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룻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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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기는 나오미와 룻, 보아스라는 세 명의 평범한 사람의 생애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신실하심에 대한 비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들이 경제적 어려움과 번영을 겪는 동안, 우리는 풍성한 농산물 생산을 위한 노동,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인색하지 않은 자원 관리, 동료를 존중하는 태도,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보이는 재간, 자녀 임신과 양육에서 가장 분명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실 맺는 일을 위한 기회를 창출해 내고,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그들은 서로에게, 그들 주변 사람에게 공급과 안정 이라는 복을 가져다준다.

 

   룻기의 주요 사건은 보리 추수기에 일어나는데(룻 1:22 2:17, 23 3:2, 15, 17), 그때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람의 수고를 축하하고 기념하는 시기였다. 율법서(토라)에 나오는 두 구절이 이 절기의 배경을 제공한다(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16:10-12).

 

   이 구절들이 룻기에 나오는 사건의 신학적 토대를 구축한다.

 

1.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인간의 생산력의 원천이다(“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2.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동(수고)를 통해 풍성함이라는 자신의 복을 부어 주신다(“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 열매들).

3.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과 취약한 사람을(“객과 고아와 과 부”) 위한 산물을 내시기 위해 일할 기회를 주시려고 사람 을 부르신다(“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 애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해방하신 것과 광야와 가나안에서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신 것을 예시).

 

   요약하면, 인간이 노동한 것에 대한 생산성과 풍요함은 세상 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연장이며, 사람의 노동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은 스스로 먹고살 방도가 없는 사람들에게 넉넉히 베풀어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런 원리가 룻기의 기저가 된다. 그러나 이 책은 신학 논문이 아니라 내러티브(이야기)이며, 매우 흥미진진하다. 

 

 

가정에 비극이 닥치다 (룻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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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룻 1:1)에 일어난 기근으로 시작한다. 이때는 사사기에서 들려준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도를 버리고 우상숭배와 최악의 사회 상황, 재앙 수준의 내전에 빠져 있던 때였다. 전반적으로 그때는 일이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율법(토라)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적어도 나오미는 이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상실했음을 인정했다(룻 1:13, 20-21). 그 결과 사회 경제적 구조가 붕괴되고 있었고, 기근이 그 땅을 덮쳤다.

 

   기근에 대처하기 위해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은 모압으로 이주했다. (이스라엘과 모압의 오랜 적대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이었다.) 그들 생각에 거기라면 일의 전망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봤다. 그들이 거기서 성공적으로 일자리를 찾았는지 여부는 모르나 어쨌든 그 아들들은 둘 다 모압에서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10년 이내에 그들은 사회, 경제적 비극을 경험했다. 가족 중 남자가 전부 죽어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과부가 된 것이다(룻 1:3-5). 그 뒤로 세 명의 과부는 당시 남자에게만 주어지던 법적, 경제적 권리를 전혀 갖지 못한 채 자기 힘으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했다. 한마디로 남편도 없고, 땅에 대한 명확한 소유권도 없고, 생계를 이어갈 아무 자원이 없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돌이켜 보면서 나오미는 “나를 마라[쓰다, 괴롭다]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라고 탄식한다(룻 1:20).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 율법에서 상당한 관심을 받는다.[1] 남편의 보호와 지지를 상실한 그들은 사회 경제적 학대와 착취의 대상이 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단지 먹고살아야 하는 이유 때문에 창녀로 전락했는데 이는 오늘날 취약계층의 여성에게도 아주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다. 나오미는 과부가 됐을 뿐 아니라 모압에서는 나그네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두 며느리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간다면, 이스라엘에서는 그 젊은 며느리가 과부면서 동시에 나그네가 될 터였다.[2] 어디에 살든 그들이 부딪칠 취약성에 대한 대책으로 나오미는 며느리에게 그들의 모국에 있으라고 강권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며느리들이 모압에서 안정을 얻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했다(룻 1:8-9). 그러나 그중 룻은 아무리 어려워도 시어머니를 떠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룻이 나오미에게 한 말은 그녀의 사랑과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노래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룻 1:16-17).

 

   누구에게나 인생은 고달플 수 있으나, 이 여인들은 그중에서도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신 10:18; 14:29; 16:11, 14; 24:19-22; 26:12-13; 27:19.

이스라엘 세계에서 모압 사람으로서 겪는 어려움들에 관해서는 Daniel I. Block, Judges, Ruth (NAC; Nashville: Broadman & Holman, 2002), 627쪽을 참조하라.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함의 원천이다 (룻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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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미와 룻은 견디기 힘든 역경에 처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라면 역경은 절망이 아니다. 룻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기적적인 개입을 만나게 되지는 않지만, 결코 하나님의 손길이 없던 게 아니었다. 하나님은 항상 역사하셨고, 특히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 그렇게 하셨다.

 

   오래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창 17:6). 여호와는 자기 백성이 신실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농업 생산성을 회복해 주심으로써(룻 1:6) 그분이 약속하셨던 것을 선하게 이루셨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 나오미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룻은 자신이 한 말을 충실하게 지켜서 자신과 나오미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 찾으리라 작정하고 시어머니와 같이 길을 나섰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룻이 한 일과 그 일의 결과로 그들 위에 (결국은 온 인류 위에) 쏟아 부어진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모든 생산성의 기반이다.

 

   대체로 히브리 성경은 하나님을 일하시는 거룩하신 분, 사람의 일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공하시는 분으로 그린다. 성경은 말씀하시고, 창조하시고, 조성하시고, 지으시는 모습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한다. 히브리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다’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수많은 동사의 주어로 등장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하나님을 부를 때 종종 은유적으로 “일하시는 분”(Worker)이라고 부른다. 히브리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많은 일에 직접 관여하실 뿐만 아니라,[1]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패턴을 따라 일하라고 명령하신다(출 20:9-11).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직접 일하시고, 또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룻기의 주요 등장인물은 반복적인 신앙 고백으로, 또 서로를 축복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일하는 토대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2] 이런 표현 가운데 어떤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행동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자를 거두지 않으셨다(룻 1:20). 그분은 기업 무를 친족을 주셨다(룻 4:14). 다른 어떤 표현은 하나님의 축복이나(룻 2:4, 19 3:10) 임재나(룻 2:4) 인자를(룻 1:8) 바라는 청원이다. 세 번째 표현은 하나님 행동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간구다. 하나님이 위로(NIV에는 “rest”) 주시기를 바라고(룻 1:9), 룻을 라헬이나 레아와 같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룻 4:11-12). 룻기 2장 12절의 축복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모든 축복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공급하시기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을 표현한다.

 

   룻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것이든(룻 2:12), ‘은혜를 입게 할’(룻 2:2)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든 풍성함이라는 하나님의 복을 갈망했다. 모압 여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는 데 많은 이스라엘 사람보다 더 지혜로웠다.

 

   이야기에 나오는 사건을 볼 때 하나님에게서 온 가장 중요한 복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추수가 넉넉하도록 축복해 주신 것이다(룻 2:3). 그가 반복적으로 한 여호와의 축복 간구에서 보이듯, 보아스는 자신이 하는 노동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온전히 인식했다(룻 2:4 3:10). 

 

 

우리 일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명백하게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풍성케 하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모든 상황에 대한 그분의 통제력이다. 룻기 2장 3절에 나오는 “her chance chanced upon”(우연히 발견된 그녀의 기회)이라는 묘한 문장구조는 다분히 의도적이다(NRSV에서는 ‘공교롭게도, 마침’이라는 뜻으로 쓰여 있으며, 개역개정에는 “우연히”로 번역되어 있다 - 옮긴이 주). 구어체 영어로 말한다면 “As luck would have it”(운 좋게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진술은 역설적이다. 이야기의 화자(narrator)는 독자가 자리에 앉아서 도대체 어떻게 룻이 자애로울 뿐 아니라(룻 2:2) 기업 무를 친족(룻 2:1)인 사람의 밭에 “우연히” 가게 됐느냐고 묻게 만드는 것이다.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우리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른 것이 하나님 섭리의 손길의 증거였음을 본다. 룻기 4장 1-2절에서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있는데 마침 그다음 기업 무를 자가 나타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 힘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것 외에 더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매일매일 출근한다면 그것처럼 삭막한 세상살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한 일, 예상치 못한 기회, 창의성의 갑작스런 발현, 눈에 보이지 않는 복 같은 것들도 의지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오는 가장 안심되는 축복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일하러 갈 때 그분도 우리와 함께 가시며 우리가 지는 짐을 함께 져 주신다는 그분의 약속이다. “나의 멍에를 메고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30). 룻은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을 듣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찾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았다(룻 2:12).

 

 

 

풍성한 인생은 우리가 하나님께 보인 신실함의 열매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나오미를 신실하게 대하는 룻의 모습에 투영되어 있다.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약속했다. 룻의 약속은 엘리멜렉 가문에 그저 식량만 축내는 수동적인 한 식구로 남아 있겠다는 간청이 아니라, 자기능력이 닿는 데까지 시어머니를 봉양하겠다는 헌신의 간청이었다. 그녀는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었는데도, 마치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십계명의 제5계명에 구체화되어 있던 이스라엘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듯 보인다. 룻과 그녀의 가족을 위해 풍성하게 일이 회복되는 복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신실하게 일한 룻의 헌신에서 시작됐다. 

 

 

 

하나님은 창조하시고(창 1:1), 세우시고(삼하 7:27; 삼상 2:35), 만드시고(창 2:4), 지으시고(창 2:7, 8), 
조성하신다 (시 8:6). 그분은 창조주로(창 1-2; 욥 10:3-12; 시 139:13-16), 짓는 자, 건축가(잠 8:27-31), 음악가, 작곡가(신 31:19), 금속 공예가(사 1:24-26), 재단사(욥 29:14), 토기장이(사 64:8), 농부(호 10:11), 목자(시 23편; 겔 34장), 장막업자, 천막업자(욥 9:8; 사 40:22), 성전 설계사 겸 건축가(출 25장; 35장; 대상 28:11-19), 서기관, 작가(출 24:12; 31:18; 34:28 등)로 묘사되어 있다.

룻 1:8-9; 2:4a; 2:4b; 2:12; 2:20; 3:10; 4:11-12; 4:14a; 4:14b-15.

사람의 수고를 통해서 풍성함의 복을 부어 주신다 (룻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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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람이 누리는 풍성함의 원천이지만, 실제로 일은 사람이 해야만 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었다(창 1:28 2:5, 15).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먹고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싶어 했다. “밭으로 가게 해 주세요”라고 룻은 간청했고, 그녀에게 일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옆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이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룻 2:7)라고 보고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룻이 일한 결과는 유난히 풍성했다. 첫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주운 보리 이삭을 달아 봤을 때, 추수한 양은 한 에바쯤 됐다(룻 2:17). 이것은 대략 보리 5갤런(약 19리터 - 편집자 주)에 해당하는 양이었다.[1] 하나님께서도 보아스도 모두 룻의 믿음과 부지런함을 칭찬하고 보상했다(룻 2:12, 17-23; 3:15-18).

 

   크든 작든 어느 정도는 우리도 모두 생계를 꾸리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자연재해, 정리해고, 편견, 부상, 질병, 파산, 부당대우, 법적 제제, 언어 장벽, 직무 연관 훈련이나 경험 부족, 나이, 성별, 정부나 기업의 잘못된 경제 운용, 지리적 장벽, 가족 부양의 필요성, 그 외 여러 요소가 우리 자신과 우리를 의지하는 사람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 일하길 기대하신다(출 20:9).

 

   혹 우리가 우리 필요를 채워 주는 일자리를 찾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일할 필요가 있다. 룻은 정해진 근무 시간이나 정해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정규직이 아니었다. 룻은 자기 처지가 일터에서 누군가의 “은혜”를 입기에 충분할지(룻 2:13) 알 수 없어 불안했고, 자기 가족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을 반드시 얻을 것이라는 기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어쨌든 룻은 일하러 나갔다. 오늘날 실업 때문에 직면하는 많은 상황이 이와 비슷하고, 우리 역시 이런 문제로 낙심할 때가 있다. 고도로 숙련된 일자리가 부족해서 하찮은 기회만 남았는가? 우리가 어떤 특정 일자리에 적합한데도 단지 차별 때문에 그 자리를 놓쳤는가?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 훌륭한 일자리에 필요한 교육을 못 받았는가? 주변 상황이 일을 소망없게 만드는가? 룻의 사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다른 사람을 돕는 자원 봉사를 한다거나, 가족을 돌보는 일, 교육과 훈련 받기, 가사 돌보기처럼 우리 일이 처음에는 아무 수입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유리한 점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일 배후에 있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 능력이나 주변의 여건에 의지하지 않는다. 대신 풍성함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가 하는 일이 (심지어는 최악의 상황에서 하는 일조차) 가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능력이 닿는 대로 충성스럽게 일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가 하는 일을 어떻게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 성취에 사용하시는지를 우리는 미리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Jack B. Scott, “82 א י פ ה”,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ed. R. Laird Harris, Gleason L. Archer, Jr. and Bruce K. Waltke, electronic ed. (Chicago: Moody Press, 1999), 38쪽.

동료를 존중하는 문화 만들기(룻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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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기 2장 1절이 말하는 것처럼 보아스는 “유력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그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던 간에 보아스의 경우는 그가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리더 중 하나임을 의미한다. 보아스의 리더십 스타일은 존중에서 시작한다. 자기 일꾼이 일하는 밭으로 나왔을 때 보아스는 그들에게 축복하며 인사하고(“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일꾼들도 친절하게 응대한다(“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룻 2:4). 보아스의 일터는 여러 면에서 아주 놀라운 곳이다. 보아스는 고용된 일꾼의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는 기업을 소유해 경영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근로 환경을 관리하고 있었다. 감독관과 소유주가 자신이 고용한 근로자를 경멸하고, 근로자 역시 자신의 상사를 존경하지 않는 많은 일터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신뢰와 상호 존중의 관계를 만들었다.

 

   보아스는 일꾼이 일할 때 물을 제공하고(룻 2:9), 그들과 함께 식사하며, 무엇보다 그들 가운데 가장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던 사람에게 음식을 나눠 줌으로써(룻 2:14) 자기 일꾼을 실질적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심지어 추수기 때는 지주인 보아스가 수확한 자기 곡식을 키질하고, 들판에서 일꾼과 같이 잠까지 잔다(룻 3:2-4, 14).

 

   보아스는 자기 일터의 이방 여인을 아주 사려 깊게 대해 줌으로써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창 1:27 잠 14:31; 17:5) 본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보아스가 일꾼 가운데서 그 여인을 봤을 때 그는, 그녀가 어떤 한 남자의 아내이거나 딸인 줄 알고 온유하게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고 묻는다. 그 여자가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이라는 말을 듣고, 또 자기 추수꾼 뒤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을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게도 그가 한 첫마디는 “내 딸아 들으라”였다(룻 2:5-8). 자신의 음식을 외국 여자와 나누는 것(룻 2:14)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행동이다. 룻이 감탄하며 말했듯이 존경받는 지주가 외국 여인과 대화하는 것은 관례상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룻 2:10).[1] 사회적 체면과 사업 기회에만 관심이 있던 남자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별로 없던 사람이라면, 모압 여자를 자기 땅에서 당장 쫓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일꾼들 가운데서도 더 딱한 형편인 그 일꾼을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녀 편에 섰다.

 

   실제로 이 이야기에서 어쩌면 우리는 세계 최초로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 반대 정책에 대한 기록을 접하게 된다. 어쩌면 그는 많은 농장주와 일꾼들이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2] 어쩌면 이것이 바로 보아스가 룻에게 자신이 자기 일꾼에게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일러두었다고 알려 주는 이유일 것이다(룻 2:9). 나오미가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룻 2:22)라고 한 말은 그녀가 자기 며느리의 안전을 걱정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보아스의 정책에 나타난 조건은 아주 분명하다.

 

1. 남자 일꾼은 이 여자를 ‘괴롭혀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 ‘naga’라는 단어는 ‘건드리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그 단어는 대개 ‘때리다, 괴롭히다, 이용하다, 학대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3] 보아스는 ‘건드리다’라는 것의 의미는 피해자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2. 룻은 똑같이 물(룻 2:9)과 점심식사 자리(룻 2:14)를 이용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에 보아스는 룻에게 자신과 자기일꾼 쪽으로 와서 그녀가 가져온 빵 조각을 자기 소스에 찍어 먹으라고 권유했다. 그런 다음 보아스는 그녀가 배부르고 남을 정도로 그녀를 친히 챙겨 줬다. ‘가까이 오다, 다가가다’라는 뜻의 동사로 ‘nagash’를 고른 것은 이방인인 룻이 의도적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희롱을 방지하는 보아스의 정책은 단순히 제한적이지 않았고 적극적인 것으로, 학대를 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의 반응이 무엇이 학대고 아닌지를 정할 수 있는 기준임을 의미했다. 보아스는 그녀가 필요로 하는 보호를 제공할 때 룻이 얼마나 안정감을 느끼는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는 취약한 여성 근로자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하는지 실례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3. 보아스의 정규직 일꾼은 룻을 책망하거나(룻 2:15) 꾸짖지(룻 2:16) 말아야 했다. 2장 9절에 나오는 ‘괴롭게 말라’(NRSV에는 “bother”, 개역개정에는 “건드리지 말라”)라는 단어와 함께 이런 표현은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언어적 학대 등 여러 형태로 학대가 온다는 것을 증명한다. 실제로 감정을 실어 룻에게 한 그의 축복 선언으로(룻 2:12) 보아스는 극적으로 그 모델을 확정한다.

4. 정규직 일꾼은 룻의 근로환경을 최대한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고 룻이 이삭을 충분히 주울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의무 이상을 해야 했다(룻 2:15-16). 일터에서 학대를 금지한다는 것은,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근로자에게 생산성이 있는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생산성과 승진, 포상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장벽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보아스는 남자 일꾼에게서 룻을 멀리 떼어놓아 룻의 안전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버리면 그녀가 물이나 음식도 먹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가 주워 단으로 묶기 전에 바람이나 짐승이 이삭을 가져가 버렸을 수도 있다. 보아스는 자신이 만든 안전장치가 룻이 생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확실히 했다.

 

   보아스의 일꾼들은 그의 너그러운 정신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들의 상사가 그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건넸을 때 그들도 축복의 말로 화답했다(룻 2:4). 보아스가 자기 밭에 나타난 여인의 정체를 물었을 때 인력 감독관은 룻이 모압 여인이라는 것을 밝히긴 했지만,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룻 2:6-7). 룻이 집에 있는 나오미에게 보리 한 에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룻을 잘 대해 주라는 보아스의 명령에 일꾼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일꾼들은 그녀를 위해 상당히 많은 곡식을 잘라두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이 모압 여인을 추수기간 동안 자신의 동료 일꾼으로 받아줬다(룻 2:21-23).

 

   보아스가 보인 리더십의 긍정적인 측면은 일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오미가 룻이 수고한 결과를 봤을 때, 나오미는 룻에게 일자리를 준 사람을 축복하며 그의 인자와 너그러움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룻 2:20). 나중에 그 공동체 안에서 보아스가 가진 높은 명성이 사회적 조화와 하나님께 영광을 가져온다는 게 명백해진다(룻 4:11-12). 모든 지도자, 아니, 사실상 모든 근로자는 그들이 속해서 일하는 문화를 형성한다. 비록 우리는 우리 문화에 의해 불공평하고, 무의미하거나, 생산적이지 못한 방식의 일에 동화하라는 강요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다른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부패하고 신실치 못한 사회(룻기 1장 1절의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는 말은 부패한 사회를 간략히 서술한 것이다) 가운데서 재력가였던 보아스는 정직하고 성공적인 사업을 창출해 낸다. 추수 감독관은 여자를 싫어하고 인종 차별이 심하던 사회에서 평등주의를 실천하고 있다. 룻과 나오미는 끔직한 상실과 어려움 앞에서도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든다. 우리가 나쁜 근로 환경에 동화하라는 압박을 느낄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약속은 우리 주변의 문화적 사회적 역기능 때문에 우리가 갖게 되는 모든 의심을 이길 수 있게 해 준다. 

 

 Fredric W. Bush, Ruth, Esther,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Incorporated, 1998), 129쪽.

Daniel I. Block, “Unspeakable Crimes: The Abuse of Women in the Book of Judges,”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Journal 2 (1998): 46-55쪽.

 Block, Judges, Ruth, 659-660쪽.

가난한 자에게 일할 기회를 주시려 우리를 부르신다 (룻2: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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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우리의 결실을 가로막는 장벽들을 극복하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서이다. 룻기에서 우리는 사회 안에서의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께서 개인들을 인도하시는 것 모두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은 수단을 가진 사람을 부르셔서 가난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 (룻2: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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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기는 이삭줍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이삭줍기는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율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다. 선행조건이 레위기, 신명기, 출애굽기에 나와 있다.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9-10 23:22). 이 책 4장의 “레 19:9-10” 부분을 보라.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 두라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9-22).

 

너는 여섯 해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 23:10-11). 이 책 3장의 “출 22:21-27”, “출 23:10-11” 부분을 보라.

 

   이 율법의 토대는 사람이 그들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풍성함의 수단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다. 일반적으로 모든 가정은 (십일조와 제물로 살아야 하는 레위인 가문의 제사장만 제외하고) 절대 양도할 수 없는 항구적인 땅의 분깃을 소유해야 한다(민 27:5-11 36:5-10 신 19:14 27:17 레 25장).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모든 사람은 곡식을 기를 수단을 가졌다. 그러나 외국인과 과부와 고아는 땅을 물려받지 못했고, 그들은 가난과 학대에 빠지기 쉬웠다. 이삭줍기법은 그들에게 밭 가장자리에서 추수 초기에 덜 익은 곡식이나 산물과, 정해진 어떤 해에 윤작으로 비어 있던 들판에 솟아난 것은 무엇이든지 추수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먹고살 기회를 줬다. 모든 땅 주인은 값을 받지 않고 이삭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줘야 했다.

 

   이 구절은 이삭줍기법에 대한 세 가지 토대를 제공한다. 가난한 자를 향한 너그러움은 (1) 하나님께서 사람이 손으로 하는 일에 복 주시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신 24:19). 또한 (2) 잔인하고도 모질게 학대하는 애굽의 노예주를 경험한 이스라엘의 기억에 힘입어(신 24:22a), (3) 하나님 뜻에 대한 순종의 문제다(신 24:22b). 우리는 이런 세 가지 동기를 보아스의 행동에서 모두 볼 수 있다. (1) 그는 룻을 축복해 줬고, (2)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기억했으며, (3) 룻이 자기 인생을 하나님의 손안에 맡긴 것을 칭찬해 줬다(룻 2:12). 고대 이스라엘에서 그 땅과 추수를 얼마나 완전하게 시행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보아스는 하나의 본이 되기에 충분하게 그것을 지켰다.

 

   이삭줍기법은, 적어도 그 법이 실제로 실행됐다는 점에서, 가난한 자와 소외된 사람을 위한 놀라운 복지망을 제공해 줬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는 사람이 일해서 그분의 결실을 얻게 하려는 의도가 있으시다는 것을 살펴봤다. 그것은 구걸을 하거나 노예로 살거나 성매매를 해야 하거나 아니면 다른 천박한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은 결혼, 입양, 또는 출신 국가로 돌아가게 해주는 기회를 대비해서 일반 농장 일에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술과 자존감, 신체조건 및 일하는 습관 등을 유지했다. 지주는 기회를 제공하긴 했으나 착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다. 강제 노동은 없었다. 그 혜택은 번거롭고 부패하기 쉬운 관료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나라 어디에서나 지역별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삭줍기법을 성취하려는 지주의 인격과 양심에 달려 있었고,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이 처했던 환경을 낭만적으로 다뤄서는 안 된다.

 

   보아스와 룻과 나오미의 경우에, 이삭줍기법은 의도했던 대로 작용했다. 이삭을 주울 기회가 없었더라면,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가난을 알고 난 후에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들을 굶게 내버려 뒀거나 미리 만들어 놓았던 음식(빵)을 집으로 배달해 주었을 것이다. 전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후자는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게는 해주겠지만, 그들이 더욱 보아스에게 의존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삭을 주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룻은 추수를 위해 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수고로 곡식을 사용해 빵을 만들 수 있었다. 그 과정은 그녀의 존엄성을 지켜줬다. 또한 룻의 기술과 능력을 활용해 룻과 나오미는 장기간의 의존에서 벗어나게 되었으며 그들을 착취에 덜 취약하도록 만들어 줬다.

 

   오늘날 빈곤에 대한 공적, 사적 대응과 사회적, 정치적, 신학적 논쟁에 있어 이런 이삭줍기에 담긴 구제원리는 마음에 새겨둘 만하고, 열렬히 토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크리스천끼리도 개인 대 사회의 책임, 사적인 수단 대 공적인 수단, 수입의 분배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룻기를 잘 살펴봐도 이런 의견 차이가 해소될 것 같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것은 공유된 목표와 공동의 토대를 분명하게 밝혀줄 수는 있다. 오늘날 사회에 문자 그대로의 이삭줍기는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회가 오늘날의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를 돌봐주는 방식에 있어서는 적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이 타인의존이나 착취에 의해 질식당하는 삶을 사는 대신 생산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기회를 갖게 해줄 수 있을까? 

 

개개인을 인도하셔서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에게 경제적 기회를 주신다 (룻2: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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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을 받은 보아스는 가난한 자와 취약한 자에게 공급하기 위해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훨씬 더 뛰어넘었다. 이삭줍기 율법은 지주에게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가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밭에 얼마간의 산물을 남겨 놓을 것만 요구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잡초가 무성한 밭이나 높은 감람나무 위에서 산물을 수확해야 하는 어렵고 위험하고 불편한 일자리를 갖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식으로 얻은 산물은 대개는 땅에 떨어졌거나 덜 익은 것으로 질이 안 좋았다. 그러나 보아스는 자기 일꾼에게 일부러 너그러운 행동을 하라고 말해 두었다. 그들은 가장 질 좋은 이삭을 벤 다음 그루터기 위에 놓아두어서 룻이 그냥 줍기만 하면 되게 해 놓았다. 보아스의 관심은 법으로 규정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데 있었던 게 아니라 진정으로 룻과 그녀의 가족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는 데 있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룻이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워야 하며 자기 일꾼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룻이 수확한 것은 그녀와 나오미 것으로 가져가게 했다. 그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해줬을 뿐 아니라 자신이 고용한 일손의 하나로 여겨줬고, 더군다나 그녀가 추수한 것에 따른 일정한 비율의 몫을 확실히 가져갈 수 있게 해 주기까지 했다(룻 2:16).

 

   어느 나라 어느 사회든 일할 기회를 찾는 실직자가 있는 세상에서 크리스천은 어떻게 보아스 같은 사람이 되려고 애쓸 수 있을까?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을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데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과 은사를 사용하도록 어떻게 우리는 권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사회의 자원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의 인격을 형성해서, 그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기회를 제공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우리가 보아스처럼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축복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는가? 가난한 사람에게 기회를 줘야 할 수단과 책임이 중산층에게 주어져 있는가? 또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다른 근로자와 앞으로 근로자가 될 다른 사람에게 그분의 결실이라는 축복을 안겨 주기 위해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하라고 인도하시는 것일까?

 

하나님 방식으로 일할 때 복이 배가한다(룻3: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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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스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의 놀라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보아스의 긍휼한 마음과 너그러움, 인종에 대한 관용의 생생한 증거를 본다. ‘어째서 보아스는 룻을 향해 그렇게 부드러운 마음을 가졌으며, 어째서 보아스는 누구든, 심지어 외국인인 모압 여인까지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그런 환경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보아스의 증언에 의하면, 룻은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고결한 마음과 신실함을 가지고 있었다(룻 3:10-11). 그 결과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그녀에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했다’(룻 2:12). 룻은 모압에서 태어났지만 구원받기 위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섰다(룻 1:16).

 

   보아스는 그녀를 덮는 여호와의 날개를 인식했고 자신이 그녀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절망에 빠진 외국인을 돌봐 줌으로써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잠언에는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17:5)라는 말이 있다. 사도 바울도 수 세기가 지나 이 주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보아스는 룻을 단순히 부지런한 일꾼과 나오미의 신실한 며느리 이상으로 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서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 옷자락을 펴 덮어주게 된다(룻 3:9). 이는 결혼에 꼭 맞는 은유로 하나님의 날개로 대표되는 사랑과 만족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 사랑 이야기에는 일과 관련된 측면이 있다. 부동산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오미는 죽은 남편 소유의 땅에 대한 권리를 아직은 주장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 율법에 의하면 그의 다음 친족이 나오미와 결혼해서 그 땅을 획득할 권리가 있었으며, 가족이 그 땅을 지킬 수 있게 해줘야 했다(룻 2:1). 보아스는 이 권리 행사 순서에서 실제로는 두 번째였다. 보아스는 그 권리를 가진 바로 다음 사람에게 연락했으나, 그 사람이 그 땅의 권리를 주장하려면 모압 여인 룻도 자기 가문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권리를 포기했다(룻 4:1-6). 

 

   그와는 대조적으로 보아스는, 룻이 인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열등함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에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받았다는 것을 기뻐했다(룻 4:1-12). 보아스는 편의상 늙은 나오미와 결혼하지 않고, 대신 나오미의 허락 하에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룻과 결혼함으로써 그 재산을 구속하기 위한 권리를 행사했다. 이 모압 여인과 결혼을 함으로써 보아스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라는 약속의 일부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취했다. 또한 보아스는 더 많은 재산도 얻게 되었는데, 기존에 가졌던 재산을 생산적이고 너그럽게 관리한 것처럼 똑같이 관리했을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막 4:25)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전조가 된다. 곧 우리가 배우겠지만, 보아스는 딱 예수님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그 이야기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선을 위해 세상에서 어떻게 아직도 일하시는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사람의 담력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 (룻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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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서두르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시 한번 나오미는 통념을 넘어서 행동한다. 나오미는 룻을 밤중에 보아스의 타작하는 밭으로 보내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룻 3:4)라고 한다. 룻기 3장 4, 7, 8, 14절에 나오는 “발”의 뜻은 성관계에 대한 완곡어법일 수도 있는데,[1] 나오미가 꾸며낸 계략은 당시 풍습과 도덕성에 비춰 보면 의심스럽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만남을 위한 룻의 준비와 장소 선택은 창녀가 하는 행동을 암시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자신을 존중하고 도덕적으로 고결한 성품을 가진 보아스 같은 사람이 타작마당에서 자다가 밤중에 일어나 자기 옆에 여자가 있는 것을 알았을 때, 그런 여자와 자신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항변하며 분명히 그녀를 돌려보냈을 것이다. 보아스한테 자신과 결혼을 해달라는 룻의 요구도 당시 관점에서 볼 때 마찬가지로 아주 대담한 것이다. 외국인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젊은 사람이 나이든 사람에게, 하잘것없는 일용직 노동자가 부유한 지주에게 제안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그렇다.

 

   하지만 룻의 당돌함에 기분 나빠하는 대신 보아스는 그녀를 축복해줬고, 가족의 행복을 위한 그녀의 헌신을 칭찬했다. 또한 그녀를 “내 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켜줬고, 요구한 것은 뭐든지 다 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녀를 “현숙한 여자”라 선언했다(룻 3:10-13). 이런 예외적인 반응은 보아스가 잠에서 깼을 때 그의 마음과 말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하다. 

 

같은 책, 683-688쪽.

법적인 절차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룻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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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스는 만약 자신보다 먼저 기업 무를 권리를 가진 사람이 그 권리를 포기한다면 자신과 결혼해 달라는 룻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보아스는 지체없이 그 문제를 법적으로 해결하는 절차에 돌입했다(룻 4:1-12). 이쯤에서 독자들은 지금까지 룻기에 일어난 어떤 사건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바로 다음날 보아스가 성문에 앉아 있을 때 그 친척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이것 역시 하나님의 예비하심인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룻이 그 성문에서 진행되던 법적인 절차 현장에 있었더라면, 처음에 그 친척이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아스가 룻도 그 기업과 함께 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 사람에게 알렸을 때, 그는 마음을 바꿨다. 그제야 룻의 희망은 다시 살아났을 것이다.

 

   그 친척이 마음 바꾼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자신이 위반한 법적인 의무가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고 말한다.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룻 4:6)라고 하지만 그 핑계는 빈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보아스에게는 충분했고, 그가 판결을 수용하면서 한 말은 명료성과 논리성의 좋은 모본이다. 사건은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었지만, 그 결과는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인도된 것으로 보인다. 

 

출산의 결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룻4: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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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룻기에서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사건이 일어난 것을 두 번째로 룻기 4장 13절에서 분명히 본다(처음 사례는 1장 6절에 나온다).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본문의 ‘임신/잉태’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herayon)는 여기 말고는 창세기 3장 16절과 호세아 9장 11절에만 나타나지만, ‘임신하게 [허락]하다’라는 특별한 숙어는 오직 여기서만 나타난다. 우리는 이 진술을, 말론과 결혼해 10년을 사는 동안(룻 1:4) 분명히 아이가 없었던 룻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나오미와 함께 이스라엘로 옴으로써 룻이 신실함을 보인 후에, 룻이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도록 보아스가 신실함을 보인 후에, 보아스가 친족 중 기업 무를 자로서 소임을 충실하게 한 후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증인으로서 한 신실한 기도 후에(룻 4:11-12), 룻과 보아스가 결혼한 후 관계를 가지자마자 하나님은 룻에게 아이를 주셨다. 모든 사람의 노력, 심지어는 성관계까지 의도하거나 바라는 목표의 달성 여부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룻 4:13-15 1:4).

 

   어떤 아이든 그 태어남은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이지만, 룻과 보아스의 아들인 오벳의 출생에는 더 큰 이야기가 있다. 오벳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의 할아버지가 될 것이며(룻 4:22), 궁극적으로는 메시아 예수님의 조상이 된다(마 1:5, 16-17). 이런 방법으로 이방인 룻은 이스라엘에, 또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됐다. 

 

룻기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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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기는 자기 백성을 돌보시기 위해, 더욱 중요하게는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사방에서 이끄시며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이야기를 전한다.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을 향한 백성의 신실함 모두 일과 그 일의 결실을 통해 활성화된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부지런히, 정직하게, 너그럽게, 창의적으로 하나님의 율법과 영감에 따라 일한다. 그들은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지했고 조화를 이루며 긍휼한 마음으로 다 같이 일했다.

 

   룻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에서 우리는 오늘날 크리스천이 일의 존엄성은 물론 그 일의 가치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일은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섬긴다. 오늘날 크리스천인 우리는 목사나 선교사, 전도사가 하는 일에서 가장 분명하게 하나님의 손길을 인식하는게 익숙할 수 있지만, 그들이 하는 일만이 하나님 나라의 합법적인 일은 아니다. 룻기는 부유한 지주가 하든 가난에 찌든 이방인이 하든 간에, 농사짓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도 충만한 믿음을 요하는 소명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거룩한 일이며, 다른 사람이 그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단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 모든 합법적인 직업은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만드시고, 디자인하시고, 조직하시고, 아름답게 하시며,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고, 경작하시고, 돌보시고, 치유하시고, 힘을 실어주시며, 알려주시고, 장식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날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근무 환경을 만들 힘이 있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 편이 되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든지 간에, 우리가 동료를 귀하고 존엄하게 대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우리가 동료의 유익을 위해 일할 때, 특히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고 모든 힘을 다해 그들이 하는 일이 인간다운 일이 되게 하고 그들의 행복을 키운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