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와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

아티클 / 성경 주석

   서론 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요나서는 소선지서 가운데서 다른 책들과 성격이 좀 다르다. 그 무대도 이스라엘이 아니다. 본문에는 연대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없다. 거기에는 예언적인 말씀도 없고, 그 초점 또한 백성들이 아닌 선지자 개인의 체험에 맞춰져 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세상 가운데서 능동적으로 움직이신다는 것과(욘 1:2, 17; 2:10),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이 예배, 사회 · 경제적 건강, 환경을 삼중으로 잇는 연결점의 토대가 된다는 관점을 다른 선지자들과 공유한다. 선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바다는 잠잠해지고, 하나님은 선원들과 요나의 안녕을 지켜 주셨다(욘 1:14-17). 요나가 올바른 예배로 돌아오자 여호와께서는 바다에 물고기를 두고 땅 위로 사람들을 놓음으로써 환경을 원래의 정상적 질서로 되돌려 놓으신다(욘 2:7-10). 니느웨가 여호와께 돌아오자 짐승과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게 되고, 사회와 경제 부분에서 저지르던 위법행위들도 멈추게 된다(욘 3:4-10).

 

   요나의 배경은 소선지서의 나머지 책들과는 다르지만, 그 신학만큼은 다르지 않다. 요나서가 독특한 점은 (1) 선지자를 향한 부르심과 그의 반응, (2)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축복하고 다른 나라들을 대적하시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다른 나라들도 축복하고자 하신다는 점이다.[2]

 

 

 Douglas Stuart, Hosea-Jonah,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2002), 431쪽.

같은 책, 434쪽

소명을 거부하고 달아난 선지자(욘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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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선지서가 다 그렇듯이 요나서 역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욘 1:1-2).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요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한다. 무모하게도 그는 외국으로 가는 배에 올라탐으로써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려 한다(욘 1:3). 이는 그 자신뿐 아니라 그 배에 탄 다른 사람들까지도 위험에 빠뜨린다. 우리가 소선지서 전체를 통해 본 것처럼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형벌을 내리시고, 개인의 행동은 언제나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은 폭풍우를 보내신다. 우선 선원들은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해 선적했던 화물들을 전부 다 배 밖으로 던져야 했기 때문에, 자기네 장사의 전망을 망쳐 버린다(욘 1:5). 심지어 나중에 그 폭풍우는 그들의 목숨마저 위협한다(욘 1:11). (선원들이 받아들이기를 주저한 제안이었지만)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제안한 다음에야 폭풍우는 누그러졌고 공동체에 닥쳤던 위험이 가라앉았다(욘 1:12-15).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시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요나를 부르신 것은 니느웨의 생명을 위해서였다. 그가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했을 때 그의 섬김을 받아야 할 백성들이 참혹해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 고생했다. 만약 우리가 요나의 일과는 다를 수 있으나 하나님께는 똑같이 중요한 우리의 일에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소명을 받았다는 걸 인정한다면, 그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실패하는 건 우리의 공동체도 무너뜨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 부분을 보라.

 

   우리의 은사나 재능이 크면 클수록, 우리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할 때 우리가 끼치는 해악은 그만큼 더 커진다.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업이나 정부, 사회, 과학,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엄청난 해를 끼치고 다닌 이야기들은 얼마나 많은가! 만약 그들이 여호와를 예배하고 섬기는 데 그들의 능력을 최우선으로 활용했더라면 그들이 어떤 선을 행할 수 있었을지, 그리고 어떤 악을 피할 수 있었을지 상상해 보라. 우리의 은사들은 너무도 미약해 보일 수 있으나, 우리가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 일을 해 나간다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선을 행하며 얼마나 많은 악을 피할 수 있을지 상상해 보라.

 

온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욘1:16, 3: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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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한 것은, 이스라엘의 원수였던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를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집을 누그러뜨리고 자신의 사명을 성공리에 마무리한다. 이때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에 분노한다(욘 4:1-2).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기 때문에 이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왕하 17:6).

 

   요나는 자신이 경멸하는 백성들을 축복하라고 보냄을 받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만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온 열방을 축복하셨다. 이 책 7장의 “렘 29장” 부분을 보라.

 

   우리의 일을 통해 우리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한계를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로 놓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가능할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위를 점유하지 못하도록 우리가 하는 일에서 얻는 유익을 모두 우리 자신을 위해 쌓아 두어야 한다고 흔히 생각한다. 우리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이익을 챙기기 위한 노력으로 우리는 비밀, 속임수, 편법 혹은 지름길을 사용하거나 착취를 하거나 위협을 가할 수도 있다. 일에서 성공하려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혹시 우리가 성공은 제로섬 게임이요, 이득 챙기기라고 믿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하나님의 축복은 용량이 제한된 양동이가 아니라 흘러넘치는 샘이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일을 하노라면 경쟁, 유한한 자원, 그리고 우리를 해치려는 악한 의도에 자주 부딪친다.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획하신 창의성과 생산성, 대인관계와 사회적 조화, 환경적인 균형으로 우리의 일터를 충만하고 웅장하게 변혁시키신다.

 

   요나는 비록 처음에는 자기 원수들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길 거부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께 충성함으로써 불순종을 이겨 낸다. 그가 니느웨에 경고하자, 요나의 예상을 뒤엎고 니느웨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에 열렬히 반응한다.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욘 3:5b) 왕과 대신들, 거리의 백성, 심지어 우리 안 짐승들까지 온 성읍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다’(욘 3:8).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욘 3:5a) 그들이 행한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고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욘 3:10).

 

   그런데 바로 그것 때문에 요나는 낙심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셔서 하길 원하신 그 일의 결과를 자신이 좌지우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니느웨가 용서가 아니라 벌을 받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의 결과에 맞게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하고(욘 4:5),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같이 누리지 못한다. 우리의 태도도 이와 똑같지 않은가? 우리의 일에서 보람이나 성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을 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하는 일의 참된 가치를 보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요나가 하나님께 저지른 작고 불완전한 순종은 그의 주변 사람들을 축복에 이르게 했다. 배 위에서 그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자신을 알리고(욘 1:9), 배에 같이 탄 동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했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폭풍우에서 건짐을 받고, 더 나아가 여호와를 따르는 자들이 된다.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욘 1:16).

 

   만약 불순종이나 분노, 방종, 두려움, 이기심 또는 다른 병적 요소들을 핑계 삼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일을 주저하고 있다면, 요나의 경험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신실한 사역자인 선지자가 우리보다 더욱 크게 실패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요나의 주저함이나, 결점, 오락가락하면서 간간이 중단되는 사역을 통해서도 그분의 계획을 완수하신다. 우리가 하는 형편없는 사역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뜻하신 대로 다 이루신다.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들을 돌보고 책임지신다 (욘1:3,12-14,17; 2:10;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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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나의 경험을 보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자칫하면 우리를 재앙과 역경에 이르도록 만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 어쩌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질 수도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큰 희생과 어려움을 요구할 수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1]

 

  그러나 요나의 경우, 어려움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요나가 불순종하면서 생겨났다. 파선을 당하고 큰 물고기 배 속에서 3일간 장사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가 해와 바람에 노출되고 절망에 빠지면서 거의 자살 직전까지 간 것은(욘 4:3-8) 하나님이 그를 어려움에 빠뜨려서가 아니었다. 요나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욘 4:2)의 축복을 받아들이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요나를 돌보시고 위로하셨다.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는 요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선원들이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대려고 애쓸 때,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를 불쌍히 여기게 하신다(욘 1:12-14).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보내셔서 요나가 익사하지 않게 하시고(욘 1:17), 그런 다음 물고기에게 요나를 마른 땅에 토해 내라고 말씀하신다(욘 2:10). 하나님은 니느웨에 있는 요나의 원수인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이 요나를 높이 평가하고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끔 만드신다. 하나님은 요나가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니느웨에서 그에게 박넝쿨과 그늘을 제공해 주신다(욘 4:5-6).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소명이 꼭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맞바꿔져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달리 생각하는 것은 제로섬 게임이라는 사고방식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소명을 거부했어도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해 특별한 조치들을 취하셨는데, 만약 요나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더라면 그가 어떤 축복을 누렸을 것인지 상상이 되는가. 여행 수단, 그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어줄 친구들, 자연 세계와의 조화, 박넝쿨과 그늘, 사람들 가운데서의 평가, 맡은 일의 놀라운 성공 ……. 만약 요나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이런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얼마나 더 큰 축복들을 누렸을지 상상해 보라. 이 축복이 요나의 불순종으로 그나마 축소된 것임을 생각하면, 섬김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두 축복으로 가는 초청이다.

 

 이 주제에 대한 고전적 설명은 1937년에 첫 출판된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New York: Macmillan, 1966)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