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서신 & 일의 신학

아티클 / 성경 주석

일반서신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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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이렇게 일곱 개 서신서는 개별 교회가 아닌 전체 교회를 향해 말한다. 때문에 ‘일반서신서’(General Epistles)로 칭한다. 이 서신서들은 또한 실질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조직 내 지도력, 근면함, 공평함, 좋은 관계, 그리고 효과적인 소통 등에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서신서는 당시 로마제국에서 크리스천들이 당면한 과제, 즉 어떻게 험한 세상에서 올바르게 예수를 믿고 따를 것인지를 반영한다. 초기 교회는 노예 생활, 차별, 부자와 권력자들의 학대 같은 문제를 겪었다. 이 서신서들은 거친 말과 대인 갈등도 다룬다. 인간적인 욕망과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마음 사이에 일어나는 긴장, 하나님께 순종할 때 발생하는 세상 권력과의 마찰에 대한 두려움도 다루었다.

 

  대체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삶과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의 삶과 노동에 단절감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현대 크리스천들도 일터에서 비슷한 갈등을 겪는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그 어떤 삶의 영역보다 자기 일터에서 더욱 주님을 섬길 기회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오늘날 사회는 기업, 정부, 교육 사업, 비영리 사업, 재택근무를 통해서 큰 결과를 달성해 간다. 그렇더라도 대부분의 직장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목적, 예를 들자면 공익을 위한 섬김, 타인의 유익을 위한 봉사, 헌신적인 인간관계, 정의 확산, 인격 개발 등의 일에 부합되지 못한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주님을 따르는 일과 일반 직장에서 추구하는 이윤의 극대화 같은 서로 다른 역할 때문에 큰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로마제국의 많은 분야들이 신자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지는 않았듯이, 비록 의도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직장이야 별로 없지만, 직장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여전히 도전이 될 수 있다. 일반서신서는 당시 세상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신자들을 위해 쓰였기 때문에, 현대 크리스천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서신서는 이와 같은 실질적인 관심사들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이 서신서들은 크게 다음 두 가지 원칙 위에서 다양한 사안들을 취급한다.

  1. 우리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2. 우리는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

 

   일반서신서는 이 두 가지 원칙에서 21세기 일터에도 적용 가능한 놀랍게도 실질적인 활용 지침을 도출해 낸다. 어쩌면 그리 놀랄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실 곳으로 로마제국을 선택하셨듯이, 현대 일터를 그분의 임재 장소로 선택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야고보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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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는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을 돕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행동(실천) 중심의 관점’을 보여 준다. 진정한 믿음이 있고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믿음은 궁핍한 자들을 돕는 다양한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다. 바로 이 관점 덕분에 야고보서가 탁월한 실용적 지침으로 돋보인다.

 

당신의 믿음은 진짜인가(약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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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하루하루의 삶과 영적 성장 사이의 깊은 관계를 강조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일상생활에서 겪는 고난과 역경들을 우리의 신앙 성장에 특별히 활용하신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일터에서의 문제와같은 “여러 가지 시험”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지만, 야고보는 특별히 앞서 말한 극심한 고난과 역경들이 “믿음의 시련”으로 이어진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우리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시련으로 이어지는도전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그중 하나는 종교에 대한 반감이다. 각자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일터에서 편견, 구직 제한, 해고, 신체적 상해, 죽음에까지 노출될 수 있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하지 않더라도, 신자로서의 정체성이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에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또 다른 종류의 시련은 윤리적인 것이다. 우리는 도둑질, 사기, 정직하지 못함, 불공정 거래, 내 배를 채우기 위해 또는 내 앞길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행위 등을 통해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직장생활에서의 실패가 또 다른 시련이 될 수 있는데, 이는 너무 충격이 커 자칫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다. 예컨대 정리해고나 일반적인 해고를 당하고 나면 너무도 황당하여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비롯해서 지금까지 믿고 의지한 모든 것들을 회의적으로 보게 된다.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일터로 부르셔서 큰 성공을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혹은 ‘우리가 그분께 충실했으니 성공시켜 주시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가’ 하고 물을 수 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결국 믿을 수 없고 심지어 존재하시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필요를 계속 채워주실지 의심할 수도 있다. 일과 관련된 이 모든 도전들이 믿음의 시련이될 수 있다.


   일터에서 우리의 믿음이 시련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될까? 인내하라!(약 1:3-4)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말한다(약 1:5). 위기를 넘기면 넘길수록 우리는 단단해지며,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에 기쁨을 느낀다.

 

채워 주시는 하나님 의지하기 (약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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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는 지혜를 논하면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는 원칙에서 시작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우리가 업무상의 결정, 기회에 대한 평가, 동료나 고객에 대한 신뢰, 자원 투자 등에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가? 심지어 야고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주실 것을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치 말라’고까지 일러 준다(약 1:6). 즉, 우리의 문제는 일터에서 하나님께 너무 많은 도움을 기대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너무 적게 기대한다는 데 있다(약 1:8).


   바로 이 점을 반드시 포착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의심한다면, 당신은 야고보가 말하는 “두 마음”을 품은 자다. 어쩌면 아직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인지 아닌지를 결단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약 1:8) 것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여할 수도, 심지어 자기 자신도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약 1:7).

 

  야고보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광대한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사는 수신자들이 이미 겪는 시련을 너무나 잘 알았다(약 1:1-2). 그러나 그는 신자의 삶이란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시작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야고보서 1장 9-11절에서 야고보는 이를 경제 영역에 즉각 적용한다. 당신이 부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자기 능력에 의지한다면, 비록 한창 사업을 진행하는 도중일지라도 당신은 이내 쇠진해질 것이다. 반대로 혹 당신이 가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냉대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도리어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것’을 기대하라.

 

  실패나 성공의 원인은 당신이 어쩔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다. 불경기, 기업 매각, 재배치, 흉작, 차별대우, 태풍 피해, 혹은 다른 온갖 요인으로 생계를 위협받게 된 사람들이 그 증인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직장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리라고 약속하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실패하도록 만드시지도 않는다. 오히려 실패와 성공을 모두 다 사용하셔서 악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인내력을 기르길 바라신다. 야고보서 2장 1-8절이 역경의 시기에 하나님을 찾도록 우리에게 당부하는 구절이라면, 9-11절은 성공의 때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되새겨 준다.


   비록 야고보가 하나님의 선과 세상의 악을 대비시키기는 해도, 우리는 천사 편에 있고 세상 사람들은 마귀 편에 있다는 식의 상상을 하게 하지는 않는다.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대신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크리스천의 마음 중심에서 비롯된다고 밝힌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그는 지금 교우들을 향해 말한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교회는 선하고 세상 일터는 악하다는 정의를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기 행각 따위가 벌어지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교회에도 추문이 생기곤 한다. 이처럼 악은 양쪽 영역에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두 영역에서 모두 선을 나타낼 수 있다.


   크리스천 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도구 가운데 하나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후하고 너그러우심을 직접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모든 후하고 너그러운 베풂과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NRSV). 이것은 하나님이 곧 우리를 채워 주시는 궁극적 근원이시며, 또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궁핍한 자들을 채워줄 책임이 있다는 두 가지 진리를 확인시켜 준다.

잘 듣는 훈련을 하라 (약1: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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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경청’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약 1:19)과 하나님의(약 1:22-25) 말을 모두 경청해야 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무슨 기술이라도 습득하려는 양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약 1:21) 하나의 길로써 경청해야 옳다.

 

  흥미롭게도 야고보는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것까지도 자신의 악을 제거하는 한 수단임을 시사한다. 그는 남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경우에 잘 듣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 못하게 막는 오만과 분노를 없애 준다고 말한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0-21).

 

  달갑지 않은 말들, 곧 거슬리는 말, 비판의 말, 묵살의 말을 남들이 건네면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넘치는 일터에서 분노로 응수하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입지가 더 나빠지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증거를 믿지 못할 것이다. 화를 내거나 직설적인 말로 자신을 방어하기보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입지를 지켜야 한다.


   이런 조언은 모든 유형의 일과 일터에 적용된다. 경청은 비즈니스 서적에서도 중요한 리더십 기술 가운데 하나다.[1] 사업체들은 고객, 직원, 투자자, 공동체, 주주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주려면, 조직체는 자신들이 채워 주길 바라는 그 필요 대상자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옳다. 이 사실은 마치 로마제국이 그랬듯, 곤경과 박해 속에서도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옥토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2009년 9월 18일에 ‘Harvard Business School Publications’ 웹 사이트(www.harvardbusiness.org)에서 “대인관계 기술”이라는 주제로 검색했더니, 첫 번째 결과가 “사람들 경청하기”였다.

궁핍한 이웃을 위해 일하라(약1: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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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진리는 충성된 일의 두 번째 원칙, 곧 궁핍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다루게 해 준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이것은 첫 번째 원칙, 곧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때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남들의 유익을 위해서도 자유롭게 일하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서 궁핍한 이웃을 돕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지 않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지적한다. 야고보가 말했듯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다(약 1:27). 신앙은 신뢰를 뜻하며, 신뢰는 행동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께서 여러 소외계층에게 직접 실천해 보이신 모습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야고보는 하나님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특별한 자리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약 2:5; 눅6:20)을, 보물을 “땅에 쌓아” 썩혀 버림에 대한 경고(약 5:1-5; 마 6:19)와 결부시킨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일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왜냐하면 남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성공적인 일터의 으뜸가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 일터가 기업이든, 교육의 장이든, 건강 관리든, 행정 공무든, 전문직이든, 비영리직 또는 다른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성공적인 조직체는 그 소비자, 직원, 투자자, 시민, 학생, 고객 또는 다른 주주들의 필요를 채우기 마련이다. 물론 이것이 야고보의 중점 사안은 아니다. 그는 빈민과 약자들의 필요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기는 하되, 그럼에도 여전히 실용적이다.한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울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것이다.


   야고보는 두려움을 계속 직시하고 믿음의 시련을 직접 맞닥뜨리라고 요청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시련에 직면한다면, 하나님은 그 시련을 통해서 궁핍한 자들을 돌보는 당신의 역량을 배가시켜 주신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되지 말라”(약 1:22).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궁핍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당신은 자신을 속이는 거라고 야고보는 풀이한다. 그건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있다면, 아마 당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일하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일한다면, 아마도 하나님이 당신을 돌볼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서이리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일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다. 혹은 야고보가 말하듯,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야고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특별히 다양한 소외계층과 가난한 자들을 실제로 돌보신 것을) 경험했기에 이런 통찰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특별히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들의 것이라고 가르친 사실(약 2:5; 눅 6:20)이며, 아울러 “이 땅”의 썩어질 재물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약 5:1-5; 마 6:19)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도 야고보의 암시를 발견할 수있다.


   이것은 성공적인 조직의 첫째 조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에 우리 일에도 직접 적용할 수 있다. 성공적인 조직은 손님, 고용인, 주주, 주민, 학생, 고객과 다른 주주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야고보는 사실 처음부터 이런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주요대상으로 삼았다. 그래도 이 원칙은 적용할 만하다. 어떤 조직이 사람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 줄 때가 바로 하나님이 함께 역사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기업의 고객 서비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들이 ‘기업에게 고객 대접을 받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때 오히려 더 큰 창조력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베푸시는 손길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어떤 크리스천 그룹이 베트남에서 사회 ·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그곳에 가구 공장을 설립했다. 그 공장을 통해 하나님은 가구가 필요한 해외 고객들과 전에 실직자였던 지역 노동자들의 필요를 동시에 채워 주셨다.[1]


   이와 비슷한 사례로, 글로리아 닐런드(Gloria Nelund)가 이끄는 트릴링크 글로벌(TriLinc Global)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개발도상국 내 창업을 돕는 투자회사다.[2]


   크리스천들의 의무는 각자의 직업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회 구조와 정치 · 경제적 시스템은 빈민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크리스천들도 이런 구조와 시스템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까지, 우리에게는 빈궁한 사람들의 필요뿐만 아니라 부유층과 권력자들의 필요도 채워 줄 책임이 있다.

 TOW 프로젝트 팀 편집장인 윌리엄 메신저(William Messanger)가 2010년 7월 29일 홍콩에서 인터뷰한 내용이다. 본인 요청으로 실명은 밝히지 않겠다

 Al Erisman, “Gloria Nelund: Defining Success in the Financial World,” Ethix 80 (March/April 2012), available at http://ethix.org/category/archives/issue-80.

가난한 자를 차별하고 부자의 비위를 맞추는가(약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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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또 앞서 말한 두 가지 기본 원칙을 부자 및 권력자 선호주의에 대한 경고로 사용한다. 그는 둘째 원칙, 곧 ‘가난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를 갖고 2장을 시작한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말하자면, 우리가 부자와 권력자들을 선호한다면, 그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을 섬긴다는 점에서 죄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부자와 권력자들은 그들의 부와 권력의 일부를 우리에게 뿌려 줄 잠재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빈민들은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필요한 것들만 잔뜩 내보인다. 야고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부유하고 옷 잘 입은 사람이 교회에 오면 특별 대우를 받는 반면, 가난하고 허름한 차림의 사람은 멸시받기 십상이라는 실례를 든다. 그러니까 교회 출석이라는 간단한 것에서부터, 가난한 사람들은 환영의 인사말에 굶주려 있다는 말이다. 반면 가는 곳마다 환영받는 부자들은 아쉬울 게 없다.


   야고보는 또 레위기 19장 18절, 곧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성구를 들어, 부자들은 반기고 챙겨 주면서 빈민은 깔보고 얕보는 행위는 살인이나 간음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반율법적 행동이라고 지적한다(약 2:8-12).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을 섬기지 않거나 심지어 가난한 사람을 이웃으로조차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교회 모임을 언급한 것이었지만, 여기에도 직장에 적용할 부분이 있다. 일터에서 우리는 우리를 도울 사람들, 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다. 건강한 일터라면 이것은 단순히 강조점의 문제다. 그러나 사람들이 권력 다툼을 하느라 서로 치고받는 역기능적인 직장에서는 약한 사람 편에 서 주는 용기가 필요하다. 특정 계층선호주의를 배격하다 보면, 특히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편파주의, 곧 인종차별, 성에 대한 고정관념, 또는 종교적 편견 등에 부딪칠 경우 더군다나 위험하다.


   야고보가 시사하는 ‘타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기’ 원칙 적용에는 은연중 하나님 신뢰의 원리가 결부된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공급 능력을 확대하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빌붙고 싶은 유혹을 그다지 받지 않을 터이다. 또 일터나 학교에서 비주류 사람들과 어울려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선행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야고보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선행이 어떻게 가능한지 가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빈민들 자신이 날마다 이 진리를 살아 낸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이것은 산상수훈이나 평지 설교 (마 5:3; 눅 6:20)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빗댄 것일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어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신을 의지할 이유가 없어서 그들은 하나님 의존하기를 더 잘 배워 왔다고 할 수 있다.

참믿음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진다(약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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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2장에서 일이라는 주제를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룬다. 그는 예외 없이 “일”(헬라어로 ergon; ‘행함’이라는 뜻도 있음 - 옮긴이 주)이라는 단수형보다는 “일들”(erga)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야고보가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을 쓰는 데는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ergon[에르곤]’과 ‘erga[에르가]’는 단지 같은 단어의 단수형과 복수형일 뿐이다.[1]

 

  야고보는 이 단어를 써서 누군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온정의 일들부터, 벼논의 수확을 꾸준히 늘리는 등의 일선 업무까지 그려 낸다. 그가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크리스천의 일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보여 준다. 일(행위)에 중점을 둔 야고보 서신의 논조는 큰 논란을 불러오곤 했다. 루터는 야고보서 2장 24절(“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말씀을 읽고서,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16절(‘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과 배치되는 것이라 생각해, 야고보를 싫어하게 된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개혁가들은 루터의 견해를 공유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루터의 이의 제기는 개신교가 야고보서를 보는 지배적인 관점이 되었다.[2]

 

  여기서 루터의 야고보서 논쟁을 길게 논할 수는 없지만, 야고보가 주장하는 일(행함)이 개신교에서 반대하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약 2:21, 24-25)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지 질문해 볼 수는 있다.


   야고보 자신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야고보서 2장 14절은 틀림없이 논쟁 중심부에 있으므로, 본서의 2장 1-13절에 앞서 이 부분을 먼저 생각해 볼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자신의 이 질문에 직설적으로 자답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그리고 ‘죽은 믿음’에 관해 신중하게 고른 에피소드에서, 누군가 이웃이 헐벗고 일용할 양식도 없는데 평안히 잘 가라는 빈말을 해 주는 경우를 언급한다(약 2:15-16). 야고보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하나님을 신뢰하는자)는 궁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도와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날마다 일을 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줄 기회가 생긴다.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하는 고객을 간단히 도와줄 수도 있고, 도움이 필요한데도 도움 요청하기를 겁내는 신참 동료를 찾아내는 경우처럼 단순한 것일 수도 있다. 야고보는 이런 연약한 자들, 혹은 소외된 자들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지라고 권고하고 있으니, 일터에서 그런 대상이 누군지를 가려내는 연습이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핵심이다. 야고보는 일(행함)과 믿음이 상충된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믿음(신뢰)이 없다면 선한 행위도 없기 때문에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야고보의 말은, 일들(행함) 없이도 믿음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다. 야고보는 행함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하면, 그건 전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크리스천들을 향한 야고보의 명령은, 주님께 대한 신앙 대신 다른 궁핍한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라는 게 아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 덧붙여 그러라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한 결과로써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대한다.[3]


  크리스천의 믿음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진다는 통찰은, 일터 현장에서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영적인 것이 곧 실천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세상을 영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나눌 수 없다. 야고보는 2장 22절에서 말한다. “네가 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교회를 다닌다. 그렇지만 나는 내 행함(일)과 믿음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라고 말한 것은, 매일 활동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행동으로 이루어 내야 할 과제를 던진것이다.


   야고보서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 궁핍한 자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이라는 기본적인 두 원칙을 실제로 적용한 예를 보여 준다. 야고보서 2장 14-26절에 대한 이 같은 우리의 평가를 전제로, 이런 적용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완성이라는 관점, 야고보 시대에 유효했고 우리 시대에도 큰 교훈을 주는 이 관점을 유지하고 계속 진행해 나갈 것이다.

Gk. #2041 in James Strong, Enhanced Strong’s Lexicon (Ontario: Woodside Bible Fellowship, 1995), and #2240  in Gerhard Kittel, Gerhard Fried  rich, and Geoffrey William Bromiley, eds.,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1985), 6:635를 보라

 Luke Timothy Johnson, “The Letter of James,” The New Interpreter’s Bible (Nashville: Abingdon Press, 1998), 177쪽.

이러한 믿음에 관한 이해와 바울의 해석이 어떻게 일치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Douglas Moo, The Letter of James (Grand Rapids: Eerdmans, 2000), 37-43, 118-144쪽을 보라.

혀를 길들이라(약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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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듣기’에 대한 실천 지침을(약 1:19-21) ‘말하기’에도 적용한다. 야고보서 3장 1-12절에서 그는 자못 맹렬한 단어를 사용한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6, 8). 또 구약 잠언 말씀에서 혀가 생명을 주관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며(그 예로 잠 12:18 -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혀가 죽음까지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잘 알았다.

 

  교회에서 가혹한 말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제대로 주의하지 않는 크리스천들도 많다. 일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부주의를 범하지는 않는가?(약 3:9; 창 1:26-27) 직장 내 정수기 옆에 모여서 나누는 수다, 뒷담화, 희롱, 경쟁자에 대한 경멸과 같은 일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으며, 또 상처를 안 입혀 본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이기적 욕망을 해결하는 길(약3: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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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3장 14절 - 4장 12절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원칙과 궁핍한 자들을 섬기는 원칙을 기술한다. 늘 그렇듯이 야고보는 순서를 바꾸어서 섬김을 먼저 논하고, 신뢰는 나중에 다루었다. 여기서 야고보는 먼저 이기적 욕망(selfish ambition)을 꾸짖는 것으로 시작해, 뒤이어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권고한다.

 

이기적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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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적 욕망은 화평하게 하는 일을 가로막는다(약3:16-4:11).  이기적 욕망은 다른 사람을 돕는 일과 반대 개념이다. 야고보서 3장 16절 말씀에 그것을 적절하게 요약했다. “시기와 이기적인 욕망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일이 있을 뿐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야고보는 이런 이기적 욕망을 극복하는 실질적 방안으로 화평하게 하는 일(peacemaking)을 강조한다.[1]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그 전형적인 방법으로 곡식을 수확하는 경우를 들어 강조하면서 일터를 암시하고, 몇 가지 화평하게 하는 일들을 나열한다. 피해를 입은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약 4:9), 스스로 낮아지는 것(약 4:10), 비방과 기소와 판단을 자제하는 것(약 4:11), 그리고 자비와 진실(약 3:17)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크리스천들은 일터에서 이 모든 것을 실천할 수 있다.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이기적 욕망을 극복할 수 있다(약4:2-5).  이기적 욕망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도 다툼과 싸움을 일으킨다. 야고보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규명한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2-3).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섬기기보다 자신의 기쁨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원칙을 완전한 하나로 묶는다. 야고보는 하나님 없이 부와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 유혹을 ‘세상과의 간음’이라는 말로 비유한다(약 4:4-5).[2]

 

산상수훈을 다시 상기시킨다(마 5:9).

야고보는 구약 예언서에서 간음의 비유를 가져와, 하나님 대용품으로 자기 기쁨과 세상의 부를 추구하는 것을 종종 묘사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투자하라 (약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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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음의 비유를 쓰기는 했지만, 야고보는 전반적으로 이기적 욕망에 관해 말한다. 일터에서 우리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디딤돌로 쓰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동료나 부하 직원의 실적을 가로챌 때, 승진을 위해 경쟁 직원에게 정보를 숨길 때, 자리에 없어서 자신을 미처 방어할 수 없는 사람한테 자신의 잘못을 전가시킬 때, 누군가의 어려운 상황을 자신의 기회로 이용할 때, 우리에게는 이기적 욕망의 죄책이 있다. 야고보는 이것이 다툼의 한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기적 욕망은 성공을 촉진시키기보다 오히려 지연시킨다. 조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성공을 위해 남들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된다. 일이란 게 부하 직원들한테 떠맡길 만큼 간단할 수도 있고, 국제팀에서 조정해야 할 만큼 복잡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앞서려고 남들을 밟고 간다는 평판이라도 나돈다면, 누가 당신의 리더십을 믿고 따르겠는가?

 

   자기 형상대로 모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창 1:27), 모든 사람을 위해 죽도록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고후 5:14)께 복종하는 것이 해결책이다. 우리 자신에 앞서 남들을 섬기는 데까지 야망을 낮출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다. 당신의 권위와 전문성이 더 높아지길 원하는가? 좋다. 다른 동료들의 권위와 장점을 추켜올리며 돕기 시작해 보라. 성공하고 싶은가? 좋다. 주변 사람들이 성공하도록 투자하라. 역설적이지만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한 투자는 자신을 위한 최고의 투자가 될 수 있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엘리자베스 던 교수와 하버드경영대학원(Harvard Business School)의 마이클 놀턴, 이 두 경제학자는, 우리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훨씬 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한다.[1]

 

 Elizabeth Dunn and Michael Norton, Happy Money: The Science of Smarter Spending (New York: Simon & Schuster, 2013)

크리스천이라고 앞날을 다 통제할 수 없다(약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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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야고보는 두 원칙들의 새로운 적용의 하나로 옮겨 가면서 사업상의 예측에 대한 경고를 다룬다.[1]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제는 먼저 하나님을 신뢰하는 원칙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드는 말로 시작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3-14).

 

  마치 단기 사업계획에 선고를 내리는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전계획이 그가 우려하는 관심사는 아니다. 앞날에 무엇이 일어날지를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다음 절에서 야고보가 말하려는 진짜 포인트를 엿볼 수 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문제는 계획 자체가 아니라, 미래가 우리 손안에 있는 양 계획하는 태도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원, 능력, 관계, 시간 등을 지혜롭게 활용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돈으로 할 수 있는 최상의 계획을 세워 실행하더라도, 그 결과는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지 대다수의 사업가들이 잘 안다. 어떤 주식회사의 연간보고서든 10-20쪽에 달하는 지면 가득 회사에 닥칠 위험요소로 가득하다. “우리 주식 가격은 회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불특정 요인 때문에 크게 변동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일반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예측할 수 없는 일에는 적절히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야고보는 명확히 밝힌다. 그럼 어째서 야고보는 세상의 일반 사업체들이 그토록 잘 아는 것을 신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일까? 아마도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노라면 예측할 수 없는 삶과 일에 대해서도 면역력을 얻을 거라고 때때로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야고보는 크리스천들이야말로 더욱 지속적으로 재평가하고, 적응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계획은 조정 가능해야 하고 상황 변화에 맞추어 실행해야 한다. 언뜻 보면, 이것은 단순히 사업 실행의 좋은 예다. 그렇지만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고 단순히 시장 조건에 대응하는 필요를 떠나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의 훈계를 다시금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크리스천 리더십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계획과 조치에 강제로 따르도록 하기보다, 먼저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을 우리 삶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 예언서의 경고인 듯하다. (겔 34:3; 암 2:6-7; 5:12; 미 2:2; 6:12-16; 마 6:19; 눅 6:24-25; 12:13-21, 32-34; 16:19-31; 18:18-30 참조). 또한 야고보서 1장 1-18절은 과거와 현재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두지만, 본 장에서는 미래의 예측에 초점이 있음을 주의하라. 

부당한 권력 남용과 노동 착취 (약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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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야고보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섬겨야 한다는 원칙으로 다시 돌아간다. 야고보서 5장을 시작하는 그의 말은 준엄하다. 그는 ‘부유한 자들에게’ 경고한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 5:1). 금고 안에 빛나는 금은보화와 옷장 안의 화려한 옷들은 언제나 빛날 것처럼 보이지만, 야고보는 그들의 재물이 이미 썩기 시작했다고 단언할 만큼 심판이 임박했음을 확신한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2-3). 그들의 사치하고 허랑방탕한 삶은 오직 도살의 날을 위해 ‘살찌는’ 데까지만 이어질 뿐이다(약 5:5).


   이들 부자들은 어떻게 그들의 부를 획득했는지, 그리고 부를 획득하고 나서 무엇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따라 파멸당할 운명이다. 야고보가 불의한 사업 관행을 강하게 꾸짖는 것을 보노라니 구약 성경의 교훈이 떠오른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레19:13).[1] 일꾼의 손에 있어야 할 돈이 사업주의 금고 안에 쌓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부를 비축했고 주변의 필요한 자들을 외면했다(약 5:3).


   사업주는 특별히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데 바지런해야 한다. 공평한 임금 지불에 대한 분석 연구는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의 범위를 벗어나지만, 야고보가 ‘사기 쳐서 남기는 임금’(약 5:4, NRSV)이라고 한것은 이 특정 지주들의 권력 남용을 꾸짖는 것이다(개역개정에는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으로 번역했다 - 옮긴이 주). 일꾼들이 마땅히 삯을 받아야 하는데도 권세 있는 부자는 법적 처벌을 용케 피해 가면서 지불하지 않을 길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부자는 흔히 사법체계를 무력화시킬 수단을 갖고 있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부당한 권력을 남용하기가 너무나 쉽다.

 

  부자들의 권력 남용에는 직원들을 독립 계약자(independent contractors)로 잘못 분류하거나 미숙련자로 분류해 낮은 임금을 지급하게 만드는 부정확한 업무 배치, 같은 일이지만 여자 혹은 소수민족을 고용해서 다른 사람보다 낮은 임금 지급하기, 어른들도 꺼리는 위험한 일을 어린이들에게 시키는 아동 노동학대 등등이다. 권력 남용은 소위 표준관행이라는 이유로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


   야고보는 이와 같이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자들을 단죄한다(약5:5).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한 삶이 과연 무엇인지를 말하기는 좀 복잡하지만, 수많은 크리스천들에게도 도전이 된다. 이 대목에서 야고보의 주된 관심은 빈민들이 잘 사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가장 적절한 물음은 이런 것일 터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가? 아니면 더 가난하게 하는가? 나의 돈 씀씀이가 사람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돕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빈곤 속에 머물게 하는가?”

레위기 19장은 야고보가 선호하는 구약 말씀 가운데 하나다. L.T. Johnson, Brother of Jesus, Friend of God (Grand Rapids: Eerdmans, 2004), 123쪽 이하를 참고하라.

추수의 날을 기다리며(약5: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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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는 인내, 정직, 기도, 죄 고백, 병 고침에 대한 다양한 권면으로써 서신을 끝맺는다. 늘 그랬듯이 이런 것들은 진실한 행함(일들)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 원칙 또는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원칙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모두에 호소한다. 그리고 여태 해 왔듯이 야고보는 이를 일터에 직접 적용한다.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인내하라

   야고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증거를 일터로 비유하면서 5장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그러고는 위의 말에 메아리치는 경구로 마무리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


   일터에서의 인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형태인데, 매우 힘든 일이다. 일은 어떤 결과를 얻으려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면 일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일을 하지 않고서도 결과를 움켜쥐려는 유혹은 항상있다. 만약 내가 돈을 투자한다면,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하지 천천히되고 싶어 하겠는가? 내부자 거래, 폰지 사기(Ponzi scheme), 슬롯머신에 생활비를 날리는 도박 등은 그런 조급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만약 승진하고자 한다면 상사의 눈에 들도록 별의별 수단을 동원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중상모략, 신용 위조, 험담, 팀 와해로 이어진다. ‘만약 내가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면, 엉성하게 빨리 해치워서 생산라인의 다음 사람한테 문제를 전가시키면 되지 않을까?’ 이런 것들은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직원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뿐더러 제품의 질도 나빠지는 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진실만을 말하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약5:12).


   항상 진실만을 말하는 사람들이 근무하는 직장을 상상해 보라. 단순히 거짓말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실 그대로 가장 정확히 이해한 것을 듣고 말한다면? 맹세와 서약도 필요 없고, 소급 해명이 없어도 되고, 허위 진술과 사기에 대한 별도의 계약 조항도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판매자가 제품에 대한 모든 정보를 항상 제공한다고 상상해 보라. 또 계약서 내용은 모든 당사자들에게 늘 명료하게 전달되고, 사장과 상사들은 수하 직원들에게 돌릴 공을 명확하게 돌린다고 상상해 보라. 업무 관련 정보를 교묘히 감추기보다 언제나 명확한 대답을 하여 그림처럼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상상해 보라. 현재의 직장에서 성공하겠는가? 만일 모두가 최대한 정직해진다면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성공의 정의가 바뀌어야하는 것 아닌가? 이 주제에 대해서는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진실과 거짓’ 부분을 보라.

 

구하라, 하나님께

   야고보는 기도 얘기를 하면서 하나님 의존 원칙으로 되돌아간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 5:13),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하나님께 구하라”(약 1:5). 야고보는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아뢰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하나님, 저는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된 이 실패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릅니다. 상사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주님께 먼저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마다 우리가 기대한 그대로 응답하겠노라 보장하시지는 않지만, 우리의 필요를 능히 채워 주실 수 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이상하게도 매일 직장에서 부대끼는 특정 이슈들, 상황, 사람들, 필요, 두려움과 의문에 관해 마지못해 기도한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하심을 (심지어 특정 결과를 위해 간구하라는 야고보의 권면도) 자꾸만 잊어버린다. 그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삶에서 실제로 응답하시리라고 말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서로 죄를 고백하라

   야고보는 서로 죄를 고백함으로써 치유를 받도록 하라고 권고한다(약5:16). 일터에서 가장 흥미로운 말은 ‘서로’다. 여기서의 전제는 사람들이 단순히 하나님께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죄를 짓는다는 것이며, 일터에서의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우리는 매일 생산과 업무 수행의 압박, 시간의 제약을 받고, 종종 귀 기울이지 않은 채 행동하고,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불공정하게 경쟁하며, 자원을 독차지하고, 귀찮은 정리를 옆 사람에게 떠넘기고, 내 욕구불만을 동료들 탓으로 돌리곤 한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유일한 치유의 길은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동료의 성과를 부정확하게 비판함으로써 그가 승진에서 제외되었다면, 단지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그 죄를 피해자에게 고백해야 한다. 그 손상을 정말 바로잡기 원한다면, 해당 부서의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죄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동기로 죄 고백과 병 고침을 원하는가?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섬길 수 있다. “너희가 알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 것임이라”(약 5:20). 사망에서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은 아주 깊고 절실한 필요를 채워 주는 섬김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마 우리 역시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사망에서 구원받도록 다른 누군가도 지금 우리를 돕고 있을 것이다.

 

베드로전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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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전서는 예수님께 충성했기 때문에 비방을 받고, 거짓 고소를 당하고, 신체적으로 학대받는 사람에게 쓴 서신으로(벧전 2:12, 18-20; 3:13-17;4:4, 14, 19), 여기서 베드로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자신의 고난을 세상을 위한 섬김으로 바꾸어 살도록 부름받았는지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분을 따르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낯선 이곳에 머무는 나그네이며, 여기는 우리의 진정한 집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벧전 1:6).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의 희생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가져오는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부른다(벧전 2:5). 크리스천의 일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그분의 왕국을 회복할 때까지 세상을 축복하는 일이다.

 

나그네요, 제사장으로 세상을 섬기다 (벧전1: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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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신 서두에서 베드로가 수신자들에게 쓰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벧전 1:1, 새번역)이라는 본 구절은 베드로 서신 전체를 관통하는주된 메시지의 전조로 보인다. 이 구절은 ‘나그네들’과 ‘선택받은’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 왕국의 시민이라면, 당신은 나그네다. 당신을 둘러싼 현재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외세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의 진정한 왕국 시민권은 ‘하늘에 간직돼’ 있다(벧전 1:4). 어떤 나라에 잠시 거하는 나그네들처럼, 당신도 당신이 사는 땅의 통치자들의 총애를 반드시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스스로 오셨지만 “사람에게는 버린 바”(벧전 2:4) 되셨다. 마찬가지로 그분 왕국의 모든 시민들도 같은 대우, 곧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는 상황을 예상해야 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동안 이 낯선 땅에 머물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벧전 1:15-17).


   정치적 은유로 말하고는 있으나, 베드로는 일터의 용어를 들고 있다. “행위”(벧전 1:17), “은이나 금”(벧전 1:18), “불로 연단”(벧전 1:7),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 등등. 베드로가 일터 용어를 사용한 까닭은 우리가 일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주변 노동세계 가운데서 우리가 주님을 따를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다.


   ‘나그네’라는 말의 의미를 설명한 뒤, 베드로는 또 다른 용어 ‘선택받은’(벧전 1:1)을 사용한다. 만일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당신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다. 당신이 임시로 거주하는 이 나라의 제사장이 되기 위해서다.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도 제사장의 타이틀 또는 ‘왕 같은 제사장직’은 거듭 나온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희생제사를 드렸고 이스라엘을 축복했다

 

  더 나아가기 전에 고대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이 된다는 게 무엇을 뜻했는지 알아야 한다. 제사장에게는 주로 두 가지 역할이 있었으니,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 그리고 제사장적 축복 선언이었다.[1]

 

 제사장들은 희생제사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성소나 성전의 내실로 들어가야 했고, 대제사장의 경우 매년 한 번씩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어야 했다. 대리적 축복 선언을 하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 당신을 대신하여 말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직무를 수행하려면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야 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는 불순하거나 부정한 것은 아무것도 용납될 수 없기에 결국 각별한 정결 또는 성결은 필수적이었다.[2] 

 

  그러면서도 제사장들은 순번제로 돌아가며 자기 차례에 섬겼고(눅1:8) 주된 생계 수단으로 일반 직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격리될 수도 없었지만, 세상의 더러움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정결을 유지해야만 했다.

  

 

우리는 이 시대 제사장이다.

  베드로가 크리스천들이 “거룩한 제사장”(벧전 2:5)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름받았다고 한 것은 모든 신자가 자신을 전임 목회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도자나 선교사가 되는 것이 선택받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하는 최선의 길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무슨 일로 생계를 유지하든, 크리스천들은 그 가운데서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복을 전달할 수있다. 베드로는 직설적으로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하려 함이라”(벧전 2:11-12).


   물론 크리스천들이 유대인 제사장들과 똑같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동물을 죽여 바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주님이 앞서하신 것과 같은 희생제사를 드린다.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한 자기 희생이다.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라고 말한다. 이것은 ‘영적 희생’(벧전 2:5) 즉,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선한 청지기로 드리는 것을 뜻한다(벧전4:10).


   우리는 날마다 일터에서 크든 작든 이런 자기희생의 기회를 만난다. 이는 베드로전서 1장 3절-2장 10절을 요약한 것으로, 사도 베드로가 수신자들을 왜 ‘선택받은 나그네들’(NRSV)이라고 불렀는지 내력을 알 수 있다. ‘나그네들’이라는 용어에는, 우리가 본향이 아닌 낯선 땅, 부정부패가 만연한 곳에서 외국인으로서 우리의 소명을 살아 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택받은’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왕 같은 제사장들’은 특별히 자기희생을 통해서 세상에 복이 되는 제사장의 소명을 지녔음을 확인시켜 준다.

제사장의 축복은 민수기 6장 23-24절에서 제사장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며, 민수기 6장 24-26절 말씀이 그 내용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결은 그분의 임재 앞에 인간의 거룩함을 요구했다(레 11:44-45). 민족적 성결 의식은 대속죄일에 시행되었다(레 16장).

세상 권세자들 아래서의 고난 (벧전2:1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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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의 노동 환경에서 나그네와 제사장으로서의 부르심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베드로는 이것을 외국인과 종인 수신자들에게 주는 직접적인 지침으로 말한다. 비록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우리에게 ‘자유인’(벧전 2:16)으로 살아갈 권리를 부여해 주지만, 땅의 외국인들로서의 우리는 우리가 사는 나라가 어디든 그곳의 모든 시민법과 제도를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벧전 2:13-14). 비록 베드로가 어떤 부류의 일꾼들이라고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수신자들의 다수를 이루는 ‘종들’에게 자신이 받는 대우가 정당하든 부당하든 어떤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예견된 일(벧전 4:12)이며, 오히려 보복하지 않고 그리스도 고난의 자취를 따라 고난을 감당할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벧전 2:21).

 

  주의할 것은 여기서 베드로는 부당한 수난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무능, 오만, 무지로 인해서 겪는 어려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정당한 형벌이라면 순복하는 맘으로 받아야 한다. 사실 당신은 위의 권위에 불복할 자유가 없다. 비록 당신이 생각하기에 올바르다고해도 그렇다. 당신이 승진, 임금 인상, 창이 있는 사무실, 수준급의 의료보험 제도 혜택을 받을 만한 충분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어쩌면 고용주가 당신을 의도적으로 기만하고, 시간 외 근무를 강요하고, 상사의 잘못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워 징계를 가할 수도 있다.

 

  반면 당신 또한 아프지도 않으면서 병가를 내고, 개인 물품을 사면서 회사에 전가시키고, 회사 사무용품을 슬쩍 챙기거나 업무 시간에 빈둥거리는 것 같은 일로 고용주가 당신을 속인 것만큼 그렇게 윤리적으로 회사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하나님은 뺏기는 만큼 도로 취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신다. 당신이 속은 만큼 남을 속인다고 해서 당신의 행위가 덜 악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적대적인 업무 환경일지라도 오직 선을 행하도록 당신을 부르셨다(벧전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라’(벧전 3:9). 오히려 크리스천들은 심지어 불의하고 부당한 권위도 존중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옹호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듯이(벧전 2:21-25), 우리는 제사장으로 사람들을 축복하도록 부름받았지, 우리 자신을 옹호하도록 부름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는 권위에 도전하시고 권세를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지만, 베드로는 여기서 복음의 전체 개요를 다시 말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예언서와 같은 다른 성경의 경우, 억압적이고 불법적 권위에 대해서는 저항하라고 하나님이 강조하셨다.

 

  항복이 항상 순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공공연하게 불순종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임으로써 권위에 복종할 수도 있다. 이 대목과 그의 서신서 전체를 통해 베드로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자기희생 모범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지도자들과 따르는 자들을 위한 지침들(벧전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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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는 이제 ‘장로들’(elders;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헬라어 어원에서 온 영어식 표현 ‘presbyters’나 ‘bishops’가 익숙하다)이라고 칭한 교회 리더들에게 지침을 준다.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터에 있는 지도자들에게도 훌륭한 조언이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 자원함으로 하며”(벧전 5:2). 돈에 대한 탐심을 품지 말라(벧전5:2).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본을 보이라(벧전 5:3).

 

  베드로는 잠언 3장 34절을 인용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아니, 사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하고 겸손을 권유한다. 이것이 유독 베드로전서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확대 설명을 하지는 않겠다. 단지 오늘날 일터에서 널리 활용하는 종의 리더십 개념을 베드로가 잘 알고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탁월한 종의 리더십이 전수될 수 있었겠는가?(벧전 4:1-2, 6)

 

베드로후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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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후서는 거룩한 삶과 고난을 견디는 인내의 필요성에 관해 야고보서와 베드로전서에서 이미 보았던 여러 주제들을 강화한다. 여기서는 이 부분을 반복해서 다루지 않고, 일의 신학에 대한 강한 도전을 주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만 그렇게 할 것이다. 만일 “현재의 하늘과 땅은 심판 날에 모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불로 멸망시키기 위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벧후 3:7, 현대인의성경)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일은 그 가치가 무엇인가? 대럴 코스덴(Darrell Cosden)의 중요한 책에서 제목을 빌려 살펴본다면, 이 땅에서의 노동은 하늘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1]

 

 Darrell Cosden, The Heavenly Good of Earthly Work (Peabody: Hendrickson Publishers, 2006)

이 땅의 끝, 영원의 시작(벧후3: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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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과 관련이 있을까?[1] 대럴 코스덴은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그의 논쟁의 핵심인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1) 물질 세상의 선함을 확인시켜 주고, (2) 지금 세상과 새 창조 세계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 주며,[2](3) 아직 완전히 구현되지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새 창조의 표징이다.  우리의 노동은 궁극적인 가치가 있다. 구속받고 성화된 우리의 수고의 열매는 하늘을 그 본향으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3장은, 코스던의 일의 신학에서 두 가지 필수불가결한 면모들 즉 (1) 창조물의 타고난 선, 그리고 (2) 지금의 세상과 다가올 창조 세계의 연속성에 대한 질문을 떠올려 주는 것 같다.
 

  베드로는 여기서 악을 심판하는 역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조롱하는 불법자들에게 맞선다(벧후 3:3-4). 그러면서 현재 세계와 미래 세계의 연속이 결여된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은 우주의 종말 또는 소멸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1.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2.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3.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벧후 3:11).
  4.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3:12).
  5. 그러나 우주의 종말이 눈에 보이듯 너무나 가깝다고 속단하지는 말라.[3] 베드로가 사용하는 종말의 이미지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독자들에게 확증해 주는 구약 성경의 예언적 계시에서 흔히 찾아볼수 있다. 구약 성경의 예언서들과 제2성전 시대 유대 문학은 모든 의인의 정화와 악인의 멸망을 언급할 때 불의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사용했다.[4]

   베드로후서 2장 7절, 10절과 3장 12절을 종말묵시문학의 관행적 흐름안에서 읽어 보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 버리는 이미지를 하나님이 선과 악을 구별하시는 과정의 은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5]

 

  이것은 베드로가 첫 번째 서신에서 불의 이미지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보여 준다. 즉 수신자인 성도들도 역시 금을 제련하는 것과 같은 시련을 거칠 터인데, 이 불 시련을 통과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칭찬과 영예를 얻으리라는 진리를 상기시켜 주었다(벧전 1:5-7). 이 구절들은 문자 그대로 하늘과 땅이 소멸될 것을 강조한다기보다 모든 악이 궁극적으로 단절될 것임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녹아 버리다’, ‘불에 풀어지다’, ‘심판’, ‘예비된 불’ 같은 용어로 세상을 변화와 시험의 면에서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더글러스 무(Douglas Moo)는 베드로후서 3장 10-12절에서 사용된 ‘불에 녹아 버리다’는 헬라어 ‘lu?[루오]’가 멸절의 의미가 아니라, 급격한 변화를 뜻한다고 해석하면서 그 대안으로 ‘undone’(풀린 상태의 또는 미완의 - 옮긴이 주)이라는 번역을 제안한다.[6]

 

   베드로는 노아 시대를 언급하면서(벧후 3:5-6) ‘물의 넘침’을 완전한 멸절로 풀이하는 해석을 경계한다. 그것은 세계의 존재 자체의 끝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정화하는 의미였다. 노아와 가족, 소유와 방주 속 동물에 국한된 인간의 선은 보존되었고, 생명도 물리적 지구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끝으로, 궁극적 미래에 대한 베드로의 긍정적인 비전을 물질계 질서의 쇄신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이것은 보잘것없고 육체를 벗어난 저세상이 아니라 ‘하늘’과 ‘땅’을 포함한 새로운 우주다. 베드로후서 3장 10절에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드러난다고 했지 파괴된다고 하지 않았다. 불타고 난 후에도 여전히 ‘일들’이 남아있으리라는 뜻이다. 이상은 본 베드로후서가 현재 일의 영원한 가치에 관한 신학의 주된 근간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본 서신이 그런 신학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상세하지는 않지만, 베드로후서는 현재 땅에서 하는 일과 미래에 경험할 일 사이에 모종의 연속성이 분명히 있다고 말한. 모든 악은 결국 소멸되지만, 모든 의로운 것들은 영원한 본향에서 새 창조를 맞이할 것이다. 불은 소멸하면서 더불어 정화시킨다. 풀어짐(용해됨)은 일의 끝을 가리키지 않는다.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은 오히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참된 결말을 이끌어 낸다.

예수님의 못 박힌 손과 발은 도래할 새로운 창조 세계의 원형이다. 그분의 육신에서 찾은 진리를 우리는 이 비전에서도 찾게 된다. 아무리 잘해 봐야 우리가 행한 일은 모순투성이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용서받고 변화됐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창조 세계 안에서 제집(본향)을 찾았다. Cosden, The Heavenly Good of Earthly Work, 76쪽. 

이 복잡한 구절에 대한 논의를 보다 정확히 알고 싶다면 Richard J. Bauckham, Jude, 2 Peter, eds. Bruce M. Metzger, David A. Hubbard, and Glenn W, Barker,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83). 리차드 J. 보컴, 《WBC 유다서 · 베드로후서》(솔로몬 역간); and John Dennis, “Cosmology  in the Petrine Literature and Jude,” Cosmology and New Testament Theology, eds. Jonathan Pennington and Sean McDonough (London: Continuum, 2008), 157-177쪽을 보라

예를 들어 다음을 살펴보라. 사30:30; 66:15-16; 나1:6; 습1:18; 3:8; 슥13:7-9; 말3:2-3; 4:1-2; Sirach 2; Wisdom of Solomon 3. 신약에서도 역시 불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사용했다: 고전3:10-15; 벧전1:5-7; 4:12-13 등.

예를 들어 다음을 살펴보라. 사 30:30; 66:15-16; 나 1:6; 습 1:18; 3:8; 슥 13:7-9; 말 3:2-3; 4:1-2; 신약에서도 역시 불의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사용했다. 고전 3:10-15; 벧전 1:5-7; 4:12-13 등을 보라.

Douglas Moo, “Nature  in  the New Creation: New Testament Eschatology and  the Environment,”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49, no. 3 (2006), 468쪽. 또한 불 이미지를 하나님이 세상을 정련시키는 과정으로 나타낸 알 월터스(Al Wolters)의 주장도 보라. Al Wolters, “Worldview and Textual Criticism in 2 Peter 3:10,”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9 (1987), 405-413쪽.

요한일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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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야고보서와는 무척 다른 상황에서 기록되기는 했지만, 요한일서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행위인 ‘행함’이 없는, 그런 믿음이 가능한지 도전한다.[1] 요한일서 2장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안다는 것은 성화된 인격과 행동,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명백히 나타난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6).


   요한일서는 재차 야고보서와 보조를 같이하면서 궁핍한 자를 돌보는것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에서 나온 행동으로 간주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한 걸음 더 나아가 요한일서는 믿음과 행함 사이의 관계를(요한의 용어로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순종하는 것’ 사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요한은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는 것(요일 2:8-11), 하나님께 사랑받게 되는 것(요일 3:16; 4:7-10, 16, 19-20),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되는 것(요일 2:29; 3:1-2, 8-9),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요일 3:14) 등의 다양한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전의 우리 실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순종이 가져오는 결과까지 설명해 준다.  요한에 의하면, 올바른 삶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요 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7-10).


   요한은 이런 과정의 결과로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요일 1:7)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대속적인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게 하여,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단지 이따금 한 번씩 빛을 켜 놓는 사람들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양식으로써 계속 빛 가운데 걷는 사람들이다. 이로써 직장 윤리에서도 직접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사상 및 생활에서 오랫동안 경시해 오다가 최근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 하나가 ‘덕 윤리학’(virtue ethics)이다.[2]

 

  덕 윤리학은 규율을 정하고 즉각적인 결정의 결과를 계산하기보다 장기적인 도덕성 함양에 중점을 둔다. 규율과 명령이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요일 5:3). 즉, 좀 오래 걸린다 해도 도덕성을 먼저 형성해 두어야 그런 규율들을 준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긴 논의는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겠지만, 요한의 ‘빛 가운데 걸어가기’라는 개념은 덕성으로 접근하는 라이프스타일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것(일)은 필연적으로 우리의 됨됨이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TOW 웹사이트 핵심 주제 코너에서 ‘윤리’ 부분을 보라.

 

   빛의 은유에서 우리가 특별히 적용할 한 가지는, 우리의 직장생활이 열려 있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행동을 빛으로부터 감추려 하기보다 면밀하게 검토하고 행하자는 얘기다. 빛 가운데 행하면서 투자자를 속이지 않고, 품질 기록을 허위로 조작하지 않으며, 동료를 험담하지 않고, 뇌물을 갈취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일서 1장 7절은 요한복음 3장 20-21절 말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의 되풀이다. 보다 자세한 논의는 이 시리즈 3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사복음서 · 사도행전》 4장 부분을 보라.

 

   롭 스미스(Rob Smith)는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에서 사용할 배를 만드는 비즈니스 선교사역체를 이끌고 있다. 그는 지역 관리들로부터 자주 뇌물을 요구받는다고 한다. 그런 요청은 언제나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그런 지불에는 영수증도 없고 거래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스미스는 이런 요청들을 빛 가운데로 가져가기 위해서 요한복음 3장 20-21절을 사용해 왔다. 그는 뇌물을 요구하는 관리들에 이런 식으로 말하곤 한다. “저는 이런 식의 지불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이에 대한 문서 작성을 위해 대사님이나 경영책임자를 불러들이고 싶습니다.” 그는 이런 전략이 뇌물에 맞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뇌물이 비윤리적이기는 해도 시장 및 이익 확장의 도구가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지만,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조지 세라핌(George Serafeim)의 연구에 따르면, 뇌물 증여는 사실 장기적으로 회사 수익을 감소시킨다.[3]


   이와 관련하여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 나라에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임 사역자가 될 필요는 없다고 역설한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소위 ‘영적’ 사역이라고 불리는 설교와 전도를 하면서 월급을 받지는 않지만, 모든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로써 빛 가운데 행할 수 있다(요일 3:18-19, 24). 그런 모든 행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하며, 따라서 매우 영적이고 의미가 깊다. 이와 같이 교회에서하는 일이 아닌데도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전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는 곳인 데다 선교기금으로 쓸 수 있는 임금을 받는 곳일뿐더러 주변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친교를 구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일터가 이웃 사랑의 가장 실천적인 수단인 까닭은 멀고 가까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물자와 봉사를 창출해 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은 하나의 영적 소명이다.


   이런 의미로, 요한일서는 우리를 다시금 야고보서로 이끌어 간다. 두 책 모두 크리스천의 삶에서 순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이것이 어떻게 일의 신학에서 하나의 요인으로 포함되는지 보여 준다. 일터에서든, 어디에서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도 주셨던 그리스도를 본받기 때문이다.

 Colin G. Kruse, The Letters of John (Grand Rapids: Eerdmans, 2000), 14-28쪽.  

 Stanley Hauerwas, Character and the Christian Life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2001)의 “서문”(introduction) 부분을 보라.

George Serafeim, “The real Cost of Bribery,” Harvard Business School Working Knowledge, November, 4, 2013, accessed at http://hbswk.hbs.edu/item/7325.html.

요한이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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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이서는 일반서신서들의 전반적인 틀과 들어맞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과 삶에 관한 자체적 통찰을 제공해 준다. 짧은 서신이지만 실천적 지침들로 가득하다.

 

진실함으로 대하라(요한이서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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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함이 빠진 사랑의 위험성(요한이서 1-6)

 

   요한의 각 서신서는 “진리”(truth; 진실)와 “사랑”의 개념을 하나로 묶어서 다루는 게 특징이다(요일 3:18; 요이 1, 3절; 요삼 3절). 이 개념이 가장 확장되고 발전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요한이서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요이 3-5절).
 

   요한에 의하면, 사랑에 진리를 더하면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와 함께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종종 진실이 빠진 사랑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추구한다. 일터에서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하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잘못된 믿음으로 불편한 진실은 가리거나 숨긴다. 혹은 진실을 말하면 평강이나 은혜보다 악감정이나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걱정한다. 딴에는 긍휼을 베푼다고 생각하면서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출발해야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로 오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리의 완전한 구현이시다. 말하자면, 사물 본연의 모습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지식을 사랑으로 감싸 그분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허위와 회피 혹은 거짓말이아닌 진실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진실을 말하노라면 충돌을 일으키거나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어지럽힐 수 있다. 그렇지만 진정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현실과 맞닥뜨리고 어려움의 수고를 거쳐 진정한 해결점에 다다를 때에 절실하게 다가온다.


   제너럴 일렉트릭사 CEO 잭 웰치는 직원들의 업무 성과에 대해 진실하면서도 노골적인 평가를 내리는 그의 관행 때문에 논쟁의 중심에 섰던 사람이다. 그는 매월 회사가 기대하는 바를 직원들이 얼마나 충족시켰는지 본인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은 그들이 최고의 성과를 올렸는지, 아니면 이런저런 부문에서 개선이 필요한 중간 정도의 성과를 보였는지, 혹은 해고의 위험에 처한 최하위 성과를 보였는지도 말해 주었다.[1] 이런 관행을 가혹하다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웰치는 그것을 사랑의 표현이라고 봤다.


거짓 친절을 베푸는 관리자야말로 가장 나쁜 관리자다. 나는 (나긋나긋하게 잘해 주기만 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당신이 친절한 관리자이니 훌륭한 관리자라고 생각해요? 그럼, 내 말을 들어 봐요. 당신이 영원히 그 자리에 있지는 않겠죠. 안 그래요? 승진을 하든지 은퇴하겠죠. 그리고 당신 후임으로 새 관리자가 와서 당신 부하였던 직원을 보고는 이렇게 말할 거요. “이런, 경력에 비해 실력이 너무 부족하군요.” 그런데 이제 그 직원이 쉰 살도 넘고, 삶의 다른 선택지도 별로 없다고 합시다. 그럼, 당신은 그 직원한테 뭐라고 할 건가요? 이젠 집에 가서 쉬라고 할 건가요? 그게 어떻게 친절인가요? 그렇게 되면 당신은 가장 잔혹한 관리자가 되는 겁니다.”[2]

 

 

진실함에는 대가가 따른다 (요이7-11)


   요한은 우리에게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요이 7절)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진실을 말하다가는 속임수로 이득을 챙기는 자들과 충돌할 것이다. 이런 난관에서도 진실을 말할 것인가, 아니면 속이는 일에 참여할 것인가? 만일 속이는 편을 택한다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정직한 사람들이 아님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1권 《일하는 크리스천을 위한 모세오경 · 역사서》 3장의 “출 20:16” 부분과 6장의 “신 5:20” 부분을 보라.


   미국의 전 조폐국장 에드 모이(Ed Moy)에게는 이런 일화가 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회사 차량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경우와 공적으로 사용한 경우의 유지비 보고서를 늘 구별해서 기록했다. 그때까지 회사에서는 집에서 직장으로 갈 때만 개인 용도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심지어 개인적 여행일지라도) 회사 공용으로 처리하는 관행이 있었다. 그런데 에드가 이렇게 사적 용도를 정직하게 구분하자 그의 상사는 마치 그를 해고할 듯이 나무랐다. “우린 보수도 시원찮고, 이렇게 하는 편이 더 수입을 올리는 길일세. 자네 보고서는 동료들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있어.” 그러자 에드는 이렇게 답했다. “원하신다면 저를 해고하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작은 일로 거짓말하는 사람이 부하로 있길 원하십니까? 그 부하의 영향력이 올라간다면 어떻게 그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여곡절 끝에 에드는 그 직장을 계속 다녔다.[3]

 

   속이는 자들이나 거짓 교사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에드의 예에서 우리는 그런 계약을 파기시키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우리는 단순히 그 자리를 피하기보다 계약을 유지하며 진실을 말함으로써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거짓을 일삼는 모든 사람들과 계약을 파기한다면, 누가 남게 될 것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조차 말이다.

“Should I Rank My Employees?” Wall Street Journal, April 7, 2009. http://guides.wsj.com/management/recruiting-hiring-and-firting/should-i-rank-my-employees/

 Jack Welch, “What I’ve learned: Jack Welch,” Esquire, December 31, 2006. http://www.esquire.com/features/what-ive-learned/wil0104jackwelch#ixzz2nkRA41TP.

Ed Moy, “Faith and Work: Spiritual Insights from a Career in Business & Public Service”, at Kiros, Seattle, October 11, 2013. 오디오 녹음파일은 http://Kiros.btexpo.we/media/에서 들을 수 있다.

얼굴을 맞대고 소통하는가(요이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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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대면하여 계속 대화하고 싶다는 말로 본 서신을 마무리한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하려 함이라”(요이 12절).

 

  아마도 전달하려는 의사를 편지로 써서 간접적으로 전하는 경우에는 오해가 생길 수 있다고 깨달은 듯하다. 이것은 비록 거리 때문에 서로 대면하는 것이 어렵다 할지라도 대면하여 직접 말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세심한 의사소통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 21세기 일터는 개인 의사소통에서 훨씬 더 복잡한 도전이 기다린다. 오늘날 원거리 소통에는 화상회의, 전화, 문자 메시지, 편지, 이메일, 소셜 미디어 등등의 다양한 옵션이 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소통은 여전히 메시지의 성격에 적합한 미디어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서 이메일은 주문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업무평가 내용을 전달하는 데는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더 복잡하고 더 감성적인 메시지일수록, 더 직접적이고 사적인 수단이 필요하다. 인텔 상무였던 팻 겔싱어(Pat Gelsinger)의 말을 들어 보자.


내게는 나만의 규칙이 있다. 만일 한 가지 주제로 네다섯 번쯤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면, 나는 더 이상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전화를 사용하거나 직접 만난다. 어떤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한쪽은 냉정함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신이 가장 직설적으로 말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을 무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의사전달 수단 때문일 수 있다. 이것은이 문제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1]
 

    잘못된 소통 수단은 쉽게 오해를 살 수 있고, 진실 전달에 실패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뿐인가, 잘못된 수단은 사랑을 전하는 데도 실패할 수있다. 그래서 바른 소통 수단을 선택하는 일은 우리 동료들에게 진실을 전하고 사랑을 보여 주는 데 필수적이다. 힘든 대화라도 존경과 온정으로 소통해야 하며, 달갑지 않은 사람과 소통할 때는 특히 그렇다. 마음이 불편하거나 불쾌할 때라도 얼굴을 맞대야 한다.

 Pat Gelsinger, “Faster Chips, More Opportunity?” interview in Ethix 57, Jan-Feb, 2008, accessible at http://ethix.org/2008/02/01/faster-chips-more-opportunity. 

요한삼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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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이서와 마찬가지로 요한삼서도 짧아서 여러 장으로 나누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노동에 적용할 수 있는 두 구절이 있다.  

험담은 이제 그만(요삼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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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은 가이오라는 이름의 ‘동역자’(요이 8절)에게 이 서신을 보냈다. 요한은 서신을 통해서 개별적으로 접근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절).

 

  그는 동역자의 육체(강건)와 영혼에 관심을 나타낸다. 동료를 단지 일꾼으로서만이 아니라 전인적으로 본다는 그 자체로, 이것은 일터에서 중요한 교훈이다. 그런 다음 요한은 일한 것에 맞게 대우받지 못하는 예로 자기 자신을 든다. 회중의 일원 가운데 디오드레베를 거론하면서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려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한다’고 요한은 말한다(요삼10절). 세 서신서 모두에서 요한은 주로 진리와 사랑에 함께 관심을 둔다 (요삼 1절). 그런데 디오드레베는 이와는 정반대로 증오 가운데 거짓 언행을 일삼았다. 다음 번역에서 요한의 고통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내가 가면, 그가 하는 일들을 들추어내겠습니다. 그는 악한 말로 우리를 헐뜯고 있습니다”(요삼 10절, 새번역).


   디오드레베가 신자라는 사실은 고통을 가중시킨다. 여기서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자체만으로는 우리가 완전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디오드레베는 자신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거짓 비방이라고 인식하는 그것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로 알려 주어 그들 자신을 방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일터에서 의견을 내놓으면서 자신이나 남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끼친 적이 있는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남들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서 말할때 그가 한 방에 같이 있더라도 똑같이 말할 자신이 있는가?’ 만일 여기에 부정적인 대답이 나왔다면, 우리는 당사자에 대한 거짓 인상을 심어 줄수 있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 요한이 디오드레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비방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편지가 교회에서 회람될 것을 잘 알았고, 디오드레베가 자신의 불평을 듣고 반응할 것에 대해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다.
 

   반대자에게 기회를 주어서 자신의 불평에 대응하도록 한 것은 요한이 진실과 사랑을 하나로 묶은 본질적 요소다. 디오드레베에 대한 요한의 불만을 전한 것은 반대자에게 설명이나 자기변호의 기회를 마련해 준것이다. 오늘날 같은 강도로 반응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대중 매체에 의해서 퍼져 가고, 수많은 공인들이 자행하는 ‘언론재판’과는 어떻게 다르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원칙은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을 폄하하는 것은 한 개인을 비방하는 것보다 행여 더 나쁘지는 않더라도 마찬가지로 나쁘다. 사실 일터에서 생기는 온갖 종류의 불공정한 대우는 그들을 열등한 혹은 위험한 그룹으로 낙인찍으면서 시작된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곧 특정 상황의 진실을 발견하려는 쪽에 서서 편견과 연대 죄에 대한 거부 발언을 할 기회가 왔다는 신호다.


   요한이 칭찬하는 데메드리오는 이 편지를 전달하는 형제로, 그 또한 흥미롭다. 요한은 데메드리오를 가이오와 그의 교회 앞에 높임으로써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요한은 데메드리오의 진실한 삶과 교회의 신자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칭찬한다. 일터에서 리더들은 (설사 표면상으로 복음이 승인받지 못할 때도) 그들의 권력과 영향력을 진실, 정의, 사랑, 그리고 긍휼이라는 목표를 향해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소통을 잘하려면(요삼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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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신도 요한이서와 동일한 생각으로 끝을 맺는다. 요한에게는 지금 펜과 먹으로보다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법한 소통 내용이 있다(요삼 13-14절). 그러나 요한삼서는 우리 일상을 약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바로 마지막에 요한이 이렇게 덧붙인다.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사람의 이름을 거들며 말하는 것이 소통상 필요하다는 점과 그런 소통이 개인적인 터치를 증대시킨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대다수는 일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대면한다. 복도를 지나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는 소통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름을 불러 가며 인사할 정도로 잘 아는 대상은 몇 명일까? 당신은 상사의 바로 위 상사, 그 위 상사, 또 그 위 상사의 이름을 아는가? 아마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 일터의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람의 이름은? 당신과 의견 충돌이 있는 사람의 이름도 부르며 인사하는가? 어떤 시점에 필시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를 회사 신참 직원들의 이름은 익혔는가? 이름을 모르는 데다 익히는 것도 귀찮아 하면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존경과 온정의 수위가 여실히 드러날 터이다. 요한은 각 사람의 이름으로 그에게 인사를 할 정도로 충분한 배려심이 있다.

유다서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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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다의 이 짤막한 서신서는 바로 역기능적인 한 일터, 즉, 경건치 못한 지도자들 탓에 엉망이 된 교회를 그린 놀라운 그림으로 시작한다. 교회마다 고유의 문제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유 4절)과 이단(‘고라의 반란’ - 유 8절) 등과 같은 이슈들이다. 다른 문제들은 권위 부정, 중상모략(유 8절), 폭력(‘가인의 길’), 탐욕(발람의 실수, 유 8절) 등등, 세속적인 일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1]

 

  최악의 권력 남용은 자기 양 떼를 희생시켜 가며 자기 배를 채우는 지도자들에 의해 저질러진다. “그들은 겁 없이 너희와 함께 먹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 기르는 목자다”(유 12절, NRSV). 유다는 탐욕스런 교회 지도자가 자신을 위해서 교회 재정을 유용하는 경우를 언급하는데, 이는 탐욕스런 경영진이 보고이익과 자신들의 상여금을 유지하려고 회사 연금 기금을 횡령하는 것, 혹은 사무실 직원이 업무 시간에 웹 서핑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악한 일에 관해 유다는 교회와 마찬가지로 일터에도 놀라운 명령을 하고 있으니, 바로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22-23절).

 

  유다는 악한 일에 강하게 대응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이나 두려움이나 더럽혀진 육체 같은 이미지 표현을 볼 때, 유다의 긍휼은 유약함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긍휼은 엄격하다. 그 긍휼의 소망은 단순히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다.


   이 엄격한 긍휼은 직장 상황에 따라 필요해진다. 누군가 사기를 치거나, 동료를 괴롭히거나, 고객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가볍게 넘어갈 수없는 문제다. 더 큰 악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설욕하여 대갚음하는 징계를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어느 누구도 소망이 없는 사람은 없다. 경건한 지도자는 각 개인을 존중하고, 어떤 징계로써 그를 다시 일원으로 맞아들일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Richard J. Bauckham, Jude, 2 Peter, eds. Bruce M. Metzger, David A. Hubbard, and Glenn W. Barker, Word Biblical Commentary (Dallas: Word, 1993). 리처드 J. 보컴, 《WBC 유다서 · 베드로후서》(솔로몬 역간).

일반서신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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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서신은 두 가지 원칙에서 시작했다. (1)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2)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 이 두 가지 원칙은 믿음의 삶에서 일터를 이해하는 신학적 통찰과 일터를 위한 여러 가지 실천적 지침의 기저를 이룬다(특히 야고보서에서).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다. (1) 우리는 이 두 원칙을 믿고 있는가? (2) 우리는 실제로 이 원칙들을 직장생활 속에 적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믿고 있는가?

 

   우리는 일터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상황을 겪는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과연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 믿을 수 있을지 의심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확신하거나 장담한다. 하나님을 신뢰해 온 듯한 사람들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예가 있다는 것도 잘 안다. 직업, 집, 은퇴 자금, 심지어 삶 자체를 상실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결코 기대하지 못했던, 혹은 전혀 가져 보지 못했던 좋은 것을 얻기도 한다.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작은 노력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투자한 일이 잘되기도하고, 낯선 사람이 내 필요를 채워 주기도 한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하나님께서 채워 주리라고 믿는 게 옳은가? 일반서신은 이 심오한 질문에 확고한 답을 얻기까지 씨름하게 만든다. 이 씨름은 아마 일생 동안 계속될지 모른다. 하지만 부정하는 것보다 씨름하는게 더 낫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원칙 또한 미심쩍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은 주로 자신의 부를 증대시키기 위해서 일한다”라는 경제의 기본 원리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회 전반에 팽배한 ‘자기 자신만을 생각해라’라는 태도와도 충돌한다. 우리는 (만약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있다면) 우리가 제대로 보수를 받고 있는지 증명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유익을 끼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증명하려 하는가?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일터에 적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스스로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을 신뢰하는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혹시 우리 자신을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지식을 비축하고 있는가? 미래에 대한 안전감을 주는 고액의 퇴직금 혹은 고용계약서를 요구하는가? 날마다 해고의 두려움을 안고 출근하는가? 가족과 공동체를 소홀히 여긴다는 강박관념을 느끼며 일하는가? 다른 여지가 없다는 불안 탓에 굴욕, 분노, 업무 미숙과 건강에 문제가 있는데도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가? 엄격한 원칙은 없으며, 이런 행동 중 (강박 상태를 제외하고) 일부 혹은 전부는 특정한 상황에서 현명하고 적절할 수 있다.

 

  일터에서의 행동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알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지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신뢰하는지를 읽어 내는 가장 탁월한 지표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돕는가? 혹 그가 나보다 앞서갈 가능성이 있더라도 그리하는가? 내 자리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동료들, 고객들, 납품업자들, 그리고 힘없고 어려운 자들을 지원하러 나서는가? 선택 가능한 범위 안에서 나 자신의 유익보다 궁핍한 자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편인가?


   유다서가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매일 일터에서 이런 원칙을 적용할 무거운 책임이 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영적 민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우리 일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육신적 결과의 문제다. 그렇지만 그 책임은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긍휼한 마음을 갖기 위함이다.
   

   일반서신은 일의 개념을 재정립할 과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지를 재정립하는 과제도 준다. 만일 우리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 자신이 아닌 그분을 위해서 일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때, 남을 섬기게 된다. 남을 섬길 때 우리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러면서도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가져오게 된다. 우리의 일을 통해 세상에 들인 하나님의 복은, 세계가 우리의 참된 집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다음 발걸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벧후 3:13)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