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1장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창세기 1-11장에 대한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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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는 ‘일의 신학’(Theology of Work)의 기초가 된다. 성경적 관점에서 하는 일에 관한 논의는 결국 전부 창세기 내용에 기반한다. 창세기는 일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창조 하신 일에 관한 이야기이고, 이는 모든 일 가운데 최초의 일이며, 이어지는 모든 일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망상가가 아니라 실재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만들어 존재하게 된 우주는 사람이 일할 재료(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 를 제공해 준다. 창조하신 우주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물(피조물), 특히 사람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노동하는 우리는 피조물 안에서, 피조물에 대해, 피조물과 함께 일 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일할 때, 우리는 피조물을 위해 일하게 된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어떻게 일하기를 원하시는지 배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통해 하나 님께 순종하기도 불순종하기도 하며, 우리가 순종하거나 불순종하 는 중에도 하나님은 계속 일하심을 깨닫게 된다. 성경의 나머지 책 65권도 각각 일의 신학에 나름대로 기여하는 부분이 있으나, 그것은 모두 성경의 맨 처음 책 창세기에서 발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창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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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이 우리에게 제일 처음 밝히는 내용은,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전에 없던 것이 존재하게 됐다. 우주 자체가 시작된 것이다. 창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다. 우연한 사건이나 실수가 아니고, 어느 열등한 신의 작품도 아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표현이다. 

 

하나님이 물질 세상을 존재하게 하셨다 (창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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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는 세상의 물질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초기 피조물은 여전히 “혼돈”(formless)했지만 공간(“깊음”)과 물질 (“수면”)이라는 물질적 차원이 있었으며, 하나님은 이 물질성에 깊이 관계하셨다(“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흙까지 사용해 일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 2:7). 1-2장 전체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의 물리적인 면에 몰두하신다.

 

   그러므로 일의 신학은 창조물(피조물) 신학과 더불어 시작돼야 한다. 우리는 우리 일의 재료인 이 물질 세상을 하나님이 주신 일급 재료로 여기는가? 영구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단지 임시 일터로, 일종의 시험 무대로, 비물질적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처소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벗어나야만 하는 난파선으로 여기는가? ‘물질적인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영적인 세상보다 못하다’는 견해에 창세기는 전적으로 반대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선명하게 나누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ruah[루아흐]”는 ‘숨’, ‘바람’, ‘영’을 동시에 의미한다(NRSV에 나오는 각주 b를 참고하거나 NRSV, NASB, NIV, KJV와 비교하라). “천지”(하늘과 땅 ‐ 창 1:1; 2:1)는 엄연히 별개의 두 영역이지만, 히브리어로 천지는 ‘우주’[1]를 뜻한다. 마치 영어의 “kith and kin”이 ‘친척’을 뜻하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건, 성경이 시작한 곳, 즉 땅에서 끝난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지상을 떠나 하늘에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완전케 하시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계 21:2)와 존재하게 하신다. 사람과 함께 거할 하나님의 처소는 바로 여기 새로워진 피조물 속에 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계 21:3).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창세기 2장과 요한계시록 21장 사이의 기간 동안에, 땅은 부패하고 깨지고 비정상이며 하나님의 목적에 반대하는 사람과 세력으로 가득 찰 것이다(이에 대한 추가 사항은 창세기 3장 이하에 나온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그분은 그것을 보고 “좋다”라고 말씀하신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서는 이 시리즈 4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서신서·요한계시록》10장의 “계17-22장” 부분을 보라.

 

   물리적 대상과 주로 일하는 많은 크리스천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람과 사상,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일보다 교회가 (심지어 하나님마저)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좋은 일을 칭찬하는 설교에서는 광부나 자동차 정비사나 화학자보다는 선교사, 사회복지사, 교사가 사례로 등장할 가능성이 더 높다. 동료 크리스천들은 재고 관리자나 조각가가 되라는 부르심보다는 목사나 의사가 되라는 부르심을 더 알아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런 태도에 과연 성경적 근거가 있을까?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곧 물리적 대상과 일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제쳐 놓더라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과제(창 2:18)와 사물과 함께 일하는 과제(창 2:15)를 모두 주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대단히 진지하게 여기신다.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98), 15쪽.

하나님의 창조는 일의 형태를 띤다 (창1:3-2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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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창조하는 것은 일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능력으로 분명히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세상이 존재하게 됐는데, 우리는 여기서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원시적 실례를 단계적으로 본다. 창조의 순서에 유의하라. 하나님 창조 행위의 처음 세 가지는 형체가 없는 ‘혼돈’을 분리해 하늘(또는 궁창), 물, 땅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었다. 첫째 날, 하나님은 빛을 만들고 그것을 어두움으로부터 분리해 낮과 밤을 조성하셨다(창 1:3-5). 둘째 날에 하나님은 물을 분리해 하늘을 만드셨다(창 1:6-8). 셋째 날 전반부에 하나님은 건조한 땅을 바다로부터 분리하셨다(창 1:9-10). 이 모든 게 그 뒤에 지음받은 것들이 생존하는 데 꼭 필요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영역을 충만하게 채우셨다. 셋째 날 후반부에 하나님은 식물을 만드셨다(창 1:11-13). 넷째 날에 하나님은 해와 달과 궁창의 별을 만드셨다(창 1:14-19). “해”와 “달”이란 말 대신에 “큰 빛”(greater light)과 “작은 빛”(lesser light)이란 용어를 써서 피조물을 예배하지 못하게 했으며, 이로써 우리가 창조주 대신에 창조물을 예배할 위험에 늘 노출돼 있음을 상기시키셨다. 빛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더러, 식물의 생명에 필수적이고, 햇빛과 밤, 계절에도 필요하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은 앞서 창조된 식물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물고기와 새로 물과 궁창을 채우셨다(창 1:20-23). 마지막으로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동물을 창조하셨으며(창 1:24-25), 창조의 극치인 사람을 지으셔서 땅에 살도록 하셨다(창 1:26-31).[1]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말씀하심으로써 성취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모든 것이 이뤄졌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고 유지하시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하나님의 연료가 다 떨어지진 않을까, 피조물의 존재가 불확실한 상태가 아닐까 하고 염려할 것 없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강건하며 그 존재는 안정적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아무것에도 도움받을 필요가 없으시다. 혼돈의 세력과의 어떤 싸움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무너뜨리는 위협이 되지 못한다. 후에 하나님이 창조의 책임을 사람과 공유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지 그분께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피조물을 훼손하려 들거나 지구를 생명이 충만하게 살기에 부적절한 곳으로 망가뜨리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속하고 회복하는 능력은 그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더 광대하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이 성경 본문에 나타나 있다고 해서, 그분의 창조가 일이 아닌 것은 아니다. 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연극을 하는 게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록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하신 일의 초월적인 위엄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쉽게 일로 연결하지 못한다 해도, 창세기 2장을 살펴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손을 가지고 내재적으로 일하신다. 사람의 몸을 만드셨고(창 2:7, 21), 정원을 일구셨으며(창 2:8), 과수를 심으셨고(창 2:9), 조금 뒤엔 “가죽 옷”을 지어 주셨다(창 3:21). 이것들은 하나님의 노동으로 꽉 들어찬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육체적 일의 시작일 뿐이다.[2]

창조 때의 “날들”에 대한 유익한 토론을 위해서는 Bruce K. Waltke, Genesis: A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2001), 74-78쪽을 보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수많은 종류의 일 목록은 다음을 보라. R. Paul Stevens, The Other Six Days (Grand Rapids: Wm. B. Eerdmans, 2000), 18-123쪽. Robert Banks, God the Worker: Journeys into the Mind, Heart, and Imagination of God (Eugene, OR: Wipf & Stock, 2008).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지만, 하나님과 동일하지는 않다 (창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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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만물의 근원이시다. 하지만 피조물이 하나님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콜린 건톤(Colin Gunton)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님은 “Selbständigkeit [젤프슈텐디히카이트]” 즉 “적당한 독립”을 피조물에게 주셨다. 이것은 유신론자나 무신론자가 상상하는 절대 독립이 아니라 피조물 중 의미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식물에 대한 묘사에 가장 잘 나타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창 1:11).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또한 그분은 자신의 창조물을 대대로 영구 보존하시기 위해 문자 그대로 씨를 심으셨다.

 

   창조 세계는 영원히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그러나 피조물은 별개의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일은 똑딱거리는 시계나 껑충대는 꼭두각시의 가치를 뛰어넘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갖고 있다. 우리의 일은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으면서도 나름의 고유한 무게와 존귀함을 지닌다. 


 

하나님은 자신이 일한 결과를 보고 좋다고 하신다 (창1:4, 10, 12, 18, 21, 2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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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은 좋지만 땅은 나쁘다는 이원론적인 견해에 맞서, 창세기는 창조의 각 날에 대해 선언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 얼마 못 가 죄를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들여올 통로인데도 ‘매우 좋았다’라고 평하셨다. 

 

   ‘이 세상은 구제받지 못할 정도로 악하므로, 구원은 오직 비물질적이며 영적인 세상 속으로 피해 들어가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이 신자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창세기는 이를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물질적’ 임무가 아니라 ‘영적’ 임무에만 시간을 써야 한다는 견해도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의 선한 세상에서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코 분리할 수 없다.

 

하나님은 관계 가운데서 일하신다 (창1:2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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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만드시기 이전부터, 하나님은 복수 대명사로 자신을 지칭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 여기서 “우리”가 천사 같은 존재의 천상(天上) 집단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독특한 단일성 안의 복수성인지에 대해서 학자들의 견해가 엇갈리지만, 어느 견해를 취하든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이란 것만은 암시되어 있다.[1]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기서 복수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한다고 이해했는지에 대해 확신을 갖기는 어렵다. 우리로서는 여기서의 복수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통 기독교적 해석을 따르는 게 최선인 듯하다. 어쨌든 신약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참으로 그분 자신 및 그분의 창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시며, 사랑의 삼위일체 속에서 존재하신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성자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요 1:14), 처음부터 피조물 가운데서 존재하시고 피조물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심을 파악할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1-4)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한 존재 안에 세 인격이 존재하는 독특하신 분이시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모두 피조물 안에서 인격으로 활동하신다.

 

 

 

Waltke, Genesis: A Commentary, 64-65쪽.

하나님은 자기 일을 제한하신다 (창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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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째 날이 끝날 때 하나님의 세상 창조는 마무리됐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하기를 그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창조가 완료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일의 많은 부분을 사람이 하도록 남겨 두셔서 창조 사역이 계속 진행되도록 하셨다. 혼돈은 거주 가능한 환경으로 변했고,이제 식물, 물고기, 새, 동물, 사람을 지지해 준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창1:31-2:2).

 

   하나님은 6일간의 일을 매듭짓고 하루를 안식하셨다. 인류 창조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절정이었다면, 일곱째 날에 안식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 주간의 절정이었다. 하나님은 왜 쉬셨을까?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은 위엄 있는 말씀만으로 피조물을 창조하셨으므로 분명 피곤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분은 쉬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공간은 물론이고 시간 속에서도 제한하기로 하셨다.

 

    우주는 무한하지 않다. 창세기를 보면, 우주에는 시작이 있었다. 이것을 과학은 우주 대폭발에 비춰서 이해하려고 한다. 시간에 과연 끝이 있는지의 문제는 성경에서나 과학에서나 그리 분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이 세상 ‘안에서’ 시간에 경계를 정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이 흐르는 한, 하나님은 일주일 중 엿새는 일하는 날로, 하루는 안식하는 날로 복 주신다. 하나님이 친히 이 경계를 지키시고 나중에는 사람들에게도 그 경계를 지키라고 명령하셨다(출 20:8-11).

 

사람,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다(창1:26, 27;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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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창조를 말한 후 창세기는 사람의 일을 말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사람에게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창5:1).

 

   만물이 하나님의 설계와 능력과 선하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사람만이 하나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온전한 신학을 다루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니 그저 우리에게는 독특하게 하나님을 닮은 점이 있다고만 말해 두자.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히’ 똑같다고 믿는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순전한 혼돈 속에서 세상을 창조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신 대로 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지금까지 기술(記述)한 것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물질적 세상에서 일하시고, 관계 속에서 일하시는 창조주시며, 그 일하는 것의 한계를 지키셨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창세기 1-2장 나머지 부분에서는 사람의 일이 다섯 가지의 특정 범주로 나뉘어 전개된다. 지배(다스림), 관계, 열매 맺음/성장, 공급하심, 한계. 이런 전개는 두 가지 주기 속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창세기 1장 26절에서 2장 4절까지, 다른 하나는 창세기 2장 4절에서 25절까지다. 범주의 순서는 각기 다르지만 어쨌거나 이 범주들은 두 가지 주기에 모두 나타난다. 첫 번째 주기에서는 하나님 형상을 따라 일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전개된다. 두 번째 주기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준비시켜서 일하도록 해 주셨는지 설명해 준다.

 

   첫 번째 주기에 나오는 언어는 추상적이어서 인간 노동의 원칙을 개발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두 번째 주기에 나오는 언어는 세속적이며 흙과 다른 요소로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어서 에덴 동산에서 맡겨진 일을 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실질적인 교훈을 주기에 적합하다. 이런 언어의 변동, 성경의 처음 네 책 전체에 걸쳐서 유사한 변동이 일어나는 것 때문에 학자 간에 무수한 연구, 가정, 논쟁, 심지어 분란까지 발생했다. 다른 일반 목적의 주석서는 이에 관해 풍부하고 자세한 내용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쟁의 대부분은 창세기의 일, 일꾼, 일터에 대한 이해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우리 논의에 관련된 것은 창세기 2장에서 앞서 전개된 다섯 가지 주제가 지배(다스림), 공급하심, 열매 맺음/성장, 한계, 관계의 순서로 반복된다는 점이다.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우리가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아 하게 된 일을 어떻게 완수하게 하시는지 설명한다. 이런 주제를 더 쉽게 이해하려면 우리는 창세기 1장 26절 - 2장 25절을 구절마다가 아니라 범주별로 탐구해야 한다.

 

지배(다스림) (창1:2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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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이 땅을 다스리고 있는가 (창1:26).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의 결과는 우리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창 1:26) 됐다는 점이다. 이안 하트의 표현을 따른다면, “하나님의 대리자로 땅을 왕처럼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기본 목적이다. …… 사람은 피조물의 지명된 왕으로서 궁극적 왕이신 하나님께 받은 책임이 있으며 피조물을 관리하고 개발하고 돌봐야 하는데, 이 임무에는 물리적인 일도 포함된다.”[1]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우리 일은 하나님을 충실히 대리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창조된 세상에 통치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행위가 하나님을 비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원형이 아니라 형상이며, 우리 의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원형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모범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인데, 그러려면 우리의 통제 아래 놓인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몸담은 일터에서 이것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우리가 직업을 어떻게 감당하기 원하실까? 직장에 무슨 가치를 더하기 원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제품을 만들기 원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섬기기 원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조직을 만들기 원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기준을 사용하기 원하실까? 하나님 형상을 지닌 자로서 우리 일은 우리가 대리하는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나타내야 할까? 우리가 어떤 일을 마쳤을 때,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 절 쓰셔서 이 일을 이루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배권을 행사한다는 건 무엇인가(창2:5)

 

  비록 즉시 그것을 인식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주기는 지배로부터 시작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창2:5) 핵심 구절은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셔서 그분과 더불어서나 그분 수하에서 일하도록 하시기 전까지는  창조하는 일을 마감하지 않으셨다. 메러디스 클라인(Meredith Kline)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한 왕이 농장이나 공원이나 과수원을 경작하는 것과 같았다. 거기다가 하나님은 그곳에 사람을 들여보내서 땅을 ‘갈고’ 토지를 ‘갈며’ ‘돌보도록’ 하셨다."[2]

 

   따라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일은 땅을 가는 것과 더불어 시작됐다. 이로 보건대, 1장에서 정복[3] 및 다스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을 짓밟도록 허용하신 게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분의 창조물과 사랑의 관계를 맺듯이 행동해야 한다. 땅을 정복하는 일은 땅의 갖가지 자원을 활용할 뿐 아니라 그것을 보호하는 것이다. 모든 생물체를 지배한다는 것은 그것을 남용할 특권이 아니라 그것을 돌볼 계약을 하나님과 맺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와 접촉하는 모든 것의 최대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이들에는 우리의 종업원, 고객, 직장 동료나 동역자, 또는 우리를 위해 일하거나 심지어 우리가 우연히 만나는 사람까지 해당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람들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이익과 주장, 자존심이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도록 특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창세기에서 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는 정확히 그런 유혹과 그 결과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자기 이익 추구가 자연 환경을 어떻게 위협하는지를 잘 알게 됐다. 우리는 에덴 동산을 개간하며 돌보도록 되어 있었다(창 2:15). 우리가 피조물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공기, 물, 땅, 식물과 동물이 선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환경을 유지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 일은 하나님이 창조물을 축복하시기 위해 주신 깨끗한 공기, 물, 땅, 다양한 생물, 생태계, 생물자원, 심지어는 기후를 보존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 지배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불리하게 일할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위해 일할 능력이다.

 

Ian Hart, “Genesis 1:1-2:3 as a Prologue to the Books of Genesis,” TynBul 46, no. 2 (1995): 322쪽.

Meredith G. Kline, Kingdom Prologue: Genesis Foundations for a Covenantal Worldview (Eugene, OR: Wipf & Stock, 2006), 69쪽.

“정복하다”(kavash)는 경작(농사), 사육(목양), 심지어 채굴에까지 적용되어 “‘땅’의 개념과 관련된 모든 경제적 문화적 잠재력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을 참고하라. Robert B. Chisholm Jr., From Exegesis to Exposition: A Practical Guide to Using Biblical Hebrew (Grand Rapids: Baker, 1998), 46쪽.

관계 (창1:27; 2:18,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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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일하고 있는가 (1:27)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일한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분이라는 것을 이미 살펴봤으므로(창 1:26), 관계적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도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다. 창세기 1장 27절의 둘째 부분은 이 점을 재확인해 주는데, 우리에 대해 개별적으로 말하지 않고 두 단위로 언급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우리는 우리 창조주와 우리 동료 피조물과의 관계 아래에 있다. 이런 관계는 창세기에서 철학적인 추상 관념으로 남아 있지 않다. 동물 이름을 짓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은 아담과 이야기하시며 그와 협력하셨다(창 2:19). 또한 하나님은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창 3:8)으로 아담과 하와를 방문하셨다.

 

   이런 실질적인 일은 직장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와 함께 일하는 주변 사람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관계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요일 4:7). 혹자는 단순히 “하나님은 사랑하신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경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내면으로 즉 성부, 성자(요 17:24), 성령 가운데서 흘러넘치는 사랑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간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우리에게로 흘러나와서, 우리에게 제일 유익한 일만을 행한다. 우리 감정 속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적 사랑과 비교되는 ‘아가페 사랑’이다.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우리가 하나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은 인격적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더 깊이 탐구했다. 쉐퍼는 이것이 참된 사랑을 가능케 한다고 말하며, 이에 반해 기계는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관리 하에 두신 모든 것을 우리는 의식적으로 돌봐야 할 책임이 있다. 관계적인 피조물이 되는 것에는 도덕적인 책임이 수반된다.[1]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한다는 건 무엇인가 (2:18, 21-25)

 

   우리는 관계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내재적으로 관계적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모든 창조 행위는 “좋다”라거나 “매우 좋다”라고 불렸으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은 하나님이 “좋지 않다”라고 선언하신 첫 번째 경우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살과 뼈를 취해 여자를 만드셨다.

 

   최초의 여자 하와가 태어나 보니 아담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이후로, 모든 새로운 사람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살로부터 나오게 되겠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잉태하게 될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 “한 몸”을 이뤘다(창 2:24). 이것이 순전히 애정 문제나 가정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일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하와는 아담의 ‘돕는 배필’이요 ‘동역자’로 지음받아 에덴 동산을 일구는 일에 동참하게 됐다. 돕는 자라는 말은 아담처럼 그녀도 그 동산을 가꾸게 될 것을 나타낸다. 돕는 자가 된다는 건 일한다는 의미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돕는 사람이 아니다.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이와 더불어 관계 속에서 일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하와를 “돕는 배필”이라고 부르셨을 때 그분은 하와가 아담보다 열등한 자가 되리라거나 하와의 일이 아담의 일보다 덜 중요하거나 덜 창조적일 거라고 의도하신 건 아니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ezer)는 구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시 30:10). 에제르는 분명히 종속적인 자가 아니다. 더욱이 창세기 2장 18절은 하와를 돕는 자로 묘사할 뿐 아니라 동역자로도 묘사한다. 돕는 자와 동역자에 대해 오늘날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영어 단어는 “협력자”(co-worker)다. 이것이 참으로 창세기 1장 27절에서 가리키는 의미다. ‘그분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라는 말은 우선순위나 지배권의 차이를 말하는 게 전혀 아니다.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부합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타락의 비극적인 결과였다(창 3:16).

 

   관계는 일하는 데 부수적인 게 아니라 필수 요소다. 적절한 환경 아래 일터는 깊고 의미 있는 관계의 장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일종의 일로 묘사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멍에란 소 두 마리를 함께 일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와와 아담을 협력자로 만드셨을 때 의도하셨던 대로 참으로 동역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마음과 몸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하는 동안, 우리 영혼은 안식을 찾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동의 선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쉼을 얻지 못한다. 멍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시리즈 4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서신서 · 요한계시록》 3장의 “고후 6:14-18” 부분을 보라.

 

   하나님이 친히 형성하신 관계에서는 권위의 위임이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동물 이름 짓는 일을 아담에게 위임하셨는데, 권위의 이전은 진지한 것이었다.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다”(창 2:19). 다른 모든 형태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위임할 때 우리는 권한과 독립성의 일부를 내주고 다른 사람이 한 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리더십과 경영 분야에서 지난 50년 동안 이뤄진 발전의 대부분은 권한의 위임, 작업자에게 힘을 실어 주고 팀워크를 기르는 형태로 성취됐다. 비록 기독교인이 늘 인지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종류의 발전은 창세기부터 일터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많은 사람은 공동의 목적과 목표가 주어질 때 (유급으로 일하든 무급으로 일하든) 서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방대하고 복합적인 재화와 용역을 개인의 역량 이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만든다. 일터에서 관계가 없다면, 자동차도, 컴퓨터도, 우편배달 업무, 법률, 상점, 학교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고, 한 사람 크기보다 더 큰 사냥감은 사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남녀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할 다음 세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몸담은 공동체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철저하게 상호 연계되어 있다. 서로 잘 결합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열매 맺고 번성하도록 하는 수단이 된다.

 

Francis A. Schaeffer, Genesis in Space and Time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72), 47-48쪽. 프랜시스 쉐퍼, 《창세기의 시공간성》(생명의말씀사 역간).

열매 맺음/성장 (창1:28; 2: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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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열매 맺고 번성하고 있는가 (창1:28)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므로, 우리는 열매를 맺거나 창조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종종 “창조 명령”이나 “문화 명령”으로 불린다. 하나님은 흠이 없는 창조물과 이상적인 무대를 만드셨으며 인류를 만드셔서 창조 프로젝트를 지속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하시니라”(창 1:28). 하나님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으며 혼자서도 얼마든지 땅을 충만케 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인류를 만드셔서, 그분 곁에서 같이 일하면서 우주의 잠재성을 실현하고 하나님 일에 참여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좋은 땅 위에서 엄청난 일을 수행하도록 우리를 믿어 주심이 놀랍지 않은가. 우리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먹을 것과 마실 것, 생산물과 용역, 지식과 아름다움, 조직체와 공동체, 성장과 건강을 주시며 그분께 찬양과 영광이 돌려지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생산적일 뿐 아니라 “보기에 즐거움이 된다”(창 3:6).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다른 선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미(美)도 우상이 될 수 있는데, 기독교인은 종종 미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하나님이 보시는 미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본질적으로 미는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더 중요한 일로부터 일탈하는 것도 아니며 시대가 지나면 시들어 버릴 꽃도 아니다. 미는 하나님의 형상을 좇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지극히 귀한 보석”(계 21:11)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님에 대한 말로 음악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 능하다. 아마도 우리는 다른 모든 종류의 참된 아름다움의 진가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더 생산적으로, 아름답게 일하는지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역사는 놀라운 성취를 이룬 크리스천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만일 우리 일이 그들에 비해 열매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해답은 자기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 무리 속에서 소망을 품고, 기도하며, 성장하는 데 있다. 그 어떤 안팎의 장애물에 부딪친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이 선을 행할 수 있다.

 

열매 맺고 번성한다는 건 무엇인가  (창2:15, 19-20)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일하다’ 또는 ‘갈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avad[아바드]’와 ‘지키다’라는 뜻의 ‘shamar[샤마르]’는 각각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그분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에도 쓰인다.[1]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 행해진 일에는 분명히 거룩함이 있다.

 

   창세기 2장 15-20절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 가지 특별한 종류의 일이 주어졌다. 정원 돌보는 일(물리적인 일)과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일(문화적/과학적/지적인 일)이다. 둘 다 창조적인 사업으로,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특정 활동을 하게 한다. 식물을 키우고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늘어나는 인구를 유지하거나 피조물의 생산성을 늘리는 데 필요한 자원을 산출해 낸다. 우리는 땅을 과도하게 채워서는 안 되겠지만 채울 수단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다고 정원 개간과 동물 이름 짓기가 사람에게 알맞은 유일한 임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사람의 임무는 하나님이 주신 상상력과 기술,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에 의해서만 제한되는 하나님의 창조적 일을 아주 여러 방식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일은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설계에 영구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일은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게 하고, 우리 자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수단이 되며, 우리의 너그러움으로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 창조 사역에서 중요하지만 가끔 간과되는 면은 기이한 바다 생물부터 코끼리나 코뿔소까지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거대한 상상력이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형상을 닮은 특징을 놓고 다양한 얘기를 하지만, 상상력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써 우리 가정뿐 아니라 직장, 우리 주변에서 늘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공장 조립대에서 트럭의 볼트를 조이는 동안 그 트럭이 길에서 달리는 모습을 상상한다. 또 노트북 컴퓨터에 담긴 한 문서를 열면서 이제 막 쓰려고 하는 이야기를 상상한다. 모차르트는 소나타를 상상했으며 베토벤은 교향곡을 상상했다. 테슬라와 에디슨은 전기를 동력화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빛을 가지게 됐으며 수만 가지 집기와 가전제품과 장비를 사용하게 됐다. 누군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가상 속에서 상상했다. 직장의 대부분은 누군가가 일감을 만들어 내는 제품이나 직장에서의 공정을 상상했기에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일이 필요하며, 상상한 다음에는 제품을 만들어 내는 일이 필요하다. 실제로 상상력과 실현은 종종 서로 얽혀진 과정으로 발생한다. 피카소는 그의 그림 <게르니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회화는 미리 생각해 놓았다가 착수하는 게 아니다.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에 화가의 마음이 바뀌면 그림도 바뀐다. 그리고 마친 후에도 그림은 그것을 쳐다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된다.”[2] 상상력을 실재로 만드는 작업은 반드시 창의력을 수반한다.

 

 

R. Laird Harris, Gleason L. Archer, Jr., and Bruce K. Waltke, eds.,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Chicago: Moody Press, 1999), 639, 939쪽.

이 인용구가 널리 반복되고는 있으나 그 출처는 알기 힘들다. 그것이 진짜든 아니든, 그것은 모든 종류의 예술가에게 널리 알려져 있던 하나의 실체를 표현해 준다.

공급하심 (창1:29-30; 2: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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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창1:29-30)

 

   우리는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 이를 통해 하나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 만일 있다고 해도 그분은 그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힘이 있으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한편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인정하는 건 우리로 오만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분이 없으면 우리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이 공기, 물, 흙, 햇빛, 생물의 기적적인 성장, 우리 몸과 마음의 형성, 우리 일의 재료가 되는 여타의 모든 원료를 계속 공급해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존재를 이어갈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의 공급을 인정하면, 일할 때 우리에게 자신감이 생긴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나 환경의 변화무쌍함에 기대어 우리 필요를 공급받으려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일을 열매 맺게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 필요를 공급하시는가 (창2:8-14)

 

   창조 이야기의 두 번째 주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우리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지 보여 준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려고 힘쓸 때 땅을 생산적으로 만들어 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 2:8). 우리가 밭을 경작하지만, 원래 심으시는 분은 하나님이다.

 

   먹을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땅을 만드셨다. 우리가 열매 맺고 번성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할 자원을 공급하시기 위해서였다. 물을 공급하는 수많은 강을 주셨고, 돌과 광물 자원을 제공하는 광석을 주셨으며, 경제 교류의 수단이 되는 원료물질을 주셨다(창 2:10-14).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창 2:11-12). 우리가 새로운 원소와 분자를 합성할 때나 미생물 가운데서 DNA를 재편성할 때나 인공 세포를 만들 때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물질과 에너지를 가지고 일하는 것이다.

 

한계 (창2:3;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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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규정하신 한계를 따르고 있는가 (창2:3)

 

   하나님 형상을 따라 창조됐으므로, 우리는 일하는 중에 한계에 따라야 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3). 하나님이 지쳐서 쉬신 걸까 아니면, 그분의 형상을 지닌 우리에게 일과 안식의 모범을 보여 주기 위해 안식하신 걸까? 십계명의 제4계명은 하나님이 안식하신 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수 세기에 걸쳐 종교적인 사람들은 무엇이 안식일을 지키도록 했는지 정의하는 규정을 쌓아 두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우리 유익을 위해) 안식일을 만드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막 2:27). 

 

   하나님처럼 우리의 일곱째 날마다 우리가 일을 멈춘다면, 우리 삶이 일이나 생산성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삶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생산과 소비는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이 규정하고 축복하고 제한하신 세상 안에서 발생한다는 걸 증거하는 것이다.”[1]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자율성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존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완전히 인간 통제 아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안식일을 우리 일의 일상적인 부분으로 만드는 건 하나님을 궁극적인 삶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안식일, 안식, 일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는 이 시리즈 3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2장의 “막 1:21-45”, “막 2:23-3:6”, 3장의 “눅 6:1-11”, “눅 13:10-17” 부분을 보라. 

 

한계 안에서 일한다는 건 무엇인가 (창2:17)

 

   일하는 날과 안식일을 모범적으로 지키심으로써 사람을 축복하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의 일을 제한하라고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다. 에덴 동산 한 가운데에 하나님은 두 가지 나무를 심으셨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창 2:9).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접근 금지였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신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왜 거주민이 이용하지 못할 한 나무를 에덴 동산 가운데 두셨는지 장황하게 추측해 왔다. 일반적인 주석은 갖가지 가설을 제시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대답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목적하는 바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볼 필요는 없다는 규칙을 따르면 그만이다. 인간의 상상력과 기술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원을 가지고 일하되 하나님의 의도, 목적, 계명에 반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거역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피조물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실현하려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준수해야 할 것이다.

 

   프랜시스 쉐퍼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한 나무와 악한 나무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하신 게 아니라 악에 대한 지식을 취할 것이냐 말 것이냐 사이에서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고 지적했다(물론 그들은 선에 대해서는 이미 알았다). 그 나무를 만드실 때 하나님은 악의 가능성을 열어 두셨지만 그렇게 하심으로 그분은 선택의 효과를 확인하고자 하셨다. 모든 사랑은 선택에 묶여 있다. 선택이 없다면 사랑이란 단어는 의미가 없다.[2]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분과 관계 맺는 사람이 ‘피조물에게 선을 가져올’ 한계를 존중하길 바라신다. 

 

   오늘날 직장에서 우리가 한계를 따를 때, 그런 자세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복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창조성은 기회에서도 발생하지만 한계에서도 발생한다. 건축가는 고객이 제시하는 시간, 돈, 공간, 물질, 목적의 제약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화가는 2차원적 화폭에 3차원적 공간을 표현해야 하는 제한으로 시작해서 그들이 도구로 사용하는 매체의 제한을 받아들일 때, 창조적인 표현을 발견한다. 작가는 지면과 단어 제한에 직면할 때 재기(才氣)를 발견한다.

 

   모든 좋은 일은 하나님의 한계를 존중한다. 자원 추출, 오염, 서식지 개량, 식품이나 의복이나 기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동식물에 대한 땅의 용량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의 몸은 일에 대한 강도, 인내력, 역량이 크긴 하지만 제한적이다. 건강한 음식과 운동에는 제한이 있다. 우리가 아름다움을 천박함으로부터 구분하고, 비판을 학대로부터 구별하고, 우정을 착취로부터, 봉사를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를 무책임으로부터, 권위를 독재주의로부터 구분하기 위한 기준에도 한계가 있다.

 

   물론 실제로 선(線)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를 정확히 알기 어려우며 기독교인도 순응, 율법주의, 선입관, 질식할 것 같은 따분함에 대해 종종 그릇 판단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지를 선포할 때 특히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형상을 지닌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피조물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한계를 따를 경우 어디서 복을 발견할 수 있는지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Walter Brueggemann, “Sabbath,” Reverberations of Faith: A Theological Handbook of Old Testament Theme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2), 180쪽.

Schaeffer, Genesis in Space and Time, 71-72쪽. 프랜시스 쉐퍼, 《창세기의 시공간성》(생명의말씀사 역간).

 

창조 명령 (창1:28;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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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창 1:1-2:3) 사람에게 하나님 형상을 따라 살도록 준비하심에서(창 2:4-25),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셔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열매 맺고 번성하며,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받아들이고, 관계 속에서 일하며 창조의 정한 한계를 따르게 하신다는 것을 탐구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창조 명령” 또는 “문화 명령”으로 종종 불려 왔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창세기 1장 28절과 2장 15절의 내용이 두드러진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이런 용어를 꼭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용어가 나타내는 생각은 창세기 1-2장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창조를 완성시키는 일에서 사람을 자신의 하위 파트너(junior partner)로 의도하셨고 그렇게 만드셨다. 만물을 있는 그대로 만족하고, 일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필요를 위해 공급된 것을 받아들이며, 오랫동안 빈둥거리며 놀고, 비창조적인 체계 안에서 일하고, 사회적 고립 속에서 일하는 것은 우리 본성에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일이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에 의존하며, 그분의 말씀 속에서 주어지고 피조물 가운데서 분명하게 드러난 한계를 존중하면서, 다른 사람 및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2차적 창조자로서 일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사람은 일하는 중에 죄에 빠졌다 (창3: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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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우리는 에덴 동산의 완벽한 조건에서 진행되는 이상적인 형태의 일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이제 창세기 3장 1-6절을 보자.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1-6). 

 

   뱀은 하나님의 대적, 즉 사탄을 나타낸다. 브루스 월키(Bruce Waltke)는 하나님의 대적이 심술궂으며 사람보다 더 교활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사탄은 민첩하게 아담과 하와의 취약점을 주목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했다. 사탄은 교묘하게 하와를 꾀어 신실해 보이는 신학 논쟁 속으로 끌어들였으며, 동산에 있는 다른 과일 나무의 공급하심 대신에 하나님의 금지령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명령을 왜곡했다. 실제로 사탄은 하나님 말씀이 가혹하고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뱀의 계획은 성공했으며 처음에는 하와, 다음에는 아담이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게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한계를  파괴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 가지게 된 것을 어떤 식으로든 넘어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헛되이 시도했으나 실패했다(창 3:5). 경험으로 이미 하나님 창조의 선하심을 알았던 그들은 악의 길을 통해 ‘현명하게’ 되려고 했다(창 3:4-6). 하와와 아담이 그 열매를 먹고자 결심한 것은 그들 자신의 실용적, 심미적, 감각적 취향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두려 했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선”이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삶을 향상시키는 것에 뿌리를 두지 않고, 사람이 생각하기에 삶을 고양시킬 것 같은 것에 뿌리를 두게 됐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1]

 

   하나님께 불순종하기로 선택함으로써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관계를 깨뜨렸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으며 더는 그분과 함께 서늘한 저녁 시간에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그분의 존재로부터 스스로 숨었다(창 3:8). 아담은 그가 하와와 맺은 관계를 깨뜨리고 그 열매를 먹은 자기 결정이 그녀 탓이라고 말했으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해 빈정거렸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그날 아담과 하와가 내린 결정은 오늘날 우리의 일터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재난을 초래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심판을 선언하셨고 고된 노동에 이르는 결과를 선언하셨다. 뱀은 항상 배로 기어 다니게 될 것이다(창 3:14). 여자는 자녀를 출산하는 산고를 겪을 것이며, 또한 남자를 지배하려는 욕구 때문에 갈등을 느낄 것이다(창 3:16). 남자는 땅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고하게 될 것이며, 땅은 원하는 곡식을 얻기까지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다(창 3:17-18).

 

   전체적으로 봤을 때, 사람은 그들이 창조된 대로 해야 했던 일을 그대로 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이다(창 3:17-19). 그러나 일은 더욱 어렵고 불쾌하게 될 것이며, 때로는 실패해 원하지 않는 결과에 이르게 되기도 할 것이다. 또한 남자와 여자에게 선언된 고통은 상호 배타적인 게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 남자 역시 자녀를 양육하는 고통을 겪을 것이며, 그들은 바라는 바가 상충하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여자 역시 식탁을 차리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가장 위대한 여자 주인공 로잘린드(Rosalind)는 삶의 가시를 언급하며 이렇게 부르짖었다. “오, 이 노동해야 하는 세상은 얼마나 가시로 가득 찼는지!”

 

   일이 고역이 될 때가 일의 시작이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일을 저주의 일부로 보지만, 아담과 하와는 이미 에덴 동산에서도 일하고 있었다. 사실 일은 타락의 결과로 덜 중요해진 게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해졌다. 이제 필요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 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자유와 기쁨 속에 태어나게 한 원료물질은 이제 복종의 원천이 됐다. 흙에서 만들어진 아담은 이제 몸이 죽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흙을 개간해야 할 것이다(창 3:19). 아담 옆구리 갈비뼈로부터 만들어진 하와는 이제 아담의 옆 자리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 아담의 지배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창 3:16). 결혼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게 된 것과 일이 고역이 된 것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아니었지만, 죄지은 인간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부여하신 관계를 깨뜨리고 그것을 새로운 관계 방식으로 삼았다(창 3:12-13).

 

   우리는 매일 두 가지 형태의 악과 맞부딪친다. 첫 번째는 자연적인 악으로서 지상의 물리적 조건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도하신 삶에 적대적이다. 홍수와 가뭄, 지진, 과도한 더위와 추위, 질병, 해충 등이 동산에는 없었던 해를 가져온다. 두 번째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도에 적대적인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때 겪는 도덕적인 악이다. 악한 식으로 행동하면 우리는 피조물을 망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리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그르친다.

 

   타락하고 깨진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는 수고 없는 삶은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일을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이생에서의 그 일은 에덴 동산에서 그날 깨진 모든 것에 의해 더럽혀졌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우리의 관계(개인적, 단체적, 사회적)에 정해 놓으신 한계를 따르지 못한 결과다. 타락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 사람 사이, 사람과 그들을 지지해 줄 땅 사이를 이간(離間)시켰다. 서로에 대한 의심이 신뢰와 사랑을 대신해 들어섰다. 이어지는 세대 가운데서, 이간은 질투, 분노, 심지어는 살인까지 낳았다. 오늘날 모든 직장은 크든 작든 노동들 사이의 이간을 나타내며 우리 일은 한층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덜 생산적이 됐다.

Waltke, Genesis: A Commentary, 90-91쪽.

타락한 피조 세계에서 일하게 되다 (창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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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다(창 3:23-24). 그들은 깨어진 관계와 고통스런 일을 그대로 지닌 채 나와, 저항하는 땅에서 생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셨다. 그들에게 기술이 부족할 때는 옷을 지어 입히시기까지 하셨다(창 3:21). 저주가 그들의 생육하고(창 4:1-2) 번성하는 능력을 파괴하지는 못했다(창 4:3-4).

 

   창세기 1-2장의 일은 계속됐다. 여전히 갈아야 할 땅이 있었고 주시하고 묘사하고 명명해야 하는 자연 현상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여전히 열매를 맺어야 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통치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일의 두 번째 단면도 성취되어야 했다. 즉 그릇된 것과 저질러진 해악을 치유하고, 고치고, 회복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것을 현대의 맥락에서 보면 농부, 과학자, 조산사, 부모, 지도자 및 창조적 기업 내 모든 이의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러나 악을 억제하고 재난을 방지하고 피해를 복구하고 건강을 회복시키는 의사, 장례 지도사, 교도관, 범죄 감식가 등 전문 직업을 가진 이들의 일도 필요하다. 사실 모든 사람의 일은 창조와 복구, 격려와 좌절,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이 섞여 있다. 개략적으로 말하자면, 에덴에 있을 때보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두 배나 더 많아졌다. 일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덜 중요한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처음 살인 (창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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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4장은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인 첫 번째 살인 사건을 상술한다. 두 사람은 그들이 일한 소출을 가져다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가인은 농부였으므로 땅의 소산 얼마를 드렸는데, 성경 내용을 보면 그것이 그가 산출한 가장 좋은 최초의 것이라는 암시는 없다(창 4:3). 아벨은 목동이었으므로 자기 양 떼 중에서 “첫째 것”을, 즉 가장 좋은 “기름진 부분”을 가져왔다(창 4:4). 비록 두 사람이 다 먹을 것을 생산했지만, 그들은 함께 일하거나 예배하지 않았다. 일터는 더 이상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장소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호의적으로 보셨지만 가인의 제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셨다. 성경에서 분노를 최초로 언급하는 장면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자포자기에 빠지지 말고 분개심을 극복해 장차 더 좋은 성과를 내도록 하라고 경고하셨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 4:7)라고 하나님은 물으셨다. 그러나 가인은 자기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창 4:8; 요일 3:12; 유 1장 참조). 하나님은 그 행위에 이렇게 반응하셨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0-12).

 

   아담의 죄로 임한 하나님의 저주가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고 땅에만 임했다(창 3:17). 가인의 죄로는 가인에게 땅의 저주가 임했다(창 4:11). 더는 땅을 갈 수 없어서 농부 가인은 방랑자가 되어 마침내 에덴 동편 놋이라는 땅에 정착했는데, 거기서 가인은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도시를 건설했다(창 4:16-17). 도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 장의 “창 10:1-11:32” 부분을 보라.

 

   창세기 4장 나머지 부분은 가인의 후손을 7대에 걸쳐 소개하는데, 폭군적 행동을 보였던 라멕은 그의 조상 가인을 오히려 온순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라멕은 죄를 지으며 점차 더 강퍅해지는 모습을 보여 준다. 첫 번째로 창세기 2장 24절에 나오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어기고 일부다처제에 빠진 것이다(창 4:19; 마 19:5-6). 그다음으로는 피의 복수인데, 라멕은 단순히 자기를 쳤다는 이유로 살인을 했다(창 4:23-24).

 

   그러나 또한 라멕에게서 문명의 시작을 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서 문제를 야기했던 ‘노동의 분업화’는 라멕 시대에 전문화를 가져왔고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라멕의 아들 중 몇 명은 악기를 창안했으며 청동 및 철 도구를 사용해서 공예품을 만들었다(창 4:21-22). 음악을 창안하고 악기를 만들어 내고 야금술을 발전시키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의 창조성 범위에 드는 일이었다. 예술과 과학은 창조 명령의 귀중한 완성이지만, 라멕이 자랑하던 악행은 폭력으로 기울어진 타락한 문명에 수반되는 위험성을 암시했다. 타락 이후 최초의 시인은 인간의 자랑과 권력 남용을 칭찬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하프와 플루트가 나와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될 수 있게 됐으며(삼상 16:23) 야금술도 히브리 성전 건축에 쓰였다(출 35:4-19, 30-35).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그들은 다양하게 갈라졌다. 셋을 통해서 아담에게는 에녹과 노아 등 경건한 씨를 얻을 소망이 생겼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하나님의 길로부터 멀리 벗어난 한 집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1-5). 

 

​   너무나 부패해 하나님이 마침내 철저히 파멸하기로 작정하신 문화에 맞서 셋의 경건한 가계(결국은 노아와 그의 가족밖에 남지 않게 됨)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오늘날 그분의 형상을 지니고 대리자로 자처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반영한다고 믿는 원칙을 직장에서 준수해야 한다. 부정직, 불성실, 불량품 산출, 생계에 못 미치는 임금, 열악한 근무 조건, 노동력 착취와 같은 압박 속에서 일할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겠는가? 셋의 이야기를 비롯해 성경에 나오는 많은 다른 예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설계와 명령에 따라 살 수 있는 여지가 세상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사람들이 두려움, 불안, 의심에 빠지고, 권력이나 부나 사람의 인정을 향한 무한한 욕망에 굴복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은 일터에서 굳건한 윤리의식과 뚜렷한 목적, 긍휼함을 가진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은혜 없이 극복하기에는 너무 많아 보이는) 고난을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시리라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탐욕, 불공평, 증오, 무관심으로 학대를 당할 때 우리는 그들을 위해 일어서서 정의를 세우고 상처와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은 직장에서 만나는 죄에 대항할 힘이 있다. 그 죄가 다른 이의 행위에서 발생한 것이든 아니면 우리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든 간에 말이다.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불가능할 게 전혀 없을 것이다”라고 한탄하셨는데, 이는 우리의 실제 능력을 언급하신 게 아니라 우리의 오만을 지적하신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라고 하시며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눅 1:37)라고 선언하신 말씀을 받았다. 놀라우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것을 성취할 힘이 있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이 권능을 믿는 사람처럼 일하는가? 아니면 그저 소란을 야기하지 않고 그럭저럭 넘어가려고 노력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헛것으로 만드는가?

 

 

“이젠 그만!” 새로운 세상을 작정하시다 (창6:9-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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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상황은 구제할 수가 있지만, 또 다른 어떤 상황은 구제 범위를 넘어선다. 우리는 창세기 6장 6-8절에서 홍수 이전 세상과 문화에 대해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으며, 다시 시작하려는 그분의 결단을 듣는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아담 때부터 우리 세대까지 하나님은 필요할 때 죄악된 문화에 대항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 아담은 그 시험에서 실패했지만 노아의 계보를 생산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다(창 6:9). 노아는 속죄적인 일을 행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땅으로부터 생계를 유지하기에 바쁜 다른 사람과는 달리 노아는 인류를 구원하고 자연을 파멸로부터 구해 내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 노아에게서 우리는 제사장, 선지자, 사도의 원형을 발견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이며, 환경 보호자로서 자연을 구속하는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자다. 크든 작든 노아 시대 이후 모든 일꾼은 구속하는 일은 물론 화해시키는 일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 노아는 얼마나 엄청난 선박 건조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했는가? 주위의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수천 그루의 “고페르 나무”를 찍어다가 대패질해서 널빤지를 만들어 물에 뜨는 동물원을 축조해야 했으니 말이다. 이 3층짜리 배는 온갖 종류의 동물을 실을 만하고 무기한으로 필요한 음식과 물도 저장할 만큼 커야 했다. 그런 고난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순종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13-22).

 

   비즈니스 세계에서 기업가는 신상품이나 공정을 내놓을 때 위험을 감수하며 통상적인 지혜에 어긋나게 일하는 데 익숙하다. 단기간의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장기적인 견해가 필요하다. 노아는 때때로 불가능한 임무처럼 보이는 것에 직면했는데, 몇몇 성경학자에 의하면 그 방주를 실제로 짓는 데는 100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의심스런 눈빛과 비판자의 면전에서 믿음, 불굴의 의지, 세심한 기획도 필요했다. 아마도 우리는 노아의 개척자적인 개발 목록에 프로젝트 관리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혁신가, 기업가, 직장 내에서 우세한 의견과 시스템에 도전하는 사람은 내적인 힘과 신념이 필요하다. 우리가 반대나 낙담에 처할 때 해답은 우리 자신을 설득해 어리석게도 위험을 감수하도록 하는 게 아니라 기도로 주의를 돌리며 하나님 안에서 현명한 사람의 조언을 듣는 것이다. 정·재계, 과학계, 학계, 예술계 및 다른 수많은 일의 영역에서 혁신가의 창의성을 격려하고 다듬는 일에 은사가 있고 훈련된 갓 피어나는 크리스천이 필요하다.

 

   홍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으며 창세기 7장 1절 - 8장 19절에 나와 있다. 산꼭대기를 넘는 물속에서 방주를 뒤흔드는 홍수가 일렁이는 반년 이상의 기간 동안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동물은 방주 안에서 이리 튕기고 저리 튕겨야 했다. 마침내 홍수가 잦아들자 땅이 말랐으며 새로운 식물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방주에 탔던 자들은 다시 한 번 마른 땅을 딛었다.

 

   본문은 창세기 1장을 회상하며 창조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깊음” 위에 “바람”을 불게 하시니 “물”이 물러갔다(창 8:1-3).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홍수의 힘에 의해 다시 생겨난 신세계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문화에 상처로부터 새로 시작하고 바로 잡을 기회를 주셨다. 기독교인에게 있어, 이것은 요한계시록 21-22장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전조(前兆)가 된다. 우리가 앞에서 논의한 바대로, 사람의 생명과 일은 타락의 결과로부터 치유된 우주 안에서 완벽해진다.

 

   아마도 사람의 이 첫 번째 대규모 토목공사는 환경 프로젝트였는지 모른다. 뱀과 모든 피조물과 사람 사이의 무너진 관계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 결과로(창 3:15),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물을 구원할 임무를 맡기셨으며 사람이 그 일을 신실하게 행하리라고 신뢰하셨다. 사람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면직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류가 타락할 때 잃어버린 것을 복구하기 위해 언제나 일하시며, 타락했으나 회복된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 귀하게 사용하신다.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다 (창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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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 번 마른 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된 노아의 첫 번째 행동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는 일이었다(창 8:20). 거기서 노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을 드렸다.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할”(창 8:22) 것이며 다시는 인류를 파멸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셨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후손과 언약을 맺으시며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창 9:8-17). 하나님은 무지개를 그 약속의 표시로 주셨다. 비록 땅이 다시 급격하게 바뀌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있다. 그분은 반복해서 축복을 선포하시며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7)라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일을 통해 식량을 제공하리라는 약속을 확언하셨다(창 9:3). 대신, 하나님은 사람 가운데서 공의에 대한, 모든 피조물의 보호를 위한 요건을 말씀하셨다(창 9:4-6).

 

   “무지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에는 ‘비’라는 의미가 생략되어 있다. 그 단어는 단순히 전쟁이나 사냥의 도구인 활을 가리키는 말이다. 브루스 월키는 고대 근동 신화에서 활 모양으로 생긴 별들은 신의 분노나 적대감과 연관이 있지만 “여기서는 전사의 활이 걸려 있으며 땅으로부터 먼 곳을 가리키고 있다”[1]는 점에 주목했다. 메러디스 클라인은 “신의 호전성과 적대감의 상징이 변형되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 징표가 됐다”[2]라는 점에 주목했다. 느슨한 활이 땅에서 하늘로 수평선을 따라 놓여 있다. 전쟁의 도구가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을 통해 평화의 상징이 됐다.

같은책, 146쪽.

Kline, Kingdom Prologue: Genesis Foundations for a Covenantal Worldview, 152쪽.

노아도 타락했다 (창9: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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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를 위한 영웅적인 일을 한 후에 노아는 곤란한 가정 사건에 휘말린다. 그 일은 아주 많은 가정과 직장에서 일어나는 비극이 그렇듯이 물질(이 경우에는 포도주) 남용에서 시작됐다(알코올 음료 생산을 노아의 혁신 목록에 추가하라 - 창 9:20). 술에 취한 노아는 천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의식을 잃었다. 그의 아들 함이 불쑥 들어왔다가 아버지의 벌거벗은 상태를 봤으나, 다른 아들들은 함의 주의를 듣고 조심스럽게 천막 안으로 뒷걸음질 쳐 들어와서 아비의 알몸을 덮어 드렸다. 이 상황과 관련해서 무엇이 정확히 부끄럽거나 부도덕적인지는 대부분의 현대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그것이 집안의 재앙이 됐음을 분명히 알았다. 노아가 의식을 되찾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됐을 때 그의 반응은 가정의 평안을 영원히 깨트렸다. 노아는 함의 후손 가나안을 저주했으며 그들을 다른 두 아들의 후손에게 종으로 삼도록 했다. 이로써 수천 년간의 증오, 전쟁, 잔학 행위의 무대가 노아의 가족에게 펼쳐진 것이다.

 

   노아는 수치의 나락으로 떨어진 첫 번째 위대한 인물일지 모르지만, 마지막 인물은 아니었다. 위대함에 대한 무언가가 사람을 도덕적 실패에 취약하게 만드는 것 같다. 특히, 우리의 개인 삶과 가정생활에서 더 그럴 것이다. 얼마나 흔한 현상인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와 같은 잠언, “사람이 덩치가 크면 클수록 떨어질 때는 더 심하게 부딪친다”와 같은 일상 속담에도 등장한다.

 

   노아는 분명히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이다(히 11:7).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좋은 반응은 노아를 심판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만일 위대해지기를 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먼저 겸손함을 구하는 게 좋다. 만일 이미 위대한 자리에 올랐다면, 노아의 운명을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만일 노아와 같이 타락했다면, 재빨리 고백하고, 자신이 자기합리화로 방어해서 타락이 재앙으로 변하지 않게 도와 달라고 주변 사람에게 요청하자.

 

 

 

노아의 후손과 바벨탑 사건 (창10:1-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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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 일람표’라 불리는 창세기 10장은 먼저 야벳의 후손을 거슬러 추적하고(창 10:2-5), 다음에는 함의 후손(창 10:6-20), 마지막으로는 셈의 후손(창 10:21-31)을 되짚어 본다. 그들 중에서, 함의 손자 니므롯은 일의 신학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니므롯은 바벨론에 노골적인 침략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폭군, 두려워할 만한 강력한 사냥꾼이었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도시의 건축자였다(창 10:8-12).

 

   도시 건축자이며 폭군인 니므롯과 관련해 우리 기억에 새로운 것은 그가 바벨탑을 건축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창 11:1-9). 바벨은, 고대 근동에 있던 다른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큰 성전이나 신전으로, 즉 신들의 왕국에 도달하기 위해 설계된 흙벽돌 계단식 탑이었다. 탑이 있어서 사람들은 신들에게 올라갈 수 있었으며 신들은 지상에 내려올 수 있었다. 비록 하늘에 이르고자 하는 이런 시도를 하나님이 정죄하시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자기 확대의 야망과 심화된 교만의 죄를 본다. 교만 때문에 이들은 강력한 탑을 쌓았던 것이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3-4).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이었나? 명성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게 무엇이었는가? 분산되어 땅에 흩어지는 것이었다. 그들이 세우려 했던 탑은 그들에게 거대해 보였지만, 창세기 기자는 그게 너무 작아서 하나님은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창 11:5)라고 우리에게 웃으면서 말하는 듯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의도하셨던 평화, 질서, 덕행의 도시와는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1]

 

   하나님이 그 탑을 반대하신 것은 그것이 사람에게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창 11:6)라는 기대감을 갖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 앞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처럼, 그들은 하나님 형상을 지닌 자로서 가진 창조적인 권능을 사용해 하나님의 목적을 그르치려 했다. 이 경우, 그들은 하나님이 문화 명령에서 명하셨던 것과 반대되는 것을 하려고 계획한 것이었다. 땅을 충만하게 채우는 대신에 그들은 한 장소에 모여서 살고자 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이름인 아담, 즉 “사람”(창 5:2)의 풍성함을 탐구하는 대신에,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명예를 얻으려고 했다.

 

   하나님은 교만과 야망이 상도(常道)를 벗어나는 것을 보셨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 11:7). 그러자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8-9).

 

   이 사람들은 원래 한 핏줄로서 모두 노아의 세 아들 후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벨탑을 파괴하신 후 이 후손은 중동의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야벳의 후손은 서쪽으로 이동해 아나톨리아(터키)와 그리스로 갔고, 함의 후손은 남쪽으로 옮겨 아라비아와 이집트로 갔고, 셈의 자손은 동쪽에 그대로 머물러 오늘날 우리가 이라크로 알고 있는 곳에 정착했다. 창세기 10장에 나와 있는 이 세 가지 계보로부터, 우리는 고대 근동의 지파와 민족이 어디서 나뉘어졌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연구로부터 도시는 본질적으로 나쁘다고 결론을 내릴 마음이 들지 모르나,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을 주셨으며 하나님 백성의 궁극적 거주지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성이다(계 21:2). “도시”라는 말의 개념은 악하지 않지만, 우리가 도시에서 갖게 될 수도 있는 교만은 하나님을 화나게 만든다(창 19:12-14).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시민이 이룬 위업과 문화를 의미 있는 원천으로 간주할 때 죄를 저지른다. 브루스 월키는 창세기 11장을 분석하며 이렇게 결론지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회는 전적으로 불안정하다. 사람들은 존재적 의미와 안보를 그들의 집단적 단합에서 열렬히 구한다. 한편 그들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갖고 있다. …… 인간 도시의 중심에는 자기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있다. 도시는 사람의 영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기 전에는 그 어디서도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2]

 

   하나님이 사람들을 흩으신 것이 형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구속의 수단이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사람을 세상에 퍼뜨리려고 계획하셨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 탑이 무너진 다음 사람을 흩으심으로써 하나님은 다시 땅을 충만하게 하는 일을 하게 하셨다. 그래서 결국 오늘처럼 사람과 문화가 아름답게 늘어서게 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악의적인 의도와 사회적 횡포만으로 탑을 완성했더라면, 그리하여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게” 됐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교만과 죄 속에서 일군 공포만을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세기와 21세기에 사람이 저지른 악의 규모는, 만일 하나님께 의존함 없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Dostoevsky)가 말한 대로, “하나님과 미래의 삶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 것이나 다름없다.”[3] 가끔 하나님은 우리 고집을 꺾으실 텐데 이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긍휼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바벨탑 사건에서 우리는 오늘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건축자가 저지른 허물은 땅에 퍼져 땅을 충만케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거주지에 모여 살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문화, 언어 및 조직도 한곳에 집중시켰다. 하나의 큰일(“우리를 위해 이름을 내자”)을 행하겠다는 야망에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다양한 은사, 봉사, 활동, 기능과 힘써야 할 노력을 질식시켰다(고전 12:4-11). 사람이 공공선을 위해 함께 일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지만(창 2:18; 고전 12:7), 권한의 집중과 축적으로 그것을 성취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왕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셨다(삼상 8:10-18).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왕, 그리스도 우리 주를 보내 주셨다. 그분의 통치 아래서는 인간 개인, 조직, 정부에 큰 권력이 집중될 수 없다.

 

   우리는 기독교 지도자와 기관이 유의해서 권한을 분산하며, 권한을 집중하는 대신에 조정, 공동 목표와 가치,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선호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크리스천 지도자들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목표는 그럴싸해 보였지만 폭군이나 권위주의자가 추구했던 것같이 권력 집중을 향해 나아갔다. 크리스천 입법자는 말은 경건과 도덕을 장려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대중에게 더 큰 통제력을 행사하려고만 한다. 크리스천 사업가는 품질, 고객 서비스, 윤리적 행동을 고양시키겠다고 내세우지만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독과점을 추구한다. 크리스천 교육자도 도덕적 표현, 친절, 건전한 교리를 주창할 의도라고 말하면서 정작 권위주의적인 교육자가 하는 것을 본받아 생각의 자유를 거의 추구하지 않는다.

 

   겉으로 내세운 목표들은 다 칭찬할 만하지만, 바벨탑 사건은 신앙인이라 자처하는 우리도 종종 오도되어 위험스런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은 후에 이스라엘에 왕을 두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셨는데, 이런 행동도 그런 위험을 암시한다. 사무엘상 8장 10-18절을 보라.) 크리스천조차 죄와 씨름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선한 지배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은, 한 사람이나 하나의 기관, 정당, 운동에 그것을 집중시키기보다는 사람들, 권력, 권위 및 역량을 분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는 한 사람이나 소수의 집단이 결정적으로 권한을 행사해야 할 경우가 있다. 조종사가 승객에게 투표를 해서 어느 활주로를 통해 착륙할 것인지 결정하게 한다면 항공 교통 관제관은 바보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우리가 전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고 권한을 나 눠 주라는 경우가 생각보다 훨씬 더 많다. 권력을 위임하고 권한을 나누 는 것은 혼란을 일으키고, 비효율적이며, 예측하기 어렵고, 위험하며, 불 안만 불러일으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많은 상황에서 크리스천 리더를 불러서 시키시는 일이다. 

 

Augustine, City of God, book XIX.

Waltke, Genesis: A Commentary, 182-183쪽.

Fyodor Dostoevsky, The Brothers Karamazov, trans. Richard Pevear and Larissa Volokhonsky (San Francisco: North Point Press, 1990), 589쪽.

창세기 1-11장에 대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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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처음 몇몇 장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우리를 세우셔서 그분과 연합해 창조를 이어가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셔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분이 공급해 주신 것을 받아들이며, 그분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하고, 그분의 창조의 한계를 따르도록 하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원, 능력, 공동체를 주셔서 이런 임무를 완수하도록 하셨으며 7일 중 6일 동안 일하는 모범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것을 그분과 그분의 창조물을 향한 사랑 안에서 할 수 있게 자유를 주셨는데, 이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만드신 만물을 위해 일하지 않을 자유도 주신 것이었다. 우리가 영구적으로 손상을 입은 것은, 처음 사람이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자 작심한 결과이며 사람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크든 작든 불순종을 선택해 왔다. 결과적으로 우리 일은 덜 생산적이 됐고 더욱 고단해졌으며 만족감이 덜해졌다. 우리 인간관계와 일은 위축됐고 때로는 파괴적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부르셔서 일하 게 하시며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우리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 그리 고 많은 사람은 선하고 창조적이고 성취적인 일을 할 기회를 얻어 그들의 필요를 해결하며, 번영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데 기여한다. 타락은 에덴 동산에서 시작된 일을 보다 더 필수적이게 만들었을 뿐 그 반대는 아니었다. 비록 크리스천이 가끔 이를 오해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타락 이후로 물질적인 세상에서 물러나시거나 그분의 관심을 영적인 것에만 국한하지 않으셨다. 어쨌든 물질 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할 수는 없다. 일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며, 일에 내재된 인간관계와 한계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비록 그것이 타락 이후의 존재의 상태에 의해 심각하게 손상됐다 하더라도 말이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기 창조물을 타락의 영향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언제나 일하신다. 창세기 4-11장은 세상과 그 거주민에게 질서를 주고 또다시 질서를 주기 위해 하나님의 권능이 어떻게 역사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창조된 세상의 주권 자시며 살아 있는 만물과 사람의 주인이시다. 그분은 사람 속에 있는 자신의 형상을 계속해서 돌보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도한 권력을 얻으려 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족(自足)으로 대체하려고 하는 인간적 노력이 “하나님과 같이 되도록”(창 3:5) 허용하지는 않으신다.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여기고 그분의 지시를 좇아 일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노아 같은 사람은 일하는 중에 복과 풍성함을 경험한다. 권력을 쟁취하고 자기 노력으로 성공을 얻고자 하는 바벨탑 건축자 같은 이는 폭력과 좌절을 만날 것이다. 특히 그 들의 일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으로 변할 경우, 더욱 그럴 것이다. 창세기 11장까지 나오는 모든 인물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할 것인지 아니면 그분을 거역하면서 일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창조하신 만물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를 창세기에서 설명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피조물의 일을 포함해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의도하셨던 대로 회복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또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