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시편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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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에 대한 찬송가집이요, 기도서, 지혜문학이자, 시선집이다. 시편의 주제는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다.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으신(시 50:14)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를 나타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마음(시 35:14)과 같은 개인적인 경험까지 포함한다. 시편 대부분이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내용이다. 바로 이 점에서 대부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거나 이야기를 기술하는 구약의 율법서나 선지서와 같은 다른 책들과 구별된다.

 

   수천 년 전에 썼는데도 사실상 시편의 모든 시들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기쁨을 반영한다. 각 시의 특정한 주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시는 우리가 삶의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표현해 준다. 어떤 시들은 어려운 상황 끝에 마침내 좋은 결말을 맞는 과정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느끼는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담아낸다. 또 다른 시들은 악인이 승리했을 때 왜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한 대로 행동하지 않으시는지를 이해하려고 발버둥 치면서 느끼는 분노나 슬픔과 같은 원초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어떤 시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다른 시에서는 침묵하신다. 어떤 시에는 해답이 담겨 있는 반면 다른 시에서는 우리에게 대답 없는 질문을 남기기도 한다.

 

   시에 나타난 다양한 특성에서 알 수 있듯이, 시편의 시는 한 사람이 한꺼번에 쓰지 않았다. 시편의 저자, 저작 연대, 배경, 목적, 용도와 전승에 대한 것들은 아직까지도 성경 연구의 주요 분야다. 양식비평과 비교문학 분석(특히 우가릿 문헌과의 비교) 방법은 시편 연구에서 매우 요긴했다.[1] 이런 연구들을 전반적으로 탐구하지는 않겠지만, 시편을 이해하고 일에 적용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연구는 필요하다면 활용할 것이다.

 

시편이 말하는 일

   시편에 수록된 150편의 시 전체에 일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다. 때로 일에 대한 시편의 관심은 개인적인 윤리와도 연결된다. 즉,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정직함(integrity), 반대자에 대한 태도, 부도덕한 사람들의 외적인 성공에 대한 염려와 근심 등을 포함한다. 또 다른 시편들은 가정이라는 좁은 범위부터 국가와 같이 큰 범위에 이르기까지 조직의 윤리에 관심을 갖는다. 이런 시편들의 주제는 기업 윤리, 제도적 압력을 다루는 법, 세계화, 직장의 결함이나 국가적 부정행위의 결과 등 다양한 현대의 주제에 적용 가능하다. 시편에서 일과 관련한 또 다른 주요한 주제는 일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모든 생산성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근거를 둔 인간의 창의성,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의 중요성, 우리 일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주제를 찾아볼 수 있다. 시편은 결혼, 자녀 양육, 부모를 돌보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다. 이러한 모든 특별한 주제들은 근본적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시편에서 일과 관련한 폭넓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일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다섯 권의 시편

   시편에는 가장 두드러진 구조적 특징이 있다. 전체 내용을 제1권(1-41편), 제2권(42-72편), 제3권(73-89편), 제4권(90-106편), 제5권(107-150편) 이렇게 총 다섯 권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이렇게 구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시편 제1권은 다윗의 경험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제2권은 다윗과 다윗 왕국 이야기다. 제3권은 탄식과 항의의 내용이 주를 이루면서 상대적으로 암울한 분위기를 띤다. 시편 89편에서 다윗의 언약이 깨지고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제3권을 마무리한다. 제4권은 인간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해 진지하게 말하면서도(시 90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위대한 왕이심을 의기양양하게 선포하기도 한다(시 93; 95-99편). 제5권의 주제는 아주 다양한데, 모든 나라와 만물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찬양으로 끝을 맺는다(시 148편).

 

   시편에는 다윗이라는 한 개인에서 다윗 왕국, 이후 다윗 왕국의 몰락, 다음으로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 찬양, 끝으로 하나님 나라의 승리로 나아가는 일련의 진행이 담겨 있다. 이것은 시편 전체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향을 보여 준다. 하지만 많은 시편들이 이러한 배열에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시편이 어찌하여 현재 순서로 배열되었는지 그 이유는 여전히 의문이다. 만일 시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구조가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며, 그게 아니라면 현재 시편이 그 구조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시편 해석을 위한 전략

   시편은 매우 독특하다. 그래서 이를 오늘날의 삶과 일에 적용하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본래 문맥에서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다. 시편은 매우 다양한 찬양 모음집이다. 그래서 이를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가르침을 얻기 위해 시편을 연구해야 하는가? 역사를 위해 읽어야 하는가? 시편을 통한 기도와 찬양을 혼자 해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이들과 함께해야 하는가? 성경 자체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주지 않는다. 시편을 일에 적용하는 문제를 놓고 고찰하기 전에, 우리는 시편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해석 전략을 세워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과 관련되거나 또는 일과 삶에 의미 있게 적용 가능한 중요한 점들을 다루기 때문에 선정된 시편들을 탐구할 것이다. 그 시편 선정 기준은, TOW 프로젝트 참여자, 운영위원회, 검토위원들이 그들의 연구나 경험에서 특별히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이것이 체계적이지 못한 선정 방식임을 안다. 때문에 이로 인해 얻은 해석이 완전하거나 반드시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크리스천 공동체나 개인이 그들의 믿음과 일의 통합을 추구하면서 이 시편들을 활용하고자 할 때 분명 최선의 방법을 제공해 줄 것이다. 

 

 Peter C. Craigie, Psalms 1-50, 2nd ed.,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Nelson Reference & Electronic, 2004), 45-55쪽.

시편 제1권 (시 1-4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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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제1권의 내용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보다는 다윗 개인이 노래한 시편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편들은 다윗 개인과 관련한 문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우리가 일터에서 개인적으로 직면하는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제1권 이후에는 삶과 일에서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측면을 다룬다.

늘 정직을 택하는 인생 (시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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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두 편의 시는 시편 전체에 흐르는 주제를 제시한다. 시편 1편은 개인의 정직함(integrity)을 기술하면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시사한다.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일과 성공에 몰두하는 우리의 열망에 적용한다. 시편 1편은 의인을 이야기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윤리적으로 행한 일은 잘되기 마련이며,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다. 하지만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직장이나 혹은 다른 곳에서 자신이 한 윤리적인 행동들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형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여전히 진리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혜롭게 살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이 그들 위에 임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순종하는가(시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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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2편은 다윗 왕국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국과 그의 성전인 시온을 하나님 나라의 중심으로 선택하셨다. 훗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복종하거나 그분의 진노를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2편 11-1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예수님이 성취하셨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주님의 나라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건강한 직업 윤리는 가치 있지만, 번영을 우리의 우선순위로 둘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분쟁의 한복판에서(시 4, 6, 7, 1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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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윗은, 시편 제1권 가운데 시편 1, 2편 이후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대적들을 향해 불평을 토로한다. 더러는 복수심에 가득 찬 목소리도 있다. 그렇다 보니 오늘날의 독자들이 이 시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다윗이 적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윗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편들을 일터에 적용할 수 있다. 직장 내에서 사람들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때로는 이런 분쟁이 악의를 띨 수 있다. 직업과 관련해 일어나는 갈등은 우울증, 불면증과 같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시편 4편 8절은 개인의 대적을 두고 드리는 기도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하나님께 문제를 맡기고 나면 더없이 평온하다. 때로 분쟁의 한복판에 있을 때는 도움을 구하는 기도마저도 헛되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시 6:8).

 

   한편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정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비열하고 부정직하며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행동한다면,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시 7:3, 5). 시편 17편 3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주장한다.

 

권한은 보상이 아니라 의무다(시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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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제1권에서 8편은 다윗하고만 관련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 시는 다윗의 통치에서 나아가 모든 인간의 권위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나(시 8:1-3), 사람을 세우셔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시 8:5-8). 이것은 고귀한 소명이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 8:5-6).

 

   우리가 권위와 리더십을 행사할 때,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를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또는 이기적으로 다스릴 수 없고 주님의 목적을 따라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은 이 땅의 생명을 돌보라 하신다(시 8:7-8). 취약한 상황에 처한 자, 연약한 자, 특히 어린이를 보호하라 명하신다(시 8:2).

 

   직장에서 권위 있는 자리에 오르면 자신이 능력 있고, 또 스스로 노력해 받은 보상이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시편 8편은 권한은 보상이 아니라 의무라는 점을 상기시켜 준다. 상급자(또는 기관의 장), 이사회, 신탁 관리자, 유권자, 그 외 모든 형태의 권위를 우리는 책임감 있게 행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께도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면, 정치 지도자는 에너지 정책을 고려할 때 현재의 정치적 기류와는 상관없이 가장 친환경적이고 경제적인 과학기술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기업가는 자사 상품이나 서비스가 어린이에게 신체적, 정신적, 문화적, 영적으로 끼칠 수 있는 해로움이 무엇인지 예측하고 이를 방지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장난감, 영화, 텔레비전 방송, 식품뿐만 아니라 소매, 운송, 통신, 금융 서비스 등의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다.

 

바른 기업 윤리 세우기(시 15, 24, 3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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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은 많은 지면을 할애해 직장 윤리 이야기를 다룬다. 시편 15편 1절과 5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이자 거두는 행위를 허용하는 현 시대의 맥락해서 보자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금융’의 “성경은 이자 책정을 금지하고 있는가?” 부분을 보라. 이 시의 내용은 ‘직장에서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로 대신 적용이 가능하다. 예상치 못한 수수료 부과와 이자율 인상으로 정보가 부족한 고객들을 고의적으로 덫에 걸리게 하는 신용카드나 고통스러워하는 대출자에게 더 큰 부채를 지게 만드는 대출은 일례다. 좀 더 범위를 확장시켜 보면, 취약하거나 순진한 사람을 겨냥해 이들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상품이나 서비스는 시편의 이 윤리에 위배된다. 바른 기업 윤리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해 고객에게 진정한 이익을 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시편 24편 4-5절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라고 말한다. 거짓 맹세란 위증을 말한다. 현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고대 사회에서도 역시 사업을 하다 보면 때때로 소송에 휘말렸다. 본 성경 구절은 우리에게 정직하게 증언하고 속임수로 정의를 훼손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다른 사람들이 비양심적일 때 우리는 정직함을 지키다가 승진이나 사업 계약, 당선, 실적 등의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하지만 멀리 본다면 이러한 손해는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시 24:5).

 

   또한 시편 34편 12-13절에서도 윤리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생명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자들아, 악한 말이나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속임수나 비방, 또는 사기 등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행복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자들아”라고 언급함으로써 반대로 당신이 다른 사람을 속이고 비방하면 적을 만들 수 있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적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설령 그 정도가 아니라 해도 적대적인 관계로 둘러싸인 삶은 결코 즐겁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소망이 삶이라면, 믿을 수 있는 친구는 부정하게 얻은 이익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 세속적인 세상에서 정직한 삶을 고집하다 보면 대가를 치러야 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부패한 국가에서 뇌물을 주지 않는 사업가나 그것을 받지 않는 공무원은 안정적인 수입을 유지하지 못할 수 있다. 시편은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말하지만,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고도 덧붙인다(시 34:19). 정직하게 일해 번영을 누릴 수도 혹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함은 그 자체가 보상이다.

 

 

부와 권력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 2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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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20편은 군사력과 같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 20:7). 고대 사회에서는 오직 상류층 군인들만이 말과 병거(전차)를 소유했고, 농부였던 일반 병사들은 도보로 행군해야 했다. 고대 사회 군사력 못지않게 현대 금융 자산은 인간의 능력을 과신하는 잘못된 믿음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그리 대단치 않은 부와 권력조차도 종종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우리의 실상이다.

일의 고충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시편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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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앎으로 평안할 수 있다. 이는 곧 우리 일을 우리 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이 세계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의 일부로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 이것은 우리가 늘 반드시 되새겨야 하는 내용이다. 일을 이런 경건한 시각으로 바라보면 자연스레 일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된다. 목양을 상세하게 설명한 시편 23편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목자는 광야에서 물과 좋은 목초지와 길을 찾는다. 그들은 막대와 지팡이로 포식동물을 물리치고, 양들과 늘 함께하며 격려의 말을 하고 양들을 편히 쉬게 한다. 시편 23편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목자의 일이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영적인 묵상으로서, 현실과의 의미 있는 연결고리가 된다.

 

   물론 일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때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시 23:4). 또는 계약에 실패하고, 교육 업무는 점점 더 힘들어지고, 일에서 소외감과 무의미함이 느껴져 힘들 수도 있다. 근무 환경이 너무 좋지 않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오랫동안 구직의 어려움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누구나 다 이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시편 23편은 이런 모든 상황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상기시킨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 23:4a). 그분은 우리를 위해 가정하시지 않는다. 언제나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우리와 함께하신다. 목자는 막대와 지팡이를 가지고 있고, 하나님은 삶의 어려움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건져 내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가지고 계신다(시 23:4b). 심지어 “내 원수의 목전”(시 23:5)과 같이 때로는 가혹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신다. 모든 것이 평온할 때는 물론이요, 시험과 역경 중에 있을 때에는 더욱이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때로 우리에게 테스트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23편은 우리 여정의 목적지까지 하나님께서 늘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마무리한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b). 시편 127편과 시편의 다른 부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집이나 가정은 사람들이 먹고 자는 주거지일 뿐만 아니라, 일과 경제적 생산의 기본 단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것은 우리가 일을 멈추고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오히려 우리가 일과 삶이 번영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할 시간이 온다는 것을 약속한다. 

 

   이 구절의 앞부분은 이것이 영원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재 삶을 위한 약속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해 준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시 23:6a). 우리 삶과 일, 무엇에든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함께하실 것이라는 이 약속은,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역경을 피하길 바라면서 얻는 위안보다 훨씬 더 깊은 평온을 준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람 (시 2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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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그중 많은 부분이 직업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든 결정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 시편 25편 12절은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르쳐 주시는가? 시편 25편에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시 25:4-5a).

 

   하나님의 길을 알고 그의 진리를 배우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어야 한다. 하나님의 길을 알면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없다 해도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의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10). 하나님의 언약과 법은 성경에 다 담겨 있다.

 

   시편 25편 7절은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라고 덧붙인다. 우리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문제에 정직하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향한 문이 열린다. 시편 25편은 “나의 죄악이 크오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하소서 ……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라고 말한다(시 25:11, 18).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으면,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기합리화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막는 강력한 장벽이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겸손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방해하는 우리의 방어적인 태도를 극복하도록 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에게 그분의 도를 가르쳐 주신다(시 25:9). 또한 우리는 항상 여호와를 바라보아야 한다(시 25:15). 항상 여호와를 바라며 정의, 신실, 화해, 평화, 믿음, 소망, 사랑과 같이 하나님이 중히 여기시는 것을 찾고 행할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항목을 시편에서 명시한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언급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있다.)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시 25:21). 성실과 정직이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관성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고객이나 동료에게는 부정직하고 무자비하게 대하면서 가족에게는 정직하고 관대하다면, 성실하고 정직한 삶이라 할 수 없다. 우리의 최고 가치를 우리가 하는 일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적어도 이 가치가 성경과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함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라면, 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인도하심이 짐짓 추상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 일터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에 이를 적용하면 매우 실질적일 수 있다. 비결은 성경 공부, 고백, 기도, 도덕적 사고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일의 상황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가져올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심으로써 응답하실 것이다. 직업과 일에서 우리의 소명과 관련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 살펴보려면,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소명’의 “특정한 종류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분별하기” 부분을 보라.

 

시편 제2권 (시 42-7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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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감에 시달리고 재정적 파탄을 걱정한다. 시편 제2권에서는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두려움,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기 위해 나아가는 길과 관련된 구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불확실한 세상에서 희망에 관한 진실을 찾고, 또한 거짓 근거가 무엇인지 배울 것이다.

재난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시 4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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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은 때때로 우리의 일터와 일 그 자체, 또는 우리의 안녕까지도 위협한다. 재난에는 자연적 재난(허리케인, 토네이도, 홍수, 태풍, 산불), 경제적 재난(경기 침체, 파산, 주요 금융기관의 붕괴), 정치적 재난(정책의 급격한 변화, 긴급을 요하는 국가적 최우선 사안, 전쟁) 등 무수히 많다. 시편 46편은 전 세계에 걸친 광범위한 재난이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오늘날 세계 경제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런던이나 중국에서 실시하는 통화 정책이 미국 인디애나주나 인도네시아의 농부의 작물 가격에 영향을 미친다. 중동의 정치적 혼란이 전 세계 곳곳의 작은 마을의 휘발유 가격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리고 연달아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결국 지역 레스토랑의 영업 여부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고대 경제가 현대 사회 수준으로 ‘세계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국가 간에 일어나는 일들이 조만간 개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았다. 지구온난화는 언젠가 국가의 모든 권력이 밀랍으로 만든 성처럼 덧없어 보이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세계의 혼란은 무역, 정부, 금융,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일에서의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재앙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크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46:1-3).

 

   어렵고 위협적인 상황의 한복판에서도 우리는 침착하고 자신 있게, 심지어 기쁜 마음으로 일과 동료에게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힘이 고갈될 때 능력과 안녕의 피난처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단지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가 몸담은 지역 사회, 나아가 전 세계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전 세계적인 재난조차도 하나님의 섭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셨던 방법을 살펴보라. 하나님께서 “그 성 중에”(시 46:5) 그리고 세상 어디서나(시 46:10)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때로 우리는 재난 가운데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특권을 누릴 수도 있다.

 

불의한 사람들이 성공해서 불안한가 (시 49, 50, 52, 6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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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성도들은 하나님의 통치 방식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불필요한 걱정에 시달린다. 크리스천들은 악인은 멸하고, 의인은 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일이 언제나 이 각본대로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은 악인이 번영하면, 세상이 잘못되었고 또 자신들의 믿음이 헛되다고 느낀다. 시편 49편 16-17절 말씀을 보자.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경건하다고 해서 경제적으로 반드시 성공하는 것도 아니요, 신앙이 없다고 해서 반드시 실패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돈을 버는 것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는 자들은, 언젠가 반드시 잃을 것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눅 12:16-21). 부자들에 대한 관심과 우려는 시리즈의 3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3장의 “눅 6:25; 12:13-21; 18:18-30” 부분을 보라. 이것은 단지 악인은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악하지만 성공한 사람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그제야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과 그 사람을 집어삼킨 재앙 간의 관계를 깨닫는다. 시편 52편 7절은 이러한 상황을 묘사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시편 62편 10절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 악인의 길을 따르거나 부를 획득하는 것으로 안전을 추구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부패 행위를 저지르거나 인맥의 힘을 빌려 잘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과 똑같이 해서 이 가난에서 벗어나 볼까?’ 하고 흔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했다가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과 같은 수치를 당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과 같은 죄를 선고받을 뿐이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했다면, 피상적으로가 아니라 온전히 믿어야 한다. 시편 50편 16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부를 얻기 위해 사기 행위를 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특히 하나님께 헌신하는 척하면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너무나 끔찍하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일과 또 일하는 방식에서 무엇을 보는지 물어봐야 한다. 혹시 ‘축복’, ‘하나님의 뜻’, ’은혜’ 등을 운운하면서 윤리적으로 손쉬운 방법을 택하고 사람들을 차별하며 부당하게 다루는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외견상의 성공을 무작정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일을 좀 더 자제하면서,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좀 더 꾸밈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시편 제3권 (시 73-8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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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제3권에는 탄식과 불평이 가득하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을 모두 포함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편 제3권 속 많은 시들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 시들을 묵상하는 것은 모든 것을 화목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 우리의 실제 감정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실함 또는 신실하지 못함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 된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라(시 7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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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73편은 시편 기자가 일하면서 만난 유혹과 신실함의 네 단계 여정을 묘사한다.[1] 첫 번째 단계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심판이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시 73:1). 하지만 시인은 곧 하나님의 길을 저버리라고 유혹하는 두 번째 단계에 접어든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시 73:2).

 

   시편 기자는 악인의 표면적 성공에 마음을 빼앗긴 자신을 발견하는데, 3절부터 무려 열 개 절에 걸쳐서 악인의 성공을 거의 강박적으로 자세히 묘사한다. 그는 특히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언급한다(시 73:8). 시편 기자는 그들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정직함이 헛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 또한 악인들에게 동참하는 경계선에 와 있음을 언급하면서(시 73:14-15)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 73:13).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깨닫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시 73:17).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파멸에 던지신다는 사실을 직시한다(시 73:18). 이것은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의 성공은 단지 일시적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세 번째 단계의 시작이다. 결국 그들은 모두 순식간에 멸망하고, “아침이 되면 사라지는 꿈”과 같이 된다(시 73:19-20, 현대인의 성경). 그는 악인들에게 동참하려 했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했는지를 깨닫는다(시 73:22, 현대인의 성경). 네 번째 단계에서 시편 기자는 다시 하나님의 길에 자신을 헌신한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시 73:23-24).

 

   이 네 단계 여정을 우리도 어느 정도는 경험한다. 우리 역시 정직함과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으로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속임수와 억압을 행하고도 교묘히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럴 때면 대체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하나님께서 심판을 집행하실지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지체하시는 동안 삶의 불공평함으로 인해 정결한 자가 재난을 당하며 징벌을 받은(시 73:14) 반면, 악인은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시 73:12)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판의 때는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관이다. 사실 우리 자신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왜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시는지 조바심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부당한 성공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 우리 역시 자신을 위해 부정한 이득을 추구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특히 직원들마다 서로 다른 규정이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터라면, 이런 충동에 더욱 쉽사리 굴복하고 싶어진다. 오만한 사람들(시 73:3)이 인정받고, 사람들을 위협하여 부당 이득을 챙기고도 별일이 없다(시 73:6). 사기를 밥먹듯이 치는데도 오래도록 잘나간다. 직장에서 우리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어리석기 그지없는데(시 73:7)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그렇다 보니 우리도 이들과 똑같이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문득문득 마치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하나님이 잘 모르시거나 아예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보인다(시 73:11). 적어도 일터에서만큼은 그런 것 같다.

 

   시편 73편에 해결책이 있다.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것, 즉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그 자체가 기쁨임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향해 자신을 열고, 그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이룩한 일의 공을 가로채고,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며, 자기 일을 다른 사람한테 미루어 버림으로써 성공의 사다리를 더 빨리 오를 수는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승진과 겨우 얼마간의 추가 소득이 그런 공허감이나 속임수가 드러날까 봐 공포에 떨어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가? 우정을 잃고 주변 사람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을 성공이 보상해 주는가?

 

   주위 사람들을 돌보고 성공의 공을 나누며 실패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다면 더 느리게 출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일은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나, 동료들을 신뢰하고 또 동료들이 나를 신뢰해야 할 때도 거만하고 악하게 구는 사람보다야 더 낫지 않을까? 진정으로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분이시다.

 

 

 John E. Hunter, Finding the Living Christ in the Psalms (Grand Rapids: Zondervan, 1972). “네 가지 방법을 보는 사람”이라는 글에서 이 생각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단계를 정확히 따르지는 않았다.

정부가 부도덕하면 경제적 고통이 따라온다 (시 81, 8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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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73편은 개인적인 심판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시편 제3권의 대부분은 심판 아래 놓인 이스라엘 민족 이야기다. 국가적 심판이라는 주제는 그 나라에서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이 글과 관련이 있다. 이 주제는 또한 크리스천들이 하나님 나라를 대표하면서 종사할 수 있는 중대한 종류의 일, 즉 국가정책 입안이라는 일을 제시한다.

 

   정부가 부도덕해지면 나라 경제가 고통받는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이스라엘 민족 이야기로 시작하는 시편 81편에 그 한 예가 있다. 이 시는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시 81:11-12)라고 말한 후 경제적 결과를 설명한다. ‘오, 내 백성이 내 말을 들었더라면, 내가 기름진 곡식으로 너희를 배불리 먹였을 것이고,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희를 만족하게 하였을 것이다’(시 81:13, 16).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린 민족이 어떠한 결핍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지 엿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길을 신실하게 따랐더라면 그들은 번영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버렸고, 결국 굶주림에 시달린다(시 81:10).

 

   마찬가지로 시편 85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따를 때 축적되는 경제적 이익을 묘사한다. 사람들은 평화와 안정, 풍성한 수확이 있는 일과 부의 증가를 경험한다(시 85:10-13). 좋은 정부가 없다면, 어느 누구도 오랫동안 번영하기를 바랄 수 없다. 잘못된 정부 정책을 규탄하는 장소에서 크리스천들이 자주 눈에 띈다. 건설적인 참여는 물론 필요하다. 당신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지역 또는 국가에서 좋은 정부를 수립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심판 중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시 8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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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제3권 전면에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은혜 역시 발견할 수 있다. 시편 86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청한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86:3).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 86:5). 이 시편 기자는 자신보다 더 힘 있는 사람의 반대에 부딪혀 마음이 지쳐 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시 86:1).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시 86:14). “나를 미워하는 그들”(시 86:17)은 지속적인 위협이었다.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시 86:16b)

 

   이 시는 정의를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시 86:15)는 사실에 기뻐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뿐이다.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86:16a).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 86:7).

 

   일을 하다 보면 누구든지 때때로 반대에 부딪친다. 다른 사람에 의해 억압을 당할 수도 있고, 또는 정말 스스로 실수를 했을 수도 있으며, 간혹 둘 다인 경우에 처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기 일에서 스스로가 무가치하다고 느끼거나, 관계에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주변 상황과 우리 자신 중 그 어느 것도 바꿀 수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를 반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행여 그 적이 우리 자신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삶과 일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걷어내고, 우리에게 과분한 하나님의 은총을 쏟아 부으신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든 우리 적이든, 아무도 더 큰 해를 끼치려는 목적으로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우리는 은혜를 받음으로 새로워진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시 86:11a).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께로 우리 자신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시 86:11-12).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심지어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자비로워진다. 이 시편 기자는 시편 기자에게 품은 미움으로 인해 대적들이 부끄러워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만(시 86:17), 그렇게 함으로써 대적들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시 86:9)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간구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의 대적에게 나타내어 그분의 이름이 영광을 받도록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적들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시편 제4권 (시 90-10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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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제4권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맥락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포함해 깨어진 세계를 다룬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세상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삶조차 바라는 대로 정할 수 없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며,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에서 보호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그분만이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수 있다.

 

하나님을 당신의 일 가운데 초청하라(시 90, 10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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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제4권은 어두운 내용을 담은 시편 90편으로 시작한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시 90:3, 9). 이 시는 우리에게 고통과 인생의 덧없음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인생의 덧없음은 우리 삶은 물론이요, 일의 모든 면에 그늘을 드리운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 동안 가족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벌고, 노년이나 힘든 시기를 대비하기 위해 모으고, 공공선에 기여하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 중 우리 몫을 해내야 한다. 그런데 젊어서는 경험이 부족해 원하는 직업을 갖지 못하고, 나이 들어서는 기술과 능력이 쇠퇴하고, 더러는 많은 나이 자체가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중간 시기에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충분히 빠른 길로 가고 있는지 늘 걱정한다. 일은 원래 하나님과 함께하는 창조적인 공동 노동을 의미했다(창 2:19). 그러나 시간에 쫓기면서 일이 ‘고역과 고생’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일이 아무리 힘들어 보이더라도, 그 일에 함께해 달라고 하나님을 초청하라.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시 90:16-17). 하나님을 우리 일에 초대한다는 것은 일터에서 단지 주님을 떠올리는 게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손이 행한 일”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게 한다는 뜻이다. 일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는 것, 우리의 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 하나님의 원칙에 부합하도록 일에 헌신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여기에 포함된다(창 1:27; 9:6; 약 3:9).

 

   시편 101편 2절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안에서 행하리이다.”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좋은 성품을 기르는 것이다. 자녀가 있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 경건한 성품으로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 가정을 잘 꾸려 나가고, 자녀들이 강하게 성장하여 인생에 닥쳐오는 고난을 대비할 수 있도록 키우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다. 허무주의자와 냉소주의자들은 세상이 잔혹하다는 이유로 부도덕한 행위와 이기주의를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그만큼 더 성품을 갈고 닦아야 한다.

창의적인 동반자 관계(시 10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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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창조성을 따라 인간의 일을 창조성의 한 형태로 의도하셨다(창 1:26-31; 2:5, 15-18). 인간이 일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를 실현하고, 각 사람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도록 이끌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다.

 

   시편 104편은 이러한 창의적인 동반자 관계를 즐겁게 묘사한다. 이 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폭넓게 그리면서 시작한다(시 104:1-9). 그리고 온 땅의 짐승, 새, 바다 생물의 생명을 유지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사역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간다(시 104:10-12, 14, 16-18, 20-22, 25).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풍부하게 공급하신다(시 104:13-15, 23). 하나님의 사역은 자연과 인류를 풍요롭게 만드신다.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시 104:13).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용하여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식물을 모으고 사용해야 한다.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시 104:14 - NRSV 각주 f를 참고하라) 덕분에 우리는 포도주와 빵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 식물에서 기름을 추출한다(시 104:15).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에 주 6일 동안 노동하는 사람들을 살게 하심으로써 풍부하게 공급하신다. 따라서 이 시는 모든 생물이 하나님께 먹을 것을 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펴서 먹이신다고 말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사용하고 가공하기 위해 여전히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시 104:27-28).

 

   시편 104편에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휘장, 옷, 들보, 불꽃, 배(시 104:1-4, 26) 같은 도구들이 나온다. 흥미롭게도 이 시는 이런 도구를 하나님도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풍부한 공급의 일부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창조에서 하위 파트너다. 창세기에서와 같이, 인간은 시편 104편에 나오는 마지막 피조물이다. 하지만 창세기와는 다르게 여기에서 인간은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 등장한다. 우리는 가축, 새, 산양, 너구리와 사자처럼 자신의 일을 해 나가는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시 104:14-23). 각 피조물은 자신에게 적절한 활동을 한다. 우리는 저녁까지 일하고 수고한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 이면에는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시 104:21).

 

   시편 104편은 하나님이 그분의 일을 최고의 수준으로 하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이 아름다운 세상을 가꾸어 나가면서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힘으로 겸손히 일한다면, 우리도 그분 안에서 우리의 일을 최고로 수행할 수 있다. 

시편 제5권 (시 107-15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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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제5권은 시편의 다른 권들에 비해서 주제나 배경의 공통성이 적다. 하지만 일이라는 주제는 다양한 형식과 배경 가운데 시편의 다른 데서보다 더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제5권에는 경제적 창조성, 기업 윤리, 기업가 정신, 생산성, 자녀 양육과 집안 살림, 올바르게 힘 사용하기, 그리고 물질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영광 등의 주제들이 모두 등장한다.

 

모든 일과 생산성을 다스리시는 분 (시 10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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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107편은 인간의 경제적 노력을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연관 짓는다.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23-31).

 

   그때도 지금처럼 사람들은 어업을 목적으로, 또는 무역을 위해 바다로 나갔다. 배는 부서지기 쉬웠고 폭풍을 사전에 알려 주는 시스템은 없었다. 삶과 생계를 날씨에 의존했다. 현대에도 고도의 기술 발전을 이룩했지만, 아직도 많은 영역에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수많은 요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빌 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놀라운 성공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서 태어났을 뿐이다.”[1] 일에서 성공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나는 운이 좋았어!”

 

   믿는 사람들에게 “행운”이라는 말은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공급하심’을 설명하는 용어다. 불확실성을 내재한 일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선물인 기술과 우리의 노력에 어느 정도 달려 있지만, 그보다는 대체로 하나님의 섭리 덕분이다. 삶과 일에서 어떠한 안식처를 갈망하든 간에, 우리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찬송해야 한다(시 107:30-31). 야고보가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도 이 시편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시편 107편 후반부에서 이와 관련한 추가적인 통찰이 등장한다.

 

또 광야가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이 변하여 샘물이 되게 하시고 주린 자들로 말미암아 거기에 살게 하사 그들이 거주할 성읍을 준비하게 하시고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풍성한 소출을 거두게 하시며 또 복을 주사 그들이 크게 번성하게 하시고 그의 가축이 감소하지 아니하게 하실지라도(시 107:35-38). 하나님은 생명이 지구에서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하신다. 광야를 목초지로, 또는 목초지를 광야로 바꾸실 수 있다. 작물을 파종하고 가축을 돌보는 농업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농업이 번영하는 곳에 마을이 생겨나고, 이와 함께 모든 종류의 일이 생겨난다. 도시 경제는 점점 다양해지는 사람들의 욕구에 맞춰 모든 종류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대의 지역 사회에는 농부와 목자뿐만 아니라 옹기장이, 금속 세공인, 서기관(법이나 종교 문헌뿐만 아니라 상업 계약과 거래를 위해 기록하는 자)도 필요했다. 현재든 과거든, 모든 도시 경제는 그 지역에서 생산한 것이든 무역을 통한 것이든 관계없이 풍부한 농업 생산량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세계의 농부들이 자급자족 수준 이상을 생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복합적인 공동체가 번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마른 땅에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한다(시 65:9; 창 2:5).

 

   따라서 시편 107편은 육지와 바다, 두 영역에서의 경제 활동을 모두 다루면서 하나님이 이 모든 영역 위에 계심을 단언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에 적대적이지 않으시다. 시편 107편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고 공급하시는지 말한다. 우리의 생계는 자연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의존한다.

“Bill Gates Answers Most Frequently Asked Questions” (온라인 문서). 다음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download.microsoft.com/download/0/c/0/0c020894-1f95-408c-a571-1b5033c75bbc/billg_faq.doc (2010년 2월 12일).

하나님 계명을 따라 사업하기 (시 11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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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112편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사업하는 사람들, 베풀고 꾸어 주는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라고 시편은 말한다(시 112:3, 7). 이러한 축복을 받으려면 자비, 긍휼, 의로움, 관대함 그리고 정의를 갖춰야 한다(시 112:4-5). 의로움과 정의는 그리 낮선 항목이 아니다. 사람들은 정직하고 공정한 매매를 원하므로, 일반적으로 이러한 덕목이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자비, 긍휼, 관대함은 어떤가? 자비는 우리 자신이나 회사에 가져다주는 이익은 적더라도 고객에게 비용이 더 적게 드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긍휼은 납기를 지키지 못한 공급자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관대함은 고객에게는 이득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잠재적인 경쟁자를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업체들과 설계 명세서를 공유해 우리와 함께 운용할 수 있는 제품을 제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시편 112편은 이런 덕목들이 성공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성공으로 이끈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분명히 그렇게 보인다. 시편은 “그가 재물을 흩어 …… 주었으니”(9절)라고 말하는데, 그러나 그들은 이런 덕을 행하지 않은 자보다 더욱더 굳건하고, 안정되고, 견고하며, 궁극적으로 더욱 큰 성공을 거둔다(시 112:7-10). 이 시는 이것을 주님의 공으로 돌린다(시 112:1, 7).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개입하셨기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이런 미덕이 번영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세계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기 때문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둘 다일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정직한 자들에게 다른 형태의 번영을 주심으로 그들을 축복하신다. 번영에는 물론 부와 재물이 포함되지만(시 112:3), 번영의 전체적인 그림은 부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시 112:6)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시 112:9) 번성하는 후손(시 112:2), 안정적인 관계(시 112:6), 마음속 깊은 평화(시 112:7), 두려움 없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능력(시 112:8)은 번영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두 똑같이 중요하다. 사업에서 주님의 계명을 따를 때, 우리가 누리는 부의 정도뿐만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바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한다면,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을 발견하는 것 역시 보장되지 않겠는가?

나의 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가(시 11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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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113편은 말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3절). 하루 종일 교회에 있으면서 주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인가? 아니면 일과를 포함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뜻인가? 7- 9절을 통해 이는 후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시 113:7-8).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이루시는지는 이 시에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시편 기자처럼 일반적으로 일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급여가 많은 일을 하면 가난한 자는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업에서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는 사람, 정부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사람, 교육계에서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을 통해 이런 기회를 만드신다. 시편 113편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일으키는 것을 강조하면서 삶 전반에서 하나님을 실질적으로 찬양하라고 호소한다.

 

   핵심을 제시하기 위해 수많은 종류의 일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는 아이를 출산하고 가르치는 일 하나를 직접 짚어 말한다.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시 113:9). 고대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건 사실상 그 여자와 남편에게 노년의 가난을 선고하는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여기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먼저 부모가 자녀를 낳고, 먹이고, 씻기고, 보호하고, 놀아 주고, 가르치고, 지도하며, 용서하고, 훈련시키고, 사랑하는 것이 명백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어머니들이 입을 모아 말한다. 아무도, 심지어 교회조차도, 그 일이 경제적으로 엄청난 소득을 내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임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두 번째로 자녀가 없는 성인과 보호자가 없는 아이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제는 거의 항상 다른 사람들의 일을 통해 이루어진다. 의료 전문가들은 생식 능력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입양 전문가와 아동 복지가들은 부모가 되고 싶은 사람과 부모가 필요한 아이를 연결시켜 주고, 가정에 필요한 훈련과 감독을 제공할 수 있다. 모든 가정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포함해 넓은 지역 사회에 있는 다른 사람의 지원에 의존한다. 가족의 일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장의 “시 127, 128, 139편” 부분을 보라.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고 있는가 (시 12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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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107편이 대규모 경제 활동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편 127편과 128편은 산업혁명 전까지 경제 생산의 기본 단위였던 가정에 대해 말한다. 시편 127편은 모든 좋은 일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1-2).

 

   “집”과 “성” 모두, 주민을 위해 재화와 안전을 제공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경제 활동의 목적은 가정을 번영하게 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지런한 노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단언한다(게으름에 관해 말하는 잠언 26장 13-16절과 비교하라). 여기에는 또렷이 보이는 요점 뒤에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열심히 일함으로써 더 크고 아름다운 집을 얻을 수는 있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모든 것을 가치 있게 만드실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제에서 농업 이외의 일은 일반적으로 가정이 아닌 더 큰 조직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127편의 메시지는 고대 가정에 적용한 것처럼 오늘날의 제도화된 직장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모든 일터는 번영하기 위해서 가치 있는 무언가를 창출해야 한다. 시간 투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은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창출해야 한다.

 

   믿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서 특별히 의미 있는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다. 모든 일터에서는 지속적인 가치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빨리 돈을 벌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고자 하는 유혹이 존재한다. 기업은 재료의 품질을 낮춤으로써 단기간에 수익을 증가시킬 수 있다. 영업 판매원은 구매자가 제품 관련 지식이 부족한 점을 이용해 미심쩍은 제품과 부대용품을 판매할 수 있다. 교육기관은 지속적인 역량 개발 없이 학생들을 유인하는 강의를 열 수도 있다. 이외에도 예는 무수히 많다. 우리의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이해하면 할수록, 그리고 우리가 생산하는 것의 진정한 가치 창출에 기여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일하는 기관이 이러한 유혹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진정한 가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겸손해야 하고, 끊임없이 경청해야 한다. 섣부른 의견을 계속 소리 높여 말해 사람들이 내 말을 듣는 데 지쳐 버리면,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가정의 일은 영예로운 것 (시 127, 128, 13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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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 자녀 출산, 부모 봉양 등의 일은 시편 127, 128, 139편 전면에 다시 나타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 128:3). 자녀 출산의 일은 시편 113편에서도 중요하게 다룬다. 이 장의 “시 113편” 부분을 보라.

 

   남편과 아내는 가장 기본적인 유형의 생산인 재생산에 함께 참여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과정에서 아내가 남편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한다. 성경에서는 이 일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을 생존에 반드시 필요하다 보았고,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명예롭게 여겼다. 자녀 출산 외에도 아내들은 일반적으로 가내 생산과 상업적 생산을 모두 포함한 집안일을 관리했다(잠 31:10-31).

 

   성경은 바다로 나가는 자와 양치는 목자(전통적인 남성 직업)뿐만 아니라 집안일을 관리하는 자(전통적인 여성 직업)도 영예롭게 여겼다. 여성이 주체가 되는 가정을 돌보는 일을 제외하고는[1] 오늘날에는 일의 역할을 예전만큼 성에 따라 엄격히 나누지 않는다. 하지만 결혼과 가정의 일은 여전히 영예로운 것으로 본다.

 

   모든 형태의 일과 같이 자녀 출산도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물론 자녀를 출산하는 것도 일이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시 139:13). 다른 모든 형태의 노동과 마찬가지로, 고통이 닥쳤을 때 이것이 하나님의 징벌이나 하나님께 버림받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출산은 전 세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핵심이다. 하나님은 목적이 있으셔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의 생득권은 하나님께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시편 127편으로 돌아가 이 주제의 마지막 요소를 살펴보자. 나이가 들어 일할 능력이 줄어든 부모를 봉양하는 일도 가정의 일이다.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고대에는 연금제도나 건강보험이 없었다. 늙은 부모의 부양 책임은 자연스레 아들의 몫이었다. (일반적으로 딸들은 결혼하면 남편의 가족에 편입되기 때문에 본문은 “아들들”이라고 말한다.) 사실 아들들이 부모의 노후 대책이었고, 이것이 세대 사이를 가깝게 만들었다.

 

   자녀 양육의 가치를 경제적인 면에서 따지는 일이 좀 냉혹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자녀 양육의 감정적 보상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을 더 편안하게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아이가 어른을 필요로 하는 것만큼이나 어른도 아이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은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가르쳐 준다. 이 구절은 또한 부모님이 우리에게 감정적, 신체적, 지적, 창의적, 경제적, 기타 많은 형태의 투자를 했음을 상기시켜 준다. 장성한 자녀가 늙은 부모를 돌보는 일은 옳다. 여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핵심은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는 하나님의 계명이 태도뿐 아니라 일과 경제적인 돌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Man Yee Kan, Oriel Sullivan, and Jonathan Gershuny, “Gender Convergence in Domestic Work: Discerning the Effects of Interactional and Institutional Barriers from Large-scale Data,” Sociology 45, no. 2 (April 2011), 234-251쪽.

힘, 올바르게 쓰라 (시 13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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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일에 힘은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시편 136편은 하나님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에 관한 네 가지 예를 보여 주면서, 힘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을 알려 준다.

 

   첫 번째 예는 4-9절이다. 성경은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 ……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시 136:5-6)라고 언급하며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능력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우리가 번영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 세상에 주시지 않았는가! 하나님이 일하신 순서를 보자. 첫 번째 창조하신 체계(땅, 물, 밤, 낮, 해, 달)는 후에 창조할 창조물들(식물, 땅의 짐승, 헤엄치고 날아다니는 생물들)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하나님은 동물의 생존에 필요한 마른 땅과 초목이 있기 전까지 동물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업무나 체계를 만드는 권한이 주어질 때, 우리와 우리 주위 사람들이 단순히 생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번성하게 하는 환경을 만듦으로써 그 힘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다. 창조에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더 알고 싶다면, 이 시리즈 1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모세오경 · 역사서》 1장의 “창 1:29-30; 2:8-14” 부분을 보라.

 

   두 번째 예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애굽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셨을 때를 그리는 시편 136편 10-15절에 나온다. 바로 이어지는 세 번째 예는, 약속의 땅에 정착하기 위해 여행하는 이스라엘에 대적한 가나안 왕들을 하나님이 멸하시는 내용이다(시 136:16-22). 이 두 가지 예 모두, 사람들을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선한 일을 방해하는 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님이 능력을 사용하심을 보여 준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각자의 소명을 실현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힘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근로자들을 다시 노예로 만들거나 또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반하는 행동을 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힘을 남용하는 것이다.

 

   네 번째 예는 이 시의 끝에 나온다.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23-25).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사랑으로 보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하기 위해 힘을 사용할 때, 하나님 방식대로 우리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힘의 올바른 사용과 관련해 시편 136편의 모든 구절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상기시킨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시 146-15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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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의 마지막 다섯 편의 시는 각각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라는 외침으로 시작한다.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의 형태다. 이 다섯 편의 시들은 우리가 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묘사한다. 그 모든 방법 속에서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일에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일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따라하고 확장시키며 성취한다.

 

시편 14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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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억눌린 자들을 위해 정의를 행하신다(시 146:7a). 하나님 계명에 따라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정의 실행에 동참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시 146:7b). 우리 역시 그렇게 한다.

 

   입법자, 변호사, 판사, 배심원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속박된 자들을 해방시키신다. 안과의사, 안경사, 안경 제작자가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의 시력을 회복시키신다. 물리치료사, 위생병, 젖먹이를 둔 부모가 하는 것처럼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을 일으키신다(시 146:8). 경찰, 안전요원, 비행기 승무원, 인명구조원, 위생 검사관, 평화유지군이 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지키고 보살피신다. 양부모, 노인복지 종사자, 가정 고문변호사, 사회복지사, 재무설계사들이 하는 것처럼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다(시 146:9).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46:10)

 

시편 14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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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옥에서 일하는 교사, 지역 사회 조직가가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흩어진 자들을 모으신다(시 147:2). 상담사, 작가, 음악가가 하는 것처럼 상심한 자들을 치유하신다(시 147:3). 천문학자, 항해사, 이야기꾼이 하는 것처럼 별을 세시고 이름을 지어 주신다(시 147:4).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시다(시 147:5a). 교수, 시인, 화가, 기계 기술자, 수중음파탐지기 조작자, 세부적인 것에 집중하는 놀라운 힘을 가진 자폐증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는 심오한 지혜가 가득하다(시 147:5b). 인권운동가와 기부자들처럼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을 높이 세우시고, 지방 검사, 내부고발자, 험담을 멀리하고 부당한 취급을 받는 동료를 강력히 변호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악한 자의 힘을 꺾으신다(시 147:6).

 

   기상학자, 기후연구원, 건축가와 건설업자, 항공교통관제사가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다가오는 날씨에 대비해 이 땅을 준비시키신다(시 147:8). 목장주, 목자들이 하는 것처럼 동물들을 먹이신다(시 147:9). 엔지니어, 군인, 관세사, 외교관이 하는 것처럼 성문을 견고히 하시고, 어린이들을 보호하시고, 국경에서 평화를 지켜 주신다(시 147:13-14a). 요리사, 주방장, 제빵사, 농부, 전업주부와 맞벌이 가정, 조리법을 올리는 블로거, 식료품 상인, 식료를 나르는 트럭 운전사, 식당 직원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훌륭한 음식을 준비하신다(시 147:14b). 하나님은 율법과 규례를 포함한 말씀을 선포하신다(시 147:19).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47:20)

 

시편 14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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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146, 147, 149편과는 달리, 148편과 150편은 일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에 대해 우리가 찬양으로 응답하는 내용으로 바로 건너뛴다.

 

   시편 148편은 마치 피조물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인 것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해 말한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불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의 말씀을 따르는 광풍이며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시148:7-10) 하나님의 창조로 인해 우리 일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주님에 대한 찬양으로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 “총각과 처녀와 노인과 아이들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시148:12-13a). 여호와를 찬양하라!(시148:14).

 

 

시편 14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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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가, 댄서, 작곡가, 안무가, 교사, 예술단체 직원과 기부자, 성가대원, 음악치료사, 스쿨밴드 멤버, 합창단과 관현악단, 아마추어 밴드, 가수, 직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근로자, 음반 프로듀서와 제작자, 유튜버(YouTubers: 직접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 사이트에 올려서 공유하는 사람들 - 옮긴이 주), 힙합 디제이, 작사가, 오디오 제조업자, 피아노 조율사, 음향 전문가, 음악 애플리케이션 개발자, 샤워하면서 노래 부르는 모든 사람들처럼 여호와께서는 노래, 춤, 악기의 음악을 즐거워하신다(시 149:2-3). 음악을 만드는 것처럼 보편적인 동시에 다양성을 띠는 형태의 인간 행위가 어디 있는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음악을 사랑하시는 데서 비롯된다.

 

   모든 좋은 지도자, 정신건강 분야 종사자, 목사, 판매원, 관광 가이드, 코치, 파티 기획자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신다(시 149:4a). 만일 사람들을 억압하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타인에게서 건강한 기쁨을 얻을 수 없는 체제가 존재한다면, 여호와께서는 억압하는 자를 물리치시고 체제를 개혁하신다(시 149:4b-9a). 사회 및 기업 개혁가, 언론인, 현 상황의 수용을 거부하는 평범한 여성과 남성, 조직심리학자와 인적자원 전문가, 그리고 상황이 극단적이어서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육군, 해군, 공군과 그들의 지휘관들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의와 올바른 통치가 회복될 때, 음악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시 149:6).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49:9b)

 

시편 150편 및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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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시는 우리의 모든 활동과 일의 기반이 되는 하나님의 “능하신 행동”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써, 다시 음악을 이야기한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 150:3-5).

 

   다섯 편 노래의 절정이면서 전체 시편 모음을 최종적으로 끝맺는 시편 150편은 음악이 실로 중요한 일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음악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크게 주를 찬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문자 그대로도 비유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문자 그대로 본다면, 우리가 음악, 춤, 다른 형태의 예술을 기독교 공동체의 관례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는 음악만을 수용하며, 그 외 형태의 예술은 거의 포용하지 않는다. 아니면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음악과 예술을 더 높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예술적 창조성을 표현할 시간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불어넣어 주신 노래들의 가치를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비유적으로 보자면, 시편 150편은 일이 마치 음악인 것처럼 여기도록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의 조화와 일과 휴식의 안정적인 리듬을 추구하고, 우리가 하는 일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보면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일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도덕적 유혹, 지루함, 나쁜 관계들, 좌절, 낮은 생산성 등의 난제들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예를 들면, 상사에 대한 불만이 쌓여서 더 이상 맡은 일을 잘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만약 당신이 상사와의 관계를 넘어서서 일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면, 상황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이 일함으로써 세상의 어떤 부분이 아름다워지는가? 당신이 하는 일에서 하나님은 어떤 아름다움을 보실까? 그것은 힘든 시간을 겪을 때 당신을 지탱하기에 충분한가? 또는 당신이 하는 일이나 방법에서 필요한 변화를 이끌기에 충분한가?

 

   ◦  결론

   우리가 자신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어떤 경우든 그 일이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150편의 시편들은 가장 어두운 두려움부터 가장 밝은 희망까지 우리 삶과 일에서의 모든 측면을 다룬다. 어떤 시는 죽음과 절망을, 어떤 시는 번영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시편의 최종 결론은 찬양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