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민수기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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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는 우리가 일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한다. 이 책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 목적에 따라 일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렇게 일하고 애쓰면서 광야를 지나 하나님의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가는 중에, 그들은 정체성, 권위, 지도력을 두고 갈등을 경험한다. 우리가 일에 대해 얻을 수 있는 통찰의 대부분은 일련의 명령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실례를 통해서 얻게 된다.

 

   이 책은 “민수기”(民數記, Numbers)라 불리는데,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 족속을 몇 차례 인구 조사한 기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병역(민 1:2-3 26:2-4), 종교적 의무(민 4:2-3, 22-23), 세금 납부(민 3:40-48) 및 농업(민 26:53-54) 등 경제 문제와 정치 문제에 사용될 인적 자원과 자연 자원의 분량을 측정하기 위해서 인구 조사가 실시됐다. 이런 인구 조사는 단순히 수를 세서 보고하는 것 이상이었으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틀을 형성했다. 그 이야기 중에서 통계의 오용(誤用)은 종종 분란과 반란과 사회 불안으로 이어졌다. 수량적 추론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하나님이 친히 인구 조사를 명하셨기 때문이다(민 1:1-2). 그러나 이스라엘이 주님의 말씀 대신에 수치적 분석에 의존했을 때 재난이 따라왔다(민 14:20-25). 온전한 도덕적 추론 대신에 제멋대로 장부에 의존하던 습관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회계 추문과 재정 위기까지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민수기는 애굽도 약속된 땅도 아닌 광야에서 발생한 사건을 기록했다. 민수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bemidbar[베미드바르]’인데, 이는 “시내 광야에서”(민 1:1)를 줄여서 표현한 말로써, 이 책에 나오는 주요 행위인 광야를 통과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여행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민족은 시내부터 약속의 땅을 향해 진행하다가 요단강 동편 지역에 도착했다. 그들이 이곳으로 온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손”(출 6:1)이 그들을 애굽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시켰기 때문인데, 이게 바로 출애굽기라는 책에 담긴 이야기다. 사람들을 노예 신분에 서 건져 낸 것은 하나의 중요한 사안이었으나, 그 사람들에게서 노예 의식을 제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음이 드러났다. 요컨대 민수기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적지까지 여행하는 동안 겪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을 기록한 책인데, 하나님 백성인 우리는 지금도 그런 여행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한 것으로부터 오늘날 삶과 일에서 만나는 도전을 이길 힘을 발견한다. 하나님이 언제나 도와주심으로 우리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수를 세다 (민1: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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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한 번도 나라를 이룬 적이 없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족과 그들의 후손으로부터 시작됐으며, 요셉이 이끌 때 하나의 종족이 됐지만, 애굽에서는 소수 민족으로서 노예 생활을 했다. 애굽에서는 이스라엘 사람의 인구가 증가해 하나의 나라만큼 커졌지만(출 12:37) 노예 생활을 하던 그들은 나라의 체제나 조직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들은 간신히 조직을 유지하는 난민으로서 애굽을 떠났는데(출 12:34-39) 이제는 나라 기능을 하는 조직을 갖추게 됐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의 인구를 조사하고(첫 번째 인구 조사, 민 1:1-3) 지파별 우두머리가 이끄는 임시 정부를 구성하라고 명령하셨다(민 1:4-16). 하나님의 추가 지시에 따라, 모세는 종교 직분자, 즉 레위인을 임명하고 그들에게 성막을 지을 재료를 공급해 줬다(민 1:48-54). 모세는 모든 사람을 위해 진영을 구축한 다음 전쟁에 나갈 만한 나이의 남자로 군대를 조직하고 지휘관을 임명했다(민 2:1-9). 그는 관료 제도를 창안했고 자격 있는 지도자에게 권위를 부여했으며 민사 법정과 항소 법정을 만들었다(출 18:1-27).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창 28:15) 모든 나라에 복의 통로가 될 사명을 완수하기(창 18:18) 이전에, 그 나라는 먼저 효율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었다.

 

   조직, 지도력, 통치, 자원 개발을 위한 모세의 활동은 기업, 정부, 군사, 교육, 종교, 비영리, 근린 협회, 가족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사회의 전 부문에 사실상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세는 모든 경영인, 회계사, 통계학자, 경제학자, 군인 장교, 정치가, 판사, 경찰, 교장, 공동체 지도자, 기타 수많은 사람의 대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 조직, 지도자 훈련, 민간 기관의 설립, 논리적 역량의 개발, 요새의 구축, 회계 제도 개발과 관련해 민수기에 나오는 세부 기술은 하나님이 지금도 오늘날 사회 구조의 정돈과 관리와 자원 공급과 유지를 위임하시고 지도하신다는 것을 시사한다.

 

 

레위인과 하나님의 일 (민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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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 3장부터 8장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일에 초점이 맞춰진다. 레위 족속에 속한 남자는 제사장으로 봉직했다. 대체로 민수기에서는 이 두 용어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을 모든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민 3:40-51). 다른 사람처럼, 그들의 수(數)도 계수됐으며 그들이 병역 의무에서는 면제됐지만 작업 단위 조직은 갖고 있었다(민 4:2-3 22-23). 그들의 일은 다른 일보다 독특했으며 더 고상한 것으로 간주됐던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지성물”(민 4:4)에 대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회막(會幕)과 그 기구에는 독특하면서도 세밀하게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제사장 역할을 다른 사람의 일보다 우월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의 일이 다른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일과 얼마나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사실적으로 그린다. 레위인은 모든 사람의 삶과 일이 하나님의 율법 및 목적과 합치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을 도왔다. 더욱이 레위인이 회막에서 하는 일은 이스라엘 사람 대부분의 일과 아주 흡사했다. 그들은 진영을 파(破)하거나 옮기거나 세우고 불을 피우고 세마포 옷을 빨고 동물을 도살하고 곡식을 가공했다. 따라서 강조점은 레위인의 일을 다른 모든 사람의 일과 통합하는데 있었다. 민수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람들에게 인식시켜 주고,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있는 제사장의 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는 종교적인 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직업의 구심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우리 노동력의 열매를 드리다 (민4,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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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은 자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는 곳인 회막의 건축에 대해 세세하게 명령하셨다. 회막을 짓는 데는 일꾼들이 생산해 낸 아주 다양한 재료가 필요했다. 고급 가죽, 청색 천, 홍색 천, 자색 천, 휘장, 채와 틀, 대접, 숟가락, 주발, 붓는 잔, 등잔, 등잔대, 불 집게, 불똥 그릇, 기름 및 기름 그릇, 금제단, 불 옮기는 그릇, 고기 갈고리, 부삽, 대야 및 향료(민 4:5-16). 이와 유사한 표현이 출애굽기 31장 1-12절에도 나온다. 이 책 3장의 “출 25:1-41:38” 부분을 보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사람들은 전제(부어 드리는 제물 - 민 4:7 등), 곡식(4:16 등), 기름(7:13 등), 숫양(6:12 등), 염소(7:16 등) 및 귀금속(7:25 등) 같은 노동력의 산물을 추가적으로 가져왔다. 회막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이뤄지려면 사실상 이스라엘에 있는 모든 직업, 모든 사람이 필요했다.

 

   레위 사람은 대개 희생제물을 가지고 자기 식구를 먹여 살렸다. 제물은 레위 사람에게 할당된 것이었는데, 다른 족속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경작할 땅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민 18:18-32). 레위 사람이 희생제물을 먹은 것은 그들이 거룩했기 때문이 아니라, 희생 제사를 집전하면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레위 사람이 아니라 백성이 희생제사의 최우선적인 수혜자였다. 사실상 희생제사 제도 자체는 이스라엘 음식 공급 제도의 일부였다. 제단 위에서 불사른 일부 제물과 앞서 언급한 레위 사람의 할당량 외에, 곡식 제사와 동물 제사의 대부분은 제물을 바친 사람이 먹게 되어 있었다.[1] 따라서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제도를 통해 제물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희생제사 제도는 사람이 생산한 다른 것으로부터 몇 가지 거룩한 것들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그 민족의 전반적인 삶과 일 속에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모든 하나님 백성의 재화와 용역은 일터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권능의 표현이다. 적어도 그래야 한다. 구약에서보다 신약에서는 이 주제가 명시적으로 전개된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할 때 그것은 제사장의 일이 된다. 우리가 생산하는 가죽과 천, 접시와 대접, 건축 자재, 학습 계획안, 재무 예측 등은 제사장의 품목이다. 우리가 하는 일, 의복을 세탁한다든지 곡식을 재배한다든지 자녀를 키운다든지 하는 다른 모든 형태의 합당한 일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봉사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질문해 봐야 한다. ‘내 일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며, 그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에게 그분을 보여 주며, 세상에서 그분의 목적을 달성하게 만드는가’ 민수기에 따르면,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매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 및 레위 사람의 후손이다.

 

David P. Wright, “The Disposal of Impurity: Elimination Rites in the Bible and in Hittite and Mesopotamian Literature,”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Dissertation Studies 101 (1987): 34-36쪽.

죄의 자백과 손해 배상 (민5: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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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백성이 반드시 해야 할 역할은 갈등과 학대가 있는 곳에 화해와 정의를 가져다주는 일이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겠다고 맹세했지만,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그런 것처럼 늘 그 맹세에 미치지 못했다. 그 행위는 종종 다른 사람을 혹사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민 5:6). 레위 사람의 일을 통해, 하나님은 그런 죄 악의 행위와 관련된 회개, 손해 배상, 화해의 수단을 제공해 주셨다. 핵심 요소는 죄 있는 쪽이 그가 끼친 손실을 보상해 줄 뿐 아니라 20퍼센트를 더 얹어 줘야 했다는 것인데(민 5:7), 피해자와 동일한 심정으로 손실을 겪는다는 의미에서 그리 했을 것이다.(이 단락은 레위기에 나오는 속건 제사와 병행되는 내용이다.) 이 책 4장의 “레 6:1-7” 부분을 보라.

 

   일터에서 이 원칙을 적용하기 위한 생생한 실례가 신약에 나온다. 세리장 삭개오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했을 때, 그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과도하게 부과한 금액의 네 배나 갚겠다고 말씀드렸다. 보다 더 현대적인 실례를 들어 보겠다. 명시적으로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 병원 중에서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며 직접 재정적 손해를 배상해 주고 관련된 환자와 그 가족에게 도움을 제공하는 곳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1] 그러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세리나 의료진이 될 필요는 없다. 실수를 자백하고 그에 대해 배상할 수 있는 변상의 기회가 우리 모두에게 얼마든지 있다. 이런 기회의 대부분은 일터에서 얻는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일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가? 아니면 약점을 덮으면서 우리 책임을 최소화하려고 애쓰는가?

 

Steve S. Kraman and Ginny Hamm, “Risk Management: Extreme Honesty May Be the Best Policy,” Annals of Internal Medicine 131 (Dec. 1999), 963-967쪽. Further coverage is found in Pauline Chen, “When Doctors Admit Their Mistakes,” New York Times, Aug. 19, 2010.

백성을 향한 아론의 축복 (민6: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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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 사람의 주된 역할 중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제사장이 축복할 말을 다음과 같이 정해 주셨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하나님은 사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즉 영적, 정신적, 감정적, 물질적인 방법으로 축복하신다. 그러나 여기서의 초점은 사람을 말로 축복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한 말은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의 순간이 된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우리가 일터에서 사용하는 말에는 축복하거나 저주하는 능력이 담겨 있으며 다른 사람을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능력도 있다. 우리가 선택해 쓰는 말은 종종 우리가 깨닫는 것 이상의 권능을 발휘한다. 민수기 6장 24-26절에 나오는 축복의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실” 것이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며 “평안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한다.

   일터에서 우리가 쓰는 말이 다른 사람을 “지킬” 수 있다. 즉 안심시키고 보호해 주고 지원해 줄 수 있다. ‘만일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게로 오세요. 나는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충만한 말을 할 수 있으며 상황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반전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역할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에 오류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말은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 화평을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우리 사이에 뭔가가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좋은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찾고 싶어요”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일을 하다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적하거나 비평하거나 꾸짖거나 때로는 심지어 벌을 줘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문제가 된 행동만을 비난할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 전체를 정죄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훌륭한 행동을 했을 때, 우리 평판이나 체면이 약간 구겨질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키는 대신 그들을 칭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은퇴의 문제 (민8: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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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에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일할 연령 제한을 언급한 단락이 등장한다. 레위인은 젊은 나이에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성막과 그 모든 성구를 설치하고 이동시킬 만큼 충분한 체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민수기 4장에 나오는 인구 조사에는 50세가 넘은 레위인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으며 민수기 8장 25절에서는 나이가 50세가 되면 레위인은 현역에서 은퇴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무거운 성막을 옮기는 일 외에도, 레위인의 일에는 피부 질병을 세밀히 조사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레 13장). 돋보기가 없던 시대에는, 사실상 50세가 넘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근거리에서 무엇을 정확히 볼 수 없지 않았을까? 요점은 50세가 만국에 적용되는 은퇴 연령이라는 게 아니라, 누구나 몸이 늙음에 따라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없는 때가 온다는 점이다. 하지만 은퇴가 레위인에게 있어 일의 끝은 아니었다. 은퇴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의 형제와 함께 회막에서 돕는 직무를 지킬” 수 있었다(민 8:26).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전업 주부나 왕성하게 활동하는 정치가 같은 두드러진 예외의 경우를 빼고는 은퇴가 대부분의 직업에 있어서 삶의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은퇴에 대한 현대적 개념은 종종 현역에서 물러나 여가를 즐기는 것으로 대표된다. 레위인의 경우에서 보듯, 그 근본적인 은퇴 이유는 (비록 그 과정은 개인과 직업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긴 하지만) 우리의 신체 및 정신 역량은 나이가 들면 결국 쇠퇴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모세는 80세가 됐을 때 이스라엘 지도자로서 임무를 시작했다(출 7:7). 레위인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은퇴했는데, 현대 시각으로 보면 매우 젊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 목적은 생산적인 일꾼을 직무에서 제거하고자 한 게 아니라 직업 특성상 그들의 직무를 보다 더 성숙한 방향에서 재편하려는 것이었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은퇴한 후에는 한가롭게 지내야 한다는 견해를 민수기는 지지하지 않는다. 레위인처럼 우리도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의미 있는 일로부터 전적으로 쉬고자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직책을 포기하기 원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역량과 지혜는 여전히 가치 있다. 우리는 무역 협회, 시민 단체, 이사회 및 인허가 발급 기관의 리더로서 맡은 일을 통해서 계속 다른 이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 고문, 훈련관, 코치로서 일할 수도 있고, 노년에 교회, 특정 활동이나 스포츠를 위한 클럽, 또는 봉사 기관에서 마음껏 봉사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가족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으며, 그러기에 때가 너무 늦었다면 다른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의 삶을 위해 봉사할 수도 있다. 종종 우리가 하는 가장 귀중하고 새로운 봉사는 젊은 일꾼을 지도하거나 용기를 북돋워 주고 축복하는 일이다(민 6:24-27).

 

   이런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노년이 인생에서 가장 만족스런 기간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이 가진 은사, 자원, 시간, 경험, 관계망, 영향력 및 지혜가 다른 사람에게 가장 도움이 될 수 있는 순간에 은퇴를 하게 되어 도태되는 이들이 많다.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는 여가나 여흥만을 추구하거나 기어이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나이와 관련된 규정 및 사회적 무시가 그들로 하여금 마음껏 일하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성경에는 은퇴 신학을 도출할 만한 자료가 거의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우리 각자는 일하기 위해 준비했던 것 이상으로 은퇴도 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나아가 아직 우리가 젊다면 우리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배우거나 그들을 존중할 수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우리는 남녀노소를 위한 보다 더 공평하고 생산적인 은퇴 정책과 관습을 확립하기 위해 일할 수 있다.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다 (민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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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 12장을 보면, 모세의 형과 누이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의 불평은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방인과 혼인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신 7:3), 정작 모세 자신은 이방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민 12:1). 만일 이런 불평거리가 그들의 진정한 관심사였다면, 그들은 모세 앞에서 또는 그가 최근에 조직한 장로회 앞에서 그 문제를 제기해서 해결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민 11:16-17). 하지만 아론과 미리암은 그들 스스로가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선동했다. 사실상 그들의 불평은 자신들이 최고위직을 차지할 목적으로 대중의 봉기를 선동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모세를 대신해서 그들에게 심한 형벌을 내리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스라엘 대표자로 모세를 선택했으며 모세와는 “대면하여” 얘기했으며 그에게 그분의 “온 집”을 맡겼음을 상기시키셨다(민 12:7-8). 그분은 물으셨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민 12:8). 그에 대한 대답이 없자 민수기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셨다(민 12:9). 그분이 내린 형벌은 먼저 미리암에게 미쳐서 그녀는 나병이 들어 죽음 직전까지 가게 되었으며 아론은 모세에게 용서를 빌었다(민 12:10-12). 하나님이 선택하신 지도자의 권위는 존중돼야 한다. 그런 지도자에게 항거하는 것은 하나님께 항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권위자에게 불만을 품을 때

 

   하나님은 모세의 리더십 안에 특별히 함께하셨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신 34:10). 오늘날 지도자 중에는 모세가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권위를 대면해 목격한 사람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도자의 권위를 존중하라고 명령하셨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롬 13:1-3). 이 말씀은 지도자에게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된다거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거나 그들을 폐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모세처럼 합당한 권위를 지닌 사람에게 불평을 품을 때마다 우리 임무는 그들의 리더십이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내는 방식들을 분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참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권위가 어떤 것이든 우리는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그들의 권위를 제한하거나 심지어 그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 할 때도 말이다.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살피면, 아론과 미리암의 목적이 그들 자신이 권좌에 앉으려는 것이었다는 점이 밝혀진다. 권력에 목말라하는 것은 권위에 도전하는 봉기의 합당한 동기가 결코 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상사에게 불평을 품게 됐다면, 우리의 첫 번째 희망사항은 그에 대한 불평을 해결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 상사의 권력 남용이나 무능력이 업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면, 우리의 다음 목표는 청렴함과 능력을 갖춘 누군가로 그를 대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목적이 우리 권력을 확장하는 것이라면, 그 목적은 진실하지 못하며 우리는 그 상사가 합당하게 행동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자격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욕망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

 

누군가가 나의 권위에 반대할 때

 

   비록 매우 힘이 있고 대단히 옳기도 했지만 모세는 그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이에게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대응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그는 이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아론, 미리암과 함께 있었으며 그들이 정당한 형벌을 받을 때도 그리했다. 그는 미리암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으며, 그녀가 받을 형벌을 ‘사망’에서 ‘7일간 진영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민 12:13-15). 모세는 그들을 나라의 고위 지도자 위치에 그대로 뒀다.

 

   만일 우리가 권세 있는 위치에 있다면, 우리는 모세가 행한 것과는 반대로 행할 가능성이 있다. 모세처럼 우리가 합당하게 권세를 얻었다 해도 반대에 부딪칠 수 있으며, 그것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지위를 변호하고 그에 대해 공격하는 사람을 물리치려 시도할 경우, 당연히 그 일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세처럼 우리는 반대자를 포함해 하나님께서 우리 권위 아래 두신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불평이 합당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들이 횡포를 부리고자 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들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조직 속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으며 그들 또한 그럴 것이다. 반대자와 공통분모를 찾아낼 수도 있고 반대로 상호 간에 좋은 업무 관계를 회복하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는 겸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말은 우리의 안락, 권세, 위신, 자아상에 손상이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의 선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다. 모세가 미리암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나설 때 그런 의무를 성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지도자가 인기를 잃을 때 (민13-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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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의 권위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이 민수기 13-14장에서 발생했다. 주님이 모세에게 가나안 땅 정복을 준비하기 위해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들여보내라고 말씀하셨다. 정탐꾼은 군사 정보와 경제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그들은 모든 족속으로부터 정탐꾼을 선발했다(민 13:18-20). 이는 정탐꾼의 보고가 토지 정복 계획을 위해 쓰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족속에게 토지를 분배하고자 논의할 때도 사용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정탐꾼들의 보고는 그 땅이 매우 좋다는 내용이었다.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민 13:27). 하지만 그들은 이런 보고도 했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민 13:28).

 

   모세와 그의 부관 여호수아는 이 정보를 기반으로 정복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정탐꾼들은 겁을 먹고서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민 13:30-32).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탐꾼을 따라 주님의 계획에 항거했으며 새로운 지도자를 세운 후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아론과 갈렙과 젊은 지도자 여호수아만이 모세와 함께했다.

 

   그러나 정복 계획이 인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입장은 굳건했다. 사람들은 그를 갈아 치우려 했지만 모세는 주님께서 그에게 정당하다고 계시해 주신 것을 고수했다. 모세와 아론은 사람들에게 반역을 그만두라고 호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주님은 신의를 저버린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으며 그들을 치명적인 질병으로 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민 14:5-12). 주님의 계획을 던져 버린 그들은 한층 열악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처절한 파멸이 임박했다. 주님의 본래 목적에 충실한 모세만이 재앙을 회피할 방도를 알았다. 모세는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주님께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구했다(민수기 12장에서 볼 수 있듯이, 모세는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 백성의 복리를 앞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주님은 분노를 가라앉히셨으나 그 사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반역에 동참했던 이는 모두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됐다(민 14:20-23).

 

   모세의 행동은, 리더란 인기에 영합할 게 아니라 단호한 결단을 내리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리더는 고독한 자리이며, 리더 위치에 있는 이들은 대중의 의견에 영합하라는 유혹을 크게 받기 마련이다. 물론 훌륭한 리더는 다른 이의 의견을 경청한다. 하지만 만일 어떤 리더가 가장 좋은 행동 방향을 알았고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그 정보를 시험해 봤다면, 그는 가장 인기 있는 방안이 아니라 가장 유익한 방안을 실행에 옮길 책임이 있는 것이다.

 

   모세가 처했던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 방향이 무엇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주님은 약속의 땅을 정복하라고 모세에게 이미 명령하셨다. 우리가 봐 온 대로, 모세의 품행은 겸손했지만 추진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사실상 그 명령을 실행하는 부분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이 좇아오지 않으려 한다면, 리더 혼자서는 사명을 성취하지 못하는 법이다. 이 경우에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택해 주신 땅을 잃는 것이었으므로 모든 세대에게 재앙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사람의 의견에 따라 계획을 변경하지 않았고, 그런 재난에 조금도 기여하지 않았다.

 

   현대인의 삶은 여론에 굴복한 지도자의 실례로 가득 차 있다. 우선 영국 수상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이 1938년에 뮌헨에서 히틀러의 요구에 굴복한 사건이 떠오른다. 그에 반해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나라의 분열을 받아들임으로써 미국의 내전을 종식하라는 여론에 굴복하기를 끈질기게 거부했기에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됐다. 그는 자신이 잘못 판단할 가능성을 겸손히 인정하면서도, 굴복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이겨 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시행할 불굴의 용기를 갖고 있었다. 로널드 헤이페츠(Ronald Heifetz)와 마티 린스키(Marty Linsky)가 쓴 Leadership on the Line(도전받는 리더십)[1]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열려 있으면서도 시련의 시기에 굳건히 리더십을 지키는 문제를 탐구한 저서다. 이 주제를 더 알고 싶다면, 이 책 6장의 “신 1:19-45” 부분을 보라.

Ronald A. Heifetz and Marty Linsky, Leadership on the Line: Staying Alive Through the Dangers of Leading (Boston: Harvard Business Press, 2002).

하나님께 첫 열매를 드리다 (민15:20-21; 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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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 4장과 7장에 나오는 희생제사 제도에 근거해서 볼 때, 민수기 15장과 18장에 나오는 두 단락은 노동의 첫 소산과 땅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설명한다. 앞에서 설명한 제사에 덧붙여서 이스라엘 사람은 “그 땅의 처음 익은 모든 열매”(민 18:13)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소유한 주권자이시며 그 땅과 사람의 소산물 전체는 실제로 이미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첫 열매를 제단으로 가져올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의 필요를 충족한 후에 남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출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첫 열매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동력과 자원의 지속적인 생산성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는 절박한 소망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존중을 표시했다.[1]

 

   이스라엘 희생제사 제도에서 언급된 제사와 희생제물은 오늘날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관련해서 우리가 드리는 헌물이나 제물과는 다르지만, 하나님께 우리 첫 열매를 드린다는 개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쓰고 남은 자원을 부수적으로 받으실 분이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첫 열매를 드릴 때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땅의 소산의 첫 열매를 드렸을 때 받았던 하나님의 축복과 유사한 축복을 받는다. 

 

Richard O. Rigsby, “First Fruits,”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New York: Doubleday, 1992), 797쪽.

언약을 기억하는 습관 (민15: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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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 15장에 나오는 한 짧은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옷 가장자리에 청색 줄이 달린 술을 달라고 명령한다.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게 하기 위함이라.’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렇지만 직장에서 우리는 언제나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민 15:39)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기 쉽다. 사실상 당신의 일(당신 “눈”)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직장에서 ‘주님으로부터 기원하지 않은 것’이 당신(당신 “마음”)을 사로잡을 가능성이 더 커진다.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덜 기울이는 게 대책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길을 생각나게 만들 장치를 마련해 놓는 것이 좋은 방책일 수 있다. 그게 옷 가장자리에 다는 술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눈이 잘 띄게 놓은 성경, 주기적으로 기도 시간을 일러 주는 알람, 수시로 당신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장신구, 혹은 주목을 끄는 곳에 놓인 부착물이 될 수도 있다. 이것들의 목적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비록 작다 할지라도 그것은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민 15:40).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할 것 (민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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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의 순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을 재개했을 때였는데, 이번에는 음식과 물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민 20:1-5). 모세와 아론은 그 불평을 하나님께 고했다. 하나님은 지팡이를 들고 가 그들 앞에 서서 바위에게 명해 그 사람들과 가축에게 충분한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시키셨다(민 20:6-8). 모세는 주님의 지시대로 했으나 두 가지를 스스로 부풀려서 실행했다. 하나는 “반역한 너희여 들어라”라고 말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부언하면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것이다. 물은 과연 엄청나게 솟아나왔지만(민 20:9-11), 주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극히 불쾌해하셨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민 20:12). 형벌은 가혹했다. 모세와 아론은, 이전에 하나님의 계획에 항거했던 모든 사람처럼(민 14:22-23),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

 

   모세 행동의 어떤 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부족한 것을 나타냈으며, 그리하여 그가 형벌을 받게 됐는지는 그리 명쾌하지 못하다. 모세가 사람들의 불평을 주님께 전달하면서 그들의 불신에 동참했을 수도 있고 그가 사람들을 꾸짖으면서 반석을 지팡이로 쳤던 것일 수도 있는데, 그 어떤 것도 주님이 명하신 바는 아니었다. 아마도 모세가 물을 주신 주님의 응답이 자기 덕분이라고 주장했을 수도 있는데, 그가 반석으로부터 물을 “우리가 …… 내랴”라고 물은 것을 보면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이 점에 대한 학문적 논쟁은 일반 주석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나, 민수기 20장 12절은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범과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모세가 하나님 신뢰하기를 멈추고 자신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 위기의 순간에 그의 리더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영역에서 활약하는 크리스천 리더들은 하나님을 대리해야 하는 엄숙한 책임을 맡고 있다. 기업, 학급, 구호 조직, 가정 또는 다른 어떤 조직을 이끌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내 것처럼 여기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도움이 되겠는가? 책임을 맡은 (또는 “또래”) 집단과 정기 모임 갖기, 리더로서의 임무를 위해 매일 기도하기,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쉬기 위해 매주 안식일 지키기, 하나님의 인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생각 구하기 등은 몇몇 리더들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굳건한 리더십을 유지하는 일이란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지상에서 가장 겸손했던 사람(민 12:3, NIV)조차 이 일에서 실패했다고 한다면, 우리 역시 별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재난을 가져왔던 실착, 즉 모세가 므리바에서 저지른 것과 같이 큰 실착도 하나님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신약은 그를 “하나님의 온 집에서 신실한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속에 대해 하나님의 집의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확신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히 3:2-6).

 

뜻밖의 출처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민22-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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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 22-24장의 주인공은 모세가 아니라 발람이었다. 발람은 이스라엘이 천천히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길목에 살던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는 선지자였다. 모압 왕은 발람의 말 속에 담긴 하나님의 권능을 인식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이스라엘 사람의 힘을 두려워한 모압 왕은 사신을 발람에게 보내어 모압으로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서 눈에 보이는 위협을 제거해 달라고 청했다(민 22: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축복을 받도록 선택된 나라라고 발람에게 말씀하셨다. 따라서 모압으로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그에게 명령하셨다(민 22:12). 하지만 모압 왕이 다수의 사신을 보내오자 발람은 모압으로 가기로 동의했다. 사신이 발람을 매수해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려고 노력했으나 발람은 자기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것만을 행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경고했다(민 22:18). 하나님은 그의 이런 계획에 동의하셨다. 그렇지만 발람이 나귀를 타고 모압으로 가는 동안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길을 세 번씩이나 막아섰다. 발람에게는 그 사자가 보이지 않았으나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매번 달아났다. 발람은 그런 나귀를 보고 화가 나서 지팡이로 때리기 시작했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민 22:28). 발람은 나귀와 말을 주고받는 동안 나귀가 자기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주님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람의 눈이 열리자 그는 여호와의 사자를 인식했으며 이어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여서 모압 왕의 요청에 대처할 가르침으로 삼았다.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라고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다(민 22:35). 23-24장에서, 모압 왕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계속해서 발람에게 청했으나 그때마다 발람은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축복을 선언하셨다고 대답했다. 결국 발람은 그 왕을 설득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데 성공했으며(민 24:12-25) 주님께서 내리시는 임박한 파멸을 모압이 받지 않도록 했다.

 

   발람은 여러 번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주님의 인도를 따랐는데 이런 점에서 그는 모세와 닮았다. 모세처럼 그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데 매우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발람은 모세와 달랐으며 히브리서에 나오는 다른 신앙 영웅들과도 매우 달랐다. 발람은 우선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주된 목적은 모압을 구원하려는 것이지 이스라엘이 파멸되는 걸 막는 게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및 제사장에게 하신 것처럼 분명하고도 직접적으로 발람에게 말씀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놀랐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에게도 그랬고 발람에게도 그랬겠지만) 하나님의 인도가 위기의 순간에 한 비천한 동물인 나귀의 입을 통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두 가지 놀라운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가 사람이 가장 선호하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방식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잠재적 원수나 심지어는 들판의 짐승을 통해서도 말씀하고자 하실진대,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 단락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방식에 통찰을 준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방식으로 전달되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쉽다. 종종 이것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 우리와 동일한 사회적 부류에 속한 사람, 또는 우리처럼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을 통해서 전달되는 음성에만 귀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와 입장이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미 생각하던 바로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믿기 쉽다. 이것은 실제로 많은 리더들이 자신과 같은 마음을 품은 부관과 자문관 몇몇 사람만 주변에 두는 모습으로도 증명된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발람을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나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토지 소유권과 재산권 (민26-27장; 3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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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지나고 인구 구조가 변하자, 새로운 인구 조사가 필요하게 됐다(민 26:1-4). 이 조사의 최우선 목적은 새로운 나라에 맞는 사회 및 경제 구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경제적 생산과 정부의 조직은 지파를 중심으로, 종족 및 가구의 하부 단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했다. 땅은 인구에 비례해 종족 간에 분배되어야 했으며(민 26:52-56) 제비를 뽑아 할당되어야 했다. 그 결과로, 각 가구(대가족)마다 가족 부양에 충분한 필지의 땅이 주어졌다. 애굽에서와는 다르게 (나중에 로마 제국이나 중세 유럽과도 다르게) 귀족 계층이 땅을 소유하고 서민이나 종이 땅을 일궈서는 안 됐다. 각 가족이 제각기 농업 생산의 수단을 소유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빚이나 세금 또는 심지어 자발적인 매매 행위에 의해서도 그 가족은 땅을 영구적으로 처분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가족이 그들의 땅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법적 보호 장치에 대해서는 레위기 25장을 보라). 비록 가족 한 세대가 농사에 실패해 빚에 허덕인다고 해도, 그다음 세대는 생계를 유지하도록 그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 인구 조사는 지파의 우두머리와 종족의 남자 우두머리에 따라 남자들의 수를 세는 것이었으며, 각 가구주에게는 땅이 할당됐다. 그러나 가구주가 여자일 경우에는(예를 들어, 땅을 분배받기 전에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그 여인이 땅을 소유했다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허용됐다(민 27:8). 하지만 이 제도는 이스라엘의 질서를 어지럽힐 수 있었는데, 여자가 다른 지파의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 여자의 땅이 아버지의 지파로부터 남편의 지파로 이전되어서 사회 구조가 어그러질 수가 있었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주님은 이렇게 규정하셨다. 즉, 여자는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민 36:6), “그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민 36:9). 이 규례는 사회 구조를 보존할 필요성과 더불어 여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재산을 소유하고 원하는 대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다. 족속은 구성원의 권리를 존중해야 했고, 가구주는 그 사회의 필요를 존중해야 했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권에서는 땅의 소유가 주요 생계 수단이 되지는 않으며 사회적 구조가 지파 및 종족을 중심으로 확립되어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민수기와 레위기에 나오는 규정이 오늘날에 직접 적용되지는 않는다. 오늘날 상황은 상이한 해법을 필요로 한다. 재산의 구조와 경제 구조, 개인 권리와 공동선(善)을 존중하는 현명하고 공정하며 공평하게 적용되는 법이 모든 사회에 필수적이다. 개발 프로그램에 따르면, “국가 및 국제적 수준에서 법적 통치의 발전은 지속적이고 통합적인 경제적 성장, 지속 가능한 개발, 가난과 기아의 박멸, 모든 인권과 근본적 자유의 완전한 실현에 있어 필수적이다.” [1]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선한 통치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 법을 통해서도 그리할 수 있지만, 기도와 변화된 삶을 통해서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일함으로써 불우한 사람들이 경제 번영에 필요한 자원을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독교인이 많아지고 있다. ‘국제 영농인’(Agros International)이라는 단체가 그 실례다. 이 조직은 주로 남미에 사는 가난한 사람과 농민이 땅을 취득해 성공적으로 경작하도록 돕기 위해 “도덕적 나침반” 역할을 하는 크리스천들에게 지도를 받는다.[2]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Issue Brief: Rule of Law and Development (New York: United Nations, 2013), 3쪽.

Agros International, http://www.agros.org/ag/how-we-work/frequently-asked-questions.

리더십 승계 계획 (민2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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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속 가능한 조직(이 경우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설립하는 데는 권위의 질서 있는 이양(移讓)이 요구된다. 승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백성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민 27:17) 혼란과 두려움을 겪게 되고, 작업 구조가 와해되며, 일꾼들은 무력해진다. 후계자를 세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실력 없는 지도자는 승계할 역량이 있는 사람을 준비시키기 두려워할지 모르나, 모세같이 위대한 지도자는 은퇴 시기가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후계자를 키우기 시작한다. 성경은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해 기도했다(민 27:15-17)고만 말할 뿐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여호수아를 발굴해 준비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다만 모세가 여호수아를 공표하고 지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했으며 여호수아의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 인증된 절차를 따랐다고 민수기는 밝힌다(민 27:18-23).

 

   민수기 27장 21절에서 볼 수 있듯이, 승계 계획을 세우는 것은 (모세처럼) 현재 집행력을 가진 사람과 (엘르아살과 회중 지도자처럼) 보완적 권위를 가진 사람의 공동 책임이다. 큰 조직이든 작은 조직이든 간에 조직이라면 모두 효과적인 훈련과 승계의 과정이 필요하다.

매일의 제사 :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기 (민28-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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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사람이 정해진 시기에 개인 제사와 가족 제사를 드렸지만, 매일 전 민족을 위해 드리는 희생제사도 있었다(민 28:1-8). 추가 제사는 안식일(민 28:9-10), 초하루(민 28:11-15), 유월절(민 28:16-25), 칠칠절(민 28:26-31), 나팔절(민 29:1-6), 속죄일(민 29:7-10), 장막절(민 29:12-40)에 드렸다. 사람들이 개인 예배에는 참석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런 공동체 제사를 통해 주님의 임재와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었다.[1]

 

   이스라엘 희생제사 제도는 더는 실시되고 있지 않으며, 오늘날 삶과 일에 직접 적용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한 희생, 제사와 예배의 중요성은 지금도 유효하다(롬 12:1-8). 일부 신자들, 특히 몇몇 유명 수도회와 수녀회는 스스로 예배하거나 기도하지 않는, 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이를 위해 기도하며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일터라는 핑계로 기도할 의무를 게을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도 시간에 우리는 같이 일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우리 주변 사람에게 축복을 가져다주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민 6:22-27). 매일 기도하는 중에 우리는 민수기 28장 1-8절을 읊조릴 수 있을 것이다. 매일 기도하거나 하루에도 여러 차례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아주 가까워질 것이다. 신앙은 안식일만을 위한 게 아니다.

Phillip J. Budd, Numbers,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98), 319쪽.

약속 존중하기 (민3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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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 30장은 약속, 서원, 서약의 유효성을 결정하기 위해 마련된 정교한 제도를 설명한다. 하지만 그 기본 입장은 간단하다. ‘행하겠다고 말한 대로 행하라’.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 30:2).

 

   여기서는 자기 권한을 초월하는 약속을 했을 때 규칙에 대한 예외를 다루는 데 공을 들인다. (본문에 나오는 규정은 여자가 어떤 남자의 권위 아래 있는 경우를 다룬다.) 비록 처음에 약속을 한 사람이 권위가 없는 사람일 경우 그 약속은 집행이 불가하다는 예외가 유효하긴 하지만, 예수님이 이 단락을 설명하시면서 훨씬 더 단순한 경험의 법칙을 하나 제안하셨다. 지킬 능력이나 의사가 없는 약속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마 5:33-37).

 

   일과 관련된 계약이나 합의는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핑곗거리, 조건, 예외, 합리화를 자꾸 만들어 내도록 우리를 유혹한다. 물론 그중 여러 가지가 계약의 불가항력 조항처럼 합리적이고, 그런 경우에 법원 판결, 자연 재해 같은 것에 의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 때 용서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계약서를 존중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많은 합의가 악수함으로써 성립된다. 가끔 허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는 단지 법조문이 아니라 합의의 의사를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신뢰는 직장을 돌아가게 만드는 요소인데, 만일 우리가 이행 가능한 것 이상의 약속을 하거나 약속한 것에 못 미치게 이행한다면 신뢰하기가 어렵다. 신뢰는 삶의 한 단면일 뿐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레위인 성읍을 위한 도시계획 (민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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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 지파 사람은 나머지 지파와 달리 백성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지역 법정에서 그것을 적용할 수 있도록 약속의 땅 전역에 흩어진 성읍에서 살아야 했다. 민수기 35장 2-5절은 각 성읍에 할당된 목초지의 크기를 자세히 규정한다. 목초지의 영역은 성읍 둘레부터 재어서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1,000규빗에 이르렀다.

 

   야곱 밀그롬은 이 지리적 배치가 현실적인 성읍 설계임을 보여줬다.[1] 도표는 성읍의 지름 너머 사방으로 목초지가 뻗어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성읍의 직경이 커지고 가까운 목초지를 흡수함에 따라 성읍 둘레 사방으로 1,000규빗의 목초지가 유지될 수 있게 땅이 추가됐다. (도표에서 네 귀퉁이에 해당하는 영역은 성읍이 커짐에 따라 바깥으로 밀려나도 크기를 유지하지만, 색이 칠해진 십자 모양의 영역은 성읍의 중심이 넓어짐에 따라 함께 넓어진다.)

 

 

 

“성을 중앙에 두고 성 밖 동쪽으로 이천 규빗, 남쪽으로 이천 규빗, 서쪽으로 이천 규빗, 북쪽으로 이천 규빗을 측량할지니 이는 그들의 성읍의 들이며”(민 35:5). 

 

   

 

​   수학적으로, 성읍이 성장함에 따라 목초지의 크기도 커지지만 사람이 사는 성읍보다는 성장 속도가 느리다. 이것은 성읍의 인구가 농업 지역보다 빨리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 비율이 유지되려면 평방미터당 농업생산성이 증가해야 한다. 목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많은 식량을 공급해서 성읍의 더 많은 사람이 산업 및 서비스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이것은 경제와 문화 발전에 필요한 일이다. 도시계획은 생산성 증가를 초래하지는 않지만, 생산성 증가에 알맞은 사회경제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의 조건을 만들어 내는 도시 정책의 주목할 만큼 세련된 사례다. 

 

 

 

   민수기 35장 5절의 이 대목은 사람들을 부양하고 경제적 복지를 이루는 사람의 일에 하나님이 세밀한 관심을 기울이심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목초지의 준지리적 성장에 근거한 도시계획을 지시하시는 수고를 감수하신 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이 공동체와 나라의 보존과 번영에 필요한 여러 전문직, 기술, 예술, 학계와 학문 분야의 일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교회와 크리스천은 여러 활동 분야에서 그 구성원의 탁월함을 더 많이 격려하고 칭찬할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 직장인들은 우리 주님을 섬기는 방편으로 각자의 일에 서 탁월해지기 위해 더욱 노력할 수 있다. 탁월한 도시계획, 경제학, 보 육, 고객 서비스가 진심 어린 예배와 기도, 성경공부보다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지 못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

 

Jacob Milgrom, “Excursus 74: The Levitical Town: An Exercise in Realistic Planning,” JPS Torah Commentary: Numbers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1990), 502-504쪽.

민수기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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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의 질서를 세우고 조직하는 모세의 모습을 통해 일터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여 준다. 이 책의 전반부는 예배에 초점을 맞추는데, 예배는 각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협력하는 제사장의 일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의 본질적인 일은 의식을 집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사랑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제사장으로 생각하든 안 하든 우리는 누구나 우리 일을 통해 축복과 화해를 가져다줄 기회를 갖고 있다.

 

   민수기 후반부는 사람들이 약속된 땅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사 회의 질서를 갖추는 모습을 추적한다. 민수기에 나오는 단락은 하나님께 드리는 노동의 열매, 분쟁 해결, 은퇴, 지도력, 재산권, 경제 적 생산성, 승계 계획, 사회적 관계, 약속의 이행, 도시계획 등 현대의 일 문제에 대해 경건한 관점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돕는다.

 

   민수기에 나오는 지도자, 특히 모세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이며 따르지 않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실례를 제공한다. 리더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지혜뿐 아니라 놀라운 근원에서 나오는 지혜에도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하 는 한 가장 좋은 방식을 좇아 하나님의 인도를 따름에 굳건해야 한다. 리더는 왕에게도 대항할 만큼 담대해야 하지만 들판의 짐승으로부터도 배울 만큼 겸손해야 한다. 민수기에 나오는 그 누구도 이 일에서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성공할 때나 실패할 때나 변함없이 그들에게 신의를 지키셨다. 우리 실수는 실질적이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만 영속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뛰어넘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사랑이 성취되는 소망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 이 모세를 인도하셨음을 알고 있으며 모세 이후에 나온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다. 이를 통해 우리도 용기를 내 우리 일터에서 기회와 도전을 놓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일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분이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민 35:34)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이스라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