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 접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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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웨인이 그의 자동차 거래 딜레마를 분석하면서 사용한 두 가지 접근법인 명령 접근법과 결과 접근법은 행동/선택 자체의 도덕성에 주목했다. 하지만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결정을 내리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윤리적 선택을 고려하는 방법도 있다. 이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행동을 취하는 사람의 인격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흔히 "미덕" 윤리 혹은 "인격" 윤리라고 불린다.

 

   미덕 접근법은 특정 상황마다 매번 "규칙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최선의 결과를 낳을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지지 않고,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접근법은 만약 어떤 사람이 선한 성품을 발달시키면, 일생동안 여러 상황들 속에서 옳은 일, 혹은 선한 일을 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이 접근법은 행위의 윤리라기보다는 존재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 속에서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문제를 지적한다. 무엇이 옳은지 안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일을 행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인격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움으로써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충분히 알아보았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 정의, 신성함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 목적은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서 이러한 성품들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는 성품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따르고자 하는 시도였기 때문에, 명령 접근법의 범주에 들어간다. 인격 접근법은 우리의 행동이 인격을 어떻게 형성하거나 만들어 나가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이를 위해 주안점을 살짝 바꾸어보자.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우리의 인격을 만들어가는지 살펴보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목표는 더욱 신성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서 이러한 특성들이 우리 내면에 기본설정으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이제 강조할 부분은 우리의 인격이다.

 

   이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할까? 그 이유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 번째로, 우리가 지금까지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한 것들은 좀 더 이상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제시해왔다. 우리가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복잡한 문제들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시간과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해결해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은 대부분 바쁜 상황에서 아주 짧은 찰나에 이루어진다. 우리가 상사의 불만에 대응하고, 고객과의 오해를 해결하며, 경험이 없는 구매자에게 조언을 해주고, 실적이 좋지 않은 팀에게 동기부여를 해줄 때, 이러한 과정들은 대체로 고민 없이 이루어진다. 만약 우리가 올바른 결정이나 행동으로 우리를 즉시 이끌어줄 수 있는 내재된 인격적 특성이나 덕목에 의존할 수 있다면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내리는 윤리적 결정들의 많은 부분은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미 거의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우리가 무엇을 하기로 결정내리는 것의 대부분은 우리의 인격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결정을 신중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에도, 우리의 결정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우리의 습관이나 인격에 큰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가 내리는 윤리적 결정은 우리가 어떠한 의사결정 과정을 택하는지에 따라 결정되기 보다는 우리가 누구인지(인격의 유형이나 몸에 밴 가치관)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것이다.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은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선택을 내리는 일은 대부분 이미 끝나있다."라고 말했다.[1]

 

   세 번째로, 인격을 기반으로 한 접근법은 윤리적 형성과 결정에 있어서 공동체의 역할을 쉽게 고려할 수 있다. 우리가 종종 스스로를 자유롭게 개인적 결정을 내리는 개인으로 인식하더라도,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인격 기반의 접근법은 대게 공동체가 줄 수 있는 윤리적 자원을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선한 의사결정 과정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선한 인격을 함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우리 삶에서 미덕과 선이 형성되면, 선한 결정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고 주장한다.

 

Iris Murdoch, The Sovereignty of Good (London: Routledge, 1970) 37쪽.

무엇이 미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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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인격과 미덕을 형성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우리가 해결해야 되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 어떻게 미덕을 정의할 수 있을까?
  • 무엇이 미덕인지 실제로 누가 판단하는가?
  • 미덕은 어떻게 함양할 수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이 아마 답하기 가장 쉬운 질문일 것이다. 옥스퍼드 사전은 "미덕"을 "도덕적으로 바르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품"으로 정의한다. 모든 문화는 각자 높이 평가하는 성품들이 있다. 그 성품들은 해당 문화의 맥락 안에서 미덕으로 여겨진다.[1]

 

   하지만 두 번째 질문, 즉, “누가 특정한 성품들을 선하다고 정확히 판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좀 더 복잡하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철학자, 이론가, 사상자들은 덕목을 나열하고 정의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 그리스의 덕목인 정의, 용기, 절제, 그리고 자제를 강조했다. 초대 교회 지도자였던 성 암브로시우스(339-397년)는 이러한 덕목들이 성경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특히 "신학적인” 또 다른 세 가지 덕목들을 성경에서 인용해 추가한다. 바로 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이다. 6세기에는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러한 덕목들에 상응하는 반대 죄악들을 언급했는데, 바로 우리가 7대 죄악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다.[2] 개신교 신학자들은 최근에 와서야 덕목들을 열성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글렌 스타센과 데이빗 거쉬는 이렇게 말했다. "덕목이란 우리가 공동체에 (긍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게 해주는 인격적 특징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누구를 통해 혹은 어떤 것을 통해 어떤 것이 도덕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이 문제의 답은 바로 성경이며, 성경 속에서 기독교적 덕목을 정의하는 데 있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중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떠한 덕목을 발달시켜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또 직접 본보기가 되셨던 성품들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일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 스타센과 거쉬의 말에 동의한다. 

성경은 평평하지 않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절정이자 중심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도덕적 문제도 그 문제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고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은 산상설교에 가장 많이 담겨 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마땅히 갈망해야 하는 구체적인 덕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산상설교는 아주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가르침을 통해 주요 덕목들, 즉 예수님께서 특히 가치 있게 여기시는 특성과 행동을 강조해 보여주신다. 마음이 가난한 것, 자비,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것, 온유함, 평화를 위해 일하는 것, 슬퍼하는 것(마5:1-12) 등은 우리가 길러야 하는 주요 성품으로 보인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우리의 행동을 우리의 인격, 즉 중심적 태도 및 동기와 결부시키신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들 또한 이러한 연관성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그 예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막7:21-22).

 

   초대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빨리 깨달았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인격 발달을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말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절제인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권고하고 있다(갈5:16-25).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3-5)라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예시이자 본보기시다. 우리는 그분의 성품을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말들은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야 한다는 점을 매우 크게 강조하는 신약성경을 반영한 것이다.

 

"virtue"라는 단어의 역사는 이러한 문화적 성향을 보여준다. 우리의 영어 단어는 라틴어 virtus로부터 비롯되었는데, 이는 "남자, 남성"이란 뜻의 vir로부터 왔다. 그들의 초기 왕국 건국 시절에 로마인들은 침략하는 정복자들의 세계로부터 살아남아야 했다. 그 결과 그들의 단어 virtus는 "미덕(virtue)" 혹은 "용기(courage)"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초기 로마인들에게 미덕이란 남자다움과 기꺼이 그들의 가족과 집을 지키려는 마음이었다.

욕정, 폭식, 탐욕, 나태, 분노, 질투 그리고 교만

웨인의 인격이 그의 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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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목에 관한 이런 이야기들은 웨인을 조금 혼란스럽게 했다. 자신의 인격이 어떻게 발달되고 있는지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실 진정한 인격은 아마도 자기 자신의 분석이 아닌 타인의 관찰에 의해 더 정확하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웨인은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중요한 반응의 과정을 거치면서 뭔가를 점점 깨닫게 되었다. 고객의 자동차에 대한 불평과 수리해달라는 요구에 저항하는 것이 쉽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은 고객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웨인은 정말로 배려와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가 일생에 걸쳐 더디게 진행되어왔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발달되어온 과정을 되돌아보았을 때, 그는 특히 동정심과 친절함, 그리고 관대함이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중요시했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고객의 요구에 긍정적으로 답하고 싶어졌다. 따라서 웨인이 결과를 추정해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고객의 요구를 어떻게 거절할까에 대해서 계산하지 않고, 오히려 얼마나 그 고객을 도와줄 수 있을까를 계산해보았다. 그의 기본설정이 그의 성품을 만들어가는 가치들에 의해 정해진 것 같아 보인다.

 

인격은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발달하고 성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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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삶 속에서 선한 인격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일터에서 이들이 일하는 모습은 정직해 보이며 그들의 평소 삶과도 일관되어 보인다. 이들은 정확히 어떠한 방법으로 그러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 된 것일까?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문화를 고려할 때, 이들의 성품은 대게 그리스도를 향한 강한 헌신, 엄격한 규율과 독실함, 그리고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의 결과일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이 분명 중요한 것이고 성령께서도 사람에 따라 매우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지만, 그러한 변화는 좀 더 넓은 상황 밖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미덕 윤리의 지지자인) 매킨타이어(Maclntyre)와 하우어워즈(Hauerwas)는 둘 다 도덕적인 삶을 만들고 체화시키는 데 있어 공동체가 지닌 지대한 역할을 강조한다. 이들은 특정 공동체의 이야기들이 그 공동체의 인격을 결정짓는 주된 요소라고 말한다. 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대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이야기 속에는 인격과 공동체를 모두 성장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를 몇 년 간 지배해온 이야기는 바로 자기주도적으로 사회적 순응의 억압을 극복한 인물들에 대한 것이다.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마이웨이(My Way)"부터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Pirates of the Caribbean)>(이 밖에도 대부분의 할리우드 영화는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금씩 변형만 시킨 것이기 때문에 하나만 언급한다), 그리고 베이브 루스(Babe Ruth)의 인기 등에서 볼 수 있는 두드러진 이야기는 바로 사회적 기대의 압박을 극복하는 개인의 내면적 인격의 승리이다. 신문을 읽을 때 특정 사건과 신문이 그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방식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러한 이야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경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제공해준다. 성경 또한 예수님께서 사회적 억압을 누르고 승리하신 이야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주도적이지 않았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의 방향이 외부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말씀하신다(요12:49-50).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닮아야 된다고 말씀하신다(요일3:2).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창조하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과 가치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러한 성경 이야기는 그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찾을 수도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매우 도덕적인 의미를 가진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우워어즈, 스타센, 그리고 거쉬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분의 성품과 덕목을 닮으라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적인 이야기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그러한 이야기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문화와 신앙 공동체를 거쳐 걸러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이 이야기를 다시 전하는 방법, 즉 우리가 주안점을 두어야 하는 덕목은 어떤 것인지, 강조해야 하는 실패는 어떤 것인지, 또 그 이야기가 묘사하는 습관과 행동들을 기르기 위해 서로를 어떻게 격려할 수 있는지, 등은 우리가 미덕을 함양해가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모든 믿음의 공동체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의 생활방식이나 세계관과 너무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경향이 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모습으로 재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유혹이다. 오늘날 서구 교회들은 부와 풍요로움이 만연하고, 자기주도적인 승리에 대한 이야기가 과거 그 어떤 때보다도 가장 박수갈채를 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러한 상항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위험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의 어마어마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환경적인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걸러내는 것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그리고 안타깝게도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 우리에게 남는 믿음 공동체의 이야기는 좁은 범위의 "개인적" 도덕 문제들만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만 그리는 이야기뿐이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묘사되는 예수님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관된 윤리적 삶에 대한 본을 보이시고 가르침을 주시지, 성적인 행위와 개인적 정직함에 국한된 문제들만 다루시지 않는다. 그 문제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말이다. 예수님의 윤리는 그 이상의 훨씬 많은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경건한 인격은 그저 개인적인 변화로 인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성품이 처음부터 양육되는 공동체의 환경 속에서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반드시 예수님에 대해 자신들이 취하고 있는 불가피한 맹점들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벤저민 팔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 성경은 히브리서 성경과 함께 믿는 공동체의 불가분한 상황을 강조한다. 이 경우에 이 공동체는 에클레시아(ekklesia) 즉, 교회다. 이러한 믿음, 소망, 사랑이 양육되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의 과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생경하고 적대적인 문화에 맞서는 것은 결코 개인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개인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행동의 진원지가 될 수 없다.[1]

 

Benjamin Farley, In Praise of Virtue (Grand Rapids: Eerdmans, 1995), 100쪽.

일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성품을 함양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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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미덕 윤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 일터에서 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올바른 의사결정 과정을 발달시키는 것 이상의 일이다. 이는 심지어 "윤리 강령"을 따르는 것 이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감에 따라 우리의 윤리적 선택이 크게 결정된다.
  • 우리는 혼자서 하나님의 성품을 만들어갈 수 없다.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복음의 이야기를 다시 전하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고, 실천하고자 하는 공동체에 전념할 때, 우리는 덕목을 갖춘 사람들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리고 비즈니스 세계에는 인격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한 공동체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성품을 좀 더 명확히 알아내고자 노력하고, 도덕적인 삶에 대한 우리의 제한적인 시각에 도전하는 어렵고 불편한 질문들을 던져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비기독교적인 방법으로 사업을 하는 안타까운 여러 사례들을 반복하게 될 확률이 낮아진다.