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누가복음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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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이 세상에 오시는 왕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분의 통치는 아담과 하와와 함께 시작된 인류의 타락과, 반역을 따르는 바람에 어긋나 버린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현재는 하나님의 권세에 반하는 반역자들이 세상의 상당 부분을 다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이며 (일을 포함한) 나날의 삶의 내용이 하나님 나라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통치, 생산성, 공의, 문화에 아주 깊이 신경을 쓰신다.
 

    가장 낮아지심으로 가장 높아지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왕이시며 모델이시다. 예수님을 왕으로 지칭하는 것이 크리스천에겐 익숙하지만, 우리 대부분에게 이 호칭은 기본적으로 실제 왕으로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소 종교적인 호칭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예수님이 왕이라고 말은 하지만, 흔히 그분을 제사장들의 왕으로 여긴다. 우리는 그분을 종교의 창시자로 생각하지만, 누가는 그분이 하나의 새로운 영역으로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다시 세우는 분이라는 걸 증명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는, 심지어 사탄과 그의 앞잡이들도 그분의 통치와(눅 8:32) 능력에 도전할 수 없음을 인정했다. 예수님이 잠시 하늘로 돌아가신 뒤, 예수님이 보이셨던 본은 그분을 대신해 그 나라의 시민들이 어떻게 자신의 힘과 권한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일을 포함해)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복음에는 일에도 적용할 점이 폭넓게 많다. 누가는 우리가 앞으로 논의하게 될 부와 권력, 경제, 정부, 갈등, 리더십, 생산성 및 공급, 투자 등 일과 관련된 주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때로는 본문 순서를 벗어나 같은 주제를 다루는 다른 본문과 함께 보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누가가 쓴 본문 순서를 따라서 살펴볼 것이다. 누가복음이 얼마나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일터에도 계신 하나님 (눅1, 2 및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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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터에 찾아온 가브리엘 천사 눅 1:8-25

   누가복음은 일터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여호와가 일터에 나타나신 오랜 이야기의(창 2:19-20; 출 3:1-5) 연장이다. 제사장이었던 사가랴는 자기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근무날, 즉 예루살렘 성전 성소에서 성전 업무를 수행하도록 선발된 바로 그날에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는다(눅 1:8-11). 우리 중에는 성전을 일터로 생각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곳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짐승도 잡고, 요리도 하고, 청소하고, 회계를 보고, 그 외에도 많은 일에 종사했다. 당시 성전은 단순한 종교 중심지가 아니라, 유대인의 경제생활 및 사회생활의 중심지였다. 사가랴는 여호와 하나님과 만난 뒤 깊은 충격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증거하기 전까지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일상 한복판을 뚫고 들어오시다 눅 2:8-20

   일터에서 하나님을 만난 또 다른 만남이 성전에서 몇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다. 들판에서 양 떼를 돌보던 한 무리의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이 방문한다(눅 2:9). 당시 목자들은 대개 평판이 좋지 않았고, 그들을 깔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 그들을 돌아보셨다. 제사장 사가랴를 방문하셨던 때처럼 하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목자들의 일을 중단시키셨다. 누가는 여호와와 만나는 일을 주일, 수련회, 또는 선교 여행 때로 미루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휘젓는다.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든 친히 나타나실 수 있다. 마치 롯이 살던 시대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지은 것이” 그들의 성읍에 닥쳐오던 심판에 눈멀게 했듯이(눅 17:28-30), 하루하루 똑같이 돌아가는 일상은 우리의 영적 감각을 무디게 할 수 있다.[1]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심과 영광을 지니시고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의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오실 수 있다.

 

   왕이신 예수님 눅 1:26-56; 4:14-22

   만약 두 일터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그분의 계획을 선언하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예수님의 직무설명서와 함께 소개하는 건 더더욱 이상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녀가 아기를 낳게 될 것이라고 말할 때, 분명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이렇게 예수님을 소개하신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우리가 예수님의 직업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을 수는 있으나, 누가복음에 의하면 왕 되심은 틀림없이 그분의 일이었다. 왕으로서의 그분의 일은 더 자세하게 기술된다.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교만한 자를 흩으시며, 통치자들을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며, 가진 것이 없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 주시고, 부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며,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눅 1:51-55) 등이다. 흔히 마리아의 찬가로 불리는 이 유명한 구절들은 예수님을 정치, 경제, 어쩌면 군사 권력까지 행사하는 왕으로 그린다. 타락한 세상의 부패한 왕들과는 달리, 그분은 자신의 권력을 가장 희생되기 쉬운 자기 신하들을 위해 행사하신다. 그분은 자기 왕조를 세울 때 권력자들과 뒤가 든든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으신다. 자기 백성을 압제하거나 자신의 사치스런 삶을 영위하기 위해 세금을 거두지 않으신다. 땅이 모든 백성을 위해 좋은 것들을 내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며, 악함을 회개하는 자에겐 긍휼을 베풀어 주는 올바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세워 나가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에 한 번도 없었던 진정 위대한 왕이시다.

   나중에 예수님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자신에게 적용하시면서 이 직무설명서를 확증하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이것은 정치권과 정부가 해야 할 과업이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는 적어도 예수님의 직업이 오늘날의 목회적인 직업이나 종교적인 직업보다는 정치인의 일에 훨씬 더 가깝다.[2] 예수님은 제사장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그들이 하는 역할을 대단히 존중하셨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을 제사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으셨다(눅 5:14; 17:14).

   예수님이 스스로 주장하신 과업들은 궁핍한 자들에게 유익을 준다. 타락한 세상의 통치자들과 달리 그분은 가난한 자들, 갇힌 자들, 눈먼 자들, 압제당하는 자들, 빚에 허덕이는 자들(주의 은혜의 해에는 그들의 땅이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 레 25:8-13) 편에서 다스리신다. 물론 예수님의 관심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만을 위한 건 아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그분은 모든 상황, 모든 처지의 사람을 돌보신다. 그러나 그분이 특히 가난한 자들과 고난받는 자들, 힘없는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은 다른 통치자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다.

비유에 나오는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초청을 거절한 까닭은, 최근에 산 자기 밭(눅 14:18)과 소(눅 14:19)를 돌봐야 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들은 일과 일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발견되도록 자신들을 열어 놓는 대신, 하나님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일을 활용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부르는 책들, 즉 에베소서(4:15; 5:23)와 골로새서(1:18)조차도 그분을 “만물 위의 머리”(엡 1:22, NIV),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골 2:10)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국가의 수장이시며, 만물의 머리시다. 또한 세상의 구속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즉 교회가 그 특별한 일부가 될 때도 그렇게 되실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 (눅5:1-11; 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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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은 자신을 따를 사람들을 부르시기 위해 두 번 그들의 일터를 찾아가신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고기를 잡고 있는 어부들을 찾아가 그들의 일을 중단시키고, 배를 강단으로 사용하셨을 때다. 거기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몇 가지 탁월한 고기잡이 팁을 주신 후, 갑자기 어부들을 자신의 첫 제자로 부르셨다(눅 5:1-11). 두 번째는 세금 거두는 일에 몰두하던 레위를 부르실 때였다(눅 5:27-32). 이들은 자기 직업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전임 교역자들로 생각하지만, 전임 “사신”(고후 5:20)이라 부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


   이들이 비록 하나님 나라의 특별한 일을 위해 부름받긴 했으나, 누가는 어떤 한 부르심(예를 들면, 설교하는 일)이 다른 부르심(고기잡이)보다 더 높은 부르심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베드로, 요한, 레위같이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눅 5:11). 우리는 조만간 다른 사람들, 마리아와 마르다(눅 10:38-42), 또 다른 세리 삭개오(눅 19:1-10) 및 로마 군대의 백부장(눅 7:1-10)같이, 자신들의 직업 안에서 변화된 삶을 영위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도 만나게 된다. 또 누가복음 8장 26-39절처럼 예수님께서 그 사람더러 자기 집을 버리지 말고 그분을 따라다니지도 말라고 명령하신 경우도 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은 분명히 돈 버는 일은 그만뒀고, 필요한 것은 후원에 의존해 공급받았다(눅 9:1-6; 10:1-24). 그러나 이는 우리 직업을 버리는 것이 제자가 되는 가장 고상한 형태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이들 각 개인을 향한 특정한 소명이었으며, 우리의 모든 공급하심은 (비록 일반적으로는 직업의 형태로 우리에게 공급하시긴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다양한 직업을 유지한 채 예수님을 따른 모델도 상당히 많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것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www.theologyofwork.org의 '마태복음과 일' 에 나오는 “마3-4장”과 '마가복음 & 일의 신학'에 나오는 “막1:16-20” 부분을 보라. 일반적인 부르심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www.theologyofwork.org에서 "소명에 대한 개요"라는 부분을 보라.

 

 예수님은 일터에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 가죽부대(눅 5:36-39), 어리석은 건축가와 지혜로운 건축가(눅 6:46-49), 씨 뿌리는 자(눅 8:4-15), 깨어 있는 종들(눅 12:35-40), 악한 종(눅 12:45-48), 겨자씨 (눅 13:18-19), 누룩(눅 13:20-21), 잃어버린 양(눅 15:1-7), 잃어버린 동전(눅 15:8-10), 탕자(눅 15:11-32), 악한 농부들(눅 20:9-19)을 비롯해 일터를 배경으로 하는 수많은 비유를 말씀하셨다. 일터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는 마치……”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되돌아오시는 장소다. 이런 단락들은 때로 일터에 대한 약간의 지침을 제공하긴 하지만, 일터 자체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것은 아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비유에 나오는 특정 배경을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의 요점을 짚어 주시기 위해서, 일터의 여러 익숙한 측면들을 사용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눈으로 보시기에 일상적인 일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걸 시사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터에서 쓰는 용어로 하나님 나라를 예시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했을 것이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 (눅3: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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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의 상당한 부분이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어난 순서대로 살펴보면, 누가복음에서의 첫 번째 가르침은 비록 예수님이 아닌 세례 요한에게서 나온 것이긴 해도 바로 일에 대한 것이다. 세례요한은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라고 청중들에게 권면한다(눅 3:8). 그들이 구체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고 묻자(눅 3:10, 12, 14), 요한은 종교적 해법이 아닌 경제적 해법을 준다. 먼저 세례 요한은 (두 벌 옷과 많은 식량을 가진) 소유가 넉넉한 사람들에게 가지지 못한 자들과 그것을 나누라고 말한다(눅 3:11). 그다음 그들의 직업과 연관해서 세리들과 군인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즉, 세리에게는 세금 고지서에다 금액을 부풀려서 그 차액을 챙기지 말고 부과된 금액만큼만 거두라 하고, 군인에게는 돈을 착취하거나 사람들을 무고하게 고발하는 데 힘을 쓰지 말라고 한다. 또 자기의 봉급을 족한 줄로 여기라고 한다(눅3:13-14).


   세례 요한이 세리들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눅 3:13)라고 말했을 때, 그는 조직적인 불의가 깊이 뿌리내린 직업인에게 대단히 극단적인 말을 한 셈이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세금은, 공무원들과 다른 고위 관리들이 자신의 관할구역 내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 외주를 주는 ‘세금 징수 청부’(tax farming)로 모아졌다.[3] 그 외주 계약을 따기 위해 세리들은 로마가 거두는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둬 그중 일정액을 그 담당 관리에게 상납해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관리들을 위한 상납금 위에 세리 스스로를 위한 이윤이 더해진 것이 최종 액수였다. 로마의 세금이 실제로 얼마인지 백성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세리가 그들에게 부과한 금액이 얼마든지 납부해야 했다. 따라서 당시 세리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돈을 착복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정부 관리들에게 두둑한 이익을 보장하지 않고 그 계약을 따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세례 요한이 세리들에게 세리라는 직업을 그만두라는 선택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런 상황은 누가가 “군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훈련을 받은 로마 군인이 아니라, 로마에 예속된 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던 분봉왕 헤롯에게 고용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헤롯의 군인들은 사람들을 겁주고, 착취하며, 자기 잇속을 챙기기 위해 권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꾼들에게 세례 요한이 내린 지시는 불의에 깊이 뿌리내린 시스템에 정의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타락한 세상의 통치자 밑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한다는 것은 위험하고도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John Nolland, Luke 1-9:20, Word Biblical Commentary (Nashville: Thomas Nelson, 1989), 150쪽. “세리들은 뇌물수수와 부패로 특정지어지는 바로 그 구조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일해야만 했다. 정직한 세리는 오늘날 일부 국가에서 관료들과 결탁하지 않고 사업을 하려는 사람이 부딪치는 것과 똑같은 문제들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Robert H. Stein, Luke (Nashville: Broadman, 1992), 134쪽, “군인들은 아마도 로마인들이 아니고, 임무 중에 세리들을 돕는 의무가 있었던 헤롯 안디바가 고용한 유대인들일 것이다. (Josephus, Antiquities 18.5.1 [18.113] 참조) 군인들은 …… [예수님에 의해] 사직을 요구받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직무상 저지르는 죄, 곧 폭력으로 위협하는 것(직권 남용), 거짓 참소로 강도짓 하는 것, 자기 월급에 (또는 어쩌면 할당받은 그날의 양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등은 피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불시에 찾아오는 유혹들 (눅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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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왕으로서 일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 사탄은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포기하라고 예수님을 유혹했다. 예수님은 광야로 나가셨고, 거기서 40일 금식을 하셨다(눅 4:1-2). 그런 다음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부딪쳤던 것과 똑같은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사탄에게 하신 대답들은 전부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이야기인 신명기 6-8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공급하심보다 자기 능력을 신뢰하라는 유혹을 받으신다(눅 4:1-3; 신 8:3, 17-20).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눅 4:3). 둘째로, 예수님은 감언이설로 권력과 영광의 지름길을 제시하는 사탄에게 충성의 대상을 바꾸라는 유혹을 받으신다(눅 4:5-8; 신 6:13; 7:1-26). ‘네가 만일 나를 경배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과 함께하는지를 의심하고, 그래서 절망해 하나님의 도움을 억지로 이끌어 내라고 유혹을 받으셨다(눅 4:9-12; 신 6:16-25).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함으로써 이 유혹들을 이겨 내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 이전의 아담과 하와도 그랬듯이) 되었어야 했지만 결코 되지 못했던,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신명기 6-8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받은 유혹과 병행해서 여기 나오는 유혹들은 예수님만 받으신 것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그분 역시 그런 것들을 경험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이스라엘처럼, 예수님처럼 우리도 똑같이 삶의 전 영역에서 그렇듯 일에서도 그런 유혹을 받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직장에서 오로지 우리 자신의 필요만 채우기 위해 일하라는 유혹은 상당히 크다. 물론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도 일하지만(살후 3:10), 자신의 필요‘만’ 채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함이기도 하다. 예수님과 달리 기적을 통해 자급하는 선택지가 우리에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월급만을 위해 일하고, 일이 어려우면 도중에 그만두고, 다른 사람과 같이 짐을 나눠지는 걸 회피하고, 일을 잘 못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바람에 그 일이 다른 사람에게 떠넘겨지는 것을 모른 척하라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또 직장에서 지름길을 택하라는 유혹도 상당히 크다.
   

   그중에서 가장 큰 유혹은 우리가 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의문을 품는 것일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도움을 강요하도록 시험을 받으셨다. 우리가 게을러지거나, 어리석어지거나, 하나님께서 돌봐주시길 기대할 때, 우리도 똑같은 시험에 넘어진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어떤 지위나 직업으로 부름받았으나 하나님이 직접 그 일이 일어나게 해주시길 앉아서 기다리기만 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또는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포기하라는 유혹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우리 일은 하나님께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은 우리의 교회생활에만 신경 쓰신다고 생각하거나, 하루하루 일상 활동을 도와 달라는 기도는 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시는 매일의 일에 하나님께서 관여하시길 기대하셨지만, 자신을 위해 그 일을 대신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지는 않으셨다.
   

   이 전체 이야기는 40일 금식을 위해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어 가시는 성령이 시작하신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금식과 따로 한적한 곳에 가 기도하는 시간은 인생의 중대한 변화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방법 중 하나였다. 예수님은 이제 막 왕으로서의 일을 시작하실 참이었기 때문에, 그 전에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능력과 지혜를 받고 싶으셨다. 이것은 성공적이었다.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했을 때,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40일을 보내셨다. 대적하기에 충분한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금식은 그 유혹을 더욱 적나라하게 느끼게 하기도 했다. ‘그는 굶주려 있었다’(눅 4:2).
   

   유혹은 종종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재빨라서, 우리가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부터 찾아올 수 있다. 우리는 생산적인 직업의 사다리 맨 아래부터 출발하는 대신, ‘성공 급행열차’에 올라타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생전 처음으로 우리 자신의 약점에 정면으로 부딪쳐, 남을 속이거나 위협을 가하거나 사기를 쳐서 그 약점을 보완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내가 가진 기술로는 원하는 직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해, 내 본모습을 감추거나 자격을 위조해서 보여 주고 싶은 유혹에 빠질수도 있다. 시간이 좀 흐른 다음 소명에 맞는 일을 더 많이 하겠다는 허상을 핑계 삼아, ‘자리 잡을 때까지 임시로 몇 년만’ 성취감이 없지만 월급은 많은 직책을 맡을 수도 있다.
   

   ‘준비’는 유혹을 이기는 열쇠다. 유혹은 대개 경고 없이 온다. 거짓 보고서를 통과시키라는 명령을 받을 수도 있다. 내일이면 온 세상이 알게될 비밀 정보를 오늘 제공받을 수도 있다. 살짝 열려 있는 문은 당신 것이 아닌 무언가를 차지할 기회를 갑자기 제공하기도 한다. 점심시간에 동료를 험담하는 일에 끼어들라는 압박이 느닷없이 올 수도 있다. 최고의 준비는 있을 수 있는 시나리오를 ‘사전에’ 상상해, 거기 어떻게 대처할지를 놓고 미리 기도하고, 계획을 세우며, 대처 방안을 하나님께 맡기면서 글로 적어 놓는 것이다. 또 다른 보호책은 짧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서 당신이 직면한 유혹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절친한 사람들의 그룹을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행동하기 전에 그들에게 알려 준다면, 그들은 당신이 그 유혹을 견뎌 나가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부 하나님과 거룩하게 교통하셨던 예수님은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표현하는) 그분의 공동체와 함께 유혹에 대처하셨다.
   

   우리의 유혹은 예수님이 받으셨던 유혹과 폭넓은 유사점이 있긴 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떤 존재냐는 것과 우리의 환경과 하는 일의 성격에 따라 크든 작든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유혹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삶을 뒤바꿔 놓는 결과를 초래한다. 만약 예수님이 왕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외면하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데 평생을 낭비하거나, 악의 주인이 요구하는 걸 수행하거나, 성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대신해 주길 기다리며 주저앉아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상상해 보라.

질병을 고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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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 시대에도 사람을 고쳐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이 13개의 이야기를 통해 기록되었다(눅 4:31-37, 38-44; 5:12-16, 17-26; 7:1-10, 11-17, 21; 8:26-39, 40-56; 9:37-45; 13:10-17; 17:11-19; 18:35-43).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왕의 책임을 맡으실 때 그리하시겠다고 선언하신 그대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가져다주셨다. 뿐만 아니라 그 치료들은 더 이상 질병 없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었다(계 21:4).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라고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능력도 덧입혀 주셨다.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두 단락에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고치라고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눅 9:1-6; 10:9). 그러나 모든 병 고침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이를 아름답게 요약했다. “예수님의 병 고침은 자연계에서의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다. 그것들이야말로 비자연적이며 귀신 들려 있고 상처 입은 세계에서 진실로 ‘자연적인’ 것이다.” [4]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시 올바르게 되돌리고 계신다는 하나의 가시적인 신호다.


   복음서에 보고된 치유 사건은 일반적으로 기적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회복시키려는 크리스천들의 비(非)기적적인 노력 역시, 생명을 주시려는 예수님 사역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구속에 병 고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주목하지 못하는 건 실수다. 이 일은 의사, 간호사, 기술자, 보험 산정가, 병원 주차장 관리원 및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료업 종사자들에 의해 매일매일 이루어진다. 누가도 의사였다 (골 4:14). 그래서 우리는 그가 병 고치는 데 특별한 관심이 있었을 거라는 상상을 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병 고치는 직업이 천부적으로 다른 직업보다 더 뛰어나다고 추론하는 건 잘못이다.

 

Jürgen Moltmann The Way of Jesus Christ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5), 69쪽.

안식일의 주인 (눅6:1-11; 1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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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은 성경에서 말하는 일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며,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안식일에 대해 가르쳐 주신다. 일과 쉼은 서로 적대적인게 아니라, 일을 잘하고 진정한 원기 회복을 가능하게 해 주는 하나의 리듬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상적으로 보면 그 리듬이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고 공급의 필요를 채워 주지만, 타락한 세상에서는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다 (눅6:1-11)

 

 누가복음 6장 1-5절을 보자. 때는 안식일이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굶주린 상태였다. 그들은 들판에서 곡식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그 알곡을 먹었다. 어떤 바리새인이 이것은 타작에 해당하므로 안식일에 일한 게 아니냐며 투덜댄다. 그때 예수님은 답변하신다. 다윗과 그의 일행들도 배가 고팠을 때,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 제사장들만 먹는 진설병을 먹어서 거룩한 규례를 어긴 적이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에피소드의 연결점이 ‘배고픔’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배가 고픈 경우엔 설령 그것이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라도,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건 허용된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좀 다른 결론을 끌어내신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눅 6:5).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계속해서 세세한 규칙과 예외를 만드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에 토대를 두는 것임을 암시한다.

 

 

안식일에 진정으로 해야 할 일​ (눅13:10-17)

 

   예수님이 안식일에 하신 또 다른 치유 사역은 누가복음 6장 9절과 14장 5절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사건들만 가지고 안식일 신학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건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가 사람들의 요구라는 관점에 닻을 내리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비록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 십계명 중 하나긴 하지만, 인간의 필요가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보다 선행한다. 안식일에 인간의 욕구를 채워 주는 것으로 그 계명은 ‘폐지’되는 게 아니라 ‘성취’된다.

   꼬부라진 여자를 안식일에 고친 것은 특히 이를 보여 주는 귀중한 실례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눅 13:14).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으로 시작한다. 만일 사람들이 안식일에 자기 짐승을 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게 합법이라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

 

   안식일에 대한 추가 논의는 —어떤 경우에는 관점이 서로 다르기도 하지만 '마가복음과 일'에 나오는 “막1:21-45"과 "막2:23-3:6" 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갈등의 윤리학 (눅6:27-3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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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을 선대하라”​(눅6:27-36)

 

  모든 일터는 갈등을 경험하기 마련이다. 누가복음 6장 27-36절에서 예수님은 갈등 상황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7-28). 누가는 이것이 경제계를 위한 가르침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없게 만든다. 누가가 이것을 특별히 돈 빌리는 것과 연관시키기 때문이다. “[너희 원수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눅 6:35). 이것은 상업적으로 돈을 빌려줄 때 실행 가능한 전략처럼 보이진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조금 더 추상적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크리스천은 자신과 갈등을 빚는 사람들을 짓밟기 위해 권력을 사용해선 안 된다. 오히려 그 원수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이것은 직장에서 두 가지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우리가 갈등을 빚는 사람들의 선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의미다. 갈등을 무조건 피하라거나 경쟁에서 물러서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예를 들어 동료와 승진을 놓고 경쟁하는 중일 때 당신은 당신의 일을 더욱더 잘하려고 애씀과 동시에, 동료(경쟁자)가 최대로 일을 잘하게끔 도와줘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회사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경쟁자나 고객들을 짓밟지 않는 걸 의미한다. 특히 쓸데없이 소송하거나, 독점하거나, 거짓 소문을 퍼뜨리거나, 사재기 같은 불공정하고 비생산적인 행동으로 당신의 경쟁자들을 밟고 올라서지 말라는 뜻이다. 어떤 직업이든 그 나름의 상황이 있기 마련이므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한 단락의 가르침을 어디에나 다 들어 맞는 만병통치약처럼 적용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업을 할 때 의도적인 속임수를 써서 심하게 경쟁하는 것은, 농구 경기에서 의도적인 파울을 하면서 격하게 경쟁하는 것과는 다를 것 아닌가? 그러므로 크리스천이 직장에서 일할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갈등과 경쟁의 적절한 양상을 찾아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핵심은 긍휼함이다​ (눅17:3-4)

 

   나중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사람 사이의 갈등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눅 17:3). 우리는 이것을 그저 가족에게 주는 치유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형제”라고 부르셨기 때문이다(막 3:35). 갈등이 해결됐을 때는, 사람들을 대면해 좋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조직에서 해야 할 바람직한 행위다. 그러나 그다음 절은 상식의 경계선을 무너뜨린다. “만일 [같은 사람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4). 실제로 예수님은 용서하라고 명령하실 뿐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비판을 없애라고 하신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눅 6:37).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눅6:41).
 

   일에 관해서 일절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걸까? 훌륭한 조직을 세우고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건전한 판단을 해야 하지 않나? 어쩌면 예수님은 (선한 판단이 아닌) 판단주의나 정죄를 버리라고 하시는 것일지 모른다. 우리 주변의 문제가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는 위선적인 태도 말이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저지르는 도덕적 실수나 무능함을 무시하라’는 게 아니라, ‘네 행동들이 그 문제를 유발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스스로 물으라’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의 업무 수행을 평가하지 말라’라는 뜻이라기보다 ‘주변사람들이 성공하도록 네가 도울 방안이 무엇이 있는지를 헤아려 보라’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점은 긍휼함이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1).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 (눅9:10-17; 12:4-7; 12: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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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 전체에 걸쳐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산다는 건 우리 생명에 필요한 것들의 궁극적인 원천으로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우리의 노동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절대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 노동은 항상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상적 일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시다 (눅9:10-17)

 

   예수님은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전에, 행동으로 이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수많은 사람을 먹여야 하는 상황이었다(눅 9:10-17).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은 먹을거리가 없는 군중의 결핍을 채우는 책임을 떠맡으신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건 그들이 굶주렸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 기적을 어떻게 행하셨는지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그분은 일상적인 음식인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적은 음식을 많은 사람이 충분히 먹게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어부들) 중에는 수산물을 공급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다른 제자들(예를 들면, 세리 레위)은 공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예수님은 군중들을 자리에 앉히고 떡과 고기를 나눠 주게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익숙하게 해 오던 일을 하게 하셨다.
   

   인간이 음식을 공급받는 일반적인 방식을 다른 방법으로 대체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활용하셨다. 결과는 기적적인 성공이었다. 인간의 일은 유익을 주기도 하고 손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끄시는대로 우리가 한다면, 우리의 일은 선한 것이 된다. 누가복음에서 자주 발견하듯이, 하나님은 일상적인 일을 통해(여기서는 생명에 필요한 필수품을 공급하는 일을 통해) 기적적인 결과를 가져오신다.

 

우리의 염려를 간파하신 예수님​ (눅12:4-7; 12:22-31)

 

   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가르치신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눅 12:22-31). 예수님은 이것을 아주 평범한 상식으로 제시하신다. 염려가 내 생명을 한 시간도 늘려 줄수 없다면 뭣 때문에 염려하는가? 예수님은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당신의 일이 당신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 주든 채워 주지 못하든, 염려는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풍요의 경제 시대에 이것은 탁월한 조언이다. 많은 사람은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느라 염려에 쫓기고 있고, 삶의 기쁨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시간들로 세월을 보내고 있으며,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모른 체하며 살고 있다. 우리 목표는 ‘더 많은’ 돈이 아니라, 안정감을 충분히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충분한’ 돈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안정감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아니, 더 많은 돈을 끌어모아 성공하면 할수록, 우리는 이젠 잃어버릴 게 너무도 많아서 도리어 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마치 가난한 사람의 걱정거리 같은 정말로 걱정할 만한 거리가 있으면 우리 형편이 더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격이다(“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눅 6:21).

   이런 관례를 깨시기 위해 예수님은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 12:31)라고 말씀하신다. 만약 당신의 최종 목표가 하나님 나라라면, 당신이 신앙을 가질 때 그 최종목표가 이루어질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을 가짐으로써 당신은 당신이 버는 돈은 실제로 충분하다는 것과, 하나님이 당신의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십억을 벌어 부자가 되었지만 그 돈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은, 십억의 빚을 진 것과 다를 바 없다. 또 백만 원을 벌어도 근본적으로 당신이 괜찮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백만 원을 선물받은 것과 같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백만 원도 없다면 어떻게 될까? 전 세계 인구 3분의 1이 1년에 백만 원 미만의 돈으로 살아간다.[5] 이들은 오늘을 살 돈은 그럭저럭 있다 해도, 신자든 비신자든 관계없이 언제든 굶주림의 위협에 직면하거나 어느 한순간에 열악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가난과 기아라는 너무도 엄연한 현실과 하나님이 공급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조화시키기는 어렵다. 예수님도 이런 상황을 모르시는 게 아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눅 12:33)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들은 절망적일 정도로 가난하게 산다는 걸 예수님이 아시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혹시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모두 가난을 완화시키고 예방하기 위해 자신의 일과 부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절망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제공하는 그분의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안 했기에, 여기서 우리는 극빈한 사람들 편에서 그들을 대신해 얘기하는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현재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급하심을 의심하지는 않았는지 자문해 보자. 우리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이 없어서 생기는 진짜 위험의 크기가 우리의 염려와 비례하는가?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이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가? 우리 자신을 위해 염려하는 것을, 절망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필요에 견줄 수 있는가? 우리의 염려가 실상 불필요한 것들이었다면, 인생의 필수품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하시던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조언일 것이다.

Peter Greer, Phil Smith, The Poor Will be Glad (Grand Rapids: Zondervan, 2009), 29쪽.

부를 올바르게 쓰고 있는가 (눅16:1-13;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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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쥔 손을 펴라 눅 16:1-13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비결은 벌고 저축하면서도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섬기고 쓰는 데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우리 돈을 쓴다는 걸 신뢰해 주신다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돈도 공급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 비유의 요점이다.

   이 비유에서 그 청지기는 자기 주인의 재산을 탕진한 결과 해고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는다. 그는 맡은 일에서 더욱 주인을 속이는 데 마지막 남은 날들을 쓰지만, 거기엔 뜻밖에도 그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는지가 기묘하게 전개된다. 그는 자기 주인의 것을 훔치려고 애쓰지 않았다. 아마도 청지기는 자신이 그 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의 빚을 주인 몰래 자기 마음대로 감면해 주는데, 거기엔 자신의 호의에 답례로써 자신이 실업자가 되었을 때 그들이 잘 대해 주기를 바라는 희망이 담겨 있 었다.

    “옳지 않은” 이 청지기처럼, 우리는 이생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이생을 사는 동안에도 우리가 한 저축은 초인플레이션이나 시장 붕괴, 절도, 몰수, 소송,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걸 비축해 두는 것도 실제로는 안전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도리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공급해 주기 위해 우리의 부를 사용해야 하며, 우리에게 그런 필요가 생길 때 그들이 똑같이 해 주길 기대해야 한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 16:9). 주인의 채무자들을 위해 빚을 탕감해 줌으로써, 불의한 그 청지기는 친구들을 사귀었다. 서로를 속이는 것이 친구를 맺는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친구를 전혀 안 만드는 것보다는 분명히 더 낫다. 안전을 확보하려면 부를 쌓아 놓는 것보다 관계를 맺어 놓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영주할”이라는 단어는 이생을 살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 좋은 관계가 도움이 되고, 또한 그것이 인내하며 영생으로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원칙의 극단적인 한 실례가 전쟁, 테러, 재해가 사회의 경제 구조를 파괴할 때 나타난다. 난민 캠프나 교도소, 초인플레이션의 경제 상황에서는 예전에 당신이 가지고 있던 부로 빵 한 조각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 공급해 준 적이 있다면, 당신이 가장 어려울 때 그들이 돕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그 불의한 청지기가 도와줬던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이 아니라는 데 주목하자. 그들은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불의한 청지기는 그 사람들의 부에 기댄 게 아니라, 그들 사이에 맺어진 상호의존 관계에 의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랫동안 당신의 덕을 입었던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감정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그 이야기는 빚을 진 사람들에게서 갑자기 주인에게로 전환이 된다(눅 16:8). 예수님은 그 주인이 말한것에 동의하시면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관계를 위해 돈을 쓰는 사람들에게 결국에는 영원한 안전에 이르게 해 주는 보증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때, 당신은 하나님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된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넉넉함을 베푸는 것과,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께 더 중요한지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눅 16:11). 진정한 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양자 됨에 기반을 두고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며,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에서 실현된다. 좋은 관계는 좋은 열매를 맺고, 그 좋은 열매는 우리에게 좋은 관계를 쌓고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게 해 주는 더 큰 능력을 길러 준다. 조그마한 물건이나 간단한 식사일지라도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고 좋은 관계를 맺는 데 돈을 유익하게 쓰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당신을 신뢰해 주신다면, 그분은 더 큰 자원을 당신에게 맡기실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만큼 충분한 돈을 비축해 두지 못했을 경우, 그 해답은 더 많은 돈을 비축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는 걸 시사한다. 도리어 당신이 가진 그 적은 돈을 남을 위해 너그럽게 쓰거나, 환대하는 데 쓰라는 얘기다. 당신이 베푼 너그러움과 환대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이, 더 많은 돈을 쌓아서 느끼는 안정감보다 더 큰 안정감을 당신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지혜롭게 (즉 다른 사람에게 정말 유익이 되는 방법으로) 되어야 한다. 단순히 당신의 양심을 만족시키거나 당신이 목표로 삼은 사람들을 미래에 당신에게 수혜를 베풀어 줄 대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최종적인 안정감은 하나님의 후하심과 환대 안에 있다.

탕자 이야기의 다른 한 면 눅 15:11-32
   
   당신이 가진 것들을 저축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 더 가까워지는 데 쓰라는 이 말은 아마도 재정에 관한 깜짝 놀랄 충고일 것이다. 그러나 탕자 이야기(눅 15:11-32) 바로 뒤에 그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탕자 이야기에서 둘째 아들은 그의 전 재산을 다 탕진했고, 큰아들은 자기 돈을 너무도 알뜰하게 저축해 두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잔치 한 번 못 열어 줬다(눅 15:29). 둘째 아들의 허랑방탕한 생활은 파멸로 끝났다. 그러나 둘째 아들의 탕진은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의지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들이 돌아온 것에 대한 아버지의 기쁨은 자기 재산 절반을 다 탕진한 데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말끔하게 씻어 줬다. 그와 대조적으로 큰아들은 가족의 남은 재산을 꽉 움켜쥐고 있던 결과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빼앗겼다.

   불의한 청지기와 탕자의 두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은 ‘부’라는 것이 본래 나쁜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만약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만드는 것에 그 부를 쓰는 것이 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일터의 선한 사마리아인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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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신다는 주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이어진다. 이 비유에서는 한 외국인 여행자가 범죄의 피해자를 긍휼히 여김을 통해 하나님의 돌보심이 일어난다. 외국인은 낯선 사람의 의료비를 지불할 만큼 부유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복음에 딱 한 번 등장하지만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가장 유명할 것이다. 이 비유는 누가가 지상대계명을 기록한 것에 바로 이어서 등장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서는 가장 큰 계명을 논의하다가 곧장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이어진다. (지상대계명이 직장에서 미치는 함의에 대해서는 이 책 1장의 “마 22:34-40”과 2장의 “막 12:28-34” 부분을 보라.)

   누가가 기록한 맥락을 보면, 율법교사는 먼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묻는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율법에서 뭐라고 하는지 요약해 보라고 말씀하시고, 율법교사는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라는 지상대계명으로 대답한다. 예수님은 그것이 생명의 열쇠라고 답하신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이어지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님이 그에 대한 답변으로 들려주신 이야기가 바로 지금까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불린다. 이이야기는 너무나 강렬해서 기독교권을 훌쩍 넘어 널리 알려졌다. 성경을 한 번도 읽어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어려움에 처한 낯선 사람을 보살피는 사람을 뜻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특별한 긍휼의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사회적 인식에 기대어,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실제 사마리아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소개하시는 사마리아인이 성공적인 사업가로 보이는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잘 알려진 통상로를 따라가다가 강도를 만나 다치고 쓰러진 유대인을 우연히 발견했다. 사마리아인은 그 통상로를 자주 다녔던 것 같다. 인근의 여관 주인이 그를 알아보고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갚겠다는 약속을 믿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마리아인이 무슨 사업을 했는지 모르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약으로 쓸 기름과 포도주와 묵을 곳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사마리아인은 낯선 사람을 위해 돈과 시간을 기꺼이 쓴다. 알지도 못하는 부상자의 필요를 해결해 주기 위해 다른 업무를 잠시 미룬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자신의 물질적 성공을 다른 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비유 속의 주인공은 그래야 할 직접적인 의무가 전혀 없지만 낯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돈을 쓴다. 그들은 혈연이나 종교로 이어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다. 예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것은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을 우리의 ‘이웃’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원래 질문의 요지를 뒤집어 이 점을 강조하신다. 율법교사는 이렇게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자신을 출발점으로 삼아 자신이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 묻는 질문이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뒤집어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라고 물으신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중심에 두고 누가 그를 도와야 하는지 물으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먼저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도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달리 생각할까?

   이것은 절대 우리가 무한히 남을 도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필요를 다 채우도록 부름받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우리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사마리아인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로마제국의 모든 다친 여행자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길에서 마주쳤을 때, 그는 행동에 나섰다. 설교자 해돈 로빈슨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도울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바로 당신의 이웃이다.”

   사마리아인은 동전 몇 푼 던져 주고 지나가는 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다친 사람의 모든 필요를 다 채워 준다. 당장 필요한 치료를 해 주고 회복할 공간을 제공한다. 사마리아인은 자신이 그런 상태였다면 스스로에게 적용할 만한 방식으로 그 사람을 보살핀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레위기 19장 18절을 성취한다. 사마리아인은 그 낯선 사람을 돕기 위해 상당한 위험을 무릅쓴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려고 몸을 굽히는 순간에 잠복해 있던 노상강도들이 그를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관 주인이 그를 속일 위험도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사람을 돌보는 것은 비용뿐 아니라 정서적 부담 면에서도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마치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처럼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한다. 이것은 ‘네 이웃을 제 자신처럼 사랑하는’ 이웃을 보여 주는 최고의 사례일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청중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을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주인공이 사마리아인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의 민족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이 민족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은 길 반대편으로 피해서 지나가는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보다 더 모세의 율법에 합당하게 행한다. 사마리아인의 존재는 유대인들이 두려워해야 할 위험이 아니라 반겨야 할 구원의 은총이다.

   우리는 일터에서 직장 동료, 고객, 타민족과 타문화권 사람의 이웃이 될 기회를 많이 얻는다. 직장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다는 것은 타인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의식한다는 뜻이다. 당신의 직장에 어떤 식으로건 강도 만난 사람이 있는가? 종종 소수민족에 속한 사람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승진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있다. 양심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가 이 사람을 공정하게 대우합니까?”라고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적대감이 커졌던 것처럼, 고용자와 노동자들은 자주 자신들을 별개의 두 종족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상황을 그렇게 보지 않은 회사가 있다. 슈퍼마켓 체인인 마켓바스켓(Market Basket)의 대표이사 아서 디물러스(Arthur T.DeMoulas)는 직원을 특별히 잘 대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직원들에게 최저임금보다 훨씬 높은 임금을 지불했고 경기가 침체되어 회사가 손해를 볼 때도 수익공유계획을 폐기하지 않았다. 그는 직원들과 직접 인간관계를 맺었고 직원의 이름을 최대한 많이 익혔다. 2만 5천 명의 직원을 둔 회사에서 이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2014년 마켓바스켓의 이사회가 직원을 지나치게 후히 대우한 것을 문제 삼아 디물러스를 해고했다. 그러자 슈퍼마켓 체인점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직원들은 아서 디물러스가 회사의 경영권을 되찾을 때까지 상품 진열을 거부했다. 이것은 대기업 노동자들이 아래부터 풀뿌리 조직화를 이루어 자신들의 대표이사를 선택한 첫 번째 사례일 것이고, 여기에는 아서 디물러스의 자기희생적 관대함이 큰 역할을 했다.

   아서 디물러스의 경우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것이 회사에서 성공하는 것에도 도움이 됐다. 어쩌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훌륭한 영적 조언일 뿐 아니라 훌륭한 사업적 조언일지도 모르겠다.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부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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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두 단락은 공급하심이라는 주제에서 부(wealth)라는 주제로 옮겨 간다. 예수님은 부에 대해 전혀 반대하지는 않으셨지만, 부를 의혹의 눈으로 보셨다. 시장 경제는 산출, 교환, 개인이 소유한 부의 축적에 기초한다. 이런 실상이 수많은 사회 속에 너무도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개인적인 부의 교환과 축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봤던 대로, 예수님은 부의 축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을 옳게 보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듯이 한 개인의 일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명이어야 하며, 일과 관련된 힘이나 권세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얻는 데만 쓰려고 하지 말아야 하듯 부 역시 이웃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만 한다. 누가복음의 후속편인 사도행전에서 일과 연관된 자료가 훨씬 더 많이 다루어지긴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도 부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지배적인 가설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한다.

 

 

 

부자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 (눅6:25; 12:13-21; 18: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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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
 
   부에 대해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첫 번째 문제점은, 재물이 풍족한 삶에는 그 부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예수님은, 우리 삶이 우리가 소유한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깨닫기 원하신다. 누가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됨으로써 우리와 우리 일이 근본적으로 변혁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부의 소유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어떤 변화에도 완강히 저항하도록 만드는 듯하다. 그것은 우리에게 현상 유지의 수단을 제공해 주고, 독립적이 되게 하며, 우리 방식으로 일을 해 나가게 만든다. 진정한 삶, 영원한 삶이란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은 삶이며, 하나님을 대체하는 부는 결국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가난한 사람은 맞닥뜨리지 않아도 될 일이나) 부자는 자신이 가진 많은 소유물 때문에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떠날 수 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눅 6:20). 이것은 미래의 보상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실체를 진술한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목을 가로막는 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눅 6:25). 여기서 “주리리로다”라는 말이 ‘하나님을 당신의 관심 궤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영생을 상실하는 것’을 어림잡아 말한 것처럼 보이는가? 맞다! 분명히 거기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비참한 부자에게도 희망은 있다.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삶 눅 12:13-2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3-21)는 이 주제를 극적으로 부각시킨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곳간에 다 들어가지 않을 만큼 많았다. 그 농부는 걱정을 하다가 자기 곳간들을 허물고 더 크게 짓기로 작정한다. 그는 부가 많으면 많을수록 돈에 대한 걱정거리가 줄어든다고 믿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소출을 쌓아 둘 곳간이 모자라 걱정할 만큼 많았던 그의 재산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미처 알기도 전에, 더욱 엄연한 운명인 죽음을 맞는다.

   하나님이 하신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라는 물음은 양날을 가진 검이다. 검의 한 날은 ‘네 것이 아니다’라는 대답이다. 그가 오랫동안 만족을 누릴 거라 믿었던 그 부가 순식간에 다른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날은 더 큰 상처를 입히는데, 그것은 ‘너의 것’이라는 대답이다. 어리석은 부자는 정말로 자기가 자기를 위해 준비한 것, 곧 죽음 이후에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삶, 진짜 죽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필요성을 가로막았는데,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넘쳐나는 그의 수확을 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

   하나님과의 우정이 여기서는 경제적인 용어로 나타난다. 부유한 하나님의 친구들은 가난한 하나님의 친구들을 위해 공급해 준다. 어리석은 부자의 문제는 그가 자신을 위해 부를 쌓아 놓기만 했지, 다른 사람을 위해 일자리나 번영을 창출하지 않은 데 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대신 부를 사랑했으며, 가난한 사람에게 너그럽지 않았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면서 부는 가볍게 생각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후하게 베풀어 주는 부자, 아니 나아가 진실한 상품과 봉사를 창출하는 데 돈을 투자하고, 일자리를 점점 더 많이 만들어 내며, 직장에서 사람들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우해 주는 부자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성경에서와(아리마대 요셉 같은 사람 - 눅 23:50), 우리가 사는 세상 가운데서 그런 인물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이생과 내세에서도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비유에서 우릴 찌르는 부분도 제거해선 안 된다. 즉, 은혜로 우리가 받은 것들이 (경제적으로든 다른 것으로든) 늘수록 탐욕 역시 늘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최종 결산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걸 잊지 말라.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드시는 분 눅 18:18-30

   부자 관리와 예수님의 만남은(눅 18:18-30) 부를 움켜쥐는 것에서 벗어나 구속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 사람은 부에 대한 끝없는 욕심에 마음을 다 뺏기지 않고 하나님을 갈망했다. 그는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으로 말문을 연다. 대답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십계명을 요약하신다. 그러자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는 게 그 관리의 대답이었고(눅 18:21) 예수님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가 그에게 끼치는 타락한 영향력도 꿰뚫어 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의 치명적인 영향력을 끝낼 방안을 그에게 말씀해 주신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눅 18:22).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은 누구나 매일매일 하나님의 아들과 개인적인 친밀함을 갖자는 그 초청에 틀림없이 기뻐 뛸 것이다. 그러나 그 부자 관리의 마음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부에 대한 애착이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을 앞질러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눅 18:23). 예수님께선 그런 증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24-25).

   이와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때때로 놀라운 관대함을 보여 준다. 가난한 과부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소유 전부를 바쳤다(눅 21:1-4). 위에 나오는 18장 24-25절 말씀은 부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즉결심판이 아니라, 부가 얼마나 강한 집착을 부르는 매혹적인 힘인지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 곁에 서 있던 사람들과 그 관리 모두 이 문제를 인식했고, 비록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걸 다 버렸음에도(눅18:28), 그렇다면 과연 구원받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고 제자들은 절망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망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눅 18:27). 하나님이, 부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도록 갈망하게 하시는 힘의 원천이시기 때문이다.

   부가 끼치는 가장 나쁜 영향력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더 나은 미래를 갈망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는 점이리라. 당신이 부자라면, 지금 생활에 만족한다. 그런 현재 생활에 변화가 생기는 건 기회보다 위협이 된다. 부자 관리의 경우 이것은 그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멋진 것이라는 데 눈을 감게 해 버렸다. 예수님은 부자 관리에게 새로운 신분과 안정감에 대한 인식을 제안하셨다. 만약 그가 자기 재산을 버리고 얻을 삶이 얼마나 더 풍요로운 것인지를 상상할 수만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제자들이 자신들은 모든 걸 버렸다고 말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속함으로써 주어지는 넘치는 부유함을 그들에게 약속해 주실 때, 급소를 찌르는 말이 등장한다. 예수님은 이생에서 그들이 자원과 관계를 ‘더욱더 많이’ 받고 내세에서 영생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눅 18:29-30). 그 부자 관리가 비극적으로 놓치고 만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릴 것만 봤지, 얻을 것은 못 봤던 것이다.

   부자 관원 이야기는 www.theologyofwork.org의 '마가복음과 일'에 나오는 “막10:17-31”부분을 보라. 

가난한 자에 대한 부자의 책무 (눅6:17-26;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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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와 관련해서 부자들이 진정으로 잘사는 것이 예수님의 유일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안녕에도 관심을 두셨다. “너희 소유를 팔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을 팔아 구제하라[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만약 부를 쌓아 두는 것이 부자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면, 가난한 자에게는 얼마나 더 해를 끼치겠는가?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같은 관심은 마리아 찬가(눅 1:46-56), 평지 설교(눅 6:17-26), 실제로는 누가복음 전체에 걸쳐나타나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눅 16:19-31) 이에 대한 요점을 제시하셨다. 부자는 우아한 옷을 입고 호화스럽게 살면서도, 배고픔과 질병으로 죽어 가는 나사로를 돕기위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나사로가 죽고 그 부자도 죽는데, 이것은 부가 큰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천사들이 나사로를 하늘로 옮겨 갔다. 분명히 나사로의 가난 외에는 어떤 다른 이유가 없으나(눅 16:22), 어쩌면 부로 대체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수 있다. 부자는 하데스(우리 성경의 “음부” 또는 영어 번역에선 “지옥”)에 갔는데, 그가 부요했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눅 16:23). 이것 역시 부에 대한 그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여지를 전혀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강력하다. 그 부자가 해야 할 책임은 그가 할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눅 16:25) 나사로의 필요를 채워 줬어야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자신의 비참한 종말을 피할 여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많은 부자처럼 그는 다가올 심판을 자기 가족들에게 경고해서 그들을 돌보고자 했으나, 율법과 선지서에 나타난 바대로 하나님의 ‘큰’ 가족에 대한 돌봄이 안타깝게도 빠졌기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서 다시 돌아가는게 그 상황의 치유책이 될 수 없었다.

다시 갚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에게 베풀라 (눅10:38-42; 14:12-14;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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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 무기가 너그러움이라는 걸 제시한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너그러울 수 있다면, 당신을 움켜쥔 부의 손아귀도 느슨해진다. 우리는 이미 너그러움이 가난한 과부의 심령 속에 얼마나 깊이 역사했는지를 봤다. 부자가 너그럽기는 훨씬 더 어렵지만, 예수님은 그들도 어떻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너그러움에 이르는 정말 중요한 한 가지 길은 너무 가난해서 당신에게 다시 갚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눅 14:12-14).

   다른 사람의 호의로 대갚음되는 너그러움은 결국 너그러움이 아니라 남에게 호의를 사는 것이다. 진짜 너그러움은 다시 갚는 것이 불가능할때 베푸는 것이며, 이것은 영원의 세계에서 보상받는다. 물론 하늘에서의 상은 진짜 너그러움이라기보다 일종의 만족을 지연시킨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즉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이유는 지상에서의 삶보다 부활 때 당신이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지혜로운 방식으로 호의를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호의를 사는 건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말씀도 너그러움은 영원한 호의를 얻는다는 해석을 배제하진 않지만, 거기엔 더 깊고 납득이 가는 해석이 있다. 진정한 너그러움은 하나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당신이 돈을 줘 버릴 때 돈은 당신을 움켜쥐고 있던 그 손아귀를 풀어 주는데, 그것은 당신이 그 돈을 영원히 당신 손에 닿지 않는 데 놓을 때만 가능하다. 이것은 물질적이며 영적 실제이듯이, 정신적 실제이기도 하다. 너그러움은 하나님을 다시 당신의 하나님으로 모실 마음의 여유를 주며, 이것은 부활 때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생에 이르게 해 준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섬기는가 (눅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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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눅 10:38-42) 역시 너그러움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맥락에서 바라본다. 그 이야기에서 마르다는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하는 반면, 마리아는 자리에 앉아 예수님 말씀을 듣는다. 마르다는 여동생이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것을 두고 예수님께 좀 꾸짖어 달라고 요청하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마리아를 칭찬하신다. 애석하게도 이 이야기 때문에 마르다는 흔히 삶의 바쁨과 산만함으로 잘못을 저지른 전형적인 모델이 되었다. 또 중세 교회는 ‘적극적인 마르다’ 또는 ‘일하는 마르다’ 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명상이나 수도원 생활의 완벽함에 미치지 못하는 열등한 삶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환대(고대 근동에서 너그러움의 가장 활력적인 한 형태)가 하나님 나라를 침노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로 나타나는 누가복음 전체를 배경으로 해서 읽어야 한다.[6]

   마리아와 마르다는 원수지간이 아니라 자매간이다. 집안일을 두고 말다툼하는 두 자매를 상반되는 삶의 두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마르다의 너그러운 섬김은 예수님에 의해 축소되지 않는다. 다만 마르다가 하는 염려는, 그녀의 봉사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에 기초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자매는 함께, ‘너그러움’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한데 뒤엉킨 실체라는 진리를 구현한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누가복음 14장 12-14절에서 칭찬하신 종류의 너그러움을 보였다. 또한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던 마리아는 우리의 모든 섬김이 그분과의 생생한 관계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건, 마르다와 마리아같이 되는 것이다.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둘은 마치 이 자매가 서로의 관계를 보강해 줬듯이, 서로서로를 보강해 준다.

Brendan Byrne, The Hospitality of God: A Reading of Luke’s Gospel (Collegeville: Liturgical Press, 2000)을 보라.

우리가 누군가를 환대할 때 (눅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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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엠마오로 가는 도상에서의 이야기는 너그러움에 대해 말하기에 딱맞는 예다. 처음에는 그 이야기가 마치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 가볍게 다루는 것처럼 보이거나, 또는 최근 있었던 일에 대해 두 제자가 예수님께 마치 훈계하는 듯한 모습에서 약간 유머러스한 게 잘못된 일인 것같이 보인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라고 그들은 물었다(눅 24:18). 어떤 사람은 글로바가 이렇게 덧붙이는 모습까지 상상할지 모른다. “당신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요?” 예수님은 가벼우면서도 힘 있게 걸으며 그 말을 받아 주시고, 그들이 말하도록 그냥 두셨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면서 이제는 그들이 듣게 하신다. 차츰 빛이 그들을 밝혀 주면서, 어쩌면 메시아가 기적적으로 부활했다는 그 여인들의 이야기가 미친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만약 이것이 그 이야기의 전부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기록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미련하고 …… 마음에 더디 믿는”(눅 24:25)다는 것 이상은 배울 게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딱 한 가지만 올바르게 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 시시해서 자칫하면 놓치기 쉽다. 그들이 예수님께 환대를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눅 24:29).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 가운데 임재해 있다는 사실을 밝히심으로 이 작은 너그러운 행위를 축복해 주신다. 떡을 뗄 때 마침내 그들은 그분을 알아본다(눅 24:31). 우리가 남을 환대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원기 회복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는 수단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하는 초청의 수단으로도 사용하신다.

 

예수님 일에 투자하기  (눅8:3;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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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는 돈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친다. 누가는 자기 돈을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투자한 사람들의 개별 명단을 예시하는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외에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재정 지원을 해 주었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의 이름이 나란히 나온다. 고대 세계에서 부를 소유한 여자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명단에 그 여인들이 들어 있다는 건 깜짝 놀랄 일이다. 이 밖에도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겼다’(눅 8:3). 나중에 예수님이 전도자들을 내보내실 때,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섬기는 사람들의 너그러움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신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눅 10:7).

   다소 즉석에서 한 것 같은 이 두 마디 해설이, 누가가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교회에 베풂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을 향해 보여 주신 지속적인 관심에 비교해 볼 때, 누가는 교회에 헌금이나 헌물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많은 말을 하지 않고있다. 예를 들면, 그 어디에서도 구약의 십일조가 교회에 속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교회에 너그럽게 베푸는 것에는 반대하시고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너그러움을 설정하셨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강조의 문제다. 우리는 돈을 주는 것이 너그러움의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술이나 열정, 관계, 기도 등을 창조적으로 활용해서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동참한다.

 

크리스천의 권력과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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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 왕국의 지도자시다. 그분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여러 방법으로 권력을 행사하신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이따금 마치 리더십과 권력이라는 두 가지가 천부적으로 악한 것이라도 되는 양 행사하기를 주저한다. 예수님은 다르게 가르치신다. 크리스천은 이끌고 힘을 행사하라고 부름을 받았으나, 타락한 세상의 권력과는 달리 그것을 사리사욕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

공의의 희망을 품고 일하는 리더십 (눅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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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기 있는 과부의 비유(눅 18:1-8)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어떤 사람(과부)이 ‘부패했으나 힘을 가진’ 사람(재판관)에게 가서, 자기에게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조른다. 그 비유는 권력과 리더십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공의롭게 행해야 하며, 특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서 일해야 한다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비유의 초점을 다른 데 두신다. 즉,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눅 18:1). 그분은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과 우리를 그 여인과 동일시하고,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부패한 그 재판관과 동일시하시는데, 이건 참 이상한 조합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점은 하나님이 부패하셨다는 걸 전제하신 게 아니다. 끈기가, 부패하고 능력이 부족한 인간도 청을 들어 주게 한다면,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들어 주시겠느냐 하는 얘기다.

   그 비유의 목적은 온갖 역경 가운데서도 크리스천이 신앙을 지켜 내도록 끈기를 가지라고 격려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리더십의 지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두 가지 점도 가지고 있다.

   첫째, 부패한 재판관과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나란히 병치시킨 것은, 지금 현재 타락한 이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이 역사한다는 걸 암시한다. 재판관이 할 일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재판관은 과부가 그에게 더 찾아오지 않을 때도 하나님에 의해 정의를 행하게 될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공직에 몸담은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든 못하든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섬기고 있다고 가르친다(요 19:11; 롬 13:1; 벧전 2:13). 따라서 조직적인 불의의 한복판에서도 공의가 시행될 희망은 있다.

   크리스천 리더가 할 일은 항상 그 희망을 향해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세상 속에서 우리는 모든 잘못을 다 바로잡을 순 없다. 그러나 절대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우리 일의 현장인 불완전한 시스템 안에서 ‘더 큰 선’ [7]을 위한 일을 중단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면, 국회의원은 좋은 법안 대 나쁜 법안을 놓고 투표할 기회는 거의 없다. 대개 ‘나쁜 일보다 그나마 나은 일’을 하게 하는 법안에 찬성투표를 던지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국회의원은 해를 덜 끼치고 선을 더 이루는 법을 통과시킬 기회를 쉬지 않고 모색해야만 한다.

   두 번째 요점은, 오직 하나님만이 부패한 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오실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며 우리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병든 세상에 기적적인 치유를 가져오실 수 있듯이, 부패한 세상에 기적적인 정의를 가져오실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인종차별 정책을 펴던 정권이 붕괴되었으며, 평화가 도래했다. 끈기 있는 과부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으신다. 과부의 끈기만이 그 재판관이 의롭게 행동하도록 이끌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사건의 행위자’임을 나타내신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더 큰 선”(greater good)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우리 행동의 결과들이 기독교 윤리에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결과주의”라 불리는 이런 윤리적 사고방식은 윤리 규정이라는 면에서만 성경을 생각해 온 사람들에겐 낯선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수세기에 걸쳐 밝혀진 규범, 결과, 미덕이라는 세 가지 윤리적 추론 모두를 다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이것들이 성경을, 성경적 사고에 정말로 안 맞는 두 가지 윤리 체계인 “상대주의적” 또는 “공리주의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 주제는 TOW 웹사이트(www.theologyofwork.org)의 핵심 주제 코너 “윤리” 부분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는 삶 (눅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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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므나 비유는 큰 금융을 다루는 직장을 배경으로 한다. 한 부유하고 곧 권좌에 오를 귀인이 왕으로 취임하기 위해 멀리 여행을 간다. 그의 백성들 대부분은 그를 증오한다. 백성들은 이 대관식을 반대한다고 사전에 전달한다(눅 19:14). 그는 종 세 명에게 자신이 없는 동안 돈을 투자할 책임을 맡긴다. 그들 중 두 명은 위험을 무릅쓰고 주인의 돈을 투자해 상당한 이윤을 남긴다. 세 번째 종은 위험을 무릅쓰는 게 두려워 그 돈을 안전한 곳에 넣어 둔다. 당연히 아무 이익도 내지 못한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는 전 영토의 왕이 된다. 왕은 그를 위해 돈을 투자한 두 종에게 그들의 지위를 승진시켜 줌으로써 상을 내린다. 반면 돈을 안전하게 보관했지만 이윤을 내지 못한 종은 처벌한다. 그런 다음 왕은 자신을 대적했던 모든 사람을 자기 앞에서 죽인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실 분이시지만(“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 눅 19:38) 이내 자기 백성에게 배척당할 장소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이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님을 비유 속의 귀인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소리치는 군중을 귀인의 왕위 등극을 반대한 사람들과 동일시하기도 한다(눅23:21). 이것을 통해 우리는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한 두 종을 제외한 백성은 곧 자신들의 왕이 될 분을 잘못 판단했음을 깨닫는다. 이 단락에서 이 비유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왕이신지 아닌지 결단해야 하며, 그분을 섬기든지 대적하든지 우리가 내린 결정에 책임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8]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목적과 목표를 향해 일할 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한다. 이 비유에서 왕은 자신이 종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이야기하고, 또 자신의 돈을 투자하라는 말도 직접한다. 이 특별한 부르심과 명령은 말씀 전파, 병 고침, 전도(사도들의 부르심)가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길 원하시는 유일한 일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모든 사람이 다 투자가가 되라고 부름받는 건 아니다. 이 비유에서 그 나라 주민 가운데 딱 세 사람만 투자가로 부름받았다. 요컨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다면, 어떤 분야에서 당신이 일하든 간에 그분의 목적을 향해 일할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이 비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기로 선택한다면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예상해야 한다는 걸 시사한다. 주인의 돈을 투자했던 종들은 주인의 권위를 배척했던 주변 사람들에게 공격당할 위험을 무릅써야만 했다. 그리고 투자했다가 혹시라도 돈을 잃을 경우 주인을 실망시킬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는 성공하더라도 위험에 노출됐다. 이제 성공을 맛봤고 승진까지 했으니 그들은 탐욕에 빠지거나 권력광이 될 위험도 무릅써야 했다. 그들은 더 많은 돈이 걸릴 다음 번 투자에서 실패해 더 무서운 결과에 직면할 위험도 무릅써야 했다. 영미권의 사업(또는 스포츠) 관행에서 회사 사장들(혹은 감독들)은 평범한 결과를 내면 주기적으로 해고되지만, 반면 직책이 낮은 사람들은 너무 형편없이 일을 처리했을 때만 해고된다. 실패도 성공도, 이 비유에서나 오늘날의 직장에서는 안전하지 않다.

   우리는 상황이 더 나아지길 기다리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잠수를 타고 시스템을 수용하기 위해 안전한 방법을 찾아보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잠수를 타는 건 예수님께서 이 비유에서 정죄하는 바로 그 행동이다. 위험을 피하려고 시도했던 그 종만 충성하지 않은 사람으로 밝혀졌다. 돈을 투자했던 그 두 종이, 만약 그 돈을 날렸다면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가 암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기 위한 모든 투자는 그들이 의도했던 보상을 얻었건 못 얻었건 상관없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다.

   www.theologyofwork.org의 '마태복음과 일'  "마25:14-30" 부분에 아주 유사한 달란트 비유가 있다. 

 

Darrell L. Block, Luke 9:51-24:53,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Baker Books, 1996), 1525-1545쪽.

겸손한 리더십, 섬기는 리더십 (눅14:7-11, 22: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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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적인 세 단락에서 보겠지만, 리더는 다른 사람을 겸손히 섬겨야 한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첫 번째 단락(눅 9:46-50)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를 놓고 논쟁을 시작한다. 예수님은 자기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환영해 주는 사람이 가장 큰 자가 될 거라고 대답하신다. ‘너희 중에 제일 작은 자가 제일 큰 자다.’ 그 모델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린아이를 환영해 주는 사람이다. 이 점에 주목하라. 모든 사람이 시간을 내서 섬겨 줄 가치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리더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다.

   두 번째 단락은(눅 14:7-11) 그가 잔치 자리에서 목격한 사교할 때의 자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다. 예수님이 지적하시듯,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실제로 반생산적이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것을 리더십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당신이 모든 공을 독차지하면 사람들은 당신을 따르는 걸 그만두거나, 아니면 당신을 나쁜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고 애쓰느라고, 그들이 할 일조차 게을리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공로를 돌리면, 사람들은 당신을 따르고 싶어 하고 당신은 진짜 남들이 알아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세 번째 단락(눅 22:24-30)은 제자들 중에 누가 제일 크냐는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이번에 예수님은 그분 자신을 섬기는 리더십의 모범으로 삼으신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이 세 단락 전부에서 섬김과 겸손의 개념은 서로 같이 묶여 있다. 효과적인 리더십은 섬김을 요구하거나, 섬김 그 자체다. 섬김은 당신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 자신보다 덜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납세 문제 (눅19:1-10; 20: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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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누가는 예수님을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다주시는 분이라고 밝혀 왔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왕으로 알아본다. 예수님이 새끼 나귀를 타고 성으로 들어서자 군중은 길가에 늘어서서 그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 하나님 나라는 모든 생명을 다 아우르는 곳이며, 예루살렘 입성 직전과 직후에 예수님은 세금과 투자를 언급해 논의의 주제로 선택하신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업무 관행 끊기 (눅19:1-10)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길에 여리고를 지나시다가 예수님은 삭개오라는 세리에게 다가가신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더 잘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눅 19:5). 예수님과의 그 만남은 삭개오가 일하는 방식을 밑바닥부터 완전히 바꿔 놓았다. 로마 속국의 다른 모든 세리처럼 삭개오도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둘 때 그들이 내야 할 금액보다 과하게 세금을 매겨 차액을 챙기고 있었다. 비록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사업상의 관행’이라고 부를지는 몰라도, 그것은 분명 사기와 협박, 부패에 의존했다. 일단 삭개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자, 그는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일할 수가 없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는 정확히 어떻게 앞으로 생계를 꾸려 갈지는 말하지 않는데, 그건 요점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삭개오는 하나님의 방식에 어긋나는 사업 관행을 그대로 따를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눅20:20-26)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열렬히 환영받으신 후에 하나님 나라와 일의 세계를 분리하는 데 종종 잘못 사용되어 온 누가복음의 단락이 나온다. 바로 예수님이 세금에 대해 말씀하신 오늘 본문이다.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시도했다’(눅 20:20). 그들은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를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전 하나를 보여 달라고 하신다. 그들이 즉시 한 데나리온을 가져왔다. 예수님은 그 동전에 누구의 초상이 그려져 있느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가이사의 얼굴”이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말씀하신다(눅20:25).

   이 대답은 때로는 물질과 영혼을 나누고, 종교와 정치를 나누며, 이땅의 영역과 하늘의 영역을 나누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교회 안(하나님의 영역)에서 우리는 정직하고 너그러워야 하며, 우리 형제와 자매들의 유익도 돌아봐야 한다. 직장(가이사의 영역)에서 우리는 진리에 그늘을 드리우고, 돈 걱정에 쫓기며, 누구보다 우리 자신을 가장 앞세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대답에 담긴 날카로운 아이러니를 오해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신 말씀은,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분리를 승인하시는 게 아니다. 가이사의 세계와 하나님의 세계가 서로 겹치지 않는다는 전제는, 예수님이 누가복음에서 지금까지 말씀해 오신 내용에 비추어 전혀 말이 안 된다.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가? 모든 것이다! 예수님이 왕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장을 하신 것이다. 가이사에게 속한 것이 무엇이든, 그 또한 하나님께도 속해 있다. 세금, 정부, 생산, 분배, 기타 모든 일의 세계가 바로 하나님 나라가 뚫고 들어오는 세계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의 삶을 그만두라고 부름받은 게 아니라, 세상에 관여하라고 부름받았다. 이 단락은 일의 세계와 크리스천의 세계를 나누는 것의 정당성에 대해 정반대로 말한다. 가이사의 것(세금)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세금을 포함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상세한 논의를 원한다면 www.theologyofwork.org에서 마태와 일  섹션 중 “마17:24-27과 22:15-22 ”을 보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만 소망이 있다 (눅22:47-2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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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일은 그분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마지막 숨을 쉬시며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고(눅 23:46), 자원하여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희생시킨 데서 절정에 이른다.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성부의 전능한 부활의 행위로 예수님은 그분의 출생 때 예고되었던 영원한 왕의 지위로 온전히 나아가셨다.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2-33).

   이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받던 아들이시다. 죄와 사망이라는 가난에 빠진, 인간의 힘으로는 받을 수 없는 구속이 절실한 우리 모두를 대신해 일하심으로써 죽기까지 충성하신 분이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을 예수님이 돌보신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며,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하나의 사인으로 본다. 우리의 죄와 세상의 깨어짐 앞에 서면 우리는 모두 무력하고 비천하다. 그러나 그분의 부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사랑에 사로잡힘으로써 우리 삶의 전 영역에서 자신이 변화되는 걸 보게 된다.

누가복음의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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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다. 세상의 진짜 왕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하는 통치자인 동시에, 우리 삶에 주어진 모든 권세를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지 본을 보여 주신 모델이다.

   우리의 통치자로서 그분은 우리에게 두 부분으로 된 지상대계명을 주신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7-28). 어떤 의미에서 이 계명은 전혀 새로운 건 아니다. 모세 율법을 그냥 요약한 것이다. 새로운 것은 이 율법에 토대를 둔 그 나라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신하심으로써 출범되었다는 점이다.

   처음부터 인류가 이 나라에서 살도록 하는 게 하나님 의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줄곧, 그렇게 하지 않고 어둠과 악의 나라에서 살아왔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되찾아서 아직 어둠의 나라가 상당히 그 힘을 발휘하긴 하지만, 그분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창조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 나라의 시민권을 얻은 사람들이 꼭 해야 할 응답은 그분의 나라의 방식에 따라 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의 모델로서 예수님은 이 목적과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은 치유, 선포, 정의, 권력, 리더십, 생산성과 공급, 투자, 정부, 너그러움, 환대 같은 과업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은 우리 각자의 구체적인 소명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려고 하나님의 영을 보내 주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분은 우리더러 다른 사람을 위해 공급해 주라고 명령하시는데, 그로써 일반적으로 우리 대신 다른 사람이 일하는 형태를 통해 우리를 향한 그분의 공급하심이 이루어질 것을 암시하신다.

   예수님은 부를 통해 자급자족을 추구하려는 함정에 빠지지 말것을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그런 함정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의 부를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더 넓혀 가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 관계 안에서 갈등이 유발될 때, 예수님은 그런 갈등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서 정의와 화해에 이르게 해야하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의 종으로 일하는 걸 의미한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자기희생은 섬기는 리더십의 궁극적인 모델이다. 하나님 나라의 보좌에 오르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이웃에 대한 적극적인 사랑이 영생을 사는 한길이라는걸 확실히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