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에 대한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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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개요”에 해당하는 글은 일의 신학(Theology of Work)의 주된 주제를 큰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만약 특정의 주제를 더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목차를 통해 원하는 주제로 바로 이동할 수 있다. 개요 항목 대부분은 웹사이트에서 항목별로 정리된 짧은 소개를 통해 접할 수 있다.

 

 

   금융은 사회를 번창하게 하고 이웃을 섬기는 데 일조하는 걸까? 영국 금융서비스감독원(Financial Services Administration)의 회장은 금융계의 상당 부분이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 최근 듀크 대학을 졸업한 로라 뉴랜드(Laura Newland)는 대학 졸업생들이 사회에 이로운 딴 일을 할 수 있는데도 금융 분야의 일자리를 찾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2] 젊은 세대는 금융을 배우거나 금융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과연 명예로운 일인지를 궁금해 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특히 성경)과 금융 관련 문헌 및 관행을 통해 금융의 가치를 평가해볼 것이다. 결론은 금융이 사회적으로 쓸모없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성경적, 신학적으로 살펴본 결과 하나님께서는 금융의 기초를 쌓으셨고, 그것을 통해 청지기의 직분을 다하고, 정의와 사랑 같은 사회의 선을 위해 금융을 사용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심을 발견하였다.

 

   청지기 사명, 정의, 그리고 사랑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곤 하므로, 이들이 지닌 의미를 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청지기의 사명은 마치 정원을 도시로 일구어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창조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창조물을 관리해야 하며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져야 한다. 정의란 인간이 지닌 타고난 권리대로 사람들을 마땅히 존중하는 것이며, 이러한 권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 자체로 상대를 돌보고 이들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에 따라 존중하는 것이다. 이러한 틀 안에서의 금융은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회복과 변화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제시한다. 죄로 인한 영향이 금융 분야에 구석구석 퍼져 있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우선 금융이 무엇인지, 금융의 기초를 이루는 요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기초를 바탕으로 금융제도들을 만들도록 하셨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런 다음 인류의 타락이 금융 분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특히 시중금리가 금융이 타락한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의 여부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그런 다음 금융 전문가, 채무자, 채권자들이 적용해볼 만한 내용들과 함께, 성경적 주제들을 통해서 회복된 금융 분야의 비전을 이끌어낼 것이다.

 

Adair Turner, “Speech by Adair Turner, The City Banquet, The Mansion House, London” (September 22 2009), accessed at http://www.fsa.gov.uk/library/communication/speeches/2009/0922_at.shtml. See also Bronwen Maddox, Adair Turner: “The Interview”, Prospect (December 14, 2011), accessed at http://www.prospectmagazine.co.uk/economics/adair-turner-the-interview/

Laura Newland, “How Elite Colleges Still Feed Wall St.’s Recruiting Machine”, NY Times DealBook (April 30, 2012).

금융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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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이란 시간을 기준으로 자원을 배분하거나 교환하는 인간의 활동을 의미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독립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자원의 할당보다는, 대출을 받거나 해주며 투자를 하는 등의 외부적 거래를 주로 다룰 것이다. 여기서는 "금융"이라는 단어를 당사자 간의 금융 거래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할 것이다. 가정이나 기관 내에서의 자금 업무 또한 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원 할당 활동이며, 여러 면에서 외부 거래와 동일한 원칙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예산 책정이나 프로젝트 계획과 같은 내부 재무활동은 특정 상황이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금융은 현재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소유한 사람들과, 어떤 시점에 이들로부터 그 자원의 일부를 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가 이루어질 때 발생한다. 채무자는 당장 해당 자원을 얻는 대신 이자와 같은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있는 것이며, 채권자는 당장의 해당 자원을 포기하는 대신 미래의 이윤이나 수익을 바라보는 것이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보았을 때, 채권자는 채무자가 필요한 시점에 (현재)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채무자를 돕는 것이고, 채무자는 향후 채권자의 자원을 증대시킴으로써 그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빌려진 자원이 무사히 갚아진다면, 궁극적으로 채무자는 자신과 채권자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자원을 사용한 것이 되는 것이다.

 

   좀 더 형식적으로 정의하면, 금융이란 시간을 기준으로 자원을 할당하고 교환하는 인간의 활동이다. 편의상 이 글에서는 앞으로 빚, 주식, 파생상품 등 자원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형태를 "대출"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것이다. 채권자는 은행 예금을 보유한 일반 가정일 수도 있고, 주식 투자자, 사모 주식 투자자, 혹은 연금을 적립하고 있는 직장인일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채무자 역시 은행 대출을 받은 일반 가정일 수도 있고, 주식을 파는 기업, 주택 구매를 위해 대출을 받는 가정, 혹은 공개시장에 채권을 발행하는 정부 독립체 등이 될 수도 있다. 이 글에서 다뤄지는 거래는 일반적으로 자발적이며 서로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시장중심적인 거래를 의미한다.[1] 이 글에서는 비非시장(non-market) 형태의 자원 할당에 대한 신학 체계는 세우지 않을 것이다. 말하자면, 흔히 "보조금"이라고 불리는 비자발적이거나 정부에 의한 자원 배분 같은 건 다루지 않을 거란 얘기다.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금융"이라는 단어가 특정 시기에 자원을 교환하면서 미래에 일어날 역(reverse)자원 교환을 기대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노동 시장이나 상품과 서비스 시장 등 "거래"라고 불릴 만한 주제도 다루지 않을 것이다.

 

   가장 오래 됐을법한 예는, 사냥이 끝난 후 사냥감의 일부와 함께 도구를 되돌려 받는 조건으로 씨족 구성원에게 사냥 도구를 일정 기간 동안 빌려주는 관행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예는 농사가 끝났을 때 빌렸던 씨앗보다 조금 더 많이 갚는다는 조건으로 이웃에게 씨앗을 빌리는 것이다. 그 후, 통화가 발달함에 따라 갈수록 복잡해지는 이런 식의 거래가 좀 더 간단하게 처리되기 시작했다. 고기를 많이 잡은 어부는 고기를 판 후에 돈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농부는 그러한 돈을 빌려서 씨앗을 사고 농작물을 재배한 뒤, 곡식을 일부 팔아 어부에게 빌린 원금뿐만 아니라 이자까지 계산해서 상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어부는 농부를 돕게 되는 것이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 기술이나 능력을 벗어난 영역에서 서로 혜택을 주고받는다. 금융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지구에 내려주신 자원을 좀 더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인간이 자신들의 창의력과 사회적 협력을 적용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수 세기 동안 여러 종류의 제도들이 생겨나 이렇게 자원을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를 매우 용이하게 만들어주었다. 은행, 투자은행, 상호기금, 소액금융기관, 신용조합 및 다른 여러 기관들은 돈을 빌릴 사람과 돈을 빌려줄 사람을 연결해주었으며, 이들의 필요에 맞게 자원을 교환 및 재 교환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상호기금은 개인으로 투자하기에는 너무 비싸고 복잡한 일련의 주식과 채권에 사람들이 적당한 금액을 투자할 수 있도록 해준다. 금융에서 사용되는 계약이나 수단에는 특정 채무자와 채권자의 필요에 맞게 만들어진 부채, 주식, 그리고 여러 복합 상품이나 파생상품 등이 포함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에게 어느 한도의 자산 소유권과 자원에 대한 책임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인 거래는 규범적이라고 본다. 그렇더라도 강압적인 거래—예를 들면 성경이 명령하고 있거나 적절한 절차에 따라 집행된 법—도 또한 합법적이다. 사유재산권이 명백하고 타당할지라도 인간의 필요 아래에 둔다는 Wright의 주장에 동의한다. Christopher J.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Intervarsity Press, 2004): 312-314쪽. 비슷하게, Lott은 카톨릭적 관점에서 재산은 신성한 선물이고 사유재산체계는 인간의 자유를 위해 허락되지만, 그 권리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와 사람들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의도하셨다는  중요한 원칙을 동일하게 존중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Micah Lott, “All Things Come From Thee: Persons, Property, and the Gifts of Creation,” Cardus (October 3, 2011).

금융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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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특정의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일의 세 가지 기본 목적은 1)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 2)청지기 사명을 다하는 것, 그리고 3)정의와 사랑을 도모하는 것에 있다. 이에 대해 곧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먼저 금융이 인간 세상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죄의 깊고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러 상황에서의 탐욕과 부정은 금융을 타락시키며, 이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청지기 사명, 정의,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해친다. 죄의 영향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것이다. 우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가지셨던 본래의 목적에 따라 금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무엇이 가능할 것인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금융은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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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적 서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창조하셨다(골1:16, 계4:11). 다른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금융의 토대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성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계절, 해, 일생 등의 시간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풍부한 사회 교류가 이뤄지는 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번창하고자 하는 갈망과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를 서로서로 긴밀한 관계로 맺어두셨다. 시간에 따라 자원을 공유하는 것은 그러한 사회교류의 한 예이다. 사람들이 사회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특정 기간 동안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풍부한 창조물을 취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창조성과 사랑을 통해 그 창조물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마치 위대한 음악이나 맛있는 음식처럼, 금융은 하나님의 창조 속 그분의 전능하심과 창조력을 나타냄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금융과 관련된 8개의 구체적인 토대를 마련하셨다는 것을 살펴보는 다음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선한 청지기가 되라는 창조 명령을 이행할 수 있도록 돕는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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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지기 사명은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다스리며)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창1:28~30, 2:15).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세상의 모습은 동식물이 가득하고 하나님과 완벽한 교감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동산의 모습으로 창세기에서 그려진다. 그 동산은 훌륭했지만 영원히 변치 않도록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창조가 실현되는 모습이 예견되는 장면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로 충만한 세계가 그려진다. 이들은 더 이상 어느 동산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초석, 성곽, 문, 나무가 심어진 거리, 철, 금, 가축과 상인들의 배가 있는 도시에서 산다. 이렇게 동산에서 사람과 문화적 요소가 가득한 도시로 창조물을 발전시키는 것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경작하고,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의 결말이다. 처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또한 완벽하고 자원으로 가득했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완성된 것은 아직 아니었다. 마우(Mouw)는 이렇게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인간이 이 땅을 발전시키고 정형화하며 문화적 형성의 산물들로 가득 채우기를 원하셨다."[1] 우리는 하나님의 완벽하고 풍족한 창조물의 토대 위에서 그분이 하시는 창조의 일을 계속해나가는 하나님의 창조적 손이라고 할 수 있다. 밴 두저(Van Duzer)는 하나님의 완벽하지만 미완성인 창조가 비즈니스에 최적인 조건을 제공한다고 이야기한다.[2]

 

   시간에 따라 자원을 잘 배분함으로써 그것을 증대시키는 일은 이러한 창조 명령을 이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창조 명령에 순종하는 데 있어 금융이 도움이 되는 예로는 봄에 씨앗을 사기 위해 돈을 저축하는 것, 향후 광석을 채굴할 수 있도록 장비를 구매하려고 자본을 모으는 것, 주택을 구매하기 위해 대출을 받는 젊은 부부, 학교를 짓기 위해 채권을 발행하는 공동체 등이 있다. 금융은 성장하는 데 필요한 미래중심적 자원 배분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는 다가오는 미래에 자원을 증대시킬 수 있는 큰 가능성을 지닌 이들에게 자원을 제공해주고, 빌려주지 않았다면 비생산적이었을 여유 자원을 빌려준 이들에게 그 증가분을 나누어준다. 금융이 없다면, 사람들은 당일에 얻은 자원, 혹은 이전에 축적해 놓은 자원만을 가지고 매일 살아가야 할 것이다. 금융이 없었다면 수 세기에 걸쳐 인류가 경험한 경제적 성장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 없이 인류의 번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물을 경작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돌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다.[4] 빌리고 빌려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시간의 교차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금융과 관련된 의사 결정에는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주택담보대출을 받는 사람들은 단기간 세를 내는 사람들보다 좀 더 집을 잘 관리하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지속 불가능한 활동에는 자금을 대기 어렵다. 소유한 삼림의 나무를 너무 빠른 속도로 베어버려 몇 년 안에 모든 나무를 고갈시킬 것으로 보이는 목재 회사한테 누가 돈을 빌려주려 하겠는가? 또한 금융은 운영상 필요한 천연 자원의 사용을 줄임으로써 가능한 자본의 증대를 이끌어낸다. 예를 들어, 어느 도시가 대중교통 시스템을 확대하기 위해 돈을 빌린다면, 이는 하나님의 탄소 자원을 더욱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되며, 시의 채권 투자자들에게 퇴직 소득을 제공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Richard Mouw, When the Kings Come Marching In: Isaiah and the New Jerusalem (Wm. B. Eerdmans Publishing Co, 2002): 11쪽.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35-38쪽.

Paul Mills, “Faith versus Prudence? Christians and financial security,” Cambridge Papers, Vol 4 No 1, March 1995 는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날마다 공급하심에 대한 믿음과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신중함을 가지고 재정적인 결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창세기 2:15의 창조명령을 넘어 피조물을 돌보는 것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성경적인 기초 설명을 보려면,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and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를 보라.

금융은 정의와 사랑의 수단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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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은 정의와 사랑과 관련된 특정의 활동을 가능케 해준다. 우리는 월터스토프(Wolterstorff)의 개념, 즉 정의란 인간이 지닌 권리대로 사람들을 마땅히 존중하는 것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사용한다.[1] 월터스토프의 유신론적 해석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사랑받을 영예로운 자격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 하나에 이러한 인권이 기초한다고 본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인간을 해치는 사람은 하나님께도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2] 이러한 하나님—인간의 관계로 인해 인권이 생겨났으며, 이에 따라 정의라는 개념도 형성되었다. 우리는 또한 월터스토프가 케어아가피즘(care-agapism)이라고 부르는 사랑의 "배려"의 개념을 사용할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의 번영 그 자체를 추구하고, 사람들을 인간으로서 마땅하게 존중해 주는 것이다.[3] 배려는 정의를 사랑 속으로 끌어오기 때문에, 배려로서의 사랑을 통해 성경적 사랑(아가페)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월터스토프는 이야기한다. "배려는 사랑하는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려는 자신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사랑,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해주신 사랑,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종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배려로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사랑의 네 가지 모습에 대해서 통일된 이해를 할 수 있다."[4] 배려는 행동을 수반하며, 어떤 경우에는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위험이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동반하기도 한다.

 

   배려를 통해 나타나는 사랑은 정의와 사랑과 같은 다른 기독교적 개념과 일관된다. 예를 들어, 크리스 라이트(Christ Wright)는 의로움과 정의에 관한 주요 성경적 주제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 개념들이며, 이는 어떤 상황을 올바르게 회복하기 위해 "특정 상황이나 관계 속에서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나타내는 것들”이라고 말한다.[5]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민족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축복하고자 하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아브라함을 특별히 선택하셨다고 이야기한다.[6]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축복하시기 위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라이트의 주장은 이러한 사랑을 실제로 행해야 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해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로 존중하기 위해 그들의 번영을 이끌어내어 사랑을 실천해야 하고, 그렇게 그들을 축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과 정의로움은 누구를 위해 나타내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22장, 막12장, 눅10장) 이는 앞선 모세의 가르침과도 일치했다.[7]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우리가 이전에 관계가 없었던 이웃을 포함해, 모든 이웃에게 사랑과 정의로움을 나타내야 함을 보여준다. 혹은 월터스토프가 말했듯이,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누구를 만나든지 이들의 필요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항상 기억하고 있으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으로 본다."[8]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사랑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께서 금융을 통해 의도하신 목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금융은 다른 사람을 인간으로서 존중해주면서 이들의 번영을 추구하는 데 유용하다. 금융은 자원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금융을 통해 다시 배분된 자원은 사람들이 번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상호간 이익이 되는 자발적 방법으로 자원을 공유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는 하나의 탁월한 방법이 된다. 비록 유일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정의의 핵심이다. 만약 지금 당장 여러분에게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자원이 없지만, 이후에 증가분을 내게 조금 나누어 줄 의향이 있다면,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서로 자원을 빌리고 빌려주는 것은 지극히 정당한 일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금융은 다른 이들의 번영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 개인적 친분이 없거나 가까이 살지 않는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체계적인 법률 제도와 구조가 잘 잡힌 금융제도는 낯선 사람들끼리도 대출해주고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해당 자원을 문제없이 되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말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개인적 범위를 훨씬 넘어선 상호적 이익을 위해 자원을 공유할 수 있다. 모든 금융 체계가 이러한 방식으로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고 있진 않지만, 이는 가능한 일이며 또 권장되는 일이기도 하다. 채플린(Chaplin)은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라도 "사랑이라는 핵심 규범을 구현"하고 이러한 제도들이 사랑과 정의의 "전달 매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9]

 

Wolterstorff, Justice in Love,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11), 90쪽.

Wolterstorff, 154쪽.

Wolterstorff의 '이타적 돌봄(care-agapism)'은 몇몇 방법에 있어 C.S. Lewis의 The Four Loves, (Harcourt, 1960)에 나오는 자선(charity)과 비슷하지만, "이웃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 방법의 예시이다.(Wolterstorff, 83쪽)"라는 연결을 중요하게 만든다.

Wolterstorff, 109쪽.

Wright, The Mission of God’s People, 88-92쪽.

Wright, 92-94쪽.

Wolterstorff, 80쪽.

Wolterstorff, 132쪽.

Jonathan Chaplin, “Loving Faithful Institutions: Building Blocks for a Just Global Society,” TheOtherJournal.com, (April 15 2010).

http://theotherjournal.com/2010/04/15/loving-faithful-institutions-building-blocks-of-a-just-global-society/

금융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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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금융 활동을 하도록 특별히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제도나 시스템을 만드셨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금융을 다루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신학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만약 하나님께서 금융의 기초를 세우지 않으셨다면, 금융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의 온전한 발명품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실제로 금융의 기초를 세우셨다면, 분명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우셨을 것이며, 그 목적은 그분께서 드러내신 의지와 반드시 일맥상통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금융의 여덟 가지 토대를 살펴보면서 이들이 정말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만들어졌는지 살펴볼 것이다.[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라고 간주하지 않았음에도, 8개의 기초 중 3개(위험 혐오, 시간 선호, 정보의 비대칭)를 발견한 Ernest P. Liang에게 감사드린다. Ernest P. Liang, Modern Finance Through the Eye of Faith: Application of Financial Economics to the Scripture, Christian Business Academy Review, Volume 7, No1 (Spring 2012), 69-75쪽

우리는 시간에 묶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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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고 인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 따라 우리에게는 하루, 계절, 세대, 그리고 일생이 주어진다(창1장, 시104).[1] 또한 우리는 시간을 인지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에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시90:12, 전3장, 잠6:6-11, 잠20:4). 카나(Kana)는 시간은 하나님의 자원이며 우리는 시간의 청지기라고 이야기한다.[2]

 

   서로 다른 시간의 지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 금융의 기초다. 금융 자원은 생산이나 선적 기간으로 인해 며칠을 요구할 수도 있고, 계절성 사업을 위해 몇 개월 동안 필요로 할 수도 있으며, 농작물의 성장기로 인해 반년을 요할 수도 있고, 신제품의 개발이나 출시를 위해 수년을 필요로 할 수도 있으며, 공장이나 주택을 건설하기 위해 수십 년을, 노후자금을 위해 거의 일생이라는 기간을 요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필요와 기회, 그리고 이용 가능한 자원이 시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기 때문에, 금융은 시간을 넘나들며 자원과 필요를 이어주는 주요한 수단이 된다.

 

성경적 시간의 요약에 대해서는 Paul Mills, “A Brief Theology of Time – Part 2: Resisting the Tyranny of Time,” Cambridge Papers, Vol 11 No 4, December 2002를 보라.

Jonathan Kana, “Time: A Non-Renewable Resource,” Perspectives, Volume 25, Number 10 (December 2010)

우리는 사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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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사회적이고 공동체 생활을 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2:18)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으며(창1:26-27; 고후3:8), 삼위일체가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 모습은 우리 공동체의 모범적인 예가 된다(갈4:1-7). 사람들 사이에 자원을 공유하는 형태로서의 금융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활동이다.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금융도 중요한 그 한 형태가 되는 자원 교환의 토대를 마련해주셨다.

 

 

우리는 다양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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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은 다양한 종류의 능력, 필요, 그리고 열망을 지닌 채로 창조되었다. 이는 성경에서 성막을 건설하고(출35:30-36:5)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온 나머지 이들의 귀환에 맞춰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일을 위해(스7:6-7, 느헤1-2장)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능력을 부여해주신 창조를 통해 알 수 있다. 바울은 우리 모두에게는 각각 다른 은사가 있음을 강조한다(고전12:12-31). 또한 우리가 모두 같은 시기에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류 사회는 매우 다양한 연령대와 인생 단계에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이들은 어려서 아직 의식주를 책임질 형편이 안 되고, 어떤 사람들은 이를 막 책임지기 시작했으며, 또 다른 이들은 물질을 가장 많이 생산해내는 전성기를 누리면서 현재 필요보다 더 많은 자원을 갖게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나이가 들어서 생계유지에 도움이 필요하거나 이전에 모아두었던 자원을 써야 한다.

 

   이러한 다양성이야말로 금융 시장의 토대가 된다. 어떤 시점에서든, 어떤 사람들은 넘치는 자원을 즐기고 또 어떤 이들은 현재 그들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하거나 그러한 자원 활용 기회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중 누구는 사업 기회를 잡거나 혹은 사회의 충족되지 못한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인프라를 세우고자 돈을 빌리고 싶어 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삶의 어떤 시점에서 돈을 저축시켜서 돈을 빌리고자 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도 있다.

 

 

우리는 대리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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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 청지기나 대리인의 역할을 하도록 창조되었다. 이에 대한 가장 주된 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청지기로 살아가고 그분의 피조물을 돌보라고 명령하신 것이다(벧전4:10).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보디발과 바로의 청지기 역할을 하라고 요셉을 부르신 것도 볼 수 있다(창39:2-6; 41:41-44).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달란트에 대한 일화는 우리가 그분의 청지기이며,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마25:14-30).

 

   금융은 다른 이를 대신해 대리인 또는 청지기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활동에 달려있다. 기업 간부는 기업의 주주들을 대신하는 대리인 역할을 한다. 펀드 매니저는 투자자들을 대신해서 어떤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할지를 결정한다. 변호사는 자신의 클라이언트가 금융 거래에 있어서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전문지식을 적용한다. 금융 활동의 여러 가지 대리관계를 더 잘 이해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금융 관련 학문 분야가 따로 있을 정도다. 금융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행동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약속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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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약속과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지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 바로 성경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약속을 하는 모습을 성경 속에서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룻의 이야기는 국적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약속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룻1:16-18). 갈라디아서 3장 15절에서 바울은 사람의 언약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은 서로 약속을 하고 또 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모든 금융 상품은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약속인 바, 만약 약속이 하나님의 창조물의 일부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택담보대출은 매달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이다. 주식 배분은 미래 배당금의 일부와 이사회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약속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금융의 약속들은 다소 복잡하고 상세해졌기 때문에, 이에 따라 약속을 서면으로 작성하는 것이 널리 관행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서면 계약은 우리가 약속을 하고 이를 이행하는 그런 창조된 능력을 단순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은 금융에 있어서 핵심이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금융과 관련해서 지나친 약속을 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잠22:26-27).

 

 

우리는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자원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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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리스크(risk)를 만드셨으며, 그로 인해 우리는 장래의 일을 알지 못한다(전8:7).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특히 미래에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다. 밀러(Miller)는 리스크를 세 가지 개념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 중 마지막 개념은 "기회 창조"로, 이는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미래를 불확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이전에는 없었던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느냐, 만들어내지 못하느냐의 여부는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뷰캐넌(Buchanan)과 밴버그(Vanberg, 1991)는 시장을 발견 과정이나 분배 과정이 아닌 창의 과정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인간 선택의 영향을 받아가면서 전재가 펼쳐지는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리스크는 금융 결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3] 대부분의 금융 상품과 그러한 상품들의 가격은 바로 이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불확실성 때문에 대출이 거절되는 경우도 있고, 실패 비율을 감안해 가격이 더 올라가기도 한다. 주가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올라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채무 계약은 불확실성 때문에 보고 및 담보 조항을 지닌다. 금융시장이 불확실성으로 인해 매우 복잡한 것은 사실이지만, 금융은 또한 리스크를 재분배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잠재적 이득을 더 많이 지니고 있기도 하다.

 

 

Kent D. Miller, “Risk and Rationality in Entrepreneurial Process”, Strategic Entrepreneurship Journal, Volume 1 (2007), 57-74쪽.

James M. Buchanan and Viktor J. Vanberg, “The Market as a Creative Process”, Economics and Philosophy 7 (1991), 167-186쪽.

See Edmund Phelps, “Uncertainty bedevils the best system”,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46-47쪽.

우리는 리스크를 무릅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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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게끔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이를 위한 성경적 토대도 마련해주셨다(창1:28-30; 2:15; 마25:14-30; 눅19:11-27; 요12:24). 우리는 "독보적인 창조를 하시고 또 그것을 지배하는 자유로운 인류를 창조"하셨으며 리스크를 무릅쓰시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1] 하나님께서는 리스크를 느낄 수 있게끔 우리를 창조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모든 것을 공급해주실 것임을 우리는 안다.[2] 이 밖에도 우리는 많은 성경적 가르침을 통해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다.[3] 그레거슨(Gregersen)은 리스크를 자연적 사건, 사회적 사건, 그리고 한 개인에게 이러한 사건들이 의미하는 바의 총합으로 보았다.[4] 그레거슨은 “신뢰가 리스크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신뢰와 리스크 사이의 선순환이 이뤄진다고” 주장했던 루만(Luhmann)의 말을 인용했다. 또한 그는 성경이 우리에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자세를 장려하고 그것을 장기적으로 보상해주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5]

 

   리스크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금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리스크를 무릅쓰고자 하지만 너무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자 하진 않으며, 그 정도는 개인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불필요하게 많은 리스크는 지양하면서 적당한 리스크는 감당하고자 하는 이러한 성향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일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지혜를 통해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리스크와 보상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우리는 금융 가격 속에서 이 사실이 반영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리스크를 이해하고 관리하는 일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일치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Samuel Gregg and Gordon Preece, “Christianity and Entrepreneurship: Protestant and Catholic Thoughts”, The Centre for Independent Studies, 1999, 10쪽.

빌4:11-13과 Howard Vanderwell, “Contentment in Uncertainty”, Calvin Theological Seminary Forum, (Fall 2009), 12-13쪽을 보라.

예시를 위해 잠11:15; 22:26, 27; John M. Boersema, “Examining a Christian Perspective on Finance”, Chapter 8 in Edward J. Trunfio Ed., Christianity and Business: A Collection of Essays on Pedagogy and Practice (Christian Business Faculty Association, Wenham, MA, 1991); Robert Brooks, “Financial Risk: an Alternative Biblical Perspectiv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6), 16-24쪽; Ernest P.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Volume 12, (2010), 48-61쪽; 그리고  John P.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Perspectives, Volume 24, Number 5 (May 2009), 6-10쪽을 보라.

Niels Henrik Gregersen, “Risk and Religion: Toward a Theology of Risk Taking”, Zygon, Volume 38, Number 2 (June 2003), 355-376쪽.

Gregersen, 368쪽.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기초에 대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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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창조의 여덟 가지 측면, 특히 인간의 창조는 금융의 토대를 쌓는다. 금융은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줌으로써 여분의 자원을 통해 인류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해주고, 상호 이익을 위해 사회적으로 자원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다시 말해, 금융은 인간 존재의 조건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로 바꾸어주며,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을 위한 청지기로서 섬길 수 있게끔, 그리고 정의와 사랑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게끔 해준다.

 

 

금융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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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의 신학적 분석을 마무리하기 위해, 우리는 정확히 어떻게 사람들이 금융제도를 발전시켜서 이를 통해 영광과 청지기 사명,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토대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란 사회가 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사용하는 구조와 메커니즘을 의미한다. 가장 기본적인 금융제도로는 통화, 중개기관, 금융상품, 그리고 가격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이 네 가지 제도들에 대해 각각 살펴볼 것이며, 이들이 하나님의 토대 위에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리고 이들이 어떻게 해서 청지기 사명, 정의, 사랑을 통해 순종적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생기는 의문 사항들 또한 풀어나갈 것이다.

 

   반 두저(Van Duzer)는 성경에 나오는 권세와 원칙들 속에 제도가 존재하며, 이러한 제도들은 하나님께서 선을 위해 만드신 것들이라고 주장한다.[1] 그는 골로새서 1:16-17 말씀이 비즈니스나 시장과 같은 제도를 일컫는 것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내놓는다.[2] 반 두저는 또한 요더(Yoder)의 말을 인용하는데, 요더는 하나님께서 창조물에 "균형, 체계,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창조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3] 이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금융을 긍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금융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할 것이다. 이후 우리는 금융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가 타락한 인류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금융제도가 잘못된 청지기 역할을 한다든지 인간의 정의와 사랑을 훼손시키는 형태로 둔갑하면, 사회에 악하게 쓰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4-146쪽.

"만물이 그에게서 창도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6-17)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145, quoting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Eerdmans, Grand Rapids, 1994), 141쪽.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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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구성이 있고 보관 및 운반이 용이한 매개를 통해 물질의 가치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초기 창조 계획에서 금과 같이 매력적이고 부피가 작으며 상대적으로 희귀한 물질들을 몇 가지 만드셨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그것을 이해하고 그러한 물질들에 가치를 매길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주셨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셨고 금과 같은 희소한 자원의 가치를 대신 나타내 줄 수 있는 흔한 자원, 즉 종이와 같은 것을 통해 다양한 자원의 교환이 가능하도록 하셨다.[1] 우리는 돈을 사용하고 있으며 현대에는 이러한 돈을 이동시키기가 매우 용이해졌고 (전자 거래를 통한 송금은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식량, 주택, 교육, 자본재와 같은 실제 자원을 얻는다. 통화를 사용해 쉽게 자원을 잘 습득하는 능력은 창조물에 대한 청지기 사명 의무를 이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성경에는 돈에 관한 가르침이 많이 들어있다.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가르침으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10)"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마6:24)"를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하나의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인간의 태도와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돈의 힘에 대한 것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은 악의 근원이 아니다. 교환 수단으로서의 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축복이다.[2]

 

 

혹자는 금으로 뒷받침 되지 않는 종이 화폐는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한 주장들을 탐구하는 것은 본 아티클의 범위를 넘어서며, 주요 요점을 알려주지 못한다.

Jacques Ellul, Money and Power (Inter-varsity Press, Downers Grove, 1984)는 돈, 부,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회의 방식이 성경적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주장한다. Ellul이 악이 돈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했지만, 부와 물질적 소유에 대해 쓰고 있는 것이지, 교환의 수단으로써 통화를 다루고 있지 않다.

중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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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개기관은 채권자의 자원을 채무자에게 유용한 형태로 "재제조"하는 기관이다. 간단한 예로, 은행이 여러 명의 예금자들과 대출을 받는 한 기업을 연결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중개기관은 다양한 형태의 은행을 모두 포함하지만, 연금기금이나 생명보험사, 상호기금, 사모펀드, 헤지 펀드, 증권화 기구 등 다른 형태의 중요 중개기관들도 있다. 심지어, 기업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않고 채권자들에게 채권을 발행함으로써 돈을 조달하는 경우처럼, 금융기관의 "중개를 받지 않은" 금융 거래들 또한 일반적으로 투자은행과 같은 일종의 중재 기관을 거친다. 예금자의 돈을 모아 채무자에게 빌려주는 투자를 하는 모든 금융기관은 금융 중재기관의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중개기관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회적이며 다양한 존재로 만드셨으며, 대리인의 역할도 맡고, 약속을 맺으며,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개기관을 통해 두 가지 주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청지기 사명을 이행하게 된다. 첫째, 그들 자신의 자원을 투자해 당사자들 간의 신뢰를 파악하고 형성해나감으로써 채무자와 채권자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여러분은 낯선 사람에게 주택 구매를 할 수 있도록 직접 돈을 빌려주진 않겠지만, 낯선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은행에게 돈을 맡기는 예금은 망설이지 않고 할 것이다. 여러분이 은행을 신뢰하는 이유는 은행이 돈을 빌릴 사람이 믿을 만한지 어떤지 확실히 알아보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둘째, 중개기관은 예금자들이 저금한 자원을 한데 모음으로써 자원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한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주택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금액의 돈을 빌려주진 못하지만, 은행은 수천 명 혹은 수백만 명의 예금자들의 자금을 모아 대규모의 대출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중개기관이 정의를 실현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서민층과 소규모 기업들에게 자원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중개기관이 없다면 가계가 자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직접 알고 있는 연줄에 한정될 것이다. 형편이 어려운 가계는 계속해서 형편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중개기관을 통해 어려운 가계는 주택, 자동차, 대학 교육 등을 위한 자원을 빌리거나 소규모의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직접 투자자들에게 채권을 발행할 수 없는 규모가 작고 평판이 낮은 소규모 기업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중개기관은 좀 더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돕는다.

 

   중개기관은 채무자와 채권자가 서로를 도울 수 있게 해주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는 사랑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중개기관은 채무자가 가족이나 친구를 통해 돈을 빌리는 것보다 좀 더 쉽고 값싸게 필요한 자금을 얻을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채권자들에게도 돈을 침대 밑에 숨겨놓거나 지인들에게만 빌려주는 것보다 훨씬 낮은 위험과 고수익을 보장함으로써 미래를 위해 저축할 수 있게 해준다. 채권자와 채무자는 서로를 직접 만나진 않지만, 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자원을 공유함으로써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중개기관을 통해 정말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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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금융이 관심과 사랑의 수단이라면, 중개기관을 통한 금융 활동은 하나의 의문점을 낳는다. 우리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리적 거리나 시간을 초월해 서로를 향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사회의 여러 가지 조직에 익숙하다. 예를 들어, 옥스팜(Oxfam)이나 월드비전(World Vision) 혹은 적십자(Red Cross)와 같은 비정부기구의 직원들과 기부자들은 전 세계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사랑을 실천한다. 그들이 그 대상을 실제로 알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기구들을 발전시켜나가는 것 역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 된다.[1] 다음과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일정 기간 동안 채무자들이 자원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은행에 돈을 맡기는 예금주들도 잘 알지 못하는 채무자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청지기 사명과 사랑 사이에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갈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규모가 큰 중재기관들은 전 세계의 많은 시장에서의 대출 중개 기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청지기 사명을 더욱 잘 수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현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규모의 지역 중재기관들이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뛰어날 수 있다. 대규모의 국영은행은 최적의 청지기 사명을 수행할 수 있으며, 소규모의 지역은행은 좀 더 친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우리의 신학은 은행과 고객들이 은행의 규모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이러한 잠재적 장단점에 대해 숙고할 것을 권고한다. 만약 은행이 규모를 키우기로 결정하였다면, 은행은 규모 있는 뛰어난 지리적 청지기 사명을 향한 분명한 목표를 지녀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은행이 계속해서 작은 규모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2] 예금자들 또한 금융 업무를 어디서 할지 결정할 때 이와 동일한 사항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Compendium of the Social Doctrine of the Church, (Pontifical Council for Peace and Justice Justice and Peace,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4, Reprint April 2005), 208번째 문단에 요약된 카톨릭 교리와 일치한다.

David McIlroy, “Christian Finance?”, Ethics in Brief, Vol. 16, No. 6, (Spring 2011)는 양측을 모두 더 잘 섬기기 위한 방안으로 대출자과 저축자 사이의 "유대감" 혹은 강한 연결을 가능케 하는 어쩌면 더 작은 방식의 중개기관들을 구성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금융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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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상품이란 각각 다른 자원 수요를 지닌 둘 혹은 그 이상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약속으로, 미래가 불확실할 때 당사자들이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게끔 맞춰진 약속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창조하실 때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 그러한 창조 요소와 함께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회적이고, 다양하며, 시간의 지배를 받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하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배경 가운데 금융상품이 만들어졌다. 금융상품은 예금자와 채무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재기관이 "생산"한 상품으로, 이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이행하고 의미 있는 방법으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금융상품은 청지기 사명을 잘 이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 이유는 이러한 상품들이 특정한 청지기 사명 기회의 리스크, 수익, 그리고 시간적 속성에 따라 맞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대출을 받는 기업이 진행하는 특정 프로젝트의 결과가 불확실한 미래에 달려있다면(다시 말해 리스크가 높다고 한다면), 이러한 리스크를 예견하고 예금주와 채권자가 정확히 필요한 자원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를 돕는 금융상품이 만들어질 수 있으며, 이는 자본상품의 형태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상품은 또한 좀 더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가능하게 한다. 금융상품은 도움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수요에 맞춰질 수 있다. 소규모 기업을 위한 대출은 사업자들에게 사회를 섬길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제공해주는 상품이다. 학자금 대출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육비 충당이 힘든 청년들에게 커다란 기회를 제공해주는 상품이다. 소액 대출을 위한 특별 상품 또한 정의를 실현한다. 계약금이 좀 더 낮은 특화된 주택융자와 국영 보험은 수많은 저소득층에게 내 집 마련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 금융상품은 풍부한 자원을 지닌 사회구성원들이 사회의 빈곤층을 향한 정의를 실천할 수 있게끔 해주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1]

 

   주택담보대출은 금융상품을 통해 가능해진 사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예금자는 채무자의 가족들이 번영할 수 있는 물리적 장소를 얻을 수 있도록 채무자를 도와준다. 그 대가로, 채무자는 예금자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생계를 이어나갈 정도의 생산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노후를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은 창조 계획 속에서 인간이 금융상품을 개발함으로써 이렇게 의미 있고 유용한 방식으로 인류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임을 예상하셨다. 물론 채무자와 예금자는 서로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기에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이에 대한 자선과 이자를 부과하는 주제에 대해서는 본 아티클의 후반부에서 다룰 것이다.

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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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시장에서의 가격은 금융상품에 대한 예측 수익률로 표현되며, 채권상품에서는 이자율로 일컬어진다.[1] 그렇다면 정확히 왜 채무자와 예금자가 수익률 혹은 이자를 지불하거나 받겠다고 합의하는 것일까? 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 계획의 일부일까? 우리는 그렇다고 보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를 채무자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채무자는 빌린 자원으로 미래에 더 많은 자원을 창출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자를 낼 의향과 능력을 나타내 보인다. 이러한 생산적 기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 예로 채무자가 건강히 지낼 수 있는 주거지를 얻는 것, 곡식을 기르기 위해 씨앗을 심는 것, 교육을 통해 기술을 습득하는 것, 도로를 닦고 공장을 세우는 것, 또는 유용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계를 구매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시한과 생산적 기회들은 둘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에 포함된다. 이는 이자율의 기초를 구성하는 중요 토대의 절반이라고 할 수 있다.

 

   토대의 나머지 절반은 채권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해보자. 채권자는 두 가지 이유로 특정 미래 시점까지 일부 자원에 대한 접근을 포기할 의향을 보인다. 현재 채권자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원보다 더 많은 자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미래의 어느 시점에, 예컨대 은퇴를 하는 상황처럼 채권자가 추가적인 자원을 필요로 하는 때가 올 것이다. 따라서 채무자가 일정 기간 동안 자원을 사용하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돌려주는 행위는 이치에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채권자는 일정 기간 동안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적어도 자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차선책을 선택했을 때만큼의 보상은 받길 원할 것이다. 채권자가 현 시점에 소비를 지양하고 미래의 노후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유한하고, 시간에 구속받는 존재로 만드신 것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산적 기회와 인간의 소비 욕구는, 앞서 다룬 금융의 여덟 개의 기초와 함께 금리의 토대를 형성한다. 금리는 인간이 고안해낸 이상한 발상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제도이다. 더욱이 가격이 잘 매겨진 금리는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으며, 상호적으로 이득이 되는 자발적 교환의 결과가 될 것이다.

 

   금리는 청지기 사명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러한 가격 장치는 자원 수급과 관련된 결정을 명료하게 내릴 수 있도록 해준다. 만약 여러분이 이자를 지불한다면, 미래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경우에만 대출을 받고자 할 것이다. 이자로 인해 오늘 사용한 금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내일 갚아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순히 좀 더 여유롭게 살기 위해서 돈을 빌리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이자 체계는 금융자원에 대한 청지기 사명을 시간에 따라 잘 이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이런 장치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명령의 "보살핌"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긍정적인 금전적 수익을 내는 모든 프로젝트가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살피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금리의 맥락에서 일하는 금융 종사자들의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금리는 자원의 정당한 재 배분을 용이하게 하며 이를 촉진시킨다. 금리는 자원을 일시적으로 사용하고 이에 따라 채권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제공하겠다고 단순히 합의함으로써, 자원이 없는 사회 구성원들이 자원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금리를 통해서 자원의 배분은 자발적으로 합의될 수 있으며, 상호 이익이 될 수 있다. 금리는 당사자 모두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금융 거래가 이루어지도록 해준다. 금리가 없다면(즉, 제로금리라면), 금융 활동은 대출을 해주는 사람들이 대출을 받는 이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제공해주는 선물이 된다. 금리가 없다면 채무자는 채권자의 자원을 공짜로 얻고자 시도할 것이다. 마치 구걸을 하는 행위처럼 보이는 이러한 방식은 아마도 정의를 실현하는 최상의 방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전능하고 창조적이신 하나님께서는 지속 가능하고 상호적으로 이득이 되는 자발적 활동을 통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만들어 내셨으며, 우리가 금리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본 아티클에서 "이자율"이라는 용어를 두 금융상품 매매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들을 공유한 것에 대한 수익률을 기대하는 더 일반적인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

시장교환을 진정 사랑으로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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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격이라는 문제는 사랑의 한 형태로서의 금융에 대한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시장 가치—교환 관계 속에서 과연 사랑이 표현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채권자와 채무자가 서로와의 관계를 통해 이득을 얻고자 한다면, 둘 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위를 하는 것일까? 둘째, 대부분의 금융 거래가 전산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 이렇게 개인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또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격이 매겨진 상품의 판매를 통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앞에서 다루었듯이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번영하기를 바라는 목적 그 자체로 상대를 인간으로 보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해보자. 따라서 위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이다. 사람은 특정 가격에 재화와 용역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번영을 늘 돕는다. 농부들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판매할 때, 이들은 소비자들의 번영을 돕는 것이다. 소비자들이 음식에 대한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말이다. 좋은 교사가 월급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는 단순히 이들을 용병들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현대 경제에서 대부분의 일은 보수를 받으며, 일을 통해 생산된 재화와 용역은 특정 가격에 판매된다. 만약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사랑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이라면, 사실상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시중 금리를 따르는 금융이 사랑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까? 이는 교육이나 농산물과는 달리 돈이 가치화되지 않는 상품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농부는 좋은 농산물을 판매함으로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채권자가 좋은 돈을 빌려줌으로써 사랑을 나타내 보일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놀랍게도 '그렇다'이다. 물론 돈 자체는 다른 돈과 비교해서 더 좋거나 나쁠 수 없다. 하지만 대출을 해주는 상황, 조건, 계약 사항 등을 통해 채권자와 채무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대출기간, 상환 조건, 담보 조건, 위약금, 보험, 인플레이션 보호 등 수많은 조건들이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정될 수 있다. 소득 증명, 자산 평가, 실사, 융자 서류에 대한 이해도, 공정한 정보의 이용 가능성 등, 대출을 받는 것과 관련된 다른 요소들을 통해서도 배려와 존중이 실천될 수 있다. 또한 은행의 위치와 이용 편의성, 대출 담당자, 금리 비교, 지역사회 참여, 광고 등과 같은 다른 요소들도 취약한 공동체 발굴에 기여할 수 있다. 생산성, 제품 교육 등을 위해 대출금이 소비되거나 투자되는 경우, 이에 대한 신용 상담이나 배려 있는 대화를 통해 채무자에게 해가 되는 대출을 예방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사랑을 표현할 수도 있다. 주식거래에서는 시장 개방성, 재무제표의 정확도,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정직함 등이 투자자들에게 존중과 배려로서 다가올 수 있다. 비록 돈 그 자체는 어느 채권자의 손에서든 동일한 모습을 띠지만, 보살핌과 존중, 즉 사랑의 정도는 크게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주택담보대출을 해주는 사람은 저소득층 가정이 주택을 세내지 않고 구매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만약 주택, 이자율, 대출기간, 소득 증명 등 모든 요소들이 제대로 취급되기만 한다면, 이는 재산을 갓 축적하기 시작한 가족에게 엄청난 혜택이 될 수 있다. 이는 또한 돈을 대출해주는 과정에 참여한 모든 이들, 가령 은행 예금자나 연금기금 등에도 이득이 될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사업의 규모를 키우는 데 필요한 자본을 얻기 위해 기업공개를 할 수 있도록 투자은행이 어떤 기업을 도와줄 때, 그 투자 은행도 해당 기업의 미래 고객들과 직원들, 협력업체, 공동체, 그리고 주식을 매입하는 주주들에게 일종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시중금리 거래들은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사랑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은 거래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을 지키고 이행함으로써 실천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은 법적으로 강요되는 사항이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법을 초월해 상대방의 최고 이익을 위해 행동함으로써 시장 거래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거나 마땅히 그래야 하는 상황, 혹은 그렇게 함으로써 미래에 이득이 주어지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는 상대방의 번영 자체를 최종 목표로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재화나 용역 시장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의료 서비스를 생각해보라. 금융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거의 —아니, 모든— 시장 거래는 이러한 종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으며, 많은 거래들이 이미 이를 행하고 있다.

 

성경은 이자 책정을 금지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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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질문은 금융 가격을 —특히 이자와 같은 것을— 성경이 금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이자를 받거나 담보를 잡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들의 적용을 놓고 토론을 벌여왔다.[1]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 예이다 :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 만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신23:19-20)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려면, "공공의 선을 위한 자산 사용 (신23:1-24:13)", "대여와 담보 (출22:25-27)", "안식년과 희년 (레25장)", "의인은 선불이자나 변리이자를 받지 않는다 (겔18.8상)", "의인은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에게 저당물을 돌려준다 (겔18:5,7)" 같은 부분을 참조하라.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현대 사회에서 이자가 본질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고, 금리와 담보와 같은 대출 관행들을 통해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착취하거나 가난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우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금융은 청지기 사명과 관심, 그리고 존중을 나타내는 수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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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싶다면  Paul Mills, “Interest in Interest: The Old Testament Ban on Interest and its Implications for Today,” Jubilee Center Publications Ltd., 1993; Eric Elder, “The Biblical Prohibition Against Charging Interest: Does It Apply to Us?”,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32-41쪽; Brian E. Porter, “Charging Interest: Is it Biblical? A Response”,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1999) 43-46쪽; or Liang, “The Global Financial Crisis: Biblical Perspectives on Corporate Finance”를 보라.

금융제도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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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의 우리의 신학을 요약해보자. 우리는 금융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창조물에 대한 청지기가 되도록 하며, 정의와 사랑을 가능하게 하도록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금융의 토대를 창조하셨고,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네 가지의 특정 제도를 세우도록 하셨다는 것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런 제도들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청지기 사명과 하나님의 정의 및 사랑 명령을 이행할 수 있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러한 틀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청지기 사명과 정의, 그리고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살펴 볼 것이다.

 

 

 

금융과 인류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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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다는 모습의 금융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창조의 모든 측면은 손상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완전히 구원하러 오실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선과 인류의 타락으로 인한 악이 섞인 세상에서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청지기가 되어 금융 시장을 통해 정의와 사랑을 보일 수 있는 능력과 성향은 죄로 인해 훼손되었다.

 

   특히 몇 가지의 죄는 금융에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본질적으로 금융은 자원 할당에 관한 것이므로, 탐욕의 죄는 금융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1]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고, 금융에 있어서는 정보가 중요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죄 또한 금융 분야에 큰 문제가 된다. 실제로 이러한 탐욕과 거짓말은 금융제도의 의도된 선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으며, 죄로 인해 너무 심하게 타격을 입은 이러한 제도들이 과연 회복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까지도 몰고 온다.

 

   많은 작가들이 금융 분야의 문제점과 그 근본 원인들을 연구해보았다. 쉴러(Shiller)는 케인즈(Keynes)를 인용하며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이라고 불렀던 즉흥적인 충동을 인간이 지니고 있기에 금융 시장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그의 주장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2] 스티글리츠(Stiglitz)는 투자 은행(대규모 금융 중재기관)과 관련된 많은 문제점의 윤곽을 보여주면서, 보상 구조에 특히 초점을 맞춘다.[3] 그는 "금융 체계가 리스크 관리, 자본 배분, 값싼 거래 비용 유지 등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데 실패했다"라고 주장한다. 테릴(Terrill)은 투자금융 분야와 소비자들에게 도덕성의 붕괴가 일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선하고 옳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4] 반 두저(Van Duzer)는 죄가 시장 및 금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하나의 챕터를 할애한다.[5]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단절된 관계가 어떻게 시장에서의 많은 문제점들을 야기하는지를 보여준다. 데이비스(Davis)는 지난 30년 동안 특히 기관 투자나 금융증권화와 같은 금융의 일부 요소들로 인해 사회에 공헌하는 기관들이 영향력을 잃었으며, 사회에 해가 될 수 있는 단기적 관점의 '장사꾼 사고'가 발달했다고 주장한다.[6]

 

   이런 문헌과 여러 작가들이 쓴 책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사람들이 금융 분야에서 고의적으로 저지르는 악행들, 즉 사기, 속임수, 폭력, 인종・민족・성별에 따른 차별 등을 자세히 다루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악행들은 다른 분야에서 볼 수 있는 윤리적 문제들과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직업 윤리에 대한 개요'는 성경적 관점에서의 윤리적 사고를 위한 틀을 제공해주며 www.theologyofwork.org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청지기 사명, 정의, 그리고 사랑으로 다가와야 할 금융에 —자발적인 시중금리 거래 형태에— 인류의 타락이 어떤 제한을 일으키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민간 혹은 정부 자선활동처럼 금융이 반드시 다른 교환 형태로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범위는 어느 정도 되겠는가? 타락한 세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을 이룰 수 있는 힘이 금융에 남아 있을까?

 

Brian Rosner, “Greed as a False Religion”, Ethics in Brief, Vol. 12 No 5 (Spring 2008)은 탐욕이 우상숭배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우리의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독점적인 주장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Lord Brian Griffiths: British Economist Offers Perspective on Global Crisis," Ethix 68, February 1, 2010, http://ethix.org/2010/02/01/lord-brian-griffiths-british-economist-offers-perspective-on-global-crisis.

Robert Shiller, “A Failure to Control Animal Spirits”, Financial Times: The Future of Capitalism (May 12, 2009) 14-16쪽.

Joseph E. Stiglitz, “Who Do These Bankers Think They Are?”, Harvard Business Review (March 2010) 36쪽.

John Terrill, “The Moral Imperative of Investment Banking”, Cardus (February 26, 2010).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Gerald F. Davis, “The Rise and Fall of Finance and the End of the Society of Organizations”, Academy of Management Perspectives, Volume 23, Number 3 (August 2009) 27-44쪽.

대출을 받을 형편이 되지 않는 빈곤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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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적으로 보면, 시중금리 거래는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에게 축복이 된다. 이는 모든 종류의 상업 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종류의 재화와 용역을 만들어내고 판매하는 것은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하지만 재화와 용역은 필요하지만 구매자에게 이를 충당할 여력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는 금융뿐만 아니라 식량, 주거, 전력, 의료 서비스 등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돈이 필요한데 채권자가 요구하는 신용 조건에 맞출 수 없거나, 감당할 수 없는 높은 금리를 적용 받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그쯤 되면 이런 상황은 더 이상 상거래가 아닌 보조금, 양도, 혹은 기증이 요구되는 단계로 접어든다. 판매자가 재화나 용역을 판매할 때 우리는 보통 그들이 손해를 보거나 무상으로 그것을 제공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기부자나 원조 기관, 혹은 정부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구매해 기부해줄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풍족함을 누리는 이들이 관대하기를 바라는 기대, 혹은 적어도 그들이 그러리라는 희망을 가진다.

 

   금융도 다른 분야와 이런 면에서 비슷하다. 성경은 금융 분야에서의 관대함을 촉구한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레25:35-36)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신15:7-8)

 

   성경은 재화에 있어서도 관대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눅3:11)

 

   관용은 중요하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형제” 레25:35) 혹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가장 좋은 무대는 가격이 매겨진 시장이 아닐 것이다. 곡식 시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곡식 시장을 위한 토대를 만드셨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모든 이들이 곡식을 기를 수 있는 똑같은 능력을 받지 않았으며, 곡식은 모든 곳에서 똑같이 잘 자라지 않고, 곡식은 1년 365일 동안 매일 추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곡식은 영양가가 풍부하며 우리의 몸은 추수를 하는 시점에 이를 전부 섭취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추수 때까지 곡식은 남겨진다. 성경은 곡식을 사고파는 행위를 일반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진 않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곡식을 비축해놓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과부, 그리고 고아에게 나눠주라고 권고하고 있다(레19, 눅12:16-21). 앞서 살펴본 대로, 성경은 금융 자원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한다.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통해 의도된 대로 대부분의 금전적 자원을 시장에서 가격(금리)을 매겨 배분하는 것과, 가족 혹은 가난한 이들에게 무상으로(제로 금리) 금전적 자원을 공유하는 것은 둘 다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다. 두 경우 모두 이웃 사랑의 실천이 될 수 있다. 돈을 벌 기회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주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자금에 대한 별다른 접근 방법이 없는 가족이나 가난한 이들에게 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는 것 또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금융이 돈을 다루고 재화나 용역을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채권자가 다른 사업이나 제도보다 더 많은 자선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무사항은 없다. 오히려 수익을 창출해내지 못하는 기업은 사회로 가져와야 하는 기업 자신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금융의 토대에는 채무자뿐만 아니라 채권자에게도 주어지는 이득도 포함된다. 어떤 금융 기관이 돈을 무상으로 기부할 때마다, 투자자들의 기대 수익의 일부는 박탈을 당한다. 연금기금 투자자들이 오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1] 채무자들에 대한 자선은 대개의 경우 연금 수혜자들의 퇴직 소득을 희생하면서 이뤄진다. 따라서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자선활동은 금융의 역할이 아니다.

 

“Asset-backed Insecurity,” The Economist, January 19, 2008, accessed online at http://www.economist.com/node/10533428 on January 1, 2014.

채무자를 이용한 이익 취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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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가는 이익을 얻기 위해 자원을 빌려줄 수 있지만, 채무자들의 약점을 이용해 이득을 취해서는 안 된다.

너는 그[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주지 말라(레25:37).

 

   다시 말해, 채권자는 잠재적 채무자가 처한 "어려움"을 이용해 이익을 얻거나 이자를 선지급 하라는 등, 부담이 되는 조건들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 구절은 전반적으로 친족에게 돈을 빌려주는 상황을 특별히 다루고 있지만(레25:35), 어떠한 이유에서든 돈을 빌려주겠다고 결정을 내린 이상, 채무자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는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도덕적 문제는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에 있는 힘의 불균형에서부터 발생한다. 채권자는 돈이 많지만, 채무자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오늘날의 많은 시중금리 거래에서조차도 채권자가 채무자보다 더 많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은행은 대출을 받는 한 명의 고객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 정보, 법적 지식, 입법부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지리적 점유율을 지니고 있다. 때때로 대출을 이용한 특정 부당 착취를 법적으로 막아주기도 하지만, 설사 부당한 대출이 법을 어기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고객을 착취하는 산업은 어떤 경우에도 장기간 번영을 누리지 못한다. 금융 분야에서 그리스도인이 기여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예금주, 직원, 투자자, 이사, 대리인, 혹은 유권자로서 지니고 있는 그 어떠한 영향력이라도 발휘해 사회적 약자들의 착취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대출금의 비생산적인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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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시간이 흐르면서 채무자와 채권자 사이에 금융이 하나의 공유 형태로 자리 잡는 것이다. 대출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공유할 무언가가 생긴다. 따라서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대출금의 사용에 대한 책임이 있다. 주택담보대출은 채무자의 주거비용을 줄여줌으로써 채무자의 생산성을 높여줄 수 있다. 자동차 임대는 대여자의 효율적인 출퇴근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기업 대출은 장비나 재고, 혹은 수취 계정이나 다른 자산을 얻게 해줌으로써 기업이 성장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반면, 주택 담보가 투기성 자산 위에 이루어졌거나, 소득 증명이나 충분한 자산 없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 ‘티저(teaser)금리’ 혹은 시간이 갈수록 지불액이 높아져 결국은 자동차 가격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게 되는 종류의 자동차 임대는 대여자로 하여금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자동차를 구매하게끔 만들 수 있다. 또한 실사 없이 이루어진 기업 대출은 비생산적인 자산에 낭비될 수 있다.

 

   이러한 예들은 금융을 채무자와 채권자가 함께 공유하는 의무 사항으로 보는 성경적 견해를 뒷받침한다. 채무자는 생산성을 향상시켜줄 것으로 여겨지는 정도의 금액, 그리고 상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정도의 금액까지만 대출을 받을 의무가 있다. 채권자는 이런 맥락 속에서 채무자를 도와줄 의무가 있으며,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대출을 거절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이를 실천하기란 어려울 수 있다. 채무자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대출이 적당한지 가늠할 수 있는 지식이 부족할 수도 있고, 채무자가 단순히 선경지명이 없거나 충동적일 수도 있다. 채권자 또한 대출의 적정한 수준을 잘못 가늠할 수 있으며, 혹은 탐욕스럽거나 부도덕할 수 있고, 근시안적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2008년에 일어난 세계 금융위기는 주택담보대출을 금융기관과 채무자 모두 주택 구입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투기의 목적으로 하다가 이로 인한 채무불이행이 일어남으로써 시작되었다. 금융기관은 기존의 상승세에 이어 계속해서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었던 주택 가격에 따라 상환이 이루어질 것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담보 대출을 대부분 기관투자자들에게 팔아넘김으로써 자신들의 돈을 빠르게 회수했기 때문에, 채무자들의 장기 이익에 대해 신경 써야 할 인센티브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주택담보대출과 관련된 채무자, 채권자, 여러 계층의 증권 투자자들 모두 시간의 지배를 받는 금융의 특성 및 모두가 함께 리스크와 수익을 공유하는 관계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것이다. 반면, 성경적 원칙에 따라 대출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모든 당사자들의 초점이 대출금이 실제로 생산성을 높이는 데 사용되는가에 맞춰져야 한다.

 

 

금융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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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상황들이 보여주듯이, 타락한 세상에서는 시중금리 금융이 잠재적 채무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동시에 채권자에게도 이익을 안겨주지 못하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하나님께서 시장과 가격의 토대를 세우셨다고 해서, 금융을 통한 자원 배분이 항상 완전한 형태의 청지기 사명, 정의,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장을 숭배하거나 시장 거래의 결과라는 핑계를 대며 무언가를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금융 시장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지만, 이는 유일한 축복이 아니며 모든 상황에서 축복으로 작용하지도 않는다. 정부나 비영리단체들 또한 하나님께서 내리신 축복이다. 타락한 세상에서는 시장과 금융제도가 사회와 개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 시장은 사회 속에서 다른 기관들과 함께 균형을 맞춰야 하며, 말씀에 드러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항상 평가되어야 한다.[1] 금융 속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서만이 그분의 본래 계획에 따라 금융이 회복될 수 있다.

 

시장(market)을 예배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시장이 어떻게 정부, NGO들과 어울리는지에 대한 분석을 알고 싶다면, Van Duzer, Why Business Matters to God: (and what still needs to be fixed), Chapter 6를 살펴보라.

회복된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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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을 통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어떤 모습을 띨까?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그분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창조물이 모두 죄로부터 깨끗해질 수 있도록 하셨다. 금융기관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뤄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선한 청지기 의식을 고취시키며, 사람들에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오는 금융의 능력을 회복시킬 수 있다. 이러한 단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되짚어보자. 청지기 사명은 마치 정원을 도시로 일구어내는 것처럼, 모든 자원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창조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다. 정의란 인간의 타고난 권리대로 사람들을 마땅히 존중하는 것이며, 이러한 권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이 번영하기를 바라는 것 그 자체를 목적으로 남을 배려하고 그들을 인간으로서의 권리에 따라 존중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틀을 적용해서, 회복된 모습의 금융의 간단한 예들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자. 

 

 

은행에서 일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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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직원들은 금융 서비스의 최전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회복의 수단으로써 행할 수 있는 첫 번째 일은 금융 중개기관에서 그들이 맡은 특정한 업무가 예금자 및 채무자를 향한 정의 및 사랑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며, 그 다음 그러한 정의와 사랑을 어떻게 하면 특별히 잘 실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은행 대출 부서에 속한 직원이라면 채무자들의 특정 상황에 주목하자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모기지 사태에서 주목 받은 "로보 사이너(Robo-signers)" 소동은 굉장히 많은 채무자들이 금융계에서 인간관계의 측면을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요구가 전혀 관철되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은행 직원이라고 해서 모든 담보권 행사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에 처한 채무자들에게 개별적인 관심을 좀 더 많이 기울여야 한다는 얘기다.

 

   은행의 인사 담당자는 새로운 직원을 고용할 때 정의와 사랑에 대한 지원자의 열정을 특별히 눈여겨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금융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하면 자신의 업무를 통해 채무자와 채권자를 향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지 알아내지 못하거나, 그런 방향으로 조직을 변화시켜나가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들은 해당 조직에 적합한 직원들이 아닐 수도 있다.

 

   금융 전문가들은 금융의 두 가지 성경적 토대를 자신들이 실천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첫째, 금융 전문가들은 주로 고객의 대리인이나 청지기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개인적 이득보다 고객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둘째, 금융 전문가들은 종종 계약이나 약속을 협상하기도 하고 체결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가 속한 조직이 합의된 약속을 수행할 능력과 의향을 지니고 있는지를 신중히 평가할 의무를 진다. 청지기 사명과 약속 이행은 말 그대로 금융의 신성한 토대이기 때문에, 금융 전문가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에 대한 본을 마땅히 보여야 한다.

 

대출 결정 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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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고객에게 대출을 해줄 것인지의 여부, 그리고 만약 해준다면 어느 정도의 이자율을 책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의 금융 신학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여기서 몇 가지 성경적 금융의 토대가 부각된다. 우선 은행원들은 전지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잠재적 채무자의 상황과 필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쉬지 않고 해야 한다. 은행원들은 채무자로 하여금 대출이 그들에게 실제로 이익이 될 것인지의 여부를 평가하고, 대출금을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둘째로, 채무자나 채권자 모두 미래를 알지 못하므로, 둘 다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신중하고 보수적인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두 당사자는 대출기간 동안 잘못될 수 있는 일, 그리고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 속에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신중하게 의논해야 한다.

 

   셋째로, 은행원은 채무자를 향한 정의와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대출 상품을 채무자에게 안내해줄 수 있다. 채무자가 어려움 없이 상환할 수 있는 대출이 바로 정의롭고 사랑을 베푸는 대출이다. 초반에는 금리가 낮았다가 시간이 갈수록 높아져서 채무자를 어렵게 하는 대출이 아니라면, 정의롭고 사랑을 베푸는 대출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신용카드와 같이 미래에 더 많은 빚을 지게 할 수 있는 대출은 정의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금리는 대출의 리스크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는 채무자가 리스크에 따라 조정된 대출 수익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리가 너무 높아 채무자가 번영하지 못한다면, 이는 금융의 성경적 목적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성경 원칙은 채무자의 신용 상태에 비해 시중금리가 터무니없이 높아 채무자가 감당하기 어려울 경우에 대한 방침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다. 첫째, 정부 보조를 받는 금리로 대출을 전환한다. 둘째, 금리가 높다고 하더라도 채무자가 대출금을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셋째, 채무자가 대출을 받기보다는 정부나 자선 단체를 통해 자원을 얻을 수 있도록 돕는다. 넷째, 채무자가 대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가난한 이들에게 대출을 제공하는 일이 가장 성경적으로 이행되는 경우는, 비영리 단체가 금융 및 생계 상담과 함께 제로 금리로 대출을 제공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1] 이러한 해결책들의 일부는 우리가 앞서 정의한 금융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어쩌면 가난한 사람이 처한 복잡한 재정 상황을 헤쳐 나가도록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들이 금융기관의 직원들일 수도 있다. 이는 금융 관련 직업이 요구하는 일과 근무 시간을 넘어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될 수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도 해당 주제를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2]

 

 

McIlroy, “크리스천 재정?(Christian Finance?)”는 이것을 "너그러움의 미덕(virtue of generosity)"라 일컫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이자 대출과 다른 지원들을 요구한다.

소액금융(microfinance)은 가난한 이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공동체에 널리 퍼져있는 높은 이자율의 대출의 한 예시이다. 이 모델이 특정 문화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부과하는 것을 성경적인 모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헤지 펀드에서 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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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지 펀드는 보통 개인 예금자는 이용할 수 없는 특화된 금융 상품에 투자하는 상호 기금이다. 헤지 펀드는 보통 규제가 덜하고, 차입금이 많으며, 보다 다양한 종류의 금융 상품에 투자될 수 있고, 다른 일반적인 상호 기금보다 높은 운용 수수료를 청구한다. 최근 헤지 펀드가 뉴스의 관심을 받은 것은 여러 명의 펀드 매니저들이 막대한 금액의 운용수수료를 벌고, 또 몇몇 펀드 매니저들이 내부자거래 혐의로 기소되고, 주가의 급격한 하락이 헤지 펀드의 탓으로 돌려지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지 펀드는 우리가 세운 금융의 틀을 적용해서 이해해볼 수 있다. 헤지 펀드는 리스크에 따른 고수익, 경기 순환과의 연관성이 적은 예금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예금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 많은 헤지 펀드는 파생상품에 투자를 하고, 파생상품 계약에서 채무자 쪽의 당사자들에게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이는 투자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헤지 펀드는 리스크를 줄이고자 하는 기업들에게 사랑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헤지 펀드는 증권 시장에서 과다 공급된 제품을 사들이고 공급이 부족한 제품은 판매하는 사업을 하는 일종의 도매상들로 간주되며, 따라서 이들은 수익을 올릴 시도를 할 뿐만 아니라 시장이 더욱 원활해질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이들은 증권 가격이 좀 더 정확하게 내재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사회에 이바지한다고 할 수 있다.

 

   헤지 펀드 투자라는 것은, 어떤 종류이건, 그 고도의 복잡성 때문에 이들이 정확히 어떻게 정의와 사랑을 가져오는지를 우리는 쉽게 밝힐 수가 없다. 만약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교환이 자발적이고 시장 시세를 따른다면, 각 당사자는 저마다 이득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고 간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복잡성 뒤에는 보조금, 힘의 불균형, 정보 비대칭, 탈세 등 금융의 성경적 토대를 침해하는 요소들이 교묘하게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일부 헤지 펀드의 경우, 특정 투자 전략으로 인해 예금자와 채무자를 향한 사랑이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 어느 정도 확실히 아는 것이 가능하지만, 다른 헤지 펀드들은 이러한 일이 쉽지 않다. 금융 전문가와 투자자들은 특정 헤지 펀드 혹은 투자가 선한 청지기 사명, 정의, 사랑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헤지 펀드 매니저들이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수익을 최대한으로 올리고자 하는지를 끊임없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

 

채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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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대출이 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청지기 사명, 정의, 그리고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대출 행위를 통해 사람들은 자원을 얻게 되며, 이 자원은 또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가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된다.

적정한 금액의 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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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적 원칙을 통해 얼마만큼의 금액을 빌려야 하는지, 혹은 언제 빌려야 하는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 몇 가지 금융의 성경적 토대가 이런 경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간의 지배를 받는 세상, 사회적 순환 주기 및 다양한 개별적 삶의 생활 주기가 존재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고객이나 시민들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성장 혹은 인프라 기회에 투자를 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할 때가 있을 것이며, 채무를 상환해야 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기는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경기 침체기에 여유 자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자원을 현금으로 비축해두기보다는 그것을 투자함으로써 정의와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 개인적 삶의 주기와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 나이가 든 사람들이 제공하는 예금 및 자본을 젊은 사람들이 빌려 씀으로써 젊은 세대가 혜택을 받는다.

 

   둘째, 대출의 목적은 자원을 확보함으로써 미래에 또 다른 자원을 창출해내기 위함,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나중에 대출을 상환하는 것이다. 교육, 성장 기회, 혹은 주거비용의 삭감을 위해 받는 대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다. 앞서 "대출금의 비생산적인 사용" 부분에서 다루었듯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영위하고자 무리하게 대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종류의 탐욕을 지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여기에는 옳지 않은 이유로 돈을 빌리는 행위도 포함된다(눅12:14).

 

   셋째, 채무자들은 그들이 —사랑의 행위로서— 빚을 상환하겠다고 한 약속을 이행할 수 있다고 어느 정도 확신해야 한다. 최소한 채무자가 상환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리스크를 채권자가 인식해서 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이는 거짓 혹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출 신청이나 신원보증을 방지한다. 예컨대, 내일 직장을 잃을 것 같은데도 오늘 대출을 받는 것은 채권자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는 행위가 아니다. 갚을 수 있는 확실한 계획 없이 신용카드의 빚만 늘려가는 것 또한 사랑의 행위가 아니다.

 

   넷째, 대출 받는 돈은 직면할 수 있는 리스크에 비해, 적당하고 현명한 정도의 금액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할 수 없는데도 거듭 신용 한도액까지 돈을 빌린다면, 이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돈을 빌려준 이들에게도 사랑이 되는 행위가 되지 못한다.

 

   위에서 다룬 예들은 주로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금융의 성경적 원칙들은 기관, 그리고 정부의 다양한 금융 관련 결정에도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원칙들은 대부분의 경우 적절한 수준의 부채를 제시하며, 개인, 기업, 그리고 정부의 재정에서 자기자본을 더 많이 사용할 것을 유도한다. 특히, 채무자는 대출 행위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채무자와 채권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장기적 상호 관계의 형성임을 기억하면서, 너무 지나친 금액을 대출받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빚을 지는 것은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대출을 해주고 받는 행위를 통해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다.

 

 

파산, 채무 면제, 그리고 융자 재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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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를 알지 못하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인간의 특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금융의 토대에 포함된다. 이는 결국 불가피하게 상환을 하지 못하는 상황의 사례로 이어질 것이다. 갚지 못하는 상황이 반드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채무불이행은 경솔한 대출, 무능한 일 처리, 은폐, 채무자의 소득 불투명, 계약 체결 당시 채무자 채권자가 모두에게 투명하지 못했던 정보, 혹은 채무자의 번영을 목적으로 계획되지 않은 대출 조건 등의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밖에도, 문제가 없었던 대출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드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채무자가 실직을 했거나, 예상치 못한 병원비를 지불해야 했거나, 혹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채권자에게는 대출의 채무를 삭감 혹은 면제해주거나 상환을 재조정해주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성경에서는 이것이 채무자의 복지나 생계를 위해 필요한 경우 채무자가 자신의 담보를 계속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는 형태로 나타난다.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출22:26-27)

사람이 맷돌이나 그 위짝을 전당 잡지 말지니 이는 그 생명을 전당 잡음이니라. (신24:6)

네 이웃에게 무엇을 꾸어줄 때에 너는 그의 집에 들어가서 전당물을 취하지 말고 너는 밖에 서 있고 네게 꾸는 자가 전당물을 밖으로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 것이며...(신24:10-13)

 

   이웃이 밤 동안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담보로 잡아두었던 옷은 해가 지기 전에 주인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맷돌을 전당잡지 못하는 것은 그것을 빼앗을 경우 방앗간 주인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타당한 전당물이라고 하더라도 채무자의 집 같은 것을 취해서는 안 된다. 이는 이미 힘든 상황에 처한 채무자를 더 큰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장치들이 된다. 비록 채권자가 대출을 통해 기대했던 수익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의 손실을 겪더라도 말이다. 채무자의 상황이 채권자와 공유되는 것이다. 이것이 금융에 내재된 시간적 관계의 속성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보호 장치는 지불불능이라고도 불리는 파산법, 채권 조사, 리시버 제도, 파산 관리, 가압류 등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법은 채권자로 하여금 파산한 채무자의 생활과 업무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상환 대신 취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현대의 법은 또한 담당 공무원이 아닌 채권자가 직접 채무자의 집에 들어가 물품을 압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채무불이행 때문에 채무자가 감옥에 수감되는 등, 근대 사회 이전에 수 세기 동안 빈번하게 일어났던 비생산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들 또한 금지되고 있다. 이는 성경적 원칙들이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현대의 파산법을 통해 이행됨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무자는 빚을 갚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노력해야 한다. 추닝(Chewning)은 하나님의 한결같으심과 잠언 6:1-5 말씀을 배경으로, 만약 채무를 상환하지 못한다면 법원에 파산신청을 해서 채권자로부터 보호받고자 하지 말고, 스스로를 낮추어 채권자 앞에서 채권자의 자비를 간곡히 부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 위의 성경 구절들이 어려움에 처한 채무자들을 채권자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에 따라 보호하고 있음을 생각해볼 때, 이는 너무 확대된 해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채무자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하는 행동은 채권자의 도움과 조언을 구하는 것이라는 추닝의 주장은 옳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대출은 채무자와 채권자 간의 장기적 관계 형성을 유도한다. 따라서 채권자와의 상호적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우선적으로 시도해보지도 않고 파산을 신청하는 것은 그러한 인간관계를 존중하는 방법이 아니다. 티엠스트라(Tiemstra)는 리스크를 신중하게 다뤄야 하며 대출은 "노동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쉬운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책임을 나타내 보이는 신중한 문제"라고 말한다.[2] 금융은 정의와 사랑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며, 신중한 채권자와 채무자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부딪히는 경우에도, 이러한 정의와 사랑은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양 당사자 모두에게 있어서 더욱 커져야 한다.

 

 

Richard Chewning, “Hermeneutics and Biblical Ethics: An Illustration – God’s Immutability and Human Integrity”, The Journal of Biblical Integration in Business (Fall 2000) 49-68쪽.

Tiemstra, “Financial Crisis and the Culture of Risk”.

대출을 위한 담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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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파산, 채무 면제, 그리고 융자 재조정" 부분에서 담보에 대한 내용을 담은 성경 구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대출을 받기 위해 주택을 담보로 제공하는 것은 대체로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적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금융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우리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신중하게 위험을 감수하라는 성경적 가르침과 잠언 22:26-27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최소한 채무자들이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음이 아주 확실하지 않은 이상, 채권자들이 주택을 담보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면, 주택 소유주들은 대출을 상환할 수 있음이 아주 확실하지 않은 이상 그들의 주택을 담보로 제공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많은 선진국들에서 채무자의 소득 수준과 안정성, 그리고 과거 부채 상환의 이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큰 규모의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현재의 대출 관행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담보는 채권자로 하여금 '필요한 경우 난 담보권을 행사하면 되니까 이 대출이 채무자에게 좋은 것인지 혹은 채무자가 상환할 수 있을지에 대해 너무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돼'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채무자도 '빚을 갚지 못하면 은행이 내 집을 갖게 될 테니까, 난 아무런 해를 끼친 게 아니야'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이러한 생각은 성경적 가르침과 맞지 않으며 정의와 사랑의 형태로서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금융의 역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예금자와 채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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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권자와 예금자처럼 자원을 공급하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자원을 오로지 자신만의 이득을 위하는 것이 아닌 공공의 선을 위해 투자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관점은 때때로 "사회책임투자"라고 불린다. 우리는 이를 은행에 예금하는 것이나 대출을 해주는 것이 아닌 주식 투자 형식을 통해 알아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책임원칙은 모든 종류의 다른 투자에도 해당이 될 것이다.

 

   기업은 보유 자원의 양보다 생산적인 기회를 회사가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판단 하에서 주식을 발행한다. 기업은 투자자들에게 주식을 판매함으로써 추가적인 자원을 습득한다.[1] 투자자는 자신의 자원을 기업이 일정 기간 이용할 수 있게 허락해줌으로써 기업,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업의 고객, 협력업체, 직원,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기업은 투자자에게 배당금이나 주가상승 보상권과 같은 형식으로 일정한 수익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한다.

 

   투자자들은 가능한 한 금융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천하는 기업의 주식만을 구매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선한 청지기의 역할을 하는 기업, 자신들이 판매하는 재화나 용역을 통해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기업, 그리고 고용 관행이나 공동체 관계에 있어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기업들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수천 개에 달하는 기업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되기 때문에 실제로 투자자들이 이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청지기 사명이나 정의, 사랑 등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기업들을 걸러내도록 도와주는 상호 기금 투자 옵션들이 여러 가지 있다. 사회적인 책임투자와 성경적인 책임투자에 대한 문헌과 자료는 많지만, 이를 더욱 세부적으로 알아보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2] 하지만 이러한 투자 접근법은 이 글에서 다루어진 틀과 완벽히 일치하며, 마땅히 행해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앙과 주식 투자 결정을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금융은 무엇인가(What Finance Is)"에서 설명했듯이, 우리는 "채무자"라는 단어를 현재 자원을 사용하고, 후일에 돌려줘야 하는 자원을 빌려 쓰고 있는 모든 가계, 사업,  정부를 정확히 담아내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예시로 Rob Moll, “Overturning the Money Tables”, Christianity Today (July 15, 2008)를 보라.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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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금융의 기초를 세우셨으며, 이것은 통화, 중재기관, 금융상품, 가격과 같은 금융제도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상적으로는, 이러한 제도들을 통한 금융 업무는 청지기 사명, 정의, 그리고 사랑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수단 중 하나가 된다. 채무자와 채권자는 시간을 두고 자원을 서로 교환하거나 공유함으로써 여러 사람이 번영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자원을 증대시킨다. 하지만, 인류의 타락은 하나님의 다른 창조물과 마찬가지로 금융을 크게 손상시켰다. 특히 탐욕과 거짓의 죄는 금융 분야에 만연하여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우리의 능력에 큰 손상을 입힌다. 하지만, 금융은 여전히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긍정적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금융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수 있는지, 그리고 청지기 사명과 정의, 사랑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금융 전문가, 채무자, 예금자 및 채권자들 모두 회복을 이루는 하나의 축으로서 금융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로서, 우리의 결정과 행동에 새로운 금융의 토대를 적용함으로써 우리 스스로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금융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를 더욱 잘 이해하고 이를 드높이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첫째, 우리가 세운 틀의 특정 요소들과 특정 실무 사이의 연결고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어, 금융 전문가들은 이러한 성경적 틀을 주택담보대출 혹은 투자 관리의 특정 실무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금융에 대한 회복된 관점과 금융의 실제 타락한 모습 간의 괴리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 비록 몇 가지 예가 주어지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금융의 역할이 사회에서 높임을 받을 수 있도록 사고방식이나 관행, 제도 등을 금융 분야의 전문가들이 발전시켜나가야 한다. 셋째, 이 글에서 세워진 신학적 틀은 파생상품이나 보험상품에 적용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주제들이 다루어지지 않는다. 넷째, 우리는 금융시장이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서로를 섬기거나 특별히 가난한 사람을 섬길 수 있도록 해주지는 못함을 살펴보았다. 정부나 자선단체와 연관된 금융의 역할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아보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금융의 의미를 일정한 시간에 걸쳐 채무자와 채권자(그리고 이들의 자산 등가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환으로 한정시켰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금융은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계 혹은 조직 내의 자원 배분을 또한 의미할 수 있으며, 그 예로 예산 책정, 회계, 제품 설계, 프로젝트 계획, 그리고 내부 재무분석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제들을 다룬 또 다른 글이 나중에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