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와 일

아티클 / 성경 주석

   베드로전서는 예수님께 충성했기 때문에 비방을 받고, 거짓 고소를 당하고, 신체적으로 학대받는 사람에게 쓴 서신으로(벧전 2:12, 18-20; 3:13-17;4:4, 14, 19), 여기서 베드로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자신의 고난을 세상을 위한 섬김으로 바꾸어 살도록 부름받았는지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분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낯선 이곳에 머무는 나그네이며, 여기는 우리의 진정한 집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벧전 1:6).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의 희생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가져오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부른다(벧전 2:5). 크리스천의 일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할 때까지 세상을 축복하는 일이다.

 

나그네요, 제사장으로 세상을 섬기다 (벧전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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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신 서두에서 베드로가 수신자들에게 쓰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벧전 1:1, 새번역)이라는 본 구절은 베드로 서신 전체를 관통하는주된 메시지의 전조로 보인다. 이 구절은 ‘나그네들’과 ‘선택받은’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이라면, 당신은 나그네다. 당신을 둘러싼 현재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외세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진정한 왕국 시민권은 ‘하늘에 간직돼’ 있다(벧전 1:4). 어떤 나라에 잠시 거하는 나그네들처럼, 당신도 당신이 사는 땅의 통치자들의 총애를 반드시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스스로 오셨지만 “사람에게는 버린 바”(벧전 2:4) 되셨다. 마찬가지로 그분 왕국의 모든 시민들도 같은 대우, 곧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는 상황을 예상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동안 이 낯선 땅에 머물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벧전 1:15-17).


   정치적 은유로 말하고는 있으나, 베드로는 일터의 용어를 들고 있다. “행위”(벧전 1:17), “은이나 금”(벧전 1:18), “불로 연단”(벧전 1:7),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 등등. 베드로가 일터 용어를 사용한 까닭은 우리가 일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변 노동세계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따를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나그네’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 뒤, 베드로는 또 다른 용어 ‘선택받은’(벧전 1:1)을 사용한다. 만일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다. 당신이 임시로 거주하는 이 나라의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제사장의 타이틀 또는 ‘왕 같은 제사장직’은 거듭 나온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희생제사를 드렸고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더 나아가기 전에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 된다는 게 무엇을 뜻했는지 알아야 한다. 제사장에게는 주로 두 가지 역할이 있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 그리고 제사장적 축복 선언이었다.[1]

 

 제사장들은 희생제사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성소나 성전의 내실로 들어가야 했고, 대제사장의 경우 매년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어야 했다. 대리적 축복 선언을 하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 당신을 대신하여 말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직무를 수행하려면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는 불순하거나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용납될 수 없기에 결국 각별한 정결 또는 성결은 필수적이었다.[2] 

 

  그러면서도 제사장들은 순번제로 돌아가며 자기 차례에 섬겼고(눅1:8) 주된 생계 수단으로 일반 직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격리될 수도 없었지만, 세상의 더러움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정결을 유지해야만 했다.

  

 

우리는 이 시대 제사장이다.

  베드로가 크리스천들이 “거룩한 제사장”(벧전 2:5)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름받았다고 한 것은 모든 신자가 자신을 전임 목회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도자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무슨 일로 생계를 유지하든, 크리스천들은 그 가운데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복을 전달할 수있다. 베드로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하려 함이라”(벧전 2:11-12).


   물론 크리스천들이 유대인 제사장들과 똑같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물을 죽여 바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님이 앞서하신 것과 같은 희생제사를 드린다.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한 자기 희생이다.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적 희생’(벧전 2:5)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선한 청지기로 드리는 것을 뜻한다(벧전4:10).


   우리는 날마다 일터에서 크든 작든 이런 자기희생의 기회를 만난다. 이는 베드로전서 1장 3절-2장 10절을 요약한 것으로, 사도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왜 ‘선택받은 나그네들’(NRSV)이라고 불렀는지 내력을 알 수 있다. ‘나그네들’이라는 용어에는, 우리가 본향이 아닌 낯선 땅,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에서 외국인으로서 우리의 소명을 살아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택받은’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왕 같은 제사장들’은 특별히 자기희생을 통해서 세상에 복이 되는 제사장의 소명을 지녔음을 확인시켜 준다.

제사장의 축복은 민수기 6장 23-24절에서 제사장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며, 민수기 6장 24-26절 말씀이 그 내용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결은 그분의 임재 앞에 인간의 거룩함을 요구했다(레 11:44-45). 민족적 성결 의식은 대속죄일에 시행되었다(레 16장).

세상 권세자들 아래서의 고난 (벧전2:1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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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의 노동 환경에서 나그네와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베드로는 이것을 외국인과 종인 수신자들에게 주는 직접적인 지침으로 말한다. 비록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우리에게 ‘자유인’(벧전 2:16)으로 살아갈 권리를 부여해 주지만, 땅의 외국인들로서의 우리는 우리가 사는 나라가 어디든 그곳의 모든 시민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벧전 2:13-14). 비록 베드로가 어떤 부류의 일꾼들이라고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수신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종들’에게 자신이 받는 대우가 정당하든 부당하든 어떤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예견된 일(벧전 4:12)이며, 오히려 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 고난의 자취를 따라 고난을 감당할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벧전 2:21).

 

  주의할 것은 여기서 베드로는 부당한 수난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무능, 오만, 무지로 인해서 겪는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정당한 형벌이라면 순복하는 맘으로 받아야 한다. 사실 당신은 위의 권위에 불복할 자유가 없다. 비록 당신이 생각하기에 올바르다고해도 그렇다. 당신이 승진, 임금 인상, 창이 있는 사무실, 수준급의 의료보험 제도 혜택을 받을 만한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어쩌면 고용주가 당신을 의도적으로 기만하고, 시간 외 근무를 강요하고, 상사의 잘못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워 징계를 가할 수도 있다.

 

  반면 당신 또한 아프지도 않으면서 병가를 내고, 개인 물품을 사면서 회사에 전가시키고, 회사 사무용품을 슬쩍 챙기거나 업무 시간에 빈둥거리는 것 같은 일로 고용주가 당신을 속인 것만큼 그렇게 윤리적으로 회사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하나님은 뺏기는 만큼 도로 취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신다. 당신이 속은 만큼 남을 속인다고 해서 당신의 행위가 덜 악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적대적인 업무 환경일지라도 오직 선을 행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다(벧전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벧전 3:9). 오히려 크리스천들은 심지어 불의하고 부당한 권위도 존중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옹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듯이(벧전 2:21-25), 우리는 제사장으로 사람들을 축복하도록 부름받았지, 우리 자신을 옹호하도록 부름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는 권위에 도전하시고 권세를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지만, 베드로는 여기서 복음의 전체 개요를 다시 말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예언서와 같은 다른 성경의 경우, 억압적이고 불법적 권위에 대해서는 저항하라고 하나님이 강조하셨다.

 

  항복이 항상 순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공공연하게 불순종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임으로써 권위에 복종할 수도 있다. 이 대목과 그의 서신서 전체를 통해 베드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모범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지도자들과 따르는 자들을 위한 지침들(벧전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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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는 이제 ‘장로들’(elders;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헬라어 어원에서 온 영어식 표현 ‘presbyters’나 ‘bishops’가 익숙하다)이라고 칭한 교회 리더들에게 지침을 준다.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터에 있는 지도자들에게도 훌륭한 조언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자원함으로 하며”(벧전 5:2). 돈에 대한 탐심을 품지 말라(벧전5:2).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본을 보이라(벧전 5:3).

 

  베드로는 잠언 3장 34절을 인용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아니,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고 겸손을 권유한다. 이것이 유독 베드로전서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확대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단지 오늘날 일터에서 널리 활용하는 종의 리더십 개념을 베드로가 잘 알고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탁월한 종의 리더십이 전수될 수 있었겠는가?(벧전 4:1-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