회의 일 또는 영적인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확정적 희생제사는 크리스천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그들을 해방시켜 주겠다고 약속한다. 본문은 히브리서 10장 16절에서 용서의 윤리적인 즉, 실질적인 결과들을 강조해서 보여 준다.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다시 말해 용서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우리 마음속에) 갖게 되며 (우리 생각 속에) 그렇게 할 수 있는 지혜와 비전과 능력을 받으리라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 활동을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언약의 의식들을 대하는 것과 거의 같은 걸로 본다. 그런 사람들의 계산법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종교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지시므로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고자 한다면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가는 것이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는 쉬운 방법인데, 매주 그렇게해야만 마법 효과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소위 기쁜 소식은 일단 우리가 그런 종교적 요구들을 충족시키고 나면, 하나님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자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가증스런 일은 하지 않을 테지만 다음 주에 다시 교회에 나가 우리의 바구니를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채우기 전까지는 마음대로 해도 된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하나님에 대한 그런 견해를 전혀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한다. 레위인 중심의 제사장 제도가 하나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한 하나의 제도긴 했지만, 그것은 원래 그 자체를 뛰어넘어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확정적인 희생제사를 가리키려는 의도가 항상 있었다. 그것은 마법적인 은총의 시혜가 아니라 여정을 위한 간이 휴게였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우리를 대신해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직접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진짜 죄 용서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의식을 통해 영원히 정결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종교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채울 필요가 있는 (또는 채울 수 있는) 바구니는 우리에게 없다. 그리스도와 그의 희생제사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히브리서 10장 5절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물론 이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크리스천들이 교회를 가지 말아야 한다거나, 또는 기독교 예배에서 그런 예식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 삶과 동떨어진 종교적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과 우리를 새롭게 연결해 주고,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 주며, 우리의 의지를 성화시켜 주고, 그 결과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 자리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해방시켜 주는 “찬송의 제사”다(히 13:15).

 

   우리는 섬김을 위해 성화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라고 말씀하신다. 섬김은 하나님이 주시는 용서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4).

 

   그러면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제사장다움에 초점을 맞춘 하늘의 일은 굉장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섬김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는 하늘뿐 아니라 땅까지 새롭게 하기 위해(히 12:26; 계21:1) 드리신 희생제사는 여기 이 땅 위에서 효과가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가 여기서 수행하는 섬김도 매일매일의 삶에서 오는 험난한 부침(浮沈)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가셔서 우리가 현재 겪는 여정을 마치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걸어가며 일하고 있다. 이 같은 확신 덕분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그분을 위해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더욱 견고해진다.

 

우리를 뼛속 깊이 헤아리시는 중보자 (히7: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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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중보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히 9:24).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그분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항상”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는 분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행위는 부끄럽고 한편 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좌 옆에 계신 예수님이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를 대변하신다.

 

  한 젊은 엔지니어가 국유기업인 고속도로공사 사장을 만나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느낄 두려움을 상상해 보라. 그 사람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맡아서 진행 중인 공사의 공기가 늦어진 데다 예산도 초과 사용 중이어서 더욱 두려운 상황이다. 그러던 차에 그를 아끼는 멘토인 자기 상사가 그 모임에 동행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게다가 알고 보니 자기 상사와 고속도로공사 사장은 대학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친구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걱정하지 마!” 그 멘토는 엔지니어를 안심시켜준다. “내가 다 처리할게.” 고속도로공사 사장의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 사장 앞에 간다면 젊은 엔지니어는 훨씬 자신감을 갖게 되지 않을까?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임을 강조할 뿐 아니라, 우리와 연대하고 계시는 대제사장임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앞에서 논의한 구절로 되돌아가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그 한 몸”(히 10:5)에 대해 말씀 드리신다. 그리스도는 진짜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똑같은 삶을 진짜로 품으셨다.


   저자는 이렇게 추론한다. 충성스런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연민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했다.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을 본인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셨더라면 그렇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예수님께서 순종을 배우셨다고 기술한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8). 이는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그침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의 자격을 얻기 위해 직접 고난과 유혹을 경험할 필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른 구절들도 비슷한 용어를 써서 같은 요점을 말한다. 예수님의 고난이 그분을 ‘온전하게 만들었다’(히 2:10; 5:9; 7:28)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의 뜻은 단지 ‘결점이 없음’(flawless)을 뜻할 뿐 아니라 ‘완전함’(complete)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흠이 없으셨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이 될 자격을 얻기 위해서, 또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완전해지기 위해 그런 고난들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이 방법 말고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매일매일 고생을 하고 있을 때 도대체 어떻게 그분이 진정으로 우리와 이어질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이 고난과 배움이 예수님의 일이라는 배경하에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공감하지 못한 채 임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배워 가는’ 단순한 신학적 박애주의자 유형의 사람으로 오신 게 아니다. 또한 갑작스럽게 방문 비자를 가지고 관광객으로 오신것도 아니다. 그분은 인간의 진짜 일을 포함한 인간의 진짜 삶이라는 피륙 속으로 자신을 짜 넣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일에서 곤경에 처하면,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그가 친히 알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를 동정해 주시는 대제사장께로 돌아설 수 있다.

The Nobel Foundation, "The Nobel Peace Prize 1983," http://www.nobelprize.org/nobel_prizes/peace/laureates/1983/walesa-bio.html "Lech Walesa,"Encyclopedia Britannica Online, https://www.britannica.com/EBchecked/topic/634519/Lech-Walesa and Sarah K. Clarke, "Lech Walesa Tells His Story of Faith at Seton Hall," Newark (NJ) Star Ledger, December 5, 2005.

믿음으로 산다는 것(히10-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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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따르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은 마지막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만이 우리를 계속 전진하게 해 줄 수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 현재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은 진실인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이 구절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면 믿음의 실제적 중요성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realization(깨달음/실현)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명이다.” [1] 여기서 ‘realization’은 매우 적절한 번역인데, 이 영어 단어가 갖는 이중적 의미가 히브리서 11장에서 제시된 믿음의 사례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완벽하게 포착해 내기 때문이다. realization(깨달음)은 우리가 마침내 상황을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마침내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realization(실현)은 우리가 바라던 것이 마침내 이루어져서 현실이 되는 상황도 의미한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은 바라던 것을 깨닫기도 하고 실현하기도 한다. 해당 구절의 후반부를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히브리서는 노아, 아브라함, 모세, 그리고 구약의 다른 인물들의 실제 예들을 보여 준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현재 경험하는 것보다 더 나은 무언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갈망했다. 노아는 홍수를 넘어선 의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 때문에 자기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방주를 지었다(히 11:7). 아브라함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또는 “도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히 11:10). 그렇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해 주신 땅을 향해 여정을 떠났다(히 11:8-12).

 

   모세는 바로 왕의 딸의 아들로서 받을 수 있는 즐거움보다 더 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을 이해하는 것이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히 11:25-26) 여기는 것이었다. 이런 소망과 약속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완전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미 그것을 성취시켜 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라도 하는 듯이 매일을 살았다.


   이런 믿음은 그냥 소원을 담은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죽은 행실을 회개”(히 6:1)하는 마음과 “사랑과 선행”에서의 인내(히 10:24)를 결부시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며(히 8:10-11), 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능력이다(히 11:3). 믿음은 성령님에게서 온 선물인데(히 2:4), 우리 자신의 의지력으로는 절대 그런 믿음을 붙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의 더 편한 삶과 바꾸기 위해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던져 버리라는 유혹을 받던 히브리서 독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메시지였다. 그들은 미래의 영광은 생각지 못하고 현재의 궁핍한 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이 책이 주는 권면의 말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더 오래가고, 더 영광스러우며, 지금 여기서의 일시적인 쾌락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라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실현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오늘이라는 현실 사이의 긴장 가운데서 일을 해내야만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일시성과 한계성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바랐던 대로 일이 안 된다고 해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선을 행하려 최선을 다하지만 주어진 환경 때문에 혹은 사람들이 고의적인 악행으로 방해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슬플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도성을 바라보기에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일이 위협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 과녁에서 빗나갔다. 히브리서 11장 32절에 나오는 명단을 살펴보라. 그들은 실패했고, 더러는 처절한 실패를 경험했다. 장군으로서 바락의 소심함을 인간의 눈으로 읽는다면(삿 4:8-9), 그에게서는 믿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눈으로 그들의 믿음을 보시며, 그들의 업적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일을 평가하신다. 우리도 넘어졌을 때 이것을 보고 용기를 낼 수 있다. 혹시 동료에게 심한 말을 했거나, 학생을 오래 참아 주지 못했거나,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았거나,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과 실패 가운데서도 세상에 대한 그분의 의도를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도성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매일의 일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가능한 한 최대로 그 도성의 방식에 합당하게 살려고 애를 쓴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온갖 종류의 일터에서 그들의 신앙을 실현시켰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히 11:33-34) 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건축과 관련된 히브리서에 딱 맞는 예로 어떤 건축가를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에 분명한 비전이 있다. 그는 그 나라가 공의와 조화로운 관계와 영속되는 아름다움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그는 현재에 이 비전을 실현시키고자 애쓴다. 그는 집 짓는 일에서 원자재를 구하는 청지기직을 수행하면서, 아름답지만 사치하지 않는 집을 만들어낸다.

 

   그는 장차 올 하나님 도성의 특징이 될 관심과 존중으로 고객과 하청업체 직원들, 인부들을 대한다. 그는 지상의 집에 기대하는 고객들의 소망에 귀를 기울이고, 제한된 돈과 자재를 이용해 그런 소망들을 실현시켜 주려고 애씀으로써 자기 고객들에게 하늘에 속한 사랑을 보여 준다. 고풍스러운 난방 장치를 욕실에 설치하려고 했더니 딱 5센티미터가 길어 안 맞을 때, 또는 목수가 엄청나게 비싼 들보를 잘랐는데 딱 5센티미터가 모자랄 때, 이러한 문제들을 참아 낸다.

 

  그는 지진이나 태풍이 자신의 모든 수고를 순식간에 파괴시킬 수 있음을 알면서도 자신의 일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붓는다. 기쁨과 좌절이 교차하지만, 그는 자신이 짓고 있는 집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관계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보임으로써, 하나님 도성이 추구하는 가치대로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비록 무너지기 쉽고 불완전하다 해도) 자신이 짓는 모든 건물이, ‘건축주와 건설자가 하나님이신’(히 11:10) 앞으로 올 위대한 도성에 대한 매일매일의 증거라는 것을 신뢰한다.

 W. Bauer, W. F. Arndt, F. W. Gingrich, and F. W. Danker,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3r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under pistos. 

역경을 견디며 화평을 추구하는 삶(히1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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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는 충성스런 성도들의 예를 보여 주면서 당시 사람들을 향한 도전으로 넘어간다. 신약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서는 역경으로 가득한 크리스천들의 삶을 묘사한다. 우리는 이런 역경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식들을 훈육하시는 방법이라 여기고 견뎌 내야만 한다. 그것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징계를 받아 완전해지듯이(히 5:7-10)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도 똑같은 과정을 겪어 나간다.


   대부분의 크리스천이 고난이 닥쳐 오면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신 거라고들 생각한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조차 우리 면전에 대고 우리가 지은 진짜 죄와 허물을 거론하며 고개를 내저을 수도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히 드리신 온전한 희생제사로 용서를받은 사람들에게는 그런 징벌이 없다고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런 죄와 악한 행동을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히 10:18, 새번역).

 

  우리의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실 것이지만(히 12:4-11) 그러나 이 징계는 형벌이 아니다(고전 11:32). 징계는 혹독한 훈련이긴 하지만, 그 또한 사랑의 한 형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히 12:6). 어느 누구도 우리의 역경을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10).


   이 징계는 단순히 우리의 개인적 유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이 말하는 “화평”은 히브리어 ‘shalom[샬롬]’이 지닌 의미를 완전히 담아낸 단어로, 공동체 내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나누어 가지고 있는 최고 상태의 공의와 형통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구원의 마지막 목적이다. 이 장 뒷부분에서는 그것을 거룩한 하늘의 도성인 시온의 형상으로 다르게 묘사한다(히 12:22-24).


   일터에서 일하는 동안 역경을 견디고 화평을 좇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약속들이 우리의 일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다. 하나님 보시기에 다 선한 것들인(창 1:28) 우리는 결실이 있길 바라고, 우리의 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가길 원하고, 권세를 얻고 싶어 하며, 우리가 하는 일 안에서, 그리고 일을 통해서 우정을 누리고 싶어 한다(창 2:18). 만약 우리가 역경, 돈 문제, 역량 부족, 까다로운 동료 등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견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포기하고, 그만두고, 이직을 하거나, 손을 떼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아니면 우리 스스로 만든 조악한 공의를 추구하는 것이 훨씬 쉬워 보일 수 있다. 혹은 지치거나 낙심해서 일터에 남아 있긴 하지만, 일을 하나님에 대한 섬김이라고 생각하는 데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어려운 일터에서의 상황들을 잘 견뎌 나가게 되기를 기도한다.

 

  역경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심으로써 우리를 더욱 충성스럽고, 유용한 사람들로 성장시키기 위해서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어려운 직장생활 가운데서 고결함(integrity)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이들을 섬기지 않고, 화목을 추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히 12:3)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이 진동할 날이 올 때까지(히 1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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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에 관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히브리서가 하늘의 세상(창조되지 않은 것)과 땅의 세상(창조된 것)을 서로 싸우게 만든다는 생각이다. 하늘은 진동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 그대로 남아 있는 반면, 우주는 멸절되길 기다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2장 26-27절 같은 구절이 그런 오해를 뒷받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생각이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2장 26절은 하늘도 땅처럼 진동할 것이며, 그 결과 ‘제거되어야 할 것들’은 두 영역에 다 영향을 미친다고 선언한다. 히브리서는 우주와 마찬가지로(히 8:2; 11:10) 하늘에 있는 세상을 ‘창조된 것’으로 묘사한다. 부활을 말할 때(히 6:2; 11:35), 그것은 창조 세계의 멸절이 아니라 수복이다. 우주를(히 1:2-6; 11:3) 하나님 아들의 기업(inheritance)으로 이해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몸소 제물이 되셨으며, 이 세상 안에서 살과 피를 가지고 이뤄진 사건이라고 선언한다(히 12:24; 13:2, 20).


   더 나아가 히브리서 12장 26-27절에 나오는 “진동”이라는 말(학개 2장에서 차용한 것)은 실제로는 파멸이 아니라, 심판함과 완전케 함을 가리킨다. 히브리서 12장 18-24절에 나오는 이미지에 부합하는 “땅”과 “하늘”은 아마도 옛 언약(시내 산, 만질 수 있음) 및 새 언약(시온 산, 하늘의 예루살렘)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진동의 효과는 현재와 장래에 다 나타난다. 궁극적으로 진동은 하늘이든 땅이든 불완전하고 죄악에 물든 모든 것을 제거한다. 학개서에서는 그리고 전체적으로 히브리서의 주장은 이 진동이 끝나면 하나님의 집인 그의 성전을 영광으로 가득 채우리라 이야기한다. 온 우주가 정결해지고,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학개서 2장에서 하늘과 땅의 진동은 앞서 히브리서 12장에서 추구하라고 요청받았던 땅 위에서의 평화의 실현으로 이어진다. “내가 이곳에 평강[샬롬]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9).


   일시적인 것은 창조된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오염시키는 불완전함과 악과의 분쟁이다. 우리 삶을 하나님 나라에 쏟아 붓는다는 것은,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통치(히 7:2)에 속한 창조와 구속의 일을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요리사든, 교육자든, 운동선수든, 경영자든, 가정주부든, 생태학자든, 국회의원이든, 소방관이든, 목사든, 어느 누구든 간에 상관없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는 방법은 ‘영적인’ 일을 선호해서 ‘세상적인’ 일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히 12:28) 그리스도의 훈련(징계) 아래 모든 종류의 일을 보존해 나가는 것이다.

환대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히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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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13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최종 권면들 가운데 두 가지가 일과 관련이 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1-2).

 

  히브리서 13장 2절부터 시작해 보자. 이 구절을 보면 히브리서에서 너무도 두드러진 인물들인(히 6:13-15; 11:8-20)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온 손님들을 환대(hospitality)했던 장면이 떠오른다(창 18:10-15). 이들은 나중에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의 약속을 전달하는(창 18:10) 천사들로 밝혀졌다 (창 19:1). 이 구절들은 또한 예수님께서 하셨던 수많은 환대 모습과(예를 들면,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2:1-11; 6:1-14; 21:12-13) 그를 따랐던 사람들 (막 1:31; 눅 5:9), 그리고 혼인잔치와 같은 비유들(마 22:1-4; 눅 14:15-24)을 생각나게 한다.


   손님 접대는 세상에서 (적어도 현대 서구 세계에서는) 가장 평가절하된 일의 형태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돈이 되지않는 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손님 접대를 실천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직업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손님 대접하는 일’이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손님 대접을 하나님에 대한 섬김으로 보기보다, 기분 전환이나 개인의 취향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환대는 대단한 믿음의 행동이다. 음식이나 음료, 즐겁게 해 주는 것이나 잠자리를 제공하는 데 드는 비용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고, 재산상의 손해를 보거나 도둑을 맞을 위험은 감당하게 해 주시며, 나그네를 환대하느라 보낸 시간이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보내야 할 시간을 깎아먹지 않으며, 또 무엇보다 나그네들은 돌보아 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이다. 심지어는 우리가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 예를 들어 감옥이나 또는 그보다 더한 곳으로 찾아간다면(히 13:3) 환대는 인간이 할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나 섬김이 될 수 있다(마 25:31-40).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자신의 일을 해 나가면서 손님 접대의 정신을 실천하는 기회를 만난다. 많은 사람들이 환대 서비스 산업에 종사한다. 청소를 하고, 호텔 객실을 깨끗하게 정돈하며, 건강에 좋고 맛있는 식사를 제공하거나, 또는 파티나 리셉션에서 저녁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히브리서 13장 1-3절 말씀을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직업이 어떠하든, 우리가 일터에서 동료나 소비자, 공급자, 고객, 또는 낯선 사람과 하는 모든 상호 활동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환영받고 소중한 존재라고 느끼게 해줄 기회다. 크리스천들이 평범한 일 가운데서 환대하는 것으로 유명해진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

돈 문제 (히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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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장에서 일과 관련된 두 번째 권면은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것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이 명령에서 히브리서의 원래 독자들이 재정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0장 32-36절에 이 사실을 이미 암시했고, 히브리서 11장 25-26에서도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아마도 장래에 올 “도성”(히 11:10; 12:22; 13:14)을 강조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현재의 도성에서 그들이 겪고 있던 경제적 · 사회적 소외현상 때문에 빚어진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하심을 확신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물질적 풍요를 누리리라는 보장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절대로 쉬운 삶을 약속하지 않으셨으며, 우리가 하는 힘든 일은 현생에서 부나 호화로움으로 보상받지 못할 수도 있다.

 

  히브리서 13장 5-6절의 요점은 믿음에 토대를 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리라는 것이다. 물론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극심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심지어는 자연재해, 목마름, 굶주림, 질병 등으로 죽기까지 했다. 그들은 믿음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죽었다. 히브리서 저자는 “[어떤 크리스천들은]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5-38)라고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이 사실을 드러낸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과 우리가 드린 기도들은 (죽음에서의 부활을 통해 그분의 아들에게 이루어졌듯이) 전부 이루어진다(히 5:7-10).

 

  히브리서에는 우리 개인의 형통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변혁된 경제적 비전이 담겨 있다. 따라서 가진 것이 전혀 없을지라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으며, 만약 넉넉히 가졌다면 그걸 족하게 여기고, 또 만약 더 많이 가졌다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희생한다.


   창조와 물질적인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 있는 하나님 나라보다 덜 신령하므로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사랑하다 보면, 현재의 질서에 집착하게 되어 타락한 세상을 변혁시키려는 마음에 망설임이 생길 수 있어 그리 권고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직장을 얻고, 회사를 창업하고, 선거에 출마하고, 교회에 등록하고, 친구를 결정하고, 우리의 자원을 투자하고, 우리의 시간을 사용하고, 배우자를 찾는 주된 이유가 돈이라면,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영문 밖에서 일하는 크리스천(히 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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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은 13장에 나오는 일과 관련된 세 번째 권면이다.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outside the camp, NIV] 그에게 나아가자”(히13:13). 히브리서 13장 11-13절에 의하면,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게’ 되어 있다. 영문 밖은 곧 부정한 곳이다. 예수님도 영문 밖 거룩하지 않은 곳에서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고난을 받으셨다. 이렇게 히브리서는 우리도 역시 영문 밖으로 나가서 그곳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도출해 낸다.


   예수님 나라의 일을 하는 것에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 포함된다. “치욕을 짊어지고”라는 구절에서 애굽의 영화와 보물보다는 ‘그리스도의 능욕’을 택했던 모세의 신앙이(히 11:24-26) 떠오른다. 이 “치욕”은이 책 앞에서 언급했던 영광과 소유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처럼 우리의 소유, 특권 및 지위를 희생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많은 크리스천들이 거룩함의 “영문 밖”에서 일한다. 때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잘 따르려면, 더 거룩한 일터들을 찾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이 구절은 그 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것은 삶의 거룩하지 않은 곳들에서도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Nancy Matheson Burns (guest lecture in the Doctor of Ministry program at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Hamilton, MA, March 22, 2000).

히브리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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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 곧 온 인류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영역으로 데려가시겠다는 약속으로 우리를 부른다. 그것은 전 우주를 자기 자신의 거룩함의 영역 안으로 통합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됨을 선언한다.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 백성으로서, 우리는 일을 포함해 우리 삶 전체를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 속에 투자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만족하고, 모든 사람을 위한 화평(샬롬)과 거룩함을 위해 일하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 기꺼이 우리의 소유와 영화를 놓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참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공급을 받고, 또 그를 닮아 담대해지며, 위로를 받는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희생시켜 세상이 거룩해지고, 하나님께서 태초에 의도하셨던 세상으로 회복될 길을 열어 놓으신 분이다. 또한 우리가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가 취해야 할 기본 자세이며, 그 감사는 곧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원천이다. 그리스도는 타락한 세상의 경제 · 사회 · 정치 구조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알리라고 우리를 부르셨다.


   돈을 위해 살려는 함정에서 벗어나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우리가 하는 일, 그리고 우리가 삼가서 하지 않는 일들은 다 이런 가치에 근거를 둔다.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일이 있고 한 가지 열망이 있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히 1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