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레위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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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는 일에 대한 안내를 구하는 사람에게 위대한 원천이 된다. 비록 오늘날 우리 대부분이 경험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직장 얘기긴 하지만, 레위기는 직접적이고 실용적인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 더욱이 레위기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 삶과 일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드러내시는 핵심 부분 중 하나다. 이 책은 구약의 담화와 신학적 기초를 형성하는 모세오경 중 세 번째 책으로서, 오경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두 번째 책 출애굽기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디에서 인도해 내셨는지 말한다면, 레위기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어디로 인도해 들이시는지를 말한다.[1]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임재로 충만한 삶이다. 레위기에서 일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가장 중요한 무대 중 하나이며,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일터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하신다.

 

   레위기는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 및 신약의 안식과 관련해서 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위대한 계명(막 12:28-31)은 레위기 19장 18절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은 예수님의 사 명을 진술하는 중에서도 핵심이 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님이 율법의 “일점이나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을 때(마 5:18), 레위기에는 그런 점과 획이 많이 들어 있었다.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새로운 견 해를 제시하셨는데,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은 규정을 준수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 만드신 목적을 따르는 데서 발견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율법을 “제일 좋은 길”(고전 12:31)로 성취해야 하며 율법의 일점일획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초월하는 방식으로 성취해 야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 율법의 정신을 성취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율법이 말하는 내용을 배움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율법의 대부분은 레위기에서 발견되며, 그것의 대부분은 일터에 적용된다.

 

   레위기가 일에 대한 예수님 가르침에서 중심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일에 대한 하나님 뜻을 알기 위해 레위기로 향하는 게 옳다. 물론 우리는 레위기에 나오는 법전을 이해해야 하며, 그것을 매우 상이한 오늘의 경제 및 사회 상황에 적용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사회 구조나 언약 관계에서 볼 때 고대 이스라엘 사회와 유사하지 않다. 예를 들어, 오늘날 직장인 대부분은 야생 동물에 의해 찢긴(레 7:24) 소나 양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이 관련되어 있는 레위 제사장,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리던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이 이해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율법이 하나님 은혜에 대한 도구가 된다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레위기를 단순히 인용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향해 성구 한 절을 읽으면서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심판을 선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레위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과 의향을 이해한 다음에 레위기를 오늘에 적용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 삶은 그분의 거룩하심을 반영하며 그분의 의도를 존중하고 천국의 통치를 이 땅에서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것을 아홉 번 거론하는데, 주로 이스라엘이 앞으로 순종해야 할 동기로서 그것을 제시한다(11:45; 19:36; 22:33, 23:43; 25:38, 42, 55; 26:13, 45).

레위기에 나오는 ‘거룩’(성결)의 기본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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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라는 책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진리에 기초한다. ‘거룩’(qodesh)이라는 말은 레위기 히브리어 원문에서 100회 이상이나 등장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모든 악이나 흠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어 계시다는 의미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완벽하면서도 온전하게 좋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전적인 충성과 하나님만을 향한 예배, 사랑에서 비롯된 순종을 받기에 합당하시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된 연유는 하나님의 행위에 의해 그들이 거룩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스라엘이 매우 실질적인 방식으로 거룩하게 행동하기를 여호와께서 기대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 자신이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도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레 11:44, 45; 19:2 20:7 21:8). 레위기에 나오는 판이해 보이는 율법은 삶의 의식적, 윤리적, 상업적, 형법적 국면을 다루고 있으며, 이 모든 율법은 거룩하심에 대한 이런 핵심 개념에 근거한다.

 

   알렉산더 힐(Alexander Hill)은 하나님의 거룩, 공의 및 사랑에 기초해 크리스천의 기업 윤리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만일 어떤 기업의 행위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롭고 애정이 깊은 품성을 반영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인 것이다.”[1] 힐은 사업을 하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품을 때 하나님의 거룩을 반영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그들의 궁극적인 최우선의 대상이시자 순결과 책임감과 겸손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분이시다. 이런 품성은 농경 사회를 위해 제정된 상법을 재연하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보다, 오늘날 레위기를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이는 율법의 이런저런 규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오늘의 상황에서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분별하는 것이다.

 

   거룩에 대한 이스라엘의 외적 관습은 두 가지 분야로 표현된다. 첫째로, 하나님은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규정에 따라 서로에게 거룩함을 실천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다. 예를 들어, 인류학자인 메리 더글러스는 레위기에 나오는 음식법이 제멋대로 제정된 것도 아닐뿐더러, 주로 사람의 건강을 염두에 두고 제정된 것도 아님을 밝혀냈다. 이스라엘이 매일 먹는 음식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강력하게 상기시키고 강화하는 역할을 한 것이었다.[2] 이것은 ‘구별된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데 필수적이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철폐하셨으며(엡 2:14-16) 따라서 그분의 제자는 모두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지적했듯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없으므로, 크리스천에게는 더는 그런 구분을 상징하는 음식들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3] 이 원리는 상이한 종류의 동물을 교배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 상이한 종자를 동일한 밭에다 혼작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 상이한 직물로 만든 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율법(레 19:19)뿐만 아니라 이발이나 문신을 금지하는 율법(레 19:27-28)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거룩하라고 요구하신 두 번째 분야는 다른 나라와의 관계였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모세의 말을 빌리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다면 위대한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게 되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열국이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신 4:6-8). 하나님의 백성이 일상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야 하는 강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라이트는 이런 사명에 대한 동기를 다음과 같은 말로 확증했다. “종교적 구별은 윤리적 구별을 통해 구현되어야 하며, 이 두 가지는 다 넓은 의미의 거룩에 포함된다. 그런데 윤리적인 하나님 여호와(YHWH)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윤리적 구별이었을 것이다.”[4]

 

   따라서 레위기에서 ‘거룩’은 구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번영시키기 위한 것이며, 나아가 각 구성원이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한 것이다. 거룩은 규정을 따르는 개인 행위와 관련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인 하나님 백성 전체의 삶과 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이에 비춰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이방인에게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신 요구(마 5:13-16)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거룩하라는 말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도 사랑하며 “그러므로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 5:48 레 19:2, 18 참조)라고 한 율법을 초월하는 것이다.

 

   요컨대 고대 이스라엘이 레위기를 따랐던 것은 그것이 일련의 특이한 규정이어서가 아니라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임재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위기는 오늘날 하나님 백성에게도 중요하다.

 

Alexander Hill, Just Business: Christian Ethics for the Marketplace, 2nd ed.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8), 15쪽.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An Analysis of the Concepts of Pollution and Taboo (London: Routledge, 1966).

Christopher J. H.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4), 299쪽.

Christopher J. H. Wright, The Mission of God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6), 336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이스라엘 희생제사 제도 (레1–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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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는 이스라엘의 희생제사 제도에 대한 규정과 함께 시작되는데, 제사 제도를 바라보는 데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첫째는 희생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에 참여하는 평신도의 관점이다(1-5장). 둘째는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의 관점이다(6-7장). 이어서 어떻게 제사장이 임직을 받으며 성막에서 사역을 시작하는지를 배울 것이다(8-9장). 그다음 하나님이 예전(禮典) 책임과 관련된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인해 나답과 아비후라는 제사장을 죽이신 사건에 비춰서, 제사장에 대한 추가 규정이 나온다(10장). 이 자료가 현대 일의 세계와는 무관한 공허한 예전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업장과 일터에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난제들을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알아봐야 한다.

 

공동체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 (레1-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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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제사의 목적은 때때로 발생하는 정결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희생제물을 ‘드린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문자대로 하면 ‘(그것을) 가까이 가지고 오다’라는 의미다. 희생제물을 성소 가까이로 가지고 오려면 예배자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예배자의 개인 비행의 정도는 주요 사항이 아니었다. 불결로 인한 오염은 고의적이든 아니든 간에 죄를 저지른 비교적 소수인 사람과 그런 악행이 그들 중에서 횡행하도록 허용한 침묵하는 다수로 구성된 전체 공동체에 영향을 미쳤다. 사회를 부패시킨 책임을 백성 전체가 집단적으로 져야 했으며, 국가 파멸에 준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소를 벗어난 것에 합당한 이유를 하나님께 아뢰어야 했다.[1]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예수님을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여전한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건 참으로 중차대한 문제다.

 

   직장에서 크리스천은 세상이 도대체 무엇을 ‘성공’이라고 정의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거룩한 조언을 구하는 것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그분이 우리 삶 가운데 거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성공에서 거룩으로 바뀔 것이다. 이것은 일터에서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우리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우선 일은 우리 노동의 열매를 향유하는 한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스라엘이 드린 희생제물이 여호와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레 1:9, 16)이었듯이, 바울은 크리스천에게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골 1:10)라고 일렀는데 이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이기 때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직장 내에서 두루 다니며 ‘어떻게 하면 이 직장이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임재하실 장소가 될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겠는가? 우리가 몸담은 직장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여하신 것 중에서 가장 선한 것이 무엇인지 표현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가? 그곳에는 모든 이를 공정하게 대우하는 특징이 있는가? 근로자들을 해(harm)로부터 보호해 주는가? 우리의 직장은 지역사회를 더욱 충만하게 번창하도록 하는데 도움될 물자와 용역을 생산해내는가?

 

 

Jacob Milgrom, Leviticus: A Book of Ritual and Ethics, A Continental Commentary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4), 15쪽.

공동체 전체를 포용하는 태도 (레1-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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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는 가끔 서로 대립하는 두 집단, 즉 제사장과 백성의 관점을 하나로 묶는다. 레위기의 목적은 하나님의 전체 백성을 그들의 신분상 차이에 상관없이 하나로 묶는 것이다. 오늘날 직장에서, 크리스천은 재물이나 직위와 상관없이 사람 사이의 반목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우리는 권력 남용이 출세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처럼 보일 경우 그것을 용인하는가? 혹은 잡담이나 빈정거림으로 직장 동료를 판단하는 데 일조하는가? 아니면 편향되지 않은 체계를 통해 고충을 해소하려고 애쓰는가? 직장에서의 따돌림과 편애로 발생하는 해악에 관심을 가지는가? 긍정적인 문화를 조장하고 다양성을 촉진하며 건전한 조직을 건설해 나가는가? 개방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하며 은밀한 정치 공작을 최소화하고 최고의 성과를 얻으려고 노력하는가? 직장 내에서 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하고 고려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의견이 실천에 옮겨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가? 우리는 지속 가능한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가?

 

   이스라엘의 희생제사 제도는 사람의 종교적인 필요를 다뤘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심리적이며 정서적인 필요도 다루었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공동체 전체를 포용했다. 크리스천들은 사업이란 본질상 대개 종교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사람의 존재를 그들의 직업이나 제품과 동등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우리 다짐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로 감싸 안으셨으므로 우리는 모두를 배려하고 모두에게 공정하고 관대해야 할 이유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많다(눅 7:47 엡 4:32 골 3:13).

 

속건제의 의미 (레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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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희생제사 제도에 속한 각각의 제사는 그 나름대로 다 필요성이 있으나, 속건제(배상 제사)는 그 특성으로 보건대 일의 세계와 특히 관련 있다. 레위기에 나오는 속건제는 회개에 대한 성경적 교리의 기원이 된다 (민수기 5장 5-10절이 그 직접적인 병행 구절이다).[1] 레위기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맡겨 둔 물건이나 전당물과 관련해서 다른 사람을 속였을 때, 도둑질이나 착취를 저지르고도 사실을 부인했을 때, 남이 잃은 물건을 줍고도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 맹세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제사를 요구하셨다(레 6:2-3). 그것은 법원에서 부과한 형벌이 아니라 범과를 저지른 후 무사히 지내오다가 나중에 자기 범과를 ‘깨닫자’ 죄의식을 느낀 자가 바치는 배상금이었다(레 6:4, 5). 당국에 의한 기소가 아니라 죄지은 자의 회개가 속건제의 기초가 됐다.

 

   종종 그런 죄가 상거래나 다른 업무적인 상황에서 저질러졌을 것이다. 속건제는 가책을 느낀 죄인에게 그릇되게 취한 것에다가 20퍼센트를 추가해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레 6:4-5). 인간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죄인은 제사장에게 제물을 가져가 제사장의 제사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었다(레 6:6-7).

 

   속건제는 재정 오용으로 파괴된 대인관계를 치유하는 것과 관련된 몇 가지 원칙을 특히 강조한다.

 

1. 사과하는 것만으로는 그릇된 관계를 바로잡는 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취한 것을 전부 반환하는 것도 충분하지 못했다. 따라서 오늘날 징벌에 의한 손해 배상 개념과 유사한 것이 추가됐다. 그러나 속건제를 드릴 때는 법원에서 부과하는 징벌에 의한 손해 배상과는 다르게 제물을 드리는 자가 능동적으로 해당 손실에 참여함으로써 피해자가 입은 고통에 동참하게 되어 있었다.

2. 다른 사람에게 끼친 피해를 바로잡는 데 필요한 모든 사항은 피해자에게만 공평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해자에게도 유익했다. 속건제는 자기 범죄와 그 파괴적인 효과를 인식한 사람의 양심을 사로잡는 고통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속건제에서는 죄를 진 사람이 그 문제를 충분하고도 완벽하게 처리해 종결짓고 평안을 얻을 수 있도록 방책을 마련해 놓았다. 이 제사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 보이는 조치였다. 고통과 상처가 중화됨으로써 곪거나 폭발해 보다 더 심각한 범죄가 되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피해자(또는 피해자의 가족)로 하여금 그 문제에 대해 보상을 받기 위해 스스로 문제 제기를 해야 할 필요성을 없애는 조치기도 했다.

3. 십자가 위에서 이룬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이 보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이 율법의 요구의 핵심이며(레 19:18 롬 13:9), 보상해 준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에 필수적인 표현이다. 예수님은 율법이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이 보상해 준 부요한 세리장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심으로써, 용서가 무엇인지를 이해한 사람의 실례로 그를 내세우셨다(눅 19:1-10).

4. 마태복음 5장 23-24절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도 사람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필수 선결 조건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것은 보상을 초월하는 구속의 단계지만, 그것이 보상을 대치할 수는 없다.

 

   속건제는 하나님이 우리의 비행으로 손해를 입거나 피해를 당한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용서의 권한을 행사하지는 않으실 것임을 강력하게 보여 주는 제도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끼친 손해와 손상을 보상해 주기 위해 값싼 대체물을 바침으로써, 심리적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Jacob Milgrom, Leviticus 1-16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8), 345쪽.

부정한 것과 정한 것 (레11–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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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 11장 45절은 레위기 11-16장의 주제가 되는 논리를 전개한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러 삶의 모든 국면에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반영하라고 말씀하셨다. 레위기 11-16장은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분류하는 것(11장) 및 정결 예식(12-15장)을 다룬다. 그것은 백성과 하나님의 성소를 정결케 하기 위한 속죄일 행사 절차(16장)로 끝을 맺는다.

 

   크리스천들도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이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에 대한 반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레위기 율법이 다루는 주제와 범위는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는 당황스럽다. 여기에 담긴 구체적 규정에 우리가 찾아내야 할 영구적인 윤리적 원리가 담겨 있을까? 예를 들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동물을 먹는 것은 허락하시면서 다른 것들은 먹지 못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기 어렵다. 왜 피부 질병(우리가 오늘날 확실히 규명하기조차 힘든 질병)에 대해서는 그렇듯 우려하면서 보다 더 심각한 다른 질병은 우려하지 않는 것일까? 사회가 직면한 모든 질병 중에서, 곰팡이 문제가 정말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일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우리가 본문에서 음식 산업, 의학, 집이나 직장에서의 환경 오염에 적용 가능한 내용을 얻으리라고 기대해도 되겠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우리는 상이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규정을 따라야 하는지 여부를 물어서는 그 해답을 얻지 못한다. 이 단락이 우리 공동체의 복리를 어떻게 구현하는지를 탐구할 때 비로소 그 해답을 발견할 것이다.

 

 

특정 동물 먹는 것을 허용하다 (레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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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 11장에서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동물의 분류에 관한 핵심 논리를 제공하고자 여러 가지 그럴 듯한 이론이 전개된다. 그 각각의 이론에는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일치를 본 이론은 없다.

 

   가장 최근에 이 논리에 대한 광범위한 해석이 랍비 야곱 밀그롬(Jacob Milgrom)으로부터 나왔는데 그는 이스라엘 음식법을 윤리 체계로 제시했다.[1] 그는 세 가지 주요한 요소에 주목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선택할 식용 동물을 엄격하게 제한하셨고, 그들에게 특별한 도살 규칙을 주셨으며, 그들이 피를 먹지 못하도록 하셨다. 피는 생명을 대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요소에 비추어, 밀그롬은 ‘이스라엘의 음식 체계는 인간의 살해 본능을 통제하기 위한 한 방도였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요컨대 “음식을 취해 식욕을 충족할 수는 있으나, 힘에 대한 굶주림은 자제해야 했다. 생명은 침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생명에 무분별하게 손을 댈 수는 없었을 것이다.”[2]

 

   만일 하나님이 어떤 동물을 죽여도 되는지, 어떻게 죽여야 되는지에 대해 세부 사항을 정해 놓으셨다고 한다면,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한층 제한적이며, 하나님께서 더 세밀하게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간과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견해를 뒷받침할 적용 사례는 오늘날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일 모든 농업, 동물 사육, 식품 기업 시설에서 그곳에 수용된 동물에 대한 대우와 조건에 대해 매일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듯 책임을 진다면, 그곳 일꾼의 안전과 노동 조건에는 한층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겠는가?

 

   성경에서 지속적으로 음식을 논의하는 레위기에 아주 세부적인 사항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의 제공, 마련, 소비와 관련해서 모든 신자가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정하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부적절한 태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데릭 팃볼(Derek Tidball)은 우리가 무엇을 먹든 안 먹든, 크리스천에게 성결의 핵심 사항을 올바르게 상기시켜 줬다.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한 혹자의 입장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거룩에 대한 크리스천의 다짐으로부터 분리해 고찰할 수는 없다. 거룩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시라고 권하기까지 한다.[3] 이 같은 권고는 음식과 음료를 생산하고 조리하고 소비하는 일에도 적용된다.

 

같은 책, 704-742쪽.

같은 책, 105쪽.

Derek Tidball, The Message of Leviticus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6), 15쪽.

피부 질병 및 곰팡이 감염에 대처함 (레13–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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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법과는 달리, 질병 및 환경 오염에 대한 율법은 주로 건강에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건강은 오늘날에도 극히 중요한 문제이며 만일 레위기라는 책이 성경 속에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고귀하고 신성한 관심사일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가 전염병과 환경 오염을 다루기 위한 교훈을 제공하며, 그것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해 보인다. 그 당시와는 수천 년의 시간적 간격이 있으므로, 이 단락이 무슨 질병을 언급하고 있는지 정확히 추정하기 어렵다. 레위기의 영구적인 메시지는 주님이 생명의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사람들을 치료하고 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하는 모든 이를 인도하시고, 존중하시고,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레위기의 구체적인 규정이 우리에게 치료와 환경 보호의 일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해도, 더 큰 이 메시지가 분명히 그런 역할을 감당한다.

 

거룩에 대한 이해 (레17–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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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성결)에 관한 교훈 중 일부는 고대 이스라엘 세계에만 국한된 것처럼 보이나, 다른 교훈들은 시간에 제약받지 않는 듯하다. 레위기는 사람에게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라고 명하기도 하지만(레 19:27), 재판관에게는 법정에서 불공정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행해야 한다고 명하기도 한다(레 19:15). 이 중 어느 것이 오늘날 직접 적용되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는 거룩을 도덕적 명령으로 분명하게 이해한다면 이런 교훈이 하나님께 근거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의 다양성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는데, 이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거룩에 대한 생각을 혼란을 주는 것으로 보지 않고 명령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청렴과 올곧은 거래를 거룩으로 장려하게 되고 모순과 이중 거래를 성결에 반대되는 것으로 볼 것이다. 도적질, 거짓말, 거짓된 증인, 저울과 되를 속이는 것, 귀먹은 자를 욕하면서 그들 앞에서는 미소 짓는 것, 마음으로는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친절하게 가장해 말하는 것 등 모든 종류의 기만 행위는 분명히 겉과 속이 다른 처신이다.[1]

 

   미풍양속에 속하는 몇몇 관행(수염을 깎는 것 등)은 어떤 상황에서는 중요할 수 있으나 다른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어떤 관행은 모든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가 처한 특정 상황에서 미풍양속에 기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음으로써 우리는 그런 국면을 분별해 낼 수 있다. 여기서는 일과 경제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단락을 탐구하고자 한다.

 

Mary Douglas, Purity and Danger: An Analysis of the Concepts of Pollution and Taboo (London: Routledge, 1966), 53-54쪽.

이삭줍기 (레1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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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의 추수 방법이 오늘날처럼 효율적이지는 않았지만, 레위기 19장 9-10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보다 더 효율적이지 못한 추수 방법을 가르쳤다. 첫째, 밭의 가장자리를 수확하지 않은 채 남겨 둬야 했다. 그 가장자리 넓이는 밭의 소유주가 정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둘째, 그들은 땅에 떨어진 곡식은 무엇이든지 줍지 말아야 했다. 이 규칙은 수확하는 사람이 곡식 단을 들어 올릴 때와 낫으로 곡식을 벨 때도 적용됐으며 잘라낸 포도 뭉치에서 포도송이가 떨어질 때도 그랬을 것이다. 셋째, 그들은 포도원을 단 한 번만 수확해야 했는데, 아마도 잘 익은 포도송이만 취하고 나중에 익을 것들은 가난한 사람과 그들 중에 거주하는 이민자에게 남겨 줬을 것이다.[1]

 

   이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 거주자들은 자기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 자신의 노동력에 의지해 먹고살아야 한다는 면에서 동일했다. 가난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은 고대 근동 지역에서 통상적인 것이었으나,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규정에서만은 이런 대우를 확대해 이방인 거주민에게까지 적용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이 주변 나라로부터 구분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였다. 다른 성경 본문은 과부와 고아를 이런 부류의 사람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삭줍기에 관한 다른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출 22:21-27; 레 23:33 신 24:19-21 삿 8:2 룻 2:17-23 욥 24:6 사 17:5-6 24:13 렘 6:9 49:9 옵 1:5 미 7:1).

 

  우리는 이삭줍기를 긍휼이나 공의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레위기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우리 재산을 주워 가도록 허용하는 것은 성결의 열매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10)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자선과 이삭줍기를 확연히 구분 짓는 것이기도 하다. 자선을 행하는 사람은 궁핍한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나눠 준다. 이는 좋고 고상한 일이지만, 그것은 레위기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다. 이삭줍기는 지주의 의무로서, 가난한 사람과 소외된 사람에게 생산 수단(레위기에 의하면, 땅)을 제공해 주고 일거리를 제공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자선과는 다르게, 이것은 지주의 관대한 성격에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자선을 통한 기여보다는 오히려 세금에 더 가깝다 할 것이다. 또한 자선 행위와 다르게, 그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무상으로 지불하는 일종의 생활보조금이 아니었다. 이삭줍기에서, 가난한 사람은 그들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해결했는데 이는 지주가 생계를 유지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계 수단에 접근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명령에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삭줍기의 원칙을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분간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많은 나라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토지를 소유한 변덕스러운 정부 관리나 지주가 토지를 관리하도록 하기보다는 토지를 농부에게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토지 개혁이 분명히 필요할 것이다. 보다 더 산업화되고 지식 기반의 경제권에서는, 토지가 생산의 주요 요인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생산적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는 교육 기회, 자본, 제품 및 고용 시장, 운송 체계, 차별 없는 법규가 포함될 것이다. 어떤 해법이 가장 효과적일 것인지 크리스천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해법은 사회 전 분야에서 도출되어야 한다.

 

   분명 레위기에는 오늘날 경제에 대한 맞춤형 체계가 담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레위기에 나오는 이삭줍기 제도는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한 가지 의무를 지워 준다. 그것은 궁핍한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생계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지주 한 사람이 이삭줍기 기회를 전 지역에서 허용할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 그 어떤 부자도 모든 실업자나 반실업자에게 고용의 기회를 제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진 자들은 고용의 기회를 창출하기 위한 선봉대로 부르심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크리스천 기업가는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일자리 창출의 역할을 다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정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성경의 진실 말하기”와 “직장에서의 진실 말하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다” 부분을 보라.

 

 

Milgrom, Leviticus 1-16, 225쪽.

정직하게 행동하기 (레1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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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으로 거래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거짓된 맹세를 함으로써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등 레위기에 나오는 계명 모두에 대해서는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을 살필 때 더 낯익은 표현을 만난다.  정직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성경의 진실 말하기”와 “직장에서의 진실 말하기에는 예외가 있을 수 있다” 부분을 보라. 하지만 레위기에서 특이한 점은 “서로 거짓말하지 말며”(레 19:11) 배후에 있는 히브리어 표현이다. 문자적으로 하면, 이 구절은 ‘사람은 자기 amit[아밋]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밋’은 ‘동료’, ‘친구’, ‘이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스라엘 공동체의 동료 구성원이 포함되지만, 레위기 24장 17-22절 중 19절 상황에 의하면, 거기에는 이방인 거주자도 포함되는 듯이 보인다. 이스라엘의 윤리와 도덕은 주변국보다 분명하게 더 나았으며, 그들은 외국에서 이주한 사람도 자국에서 태어난 시민과 꼭 같은 방식으로 대우해야 했다.

 

   어쨌든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진실을 말하는 것과 거짓을 말하는 것의 관계적 측면이다. 거짓은 엄정한 사실을 허위로 진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료, 친구, 이웃을 배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말은 단지 빤한 거짓말을 피하기 위한 기술적 분석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으로부터 흘러나와야 한다.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나는 그 여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마음속에 솔직하지 못한 논리를 품고 엄밀히 따지면 거짓말은 아닌 진술을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동료인 시민들은 그가 신의를 배반했다고 느꼈고, 나중에 그는 이런 평가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무를 어겼던 것이다.

 

   직장에서는 제품, 봉사, 사람, 조직, 상황의 긍정적인 측면이나 부정적 측면을 홍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크리스천은 어떤 주장을 역설해야 할 때 거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내용이 거짓말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참된 말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 마음속에 거짓된 인상을 줬다면,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진실성에 대한 논의가 표현법에 대한 기술적 논쟁으로 변질될 때마다 우리는 그 논의가 다른 사람에게 거짓을 말하려 했던 것의 문제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게 현명할 것이다.

피고용인을 공평하게 대하기 (레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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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네 이웃을 억압하지 말며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레 19:13). 일용직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농사지을 땅이 없는 더욱 가난한 사람이다. 그들은 특히 노동의 대가를 즉시 지불받아야 생존할 수 있으므로 하루 일이 끝날 때마다 임금을 지불해 줘야 한다(신 24:14-15).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고용주가 노동 조건을 정하며 피고용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종업원에게 압력을 가해 그들로 하여금 사장이 정치적으로 호감을 갖고 있는 후보에게 기부를 하게 하거나 퇴근 시간 이후에도 계속 일하도록 하는 사례가 발생한다. 이런 관행은 대부분 불법적이지만 불행하게도 통상적으로 발생한다.

 

   보다 더 문제 되는 상황은 법적으로 고용 허가를 내 줄 서류를 갖추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다. 그런 사람은 주로 농업, 조경업 등 작은 사업체에서 일한다. 왜냐하면 고용주나 종업원이나 모두 불법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피고용인은 고용 계약서나 정부가 규정한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한다. 고용주가 노동자의 상황을 악용해 그들에게 합법적 노동자에게 미치지 못하는 시급을 지불한다거나 수당을 주지 않는다거나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 조건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대와 성적 괴롭힘에 노출될 수도 있다.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그렇게 대우하는 게 합법적인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자원해 열악한 고용 조건에 응한 것처럼 보일 경우는 어떤가? 많은 불법 노동자가 야외 정원과 건축 자재상, 농산물 시장과 다른 집하장에서 일한다. 그런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이 옳은가? 만일 그럴 경우, 최저 임금, 건강 수당, 은퇴 자금, 병가, 퇴직 수당 등 정규직 직원이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제공하는 게 고용주의 의무인가? 크리스천들은 그런 고용의 법적 요건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법적 제도와 실제는 차이 있는 법이라는 구실로 융통성 있게 처신해야 하는가? 사려 깊은 크리스천이라면 이에 대한 그들의 결론에 필연적으로 의견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상황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크리스천이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처리하든 간에, 레위기는 우리에게 거룩함(실용적 편의가 아님)이 우리 생각의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노동 문제와 관련된 거룩함은 가장 취약한 일꾼에게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난다.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의 권리 (레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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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맹인 앞에 장애물을 놓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4). 이 명령은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에 대한 잔인한 처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청각장애인은 저주를 들을 수 없으며 시각장애인은 장애물을 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레위기 19장 14절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일터에서 모든 사람을 어떻게 대우하는지 들으시며 보고 계시는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라’라고 말한다. 

 

  신체장애가 있는 근로자에게는 신체장애가 없는 사람이 필요로 하는 사무실 집기와 장비가 꼭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다른 모든 사람처럼 고용의 기회는 필요하며 그들의 생산성을 최대한 발휘할 필요도 있다. 많은 경우에 신체장애가 있는 사람이 가장 필요로 하는 바는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직무에서 배제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레위기에 나오는 명령은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을 닮은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반으로 해서 적절한 고용 기회가 당연히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터에서 공의를 행한다는 것 (레19: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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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며 네 이웃의 피를 흘려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5-16).

 

   이 짧은 구절은 공의에 대해 잘 알려진 성경적 가치를 지지하며 그것을 상당히 확장한다. 첫째 구절은 재판장에 대한 말로 시작되지만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로 끝난다. 소송 사건을 편파적으로 판결하지 말며 우리 이웃을 불공평하게 판결하지 말라는 것이다. 히브리어 표현은 사람이나 사건을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점을 부각한다. 직역하면 레위기 19장 15절은 이런 뜻이다. ‘심판할 때 불공정을 행치 말라. 가난한 사람의 얼굴이라고 들지 말고 위대한 사람의 겉모양이라고 두호하지 말라. 이웃을 재판할 때 올바르게 하라.’ 재판관은 문제를 공평하게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선입관(자신이 인지한 ‘겉모양’)을 검토해야 한다.

 

   직장, 학교 및 사회에서 맺는 우리 관계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전반적인 맥락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은 특권을 누리며 다른 누군가는 온갖 종류의 사회적 편견 때문에 억압을 받고 있다. 우리가 사람과 그들의 상황을 깊숙이 알기 전까지 판단을 보류하는 일이 얼마나 엄청난 차이를 만들지 상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우리 팀에서 골치 아프게 하는 사람을 뒤에서 험담하는 대신에 시간을 내서 그 사정을 알아보려 한다면 어떨까? 학교나 사회에서 우리를 껄끄럽게 만드는 사람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 본다면 어떨까? 신문, 텔레비전, 잡지 등을 뒤져서 우리와 다른 관점을 가진 경우를 찾아내 본다면 어떨까?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더 깊숙이 알아본다면 우리에게 더 큰 지혜가 생겨서 맡은 일을 공정하게 더 잘할 수 있지 않겠는가?

 

   레위기 19장 16절 후반부는 사회적 편견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문자적으로 하면, 히브리 원어는 ‘네 이웃의 피를 방관하며 그냥 있지 말라’라는 의미가 된다. 앞의 절에 나오는 법정 용어로 하면, 편향된 증언(“중상”)은 피의자의 생명(“피”)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 경우, 편향된 말을 하는 것도 그릇된 행동이지만, 억울하게 잘못 기소된 피의자를 대신해 증언하는 일을 자원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것은 더욱 그릇된 행동이다.

 

   직장 내 리더들은 종종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근로자들은 직장에서 불공정한 증인이 될 수 있고, 또 그렇게 개입하는 것이 합당한지 의문이 들 때도 있을 것이다. 레위기는 학대당하는 자를 위해 분연히 일어서는 것은 하나님의 경건한 사람이 갖춰야 할 필수 품성이라고 주장한다.

 

   보다 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레위기는 거룩에 대한 신학적 시각을 전체 공동체에 적용한다. 우리가 몸담은 지역사회의 건강과 우리가 공유하는 경제가 위기에 처해 있다. 한스 큉(Hans Küg)은 사업, 정치, 종교의 필연적인 상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경제 사상과 행위도 가치가 개입되지 않거나 가치중립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생태계적 책임을 정치가에게 전가한다고 되는 게 아니듯이, 도덕적 책임과 윤리적 책임도 종교에 떠맡길 수는 없는 법이다. …… 윤리적 행위는 마케팅 계획, 판매 전략, 생태계적 부기(簿記) 및 사회적 대차대조표에 첨가되는 민간 부문의 지표가 되어서는 안 되고, 인간의 사회적 행위를 위한 자연적 틀을 형성해야 한다.[1]

 

   가정, 기업, 정부, 학계, 의료계, 농업 등 모든 종류의 일터에는 각자 감당해야 할 독특한 역할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모두 거룩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곳이다. 레위기 19장 15-16절에 의하면, 성결은 겉으로 드러난 가치에 가려져 있는 이면에 초점을 맞추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주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Hans Küng, Global Responsibility: In Search of a New World Ethic (New York: Continuum, 1993), 32-33, quoted in Roy Gane,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Leviticus, Numbers (Grand Rapids: Zondervan, 2004), 352쪽.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레19: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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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구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라는 명령일 것이다. 이 계명은 너무도 유명한 것이어서 예수님과 랍비들도 그것을 두 개의 지상대계명 중 하나로 간주했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막 12:29-31)다.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 13:10)이라고 말했다.

 

나를 위해서 하듯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기

 

   이 명령의 핵심은 “네 몸처럼”이란 말 속에 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위해서 일한다. 일하는 데는 자기 이익이 강력한 요소가 된다. 우리는 일하지 않으면 먹을 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성경도 이런 명령으로 동기 부여를 한다(살후 3:10). 하지만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네 몸처럼”이란 말은 우리가 우리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도 동일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것은 매우 고귀하고 중요한 부르심이다. 자신의 필요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도 일해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이 계명을 성취하기 위해 두 배로 일해야 한다면 즉, 자신을 위해서 하루를 일하고 이웃을 위해서 또 하루를 더 일해야 한다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로, 동일한 일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동시에 이웃도 사랑하는 게 가능해졌다. 적어도 우리 일이 고객, 시민, 학생, 가족 및 다른 고객에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제공해 주는 한 그게 가능해졌다. 교사는 월급을 받지만 동시에 학생에게 월급 못지않게 귀중한 지식과 기술을 전달한다. 호텔 종업원은 급료를 받는 대신에 손님에게 청결하고 위생적인 방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직업에서 우리가 만일 받는 급료 이상의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을 위해 이득을 편취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들이 제공하는 가치를 초과하는 월급과 상여금을 내놓으라고 명령할 힘을 가질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연계되거나 부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거의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계약, 보조금, 상여금, 불요불급한 직책의 형태로 커다란 보상을 짜낼 수도 있다. 거의 모두에게 우리 의무를 태만히 하면서도 급료를 받을 수 있는 순간이 발생할 수 있다.

 

   보다 더 넓게 생각해서, 만일 우리 일에 대해 선택할 여지가 아주 많다고 치자. 그럴 때 우리가 직업을 결정하는 데 다른 사람에 대한 섬김 요소가 얼마나 큰 역할을 차지할 것인가? 거의 모든 종류의 일은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직업이나 일할 기회가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봉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높은 급여, 명성, 안정감, 위로, 쉬운 일감을 가져다주는 일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 어려운 사람을 위한 기회,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보호, 공의와 민주주의, 진리, 평안,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일을 선택할 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레위기 19장 18절은 우리에게 후자도 전자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좋게 대하라?

 

   우리는 이 고귀한 부르심에 응답하는 대신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에 대한 우리 이해를 완화해서 그 계명을 ‘좋게 대하라’ 정도의 진부한 표현으로 바꾸기 십상이다. 그러나 좋게 대한다는 것은 종종 우리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것에 대한 면피(面皮)나 구실과 다를 바 없다. 레위기 19장 17절은 우리에게 그 반대가 되라고 명령한다.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해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레 19:17). 이 두 가지 명령 ‘네 이웃을 사랑하라’와 ‘견책하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 쌍이지만 이 구절은 잠언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 27:5).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교회에서 받는 교훈은 언제나 좋게 대하라는 것뿐이다. 만일 이것이 직장에서 우리 규칙이 된다면, 그것은 개인에게나 직장에나 재앙이 될 수 있다. 좋게만 대하는 태도는 불량배나 약탈자가 크리스천을 학대하거나 조종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짓을 하도록 놔둘 수도 있다. 그런 태도는 크리스천 경영자로 하여금 직원의 성과를 검토할 때 결점을 눈감아 주도록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직원이 자기 분야에서 롱런하는 직업인이 될 동기를 빼앗는 것일 수도 있다. 좋게만 대하는 태도는, 때로 분노를 오래 간직하고 적의를 품으며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레위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가끔 정직한 견책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르쳐 준다. 이것은 무감각에 대한 면허장이 아니다. 면책할 때 우리는 겸손함과 긍휼함으로 면책해야 하며, 그런 상황에서 우리도 견책을 받아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윤리’의 “직업 윤리에 대한 개요” 부분의 “실생활에서의 명령 접근법”과 “인격 접근법”을 보라.

 

누가 내 이웃인가 (레19: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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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방인 거주자를 “억압”(NRSV)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레 19:33). (동일한 히브리어 동사가 레위기 25장 17절에서도 나온다.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이 명령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34). 이 성구는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의 도덕성(‘이방인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과 하나님 되심(‘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다’) 사이의 깨뜨릴 수 없는 연관성을 보여 주는 대단히 강력한 실례가 된다. 이방인을 억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거룩한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과부 및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레위기 19장 9-10절을 보라) 이방인 거주자는 힘없는 국외자의 대표였다. 오늘날 직장에서, 권력 차별은 국적 및 성별 차이에서 발생할 뿐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요인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대부분 직장에는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아도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는 권력의 계층구조가 발달되어 있다. 레위기 19장 33-34절로부터, 하나님을 진지하게 예배할 때처럼 일터에서도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공평하게 거래하기 (레19: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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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락에서는 길이, 무게 또는 품질을 거짓으로 측정함으로써 사업상 속이는 것을 금지하며, 저울, 저울추 및 표준 거래 장비를 들어 보다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갖가지 도량형 기구는 이 규칙이 토지 거래부터 마른 상품과 젖은 상품에 대한 극히 세밀한 측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적용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레위기 19장 36절에서 네 번씩이나 언급된 히브리어 ‘tsedeq[체데크]’(NRSV에는 “honest”)는 정직하고 흠이 없다는 면에서 올바른 품성을 나타낸다. 모든 저울추와 측량 도구는 정밀해야 한다. 요컨대 구매자는 자신이 지불한 값에 해당하는 만큼 물건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판매자는 아주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서 구매자가 예상하는 것보다 적게 상품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은 무게, 면적, 부피 등을 엉터리 기구로 측정하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과장된 청구, 그릇된 통계치, 부적절한 비교, 지킬 수 없는데 하는 약속, 실제로는 실현 불가능한 거품 섞인 선전, 숨겨진 조건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여러 직장에서의 적용 사례를 보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의 “직장에서의 진실 말하기” 부분을 보라.

 

 

   대형 신용카드사에서 일하는 한 여성이 이와 관련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신용 이력이 열악한 가난한 사람에게 신용 카드를 발급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고율의 이자를 부과하지만, 고객들의 채무 불이행 비율이 너무 높아서 단지 이자만 부과해서는 이윤을 남길 수 없다. 우리는 비용을 벌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나의 난제는 고객들은 빚을 두려워하므로 월별 수지 차액을 제때에 갚아 버린다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는 우리 비용이 충당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들의 경계심을 늦추게 할 책략이 필요하다. 처음 6개월 동안은 매달 15일에 다음 달 15일이 변제일인 청구서를 그들에게 보낸다. 청구 형태를 알고 난 그들은 매달 14일에는 틀림없이 입금한다. 일곱째 달 12일이 될 때 우리는 그들에게 다음 달 12일이 만기인 청구서를 보낸다. 그들은 바뀐 내용을 눈치 채지 못하고 평소처럼 14일에 우리에게 돈을 보낸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포착해서 연체 수수료로 30불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채무 불이행을 이유로 그들의 이자를 높일 수 있게 된다. 다음 달이 되면 그들은 이미 연체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매달 우리에게 연체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 악순환이 지속된다.[1]

 

   사람들을 속이거나 오도(誤導)하는 방법에 의지해 이윤을 남기는 거래나 사업이, 어떻게 하면 거룩한 하나님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직장이 될 수 있는지 알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TOW 프로젝트 편집장 윌리엄 메신저가 2011년 8월 5일, 시애틀퍼시픽대학교에서 열린 포드햄 컨소시엄에서 말한 내용이다. 요청에 의해 이 여성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안식년과 희년 (레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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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 25장에는 이스라엘의 내부 경제를 성별(聖別)하는 제도로서 7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년(레 25:1-7)과 50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희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안식년을 맞이하면 각각의 농토를 묵혀 둬야 했는데, 이는 건전한 영농 관습처럼 보인다.

 

   희년은 훨씬 더 급진적인 것이었다. 임대되거나 담보 잡힌 땅은 50년마다 모두 원 소유주에게로 돌려주어야 했으며, 모든 종과 매어 있는 노동자를 해방해야 했다(레 25:10). 이는 자연스레 은행 거래와 토지 거래에 지장을 초래했으며, 그런 어려움을 경감하기 위해 특별한 조치가 고안됐는데(레 25:15-16), 그에 대해서는 뒤에서 고찰할 것이다. 희년법의 근본 의도는 이삭줍기법에 나와 있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써(레 19:9-10), 가족 농장이든 아니면 단순히 자기 노동력의 열매가 됐든 모든 사람이 생계 수단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이 실제로 희년이나 희년과 연관된 반(反)노예제도 규정(레 26:25-28, 39-41)을 준수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기 25장의 세부 사항은 그런 율법을 이스라엘이 실행에 옮겼을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희년을 문학적으로 가공(架空)된 이상향적인 제도로 보기보다는 이스라엘이 희년을 소홀히 했다고 보는 게 오히려 낫다. 그러나 그것은 희년법이 실행 불가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자들이 비용과 손실을 초래할 희년의 사회·경제적 파장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일리 있을 것이다.[1]

 

궁핍한 자에 대한 보호

 

   민수기 26장 및 여호수아 15-22장에 기술되어 있듯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후, 그 땅은 이스라엘 부족과 가족에게 할당됐다. 이 땅은 영구히 팔 수 없었는데, 이는 그것이 사람 소유가 아니라 여호와의 소유였기 때문이다(레 25:23-24).[2] 희년의 효과는 분할된 땅의 매각, 담보 또는 영구적인 임대를 통해서 땅을 영구적으로 빼앗기는 가족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땅을 매각하는 것은 한시적 임대와 다름없어서 다음에 돌아오는 희년을 넘어서까지 팔 수는 없었다(레 25:15). 이것은 궁핍한 자가 후손들로부터 생계 수단을 빼앗지 않으면서도 (땅을 임대 주고) 돈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 됐다.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규칙은 이해하기 쉽지 않으나, 밀그롬은 빈곤의 점진적 단계를 셋으로 나누어 설명함으로써 그 규칙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3]

 

1. 1단계는 레위기 25장 25-28절에 나와 있다. 한 사람이 가난해졌다고 하자. 가령, 어떤 농부가 종자를 구매하기 위해 돈을 빌렸는데 대부금을 갚을 만큼 충분한 수확을 얻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땅의 일부를 구매자에게 팔아넘기고 빚을 갚은 후 다음 해에 심을 종자를 사야만 했을 것이다. 만일 그 농부의 친족 중에 ‘기업 무를 자’ (redeemer) 역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땅이 농부에게 귀속될 희년이 되기까지 그는 나머지 수확물을 미리 계산해 구매자에게 돈을 갚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그 땅은 그 무른 자에게 속해 있었으며, 농부는 거기서 경작을 할 수가 있었다.

 

2. 2단계는 보다 더 심각한 경우다(레 25:35-38). 땅을 되찾아오지 못하고 농부는 갚지 못한 빚에 재차 휘말려서 그 땅 모두를 채권자에게 빼앗기게 됐다고 가정해 보자. 이 경우에 채권자는 그 농부에게 자금을 대 주어서 그로 하여금 자기 땅에서 소작인으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 줘야 했는데, 이자는 받을 수 없었다. 농부는 수확한 곡식을 처분해서 이 대부금을 상환하고자 할 것이며 아마도 빚을 다 갚게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 농부는 자기 땅을 되찾을 것이다. 만일 희년이 돌아오기 전까지 대부금을 다 상환하지 못해도, 희년이 됐을 때 그 땅은 농부나 농부의 상속자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3. 3단계는 한층 심각한 경우다(레 25:39-43). 농부가 이전 단계에서 말한 대부금을 갚지 못하거나 그와 그의 가족을 부양하기조차 어려울 경우를 가정해 보자. 그는 일시적으로 채권자의 가속(家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속박(束縛)된 노동자가 된 그는 임금을 바라고 일할 것인데, 그 돈은 전액 빚을 갚는 데 사용될 것이다. 희년이 되면 그는 자기 땅과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레 25:41). 그때까지 채권자는 그를 종처럼 부려서는 안 되며 그를 종으로 팔아서도 안 되고 가혹하게 다뤄서도 안 됐다(레 25:42-43). 채권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애굽에서 은혜로 건져 낸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했다.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소유하셨으므로 그분 외의 그 누구도 그들을 소유할 수 없었다.

 

   이 규칙의 핵심은 이스라엘 사람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의 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난해진 이스라엘 사람이 그 땅에 살고 있는 부요한 이방인 거주자에게 종으로 팔릴 수 있다는 사실은 상정할 수가 있었다(레 25:47-55).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그런 매매는 영구적일 수 없었다. 종으로 팔린 사람은 돈이 생기면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량할 권리가 있었다. 만일 여력이 없을 경우에는, 가까운 친족이 가난해진 이스라엘 사람을 해방시켜야 하는 희년이 되기까지의 햇수를 미리 계산해 이방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기업 무를 자’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그때까지 그들을 가혹하게 대우해서는 안 되고 다만 고용된 일꾼으로 간주해야 했다.

 

희년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가

 

   희년은, 그 백성이 조상의 땅에서 일할 수 있는 양도 불가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친족 체계 내에서 운영됐다. 그들은 그 땅을 하나님의 소유로 알았으며, 하나님과 맺은 관계 덕분으로 그 땅을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사회 및 경제 조건은 이제 존재하지 않으며, 성경적 견지에서 볼 때 하나님은 더 이상 한 국가를 통해서는 구속을 베풀지 않으신다. 우리는 희년을 우리에게 유리한 현재적 관점에서 봐서는 안 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구약 율법의 기독교적 적용에 대해 긴 글을 썼다.[4] 그는 이 고대 율법 속에 암시된 원칙을 찾아내서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윤리적 의미를 포착했다. 그에 따르면, 희년은 신학적, 사회적, 경제적 시각 등 세 가지 기본 각도에서 취급되어야 한다.[5]

 

   신학적으로 볼 때, 희년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땅을 소유한 하나님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모든 시간과 자연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제도다. 백성을 애굽에서 구속해 내신 행위는 그들에게 모든 면에서 공급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이었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안식일, 안식년 및 희년을 지키는 것은 순종과 신뢰의 표시였다. 실용적 입장에서 볼 때 희년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갖고 있는 신뢰, 즉 하나님께서 그들이 당면한 필요와 그들 가족이 당할 앞날의 필요를 다 채워 주실 것이라는 신뢰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부자들에게 채무자를 불쌍히 여긴다면 장차 적절한 보상이 주어질 것을 신뢰하라고 요구한다.

 

   사회적 각도에서 보면, 이스라엘 친족 구조의 최소 단위는 서너 세대가 포함된 가족이었다. 희년은 경제적 재난 가운데서도 그 가족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한 사회 및 경제적 해법이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가족의 채무는 고대 시대에서도 엄연한 현실이었으며, 그것의 결과로 무서운 사회적 질병을 앓았다. 희년은 이런 부정적인 사회적 결과의 존속 기간을 제한함으로써 그 영향을 저지하고자 하는 제도였다. 그리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그들의 먼 조상이 물려준 짐을 떠맡지 않게 하고자 하는 데 의의가 있었다.[6]

 

   경제적 각도에서 보면, 오늘날에 적용 가능한 두 가지 원칙이 드러난다. 첫째, 하나님은 땅이라는 자원이 공평하게 분배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땅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할당됐다. 희년은 재분배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복구에 관한 것이다. 라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그러므로 희년은 개인이 대량으로 땅과 관련한 재물을 축적하는 것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개인이나 가족 소유권의 의미를 파괴하는 거대 규모의 집단주의나 국유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7] 둘째, 가족 단위들은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는 기회와 자원을 소유해야만 한다.

 

   오늘날 입장에서 볼 때, 파산법도 그런 목적의 상당 부분을 성취하고자 하는 의도로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노예로 팔아 빚을 갚을 수 없다. 후손이 조상의 빚까지 갚을 책임은 없다. 생존에 필요한 기본 재산이 압류되지 않도록 보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레위기 25장은 현대 파산법보다 더 광범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듯하다. 그것은 어려운 사람의 개인적 자유와 약간의 재산을 보호할 뿐 아니라 모두가 생계 수단을 소유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가난을 모면하게 하려는 조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레위기에 나오는 이삭줍기법이 보여 주는 것처럼, 해법은 재산 분배 나 대량 전용(轉用)에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사회적 가치관과 사회 구조다. 이 점에서 현대 사회가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실제로 능가하고 있는가? 참된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 신앙인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Christopher J. H. Wright, The Mission of Go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2006), 296쪽.

Bruce Waltke and Charles Yu, An Old Testament Theology (Grand Rapids: Zondervan, 2007), 528쪽. 브루스 월키, 《구약 신학》(부흥과개혁사 역간).

Milgrom, Leviticus: A Book of Ritual and Ethics, A Continental Commentary, 299-303쪽.

Wright, Old Testament Ethics for the People of God, 9장.

이 세 각도에 관한 향후 논의는 라이트의 The Mission of God, 296-300쪽에 나오는 해설에 빚을 졌다.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경제학과 가난한 자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Old Testament Ethics, 5장도 유용하고 적절하지만 다루는 내용의 범위가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의 관심사들을 훨씬 넘어선다.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IVP 역간).

www.jubileedebtcampaign.org.uk

Wright, The Mission of God, 296-297쪽. 크리스토퍼 라이트, 《하나님의 선교》(IVP 역간).

레위기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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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에서 도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일터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에 반대하는 주변 사람의 행위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일터, 가정, 교회, 사회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낼 때, 하나님 임재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 구절을 차에 달고 다닌다든가 기도문을 줄줄 왼다든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닌다든가 또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군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직장 동료, 고객, 학생, 투자자, 경쟁자, 적수 및 우리가 만나는 모두를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때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 상황에서 이것은 우리 일을 통해서 자신에게 하듯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동기 부여, 근면, 권한 행사, 역량 개발, 어쩌면 직업의 선택까지도 활기를 띠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할 수만 있다면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다른 사회 구성원과 조화를 이루며 일하는 것이며, 이스라엘을 노예 생활과 억압에서 건져 내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고자 사회 구조와 체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