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마가복음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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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복음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분이 하신 일은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의 표적을 행하시며, 그 어떤 것보다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사역은 절대적으로 유일무이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처음부터 의도하신 방식으로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하나님과 협력해야 하는 모든 하나님 백성의 일과도 이음매 없이 연결되는 한 부분이다. 비록 우리의 일이 그리스도의 일은 아니나, 그분의 일과 동일한 목표를 가진다. 따라서 마가복음은 우리의 일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우리 일에 정보를 제공해 주고 우리가 하는 일의 궁극적 목적을 규정해 준다. 
 

   마가복음을 공부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일로 부름받았다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과 안식과 예배의 리듬을 분별한다. 또한 돈을 벌면서 살아가는 것, 부를 쌓는 것, 지위를 얻는 것, 세금을 내는 것,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을 지향하지만은 않는 사회에서 일하는 것 등에 많은 기회와 위험이 함께 내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어부, 육체 노동자, 아버지, 어머니(부모 역할도 일의 일종이다), 세리, 장애 때문에 일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 지도자, 농부, 율법학자, 제사장, 건축가, 자선가, 대단한 부자, 상인, 은행가, 군인, 통치자들을 만난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일과 삶의 현장에서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다양한 인격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의 개별적인 고립된 존재로 만나는 게 아니라, 가족과 지역 사회와 국가의 일원으로 만난다. 일과 일꾼은 마가복음 어디에나 나온다.
 

   마가복음은 제일 짧은 복음서다. 마가복음에는 마태와 누가의 기록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자료가 적은 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임무는 마가복음의 세부 내용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가 말하는 복음이 비교회적(non-church) 일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마가복음에서 일과 관련된 기본 본문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진다. 첫째, 하나님 나라를 대신해서 일하도록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것 같은 부르심의 이야기. 둘째, 일과 휴식의 리듬과 관련한 안식일 논쟁. 셋째, 부와 부의 축적 및 납세와 관련한 경제적 이슈 등.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제자화”라는 제목으로 부르심을 논의할 것이고, 안식일 논쟁은 “일과 안식과 예배의 리듬”이라는 제목 아래 다룰 것이며, 납세 및 부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경제적 쟁점들”이라는 제목으로 다룰 것이다. 이 각각의 범주 안에서 마가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자들이 어떻게 아주 깊은 수준까지 변화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쏟는다.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복음도 소용돌이치는 경제 시대를 배경으로 쓰였다. 로마 시대의 갈릴리는 사회적 동요가 계속해서 일어나던 곳이었는데, 토지가 점점 더 극소수 부유층의 (때로는 외국인의) 소유가 되고, 일반적으로 토지에 뿌리를 둔 농업 및 소규모 농업에서 대규모 농업으로 전환되는 중이었다. 한때는 소작농이거나 토지 임차인이었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일용직 근로자로 전락했는데, 종종 로마제국에 세금을 내기 위해 빌린 융자금을 차압 당하는 바람에 토지를 빼앗겨 그렇게 된 경우가 많았다.[1]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마가복음의 서술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경제 · 재정 관련 주제들이 등장하는 건 당연하다. 이 같은 사회적 상황을 잘 안다면, 그걸 모를 경우 이런 주제 밑에 숨겨져 간과하고 넘어갔을 흐름을 깨닫기가 좀 더 수월하다

 

Sean Freyne, Jesus: A Jewish Galilean (London/New York: T&T Clark, 2004), 45-46쪽.

우리를 통해 계속되는 복음의 행진 (막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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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 요한의 설교와 예수님의 세례 및 시험에 대한 이야기에는 일을 언급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향해 가는 관문으로서의 그 이야기들은 뒤에 나오는 모든 주제 문맥의 기초를 제공하며, 우리가 일이라는 관심사에 보다 더 분명하게 적용 가능한 본문을 향해 움직여 나갈 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마가가 마가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제목을 붙인 사실이다(막 1:1). 내러티브 관점에서 볼 때, 시작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인상적이다. 마가복음은 끝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초기 사본에서는 그 복음이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라는 구절에서 갑자기 끝난다. 본문이 너무도 갑자기 끝나는 바람에 필사가들이 신약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마가복음 16장 9-20절의 내용을 구성해 넣을 정도였다.
 

   그러나 어쩌면 마가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복음서에 끝이 없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기 때문에, 마가복음을 읽는 우리가 계속되는 그 복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 삶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사건들의 직접적인 연속이요, 우리에겐 그것을 우리 일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길 기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2]

  우리는 앞으로, 마가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묘사할 때 항상 완전과는 아주 거리가 먼 초보자로 묘사한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이는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다.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 마가복음은 이 사도들을 둔하고, 무지하며, 계속해서 예수님을 실망시키는 사람들로 그린다. 이것이 우리에게 상당히 위로가 된다. 직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애쓰는 상당히 많은 크리스천이,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부적합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가는 우릴 격려한다. 이 점에선 열두 제자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으니, 용기를 내라고 말이다.
 

   세례 요한(막 1:2-11)은 말라기 3장 1절과 이사야 40장 3절에 나오는 ‘주의 사자’로 묘사된다. 세례 요한은 “주”의 오심을 선포한다. 이 표현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막 1:1)로 지칭한 것과 함께,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 나라’를 독자들에게 또렷하게 나타내 준다. 다만 예수님은 마가복음 1장 15절까지 기다려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복음”(good news)과 연결시켜 사용하신다. 마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성령님의 변화시키는 역사를 통해, 사람과 여러 민족들이 하나님의 법 아래서 따르게 될 주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이런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세례와 시험(막 1:9-13)에 대한 마가의 간략한 묘사에 강조되어 있다. 그 짤막한 묘사는 성령이 예수님 위에 임하시며, 예수님이 사탄에 의한 시험을 받도록(아마도 그 시험을 극복하시도록) 몰아가시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단락은 두 가지 상반되면서도 널리 알려진 하나님 나라 개념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한 가지 개념은, 하나님 나라는 아직 실존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친히 다스릴 때에야 비로소 실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견해로 보면 직장은, 세상의 다른 어떤 곳과 마찬가지로 원수의 영토다. 크리스천이 할 일은, 이 세상이라는 적의 영토에서 전도 할 정도로 생존하고, 개인의 필요를 채우며, 교회에 헌금할 만큼만 이득을 내면 된다. 다른 하나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가 내면적이고 영적인 영역이어서, 우리 주변의 세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서 보면, 크리스천이 교회에서의 시간과 개별 기도 시간을 제외하고 직장이나 다른 어떤 곳에서 하는 일은 전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두 견해 모두를 반대하면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에 현재적 실체로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나님 나라는 물론 현재 실현된 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이 땅을 다스리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까지는 그러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 와 있으며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분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세상에 대단히 실질적인 결과들을 가져온다. 그것은 우리로 사회적 불명예나 갈등에 휘말리게 할 수도 있고, 또 고난을 당하게 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 4장 12절처럼, 마가복음 1장 14절도 요한이 투옥된 것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이 투옥 사건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5)라고 직접 선포하신 시작과 연결시킨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권력에 맞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복음을 섬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반드시 이생에서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또렷이 본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에 나타나 있듯이(막 1:23-34, 40-45), 성령의 능력으로 주변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성령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는 나중에 바알세불 논쟁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막 3:20-30). 이것은 어려운 부분이므로 아주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에 대한 우리 신학을 뒷받침하는 하나님 나라 신학에 분명히 중요하다. 이 단락은 귀신을 쫓아 냄으로써, 예수님이 ‘강하지만 이제는 결박당한’ 사탄에게서 이 세상을 실제로 해방시키셨음을 보여 준다. 크리스천은 우리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세상에서 도망치거나 세상에 순응하는 대신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J. David Hester, “Dramatic Inconclusion: Irony and the Narrative Rhetoric of the Ending of Mark,”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17 (1995), 61-86쪽.

첫 제자들을 부르시다 (막1: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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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분은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제자들이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전형이자 예이긴 하지만, 그들은 또한 구원 이야기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특정한 종류의 섬김인 그들의 소명과, 그들이 생업을 포기한 것이 모든 크리스천의 삶과 직업에 대한 보편적인 모범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자기 직업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의 “소명에 대한 개요” 부분을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사회의 원칙을 뛰어넘고 무효화해 버리는 그 나라의 요구 방식은 우리 일에도 그대로 전수할 수 있고, 깨우침을 얻게 한다.

 

​   마가복음 1장 16절이 시작되는 절은 예수님을 순회 여행자(“지나가시다가”)로 보여 주고, 그분은 이 어부들에게 육지로 올라와 자신을 따라오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수입과 안전을 뒤로 하고 ‘안전지대’를 벗어나라는 도전 그 이상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마가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빠져 있는 것들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예컨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형제 요한이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막 1:20)라고 기록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품꾼이나 일꾼들이 아니라, 도리어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되던 가족 기업체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수전 왓츠 헨더슨(Suzanne Watts Henderson)은 제자들의 반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것들을 쌓아 두던 사람들에게 ‘버려두고’라는 동사는 그 무게감을 엄청 더해 준다. 단지 그물만 내버린 게 아니라, 이름까지 명시된 아버지, 배, 사업 전부를 버렸기 때문이다.”[3]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신분, 지위, 가치 등을 예수님과 연관해 사전에 결정해야 하는 자발성을 증명해 보여야만 했다.
 

   갈릴리에서 고기잡이는 생선 염장용 소금산업과 함께 큰 산업이었다.[4]갈릴리가 사회적 혼란을 겪을 때도 서로 연관된 이 두 산업은 서로를 떠받쳐 줬고, 튼튼하게 유지되었다. 그런 안정된 직업을 제자들이 기꺼이 버렸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경제적 안정이 더는 그들이 일하는 주된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도 조심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가졌던 땅에서의 직업을 거부하시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재교육시키신다.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데(막 1:17),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가졌던 예전 직업을 그분이 그들을 부르시는 새 역할에 대한 이미지로 확정해 주신다.
 

   비록 모든 크리스천이 다 직업을 버리고 순회 설교자가 되라는 부름을 받진 않지만, 그래도 우리 신분의 기반을 예수님 안에 두라는 요구는 받는다. 우리가 하던 일을 그만두건 그만두지 않건, 제자의 신분은 더는 ‘어부’나 ‘세리’ 또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를 따르는 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직업을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정하는 기준 요소로 삼고 싶어 하는 유혹을 뿌리치라는 과제를 던져 준다.

 

Suzanne Watts Henderson, Christology and Discipleship in the Gospel of Ma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63쪽.

Freyne, Jesus: A Jewish Galilean, 48-53쪽. 납세제도에서 어업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는 Bruce Malina, Richard Rohrbaugh, A Social-Scientific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Minneapolis: Fortress, 1992), 44-45쪽을 보라.

직장생활을 위한 믿음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막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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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과연 일의 신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기 전에는 스스로 일해 먹고살 능력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주변 사람의 은혜와 긍휼에 의지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친구들의 믿음에 깊은 인상을 받으신다. 일에서 오는 재정적 보상과 관계적 보상을 모두 배제한 채, 누군가에게 돌봄과 긍휼과 우정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믿음이었다. 그들의 믿음엔 행함(doing)과 존재됨(being)의 구분이 없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노력을 집단의 믿음의 행위로 보신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안타깝게도 믿음의 공동체는 현대 서구 크리스천의 직장생활에서는 사라지다시피 하여 작은 역할만 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직장생활을 위한 도움과 격려를 교회에서 받긴 하지만, 그것은 거의 개인적인 도움과 격려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함께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과 같이 일했다. 그래서 교회는 일자리를 나눠 가진 근로자들, 농부들, 집안 식구들에게 쉽게 성경을 적용시킬 수가 있었다. 반면 오늘날 서구 크리스천들은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과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물론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직종에서 일하는 경우는 많다. 따라서 그들이 일에서 부딪치는 도전과 기회들을, 비슷한 직업을 가진 다른 신자들과 나눌 기회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이런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크리스천 근로자들을 위해 서로를 지원하고 함께 성장하며 얼마간의 업무연관성도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를 개발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마가복음 2장 3-12절에서 핵심으로 다루는 믿음의 공동체적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 짧은 일화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관찰한다. 첫째, 일은 일을 통해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신을 부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익을 주려는 의도가 있다. 둘째, 믿음과 일은 존재됨과 행함처럼 분리될 수 없고, 도리어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힘으로 행하는 활동에 통합되어 있다. 셋째, 믿음으로 행해진 일은 그것을 지지해 줄 믿음의 공동체가 절실히 필요하다.

복음을 말할 기회, 복음을 만날 기회 (막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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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를 부르신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동하시는 중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이다(막 2:13-14). 이 단락은 이 부르심의 공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예수님은 무리를 가르치시는 도중에 레위를 부르셨고(막 2:14), 레위는 처음에 “세관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레위의 직업은 갈릴리에 같이 사는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었다. 갈릴리에서 로마와 헤롯 정부가 거둔 세금이 얼마나 무겁게 느껴졌는지는 논란의 대상이지만, 대부분은 그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실제 세금 징수는 개인 세리들과의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리는 자신이 담당하는 구역의 세금을 낸 후, 나중에 전체 주민에게서 개별 세금을 거뒀다. 여기서 이익을 크게 보려면 전 주민에게 실제 세율보다 높은 세금을 매겨야 했고, 세리는 그 차액을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로마 당국은 세금 징수라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그 지역 사회 사람들에게 위임했으나, 결과적으로 실제 세율이 높아졌고, 온갖 종류의 부패가 가능하게 됐다.[5]
 

   또한 이것이 갈릴리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리게 만든 주된 요소의 하나였을 것이다. 토지 주인들이 세금을 돈으로 내려고 융자를 받았고, 그러다가 농사 수확이 시원찮게 되면 담보 잡힌 그들의 토지를 잃었던 것이다. 우리가 처음에 레위를 세관에서 마주쳤다는 사실은, 그가 실제로 로마 식민 지배에 대한 살아 있는 하나의 상징이며, 당시 일부 유대인들이 로마 정부에 협조하고 있었음을 상기시켜 준다. 마가복음 2장 16절에서 세리와 “죄인들” 사이를 연결시키는 것에서도 그 같은 부정적인 연상이 강조되어 있다.[6]
 

   누가는 레위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떠나는 장면을 강조했으나(눅 5:28), 마가는 레위가 그냥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한다. 그 후에 그 세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 및 다른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뒤섞인 무리에게 자기 집을 개방하고 잔치를 벌인다. 그 이미지는 단순히 자기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나누려고 시도하는 한 사람을 연상시키긴 하지만, 현실은 아마 그보다 더 미묘했을 것이다. 레위가 속한 ‘공동체’는 ‘죄인들로서’ 그 지역 사회의 주요 인물들에게 외면당했다. 그들의 직업은 그들을 내부적으로는 아주 양질의 사교 관계를 가지게 해 주었으나, 주변 지역 사회와는 그다지 좋지 못한 관계를 맺는 하위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날 여러 직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직장 동료가 이웃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마음을 열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직업군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은 우리와 함께하게 되는 직장 동료들이 복음의 실상을 더 잘 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같이 식사하는 데서 오는 환대는 예수님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그런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준다. 직장 동료들과 점심을 같이하거나, 조깅이나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같이하거나, 퇴근 후에 차 한 잔을 같이하는 등의 환대는, 그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게 해 줄 수 있다. 이런 우정은 그 자체로 항구적인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 성령이 ‘우정 전도’(Friendship evangelism)를 할 수 있는 문도 열어 주신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만약 오늘날에도 크리스천이 직장 동료들, 이웃에 사는 친구들, 교회 친구들과 함께하는 식사 모임을 만들고자 한다면, 거기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기독교 신앙은 좋은 일꾼이 되는 방법과, 좋은 이웃이 되는 방법에 대해서는 할 얘깃거리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 동료나 이웃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반 언어로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가? 우리의 대화가 구직, 고객 서비스, 재산세, 건축 규제 같은 도시민의 관심거리나 직장에 관련된 것으로 옮겨 갈 때, 과연 우리는 기독교적 개념이 그런 이슈에 어떻게 의미 있게 적용될 수 있는지 비신자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교회는 우리가 이런 대화를 해 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켜 주는가? 레위, 또는 예수님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삶에 예수님의 메시지를 어떻게 의미심장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말할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납세 문제는 뒤에서 또 등장할 테니, 납세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알고 싶은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하는 것은 그때까지 미뤄 두자. 

Malina, Rohrbaugh, A Social-Scientific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189-190쪽.

미슈나 원전(The Mishnaic text) m. Toharot 7:6은 세리가 집에 들어오면 부정하게 된다고 말한다.

당신의 기질을 맡기라 (막3: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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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한 제자들을 부르신 기사 외에, 사도들의 임명에 대한 기사도 나온다. 소위 제자들로 이루어진 넓은 공동체 안에서 열두 명이 특별한 그룹을 구성하는 마가복음 3장 13-14절에는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요점이 있다. 그들이 맡은 사도직의 유일성이다. 그들은 특별한 형태의 섬김으로 부름을 받았으며,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그런 섬김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형태의 것이었다. 우리가 제자들의 경험과 역할에서 어떤 교훈을 찾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활동과 확신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연관이 있었는지에 대한 인식에서지, 그들이 그저 자신들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이 아니다.
 

   마가복음 3장 16-19절에 열거된 시몬, 요한, 유다의 자격이 여기서 중요하다. 시몬의 이름은 예수님에 의해, 헬라어로 ‘반석’(petros)이라는 뜻의 단어와 아주 흡사한 “베드로”라는 새 이름으로 보완됐다. 누구든 그 이름에 분명히 어떤 역설과 약속이 들어 있지 않을까 하고 의심하게 된다. 나중에 몹시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시몬이 ‘반석’으로 개명되는데, 언젠가는 그 이름값을 하며 살게 될 것이다. 베드로처럼 직장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우리 삶의 다른 모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즉각적으로 완전하게 되는 문제가 아니라 도리어 실패하면서 성장해 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때로 우리가 실패했다고 느끼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에 좋지 않은 평판을 자신이 초래했다고 느낄 때 이것을 떠올리는 건 도움이 된다.
 

   시몬에게 새 이름이 주어졌듯이, “우레의 아들”로 언급된 세베대의 아들들(막 3:17)에게도 똑같이 새 이름이 주어졌다. 그것은 익살스런 별명으로 우습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그 두 사람의 성격과 기질을 아주 잘 포착한 이름같이 보인다.[7] 하나님 나라가 개입한다고 해서 성격과 기질의 유형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참 흥미롭지 않은가? 여기엔 장단점이다 있다. 한편으로 우리의 기질은 계속 남아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되며, 직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해 나가는 것도 바로 그 기질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크리스천인 우리조차 어떤 정형화된 유형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내고자 하는 유혹에 부딪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기질은 그 자체가 복음으로 변화받아야 할 요소일 수 있다. 세베대의 아들들에게 붙여진 호칭에 힌트가 나와 있다. 비록 그 호칭은 예수님이 애정을 담아 붙여 준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랑할 만한 호칭은 아닐 수 있다. 거기엔 불같은 성깔, 또는 갈등을 유발하는 경향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질은 우리가 하는 일에 기독교 신앙을 적용하는 문제를 풀어 가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한 일의 경험이 주변 사람의 기질에 의해 (좋든 나쁘든) 큰 영향을 받아 왔다고 말할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고 에너지가 솟구치는 동료로 만들어 주는 바로 그 성격 때문에, 그 사람과 함께 일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의욕적이고 흥이 넘치는 일꾼은 새로운 프로젝트에 쉽게 주의를 빼앗겨 산만해지거나 의견을 너무 빨리 정하기(표현하기) 쉽다. 우리 각자의 성격도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성격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격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일하기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도 우리와 같이 일하기가 쉽기도 하고,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엔 다른 사람들과 그저 얼마나 손쉽게 잘 지내는지의 문제 이상이 담겨 있다. 우리의 고유한 기질은 우리가 (좋든 나쁘든) 조직이하는 일에 (또 그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에) 기여하는 능력을 결정한다. 기질은 우리에게 강점과 약점을 동시에 준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건, 어느정도는 우레의 아들들이 그의 좌편과 우편에 앉겠다는 잘못된 야심 때문에 책망받은 데서 볼 수 있듯이(막 10:35-45), 우리가 우리 기질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그분께 맡겨야 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크리스천은 특정한 기질적 특징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모델인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 어떤 크리스천 공동체들은 외향성, 유순함, 권력 사용의 자제, (좀 더 부정적으로는) 학대받음, 종교적 편협성, 잘 속는 성향을 특권화한다. 어떤 크리스천은 그들의 직업 현장에서는 유익한 특성들인 결단력, 독단적 견해나 야망을 분별해 내는 의심이, 교회 안에서는 죄책감을 들게 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직장에서 크리스천은 마땅히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라는 어떤 틀에 꼭 맞추려고 애쓴다는 의미로 보면, 우리가 아닌 어떤 존재가 되려고 시도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고(빌 2:5), 우리 리더들을 본받으라는 부름을 받았을지는 모르지만(히 13:7), 이것은 기질이 아니라 그들의 미덕을 열심히 따라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다양한 기질의 사람들을 자신의 친구와 일꾼으로 선택하셨다. 의사 결정, 경력 선택, 그룹으로 하는 업무 수행, 갈등 해결, 리더십, 직장 내 대인관계 및 기타 여러 요소에 관해 개인이나 조직이 다양한 개성의 특징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많은 도구를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부나 재산의 신학과 연관시킬 필요가 있으나, 또 다른 면으로는 교회의 신학과 일이 만나는 지점과 연관될 필요도 있다. 일하는 환경 안에서 크리스천끼리 관계망을 유지하고 서로서로를 지지해 준다는 건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한다. 물론 실제로는 의무처럼 느껴질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하는 것이 칭찬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거기엔 반드시 우리의 현실을 포함시켜야 한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이들이 마음을 잘못 먹었을 때 그들이 지지하는 의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경우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사랑 안에서 서로서로 도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맞게 움직이는지 아닌지 서로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Robert. A. Guelich, Mark 1-8:26,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1989), 162쪽.

날마다 함께 성장해 가는 삶 (막 4:35-41; 6:45-52; 8: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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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은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제자들의 무지와 연약함과 이기적인 모습을 부각시킨다. 처음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막1:16-20)과 그들에게 위임하시는 모습(막 6:7-13)[8] 등 그들에 대해 좋은 걸 많이 말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떤 사건들과 이야기 전개의 장치들이 이런 모습을 잘 보여 준다. 그중 하나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배 위에서의 모습인데(막 4:35-41; 6:45-52;8:14-21), 그것은 예수님의 참된 능력과 권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능함을 강조하는 면에서 서로 유사하다. 마지막 배 위에서의 모습 바로 다음에는 특이한 소경 치유 사건(막 8:22-26)이 2단계에 걸쳐서 나온다. 그것은 이야기 전개상 예수님에 대해 부분적인 시야만 가지고 있던 제자들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은유)로서 기능한다.[9] 그런 다음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막 8:27-33)이 나오는데, 베드로의 극적인 깨달음의 순간 바로 뒤에 사탄이 곧바로 사도들의 눈을 가려 버리는 사건이 이어진다.
 

   예수님의 실체에 대한 제자들의 제한된 이해는, 그분의 메시지조차 제한적으로 알아듣게 했다. 그들은 여전히 권력과 지위를 갈구했다 (막 9:33-37; 10:13-16, 35-45).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기 위해선 자기희생이라는 근본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여러 번지적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제자들은 그분이 붙잡혀 재판을 받을 때 예수님을 버림으로써 가장 적나라하게 자신들의 실상을 보여 줬다(막14:50). 세 차례에 걸친 베드로의 부인과(막 14:66-72) 예수님의 죽으심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비겁함과 용기를 아주 뚜렷하게 대조시킨다.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마침내 교회를 훌륭하게 이끌어가게 될 것이다. 부활 후에 여인들에게 말하던 그 천사는(막 16:6-7)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중에 만나게 될 것을 약속하면서, 제자들에게(베드로의 이름만 언급하면서) 전달해 줄 메시지를 그 여인들에게 전한다. 이 만남으로 제자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를 자세히 살피지 않지만 사도행전에서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로 인해 제자들이 그토록 변하게 만든 핵심 사건이 ‘부활’이었음을 효과적으로 말해 준다.
 

   이것은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간단하고도 분명하게 말하면, 각자의 해야 할 일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완벽하지 않으며 성숙하는 과정 중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회개가 요구되고, 바꿔야 할 태도가 상당히 많다. 더욱 깊이 들여다보면 제자들처럼 우리도 우리가 믿고 생각하는 것 심지어는 복음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상당수 잘못 생각할 수 있음을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매일매일의 차원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 삶에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반영하며, 그 점과 관련해 우리의 부족함을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반추해 봐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직장 내에서 의롭고, 지혜롭고, 노련미 넘치는 증인, 예수님의 의와 지혜와 뛰어나심에 대한 증인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모습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 즉 약점이 있고, 어느 정도 자기중심적이지만 그래도 발전해 나가는 사람, 예수님의 성품을 증명해 보이기보다는 그분의 자비에 대한 증거를 보여 주는 것이 훨씬 더 정직하고 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증거는 직장 동료들이 우리처럼 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방식 안에서 우리와 함께 성장해 가도록 북돋우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철저하게 스스로를 훈련해 가야 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핑계 삼아 죄 안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

Suzanne Watts Henderson, Christology and Discipleship in the Gospel of Mark.

Guelich, Mark 1-8:26, 426쪽.

매일 기도 (막1: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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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속 중대한 사건 한 토막이 안식일에 일어난다(막 1:21-34). 이 가운데 일부 행위는 회당에서 벌어진다(막 1:21-28). 일과 안식과 예배가 매주 주기적으로 돌아온다는 것,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의 생애에 통합되어 녹아들어 있으며 어느 하나 결코 무시되지도 폐기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곧 그런 풍습이 크게 약화된 시대에는 예수님이 이 같은 한 주간의 리듬을 지지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예수님이 안식일에 진리의 일도 하시고, 치유의 일도 하셨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나중에 바리새인과 충돌을 일으킨다. 그 충돌은 안식일이 단지 노동에서 쉬는 날일뿐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날이기도 하다는 것을 강조한다.[10]
 

   한 주간의 리듬이 있듯이 매일의 리듬도 있다.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은 아직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기도하시려고 일어나셨다(막 1:35). 그분에겐 하루의 첫 우선순위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 기도 시간에 가진 예수님의 홀로 있음에 대한 강조는, 이 기도가 사람들이 보는 공개적인 행위가 아니라 개인적인 교통의 문제였음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직장에서 일하는 많은 크리스천에게 매일 기도하는 건 매우 어렵게 느껴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야 할 가정에서의 책임들, 장시간의 출근, 이른 근무 시간, 그날 하루의 업무에서 남보다 앞서고 싶은 소원, 하루의 일과(또는 오락)를 마무리하는 데 필요한 야근을 하면서 빼먹지 않고 일관되게 아침 기도를 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시간을 나중으로 옮긴다 해도 힘든 건 마찬가지다. 자기 앞에 쌓인 업무에 대해 매일 기도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사람을 정죄하는 내용은 마가복음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 누구보다 더 바쁘셨던 예수님이 매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붙여 주시는 일과 사람들을 놓고 기도하셨다는 것을 그린다. 일하며 사는 압박감 가운데서도 매일 기도하는 것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개인적인 호사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가 신발을 신지 않고 직장에 출근하는 걸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기도하지 않고 일하러 간다는 건 상상하실 수가 없었다.
 

   기도를 위해 따로 정기적인 시간을 떼어 놓는 건 좋은 일이나, 그렇게하는 게 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우리는 일하는 중간에도 기도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실행해 보고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된 방법은 하루 동안에 아주 짧게 여러 번 기도하는 것이다. Book of Common Prayer (공동기도서)에 나오는 “개인과 가족을 위한 매일 경건의 시간”(136-143쪽)은 하루 동안 생활과 일의 리듬에 맞춰 아침, 점심, 늦은 오후 및 밤에 할 수 있는 간단한 기도문들을 제공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한 업무를 마치고 다음 업무로 넘어갈 때 눈을 뜬 채 기도한다거나, 다른 많은 것을 기억나게 해 줄 어떤 물건이나 성구를 호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면서 눈을 뜬 채 조용히 감사를 드린다거나, 식사 전에 큰 소리로 감사하면서 하는 식의 짧은 한두 문장으로 된 기도문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다. 조이스 허기트(Joyce Huggett)가 쓴 Finding God in the Fast Lane (고속차선에서 하나님 발견하기)과[11 ]달라스 윌라드가 쓴 《영성 훈련》(The Spirit of the Disciplines , 은성 역간) 등은 매일의 기도 리듬을 세워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12]

 

David Shepherd, Seeking Sabbath: A Personal Journey (Oxford: Bible Reading Fellowship, 2007). 이 작품은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안식일의 중요성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Joyce Huggett, Finding God in the Fast Lane (Eagle, 1993).

Dallas Willard, The Spirit of the Disciplines: Understanding How God Changes Lives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88). 달라스 윌라드, 《영성 훈련》(은성 역간).

안식일의 참뜻 (막2: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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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앞 글에서 안식일이 예수님의 일상생활에 녹아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 바 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간에 일어난 충돌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바리새인에게 안식일은 애당초 부정적인 용어로 정의되어 있었다. 그들은 “율법에 일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는 것들이(출20:8-11; 신 5:12-15) 어떤 것들이냐?”라고 질문한다.[13] 바리새인에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사소한 행위까지도 일종의 일이었으며, 금지 명령을 무시한 것으로 보았다. 제4계명을 그렇게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토라(율법)에는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행위를 율법에 안 맞는 “하지 못할 일”(막 2:24)로 묘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율법 해석만이 권위 있고 구속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지, 자신들이 틀렸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이 더욱 반발한 것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인데(막 3:1-6),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게 만드는 핵심 사건으로 그려져 있다.
 

   바리새인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안식일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셨다. 일에서 해방되는 안식일은 인류의 선을 위한 선물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더 나아가 안식일은 긍휼과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제공한다. 안식일에 대한 그런 관점은 예언적인 멋진 선례가 있다. 이사야 58장은 안식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의 긍휼 및 사회적 정의와 연결시켜 주며,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사 58:13-14)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긍휼, 공의, 안식일을나란히 놓는 것은 안식일이 긍휼과 공의를 보여 줌으로써 가장 온전하게 예배하는 날로 사용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안식일 그 자체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기억하는 것이다(신 5:15).
 

   첫 안식일 논쟁 기록은 제자들이 곡식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 때문에 촉발되었다(막 2:23-28).[14] 마태는 제자들이 배가 고팠다는 내용을 덧붙이고, 누가는 제자들이 그 이삭을 먹기 전에 손바닥으로 비비는 행위를 묘사하는 반면에, 마가는 그냥 그들이 이삭을 잘랐다고만 서술하는데, 그것은 그 행동의 우발적 성격을 전달해 준다. 제자들은 아마도 별생각 없이 그 곡식을 잘라서 조금씩 먹기 시작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변호는 얼핏 보면 이상해 보이는데, 그것은 안식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막 2:25-26).
 

   학자들은 예수님의 주장이 어떻게 유대인의 성경 해석과 논쟁 원칙을 따르는지에 대해, 심지어는 과연 그것이 그 원칙을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15] 그 핵심은 ‘거룩’의 개념을 인식하는 차이에 있다. 안식일과 성전(그 안의 내용물들과 함께)은 모두 성경에서 “거룩한것”으로 묘사된다.[16] 안식일은 거룩한 시간이요, 성전은 거룩한 공간이지만, 한쪽의 거룩함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교훈들은 다른 쪽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요점은, 성전의 거룩함이 긍휼과 공의의 행동에 참여하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땅의 거룩한 공간들은 ‘세상에 맞선 거룩함’의 피난처가 아니라, 세상을 유지하고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 장소들이다. 하나님을 위해 따로 구별해 둔 장소는 근본적으로 공의와 긍휼의 장소이다. “안식일[그리고 그것이 암시하는 바에 의하면 성전]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이 사건에 대한 마태의 기록에는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 12:7)라는 자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좀 더 유보적으로 다루는 요점을 마태복음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똑같은 요점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사람을 고치셨을때 일어난 두 번째 안식일 논쟁에서 그대로 재연된다(막 3:1-6). 예수님이하신 핵심 질문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는 것이었다. 이 질문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아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안식일이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에 의해 귀하게 여겨진다는 점을 확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일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안식일 원칙은 우리가 일정한 시간을 따로 성별해 그 시간을 업무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서, 그 시간이 예배라는 독특한 성격을 갖게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안식일이 예배드리는 유일한 시간이라거나, 일 그 자체는 예배의 한 형태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안식일의 본질은, 일주일 내내 일할 경우와는 확실히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주고,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면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예배는 그 자체로 사회적인 긍휼, 돌봄, 사랑으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여유를 준다는 사실이다.  안식일에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주중에 우리가 하는 일에 향기와 맛을 더해 준다.

   안식일에 대한 크리스천의 단일한 관점은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 책의 3장 “눅 6:1-11; 13:10-17” 부분에서 다소 다른 관점도 살펴보고 있다.

 

이 점에서는 랍비 전통이 널리 퍼져 있다. m. Sabb 7:2 and m. Besah 5:2를 보라.

Lutz Doering, “Sabbath Laws in the New Testament Gospels,” ed. F. García Martínez and P. J. Tomson, The New Testament and Rabbinic Literature (Leiden/New York: Brill, 2009), 208-220쪽.

Guelich, Mark 1-8:26, 121-130쪽.

출애굽기 31장 14-15절에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라는 말씀을 그대로 따오고, 하나님이 친히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출 20:11)는 것을 인정하면서 안식일은 거룩한 것으로 언급된다. 이 ‘거룩함’이라는 개념은 ‘거룩한 것’으로   해 오던 성전(예를 들면, 시 5:7; 11:4)과 안식일을 연결시키고 있고, 그 핵심엔 당연히 ‘지성소’가 있다.

건축가 예수님 (막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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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고향에서 있었던 한 사건은 그분이 순회 설교자가 되기 전에 하던 일에 관한 내용을 제공해 준다. 이 본문은 고향에 살던 친구들과 지인들이 자신들이 잘 알던 촌뜨기 소년이 그처럼 위대한 설교자와 선지자가 되었다는 걸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을 그린다. 그들이 했던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막 6:2-3)라는 말은 예수님의 직업을 직접 진술한 유일한 단락이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서는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로 불리고, 누가와 요한은 예수님의 직업을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 Tekton[테크톤]’은 ‘건축가’ 또는 ‘온갖 재료를 사용하는 장인’을 가리키는데,[17] 팔레스타인에서는 그 재료가 대개 돌 아니면 벽돌이었다. ‘목수’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영어 초역본이 만들어지던 당시 런던에서 더욱 흔한 건축 재료가 목재였다는 사실이 반영된 때문일 것이다.
 

   어찌 됐든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상당수는 건축 현장을 주제로 한다. 그렇다면 이 비유들에는 예수님의 개인 체험이 얼마나 반영되었을까? 예수님은 울타리를 치거나, 포도즙 틀을 파거나, 포도원에 망대를 세우고, 땅 주인과 소작농 간의 팽팽한 관계를 관찰했을까?(막 12:1-12) 그분의 고객 중 한 사람이 건축을 하다가 중간쯤에 돈이 떨어지는 바람에 예수님께 나머지 돈을 갚지 못한 채 남겨 두었을까?(눅 14:28-30) 요셉이 가르쳐 준 단단한 바위 위에 토대 놓는 법을 기억해 지어서, 그분이 지은 건물은 바람과 홍수를 잘 견딜 수 있었을까?(마 7:24-27) 그분이 혹시 한 번이라도 조수를 고용했다가 주지 않은 임금(마 20:1-16)과 사회 서열 조직(막 9:33-37)에 대한 불평에 직면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분은 주인을 속이자는 꼼수에 동참하라고 요구하는 관리자의 지시를 받아 본 적이 있었을까?(눅 16:1-13) 한마디로,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지혜 가운데 얼마만큼이 1세기의 경제 시스템에서 직업인으로서 일했던 자기 경험에서 나온 것일까? 경험에서 얻은 게 전혀 없다 하더라도, 건축가로서 예수님이 경험하셨던 것을 기억하는 건 우리가 그분의 비유를 보다 구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준다.

Ken M. Campbell, “What was Jesus’ Occupation?”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48/3 (September 2005), 501-519쪽.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일에 관한 비유들 (막4:26-29과 13: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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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는 다른 복음서에는 안 나오는 두 가지 비유를 수록한다. 그 두 가지 다 일에 대한 것이고, 아주 짧다. 이 가운데 마가복음 4장 26-29절에 나오는 첫 번째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씨에서 자라나는 곡식에 견준다. 이 비유는 곧바로 뒤에 따라 나오는 겨자씨 비유(막 4:30-32),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막 4:1-8)와 유사점이 있다. 비록 이 비유가 농사일을 배경으로하긴 하지만, 농부의 역할은 의도적으로 최소화되어 있다. 농부는 곡식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모른다’(막 4:27). 대신 그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으로 얼마나 커지는지에 맞춰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곡식을 가꾸기 위해서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막 4:27) 작물을 가꾸며 낫을 들고 가서(막 4:29) 곡식을 거둬야 한다. 하나님의 기적은 우직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다.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두 번째 비유는 13장 32-37절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대비해 깨어 있어야 함을 비유로 설명하신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막13:34)라고 말씀하신다. 주인이 멀리 가 있는 동안, 각각의 종은 자신이 맡은 일을 계속해야 할 책임을 진다. 하나님 나라는 먼 나라로 가면서 마지막엔 그 종들을 자신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르겠다고 약속한 그 주인과 같지 않다. 그런 게 아니다. 그 주인은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 종들에게 자신이 마지막에 돌아올 때 까지 집을 번창하게 하고 유지하는 일을 맡긴 것이다.

    두 비유 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부지런한 일꾼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비유는 논의하지 않고 다만 이 책의 1장과 3장에서 폭넓게 그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언급으로 대신하겠다.

‘부’의 종으로 사는가 (막 10: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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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을 던진 한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만남은 마가복음에서 경제활동을 직접 다룬 몇 안 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다. 그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은 십계명에서 가장 사회적 경향이 짙은 여섯 가지 계명을 열거하신다. 흥미롭게도 “탐내지 말라”(출20:17; 신 5:21)라는 계명이 “속여 빼앗지 말라”라는 명확한 상업적 부정행위의 형태로 제시된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이것[모든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막 10:20)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있는 청년의 재물을 희생하고 갈릴리에서 온 방랑자를 따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하늘의 재물이 그에게 아직 부족하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 부자 청년이 넘을 수 없는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부자 청년은 엄청나게 많은 그의 소유가 제공하는 안락함과 안정감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가복음 10장 22절은 그 상황의 감정적 차원을 강조한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주는 진리에 열려 있기는 했지만, 그렇게 살아갈 능력은 없었기에 정서적인 불편을 느꼈던 것이다. 부와 지위에 대한 그의 정서적 애착이 예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의지를 눌러 버린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일에 적용하는 건, 우리 자신의 본능과 가치관과 관련해 진정한 민감함과 정직함이 요구된다. 부는 때로 우리가 한 일이든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든 일의 결과지만, 일 자체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 정서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그 부자 청년이 그랬던 것처럼 상당한 지위가 있다면, 우리의 경력 관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거나, 선을 행하거나, 가족을 위해서나 시민으로서 또 영성생활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예상치 않은 때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 마음을 열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도 있다.
 

   우리의 부와 특권이 우리를 거만하게 만들거나, 우리 주변 사람들을 향해 무감각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어려움은 물론 부와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만남은, 만일 당신이 이미 조직이나 사회의 상층부에 있다면, 당신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을 먹기가 어렵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서구에 살면서 소박한 생계 수단과 지위를 가진 우리 대부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전에, 혹시 우리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상대적인 부와 지위 때문에 그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냉철하게 물어보자.
 

   이 에피소드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결정적인 측면이 남아 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막 10:21). 예수님의 목적은 그 청년에게 수치를 주거나 말로 위협하려던 게 아니라, 그를 사랑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그 청년의 유익을 위해서, 제일 먼저 그의 소유를 버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부와 일이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끊어지게 하고,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게 할 때, 정작 고난을 겪는 사람은 바로 우리다. 해결책은 더 선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삶에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안전을 위해 우리의 지위나 부를 안간힘을 다해 꼭 붙들 필요가 없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비유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이 책 3장의 “눅 18:18-30” 부분을 보라.

‘지위’의 종으로 사는가 (막10:13-1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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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가 이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는 독특한 점이 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어린아이들 이야기와 나란히 놓여 있으며, 그런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받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그다음 진술이다(막 10:13-16). 이 두 단락을 연결해 주는 것은 아마도 안전이나 하나님보다 재정적인 자원에 더 의존하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도리어 그 연결점은 지위의 문제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어린아이들은 아무런 지위가 없었거나, 기껏해야 최하층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18]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지위를 말해 주는 그 어떤 재산도 소유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아이들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 부자 청년은 그 지위의 상징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재산도 엄청났다(막10:22). 누가복음 18장 18절은 그가 “관리”였다고 분명하게 밝힌다. 그 부자 청년이 천국을 놓친 것은, 그가 ‘부’의 종이었던 만큼 ‘지위’의 종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직장에서 지위와 부는 같이 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기 일을 통해 부와 지위가 동시에 늘어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이중 경고다. 설령 부는 경건하게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지위의 종에서 탈출하기는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다. 최근에 한 그룹의 억만장자들이 자신들의 재산 중 최소한 절반은 기부하겠다고 맹세해 대중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19] 물론 그들의 자선은 놀라운 것이며, 그렇게 맹세한 사람들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비난하고 싶진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 정도로 기부의 가치를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절반 이상을 기부하진 않는 걸까? 그들이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고 남은 돈도 여전히 아주 안락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것보다는 훨씬 더 많다. 기부자들이 너무도 명백하게 중요한 목적을 위해 전 재산을 바치는 데, ‘억만장자라는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장애물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소박한 삶을 사는 직장인들은 그 면에서 다를까? 지위를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더욱더 많이 바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지위가 부와 별 상관이 없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학자, 정치가, 목회자, 예술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반드시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닐 수 있지만, 나름 훌륭한 지위는 얻을 수 있다. 지위는 어떤 특정 대학에서 일하거나 평판이 자자한 어떤 인맥 안에 있다는 것에서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지위는, 우리가 인기 없는 입장을 취하거나 결실이 더 많은 일자리로 이직함으로써 우리의 자리가 위태로워지는 걸 막아 주는 또 하나의 종살이가 아닐까?
 

   자신과 여러모로 다른 누군가를 섬기고, 불의를 줄여 나가며, 도덕적 청렴함을 지키고,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을 보기 위해, (아주 약간일지라도) 일과 관련된 자기 지위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게 사실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예수님은 이런 모든 지위를 가지고 계셨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셨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지위를 제쳐 놓기 위해, ‘아버지’께 날마다 기도하시고, 아무런 평판도 없는 사람들 속으로 자신을 계속 밀어 넣으시며, 그렇게 열심히 일하신 이유일지 모른다.

 

Malina, Rohrbaugh, A Social-Scientific Commentary on the Synoptic Gospels, 238쪽. “어린아이들은 지역 사회나 가족 안에서 지위가 거의 없었다. 아주 어린아이는 노예나 다를 바 없었고 자란 이후에야 가족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어린아이/어린아이들’이라는 용어는 아주 심한 욕으로도 쓰였다”(마 11:16-17 참조).

Stephanie Strom, “Pledge to Give Away Half Gains Billionaire Adherents,” New York Times, August 4, 2010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복  (막10: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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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막 10:23-25)에는 뜻밖의 만남(encounter)이 중요함을 상세히 다룬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부(富)가 얼마나 까다로운 걸림돌인지 강조하신다. 부자 청년의 반응은 부자들이 자신의 부와 그 부에 따라오는 지위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 주는데, 의미심장한 것은 부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제자들이 도리어 어리둥절해한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0장 24절에서 예수님이 그 진술을 되풀이하실 때제자들을 “얘들아”(children)라고 부르시면서, 제자들이 지위의 부담을 지고 있지 않음을 말씀하신다. 이미 그분을 따라나섰기에 제자들은 부요함에서 오는 부담에서 벗어나 있었다.
 

   예수님이 하신 낙타와 바늘귀 비유(막 10:25)는 아마도 예루살렘의 작은 문들[20]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다만 낙타를 뜻하는 헬라어 ‘Kamelos[카멜로스]’와 굵은 밧줄을 나타내는 헬라어 ‘Kamilos[카밀로스]’ 사이의 유사성을 이용한 언어유희적인 표현일 수 있다. 의도성이 담긴 우스꽝스런 이미지는 부자가 하늘의 도움 없이 구원받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왜 그럴까?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막 10:26). 그런 하늘의 도움에 대한 약속이 마가복음 10장 27절에 밝혀져 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것은 그 단락이 (바라건대 독자인 우리도) 부자들을 향해 단순히 냉소해 버리지 않도록 방지한다.
 

   이에 베드로는 제자들의 태도와 자기 부인에 대한 과거를 변호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걸 버렸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런 희생을 한 모든 사람을 기다리는 하늘의 상급을 확증해 주신다. 되풀이 하거니와, 그들이 버린 것(“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만이 아니라, 지위에 대한 의미도 내포할 것이다. 실제로 마가복음 10장 31절은 이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 지위에 대해 힘주어 강조한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시점 전까지의 설명은 물건들 그 자체에 대한, 또는 그런 것이 제공해 주는 지위에 대한 사랑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말씀은 확고하게 지위 문제를 강조한다.
 

   얼마 안 있어서 예수님은 이것을 분명한 직장 용어로써 선언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 결국 종은 지위 없이 그냥 일하는 사람이며, 심지어는 일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의 능력을 가질 지위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갖는 바른 지위는 어린이나 종처럼 전혀 지위가 없는 처지다. 혹 우리가 고위 직책이나 권세의 지위를 가졌다 해도, 우리는 그런 직책과 권세를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변할 뿐, 그분께만 속한 지위를 취하지 않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하다.

 

이것은 널리 알려져 있던 크리스천 분파들 사이에서 회자된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그가 쓴 Daily Study Bible Commentary에서 이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William Barclay, The Gospel of Matthew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1), 253쪽을 보라. 이 신화의 기원이 어떤 것들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런 문이 예루살렘이나 다른 어느 곳에서 발견된 적은 아직까지 한 번도 없다.

교회를 내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위험 (막1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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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성전에서 좌판을 뒤집어엎고, 환전상들을 쫓아내신 사건은 상업에 대한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이 행동에 담긴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개별 복음서의 설명으로 보건, 역사적 예수라는 전통으로 보건, 논란이 있다.[21] 분명히 예수님은 제사에 쓰일 정결한 짐승과 새들을 팔고 있었든지, 아니면 성전세를 내기 위해 적정한 비율로 동전을 바꾸고 있었든지 간에, 성전 뜰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과격하게 쫓아내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거의 강도나 다름없는 환율로 사람들을 착취하던, 성전세를 내러 온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던 사람들에게 항거한 것이었다고 풀이한다.[22] 한편에서는 그것이 매년 내는 반 세겔 성전세를 거부한 것이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23] 또 다가오는 성전의 파괴에 대한 그림자로서, 성전에서의 절차를 종료시키는 예언적인 표적의 행위라는 견해도 있다.[24]
 

   우리가 그 성전을 오늘날의 환경하에 놓인 교회라고 가정해 본다면, 교회와 아무 연관 없는 일에 대해서도 다루는 이 책의 범주를 대부분 벗어난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 사건이 교회를 자기의 이익을 얻는 안전한 일터로 사용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미한 빛을 던져 준다는 걸 주목해 볼 수 있다.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사업상의 직책을 얻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거나 교회에 나오는 것은, 공동체에 상업적으로 손해를 끼치고 개개인에게도 영적으로 해롭다. 교회와 그 구성원들이 교회 안에서 더 나은 직장인(일하는 사람)이 되도록 서로 돕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만약 교회가 상업적 도구가 된다면, 교회의 정직함은 손상되고 교회가 하는 증언이 흐려질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N. T.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London: SPCK, 1996), 413-428쪽. 그리고 좀 더 최근에는 J. Klawans, Purity, Sacrifice and the Temple: Symbolism and Supersessionism in the Study of Ancient Judaism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213-245쪽.

Craig A. Evans, “Jesus’ Action in the Temple,” C. A. Evans, B. Chilton, eds., Jesus in
Context: Temple, Purity and Restoration (Leiden: Brill, 1997), 395-440쪽, 특히 419-428쪽에서 에반스는 당시 제사장들이 광범위하게 탐욕스럽고 부패한 상태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다양한 종류의 증거를 조사해 제시한다. 에반스의 주장은 E. P. Sanders, Jesus and Judaism (Philadelphia: Fortress, 1985), 61-76쪽 내용을 반박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에반스의 주장이 Klawans, Purity, Sacrifice and the Temple, 225-229쪽에서 도전을 받는다.

R. J. Bauckham, “Jesus’ Demonstration the Temple,” B. Lindars, ed., Law and Religion: Essays on the Place of the Law in Israel and Early Christianity (Cambridge: James Clarke, 1988), 72-89쪽, 특히 73-74쪽.

Wright,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413-428쪽; Sander, Jesus and Judaism, 61-76쪽.

돈도 세상 통치자도 하나님께 속했다 (막1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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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납세 문제는 앞서 세리였던 레위를 부르셨던 장면에서 이미 간접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막 2:13-17). 논리를 따져 봤을 때 그 본문의 의미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번 장에서는 그 문제를 좀 더 직접 다룬다. 여기서 묘사된 사건 전체가 하나의 함정으로 제시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만약 예수님이 로마의 과세를 정당한 것으로 확증한다면, 그분은 자기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과세를 거부한다면, 그분은 반역죄로 몰릴 것이다. 세금 사건이 바로 그 같이 특정한 상황에 기초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단락을 이런 상황과 닮지 않은 오늘날 상황에 적용하려면 신중을 기해야 한다.
 

   예수님은 그 함정을 형상과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빠져나가신다. 흔한 데나리온(기본적으로 하루치 일당) 동전을 자세히 관찰하신 예수님은 그 동전에 누구의 “형상”(또는 “모습”)이 새겨져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 질문의 요지는 어쩌면 대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창세기 1장 26-27절(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을 넌지시 암시할 수도 있다. 동전엔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황제의 것(돈)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우리 자신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지녔다는 핵심적인 요소는 진술되어 있지 않지만, 그 주장하는 논리 안에 어우러진 대구법에 의해 분명히 암시되어있다.


   그런 논리를 펴심으로써 예수님은 납세 문제를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더 큰 요구 아래에 종속시키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납세의 타당성을 부인하신 게 아니며, 심지어 잠재적으로 남용될 가능성이 있는 로마제국의 시스템도 무너뜨리려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돈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으신다. 만약 돈이 가이사에게 속해 있다 치더라도 가이사 역시 하나님의 권세 아래 속해 있기 때문에(롬13:1-7; 벧전 2:13-14) 돈은 더욱 하나님께 속한다. 이 단락은 흔히 말하듯 사업은 사업이고, 종교는 종교일 뿐이라는 잘못된 주장의 근거가 아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성과 속을 구분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는 일엔 전혀 신경 쓰시지 않는 것처럼 마음대로 행동하면서 예수님을 따를 순 없다. 예수님은 당신이 직장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면허를 선언하시는 게 아니라,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평안을 선언하신다. 당신이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속일지 말지는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으므로(막 10:19), 속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세금을 낼지 말지는 국민의 한 사람인 당신이 조정할 수 없는 사안이기에(막 12:17),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 예수님은 만약 당신이 당신의 세금을 통제(혹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경우, 예를 들어 당신이 로마 원로원의 위원이라든가, 또는 21세기의 민주주의 유권자라 할 때 당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게 아니다.

 

   이 사건은 www.theologyofwork.org의 '누가복음과 일'에 나오는 “눅20:20-26”부분을 보라. 

우리 일, 지상대계명에 순종할 기회 (막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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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성경을 탁월하게 해석하시는 것을 지켜본 한 서기관이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던 문제를 여쭈었다. “모든 계명 중에서 첫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당시 청중이 이미 잘 알고 있을 두 계명으로 대답하신다. 첫째는 유대 민족에게 주신 선언으로 신명기 6장 5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어서 예수님은 “둘째는 이것이니” 라고 바로 덧붙이신다.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다.(이 두 계명의 관계를 더 살피고 싶다면 이 책 1장 “마 22:34-40”과 3장 “눅 10:25-37” 부분을 보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하게 될 것이다. ( 이 시리즈 1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모세오경 · 역사서》 4장의 “레 19:17-18” 부분을 보라.)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은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알려 준다. 하나님이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집중하기 원하시는 과업을 둘만 꼽으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위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네 자신과 같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하기를 바라심도 드러내셨다.
 

   감사하게도, 일은 우리가 지상대계명에 응답하는 주요한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가 많다. 그리스도인의 많은 직업은 다른 사람의 기본 필요를 채워 줄 기회가 된다. 의료서비스를 예로 들어 보자. 처방전을 써 주는 의사, 처방전대로 약을 조제하는 약사, 약국과 편의점에 약품을 비치하는 사람 모두가 이웃에게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전달하는 일에 각기 역할을 담당한다. 의약품 공급망의 위아래를 훑어보면 약이나 치료법의 효과를 시험하는 과학자, 의료품이 운송되는 도로를 유지하는 건설노동자, 건강보험 청구 내용을 처리하는 사무직원, 이 모두가 이웃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기본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이웃 사랑에 참여한다.
 

   물론 인간이 필요한 것은 의료서비스외에도 많다. 음식, 거처, 웃음도 있어야 한다. 자신보다 큰 의미와 이어지는 것도 필요하다. 그래서 농부와 식당 종업원, 주택건설업자, 보험설계사, 희극 배우와 아이들, 철학자와 목회자 모두가 자기 일을 매일 잘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 교차로를 쌩쌩 달리는 차량의 브레이크를 최근에 손본 정비공의 사랑의 수고는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의 목숨을 좌우한다.
 

   일을 통해 우리는 자신과 가족의 재정적 필요를 채운다. 이것도 일로써 지상대계명을 성취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의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사랑하는 것인데, 이것은 로렌스 수사 같은 지혜로운 이들의 삶으로 널리 알려진 방식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 여의치 않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함으로써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큰 구원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시장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길 원하시는지 보여 준다. 많은 산업과 일터에는 구원받고 회복되어야 할 문제들이 있다. 크리스천 일꾼은 용서와 긍휼과 정직의 본을 보임으로써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건, 우리는 지상대계명을 이루는 두 부분의 순서를 꼭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고, 이웃 사랑은 두 번째다. 도로시 세이어즈가 말한 대로, “두 번째 계명은 첫 번째 계명에 의존한다. 첫 번째 계명이 없는 두 번째 계명은 망상이고 덫이다. …… 이웃을 첫째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보다 인간을 우선시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우리가 인류를 숭배하고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 삼기 시작한 이래 죽 해오던 일이다. ……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하는 일에는 역설이 있다. 공동체를 섬기는 것을 직접적인 목표로 삼으면 일이 그릇되고 만다. 공동체를 섬길 유일한 길은 공동체는 잊고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25]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이것은 우리는 진정한 일,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을 감당함으로써 이웃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그 일은 우리의 이웃인 고객, 손님, 동료, 공급자가 우리에게 원하는 바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직장 동료는 우리가 그들의 일을 대신해 줌으로써 그들을 섬기길 바라는 반면, 하나님은 그들이 그 일을 스스로 감당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그들을 섬기기를 원하실 수도 있다. 고객은 최저가에 제품을 공급받기 원하는 반면, 하나님은 좀 더 높은 가격의 물건이 고객은 물론이고 환경과 사회에도 더 나은 이유를 고객에게 알려 주기를 원하실 수도 있다. 지상대계명의 전반부는,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굳건한 토대에 우리 발을 딛게 한다. 우리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써 다른 이를 위해 일해야 한다.
 

   서기관은 자신의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신 것을 듣고 예수님의 우선순위가 옳다고 동의한다. 서기관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유대교 율법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계명들보다 참으로 더 중요하다고 공감한다. 예수님은 그 서기관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고 응답하신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지상대계명의 기준에 맞추어 행동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자기 몸을 돌보듯 다른 이를 돌볼 때, 하나님 나라가 우리 일터에 임한다.

Dorothy L. Sayers, Letters to a Diminished Church: Passionate Arguments for the Relevance of Christian Doctrine (Nashville: Thomas Nelson, 2004), 142쪽.

자신의 지위를 다 버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분 (막14:3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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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위와 은혜라는 주제는 예수님이 재판을 받으시고 십자가 처형을 받으시면서 다시 앞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돌아간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섬김의 길은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모든 지위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3-34).
 

   사람들은 ‘올바르게’ 예수님이 메시아이시며, 왕이라고 외쳤다(막 11:8-11). 그러나 그분은 자신의 이런 지위를 옆으로 제쳐 두셨고, 유대 공회가 제기한 거짓 참소와(막 14:53-65), 로마 정부의 부당한 재판(막 15:1-15), 자신이 구원하러 온 인류의 손으로 죽임당하는 것에(막 15:21-41) 순복하셨다. 그분을 줄곧 따라다니며 그분의 사역을 지원한 몇몇 여성들을 제외한 가장 가까운 제자들마저 그분을 배신하고(막 14:43-49), 부인하며(막 14:66-72), 버렸다(막 14:50-52). 그분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절대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를 취하셨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셨다.
 

   쓰라린 삶의 끝 무렵에 예수님은 하나님께도 버림받았다고 느끼셨다 (막 15:34). 모든 복음서 가운데 오로지 마가복음만 시편 22편 1절에 나오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을 기록한다(막 15:34). 십자가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일은 세상의 모든 버림을 다 껴안는 것이었다. 오해받고, 조롱받고, 버림받는 것이 그분에겐 정말 죽음만큼이나 힘드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며칠있으면 자신이 부활할 것을 아셨지만, 오해와 조롱과 버림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친구, 가족, 사회, 심지어는 하나님께도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직장에서 경험하는 버려진 느낌은 특히 강렬하게 다가온다. 스터즈 터클(Studs Terkel)이 쓴 《일》(Working , 이매진 역간)이라는 책은 이런 현실을 잊히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묘사했다. 우리는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하거나, 과중한 노동과 위험으로 짓이겨지거나, 업무 수행 능력이 모자라 걱정한다. 해고정리의 전망 때문에 겁에 질리고, 적절치 못한 임금과 불충분한 복리후생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터클의 책에서 리셉셔니스트로 나오는 샤론 앳킨스(Sharon Atkins)의 말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대변한다. “아침에도 난 소리쳤어.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다고. 금요일은 끔찍해. 벌써 월요일이 눈에 아른거리기 때문이지. 다시 또 5일이 내 앞에 버티고 있어. 절대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기분, 어떡하지? 도대체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거지?”[26]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일과 삶의 가장 극심한 충격도 이기게 해 준다. 예수님이 즉각 순종하신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인정했던 것이다(막 15:39). 예수님이 살아나셨을 때 은혜는 사망 그 자체를 이긴다. 새벽에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그가 살아나셨느니라’(막 16:6)라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이 장의 맨 앞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갑작스런 결말에 대해 언급했다. 이것은 종교적 연극 경연을 위한 매력적이고 보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거칠고 해로운 티끌과 더러운 때로 뒤범벅되어 누더기처럼 다 해진 우리의 삶과 일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매우 고통스러운 이야기다.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텅 빈 무덤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막 10:31)라는 사실에 대한 (우리 대부분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보다 더) 엄청난 증거다. 이 놀라운 은혜는, 우리가 하는 일이 ‘현세에서 백 배’나 생산물을 내게 하고, 우리를 ‘다가올 영원한 삶’으로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막 10:30). 그러니 그들이 ‘몹시 놀라 떨며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막 16:8)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Studs Terkel, Working (New York: The New Press, 1972), 31쪽. 스터즈 터클, 《일》(이매진 역간).

결론 (마가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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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은 인간의 일에 대한 지시 매뉴얼로 구성되진 않았지만,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일이 보인다. 우리는 지금까지 삶과 노동이라는 직물에서 가장 중요한 실들을 몇 가닥 뽑아내, 그것들을 21세기 일에 적용해 왔다. 일의 종류도 많았고, 사람들이 일하는 상황도 다양했다. 전체를 하나로 묶는 주제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모두 성장하고, 회복하며,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장엄한 틀 안에서, 마가의 이야기 중 상당수가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마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개인의 정체성과, 공동체 내의 관계가 변혁하는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보여 준다. 고대 세계에서는 지위와 정체성의 문제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공식적인 면에서 부와 직업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역학은 급격하게 달라지진 않았다. 지위의 문제는 여전히 일에 종사하는 우리의 선택, 결정, 목표에 영향을 미친다. 역할, 인지도, 인맥, 대인관계 같은 모든것이 다 우리 직업에 고려되는 요소들이며,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결정이나 더 나쁜 결정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누구나 재산, 부 또는 잠재적 영향력이라는 수단으로, 사회 속에서 우리 자리를 확고히 잡고자 하는 열망에 말려들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직업을 결정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모든 요소는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에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이 땅의 지위를 탐하는 욕심을 포기할 준비를 하라는 예수님의 도전은 근본적인 중요성이 있다. 열두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자신들의 직업을 완전히 떠나는 특별한 선택을 해야 할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그리 많지 않겠지만, 하나님 나라의 요구에 세속적인 욕심을 굴복시키라는 도전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다. 자기 부인은 예수님 따르는 삶의 핵심이다. 여기에는 우리 정체성이 타락한 세상 속에서 갖는 우리의 지위에 의해 결정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포함된다.
 

   이런 과격한 자기 부인은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삶과 일을 변혁시키는 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섬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좀처럼 즉각적인 변혁을 통해 오지 않는다. 제자들의 이야기는 실패와 회복의 이야기며, 끝에 가서야 일어나는 변화의 이야기다.
 

   제자들처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 섬김은, 여전히 죄와 실패로 얼룩져 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그 과정에서 상당히 회개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영원한 유산을 남기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통해 경계가 확장되고 천국 시민이라는 우리의 신분으로 그 생명력이 더욱 풍성해진 왕국이라는 유산 말이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가로막는 것들을 포기하기란 참 어렵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어리석음을 섬기는 것보다 우리가 하는 일로 그분을 섬기는 편이 분명 훨씬 큰 상을 가져다준다(막 10:29-31).

마가복음의 핵심 구절들과 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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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16-20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첫 제자들은 일을 하고 있다가 부름을 받았다. 그들의 일과의 관계는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면서 재조정되었다.

막1: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은 낮 시간(일하는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교제하시기 위한 시간으로 틀을 짜놓고 계셨다.

막2:3,5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일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인도되어 왔다. 이 이야기는 그냥 치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의 믿음과 상호협력의 장에 대한 것이다.

막2:14-17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레위가 제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기 집과 부를 내놓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해주었다.

막2: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2:23-3:6의 문맥을 보라)

예수님에 의해 안식일 리듬이 아주 소중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거기서 우리가 뭔가 유익을 얻게 하려는 것이지 그것에 얽매이라는 것이 아니다.

막3:16-19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12명이 임명되었다. 목록에 별명이 나오는 것은 그 그룹 내 사람들의 개성의 중요성에 대한 힌트를 준다. 유다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주장을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자신을 맞추지 않는다는 걸 상기시켜준다. 크리스천 동료들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볼 때, 이 두 요점은 모두 다 연관이 있다.

막4:35-41       (배 고물에서 주무시던 예수님을 제자들이 깨운 후에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를 잠잠케 하신다.)

막6:45-52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다.)

막8:13-21       (예수님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는데 제자들이 빵 가져오는 걸 잊었다.)

서로 평행하는 배 위의 세 장면은 제자들의 이해력 부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제자들이 실패로부터 강해져가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주려는 마가의 의도의 일부다.

막10:21-22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부자 청년은 재산과 그것으로 대변되는 지위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가 없었다. 지위는 이 이야기에서 사치 못지않게 중요하다.

막11:15-17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은 성전에서의 경제 활동을 다 깨부수셨는데, 아마도 거기서 목격한 특정한 행위들이 불공정하고 남용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12:15-17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은 납세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해 납세의 타당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권위를 강조하심으로 대답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