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반드시 살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8:5-9).

 

에스겔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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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그저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개인적으로 헌신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시장이나 집에서, 혹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의롭게 사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사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롬 5:1)을 실천하는 삶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시작하며, 나아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감으로써 완성에 이른다.

 

   에스겔서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 제국에서 포로로 사는 동안 상실과 억압, 심지어는 죽음으로까지 극심하게 위축된 고난의 삶을 살던 일을 상세하게 담아낸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그들이 그런 의문을 제기할 때에, 에스겔은 ‘너희의 의롭지 못한 생활양식 때문’(겔 18:1-17)이라고 하나님의 응답을 전한다. 이스라엘은 결혼과 성, 예배와 우상숭배, 상업과 정부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불의를 행했다. 그 가운데 여기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영역은 일터에서 벌어진 관행이다. 에스겔은 재정과 빚, 경제 개발, 정직함, 자본 분배, 직장의 평가, 투자의 공정한 수익, 경제적 편의주의, 성공과 실패, 내부고발, 팀워크, 행정부의 보상과 법인 관리까지 두루 다룬다. 또한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름받는 인상적인 장면은,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어떻게 특정한 일로 부르시는지 잘 보여 준다. 

 

 

부르심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겔 1-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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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은 야곱의 아들 레위의 후손으로서 그의 직업은 제사장이다(겔 1:2). 따라서 그는 예배자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져온 가축을 도살하고 도축하고 구워 내는 일을 일상적으로 행했다. 또한 사람들에게 도덕과 영적인 지침을 제공하는 지도자였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분쟁을 재판하기도 했다(레 10:1; 신 17:8-10; 33:10).

 

   그러나 BC 605년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사람들 중 일부가 바벨론에 제1차 포로로 잡혀갈 때 그 역시 포로가 되면서 그때부터 제사장으로서 직무 수행은 끝이 난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은 두 가지 의구심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공평하신가?’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가?’

 

   시편 137편 1-4절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의 슬픔이 잘 드러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에스겔은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 중에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다. 에스겔도 이사야가 부름받을 때처럼(사 6:1-8), 하나님의 이상으로 시작하여(겔 1:4-2:8) 선지자가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끝난다. 성경에서 특정한 일에 직접 부름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 면에서 에스겔의 소명은 매우 인상적이다.

 

   에스겔은 원래 제사장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종교적 직분이 아니라 정치적 직분인 선지자직을 수행하도록 부르셨다. 그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환상을 보는데, 전차 바퀴(겔 1:16), 군대의 소리(겔 1:24), 왕좌(겔 1:26) 그리고 파수꾼(겔 3:17)과 같은 정치적 상징들뿐 종교적인 상징은 없었다. 이렇게 정치적인 선지자로서의 그의 직분과 맥을 같이했다. 에스겔이 받은 소명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대체로 세상 직업에서 교회 사역이라는 방향으로 일꾼을 부르신다는 부르심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떨쳐 버려야 한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 부분을 보라.

 

   에스겔이 선지자직으로 부르심을 받은 때는, 예루살렘의 최종 파괴가 불과 11년 남은 시점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유다 백성들을 현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약속이 공허한 것임을 천명하라고 명하신다. 당시까지도 거짓 선지자들은 유다 백성을 향해 ‘바벨론이 곧 패망할 것이며 유다 백성은 곧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선동하고 있었다.

 

   에스겔서의 처음 몇 장은 그가 본 환상을 이야기하는데, 포위당한 예루살렘의 참상, 그리고 함락 과정에서 벌어지는 학살을 그려 낸다. 

 

이스라엘이 범한 죄(겔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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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가?’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이 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잘못은 조상에게 있지 우리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용한 거짓 속담에도 같은 생각이 드러난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겔 18:2).

 

   하나님은 그들의 하소연을 외면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이 곤경에 처한 책임을 스스로가 아닌 이전 세대에게 전가했기 때문이다.[1] 이에 하나님께서는 의롭거나 사악하거나, 각자의 행위에 따라 명확히 각 개인이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의인(겔 18:5-9)과 그의 죄 많은 아들(겔 18:10-13)과 그의 의로운 손자(겔 18:14-17) 비유에서 사람들이 자기 조상들의 도덕성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각 개인의 ‘영혼’에 책임을 물으신다.[2]

 

   그러나 학자들은 에스겔이 아직도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3] 개개인이 정의로워야 한다. 하지만 개인으로 이루어진 전체 국가가 의로워지기 전까지 하나님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전 세대와는 관계없이 현재 잡혀간 포로들 전체에게 의로운 삶과 책임을 요구하신다.

 

   에스겔 18장 5-9절을 보면 의로운 사람과 사악한 사람 모두의 제의적 · 도덕적 행위들을 광범위하게 지적한다. 나아가 이러한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이 ‘살아 있는지’ 또는 ‘죽어 있는지’를 판단한다. 이 행위들 가운데 네 가지가 일과 관련이 있다. 채무자의 담보를 반환하는 것, 가난한 이들을 부양하는 것, 과도한 이자를 부과하지 않는 것, 정당하게 일하는 것이다. 정당하고 정의로운 기준을 지키지 않는 것, 더 나쁘게는 다른 이에게 무분별하게 피 흘리게 하는 행위는 죽음이라는 벌을 초래할 것이다(겔 18:13).

 

 

 Katheryn Pfisterer Darr,“Proverb Performance and Transgenerational Retribution in Ezekiel 18,” Tiered Reality, 209, nt. 63, 509-510쪽

겔 18:4, 20, 27에 나오는 ‘Nephesh’를 보라.

 Jeol Kaminsky, Corporate Responsibility in the Hebrew Bible (Sheffield Academic Press, 1995), 177-178쪽

의인은 사람을 압제하지 않으며, 빚진 자에게 저당물을 돌려준다 (겔 18: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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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원리는 일반적인 학대죄(히브리어로 daka)에, 빚을 내주기는커녕 받아갔던 저당물까지도 돌려주지 않는 죄(habol)까지 다룬다. 이 원리를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 이스라엘 대부법부터 살펴보자. 《앵커 예일 성경사전》(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에서는 그 법을 이렇게 요약한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빚의 필연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이에 자연스럽게 채무자에게서 이자를 요구하는 관습을 막는 방도를 고안해 내야 했다. 고대 근동에서 채무 이자는 현대 기준에 비추어 보면 과도했을 수 있다. (빌릴 때 빚의 원금에서 이자를 미리 공제했을 수도 있다.)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잠재적인 이자를 미리 걷는 일은 부당했다. 하나님께서 노예 신분에서 해방해 주신 공동체를 공적으로 보호하는 것과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면 된다. 형제가 가난해져 돈을 빌려야 할 상황에 처하면,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레 25:35-38)의 이름에 근거하여 이자를 강제로 징수하면 안 되었다. 이자를 받으려는 욕망은 이스라엘이 경제적 압박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억압으로 노예를 교환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는 것으로 보였다. 레위기 25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온전함을 유지하는 문제를 다룰 때 안식일과 희년에 이루어져야 할 해방(레 25:1-34), 빚(레 25:35-38), 고용살이와 관련한(레 25:39-55) 내용을 매우 자세히 다룬다. 돈을 빌려주면서 담보를 받는 것은, 후일에 이자를 받지 못하더라도 용서하겠다는 암묵적인 인정이었다. 또한 받은 담보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도 금지했다(출 22:25-27; 신 24:10-13). 그러나 어떤 담보는 (바르게 다루기만 한다면) 이윤을 낼 수 있었고, 담보를 받았다 해도 외국인에게는 어떤 경우 이자를 징수할 수 있었다(신 23:19-20 - 토라의 엄격한 해석에 따라서 채권자는 생활을 꾸려 갈 수 있었다.)[1]

 

   모세 율법에 따르면, 빚 보증으로 받은 담보물은 영구히 소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 은행법에서는 (전당포처럼) 빌려주는 사람이 보증으로 받은 물건을 보유하거나 (자동차 대출이나 주택담보 대출에서처럼) 회수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전체 보증 체계가 반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이 글에서 다룰 바가 아니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금융” 부분을 보라.모세 율법에 따르면, 빚 보증으로 받은 담보물은 영구히 소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현대 은행법에서는 (전당포처럼) 빌려주는 사람이 보증으로 받은 물건을 보유하거나 (자동차 대출이나 주택담보 대출에서처럼) 회수할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전체 보증 체계가 반성경적인지 아닌지는 이 글에서 다룰 바가 아니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금융" 부분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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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현대 법률은 빌려준 사람이 담보물을 소유하는 과정을 규제하는 한편 한계를 둔다. 예를 들어, 채무자가 파산 절차를 밟으며 법의 보호 아래 있는 동안 채권자가 저당 잡힌 주택을 점유하고 채무자를 강제로 쫓아내는 것은 불법이다. 일종의 억압이기 때문이다. 물론 채권자가 면책권을 가지고 있거나 법의 테두리 밖에서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에스겔 18장 7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무리 벌을 모면할 권력이 있더라도, 마땅히 자신의 소유인 듯 보이더라도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법을 어기지 말라!” 오늘날 상업적 관례에서는 사채업자를 빼고는 거의 모든 채권자들이 법을 어기면서까지 강제로 담보물을 회수하진 않는다. 따라서 에스겔 18장 7절 말씀은 합법적인 사업을 하는 현대인에게는 전혀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 셈이다.

 

   여기서 잠깐 눈여겨볼 것이 있다. 구약 전체에서 대부법은 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주로 빌리는 사람 편이었다. 비록 해가 질 때까지만 겉옷을 보관할 수 있을지라도, 겉옷을 담보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이유는, 당신에게 여유 자금이 있고, 빌리는 사람은 돈이 필요한 궁핍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빌려주는 사람으로서 당신은 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보증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빌리는 사람이 그 돈으로 충분히 이익을 보아 돈을 다시 갚을 수 있을 때만 돌려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또한 담보물을 무기한으로 가지고 있을 수 없기에, 빌리는 사람이 돈을 갚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을 알면 저당을 잡고 돈을 빌려줘서는 안 되었다.

 

   2008-2009년에 미국에서 발생한 주택담보 대출 위기를 보자. 서브프라임 대출을 실행한 금융기관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최우대 대출금리보다 낮은 주택자금 융자를 갚지 못하리란 것을 알면서도 빌려주었다. 이 금융기관들은 자기들의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주택 가격이 상승할 경우나 빌린 사람이 채무 이행을 못할 경우에는, 자기네들이 부동산을 팔거나 회수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빌리는 사람의 이익은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이익만 생각하며 돈을 빌려준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지자 어떠했는가? 수백만이 넘는 주택에 대한 담보권을 한꺼번에 행사하면서 시장에 부동산 매물이 쏟아져 나왔고, 연쇄적으로 부동산 가치는 무섭게 하락했다. 그 바람에 부동산을 회수한 금융기관들도 손실을 입었다. BC 580년경에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13)라고 압제자들에게 선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AD 2000년경의 은행 제도에서 사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에스겔 18장 7절은 빚에 관한 것이지만, 같은 원리를 모든 종류의 상품에도 적용할 수 있다. 상품의 결점이나 위험성 여부를 알려 주지 않는 것, 구매자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비싼 상품을 판매하는 것, 제품의 장점을 구매자의 필요에 부적당하게 맞추는 것과 같은 모든 관행은 에스겔 18장 7절에 나온 학대나 다름없다. 구매자의 안녕을 거래에서 침범할 수 없는 목표로 삼지 않는 한, 그러한 관행들은 선의의 사업에도 서서히 파고들어올 수 있다. 에스겔의 용어를 빌면, 구매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겔 18:9).

 vol. 2, The Anchor Yale Bible Dictionary, ed. David Noel Freedman (New York: Doubleday, 1996), 114쪽.

의인은 도둑질하지 않으며, 대신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벌거벗은 사람을 입힌다(겔 18: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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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장 7절 상반절과 하반절은 의외의 짝처럼 보인다. 도둑질을 금하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도둑질이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주고 벌거벗은 이들에게 입을 옷을 제공해야 하는 의무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에스겔 18장 7절 상반절에 나올 만한 내용은 ‘다른 사람의 경제적인 여유에 관심을 가져라’ 정도일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 이 ‘다른 사람’은 상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생활 중에 만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진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그 사람 역시 그 물건을 필요로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서 그 물건을 빼앗으면 안 된다. 또한 당신이 넘치게 가진 물건인데(적어도 음식이나 옷과 같은 기본적인 필수품의 경우에는), 그 물건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그것을 기꺼이 내주어야 한다.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권고의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경제적인 법이 깔려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실 때는 우리의 곤핍함을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부는 공공의 부로 보아야 한다(신 6:10-15; 15:1-18). 율법은 7년마다 빚을 탕감하고 희년에는 축적한 부를 재분배하라고 요구한다(레 25장). 50년에 한 번씩,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사회에 뿌리내리는 악을 제거하기 위한 치료의 일환으로 그 땅의 부를 재조정해야 했다. 이런 희년이 돌아올 때까지 그 사이 기간에는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것에 청지기로 살아야 했다.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을 속이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행하며 내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그 땅에 안전하게 거주할 것이라(레 25:17-18).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5:35-38).

 

   에스겔 18장 7절 하반절에 있는 에스겔의 법령은 가치 있는 물건을 생산하는 일과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에 일의 신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대신 부에 관한 신학, 즉 가치 있는 물건에 대한 청지기직과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관한 신학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달리 보면 어떤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만약 자신의 필요보다 남의 필요를 채워 줄 목적으로 일한다면 어떨까? 이는 도둑질을 막는 동시에, 궁핍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복과 기타 필수품을 제공하기 위해 일하도록 하는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다. 일례로 신약 개발 계획에 동정적 사용 정책(compassionate-use policy)을 반영한 제약회사를 들 수 있다. 또한 적정 가격에 살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것을 사업 모델의 핵심 요소로 삼은 소매회사도 역시 같은 사례다. 반대로, 진정한 필요를 충족해 주지 않는 생산품에 높은 가격을 책정함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사업은 이 원칙에서 배제된다. 특허권 기간을 연장하려고 제조 공식을 살짝 변경하여 약품을 생산하는 제약회사가 이에 속한다. 

 

의인은 자기 재산 불리려고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겔 18: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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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학자들은 ‘구약 율법에서 이자를 완전히 금한 것일까?’를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 왔다.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가 에스겔 18장 8절 상반절을 가장 자연스럽게 번역했다. “[그는] 이자를 받거나 재산을 불리기 위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크리스천들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융자금에 이자를 붙이는 것을 성경에서 금한다고 이해했다. 물론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자본의 생산적인 투자를 심하게 제한할 수 있다. 그래서 현대 성경해석자들은 NRSV(New Revised Standard Version)에서 번역한 것처럼 과도한 이자를 금지하는 것으로 내용을 완화시킨다. 이런 한층 완화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오늘날 제로 쿠폰채(zero-coupon bond)로 불리는 발행 시점의 할인은 허용했고, 대출금이 제때 상환되지 않더라도 ‘부가이자’를 붙이는 것은 금지했다고 주장한다.[1] 앞서 언급한 ‘담보’라는 주제에서 그랬듯 오늘날 이자 체계가 합법적인지를 논할 생각은 없다.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금융” 부분을 보라. 대신 둘 중 한 가지 경우가 불러오는 결과를 살펴볼 생각이다.

 

   좀 더 엄격한 해석을 따른다면, 돈을 가진 사람들은 돈을 빌려주어야 하느냐 아니면 전혀 빌려주지 말아야 하느냐의 선택에 직면한다. 만약 이자 추징도 안 되고, 담보물조차 소유할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에게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편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금지하셨다.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신 15:8).

 

   예수님도 누가복음 6장 35절에서 이 명령을 반복하시는데, 심지어 확대하여 해석하신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융자는 무엇보다 채무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 채권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채권자의 두려움은 이차적인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잠재적인 채권자는 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잠재적인 채무자는 그 자본을 필요로 하니까 말이다.

 

   한편 현대의 이자 체계가 정당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이 원칙은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자본을 생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두려움 때문에 자본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문자적인 뜻도 바로 이와 같다(마 25:14-30).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중한 보물인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겠노라 약속하셨다. 만약 투자할 수 있는 여분의 자본이 있다면 그것은 공급하시는 하나님 덕분이며, 따라서 공정한 투자나 기부를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어야 한다. 경제 개발은 금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개발이 절실하다. 다만 자본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생산적인 유익이어야지 자본을 가진 사람의 사욕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Oriental and Biblical Studies, Collected Writings of E. A. Speiser, ed. by Finkelstein and Greenberg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67), 131-133, 140-141쪽.

의인은 악한 일을 거절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진실하게 판단한다 (겔 18: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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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은 초반부에서 했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특정한 규칙(개개인 사이를 공평하게 판정하는 것)과 연관된 일반적인 규칙(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그의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다시 말하지만 더 큰 권세를 가진 사람은 약한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해야 한다. 이 경우에 권세는 사람들 사이를 판단하는 권세를 가리킨다. 우리는 누구나 매일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를 판단하는 권세를 누리는 순간들을 만난다. 지극히 사소하게는 점심에 무얼 먹을지 결정하는 것이요, 크게는 부도덕한 행위를 고발할 때 누구를 믿을지 결정하는 등 삶은 판단의 연속이다. 다만 대부분이 이러한 결정을 매일 내리면서도 우리에게 판단하는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이 주변 사람들보다 덜 중요하다는 평가를 계속 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직장에서 많은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난다. 이는 성과 보고, 프로젝트 결정, 근로자 보상이나 승진 등과 같은 공식적인 평가나 공무상 평가와 같은 공식적인 루트에서 기인한다. 비공식적으로는, 아이디어를 말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져 주는지, 혹은 사람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는 일이 얼마나 잦은지를 보고 확인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평가에 민감해야 한다. 그런 평가에 참여하는 입장이라면 그 역시도 공정해야 한다. 크든 작든 하루 동안 이런 평가에 몇 번이나 참여하는지 기록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 18장 8절 하반절 말씀에 나온 의로운 사람은,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대처했을지 물어보는 것도 역시 흥미로운 일이리라. 

 

   에스겔 18장은 그저 포로로 살아갈 때 필요한 규율 정도가 아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겔 18:2)에 드러난 바벨론의 포로 유다 백성들이 느끼는 절망에 내놓은 대답이다. [1] 18장 전체에서 대대로 이어지는 징벌이 일거에 삭제되지 않는다는 격언(2절)을 향해 반박한다.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교훈은 절망하는 유다 백성에게 주는 대답일 뿐만 아니라(시 137편),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겔 18:25, 29)라는 구절에 반영된 신정론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왜 포로로 잡혀 와 있는가, 왜 우리는 고난당하고 있는가, 도대체 하나님은 관심이라도 있으신가?” 이 같은 포로들의 하소연에 하나님께서는 한마디 답도 않으시고 의롭게 살라고 요구하신다.

 

   과거의 죄와 미래의 회복 사이, 약속과 약속의 성취 사이, 의문과 대답 사이의 시간에 바벨론의 포로들은 의롭게 살아야 한다.[2] 의미와 목적,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하나님은 그저 개개인이 따라야 하는 선과 악을 규정하는 율법을 되풀이하신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비로소 “내 백성”(겔 11:20; 14:11; 36:28; 37:23, 27)이 되리라 하셨을 때 하나님은 국가적인 차원의 의로운 삶을 요구하신 것이다.[3]

 

   에스겔 18장에 나온 의의 표지들은, 새 언약 안에 사는 삶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예로, 공동체 전체가 ‘율법에 맞는’ 윤리를 지향한다(겔 18:5, 19, 21, 27). 소망 가득한 미래를 꿈꾼다면 지금 언약의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크리스천들은 마태복음 5장 17-20절과 22장 37-40절에 나오는 동일한 요구를 받는 새 언약의 구성원들이다. 이와 같이, 에스겔 18장은 시대를 불문하고 우리의 직장생활에 놀라울 정도로 적용 가능한 교훈을 준다.[4] 직장에서 일할 때 개인적 의를 추구하는 삶은 우리의 현재 상황에 생명과 의미를 더해 준다. 그렇게 하면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할 수 있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에서 누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새 마음과 영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에 상을 주신다(겔 18:31-32; 고후 3:2-6).

 

문제는 격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격언을 포로 된 상황에 부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Peter Enns, Inspiration and Incarnation: vangelical and the Problem of the Old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2005), 74쪽을 보라.

이것과 신정론과 윤리의 통합에 대해서는 Gordon H. Matties, Ezekiel 18 and the Rhetoric of Moral Discourse, SBL Dissertation Series (Atlanta: Scholars Press, 1990), 223-224쪽을 보라.

에스겔 18장 2절의 거짓 격언은 예레미야 31장 29-31절에 되풀이해 나온다. 거기서 하나님은 미래의 이스라엘과 맺으실 “새 언약”의 약속을 통해 그 격언을 확실하게 반박하신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책임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돌리려는 시도를 멈출 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스라엘 및 유다 백성과 새로운 언약을 맺을 날이 올 것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할 것이다(렘 1:34).

Matties, Ezekiel 18 and  the Rhetoric of moral Discouse, 222쪽, Darr, “Transgenerational Retribution,” Tiered Reality, 223쪽.

하나님의 궤도를 벗어나다(겔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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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다 백성들이 18장에 나오는 긍정적인 본보기를 놓쳤다면, 에스겔 22장은 그 나라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궤도를 어디에서 벗어났는지 확실하게 보여 준다. 예루살렘은 그 나라를 궁극적인 멸망으로 이끌어 간 정치 · 경제 · 종교적 요인들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무대다.

 

   로버트 린치쿰(Robert Linthicum)에 따르면, 정치 제도의 목적은 정의로운 정책을 수립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다(신 16:18-20; 17:8-18). 경제 제도는 청지기와 관용의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신 6:10-15; 15:1-18). 종교 제도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정치와 경제 제도들이 하나님께 기반을 두도록 하는 책임을 맡는다(신 10:12; 11:28). 종교는 공동체에 울타리를 제공하고 인생에 의미를 가져다준다. 정치 제도는 그 절차를 마련해 규정하고, 경제 제도는 공동체를 부양한다. 종교적인 제도가 잘못되면, 다른 모든 것들도 쉽게 잘못된다.[1] 부와 가난 사이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은, 국가나 공동체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는 직접적인 표지라고 하나님의 법은 이야기한다.

 

   에스겔 22장에서, 이제 선지자는 포로가 된 유다 백성들에게 왜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의 나라에 임했는지 보여 준다. 왕자에서 시작해서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거쳐 그 땅의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너희가 다 찌꺼기가 되었다’고 말씀하신다(겔 22:19). 하나님의 인내는 한계에 다다랐고, ‘사업상’ 짓는 모든 죄의 삯은 범죄자들에게 죽음과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죄의 목록을 보자. 권력을 사용하여 피를 흘림(겔 22:6), 부모를 업신여김, 이방인을 학대함, 고아와 과부를 해함(겔 22:7), 피를 흘리려고 이간을 붙임(겔 22:9), 성적인 죄와 괴롭힘(겔 22:11), 이자를 요구하고 가난한 자들을 속여 이득을 취함, 부당하게 이익을 강탈함(겔 22:12), 사람들을 약탈하려고 음모를 꾸밈, 보물과 귀중한 물건들을 빼앗고 많은 과부를 만듦(겔 22:25), 율법을 범함, 성물을 더럽힘, 오류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안식일을 어기는 일에 눈을 감아 줌(겔 22:8, 26), 관료들이 부당한 이익을 취득하기 위해 늑대처럼 먹이를 찢고 삼킴(겔 22:27), 선지자들이 이런 행위들을 거짓 환상과 거짓 예언으로 덮어 줌,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강탈을 일삼음,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을 압제함, 외국인을 부당하게 학대함(겔 22:29) 등등이다.

 

   마침내 하나님이 그 사이를 메워 줄 의로운 사람을 찾으셨지만, 단 한 명도 없었다.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초래한 이유는 이 의로운 관계를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22장은 백성이 자멸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그분의 보호하시는 손을 거두시는 것으로 끝난다(겔 22:31).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시는가? 그분은 직접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 제도들이 자연스런 과정을 밟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런 하향 곡선은 결국 멸망으로 끝난다. 일의 신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따라야 할 정직하고 자비로운 관행들을 펼쳐 보여 주어야 한다(겔 18장). 이것을 무시하는 경우 재난이 불가피하다. 

 

 Robert Linthicum, City of God, City of Satan: A Biblical Theology for the Urban Church (Grand Rapids: Zondervan, 1991).

성공의 원천은 누구인가(겔 26-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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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 26-28장의 두로를 향한 말씀은 또 다른 불의한 삶의 예를 보여 준다. 두로 사람들은 무역 경쟁자가 없어지면 얻을 이득을 예상하면서 멸망하는 예루살렘을 고소하게 바라보았다(겔 26:2). 하나님께서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던 유다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시고 저들이 굴욕을 당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겔 26:7-21). “두로는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명성, 심지어는 문화를 통해, 창조된 실재의 본질과 모순되는 안전과 자율성의 추구를 대변한다.” [1] 어떤 사람이든 어떤 나라든 안전과 번영을 단언할 수 없다. 그런데도 두로는 상업적인 성공과 완전함과 풍족함을 자랑했다(겔 27:2-4). 두로는 강력한 해양 국가로서, 지중해 세계를 가로질러 수많은 사람들과 거래를 함으로써 (또는 이용함으로써) 그런 자리에 이르렀다. 하지만 결국 넘치는 화물의 무게 때문에 침몰하는 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두로는 자만심이 과도했고, 거래할 때도 너무나 이기적이었기에 난파하는 두로를 보며 열방의 상인들은 조롱하기를 마지않았다(겔 27:26-6). 하나님께서는 두로의 교만과 물질만을 갈망하는 태도에 책임을 물으셨다. 28장에 나오는 두로 왕을 치면서 읊는 시에서 절정을 이룬다. 두로 왕은 자신은 그 누구보다 위대하며, 경제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이룬 최고의 지혜를 소유한 신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

 

   세상에서 일하는 것과 관련해서 26-28장이 주는 교훈은 의미심장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에서 성공하는 근본적인 원천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금하신다. 물론 우리의 성실함, 또 우리가 가진 기술과 어떤 일을 인내하는 등의 자세가 성공에 기여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성공의 근원은 결코 아니다. 가장 성공적인 자화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기저에는 기회들의 세계가 있고, 우연한 상황들이 있으며, 다른 이들의 수고가 있고, 무엇보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성공의 원천이 오직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깨는 교만이다. 우리에게는 성공을 좌우하는 모든 상황과 가능성과 사람들과 사건들을 통제할 힘이 없다. 그렇다 보니 성공의 근원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요인들을 통제하려 들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속임수를 쓰려다 보니 가혹한 억압을 서슴지 않는다. 과거에는 정직하고 합법적인 비즈니스로 성공했다면, 이제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진실을 가리고, 뒤에서 입찰을 조작하고, 우리가 원하는 걸 얻으려고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거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어 사람들의 환심을 삼으로써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 한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할지라도 교역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무자비하고 난폭해질 수도 있다(겔 28:6).

 

   진정으로 슬기로운 자는 의롭게 행동하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 주시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성취에 알맞은 은혜로 신실한 삶을 보상하실 분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들은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을 충실히 지킨다(겔 28:22-26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신다(겔 24:17-22; 마 25:31-46). 이것은 고대 사회에 살든 현대 사회에 살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포로들’에게, 특히 그들이 공정성과 절망에 관한 문제로 의문을 품을 때 큰 희망을 안겨 준다.[2]

 

 Joseph Blenkinsopp, Ezekiel, Interpretation, (Louisville; John Knox Press, 1990), 118쪽

말 3:13-18의 같은 부분을 보라.

파수꾼으로 부르시다(겔 3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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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서 전체를 생각할 때, 18장과 33장은 주제와 구조 면에서 비슷한 기능을 한다.[1] 18장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33장에서는 설령 그렇다 해도 개인적인 의에 따라 살며 회개하라고 요구한다.[2] 다만 33장에는 18장에 나오지 않는 다른 개념이 등장한다. 에스겔 33장 1-9절에 이르면, 하나님이 3장에서 그 나라를 위한 파수꾼으로 에스겔을 부르셨던 사실을 다시금 회고하신다.[3] 성문에 있는 파수꾼은 원수가 위협해 올 때 도성 주민들에게 알려야 하는 책임이 있다. 이처럼 에스겔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를 의무적으로 권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이르기를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너는 악인에게 경고하여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라고 하되 그가 돌이켜 그의 길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전하리라(겔 33:7-9).

 

   이는 에스겔 18장에 처음 소개하고, 이어서 33장에서 예루살렘 멸망 전야에 다시 강조한 의에 관한 소명에 덧붙이는 중요한 추가 사항이다(겔 33:21-22). 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개인적인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바벨론의 포로 된 유다 백성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개인과 공동체의 의에 호소하라고 파수꾼에게 요구하신다.

 

   우리는 에스겔의 청중(겔 18장)과 같은 입장일 뿐만 아니라, 에스겔과도 같은 입장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다른 이들을 향해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권고하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라고 호소해야 한다. 구약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절실히 깨닫도록 해 주는 선지자로서의 부름을 받았다. 하지만 이 시대 모든 크리스천들은 새 언약의 구성원들로서 선지자의 직분을 다하도록 부름받는다.

 

   선지자 요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이것을 다음과 같이 미리 내다보았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이것을 현실에서 실현된 사실로 선포했다(행 2:33).[4]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선지자로서 책임이 있다는 말씀은 일의 신학에 관한 몇 가지 교훈을 주며, 나아가 일터에서 완수해야 하는 증인의 사명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다른 이들의 운명을 개인적으로 책임지도록 부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책임짐으로써 파수꾼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그들의 생명만 위태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 또한 위태롭다(겔 33:9).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시대와 문화에서 이러한 책임을 다하기란 실로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른 사람들이 의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소명은 이 시대에도 여전하다. 일터의 관점에서 말한다면, 크리스천은 일터에서 정의를 위해 일할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자기 진단 차원에서 다음 질문 몇 가지를 스스로에게 해 보자.

 

  •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가? 크리스천들은 어느 직장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일들을 보고, 그런 일에 참여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이때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 편안하게 잘 어울리는 삶보다 하나님의 진리를 더 중요시하는가? 일터에서 신랄한 비판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부서의 실패를 뒤집어쓰고 희생양이 되는 사람을 지지하며, 오도하는 광고 캠페인을 그만두라고 앞장서서 외치라는 뜻이다. 이러다 보면 사무실 내에 분쟁이 일 수도 있고, 인사고과에 좋지 않게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고통을 감당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직장 동료들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삶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실제로 보여 주는가? 우리는 말로만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소통한다. 에스겔은 그의 전체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과 심판을 보여 주는 걸어다니는 증거이자 눈에 보이는 실례였다. 실리콘 밸리의 한 CEO가 자금 관리 이사에게 일주일 뒤에 분기별 보고서를 내야 하니, 거기에 넣을 만한 2백만 달러짜리 추가 이익을 찾아내라는 업무 지시를 내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부 비용을 투자로 부정확하게 분류하고 일부 투자를 수입 총액으로 분류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공교롭게도 다른 기독교인 자금 관리 이사들과 매월 한 번씩 모임을 했고, 때마침 모인 자리에서 그들은 CEO 앞에 두려움 없이 나서야 한다고 그를 독려했다. 보고서 제출 마감일에 자금 관리 이사는 CEO에게 말했다. “여기 대표님이 부탁한 대로 보고서에 2백만 달러짜리 추가 이익을 잡아 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정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 여기에 서명할 수 없습니다. 절 해고하려면 하십시오.” CEO는 뭐라고 답했을까? “이사님이 서명하지 않겠다면 나도 안 할 겁니다. 이사님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알기에 나는 이사님을 믿습니다. 본래 작성한 정확한 보고서를 가지고 오세요. 예상했던 수익성에 미치지 못해서 일괄 책임을 지겠지만 그래도 그 보고서를 발표합시다.”[5] 말과 행동, 이 두 가지 면에서 자금 관리 이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의 실제를 보여 줬을 뿐만 아니라 CEO까지 그렇게 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에스겔 33장은 각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의를 이루도록 부름받았지만, 선지자는 동료 포로들을 경고하여 의롭게 행동하게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에스겔 33장의 파수꾼 비유를 통해 직장 동료들의 인생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기대를 일깨운다. 이 비유는 또한 다음 장에서 비슷한 사상을 제시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준다.

 

 

Preston Sprinkle, “Law and Life: Leviticus 18:5  in the Literary Framework of Ezekiel,”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estament, 31, no.3 (2007), 275-293쪽을 보라.

겔 18:21-22/ 겔 33:14-16; 18:23/ 겔 33:11; 18:24/ 겔 33:12-13; 18:25-29/ 겔 33:17-20 참조.

겔 3:17-19; 33:7-9 참조.

이를 더 알아보기 위해서는 R. Paul Stevens, The Other Six Days (Grand Rapids: Eerdmans, 1999), 169-173쪽을 보라.

 TOW 프로젝트 실행 편집인에게 익명으로 제보가 들어왔다.

실패한 이스라엘 지도자들(겔 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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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나라를 돌보지 않아서 고발당한다. 에스겔 34장은 양을 치는 비유를 들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목자)이 하나님 나라에 사는 사람들(양 떼)을 어떻게 압제했는지 명확하게 보여 준다. 목자들은양 떼의 필요를 희생시키면서까지 호의호식하면서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했다(겔 34:2, 3, 8). 양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그들을 보살피거나 힘을 불어넣어 주지 않았고, 길을 잃어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맹렬하게 그들을 압제했다(겔 34:4). 이로 인해 양 떼는 야수들(적대적인 나라들)에게 노출되었으며, 온 세상으로 흩어졌다(겔 34:5-6, 8).

 

   하나님은 양들을 목자들(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입”에서 구하고, 그분의 양을 찾아 보살피고, 흩어진 곳에서부터 다시 불러 모으겠다고 약속하신다(겔 34:9-12). 하나님은 그들을 고국으로 다시 인도해 와서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목초지에 편안히 눕게 하실 것이다(겔 34:13-14). 최종적으로 하나님은 살찐 양(압제에 가담하여 혜택을 누린 사람들)과 여윈 양(약하고 억압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심판하실 것이다(겔 34:15-22). 이러한 구원은 두 번째 다윗이신 최후의 목자를 미래에 지명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하는데, 그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왕권 아래에서 왕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 즉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고 보살피는 일을 할 것이다(겔 34:23-24).[1]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보호와 풍성한 열매와 자유의 축복을 보장하는 평화의 언약을 하나님의 양들(백성들)과 맺을 것이다(겔 34:25-31).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진정한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겔 34:30-31). 목자 비유는 이스라엘의 사악한 지도자들에게는 심판을 약속하는 메시지요, 그 나라의 억압받고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주는 메시지다.

 

   목자 비유에서 드러난 리더십의 역할은 다른 직무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좋은 리더들은 자기 자신을 먹이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추구한다. 요한복음 10장 11절에 나오는 ‘선한 목자’를 본받는 리더십은, 부하들의 복지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이는 그야말로 종의 리더십이다.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은 권력 과시나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관리자는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사람들이 꽃피우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이것은 경영대학원에서 가르치는 최고 경영 방식과 일치하며, 나아가 수많은 회사에서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신실해서지, 조직에서 관행처럼 행하기 때문은 아니다.

 

   앤드류 메인(Andrew Mein)은 “목양에 관한 성경 속 모든 이미지가 너그러운 돌봄 수준 정도로 퇴색된 탓에 경제적 현실이 특정한 비유 사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데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독자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했다.[2]

 

   에스겔 34장은 양 떼를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예레미야 23장, 시편 23장, 요한복음 10장과 같은 다른 목양에 대한 구절처럼), 동시에 고대 목축의 경제적 입지를 더욱 특별하게 보여 준다. 이로써 경제 분야에서 리더의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알려 준다. 그 목자들은 “소유자의 재산을 잘못 투자하고 남용하여 소기의 수익을 생산해 내지 못함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의무를 저버렸다.[3]

 

   하나님은 양 떼를 반환하라는 말씀으로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 떼의 유익을 돌보지 못했다는 말로는 표현이 너무나 부족하다. 목자들은 자신들을 고용하고 투자에 따른 유용한 수익을 기대하는 주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오늘날 경영자 보상과 기업의 조직 관리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 에스겔이 이와 관련하여 일반적인 입장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각 조직의 관행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 이와 같이 에스겔 34장에는 일의 신학과 관련한 내용들이 풍부하다.

 

   리더들은 그들의 지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와 이익을 돌보아야 한다(빌 2:3-4). 이외에도 그들은 경제적인 의무를 다하도록 고용된 만큼, 경제 분야에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는 조직의 사다리에서, 우리 위와 아래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이익과 복지를 위해 일해야 한다(엡 6:5-9; 골 3:22-24).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일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윤이나 경제적 생산성을 도모하는 것은 경건한 추구다. 크리스천들은 이러한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다. 이익을 그저 크리스천이 하는 일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부산물 정도나 심지어는 거의 받아들일 수 없는 부산물로 여긴다. 하지만 에스겔 34장에서는 경제 손실을 가져오는 근로자나, 팀 운영에 실패해 업무를 성취하지 못하는 관리자가 동료나 부하를 학대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게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사람과 업무, 둘 다 중요하다. 에스겔 시대에서 몇 세기 후에 바울이 말하지 않았던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이런 바울의 입장은 에스겔의 입장과 일맥상통한다. 이윤 창출은 양도할 수 없는 구성 요소이며, 나아가 돈을 받고 하는 일도 주님을 위해 하는 일처럼 하라. 만약 당신이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에서 일한다면, 이윤을 내는 일에 참여할 때 마땅히 하나님께 보고해야 한다.

 

   다만, 크리스천들은 오직 경건한 이윤만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회사에서 좋은 일과를 보낼 의무가 있다. 이행 가능한 판매 계획을 세우고, 업무 계획서를 견고하게 작성해야 한다. 고용주는 우리에게 마땅히 그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회사에 잘못된 상황 보고서를 제출해서는 절대 안 되며, 피고용인들을 오도하거나 그들의 무지를 이용해서도 안 되고 품질 관리 문제를 덮어 두려고 해서도 안 된다. 고용주들 또한 우리에게서 이런 태도를 기대할 것이다. 회사에 충성을 다하는 착하고 생산적인 일꾼이, 곧 주님께 헌신하는 정직하고 자비로운 일꾼이다.

 다윗과 같은 왕은 에스겔 19장 1절, 21장 17, 30절, 22장 6절에서 고발당하는 왕들과 명확한 대조를 이룬다. 

 Andrew Mein, “Profitable and Unprofitable Shepherds: Economic and Theological Perspectives on Ezekiel 34,”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Old Tastament, 31, no.4 (June 2007), 496쪽.

같은 책, 500쪽.

참목자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때(겔 35-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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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서에 나타난 일의 신학은, 이 책 전체에서 암시하는 미래의 회복이라는 큰 문맥 안에서 보지 않으면 불완전하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파기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이스라엘이 그분께 돌아오면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다. 회복을 예언하고 새로운 성전을 소개하는 겔 35-48장에서 비로소 이 성취는 절정에 이른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신실한 바벨론 포로들이 의로운 삶과 공동 책임을 통해 당시에 예고해 주던 더 완전한 미래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평화의 언약’에는 장차 다윗과 같은 목자를 보내시어 미래를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이 내재해 있으며(겔 34:25), 이는 곧 영원한 언약이다(겔 37:24-26).

 

   에스겔은 이 충성스러운 목자(왕)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시기로 약속하신 축복으로 안내하는 그 날을 기대한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소명을 성취하도록 이끌어 줄 그 날을 기대한다.[1] 하나님께서 에스겔 18장 31절에서 명령하신 율법을 성취하도록 그들에게 나뉘지 않은 마음과 새로운 영을 주심으로써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에스겔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겔 11:19-20; 36:26-28; 36:14; 39:29 참조).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뜻을 행할 만반의 준비를 갖출 것이고, 그들이 장차 세울 새로운 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거룩해질 것이다(겔 37:28). 에스겔은 회복의 날과 그때 필요한 새로운 성전을 묘사하는 데 무려 아홉 장을 할애한다(겔 40-48장). 에스겔 38-48장과 요한계시록 20-22장 사이의 밀접한 유사성에 비추어 볼 때, 에스겔의 환상이 성전 회복을 문자 그대로 기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라는 말씀처럼 성전이 없는 더 위대한 새 예루살렘의 실체를 가리키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목양을 신뢰한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심으로 개개인의 의를 성취하셨다. 나아가 인류를 위해 완전한 공동 책임까지 지셨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에스겔이 말한 언약이 성취되는 날이 우리에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날이 아직 완전히 임하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언약도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다.

 

   에스겔은 우리가 일터에 부름을 받을 때, 포로로서 의로운 행위를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며 거기에 따르는 도전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개개인의 의로움과 공동 책임이라는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이런 삶의 방식은 미래에 성취될 언약을 미리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름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회복을 오늘날 직장에서 실현할 수 있다. 

 

Rolf Rendtorff, The Covenant Formula: An Exegetical and Theological Investigation, trans. Margaret Kohl (Edinburgh: T&T Clark, 1998)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